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 죽어야 안을 수 있는
“폐황후 강이령은 죗값을 치르라는 황명이오!”
개화궁에 유폐된 지 꼭 한 달째.
지아비이자 황제 검무가 윽박지른 대로 독약이 내려졌다. 이령은 한숨을 쉬었다. 이 목숨을 언제쯤 거두러 오나 두려움에 떨었던 것도 오늘도 끝이었다.
“마마아…… 흑.”
황후전의 지밀에서 자신을 보살폈던 여관, 금란이 비통에 차 울음을 터트렸다.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건 금란뿐이 아니었지만 그 누구도 황명을 거스를 수 없어 덩그마니 놓인 독약 사발을 뒤엎지는 못했다.
이령은 핏기가 가신 얼굴처럼 버석거리는 걸음을 한 발, 한 발 내디뎌 방을 나왔다. 마당에는 여러 장의 멍석이 깔려 있었고 독약 사발을 올린 소반이 있었다.
그녀는 제 얼굴보다 큰 사발에 한가득 부어 놓은 독약을 응시했다. 저 시커먼 물이 뭐라고 마시면 오장육부가 녹아 없어지는 고통 속에서 죽게 되는 걸까?
그저 먹물처럼 검기만 한걸.
이령은 저항하지 않고 독약 그릇을 놓은 탁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걸 마시지 않겠다며 저항할까? 찰나적으로 짧은 생각이 스쳤지만 무지몽매한 미련일 뿐이었다.
독약을 마시지 않으면 부모님과 오라비, 여동생은 물론 그들의 반려자, 반려자의 가족들이 줄줄이 독약을 마셔야 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코끝이 찡하게 울리나 싶더니 이내 눈앞이 뿌옇게 흐려진다. 저걸 마시면 코와 입, 귓구멍을 통해 피가 솟구치고 녹아내린 장기는 항문으로 쏟아진다고 하였다.
하여 죽을 때까지도 수치심을 안기고 싶은 후궁들에게나 독약을 먹여 죽이는 게 황실의 법도였다. 하지만 황제는 법도까지 깨부수며 그녀의 시신까지도 처참한 꼴이 되게 할 생각인 듯했다.
눈가에 손톱자국을 냈으니까 용서할 수 없겠지.
안 그래도 사랑이 식어 버린 탓에 멀리 치워 버리고 싶었을 텐데.
사랑을 시작할 땐 호탕하고 적극적인 성격이 좋다더니 애정이 식으니 그 점 때문에 재미가 없고 숨이 막힌다고 했다.
자신을 옥죄고 몰아붙이기 때문에 불편해서 꼴도 보기 싫다고 했었다. 사랑을 시작한 이유가 헤어지는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걸 그때는 조금도 의심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그저 허망하고 구슬펐다.
이령은 독약 사발에 시선을 묻은 채 물었다.
“폐하는 어디 계신가?”
“나, 나흘 전에 사냥을 가셔서 아직…….”
독약을 가지고 온 말단 관료가 고개를 숙였다. 12년이나 살을 맞대고 산 조강지처에게 독약을 내리고 마음 편하게 사냥이나 갔다는 걸 전하는 게 민망한 모양이다.
“면목 없습니다, 마마.”
“자네가 왜…….”
이령은 한숨을 쉬었다. 미안해해야 할 사람은 사슴이나 잡으며 희희낙락하는데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이 면구스러워하니 허탈했다.
양어깨를 짓누르는 침묵의 시간이 오랫동안 흐르자 말단 관료가 조심스레 물었다.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내가 죽거든…… 땅에 묻지 말고 태워 주게. 아무것도 남기고 싶지 않아.”
“마마…….”
“시신을 남기고 가면…… 혹시나 내세에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도 있잖아. 땅에 묻힌 게 없으면 사람이 아닌…… 나무나 들풀로 태어나지 않을까 싶어서.”
나무라면 소나무가 좋겠고 꽃이라면 달맞이꽃이 좋을 것 같다.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으나 소담하지만 저만의 색깔이 분명한 존재들.
그 중 달맞이꽃은 그녀가 좋아했기 때문에 황태자궁과 황후전에 잔뜩 심어 놓았다.
달맞이꽃이 만개하면 화관, 여관을 데리고 소풍을 가곤 했었다. 그래봤자 황궁 안이었지만 그만한 호시절(好時節)도 없었다.
문득 제가 죽게 되면 달맞이꽃은 어떻게 되려나 걱정스러웠으나 괜한 걱정이다. 달맞이꽃은 뿌리만 잘 내리면 철에 맞춰 피고 졌다.
그렇듯 제철만 찾으면 만개할 수 있었고 뿌리가 튼튼하니 혹독한 겨울을 견디며 꽃을 피울 철을 기다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령은 이제 죽는다.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아홉 살 어린 나이에 황태자비로 입궁하여 스물한 살까지 그럭저럭 잘 지냈다. 황태자 검무는 황제 수업을 빼면 늘 이령의 치마폭에 누워 잠들거나 손장난을 치고는 했었다.
아낌없이 사랑했고 맹목적으로 아꼈으며 그 마음이 영원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령에게 검무가 전부인 듯, 검무 또한 일편단심임은 당연했다.
하지만 검무의 위치가 바뀌고 나니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황제가 된 검무는 극심한 격무로 인해 예민해져 갔고 시어머니 황태후는 후사를 걱정하며 후궁들을 들이려고 했다.
금슬이 좋은 부부인데도 사내아이는커녕 계집아이 하나 출산하지 못한 게 슬슬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시어머니 황태후는 이령에게 문제가 있어서 후사를 얻지 못 하는 거라며 눈치를 주었고 조정에서도 후사를 잇지 못하는 이령을 질타했다.
후궁을 들여서라도 후사를 이어야 한다는 의견의 강도가 강해질수록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검무라도 나서서 후궁을 들일 일은 결코 없을 거라고 선언을 해 주었다면 좋을 테지만 그건 이령의 욕심이자 바람일 뿐이었다.
검무는 침묵했다. 침묵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령은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검무가 여관에게 다정하게 말이라도 붙이면 이령의 눈빛이 변했다.
투기심이 불같이 일어났다. 그녀는 검무와 마주칠 때마다 후궁은 절대 안 된다며 몰아붙였다. 후궁 문제로 말다툼을 하게 되자 검무는 그녀를 멀리하거나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렇게 불화의 불씨가 황궁의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 즈음 이령이 검무를 할퀴었다.
자존심이 센 황제는 눈가의 상처와 피를 확인한 후 광인처럼 펄쩍 뛰기 시작했고 부부싸움은 과격하여 연일 전쟁 같았다. 금슬이 좋았던 부부였던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다툼은 지독했다.
치욕을 안은 황제는 이성을 완전히 잃어 이령이라면 끔찍하다는 말과 함께 그 자리에서 죽음을 내렸다.
“차라리 죽어.”
그의 말은 곧 법이다.
황후일지라도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겼던 조강지처일지라도.
독약을 내릴 만큼 증오했다.
독약을 내리지 않아도 이령은 그때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데도 그는 숨통을 끊으려고 한다. 사랑했던 기억을 도려낸 것처럼.
이령은 눈물이 맺힌 눈가를 손끝으로 쓸었다. 그녀의 시선이 사발에 고정됐다.
오장육부가 녹아내리는 고통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할 테지만 감내해야 했다. 감내하다보면 숨이 끊어질 테니까 그것으로 됐다.
이제 그만 가야겠다.
무아(無我)의 세계로.
이령은 사발을 양손으로 쥐었다.
“마마!”
여관들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이령은 입에 고인 침을 삼킨 후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그리고 황후로서의 위엄을 갖추며 꾸짖었다.
“어느 안전이라고 눈물을 보이느냐, 울지 마라!”
“마마…….”
“나는 기쁜 마음으로 사라질 것이다. 폐하께서 바라시는 대로 영원히 사라지지. 그러나 나는 이제 더는 슬프지 않아. 이제 더는 가슴앓이를 하지 않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 하니…… 너무 슬퍼하지 마라.”
이령은 눈물이 차오르려는 걸 어금니를 깨물어 삼켰다. 여관에게 말한 것처럼 검무를 잃고 사는 것보단 죽는 편이 낫다.
개화궁에 유폐되어 무의미한 날을 하루하루 보내며 황제에게 총비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면 어땠을까?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아직까지 여인은 나 하나. 아직까진 유일하니 그것으로 족해.”
이령은 독약 사발에 비친 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겁이 나서 손이 떨렸다. 하지만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죽자, 죽어서 사라지자.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미적거리지 말자. 죽음을 받아들였으니 빨리 죽는 거야.
마음을 추스른 그녀는 비장미가 흐르는 눈빛을 빛냈다.
“이만 가네.”
단단히 먹었지만 떨림은 가라앉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사발을 들어 입가로 가져간 그녀가 용기를 그러모으듯 입을 크게 벌렸다.
그리고 막 사발을 입에 붙이려고 할 때였다. 환관 하나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멈추십시오! 황명을 거두라는 황태후마마의 명이옵니다!”
이령은 독약을 마시려다가 움찔했다. 그 사이 환관이 달려와 이령에게서 사발을 빼앗아 바닥에 내팽개쳤다.
“황태후마마께서 오고 계십니다!”
땀을 뻘뻘 흘릴 정도로 다급해하던 환관이 무릎걸음을 걸어 물러났다. 그러자 황태후가 환관과 여관들을 데리고 개화궁에 들어섰다.
형을 집행하고자 개화궁의 너른 마당을 채웠던 병사들과 말단 관료가 두 손을 맞잡은 채 허리를 숙였다.
“황태후마마, 드셨습니까?”
검은 비단에 금실로 꽃과 나무, 새와 나비 등을 수를 놓아 화려한 옷차림을 한 황태후가 이령과 말단 관료의 앞에 섰다.
이령은 시어머니의 옷 색깔을 유심히 응시했다. 검은색 비단에 수를 놓은 옷을 입을 땐 황실에 변고가 생겼을 때였다.
황태후의 지밀이나 며느리만이 알 수 있을 만큼 은밀한 신호였다. 이령은 얼굴을 쓸었다. 사냥을 나갔다는 황제나 황태후의 신변에 무언가 터진 모양이다.
“폐황후의 사사(賜死)는 지연되었으니 모두 물러가라.”
철회가 아닌 지연?
역시…… 무언가 터졌구나.
이령은 생각에 잠겼다. 형을 집행하고자 개화궁을 채웠던 말단 관료와 병사들이 연기처럼 빠져나갔다. 황태후의 여관 중에서도 몇몇은 개화궁 밖을 지키려는 듯 병사들의 뒤를 따랐다.
이제 마당에 넘은 건 황태후와 황태후전 소속의 여관, 환관, 이령과 황후전의 여관뿐이었다.
“내가 때를 잘 맞추었구나.”
“황태후마마께서 어인 일로…….”
“죽기 전에 해 주어야 할 일이 있어서 왔단다.”
살려 주겠다는 말을 해도 의심스러운데 해 주어야 할 일이라니, 그게 뭘까? 이령은 황태후를 빤해 쳐다봤다. 열여섯에 황태자를 출산한 만큼 황태후는 꽤 젊었다.
서른 후반의 나이였으나 얼핏 보면 서른 초반으로 보일 만큼 피부와 몸매 관리를 잘해 과부로 늙기엔 아까울 만큼 고왔다.
하지만 그 성질은 외모만큼 아름답지 못해 자식을 얻지 못한 이령을 한심해하거나 사사건건 무시했었다. 이령의 편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안 그래도 미운 며느리가 눈가에 흉터를 만들었으니 황태후에게는 기회가 온 셈이었다. 그녀는 흥분한 아들의 분노를 다독이지 않았다.
오히려 방관이라는 방법으로 이령에게 독약을 내리도록 유도했다. 황태후의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였던 만큼 이령의 음성은 냉정했다.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요?”
“황상이 사냥을 나갔다가 구미호를 화살로 쐈다는구나.”
구미호……?
이령은 당황했다. 그녀는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가 싶어 황태후를 넋 놓고 바라봤다.
신령으로 불리는 그 구미호를 말하는 겐가?
하지만 구미호라는 건 미신이 아니었나?
이령은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 눈꺼풀만 끔뻑거렸다. 상상 속의 동물이거나 사람들이 지어낸 말이라고 생각했던 그녀로선 혼란스러웠다.
“구미호가 실제로 존재하나요? 저는 무슨 소리인지…….”
“꼬리가 아홉인 여우를 본 자만 수십이다. 나도 미신인 줄 알았으나 존재한다는구나. 500년을 수행할 때마다 꼬리가 둘로 갈라지고 아홉 개가 되면 불사라고…… 건드리지 않으면 해하지 않고 인간들 속에 섞여 평화로이 지낸다는구나. 즉 건드리지만 않으면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게야.”
황태후는 울상을 지었다.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짚은 그녀는 저와 아들에게 일어난 비극을 견딜 수 없는지 울먹거렸다.
“정신을 어디에 두었기에…… 건드려선 안 될 것을 건드려.”
처를 죽이는 일이 그렇게 신이 나셨나? 기분이 너무 좋아서 아무 데나 막 쏘아 대지 않았다면 꼬리가 아홉인 걸 왜 못 봐?
이령은 눈만 끔뻑거렸다. 황태후를 위로하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무성하게 자란 잡초를 응시했다.
“걱정되지도 않으냐.”
“……제게 죽으라고 하신 분인걸요.”
“이게 다 너 때문이다! 네가 황상에게 그런 짓을 벌인 바람에 부정을 탄 게야! 성질이 왜 그 모양이냐!”
또 시작이구나, 소나기가 내려도 부덕한 황후의 탓이라고 하더니 이젠 하다하다…… 죽기 직전의 사람에게도 탓을 돌린다.
이령은 시어머니의 궤변에 눈살을 찌푸렸다. 무언가를 부탁하려고 온 게 틀림없는데도 비위에 거슬리는 소리를 해 대니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저를 찾아오신 연유가 무엇인지요?”
본론을 꺼내지 않고 쓸데없는 소리로 속을 긁는 시어머니가 얄미웠던 이령이 쌀쌀맞게 물었다. 그때야 아차 싶었던지 황태후가 목청을 가다듬으며 찾아온 이유를 말했다.
“황상이 구미호가 쏜 독을 맞고 쓰러졌다는구나. 꼭 광인처럼 미쳐 날뛰는데 진정을 시키려면 독기를 빼내는 수밖에 없다는 게야.”
“독기를 빼는 일이라면 태의가 해야 할 텐데요. 신첩은 의술을 배운 적이 없사옵니다.”
“방사뿐이란다.”
방사?
이령은 피식 웃었다. 하도 어이가 없다 보니까 실성한 것처럼 입꼬리가 씰룩거려 곤란했다. 그녀는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러자 황태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꼬시냐? 그래서 웃는 게야!”
“폐하께 승은을 입고 싶어서 환장하는 궁녀들이 몇인 줄 아셔요? 그 중에서 고르시면 될 텐데요. 아니면 스스로 빼내셔도…….”
“그게 가능할 것 같았으면 이렇게 왔을까!”
“신첩이 폐하께 해를 끼치면요?”
“네 친정이 무사할 듯싶으냐? 어차피 너는 죽을 목숨이니까 황상을 구한 후에 죽어라.”
황태후의 얄팍한 수가 읽혔던 만큼 이령의 낯빛은 한 겨울에 내린 서리를 맞아 얼어붙은 바위처럼 싸늘했다.
“……회임이라도 하면요?”
“회임은 걱정하지 마라. 그런 비극은 생기지 않을 테니.”
비극이라니.
대놓고 염장을 질러 댔지만 상대가 황태후인 이상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 쏘아붙일 수 없었다.
게다가 살려 주겠다는 소리를 하지 않는 걸 보니 제 입에 꼭 맞는 며느릿감을 점찍어 놓은 게 틀림없었다.
예전부터 제 아들을 빼앗겼다는 식으로 눈치를 주곤 했었다. 선황제와 사이가 안 좋았던 걸 생각하면 당연한 반응일 수도 있었지만 대놓고 죽길 바라니 기가 막혔다.
“합궁만 하면 폐하께서 정상으로 돌아오실 수 있나요?”
“그래, 황상의 독을 네 몸으로 옮기는 게야. 오늘 마셔야 했던 독약을 천천히 마신다고 생각하렴.”
황태후의 설명을 듣고 서야 사사가 지연되었다는 뜻을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신첩이 거절하면요?”
“말했을 텐데? 네 친정이 무사하지 않을 거라고.”
황태후는 이령의 기를 납작하게 눌러줄 만큼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령은 입술을 깨물었다. 사사건건 친정을 물고 늘어지는 태도에 질려 버렸다.
“오늘 죽으나 몇 달 후에 죽으나…… 죽는 건 매한가지인데 좋은 일 하나는 하고 가렴.”
좋은 일을 하면서 죽으라니.
내겐 좋은 게 하나도 없는데…….
이령은 넋이 나간 낯빛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그러자 황태후가 가까이 다가와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은 손을 잡았다. 황태후의 눈썹이 둥글게 치켜 올라갔다.
“아가.”
황태후가 입술을 뗐다. 그녀의 음성은 음산할 만큼 나직했다. 꿍꿍이속이 있을 때마다 나오는 기운까지 더해지니 등골이 서늘했다.
“친정을 지켜야지.”
황태후답다.
손가락마디를 아프게 쥔 시어머니는 늘 이런 식으로 압박했었다. 이번에도 이령은 황태후가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친정을 지켜야 하니까.
“……예, 하겠습니다.”
“고맙다, 아가.”
고맙긴.
지금까지 협박했으면서.
이령은 제 아들만 생각하는 황태후를 빤히 쳐다보다가 물었다.
“폐하께서 좋아하실지요. 독 때문이라도 해도…… 폐하는 제가 끔찍하다고 하셨어요.”
“황상에겐 내가 잘 설명할 테니까 염려 마라.”
“제가 죽는다는 것도 말씀하실 건가요?”
“긁어서 부스럼을 낼 필요 있겠느냐? 어차피 죽을 거 조용히 죽어 다오.”
이령은 숨을 들이켰다. 역시 황태후답다. 똑 소리가 날 만큼 계산이 빨라 득이 될 것 같지 않은 것엔 자비심을 베풀지 않았다.
이령이 죽는 날을 받아 놓았다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아는 황태후에겐 그녀는 한 번 쓰고 버려지는 수단에 불과했다.
“황상을 개화궁으로 모시라고 하였으니 몸단장을 해야겠지?”
“개화궁으로 모신다니요?”
“개화궁은 황궁에서 떨어진 곳이 아니더냐? 황상께서 변을 당한 걸 아는 이는 극소수니라.”
황태후의 시선이 황후전의 여관 금란에게 향했다. 이령의 처지가 가엾고 애달파 조용히 눈물만 흘리던 금란이 서둘러 눈가의 물기를 닦았다. 황태후가 금란의 주책을 질타하듯이 노려보다 입술을 뗐다.
“금란.”
“예, 황태후마마.”
“냉궁을 단장시켜라.”
“내, 냉궁이요?”
금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제 아들을 살려 주겠다는 며느리를 대놓고 멸시하는 바람에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개화궁의 궁호(宮號:궁궐 이름)로 불러도 될 걸 어쩜 저렇게 야박한지.
금란이 얼굴을 붉히자 속내를 읽은 듯 황태후가 인상을 썼다.
“주인이 봉작을 유지했을 때나 궁호(宮號)를 붙여서 부르는 게지! 황상의 용안에 상처를 입혀 폐위된 죄인에게 어찌 궁호를 붙여! 죄를 지은 황후나 후궁들은 모두 냉궁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하니 냉궁으로 부르는 게 합당하다!”
황태후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호통치는 바람에 금란은 겁을 집어먹었다. 그녀는 냉큼 잘못을 빌었다.
“소인이 아둔하였습니다. 용서해 주시옵소서.”
“주인을 닮아 생각이 짧은 걸 누굴 탓하겠느냐.”
황태후는 콧바람을 내쉬곤 이령에게 눈을 흘겼다.
“황상과 합방을 하게 됐다고 황후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헛된 꿈이고 바람이야. 너만 힘들어져.”
“……예.”
“금란은 어서 냉궁을 씻겨라.”
황태후의 명령에 금란은 이령을 데리고 목욕간으로 향했다. 독약을 한번에 마시고 죽으나 매일매일 조금씩 체내에 쌓나 죽는 건 매한가지.
금란은 훌쩍거렸다. 넋을 놓은 듯 무덤덤하게 걸어가는 이령에게 미안할 정도로 눈물이 났지만 멈출 수도 없었다.
“울지 마…….”
“마마…….”
“그런 거지…… 다 그런 거야.”
무엇이 그런 거냐고 소리쳐 묻고 싶을 만큼 가슴이 답답했던 금란은 어금니만 깨물었다.
“호상 중의 호상이 무언지 아느냐?”
금란이 울음을 그치지 못하자 이령이 물었다.
“평온하게 잠들었다가 가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복상사란다.”
“복, 복상사요? 그건 사내가 여인의 배 위에서 죽는 건데 마마와는 상관이 없잖아요.”
금란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가끔씩 엉뚱한 소리를 해 기가 막히게 하는 면이 있었지만 복상사는 정말 의외였다.
긍정적이라고 해야 하는 거야? 자포자기라고 해야 하는 거야?
금란은 이령을 떨떠름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어이가 없으니까 눈물도 순식간에 말라붙었다. 이령은 의도한 대로 금란이 울음을 그쳐 히죽 웃었다.
“나는 반대가 되는 게지. 그런데 여인은 왜 사내의 위에서 복상사했다는 표현이 없을까?”
“마마……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그런 농담을 하세요……. 부둥켜안고 대성통곡을 해도 모자랄 판에 복상사라니요? 소인…… 솔직히…… 충격으로 인해 정신이 어떻게 된 게 아닐까 의심스러워요.”
“운다고 달라지면 펑펑 울었지.”
“마마…….”
“빈손이구나. 갈아입을 옷이 없으니 준비해 다오.”
금란은 제 손을 응시했다. 저도 정신이 없었던 탓에 멍한 모양이다. 갈아입을 옷을 챙기는 건 물론 목욕 도구를 챙기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죄송해요, 마마께서 말씀해 주시기 전까지 생각을 아예 못 하고 있었지 뭐예요?”
“너도 경황이 없었던 게지.”
“……금방 챙겨 오겠습니다.”
금란은 서둘러 목욕간을 나갔다. 이령은 몸에 주었던 힘을 풀었다. 이제야 혼자가 됐다. 마음 놓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공간이 생기자 설움이 북받쳤다.
그녀는 욕조까지 터덜터덜 걸었다.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9살에 황태자비가 되었고 황후라는 높은 위치에게 오른 이상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웃전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았다.
황태후에겐 우는 모습을 종종 보여야 노여움을 풀거나 시집살이를 덜 시켰기 때문에 약한 모습을 드러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잃게 된 이상 함부로 감정을 드러낼 수 없었다. 동정을 사는 건 황후로서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무엇보다 저로 인해 금란이 가슴 아파하는 건 못 보겠다.
이제야 숨을 돌릴 여유가 생기자 제일 먼저 한숨이 터졌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구나.”
부글부글 끓어오른 분노만큼 슬픔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다. 중심을 잃은 그녀는 몸을 휘청거렸다. 욕조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그녀는 시선을 떨어트렸다. 나무 욕조에 물이 고여 있었다.
똑.
눈물이 물 위에 떨어져 파문이 일었다.
똑…….
다시 한 방울의 눈물이 떨어졌다. 두 손으로 입술을 꽉 막은 그녀는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친 슬픔감과 절망감을 주체할 수 없었다.
금란의 앞에선 태연한 척 농을 던졌지만 여러모로 두려웠다. 자신을 내친 지아비를 살리고자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과 살 정이 다시 통한다고 해도 살아날 희망이 없다는 게 그 어떠한 공포보다 살벌하고 두려웠다.
“천천히 죽으라니…… 참으로 잔악하구나.”
이령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금니를 꽉 물고 있었더니 잇몸이 욱신거렸다. 통증을 느끼는 곳이 잇몸뿐이겠나.
심장통 역시 가라앉지 않았다. 언제 닥칠지 모를 죽음을 대비해 매일매일 밤마다 마음을 비우며 지냈다.
독약 사발을 들어 올릴 때도 올 것이 왔구나, 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서서히…….
고통 속에서 죽게 생긴 것과 잠자리를 해야 한다는 처지가 처연하기 그지없었다.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 내던 이령이 움찔 놀랐다.
밖에서 기척이 들렸다. 갈아입을 옷을 챙긴 금란이 뛰어오는 소리였다. 그녀는 얼굴을 뒤덮었던 눈물을 말끔하게 닦았다. 눈가가 붉긴 해도 세안을 하고 나면 금방 가라앉을 터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그리고 목욕간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금란을 평소처럼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