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2/12)

***

정확히 35일 만의 재회이다.

꼬투리가 될 만한 흉이 단 하나도 없어, 무결점의 황제라고 불릴 만큼 완벽하고 우아했던 황제가 사람 꼴이 아니다.

이령은 바로 눈앞에서 침을 흘리고 짐승처럼 숨소리를 그르렁거리는 검무를 겁먹는 눈으로 응시했다.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데다 헐벗기까지 해 흡사 광인이나 짐승 그 자체였다.

허리가 우지끈 조이고 담에 걸린 듯 등 근육이 딱딱하게 뭉쳤다. 어쩌다 이렇게 되셨느냐, 꼬리가 아홉 개라는데 그걸 못 보고 화살을 쏘았느냐! 따지고 싶을 만큼 만감이 교차했다.

황태후, 이 몹쓸…….

어쩐지 저만 방 안으로 들여보내는 게 이상하다 싶었다. 제 아들에게 공격을 당할까봐 겁이 난 건지, 자랑거리였던 아들의 모습이 처참해 외면하고 싶었던 건지 몰라도 언질이라도 줬어야지!

태의가 몇 가지 당부했었지만 맞닥뜨리고 나니 먹물처럼 시커먼 독약을 처음 봤을 때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황망했다.

말로는 표현이 어려울 만큼 검무와 방안의 분위기가 살풍경스러웠다.

“크아!”

검무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위협했다.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겁을 집어먹은 이령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이러다 물어뜯기는 건 아닐지 무서웠다.

구미호의 독에 쏘이면 맹수처럼 발광하여 사내들은 물어뜯고 눈에 보이는 계집은 모조리 겁탈한다고 했다. 그것은 음과 양의 조화 때문이라는 게 태의의 설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황제의 양팔과 양 발목에 족쇄를 채워 방 밖을 나가지 못하도록 했고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고열을 뿜어 대는 바람에 장옷 하나만 입혀 놓았다고 했다.

명색이 황제인데 발가벗긴 채 족쇄를 채우고 사슬로 고정할 수 없다는 것도 태의의 설명이었다.

“킁, 킁……킁.”

황제, 즉 검무가 코를 킁킁거리며 이령의 주변을 맴돌았다.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힌 채 산발이 된 머리카락 사이로 광안을 번쩍거려 무서웠다.

“킁킁, 킁.”

이령은 겁을 집어먹은 얼굴로 검무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도도하게 치켜 올라가 있었던 눈썹이 잔뜩 우그러져 있고 시원스럽게 뻗어 올린 콧등엔 주름이 졌다.

마치 성난 호랑이 같았다.

어디 그뿐이랴, 비틀어진 입술은 여전히 붉은 빛이 감돌고 두툼했지만 하얗게 거스러미가 생길 만큼 부르터 있었다.

역대 황제 중 가장 잘생긴 외모로 기록되었던 검무의 외모가 광기에 가려져 빛을 발하지 못했다.

이령은 주먹을 쥐었다.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분간도 못 하는데 방사를 했다고 예전의 검무로 돌아올 수 있을까? 회의적일 만큼 믿음이 생기지 않았다.

“크아앙…….”

이것 봐라. 짐승이 우는 소리를 내지 않나.

이령은 기가 막혀 눈시울을 붉혔다.

“어쩌다…… 이 꼴이 되셨습니까…….”

미워서 죽겠는데 제정신이 아닌 모습을 보니 가슴이 미어진다.

“죽으라고 했으면 즐겁게 사냥이나 하시지, 왜 이 꼴을 해서 나타나요.”

이령은 눈물이 고이기 시작하자 눈에 힘을 줘 노려봤다. 고양이처럼 크고 동그란 눈매에 맺힌 눈물이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무겁다. 무게를 견디지 못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크…….”

이령이 눈물을 보이자 입가를 씰룩거리던 검무 역시 울상을 지었다. 그녀를 알아본 듯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망울에 그만 철옹성처럼 견고하게 다졌던 분노가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나쁜 사람…….”

이령이 훌쩍거렸다.

“크으…… 응.”

짐승 같은 소리를 내던 검무가 혀로 눈물을 핥기 시작했다. 이럴 땐 꼭 뭔가를 아는 것 같았다. 그녀는 코를 훌쩍거렸다.

그가 다시 한번 눈물을 덮어쓴 뺨을 혀로 문지르며 눈물을 맛보았다. 얼굴에 침을 잔뜩 바르며 킁킁대던 그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그녀의 목덜미와 젖가슴 쪽에서 숨을 들이마셨다.

속이 비칠 만큼 얇은 무명으로 지은 잠의는 황후가 황제와 합궁할 때만 입는 침의였다. 유방의 모양, 유두의 빛깔, 음모의 숱과 색은 물론 잘록한 허리와 풍만한 엉덩이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어 그야말로 아찔했다.

이 아찔한 차림으로 발정한 짐승의 앞에 서 있으려니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을 쳤다. 죽음의 공포보단 눈앞에서 침을 흘리며 입맛을 다시는 검무 때문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크으…….”

“읍!”

검무가 이령을 벽에 밀어붙였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막혀 버린 입술 사이로 시뻘겋게 달아오른 혀가 부지불식간에 디밀고 들어와 요동쳤다.

그 기운이 어찌나 억세고 거침없는지 몸에 주었던 힘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검무와 잠자리를 갖지 않은 지 반년. 오랜 가뭄으로 인해 쩍쩍 갈라져 있던 논바닥에 단비가 내린 듯 촉촉하게 고이기 시작했다.

반년 동안 가랑이 사이 움푹 팬 구멍을 텅 비웠더니 그동안의 갈증을 당장에 해갈하고 싶은 모양이다. 허벅지 안쪽 살이 부르르 떨리더니 신음이 터졌다.

“아…….”

야속한 몸뚱어리 같으니라고.

이성을 잃고 날뛰는 걸 알면서도 금방 달아올라 음탕한 짓거리를 상상하고 만다. 얼굴을 빨갛게 적신 열기와 팽팽하게 솟구친 유두는 스치기만 해도 따끔거렸다.

“핫!”

검무가 그녀의 젖가슴을 양손으로 쥐는 동시에 무릎으로 다리를 벌렸다. 넓게 벌린 가랑이 사이에 찬 공기가 들어왔다. 침의 자락이 벌어진 탓이었다.

이성을 잃은 짐승처럼 변했다고 해도 그의 육신은 이령을 알아본 것 같았다. 허벅지를 가랑이 사이에 넣은 그가 가볍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황태자 시절, 어린 부부가 하던 놀이 중 하나가 발을 가랑이 사이에 대고 터는 거였다. 그때마다 그녀는 자지러지며 좋아했고 검무는 그녀의 발목을 높이 세운 후 발로 음부를 꾹 누르며 즐거워했다.

“아흣…… 아아…….”

이령은 검무에게 매달렸다. 제정신이 아니라고 하니 욕설을 잔뜩 해 주려고 했었다. 어떻게 다른 여인을 취할 생각을 하느냐 악다구니를 치며 내가 널 살려 주지만 죽을 때까지 행복하진 않을 거다! 그렇게 원망을 잔뜩 늘어놓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단 한마디의 원망도 내뱉지 못했다. 이렇게 입술이 빨리고 질 질 구멍이 끈끈한 애액으로 젖어 가는 바람에 정신이 점점 흐려 갔다.

“윽!”

검무가 그녀의 어깨를 아프게 깨무는 동시에 침의를 찢어 버렸다. 매끈한 여체가 달콤한 향을 피워 내자 손가락이 질 구멍을 찾았다.

“아핫!”

손가락 두 개가 동시에 몸속으로 들어와 질 내벽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구부린 손끝으로 볼록볼록 돋아난 돌기를 찾아내자 그녀가 자지러지기 시작했다.

“끄…… 으읏.”

배꼽 아래의 감각이 제멋대로 경련을 일으켰다. 어깨를 물린 통증 따윈 까맣게 잊어버렸다. 구멍을 쑤시는 힘에 도취되어 끙끙 앓는 소리를 내던 그녀는 별안간 쓰러졌다.

검무가 그녀를 가볍게 눕힌 후 손가락으로 막고 있던 구멍을 벌렸다. 그는 곧장 혀를 대고 쪽쪽 소리를 내며 애액을 빨아 마시기 시작했다.

“아!”

하복부를 송두리째 뽑아 버릴 기세로 입술에 힘을 주는 바람에 허리가 들렸다. 그녀는 허리를 높이 쳐드는 동시에 엉덩이를 조였다. 발뒤꿈치가 들릴 만큼 봉긋하게 몸을 세우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입 주변이 애액과 침으로 인해 번들거렸다. 그가 그녀의 발목을 잡은 후 뒤돌렸다. 꽃가지를 꺾듯이 그녀의 몸을 가볍게 비튼 그가 그대로 올라탔다.

“읏!”

이령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한껏 벌려 놓은 구멍이 손가락의 몇 배나 되는 굵기의 양물에 쑤셔지기 시작했다.

눈앞이 핑 돌았다. 오랜만에 품어본 맛은 최고였다. 그녀는 발을 무릎을 바닥에 붙인 채 발을 흔들었다. 그러자 그가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누르며 쾌속으로 내달렸다.

손뼉을 치듯이 강한 힘이 맞붙었다가 떨어질 때마다 찰싹거리는 소리가 제법 야릇했다.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민망할 정도로 유연하게 허리를 치대는 동작은 야수였다.

야수는 발정하였고 맹목적인 만큼 힘이 넘쳤다.

“하앗, 아!”

이령은 바닥을 긁으며 바동거렸다. 제 몸을 반으로 가르려는 듯 들쑤시는 바람에 정신이 아득했다. 구미호의 독인지 뭔지 때문에 죽는 게 아니라 발정한 검무 때문에 찢겨 죽을 것 같았다.

“읏!”

엉덩이를 들어 올린 검무가 이령을 젖가슴을 세게 쥐었다. 고양이가 옹크린 것처럼 몸을 만 그녀는 죄인처럼 엎드려 바들바들 떨었다. 젖꼭지가 비틀렸다. 몸이 진정했다.

아랫배가 빡빡하게 조이기 시작하나 싶더니 요도구에서 물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낯설거나 창피해하지 않았다. 검무와 관계를 맺을 때마다 이불을 적신 탓이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충분한 양의 소변을 보아도 꼭 이렇게 싸 버렸다.

“아흡!”

이령이 숨을 들이마셨다. 젖가슴을 괴롭히던 손이 공알을 눌렀다. 눈앞이 번쩍거렸다. 그녀는 팔다리를 바르작거리며 그에게서 도망치려고 했다.

이 익숙한 감각이 오늘은 몇 배로 날카로워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고 반딧불이 같은 것들이 제 주변을 날아다니며 주위를 밝혔다.

대낮이었기에 불빛이 도드라질 리 없는데도 그녀는 빛에 홀린 듯이 눈동자를 굴렸다. 검무가 다시 한번 공알을 눌렀다. 입술을 깨물어 가며 참고 있었던 교성이 터졌다.

“아항!”

비음 섞인 신음이 목구멍을 열었다. 그녀는 엉덩이를 미친 듯이 흔들었다. 구멍이란 구멍은 모두 열렸다가 닫히며 헐떡거렸다.

그녀는 쌕쌕 거친 숨소리를 바닥에 대고 흩뿌렸다. 현기증에 이은 두통으로 인해 가슴이 격하게 들썩거렸다.

“아아…… 아!”

몸이 오그라든다. 양물을 꽉 물고 있던 속살이 바싹 긴장해 빡빡하게 조이기 시작했다. 미끄덩거리는 기둥이 몸속에서 빠져나갔다.

그녀는 손으로 음부를 가린 채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검무가 그녀를 얌전히 놔줄 리 없었다. 색욕의 달콤한 맛에 취해 버린 육신을 한껏 부풀린 그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잡아 돌아눕게 했다.

다시 또 천장을 바라보게 되자 그가 그녀의 엉덩이를 양 손으로 꽉 쥐며 끌어당겼다. 무릎을 꿇고 앉은 그는 무시무시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만큼 엉망진창이었다. 그는 송곳니가 보일 정도로 입술을 씰룩거리며 그녀를 노려봤다. 실핏줄이 터진 눈에서 애욕을 넘어선 살기가 느껴졌다.

“윽!”

검무가 이령에게 파고들었다. 그는 그녀의 발목을 잡아 입가로 가져갔다. 발가락을 게걸스럽게 빨아 대며 무어라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짐승이 아르릉, 아르릉 숨 고르는 소리 같기도 했다.

이령은 검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정신이 없어도 자신이 했던 행동들은 몸에 배어 있어 습관적으로 나오나 보다.

그녀의 발이 예쁘고 부드럽다며 입맞춤을 해 주곤 했었다. 그는 그녀만을 위해 존재했던 것처럼 열정적으로 사랑을 주었다. 당연한 대가처럼 그의 마음이 변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자신이 죽고 나면 후궁, 아니 새 황후에게 지금처럼 발에 입을 맞추며 사랑을 속삭이겠지. 그런 생각만 하면 억장이 무너졌지만 죽을 날을 받아 놓은 몸이라 그런가 그저 망연했다.

이렇게 누워 있으니까 검무와 보냈던 호시절이 주마등처럼 흘렀다. 아홉 살, 열한 살 어린 부부는 나뭇잎이 굴러가도 웃음을 참지 못할 만큼 해맑고 다정했다.

정략혼인 데다 어릴 때 만난 부부는 정답지 못하다고 했으나 검무와 이령은 사이가 꽤 좋았다. 검무는 이령이 제 지어미인 게 너무 좋다며 노래를 불렀다.

이령 또한 자신을 사랑하고 아끼는 검무가 좋았다. 황태자 시절에도 후처를 들일 수 있었지만 이령이 속상해한다며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초경을 하고도 몇 년이 지났음에도 회임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황태후의 시집살이가 시작됐다. 그때마다 검무가 나타나 어머니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줬지만 황제가 된 후로 예전 같지 않았다.

처음엔 격무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나 말수가 줄어들고 혼자 있으려는 태도에 애정이 사라진 게 아닌가 늘 의심을 품게 됐다.

불안감으로 인해 고개를 든 의심은 부부간의 불화로 이어졌고 검무는 황후전을 드문드문 찾았다. 그러다 후궁의 문제가 불거지면서 오늘 날이 이르게 되었다.

단 몇 줄로 설명이 가능할 정도로 불화의 이유는 간략했다. 검무가 변해 버린 탓이었다. 그는 받아들이지 않을 테지만 여인은 지아비의 마음 때문에 죽고 산다. 봄이었던 마음도 한겨울이 되는 게 여인의 팔자였다.

“읏!”

검무가 절정으로 치달았다. 그녀 또한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져 숨넘어가는 소리만 겨우 내뱉었다. 곧이어 검무가 아랫배를 꿀렁거리기 시작했다.

구미호의 독을 게워 내기 시작했다. 그 행위는 시원한 사정감으로 이어졌으나 이령에겐 반대였다. 그녀는 자신의 수명을 갉아먹기 시작하는 독기를 덤덤히 받아들였다.

구미호의 독이 섞인 정액이라는 걸 알아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자궁이 따끔거렸다. 녹는 건 자궁부터일까? 아니면 질 구멍일까?

이제야 눈물이 흐른다. 그녀는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살아날 희망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처연하고 두렵다. 깨문 입술을 부르르 떨어 가며 터져 나오는 울음을 삼킬 때였다.

검무가 맥없이 쓰러져 누웠다. 의식을 잃은 것처럼 눈을 감은 그는 거친 숨만 씩씩거리는 게 전부였다.

“당신…… 깨어나며 상처가 되는 말을 잔뜩 퍼부어 댈 테지요. 죽어야 할 사람이 왜 옆에 있느냐는 분노와 함께.”

이령은 귓가를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부탁했다.

“그렇다고 너무 몰아붙이진 말아요, 어차피 나는 죽으니까.”

그러니까 저번처럼 벌레 보듯이 보지도 마세요.

한때는 당신의 꽃이었잖아요.

다시…… 꽃으로 돌아갈 순 없어도…… 벌레로 죽고 싶진 않아요.

그러니까…… 마지막엔 곱게 필 수 있도록 짓이기진 말아요.

1장. 네가 밉다

검무가 정신을 차렸을 땐 보름달이 서서히 떠오르던 초저녁이었다. 방 안의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을 만큼 차가운 시선으로 이령을 노려보고 있었다.

죽을 것처럼 타들어 가던 고통 속에서 빠져나온 건 다행스러웠지만 마냥 안도할 수 없었다. 독약을 마시고 죽었어야 할 이령이 왜 멀쩡하게 앉아 있는지 그 연유가 궁금했다.

검무는 미워 죽겠어서, 아예 죽었으면 했던 이령을 벌레 보듯이 노려보며 물었다.

“어째서…… 황명까지 어겼느냐. 짐의 얼굴에 상처를 내더니 간덩이가 부어올라 천지분간도 못 하게 된 게냐.”

“황태후마마께서 사사의 명을 거두셨어요.”

이령은 조곤조곤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녀는 푸르스름한 밤하늘에 새하얗게 뜬 달처럼 창백했다.

검무는 이령의 옆에 앉은 황태후를 응시했다. 그러자 황태후가 어쩔 수 없었다는 표정으로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방사를 해야지만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하니 어쩌겠습니까? 황상이 미쳐 날뛰고 있다는 게 소문나지 않으려면 입이 무거운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게 폐황후입니까?”

“어차피 사사될 몸이고 죽으면 비밀은 영원히 지켜집니다.”

황태후의 대답에 검무는 헛웃음을 쳤다.

“소자와 몸을 섞었다가 회임이라도 하면요?”

“그럴 일은 없다는군요. 저 아이 불임입니다.”

황태후는 검무가 독에 대한 걸 몰랐으면 하는 마음에 거짓말을 둘러댔다.

“불임이라니요? 태의는 그렇게 진단한 적이 없습니다.”

“다시 검사를 해 보니까 불임이라고 하더이다. 생각해 보세요. 황상과 그렇게 사이가 좋을 때도 생기지 않았던 아이. 누구 때문이겠습니까?”

“소자의 책임일 수도 있습니다.”

“폐황후를 두둔하는 겁니까?”

“그런 뜻이 아닙니다. 소자가 마음을 끊어 낸 여인이라고 해도 시시비비는 정확하게 가려야겠기에 드린 말씀입니다.”

검무는 반듯한 황제로 도리에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면에선 결벽증에 가까운 성격이었기 때문에 이령을 두둔할 마음이 없다는 건 진심이었다.

“어쨌든 폐황후는 불임이고 회임할 수 없소이다. 하니 황상은 건강을 되찾아 환궁하는 것만 생각하세요.”

“방법이 방사밖에 없습니까?”

“이 어미도 좋아서 시키는 건 아니오.”

“그러시겠지요.”

“어쨌든 하루빨리 회복해야 하니 다른 생각은 일체 접어 두고 환궁할 날만 생각하세요.”

이러쿵저러쿵 길게 설명해 봤자 말실수나 할 것 같았던 황태후는 몸을 일으켰다.

저 성격에 구미호의 독에 대해 알게 된다면 골치가 아파진다. 제가 사사 명령을 내린 처라고 해도 저 때문에 죽게 된다는 걸 알게 되면 못 견뎌할 게 뻔했다.

황태후는 이령을 흘끗 쳐다봤다. 마음에 쏙 드는 며느리는 아니었지만 이령은 영특하고 입이 무거웠다. 죽는 마당이니 검무에게 상처를 주겠다고 입을 놀렸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잘 알았다.

아랫것들에게도 함구령을 내려놓았기 때문에 구미호의 독에 대한 진실이 검무의 귀에 들어갈 일은 없을 터였다.

“이 어미가 개화궁을 찾을 리는 없을 게요. 하니 황상은 하루 빨리 건강을 되찾아서 환궁하세요. 이 어미가 기다리리다.”

“……예.”

검무는 한참 동안 뜸을 들인 후에야 마지못해 대답했다. 황태후는 목석처럼 앉아 있던 이령이 몸을 일으키자 고갯짓을 한 후 방을 나가버렸다.

황태후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서 있던 그녀가 천천히 몸을 내렸다. 조심스레 앉은 그녀는 시선을 방바닥에 붙였다.

검무의 시선이 피부에 닿아 따끔했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옆으로 돌린 그녀는 입술을 꼬물거렸다.

좀 전에는 그렇게 짐승 같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나니 눈이 부실 만큼 잘나고 잘난 외모에 윤기가 흘렀다.

뽀얗게 핀 피부는 맑았고 광채가 흐르던 눈동자는 촉촉하게 젖어 색기가 돌았다. 눈썹은 어찌나 짙고 선명한지 며칠 안 본 사이에 더 멋있어진 것 같아 서글펐다.

이령이 없어도 잘 살아왔다는 게 느껴질 만큼 높은 콧대도 여전했고 반듯한 이마에 도드라진 광대, 강인한 턱 선과 붉은 기가 돌아 건강미가 도는 입술도 여전히 잘생겼다.

한때는 검무가 흘린 머리카락 하나도 제 것이었던 시절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제 것이 아니었는데…….

그건 제 착각이었을 뿐이었는데…….

이령은 고개 숙인 해바라기처럼 숨을 죽였다. 한참 동안 이어진 침묵 끝에 검무가 입술을 뗐다.

“그 안에 짐의 씨물이 그득하겠지?”

검무의 목소리는 눈빛만큼이나 싸늘했다.

“예.”

“제정신이 아니었을 텐데…… 속으로 조롱했나?”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어요.”

“어째서? 한껏 비웃어도 몰랐을 텐데.”

“오랜만에 안긴 탓이겠지요.”

이령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몹쓸 기억도 떠오르고…….”

“그랬겠지. 몹쓸 기억…… 12년이나 살았으니.”

검무는 주먹을 쥐었다. 죽어 버리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던 순간을 벗어나고 나니 살 것 같았다. 한데 자신을 구한 이가 바로 밉고 미워서 죽었으면 했던 지어미라니. 고맙다는 말보다 짜증부터 치밀어 올랐다.

“또 부어야 한다는데 자네는 괜찮나?”

“어쩔 수 없으니까요.”

“솔직히 나는…….”

“압니다. 폐하께선 끔찍한 것을 보는 것도 닿는 것도 싫어하신다는 걸요. 하지만 합궁 말고는 회복할 방법이 없답니다.”

“자네는? 자네는 역겹지 않나?”

“신첩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네요.”

“자네의 기분을 묻는 게야.”

검무는 제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넋을 놓은 듯 바닥만 쳐다보는 이령 때문에 배알이 꼬였다. 제게 물건을 집어던지며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 대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사내로서의 자존심을 꺾는 소리도 얼마나 내뱉었나.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여인과 나눌 수 없다?

그 말을 왜 이해 못하겠느냐마는 후궁을 들이겠다고 말한 적도 없는 저를 호색한으로 몰아붙이는 통에 정나미가 떨어졌다.

사랑이 깊었던 만큼 배신감이 커 활활 타올랐던 마음이 순식간에 식어 버렸다. 다시는 불태울 수 없을 만큼.

“두렵고…… 또 두려워요.”

“단지 그뿐인가?”

“지금으로선.”

“혹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는 건 아니겠지.”

검무는 여전히 짜증조였다. 예전 생각이 떠올라 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떨군 고개만 열없이 흔들었다. 절망감뿐인 그녀의 심경이 고스란히 드러난 옆얼굴은 그늘이 짙어 어두웠다.

“자네와 나는 끝났어.”

“……예.”

“마음에서 도려낸 자네를 다시 들이지 않아.”

“……예.”

“살려 달라고 애원하지 말게.”

“……예.”

이령의 목소리는 기어들어 가는 것처럼 작았다. 그가 하는 걱정이 부질없다는 양 넋을 놓고 있어 기분이 야릇했다.

“신첩…… 폐하의 바람대로 죽을 거예요. 살려 달라고 애원하지도 않을 거고…… 마음을 달라고 매달리지도 않아요. 끝난 것도 잘 알고…… 제가 죽을 것도 잘 아니까…… 같이 지내는 시간만이라도 싸우지 말아요.”

눈가가 충혈 됐지만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우는 모습을 보였다간 약한 척하지 말라는 소리나 들을 게 뻔했다.

“태의가 자주 빼야…… 빨리 회복할 수 있대요. 하지만 폐하께서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니…… 필요할 때 부르셔요.”

“마음이 없는데 무슨 준비. 자네는 다리나 벌리고 있어.”

“……예.”

검무가 침의의 저고리를 벗었다. 이령은 실내를 밝힌 촛불을 껐다. 그녀 또한 침의의 매듭을 풀고는 검무에게 다가갔다.

“입술은…… 겹치지 말아요.”

“어째서.”

“입맞춤은…… 힘들어요.”

“다리는 벌려 주면서 입술은 벌리지 못하겠다?”

“신첩이 매달리면 어째요. 살려 달라고 울면서 애원하면 그땐 어쩌시려고요? 은애한다, 잘못했다, 살려 달라…… 그런 소리는 듣고 싶지 않지요?”

이령의 물음에 검무는 입술을 비틀었다. 하체만 놀리면 매달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겐가? 어이가 없었지만 그 역시 입을 맞출 기분이 아니었다.

“그러지.”

이령은 이불 위에 반듯하게 누워 무릎을 세웠다. 불과 몇 시간 전에 그를 받아들였던 탓에 음부가 질척거렸다. 자궁에 다 담지 못한 씨물이 새어나와 맺힌 탓이었다.

검무는 손가락으로 질 입구를 쓸었다. 넓히지 않아도 충분히 부드럽고 말랑말랑했다. 그는 바싹 세운 용두를 옥문에 대고 문지르다가 힘을 줬다. 애무 없이 파고드는 데도 거북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복부가 팽팽하게 조일 만큼 달아올랐다. 이유는 반년 동안 금욕의 시간을 보낸 탓이었다.

“읏.”

이령이 신음했다. 넣고 빼는 것만 반복할 뿐인데도 느끼는 모양이다. 전에는 뺨을 건드리기만 해도 얼굴을 붉히는 게 귀여웠다.

깨물어 주고 싶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사랑스러웠지만 지금은 그녀가 밉다.

미운 감정이 저만의 감정이겠느냐마는 어째서 믿어 주지 않았던 걸까? 부황의 죽음과 동시에 황제가 된 제 사정을 어째서 헤아려 주지 않았지?

아버지를 잃은 슬픔과 황제가 짊어진 막중한 책임감으로 인해 하루하루 버티는 것도 고역이었던 제게 후궁 문제를 매듭지으라니.

이령이 그렇게 미운 수가 없었다.

그렇게 사랑해 주었으면 믿음이 생길 만도 한데 그녀는 제 감정만 앞세우며 그의 고통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후궁이라면 꼭 황제가 되지 않아도 황태자 시절에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었다. 가능했지만 다른 여인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던 건 이령을 향한 마음 때문이었다.

바보같이.

이령, 그녀를 향한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얼굴을 상처까지 내다니.

검무는 눈가를 찡그렸다. 지금도 그날의 수모가 생생해 통증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아아…… 아.”

새카만 어둠 속에서 이령이 흐느꼈다. 우는 것 같기도 했고 신음하는 것도 같아 헷갈렸지만 그는 못 들은 척했다. 마음속에서 지우겠다, 도려내겠다고 각오한 이상 흔들림은 없다.

“윽!”

쏟아 내는 것에만 신경을 집중했더니 얼마 못가 사정감이 몰려왔다. 그는 파정을 마친 양물이 빠르게 잦아드는 것처럼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이령이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벗어 두었던 침의를 갖추어 입었다.

“신첩이 필요하실 땐 방울을 울리세요.”

이령은 어깨를 움츠린 채 비실비실 걸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리는 움직임이 어둠 속이지만 선명했다.

기분 참…….

시원하게 배출했는데 기분은 더럽다.

12년이라는 세월 탓이겠지.

그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그대로 주저앉았다. 눈앞이 아찔하고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앉았다. 개운한 느낌 덕분에 호전됐다고 생각했던 게 착각이었나 보다.

이마를 짚고 있던 그는 무너지듯이 쓰러져 누웠다. 코에서 피비린내 같이 역한 냄새가 올라왔다. 천장이 뱅글뱅글 도는 것 같았던 그는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기력이 쇠했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속수무책으로 주저앉게 되고 쏟아지는 잠을 견딜 수 없어 눈이 감기는 것. 그리고 언제 의식을 잃은 지도 모를 만큼 찰나적인 그 순간에 기절해 버리는 것.

이게 구미호의 독이라는 건가?

주르륵.

검무의 방을 나오자마자 코에서 뜨겁고 비릿한 게 흘렀다. 손등으로 슥 닦고 보니 피였다. 아까 낮에도 코피를 한 바가지나 쏟았다.

천으로 코를 막아 봤자 순식간에 젖어 버리기 일쑤이니 멈출 때까지 흘리는 방법뿐이었다.

“히익!”

금란이 코피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마, 마마…….”

“놀라지 마. 난 괜찮아.”

“피, 피가 또…….”

“머리도 맑아지고…… 기분 전환도 돼서 괜찮아.”

이령은 수풀이 우거진 화단으로 걸어가 쪼그려 앉았다. 머리를 앞으로 숙여야 코피가 기도나 식도로 들어가지 않았다.

“태, 태의를 불러 올게요.”

“호들갑 떨지 마. 태의가 그랬잖아. 독을 내 몸에 옮기는 거라서 사나흘은 코피가 흐를 거라고. 독에 내성이 생기면 코피가 멎을 거라고 했으니 걱정하지 마.”

“마마…….”

금란이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또 우는구나. 나는 울지 않으려고 하는데.”

“어째요…… 제가 도울 방법도 없고…… 흑흑.”

“어차피 나 혼자 감당해야 할 일이야. 그러니 너무 마음을 쏟지 마라. 나 때문에 상심하지 마.”

“어쩜 그렇게 태평하세요?”

“나도 무서워. 하지만…… 머리가 맑아지는 건 좋은 것 같아.”

보이는 것마다 절망뿐일 땐 사소한 것에서 기쁨을 찾아 가며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코피를 쏟고 나면 좋은 점이 둘이나 있었다.

하나는 머리가 맑아진다는 것과 금방 지쳐서 잠이 잘 온다는 거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잠을 자려고 하면 악몽을 껐다.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 그녀에게 들러붙어 시커먼 계곡으로 끌고 가려고 했었다. 그들에게서 벗어나려고 발악을 하다가 잠에서 깼다.

하지만 오늘부턴 그런 악몽에서도 해방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꿈이 아닌 진짜 사신이 찾아올 테니까.

한참 동안 쪼그리고 앉아 있었더니 코피가 멎었다. 갑자기 일어나면 현기증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녀는 금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으켜 줄래?”

금란이 이령을 부축해 일으켰다. 황후전에서 쫓겨난 후로 몸무게가 많이 줄어 종잇장처럼 가벼웠다.

“씻으셔야죠.”

“피 냄새가 많이 나지?”

“따뜻한 물로 씻고 나시면 숙면을 취할 수 있을 거예요.”

“응…….”

이령은 싱긋 웃으며 밤하늘을 응시했다. 태의가 말하길 검무의 체력이 회복될수록 이령은 죽어 갈 거라고 했다.

달이 기울여야지만 해가 떠오르는 이치인 듯. 만약에 숨을 거두게 된다면 동트기 직전이었으면 좋겠다.

평온하게 잠자다가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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