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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올 날씨는 아니었지만 구름이 하늘을 뒤덮어 날이 흐렸다. 안 그래도 우중충한 날씨 탓에 기분이 가라앉는데 이령의 건강에 이상이 왔다.
새벽까지 잠자리를 한 탓인지 이령이 맥을 못 추자 검무는 태의를 불렀다. 태의는 형식적인 진맥을 통해 그녀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어떤가.”
“기력이 많이 약해지셨습니다. 합궁 때문인 듯하니 오늘은 각방을 쓰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합궁 때문이라는 겐가?”
“폐하의 정력을 못 견디시는 거니 기력을 회복하는 데 효과적인 탕약을 올리겠습니다. 탕약을 드신 후 한숨 푹 주무시면 오후엔 몸과 정신이 개운해질 겁니다.”
태의는 이령이 의식을 못 찾는 것처럼 잠만 자는 게 검무의 정력 탓이라고 둘러댔다. 남다른 성욕으로 선황제와 황태후의 걱정을 샀던 만큼 검무도 의심하지 않고 쉽게 수긍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지?”
“예.”
태의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안심이 됐다. 검무는 안도의 숨을 돌렸다.
“탕약을 빨리 만들어 오라.”
“소신은 이만 물러가옵니다.”
검무는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이령의 이마를 짚었다. 이마가 차가웠다. 한겨울, 얼어붙은 땅처럼 냉기뿐이었다. 시체를 만지는 기분이 들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손목이 왜 이렇게 가늘어…….”
가는 게 손목뿐이겠느냐마는 며칠 전보다 마른 게 신경 쓰였다. 자신이 건강을 찾는 대신 이령이 죽어 가는 건 아닐까? 노파심이 생겼다.
검무는 실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이령을 걱정했다.
“자네가 이런 건 나 때문인 것 같다.”
“받아 내는 게 힘들다고 해도 몇 번을 안으셨지요.”
“욕심이 과했어. 좋아서…… 멈출 수가 없었거든.”
“새 황후를 들일 땐 속궁합도 보시고 그쪽으로 건강한지 잘 확인하세요. 체력과 정력은 다른 것 같아요.”
이령은 눈을 감았다. 손가락 하나를 들 힘도 들어가지 않는 몸뚱어리로 인해 심장이 거칠게 뛴다. 태의의 언질대로 제 쓰임을 다한 몸이 드디어 한계를 맞은 모양이다.
“새 황후…… 짐을 다른 여인과 나누기 싫다더니 아예 떠넘기나?”
“가질 수도 없는데 욕심을 내서 뭐하게요.”
“다시 가질 생각을 해 봐.”
“싫어요.”
“이 사람이…….”
“말했잖아요, 이령인 이미 죽었다고. 폐하가 죽으라고 한 날, 이미 송장을 친 거라고…….”
이령은 덤덤했다. 젖 먹던 힘을 쥐어짜 겨우 뜬 눈으로 검무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이목구비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사물이 온통 희뿌옇게 흐렸다.
문득 오늘이 그 날인가 싶어 미소가 피었다. 이대로 잠들면 죽는 건가? 고통 없이 가는 건 다행스러운데 아쉽다.
좀 더 안겼으면 했는데…….
아홉에 만난 서방님의 품을 좀 더 느껴 보고 싶었는데…….
이령은 눈을 감았다. 눈물을 참으려고 했지만 터져 버렸다.
“폐하가 용서를 빌어도, 폐하가 울부짖어도…… 우린 끝났어요…… 그러니까 환궁 준비를 서두르세요.”
“뻣뻣한 사람. 꼭 그렇게 말해야 하나?”
“폐하의 성욕 때문에 힘들어요. 그러니까 새 황후를 뽑아서 성에 찰 때까지 하세요.”
“자네가 길들여 놓고 다른 사람을 안으라니, 복장 터지는 소리를 하는군.”
이령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검무가 소매로 눈물을 닦아 주며 덧붙였다.
“미안하다, 잘못했다. 그 말이 그렇게 어렵나? 자네가 사과를 해야 나도 할 게 아니야.”
“폐하가 먼저 하세요. 그럼 생각해 볼게요.”
“잘못은 자네가 저질렀어.”
“폐하도 그런걸요.”
“이 사람이…….”
“몰라요, 피곤해요. 혼자 있고 싶어요.”
이령이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훌쩍이는 바람에 검무는 한숨을 쉬었다. 어릴 때부터 이령이 울면 검무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굴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 때문에 속상해 미치겠다.
“지아비의 체면을 세워 주면 덧나나? 미안하다 한마디면 될걸.”
“아픈 사람 앞에서 체면은…… 몰라요, 미워요.”
“나도 밉다.”
“귀찮아요, 빨리 가요.”
검무가 이령을 노려보며 눈썹을 씰룩거리자 옆에서 지켜보던 이치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폐하, 마마는 금란에게 맡기시지요.”
“좀 있다가 가련다.”
“마마도 안정이 필요하지만 폐하도 쉬셔야 합니다.”
“짐은 괜찮아. 기운이 펄펄 나서, 날아다닐 것 같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하오나…….”
“옆에 있고 싶어서 그런다. 얄미운 사람 옆에.”
“귀찮다는데도…… 남 생각은 눈곱만큼도 안 해. 나중에 얼마나 후회하려고.”
이령이 짜증조로 중얼거려도 검무는 제 고집대로 했다. 그녀에게서 떨어지기 싫었다. 두려움 때문이었다. 검무는 이령의 뺨을 손등으로 어루만지다가 한숨을 쉬었다.
“얼음장처럼 차구나. 체온이 없는 것처럼…… 이래선 살아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야.”
“말했잖아요. 이미 송장이라고.”
“말을 해도…….”
“듣기 싫은 소리만 하게 될 테니 이만 가세요.”
“그렇게 떨궈내고 싶나?”
“네.”
이령의 대답에 검무는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가슴이 아프다. 딴에는 노력하는 건데 이령이 받아 주지 않아 명치가 욱신거렸다.
“자네, 기력을 찾은 후에 보세. 그땐 정말…….”
검무는 입술을 씰룩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령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였다. 자신을 철저하게 외면하는 태도가 서운했던 검무는 울상을 지었다.
이령의 처소를 나온 검무는 한숨부터 쏟아 냈다.
“환궁 준비를 서두르겠습니다.”
“서두를 게 무어냐.”
“태의도 환궁하는 게 좋다고 하고 황태후마마께서도 폐하께서 회복하신 걸 알고 계십니다. 곧 재촉하실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태의…… 그 사람이 어마마마의 눈치를 많이 보는구나.”
검무는 심기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이젠 돌아가셔야지요.”
“구미호의 독, 완전히 배출하였다더냐?”
“예, 환궁하시어 보양식으로 기력을 보충하시면 완치라고 하였습니다.”
“완치…….”
검무는 희미하게 웃었다. 좋아해야 하는데 이령 때문에 마음이 무겁다.
“이치…….”
“예, 폐하.”
“환궁 시기를 좀 미루어야겠다.”
“예?”
“저이가 저렇게 누워 있어서 마음에 걸려. 대서절 전엔 돌아갈 테지만 한 사흘 정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대서절도 보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벌써 그렇게 됐나?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
“짐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마마가 신경 쓰이십니까?”
“신경이 안 쓰일 리 없지.”
“환궁하신 후에 결정을 내리시지요.”
“함께 환궁하라는 소리는 안 하는구나.”
검무가 이치를 노려봤다.
“마마는 용안을 할퀸 대역죄를 지었습니다. 잊으셨나이까?”
“짐이 너희들에게 폐황후의 복권 문제를 입에 담지 말라고 정색했다지만…… 너도 그렇고 다른 놈들도 그렇고…… 왜 그렇게 이성적인지 궁금하구나.”
곱씹어 생각해도 이치와 타래, 노을, 석삼 등의 반응이 수상쩍었다. 특히 쓸데없는 소리를 많이 해 속을 긁어 놓던 노을이 알쏭달쏭한 말을 해 댈 땐 저만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너나 타래는 이성적인 성격이니 이해하나 노을이…… 마음에 걸려. 짐에게 숨기는 게 있느냐?”
“없습니다.”
“없는데 왜들 하나 같이 헛다리를 긁는 게냐. 짐의 생각이나 마음을 못 읽는 것도 아닐 텐데.”
“폐하, 소인들은 환궁하는 걸 우선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마도 소중하지만 폐하의 안위만큼…….”
“됐다! 하나 같이 왜 그렇게 멍청한 게야! 짐이 입 밖으로 내뱉어야지만 알아듣겠느냐!”
이치마저도 복권이라는 단어를 꺼내지 않았다. 그는 콧구멍이 벌렁거릴 만큼 분노했다.
“너희들을 믿은 내가 잘못이지, 혼자 있고 싶으니 따라오지 마라!”
검무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이치를 지나쳤다. 어찌나 씩씩거리고 걷는지 감히 쫓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복권…… 그 마음을 왜 못 읽겠습니까? 하나…….”
“우리 마마는 죽는데, 아무것도 모르시면서…….”
금란이 등 뒤에서 울먹거렸다. 이치는 태의가 지어 준 탕약 그릇을 든 금란에게 손을 내밀었다.
“탕약은 내가 올리마, 그 얼굴을 마마께 보여선 안 되겠다.”
금란이 눈물을 철철 흘리는 바람에 이치까지 심란했다. 죽어 가는 사람은 의연한데 금란과 노을은 제 감정이 취한 것처럼 감추지 못했다.
이치는 금란에게 탕약 사발을 받은 후 이령의 처소에 들어섰다.
손잡이를 잡아당기려는데 흐느낌이 들렸다. 이령이 울고 있었다.
“그렇겠지…… 의연할 수 없겠지…….”
이치는 문에 이마를 대며 눈을 감았다.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눈물이 흘렀다. 모두의 앞에선 밝은 척 애를 썼던 이령이 안타까웠다.
“마, 마마…… 소인 이치입니다. 탕약을 올리겠습니다.”
마냥 울고 있을 수 없었던 이치가 침소에 들어왔다. 숨을 헐떡거리며 울고 있던 이령이 울음을 그치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소인, 귀가 들리지 않고 보이는 것도 없으니 편히 우십시오.”
“이치…… 앞이…… 보이지 않아…… 나…… 죽으려나 봐.”
이령의 대답에 이치가 제 손목을 깨물었다.
“이치…… 폐하를 모시고…… 빨리 가…….”
“마마…….”
“환궁, 빨리 해. 그래야지…… 내가 덜 슬플 것 같아. 그래야지…… 폐하께 매달리지 않을 것 같아…… 모진 말을 해 대고 마음의 거리를 두려고 했지만…… 폐하의 마음이 읽혀서 안 되겠어. 빨리 모시고 가.”
“예, 마마…… 마마의 분부대로 환궁하겠습니다.”
이치는 무릎을 꿇고 앉아 눈물을 흘렸다. 이를 밖에서 훔쳐보던 금란도 엎드려 앉아 흐느껴 울었다. 그리고 세 사람의 울음소리를 들은 타래와 노을도 궁실 밖에서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5장. 부디 행복하세요
개화궁이 뿌연 안개로 뒤덮였다. 한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짙은 안개를 양손으로 가르며 처소로 돌아가던 검무가 이치와 타래를 불렀다.
“이치, 타래. 어디 있느냐?”
앞은 보이지 않아도 소리는 생생하게 전달될 법도 한데 주변은 고요했다.
“이치, 타래!”
아까보다 큰소리를 내도 두 사람의 대답은 없었다. 바람 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하고 쓸쓸하여 머리카락이 쭈뼛거렸다.
“노을아, 노을아!”
수다쟁이 노을이라도 대꾸를 해 주었으면 싶었지만 그의 바람대로 되지 않았다. 그렇게 말이 많던 노을마저도 조용했다.
“연다, 고식, 석삼!”
늘 그림자처럼 조용히 수행하던 이들도 마찬가지로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전신을 휘감는 음기로 인해 전심이 쭈뼛거렸다. 그는 팔을 문지르며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도 없느냐!”
겁을 집어먹은 검무가 허리를 굽히며 소리를 질렀다. 숨이 차오르고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애들아!”
무섭다. 발치 앞에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불안함, 늘 함께했던 환관들의 부재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어디 있느냐!”
제자리에 멈추어 선 검무는 눈시울을 붉혔다. 제 곁에 아무도 없다는 공포심으로 인해 다리가 후들거려 가슴을 움츠릴 때였다.
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그는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은빛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내린 사내가 보였다.
비록 뒷모습이었지만 평범한 인간이 아님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소리쳤다.
“웬 놈이냐!”
안개에 갇혀 있을 땐 겁이 났지만 개화궁을 허락받지 않은 자가 발을 들인 것을 보자 울컥했다. 그는 새빨개진 얼굴로 그에게 뛰어갔다.
사내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품엔 이령이 안겨 있었다. 의식을 잃은 그녀는 죽은 것처럼 늘어져 있었다.
“네 이놈!”
이령을 발견하자 검무의 눈빛이 변했다. 그를 움츠러들게 했던 두려움이 안개처럼 걷히는 동시에 피가 뜨겁게 데워졌다. 이령을 안은 사내에게 달려들어 모가지를 비틀어 놓을 기세로 포효했다.
“뭐하는 놈이냐!”
사내가 멈칫했다. 그는 어깨 너머로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네게 화살을 맞은 몸이다.”
몹시 을씨년스러운 목소리였다. 등골이 오싹했던 검무는 사내의 얼굴이 궁금해 눈을 부릅떴다. 잠시 후 사내가 완전히 돌아섰다.
은빛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던 얼굴이 드러났다. 길게 찢어진 눈매와 뾰족한 콧날, 큰 귀에 검무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너, 너는…….”
구미호!
검무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사냥터에서 본 구미호는 분명히 여우의 형상이었지만 자신을 쳐다보는 눈초리와 화살을 맞은 몸이라는 대답으로 보아 지금 이자는 구미호가 확실했다.
검무가 자신을 알아본 걸 직감한 구미호가 실처럼 가늘게 뜬 눈을 번쩍거렸다. 가는 눈매를 통해 느껴지는 독살스러운 기운에 오금이 저렸다.
“비겁한 놈, 죽어야 할 목숨이 살아서 움직이는구나. 내겐 이깟 계집을 던져 주다니…… 죄를 지은 놈은 아무것도 몰라 이렇게 천지분간을 못 하는데…….”
검무를 노려보던 구미호가 이령에게 측은한 시선을 보냈다. 그렇다고 해서 이령을 구하거나 도울 생각은 없어 보인다.
“내가 원한 건 이까짓 계집의 육신이 아니었거늘.”
무시무시한 기운에서 느껴진 것처럼 구미호는 자신을 쏜 자의 대가를 확실히 챙기려는 것 같았다.
“안 돼…….”
이령일 뺏길 순 없다.
검무는 허리춤을 더듬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몰라도 허리에 검을 찬 것 같았다. 손에 검 자루가 걸렸다. 그는 그것을 과감하게 쥐었다.
“이령일 내려놔.”
검무는 검을 뽑았다. 검으로 어찌해 볼 만한 상대가 아님을 모르지 않았지만 이령을 구할 방법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내려놔!”
“아직도 천지분간을 못 하는 게지…… 손바닥의 지문이 사라지도록 빌고 네놈의 심장을 바치겠다고 울부짖으며 용서를 구해도 모자랄 판에.”
구미호는 혀를 찼다. 대놓고 조롱하는 바람에 검무의 눈에서 불기둥이 치솟았다.
“이번에는 꼬리가 아니라 목을 칠 것이다! 내려놔!”
“빌고 또 빌어도 용서할까 말까한데 네놈은 아직도 내게 검을 겨누는구나.”
“내려놔!”
검무가 검을 높이 쳐들자 구미호가 입꼬리를 올려 비웃었다. 그의 시선은 얼굴의 살이 빠져서 눈 밑이 퀭하고 입술이 갈라질 만큼 건조한 이령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그깟 것으로 나를 해할 수 있다고 보느냐.”
“못할 것도 없다.”
“그러다 진짜 죽는다.”
“죽일 테면 죽여라. 하나 네가 안고 있는 그 여인은 안 된다! 그러니까 내려놔!”
천산유수와 같은 말주변을 늘어놓을 분위기가 아니지만 겁을 먹은 데다 긴장한 탓에 같은 말만 반복하고 만다. 콧바람을 뜨겁게 내뿜던 검무가 다시 한번 고함쳤다.
“내려놓지 않으면 벤다!”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으니까…….”
검무의 위협이 우스웠지만 구미호는 이령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곤 그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나직이 뱉었다.
“어차피 꺼질 불씨…… 마음껏 품어 보아라.”
구미호는 검무를 위아래로 훑으며 끝까지 조롱했다.
“계집 뒤에 숨어 빌어먹는 놈.”
“네 이놈!”
“겁대가리 없이 날뛰지 마라, 네 계집의 희생이 물거품이 될지니.”
구미호는 새카만 눈동자로 검무를 노려봤다. 이 자리에서 목숨을 끊겠다고 작정하면 쉬운 일일 텐데 그는 꼼짝하지 않았다.
그저 검무의 얼굴을 뇌리에 아로새기기라도 할 것처럼 한참 동안 뚫어지게 응시했다. 검무 또한 눈싸움을 하듯이 구미호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풋.
구미호가 웃음을 흘렸다.
검무는 검 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달려들면 힘껏 내려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금니를 꽉 깨물며 새운 각오를 조롱하듯 구미호는 홀연히 사라졌다.
쨍!
구미호가 사라진 걸 확인한 검무가 들고 있던 검을 내던진 후 이령에게 달려갔다.
“이령아!”
그는 그녀를 품에 안으며 뺨을 두드렸다.
“이령아, 이령아!”
이령의 목이 뒤로 꺾였다.
“이령아, 정신을 차려라!”
검무는 이령을 꼭 끌어안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도 없느냐? 이치! 이치!”
이치를 애타게 부르던 검무가 눈물을 흘렸다. 이령에게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은 탓이었다. 떨리는 손가락을 코 밑에 대봤지만 숨결이 닿지 않았다.
“아, 아니다…… 아니야…… 이령아!”
검무는 고개를 내저으며 눈물을 흘렸다. 심장이 뜯긴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숨을 쉬어라! 숨을 쉬어야 해!”
이령을 흔들며 울부짖었지만 소용없었다. 그녀는 뼈가 없는 생물처럼 흐느적거렸다.
“이령아, 이령아!”
이령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르며 몸을 흔들던 검무가 흐느껴 울 때 이치의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 폐하!”
“이령아, 이령아…….”
“폐하, 정신을 차리십시오!”
이치가 검무의 어깨를 흔들었다. 검무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는 바로 코앞까지 얼굴을 가까이 내민 이치를 바라보며 울음을 터트렸다.
“이치, 황후가…… 이령이가!”
검무는 끌어안고 있던 이불을 이치에게 내밀다가 얼어붙었다. 이령이 아니다. 그는 눈물로 인해 흠뻑 젖은 이불과 이치를 번갈아 보며 턱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자 이치가 그의 얼굴을 부드러운 수건으로 닦았다. 비 오듯이 흘린 땀으로 인해 수건이 금방 젖었다.
“악몽을 꾸신 듯합니다.”
“악……몽?”
“괴로워하시기에 달려왔더니 이불을 끌어안으시며 몸부림을 치고 계셨습니다.”
검무는 끌어안은 이불을 응시했다. 이령이라고 생각했던 게 이불이었다니.
“이령이 아니었다…….”
검무는 이마를 짚으며 안도했다. 이치가 차분하게 반응하는 걸 보니 이령에게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은 모양이다. 참 다행이다. 검무의 눈에서 말간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꿈에 이상한 게 나와서…… 하마터면…… 하아…….”
이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검무가 하는 얘기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이령…… 그이의 이름을 오랜만에 불렀어. 황태자 시절엔 그 이름으로 많이 불렀는데…… 황위에 오른 후엔 이름을 불러준 적이 없구나. 그보다 그이는 어떠냐.”
“마마께서는 기력을 찾으셨습니다.”
이치의 대답에 검무는 눈물을 닦으며 되물었다.
“기력을 찾았다면 걸을 수 있다는 게냐.”
“예, 어제 하루 꼬빡 앓았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하십니다.”
“다행이구나. 태의에게 상을 내려야겠다.”
“태의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그보다 눈물을 닦으십시오. 이제 일어나셔야지요.”
“그래, 일어나야지.”
검무는 마른세수를 하듯 얼굴을 문질렀다. 몸을 일으킨 그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앉자 이치가 갈아입을 옷을 챙겼다.
“조용하구나, 기분 나쁠 만큼.”
기분 나쁜 꿈을 꿔서 그런지 몰라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고 뒤숭숭해 조용한 분위기가 마음에 걸렸다.
“모두 어디 갔느냐?”
“……고식과 연다는 황궁에 갔고 타래와 노을은 마마께 갔습니다.”
“고식과 연다가 황궁에?”
검무는 미간을 찌푸렸다.
“환궁 준비를 하려면 어가(御駕)가 필요합니다. 말을 타고 이동하시는 건 무리일 듯하여 어가를 준비하라고 하였습니다.”
“뭘 그렇게 급하게 서둘러.”
“곧 대서절입니다. 폐하께서 하셔야 할 일이 잔뜩 기다리고 있으니 오늘 중으로 환궁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네 멋대로 정하는 게냐!”
검무가 소리를 질렀다. 악몽 때문에 예민해 있던 성격이 잘 벼린 칼날처럼 날카롭다.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잖으냐!”
“황태후마마의 명이옵니다.”
이치는 황태후에게서 온 서선을 내밀었다. 어제 아침, 이령의 부탁에 따라 황태후에게 도움을 청했다. 검무 하루 빨리 환궁시키려면 황태후의 힘이 필요했다.
검무는 서신을 낚아챈 후 빠르게 읽었다. 내용은 짧았지만 의미는 위급했다.
‘조정의 고위 대신들의 행동이 수상쩍으니 하루 속히 환궁하여 황제의 권위로 거만한 것들에게 철퇴를 내려 주시오.’라고 쓰여 있었다.
황위를 위협받고 있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검무에겐 이보다 더한 협박이 없었다. 그는 서신이 구겨질 만큼 주먹을 쥐었다.
“어딜 가나 썩은 놈들이 말썽이구나. 은혜를 내리면 권세를 쥐었다고 착각하며 짐의 자리를 위태롭게 하는구나.”
“모두가 탐을 내는 자리에 계십니다.”
“안다! 아니까 속상한 게야.”
검무는 씁쓸한 기분을 지우듯 입맛을 다신 후 물었다.
“……어가는 언제 도착하느냐?”
“황궁까진 한나절 거리이니 오후엔 도착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환궁은 내일 한다.”
“폐하…….”
“이대론 못 가, 오늘 가나 내일 가나. 밤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겠느냐.”
검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대로 못 간다고……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두고 어딜 간다는 게야.”
이령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하다못해 그녀의 기분을 풀어 줄 생각을 못 하고 합궁만 했더니 마음이 무거웠다.
무엇보다 악몽이 마음에 걸렸다.
계집 뒤에 숨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인 구미호 때문에 기분이 이상했다. 그렇다고 이치에게 꿈 얘기를 할 수도 없는 게 입방정을 떨어서 부정을 타고 싶지 않았다.
구미호가 이령을 데리고 가려고 했다는 걸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현실이 될 것 같은 불안감. 그 불안감에 근심이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