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6 (26/27)

Hidden track 3. 이것은 팬픽입니다.

“형….”

PC 앞에 앉아서 곡 작업을 하는 와중에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기운이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잔뜩 놀란 민찬이 홱 돌아보며 소리쳐 물었다.

“왜 그래!”

준희는 말없이 하얀 스틱을 내밀었다.

“응?”

민찬은 이게 뭔가… 하고 들여다보았다. 스틱 가운데에 홈이 파여 있고 거기에 보라색 줄 두 개가 그려져 있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숙맥도 아니고, 이게 뭔지 모르지는 않았다. 근데 ‘두 줄’이 의미하는 바가 좀 헷갈렸다.

“두 줄… 이면….”

흐음. 하고 한숨을 쉰 준희가 또박또박한 소리로 대답했다.

“임신.”

“아… 그렇….”

“지울까?”

“어?”

“지울게.”

“어어?”

“형 지금 갈등했잖아. 백 프로 반기는 것 아니면 낳고 싶지 않아.”

민찬은 벌떡 일어서며 고함을 쳤다.

“야! 너는 무슨 말을 그렇게 쉽게!”

“누가 쉽대. 나도 지금 당황스러워. 그러니까 나한테 소리 지르지 마.”

말로는 야무지고 똘똘하게 받아치고 있지만, 준희의 눈가는 점차 붉어지고 있었다. 이어서 초록색 눈동자가 매끈하게 젖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눈가로 빠르게 차오르는 눈물을 보게 된 민찬의 눈이 커지고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민찬은 한발 성큼 다가가 준희를 덥석 끌어안았다.

“미안해. 내가 미안해. 나 너랑 아이 갖고 싶어. 늘 꿈꿨던 미래야. 단지, 너무 빨라서, 그래서 좀 당황했어. 그것뿐이야. 절대로 아이 지울 생각 없어. 낳자, 준희야. 같이 키우자. 사랑해. 사랑해 준희야.”

그제야 준희는 꾹 참고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민찬의 품에 안겨 엉엉 울면서 따졌다.

“바로 좋아하지 않았잖아아아-”

“안 좋아한 것 아니야. 잠깐 당황해서 그랬어. 미안해.”

“갈등했잖아아아-”

“아니야. 갈등한 거 아니야. 진짜 아니야. 미안해 준희야. 용서해 줘. 용서해 줘….”

민찬은 준희의 머리통을 끌어안고 쓰다듬으면서 반복하여 용서를 구했다.

“미안해…. 용서해 줘…. 사랑해 준희야…. 사랑해….”

*

그날 민찬이 말한 ‘미안해’와 ‘사랑해’와 ‘용서해 줘’는 도합 삼백 번 이상은 되었을 듯했다.

진정을 좀 한 후에 돌이켜 생각해 보니 적잖이 미안했던 준희가 “형 입 아프겠다. 미안해….” 하고 사과를 했다. 사과의 말을 듣고, 준희가 이제 자신을 용서한 모양이라고 생각한 민찬은 안도의 한숨을 쉰 후에 씩, 웃었다. 그러고는 옆에 앉혀 놓은 준희의 배를 조심조심 쓰다듬으며 물었다.

“여기에 애기가 있다고? 이렇게 납작한데?”

“지금은 애기는 아니고, 아직은 알이지 뭐.”

“음, 한 명인가? 토끼는 한 번에 여러 마리 낳지 않아?”

“…….”

“미안.”

준희가 몹시 노려봤기 때문에 민찬은 또 사과를 해야 했다. 그리고 이내 또 풀썩 웃으며 말했다.

“진짜 신기하다. 내가 아빠라고? 하하하?”

“어. 나도 형이 아빠라는 게 신기해.”

“뭐야, 인마?”

이번엔 민찬이 준희를 조금도 안 따갑게 흘겨보았다. 흘겨보다가 말고 또 좋아서 씩 웃으며 똑같은 소리를 중얼거렸다.

“내가 아빠라니.”

그러거나 말거나, 눈을 깜박깜박하며 생각해 보던 준희가 말했다.

“난리 나겠지?”

“응? 뭐가?”

“…….”

준희의 배 위에 시선을 두고 계속해서 만지작대면서 ‘내가 아빠라니.’ 그 생각만 무한 반복하고 있었던 민찬은 침묵 속에서 한기를 느끼고 올려다보았다가, 또다시 잔뜩 노려보는 눈을 마주하고 흠칫 놀랐다.

와. 우리 준희가 오늘따라 예민한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얼른, 준희가 한 질문 ‘난리 나겠지?’에 대한 답변을 정리했다. 아마도 임신 발표를 했을 때 팬들이나 언론의 반응을 물어본 것이었으리라.

“응. 그렇겠지. 근데 난리 나거나 말거나. 너랑 나랑 우리 아기만 행복하면 돼. 우리 집 앞에 수영장 팔까?”

“수… 영장….”

준희는 ‘수영장’이라는 단어가 실린 한숨을 아주 아주 커다랗게 쉬었다.

‘준희 임신했어.’

전화로 다짜고짜 준희의 임신 소식을 알린 통에 장범수의 턱이 빠질 뻔하게 만든 여민찬은, 실로 오랜만에 말문이 막혀 어버버거리고 있는 장범수에게 잔뜩 목소리를 낮추고서 협박의 소리를 으르렁거렸다.

‘우리 준희 지금 예민하니까, 어쩌다 그랬느냐 왜 그랬느냐 어쩌려고 그러느냐, 뭐 그딴 잔소리 따위 하지 말고, 무조건 축하해 줘. 그렇게 해 줄 것 아니면 오지 마.’

어이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 와 볼 수 없었던 범수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을 한 후, 배재민을 대동하고 곧장 달려왔다.

장범수는 준희에게 꽃다발을 건넸다. 아기 아빠는 난데 왜 형이 꽃을 주냐고 투덜거리고 있는 녀석 따위 무시해버리고, 준희를 향해 애써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추, 축하해?”

말을 더듬고 말았다.

제 손안에 들어온 꽃다발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준희가 꽃다발을 향해 중얼거렸다.

“미안해.”

아기 아빠 여민찬을 비롯한 세 명의 형들은 화들짝 놀랐고 앞다투어 외쳤다.

“얌마! 네가 뭐가 미안한데!”

“미안하긴 뭐가!”

“왜 미안해 네가!”

셋이서 동시에 소리를 지르니 참 시끄러웠다. 덩치에 안 어울리게들 호들갑을 떨고 있는 남자들 사이에서 조용히 말이 없던 준희가 여전히 꽃다발을 향해서 미안한 이유를 말했다.

“나 때문에… 블랙웨일즈 활동 접어야 하잖아….”

그랬다. 임신 초반엔 안정이 필요할 테고, 중반부턴 배가 나오기 시작할 터이니 활동은 접어야 했다. 민찬도 그 부분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걸 준희가 미안해해서는 안 되었다. 아기를 혼자 만든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런 말을 하려고 입을 벌리는데 장범수가 빨랐다.

“미안할 거면 콘돔 사이즈도 제대로 못 맞추는 상멍충이 자식이 미안해해야지. 네가 왜 미안해.”

“아. 찢어진 거야?”

장범수의 이야기를 듣던 배재민이 눈치 없이 물었다. 여민찬이 그런 배재민을 흘겼다.

“그런 거 아니거든.”

콘돔 안 쓰고 섹스한 날, 나름대로는 체외사정을 한다고 했는데 실패한 모양이었다. 형들이 피임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있는 동안 여전히 꽃다발만 바라보고 있는 준희가 또 중얼거렸다.

“객원 보컬을 쓰면….”

그런데 그 중얼거림이 꽤나 기가 찬 소리인지라 형들은 또다시 입을 쫙, 벌렸다가 동시에 떠들었다.

“말이 되냐, 인마!”

“네가 노래 안 하면 이미 블랙웨일즈가 아니지!”

“그건 말도 안 돼!”

무대 위에만 서면 카리스마가 폭발하는 덩치들이 거참 수다스럽게 떠들어대는 동안에도 준희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러다 장범수가 말했다.

“일단 우리 앉자. 준희 오래 서 있으면 안 돼.”

그러고 보니 현관 앞에 아옹다옹 모여 서서 이러고들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에 흡! 하고 놀란 민찬이 준희의 어깨를 양손으로 잡고 조심조심 끌었다.

*

네 사람은 식탁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았다. 장범수가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녀석을 타일렀다.

“일단 준희야. 내가 아까 콘돔 어쩌고 하면서 여민찬에게 뭐라 하긴 했지만, 사실 아기가 생긴 건 절대로 미안해할 일이 아니야.”

“어. 맞아.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 사이에 생긴 아기는 하느님이 보내 주신 선물, 인생의 축복 같은 거지.”

배재민의 오글거리는 소리에 장범수와 여민찬이 흠, 흐음, 헛기침을 했다. 여민찬이 눈빛으로 배재민을 면박 주는 동안 장범수가 다시 나섰다.

“블랙웨일즈 활동이 걱정돼서 그러는 거면, 태교한다고 생각하면서 싱글 음반 정도 주기적으로 내고, 틈틈이 온라인으로 팬들하고 소통하면 돼.”

“그래. 그러면 되겠네.”

민찬이 얼른 맞장구를 쳤지만 준희의 얼굴은 밝아지지 않았다. 일부러 활짝 펴고 있었던 민찬의 얼굴도 함께 흐려졌다. 흐음, 하고 고민해 보던 재민이 물었다.

“준희야. 혹시 너, 아기 생긴 게 싫은 거야?”

다른 두 사람이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있었던 질문을 배재민은 참 쉽게도 했다. 범수와 민찬은, 참 대-단하다, 라는 약간의 비꼼이 담긴 눈빛으로 배재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걱정스레 준희를 보았다. 만약 재민의 말대로, 한참 활발하게 활동해야 할 시기에 아기가 생긴 것이 싫어서 이러는 거라면, 그 위로의 내용이 달라져야 할 터였다. 특히 민찬은 잔뜩 긴장한 채로 준희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싫지 않아.”

자신도 모르게 숨까지 참고 있었던 민찬이 하아.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행이다….” 라고 했다. 준희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나 말고는, 아무도 아기를 반기지 않을 것 같아서, 그게 싫어.”

민찬이 황당한 얼굴로 따졌다.

“야. 나 지금, 다행이다, 라고 했거든?”

“들었어. 근데 형 연기 잘하잖아.”

“야잇! 그런 걸 뭐 하러 연기를 하냐!”

눈가가 뾰족해진 준희가 양손으로 제 배를 감싸 안으며 민찬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소리 지르지 말라고. 아기 들어.”

“뭐? 네가 아직 알이라며!”

“그랬는데, 좀 전에 귀 생겼어.”

“뭐야?”

아주 그냥 정색을 하고 개뻥, 아니 토끼 뻥을 치고 있는 녀석과 황당해하는 녀석을 번갈아 보던 범수와 재민은 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느라 한결 부드러워진 분위기 속에서 범수가 다시 말했다.

“준희야 축하해? 조카가 생겨서, 진심으로 기쁘다, 나는.”

이런 분위기를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도 좋아하는 재민이가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준희의 배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며 인사했다.

“아기야. 안녕? 나는-”

“야이, 씨. 그런 거 하지 마.”

민찬이 정색을 하며 준희의 배를 가렸다. 이제 막 귀가 생겼다는 아기가 오그라들어 버릴까 봐 걱정이 되었다.

일단, 팬들과 언론에 준희의 임신 사실을 알려야 했다. 더불어 그간 형 동생 사이라고 일축해 왔던 여민찬과 제준희의 실제 관계를 밝히고 결혼 발표도 해야 했다. 그리고 블랙웨일즈 활동의 잠정적 중단과 향후 활동 계획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전해야 했다.

각계 언론과 팬들이 한바탕 뒤집어질 것이 분명한 중차대한 발표가 하나도 아니고 두 개, 아니 세 개였다. 이런 중요한 발표를 글로 써서 올리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판단한 장범수는 기자회견을 열기로 했다.

대부분의 스케줄을 취소한 블랙웨일즈는 ‘잠정적 활동 중단’을 발표하고, 그 이유에 대한 기자회견을 열겠다고 공지를 올렸다. 이유를 기자회견에서 밝히겠다고 했으나, ‘아, 그럼 기다려보겠습니다?’ 하고 말 사안이 아니었던지라, 그 이유를 추측하는 글들과 멤버들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글들이, 활동 중단 관련 기사의 댓글 창과 각종 커뮤니티에 도배가 되다시피 했다.

그리고 기자회견 당일.

회견장으로 가기 전 샵에 들를 생각으로, 민찬과 준희는 기자회겨 시간까지 넉넉하게 여유를 두고 집을 나섰다.

라포드 삼정의 빨간색 스포츠 세단을 몰고 청담동에 위치한 단골 샵으로 가는 중에 민찬이 물었다.

“너는 여자면 좋겠어, 아니면 남자면 좋겠어?”

평일 낮 시간이라 막히는 것도 없이 뻥 뚫린 도로 위를 달리고 있는 차 안은 고요했다. 평소와 달리 시끄러운 음악을 틀지 않았기 때문에 한결 더 고요했다. 금세 버릇이 들어 배를 만지작만지작하던 준희가 “음….” 하고 고민해 보더니 대답했다.

“형 닮은 여자애.”

“뭐야? 여자애면 너를 닮아야지, 하필 왜 날 닮냐?”

“형 닮아서 키 크고 좀 사납게 생긴 여자, 멋있을 것 같아.”

“아. 너 우리 고모 같은 타입 좋아하는구나?”

“참, 나. 뭐래.”

준희가 코웃음을 치는데 따라 웃던 민찬의 얼굴이 돌연 상기되었다.

“와. 준희야. 나 너 닮은 여자 아기 상상해봤는데. 진짜 사랑스러워.”

“아 싫다니까. 그런 여자애들은 흔하잖아.”

“흔하다고? 너 ‘흔하다’라는 말의 뜻을 잘 모르는 것 같다?”

민찬은 진심으로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준희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몰라, 몰라. 어쨌든 나는 형 닮는 게 좋아.”

“참나.”

자신을 닮은 여자라니, 자꾸 고모가 생각나서 별로였던 민찬이 잠시 뚱해졌던 얼굴을 다시 활짝 펴고 물었다.

“태명 뭘로 할까?”

그렇게 물어 놓고, 좌회전 신호를 켜고 좌회전 대기 선에 정차한 민찬이 준희 쪽을 아예 돌아보고는 대답을 기다렸다.

준희는 배를 쓰다듬다가 대답했다.

“찬희?”

“어. 촌스러운데.”

“그럼 뭘로 해? 형은 생각한 거 있어?”

“음…. 제준희와 여민찬의 아기니까 러블리와 그레이트, 합쳐서 러그. 어때?”

“하.”

준희는 정색한 얼굴로 웃음소리를 뜻하는 의성어 한마디만 했을 뿐 대답이 없었다. 싫다는 의사를 명확히 하고 난 후, 더 이상 두말 안 하려던 준희는 결국 짜증을 터트리고 말았다.

“바닥에 깔 거야?”

“아?”

“러그라며!”

“아-”

그제야 러그의 본디 뜻이 생각난 민찬은 하하하! 하고 웃었다. 인상을 쓰고 있었던 준희도 결국에는 툭,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임신 소식에 예민해진 가운데에도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기특한 녀석의 머리를 헝클이고 쓰다듬은 민찬은, 좌회전 신호가 떨어진 것을 보고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그리고, 두 사람이 탄 차가 향하고 있는 사거리 좌측 도로의 반대편에서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덤프트럭이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남자가 사이드미러를 보았을 때에는 이미, 덤프트럭의 커다란 차체 앞면이 덮칠 듯이 다가와 있었다.

중환자실 앞 대기실에는 환자와의 면회를 기다리는 보호자들이 빼곡하게 앉아있었다.

대기실 중앙의 티브이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는데, 오늘 낮 청담사거리에서 있었던 사고에 대해 보도하고 있었다.

[오늘 낮 2시경, 블랙웨일즈의 멤버 여민찬 씨가 운전하는 차량이 신호를 무시하고 달려오던 4톤 트럭과 측면 추돌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블랙박스 영상 조회 결과 여민찬 씨는 좌회전 신호를 받고 출발한 것으로 확인되어, 덤프트럭 운전자의 졸음운전 등 과실 여부와 차량 자체 결함에 대해 조사 중입니다. 승용차 운전자인 여민찬 씨와 동승자인 제준희 씨는 현재 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 중입니다.]

그리고 대기실 옆 어두운 복도, 달리 의자도 없는 곳에는 한 남자가 주저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의 옆에는 체격이 몹시 우람하고 피부색이 어두운 남자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괜찮을 거야.”

블랙웨일즈의 드러머 배재민은, 지금 자신에게 누군가가 해 주었으면 하는 말을 건넸다. 건네 놓고 나니, 지금 이 상황이 무척이나 낯익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몇 해 전, 지금 제 옆에 주저앉아 넋을 놓고 있는 녀석이 손을 다쳤었고, 당시에 수술실 앞에, 지금 이 녀석과 비슷한 모양으로 넋을 놓고 있었던 녀석, 준희에게 방금 했던 말을 똑같이 했던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그때 자신이 했던 위로가 눈물샘을 건드렸고, 지금 저 안에 누워있는 녀석이 통곡을 했던 것 같았다.

배재민은 당장 통곡을 해도 이상하지 않은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민찬이 녀석은 접어 세운 무릎 위에 걸치고 있던 팔을 들더니 제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어깨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아. 이런….

배재민은 푸욱, 한숨을 쉬고는 흐느껴 우는 것이 분명한 녀석의 옆에 앉아 어깨를 툭툭 쳐 주었다.

*

장범수는 의식을 잃을 것만 같았다. 의식 없이 누워있는 녀석은 따로 있는데, 자신이 곧 의식을 잃을 것만 같았다. 그런 장범수의 콧구멍을 찌를 듯이 녹음기를 들이밀고 있는 기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소리치고 있었다.

“제준희 씨가 현재 뇌사 상태라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뇌사는 아닙니다. 정확한 상태는 확인이 되는 대로 답변을-”

“제준희 씨가 임신 중이라는 것이 사실입니까?”

“정확한 상태는 확인되는 대로-”

“제준희 씨가 임신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상대는 누구입니까! 여민찬 씨입니까!”

“확인되는 대로-”

“여민찬 씨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확인되는 대로 말씀 드리겠-”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뜻입니까!”

대답을 할 새도 없이 날아드는 질문에 앵무새같이 같은 말만 반복하는데 그마저도 끝맺지 못하던 장범수는 문득, 현기증을 느꼈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는 듯도 했기에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떴다. 혹시나 기대해 보았건만, 자신을 향해 고함치고 있는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꿈속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임신 및 결혼 발표와 대외 활동 중단 관련 기자회견을 4시간 앞두고, 경찰로부터 걸려 온 전화 내용이 도무지 현실적이지가 않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장범수는 이게 지금 꿈인가 생시인가,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병원 앞을 에워싸고 진을 친 기자들에게 둘러싸이기 전에, 장범수는 사고 처리 후 블랙박스를 수거해 간 강남경찰서에 방문해 영상을 확인해야 했다. 여민찬의 과실이 전혀 없으며 보험사 기준 100대 0이라는 것은 일단 다행이었다. 그건 다행인데,

‘너는 여자면 좋겠어, 아니면 남자면 좋겠어?’

‘형 닮은 여자애.’

‘와. 준희야. 나, 너 닮은 여자 아기 상상해봤는데. 진짜 사랑스러워.’

‘몰라, 몰라. 어쨌든 나는 형 닮는 게 좋아.’

‘태명 뭘로 할까?’

‘찬희?’

‘어. 촌스러운데.’

‘제준희와 여민찬의 아기니까 러블리와 그레이트, 합쳐서 러그. 어때?’

사고 직전에 나눈 대화 내용이 문제였다.

난감한 표정이 역력한 교통과의 경찰들은 자기들끼리만 눈빛을 주고받을 뿐, 장범수에게 대화 내용의 진위 여부에 대해 묻지도 않았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명명백백한 상황에서 따로 물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하아, 하고 한숨을 크게 쉰 장범수는 당시 자리에 있었던 세 명의 경찰들에게 부탁을 해야 했다.

‘죄송하지만, 당분간은 언론에 알리지 말아 주세요. 부탁합니다. 조만간 정식으로 발표하겠습니다.’

이후로 병원으로 넘어와 준희를 담당한 의사를 만나야 했다. 의사 옆에 또 다른 의사와 간호사까지 총 세 명이 함께 있었는데, 세 명 모두 표정이 좀, 이상했다.

‘일단… 활력징후도 정상이고…. 치명적인 외상도 없습니다. CT상에 내출혈 소견도 보이지 않아서, 쇼크로 인한 일시적 의식 소실이면 조만간 깨어나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도 일단 당분간은 중환자실에서 집중 관찰을 할 예정입니다. 이고요….’

하며 말을 끌던 의사가 한껏 낮춘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배 속에… 아기도…. 흠, 건강합니다.’

‘아.’

그제야 세 사람의 표정이 영 수상했던 이유를 알게 된 장범수는 또다시 한숨을 쉰 후에, 아까 경찰서에서 했던 말을 다시 되풀이해야 했다.

‘저, 죄송하지만, 당분간은 비밀로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조만간 정식으로 발표하겠습니다. 그때까지만요.’

그때 그 세 사람의 대답이 석연찮았던 이유를 장범수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병원 밖에 진을 친 기자들은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나온 장범수를 보자마자 ‘제준희 임신설’에 대한 진위를 묻기 시작했다. 이미 다 퍼진 모양이었다.

“아기 아빠는 여민찬 씨입니까! 아닙니까!”

“하아. 확인하는 대로, 답변 드리겠습니다.”

*

덤프트럭이 전속력으로 달려오긴 했지만 위험을 감지한 여민찬이 핸들을 틀었기 때문에 그나마 큰 사고를 막을 수 있었다. 덤프트럭을 스치고 중앙분리대를 들이받은 차량은, 앞 범퍼와 뒤쪽 문짝이 날아가긴 했지만 차량 내부는 온전했다. 그래서 운전자인 여민찬도, 조수석의 제준희도 외상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준희가 4시간째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여민찬은 지금, 사고 직후부터 앰뷸런스를 타고 종합병원 응급실로 온 이후로 의식을 잃은 준희가 중환자실로 옮겨지기까지의 과정이 제대로 생각나지 않았다. 사고가 났고 준희가 의식이 없다, 라는 것만 머릿속에 왕왕 울릴 뿐이었다. 그래서 믿어지지가 않았다.

“준희 잘못되면 어떡하지….”

앞머리를 쥐어뜯듯이 끌어 잡은 여민찬은 여태껏 수차례 했던 소리를 또 했다.

“괜찮을 거야….”

그래서 배재민은 수차례 했던 거짓 위로를 또 해야만 했다. 그러고 있는데, 중환자실에서 나온 의료진이 보호자 대기실을 향해 소리쳤다.

“제준희 씨 보호자 분!”

그 소리에 벌떡 고개를 치켜들고 용수철같이 튀어 오른 여민찬이 황급히 달려갔다.

“여기요!”

복도를 돌면서부터 소리를 지른 민찬은 흰색 가운을 입은 의료진의 앞에 섰다. 뒤따라 달려온 배재민도 여민찬의 뒤에 섰다. 너무 커다란 남자 두 명이 내려다보고 있고, 보호자 대기실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쏠린 가운데 조금 당황한 것이 분명한 의료진이 일단 제일 중요한 사실을 전했다.

“제준희 씨가 깨어나셨어요.”

그 말에, 다리에서 힘이 풀려버린 여민찬은 털썩 무릎을 꿇어버렸고, 재민은 아이고 인마, 하면서 얼른 민찬의 팔을 잡아 부축했다. 그리고 보호자 대기실에 있던 사람들이 다 함께 깨어났대, 깨어났대, 하며 웅성거렸다.

여민찬은 못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배재민이 물었다.

“준희 괜찮아요?”

“몇 가지 검사 중이긴 한데, 말도 잘하고, 의식도 명료하고, 전반적으로 괜찮으신 것 같아요.”

그 소리에, 흑! 하고 울음을 터트린 것은, 다리가 풀려 무릎을 꿇다 못해 이제는 아예 바닥을 부여잡고 엎드려 버린 남자였다.

*

중환자실과 병원 앞을 오가며 이쪽저쪽 상황을 확인하고 전하느라 바빴던 송여진으로부터 준희가 깨어났고,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겨졌다는 말을 전해 들은 장범수가 기자들을 뒤로하고 올라와 보았다. 정식으로 기자회견을 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뜨는 장범수를 따라 들어오려는 기자들은 강동수와 이우영, 그리고 병원의 경비 직원들이 막아서야 했다.

준희가 의식을 찾았고, 상태가 괜찮은 것 같다는 말을 전해 들은 장범수는 한고비 넘겼구나, 싶어 안도한 표정을 하고서 병실로 올라왔다. 그런데 준희의 침실을 둘러싸고 있을 줄 알았던 녀석들이 1인실 앞 복도에 모여 있는 것을 보고 밝아졌던 표정이 의아함에 굳어졌다.

“왜 나와 있어? 준희 만났어?”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여민찬이 아니라 배재민이 대답했다.

“…아직 못 봤어.”

“왜?”

이번에도, 어휴, 하고 땅이라도 꺼질법한 한숨을 내쉰 배재민이 입을 열었다. 영 입에 담기 힘든 말을 전했다.

“그… 준희가 약간 오락가락 하나 봐.”

“뭐어-?”

장범수의 얼굴이 심하게 구겨졌다.

“오락가락한다니? 헛소리를 한다는 거야?”

“우리도 자세한 얘긴 못 들었어. 지금 그쪽 분야 전문가라는 사람이랑 상담 중이라는데, 상황 정리되면 부르겠다고 일단은 여기 있으래.”

그런 대화들을 하고 있는데, 병실의 문이 스르륵 열렸다. 고개를 처든 여민찬이 내내 붙어있었던 벽에서 떨어져 나왔다. 병실에서 나온 한 무리의 의사들과 간호사들에게 황급히 물었다.

“어때요?”

한숨을 쉬는 의사들의 표정이 어찌나 어두운지, 덜컥 겁이 난 여민찬은 심장이 미친 듯이 발광을 하는 것을 느꼈다. 숨을 쉬기도 힘들었지만 다시 물어야 했다.

“왜, 왜요? 왜 그러시는데요?”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은 의사가 연민이 가득 담긴 눈빛을 보내며 대답했다.

“해리성 기억 상실입니다. 지난 3년간의 기억이 없어요.”

그야말로 사색이 된 남자는, 중환자실 앞에서와는 전혀 다른 이유로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려야 했다.

*

황당하다 못해 충격적이라서 그 자리의 모두가 기억 상실이라도 될 법한 어마어마한 소리를 건넨 의사는, 당장 들어가 보겠다고 문 앞으로 몰려드는 이들을 막아서고 말렸다. 기억에 없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떼로 들어가면 환자가 충격을 받을 것이라고. 그러면서 제준희가 연락을 부탁했다는 전화번호를 내밀었다. 자신의 담당 사회복지사라면서, 이분께 연락을 해 달라고 했단다.

데뷔 후 근 3년간 연락하지 않았던, 연락할 일이 없었던 인물의 난데없는 등판 덕분에, ‘기억 상실’이라는 현실성 없는 단어가 현실임을 알 수 있었다.

‘면회 금지’ 푯말이 붙은 병실 앞에 옹기종기 모여있었지만 달리 할 말이 없었던지라 모두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다 자유롭게 오가는 간호사만 붙잡고 어떠냐고 묻기를 몇 차례 반복하고 나니, 3년 전 준희의 담당 사회복지사였던 분이 달려와 주었다.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진 여자는 티브이에서만 보던 인물들을 보고 꾸벅꾸벅 인사를 하다가 물었다.

“준희가 많이 안 좋은… 가요?”

걱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묻고 있는 여자는, 뉴스를 통해 사고 소식을 듣고 걱정하던 중에 걸려 온 전화를 받고 그야말로 집에서나 입는 잠옷 차림으로 달려오는 길이었다.

그래도, 이 와중에 이런 분이 계셔 주셔서 정말 다행이다, 생각한 장범수가 대답했다.

“지난 3년간의 기억이 없대요. 연도도 틀리게 말하고 있고, 저희 멤버들이나, 지난 3년 함께 산, 저 녀석도 모른대요. 다행히도 사회복지사님 연락처를 외우고 있어서 밤늦게 전화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작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여자가 입을 틀어막았다. 불쌍하고 안타까운 나머지 왕왕 울어버릴 뻔한 것을 가까스로 삼키고 난 후 말했다.

“제가 들어가서 얘기해 볼게요.”

“부탁드립니다.”

*

2시간 같았던 20여 분 정도가 경과한 후, 홀로 들어갔던 사회복지사가 병실 문을 열고 나왔다. 침통한 표정이었다. 훌쩍, 코로 내려간 눈물을 들이켠 여자가 말했다.

“일단은, 가수로 데뷔했고 굉장히 많이 유명해졌다고, 말해 줬어요. 여기 계신 분들도 다 소개했구요. 근데, 많이 혼란스러운 모양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사회복지사는 또 눈물을 쏟았다.

잘 알고 지냈던 이가 자신들을 소개해 주었다고 하니, 이제는 들어가도 되는 건가 싶어 함께 나온 간호사를 보았다. 간호사는 여섯 개의 눈들이 다 함께 묻고 있는 간절한 청에 대한 대답을 해 주었다.

“만나 보시겠대요. 들어가 보세요.”

*

제일 먼저 앞장을 설 줄 알았던 여민찬은 그러지 못했다. 제 눈치를 보다가 먼저 병실로 들어가는 이들의 뒤를 따르던 여민찬은 결국, 병실 문간에서 멈춰 섰다. 그런 녀석의 팔을 배재민이 끌었다. 들어가자고.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녀석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아 잠시 주저했던 민찬은, 일단 병실 문을 넘어 들어가 침대에 앉아있는 녀석을 보자마자 앞장선 사람들을 헤치고 달려갔다.

다른 이들이 미처 말릴 새도 없이 침대 한가운데 앉은 녀석을 와락 끌어안고 통곡을 했다.

“미안해 준희야! 형이 미안해! 흐흑! 미안해 준희야아-”

“어, 저, 저기-”

준희는, 자신을 안고 통곡 중이긴 하지만 누군지 전혀 모르겠는 낯선 남자의 몸을 밀어내고 있었다. 장범수와 배재민이 정신없어 보이는 여민찬을 뜯어냈다.

“인마, 준희 당황했잖아.”

“민찬아, 좀, 진정해 봐.”

강동수와 이우영까지 함께 힘을 합쳐 겨우 뜯어낸 여민찬을 배재민이 뒤쪽으로 끌고 갔다. 여민찬은 “준희야! 준희야!” 하며 전쟁통에 생이별이라도 하는 양 울부짖었다.

“저…. 규리 누나…?”

준희가 허공을 두리번거리며 사회복지사를 찾았고, 뒤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던 여자가 “어! 나 여깄어!” 하며 앞으로 나아가 준희의 손을 잡았다.

“누나, 귀 좀….”

귀를 가까이 해 달라는 말에 원하는 대로 해 주는 여자의 귀에 대고 준희가 뭔가를 속삭였다. 여민찬이 시끄럽게 울부짖고 있어 정신없는 통에 모두의 관심이 그런 두 사람에게 쏠렸다.

귓속에 대고 하는 말에 대고, 응, 응, 하며 끄덕끄덕하던 여자가 난색이 짙어진 얼굴을 하고서 귀를 뗐다.

그리고 자신에게로 집중된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장범수에게 말했다.

“잠깐, 나가서 얘기 좀.”

뭔데 그러나 싶었던 사람들의 눈에 의구심이 떠올랐다. 오죽하면 여민찬도 준희를 부르짖던 것을 멈추고 쳐다보고 있었다.

사회복지사의 뜻에 따라 병실 밖으로 나갔던 장범수는, 잠시 후 잔뜩 곤란해진 얼굴로 들어왔다. 들어와서, 자신에게로 집중된 눈들을 죽 보다가 여민찬을 보고 한숨을 푹, 쉰 후 손짓을 했다. 나와 보라고.

대체 뭔데 저러나 싶어 궁금해 미치겠다는 얼굴로 따라붙는 눈들을 피해 밖으로 나간 두 사람은 병실에서 좀 떨어진 복도 끝까지 갔다.

병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린 후 장범수가 말했다.

“준희가.”

“어!”

빨리 말해 보라고 재촉하는 녀석을 보다가, 하아, 하고 또 한숨을 쉬며 곤란해하던 장범수가 말했다.

“며칠 전에 경찰서에서 만났던 성추행범 용의자랑 네 목소리가 비슷하다고 그런대.”

“뭐어?”

“준희 기억이 아마 그즈음으로 돌아갔나 봐. 너랑 경찰서에서 엮였던 그때.”

“뭐어어?”

잔뜩 일그러진 여민찬의 눈이 묻고 있었다. 왜 하필 그때냐고!

장범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도 지금 그게 궁금한 참이었다. 하고많은 날들 중에, 왜 하필이면 그때로 돌아갔는지.

*

사회복지사로부터 지난 3년간 함께했던 밴드의 리더라고 소개를 받은 장범수가 자신을 다시 소개했다.

“나는 장범수고, 흐음, 포지션은 베이스야.”

이런 날이 올 것이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모두의 눈이 슬픔에 젖어 들었다. 장범수가 물었다.

“얼굴, 가까이에서 볼래?”

“…….”

고민하는가 싶던 준희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싶지 않다고.

아, 그렇구나. 몹시 섭섭했지만 내색하지 않은 장범수가 배재민을 소개했다.

“이 녀석은, 배재민. 드러머야. 키가 190이고. 좀 크지?”

“안녕, 준희야. 나 너랑 되게 친했어.”

인사를 건네는 배재민이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이는 것이 오히려 더 슬펐다. 배재민은 밝은 목소리를 내려고 애를 쓰며 말을 이었다.

“너랑 나랑 얼마나 친했냐면, 우리 같이 홀딱 벗고 목욕도 했다?”

준희의 눈이 슬쩍 커지는 걸 본 장범수가 혹시 준희가 오해할지도 모를 소리를 얼른 정정했다.

“이 녀석이랑 단둘이 한 게 아니라, 너랑 나랑 얘랑, 여민찬까지 넷이 같이 놀러 가서 다 벗고 온천욕도 하고 그랬어.”

그리고 장범수는 강동수와 이우영과 송여진도 차례차례 소개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뒤쪽에 물러서 있었던 여민찬을 불렀다.

“이리 와 봐.”

침상에 병풍처럼 서있던 사람들이 자리를 비켜 주었고, 홍해처럼 갈라서 준 사람들 사이로 준희와 마주하게 된 민찬은 울음이 왈칵 터질 것만 같은 심정을 참아내고 힘이 풀린 다리를 옮겼다.

“이 녀석은 여민찬. 우리 팀의 기타리스트야. 그리고, 흐음, 네가 경찰서에서 성추행범으로 지목했던 녀석 맞아. 맞는데. 한 달 뒤에 실제 범인이 잡혔어. 그때, 큰일을 당할 뻔한 상황에서 너를 구해 주고 범인을 잡은 녀석이 바로 이 녀석이야.”

“…….”

준희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모양으로, 귀담아 이야기를 듣던 하얀 미간이 구깃 구겨졌을 뿐이었다.

“그렇게 친해져서, 이 녀석이 너를 밴드로 끌어들였고, 이후에 함께 데뷔해서 지난 3년간 국내는 물론이고 전 세계를 돌면서 순회공연을 했어.”

그런 말을 할 때, 치밀어 오르는 안타까움을 참아내지 못한 송여진이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내내 눈물을 찍고 있던 사회복지사의 울음도 고저가 격해졌고, 덩달아 이우영과 강동수까지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따라 울기 직전이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낸 장범수가 핸드폰을 꺼냈다.

“네 노래, 들어 볼래?”

“…….”

또다시 가만히 생각해 보던 준희는, 혹시 이번에도 거절인가, 싶어 울음을 참고 숨까지 참은 사람들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 보겠다고. 누군가가 크헝! 하는, 커다란 콧소리를 내며 울음을 삼켰다. 좀 웃긴 소리였지만 그 누구도 웃지 않았다.

장범수가 지난 3년간 꽤 길어진 ‘블랙웨일즈’란 제목의 플레이 리스트를 살피다가, 제일 위에 있는 ‘눈먼 고래의 노래’를 눌렀다.

모두가 아는 서정적인 기타 선율이 제법 큰 특실 안의 공간을 가득 채웠다. 말없이 가만히 들어 보던 준희는,

[아주 머언 바다 끝 태양이 내린 그곳에,]

자신의 목소리가 자명한 첫 소절이 흘러나오자, 적잖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준희의 얼굴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던 사람들은 준희의 표정 변화에 감격해 흐윽! 하고 또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여민찬은 주먹을 꽉 틀어쥐고서 준희를 보고 있었다. 장범수가, 제대로 숨도 못 쉬고 있는 녀석이 지금 간절히 묻고 싶을 것을 대신 물어봐 주었다.

“혹시 이 노래… 기억… 나니?”

“…….”

고개를 숙이고 제 발치에 시선을 둔 준희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맥이 풀려버린 여민찬이 비틀 하고 넘어가려는 것을, 뒤에 서있던 배재민이 몸으로 막아 버텨 주었다. 그러는 통에 겨우 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다.

좀 더 들어 보던 준희가 입을 열었다. 준희가 뭔가를 말하려고 하니까 모두가 또 울음과 숨을 멈추고 집중해 주는지라, 오늘따라 한결 더 구슬픈 노랫소리만이 맑고 고요하게 울리고 있는 가운데 준희가 물었다.

“이 기타… 친 사람이….”

여민찬은 당장 울 듯한 얼굴로 자신의 이름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고, 배재민이 그런 녀석의 팔을 잡아 꾹꾹 누르며 기운을 북돋워 주었다. 하지만 꽤 오래 기다렸는데도 다음에 이어져야 이름이 들려오지 않았다. 준희의 말 사이 간격이 너무 길어서 모두의 피를 말리고 있었다. 특히 배재민에게 의지해 가까스로 버티고 서 있는 녀석 하나는 이미 피가 싹 다 말라버린 모양으로 창백해져 있었다. 한 놈 더 쓰러지기 전에, 장범수가 대신 나서서 대답을 해야 했다.

“어. 맞아. 민찬이. 여, 민, 찬.”

범수는, 자신이나 여기 있는 다른 누구는 몰라보더라도, 한 녀석만큼은 기억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담아 이름 한자 한자에 힘을 실어 말해 주었다.

“네가 지금 당장은 성추행범으로 알고 있는 이 녀석이 직접 만든 곡이야. 그리고 가사는 네가 썼어.”

“내가…?”

“어. 네가. 이 노래 말고도, 너랑 민찬이랑 둘이 함께 만든 곡이 정말 많아.”

준희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무척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장범수는 잠시 고민하고 갈등했다.

시간을 줘야 하는 건가.

그러다, 한 가지 사실만큼은 알리는 것을 지체해선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시 한번 더 고민해 보다가, 말하기로 결정했다.

“네 배 속에 아이도, 민찬이 아이야.”

흐읍! 하고 놀라서 숨 들이켜는 소리가 컸다. 뒤쪽으로 물러나 있었던 사회복지사 규리였다. 얼른 돌아본 송여진이 눈짓으로 부탁했다. 놀란 내색하지 말아 달라고. 규리는 벌어진 입을 틀어막고 끄덕였다.

그리고 그즈음, 작게 흔들리던 준희의 눈동자가 멈춰있었다. 점차 커지는 눈과 같은 속도로 벌어지는 입이 무척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준희의 표정을 살피는 일곱 개의 얼굴들 위로 걱정과 염려가 쌓이고 있었다.

눈먼 고래의 노래가 클라이막스로 올라섰고, 노래 속의 준희가 혼신의 힘을 다해 노래하고 있었다. 노래 밖의 준희는 손에 잡힌 이불을 꼭 감아쥐고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움직였다.

“내가… 임신을…?”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중얼거리던 녀석이 불현듯 소리쳤다.

“규, 규리 누나! 규리 누나!”

허공을 향해 치뜬 눈 속 초록색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심히 놀라버린 민찬이 나섰다.

“준희야! 왜 그래! 왜 그- 읍!”

범수의 눈빛을 알아먹은 배재민이 민찬의 입을 막고 뒤로 끌고 갔다. 뒤에 물러서 있었던 규리가 다시 앞으로 나와 준희의 손을 잡았다.

“준희야! 나 여기 있어!”

규리의 손을 꼭 잡은 준희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혼, 혼자, 혼자 있고 싶어요.”

*

결국 모두 다 병실 밖으로 쫓겨났다.

배재민에게 팔이 엮여 연행되다시피 끌려 나온 여민찬은 복도 벽에 등을 털썩 기대고는 주르륵 주저앉아 버렸다. 다리는 물론이고 눈까지 흐리멍덩하게 풀려버린 모양새가 정신이 나간 듯해 보였기에, 장범수를 비롯한 모두가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러다 여민찬까지 잘못되는 거 아닌가 하고 말이다.

주저앉아 버린 녀석을 따라 같이 몸을 낮춘 재민이 그런 민찬의 어깨를 꼭 잡아 주며 말했다.

“마음 단단히 먹어. 어쨌든 준희한텐 너밖에 없잖아. 너까지 쓰러지면 안 돼.”

쥐어뜯을 듯이 제 눈을 감싸 쥔 남자의 입술이 괴로움에 일그러졌다.

*

그래도 사회복지사 김규리가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김규리는 준희가 진정이 될 때까지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그리고, 남에게 폐 끼치는 것 못 참는 준희는 규리에게 오늘 정말 고마웠다고, 당황했는데 생각나는 분이 없었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말하며 집으로 들어가라 했다. 한동안 실랑이를 하던 김규리는 고집불통 제준희의 뜻에 따르기로 하고 병실을 나섰다.

병실 문을 열고 나선 규리는 깜짝 놀라 멈춰 섰다. 아까 쫓겨났던 사람들이 모두 다 병실 복도에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로 2시간이 경과했고, 시계는 자정에 가까워졌는데 말이다. 자신에게로 몰려든 눈들을 보고 잠시 당황했던 규리가 말했다.

“준희가 혼자 있겠다고 고집을 부려요. 옛날부터 남한테 폐 끼치지 않으려고 그렇게 노력을 했었는데….”

그런 말을 하며 흐음, 하고 울음을 삼켰다. 범수가 말했다.

“집까지 차로 데려다드릴게요. 죄송하지만,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부탁드립니다.”

*

장범수의 부탁은, 어쨌든 보호자 한 명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상황이니까, 아까 소개했던 사람 중에 한 명이 함께 있을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흔쾌히 부탁에 응한 규리는 다시 병실로 들어갔다. 네가 한 명을 안 고를 경우 저 사람들 모두 밤새 복도에서 진을 칠 태세라는 말로 준희를 타일렀다. 한참 고민해 보던 준희는, 웃음이 묻어있는 말투가 따뜻했었고 또 가장 체격이 크고 튼튼해 보여서 가장 덜 미안할 것 같은 배재민을 골랐다.

잔뜩 곤란한 표정으로 병실에서 나온 김규리가 여민찬의 눈을 피하면서 준희의 뜻을 전했다.

“재민 씨가… 있었으면 한대요.”

그 말에 또다시 쇼크를 받은 여민찬이 눈을 감고 비틀거렸다. 아마도 그럴 것 같아 계속 옆에 딱 붙어 있었던 배재민은 놔두면 쓰러질 것 같은 녀석을 부축했다.

*

다 함께 뭉쳐 있는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판단한 장범수가 상황을 정리했다.

일단 여민찬에게, 어차피 함께 있어 줄 수도 없는 상황이니 집에 들어가라 했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혼이 나간 듯 보이는 녀석은 지금 다른 이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배재민이 장범수에게 눈짓을 했다. 그냥 두라고.

이어서 이우영과 강동수, 그리고 송여진에게라도 귀가하도록 당부한 장범수는 김규리를 집에 데려다줄 생각으로 제 차에 태우고 병원을 나섰다.

김규리가 살고 있는 우월동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장범수는, 준희가 자신들을 내보내 놓고 무슨 얘기를 했는지 물었다. 안타까움에 커다란 한숨을 쉰 규리가 준희의 심정과 마음 상태를 전했다.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도 충격인데, 그 상대가 민찬 씨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가 봐요. 준희는 지금… 민찬 씨에 대한 이미지랄까…, 감정이 썩 좋지가 않아요. 무섭… 다고 하더라구요.”

저런.

장범수는 뒷골이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냥 싫은 것도 아니고, 무섭다니. 최악의 경우였다. 차라리 기억이 없었으면 상황이 훨씬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왜 하필이면 그때의 기억은 남아있는 건가 싶어 짜증도 났다.

재능과 인기가 심하게 많아 동종업계 다른 이들에게 자격지심을 느끼게 했다는 것 말고는 살면서 별반 잘못한 것도 없어 보이는 녀석들한테, 대체 누가 이런 재밌지도 않은 짓궂은 장난질을 치고 있는지 화가 나는 것도 같았다. 신이라는 존재가 정말로 있다면, 그 신의 본성은 아마도 ‘악함’일 것 같았다.

무신론자인 장범수가 악마의 존재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을 때, 김규리가 물었다.

“민찬 씨 안 괜찮아 보이던데요….”

“괜찮을 리가 없죠.”

그렇게 대답한 범수는 하아, 커다란 한숨을 쉬며 핸들을 틀었다. 민찬이 녀석은 지금 괜찮지 않을 것이다. 괜찮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리 뾰족한 수도 없었다. 버티는 수밖에.

버텨라 인마.

장범수는 마음속으로 진심 어린 응원을 보냈다. 어쩐지 코끝이 시큰거렸다.

*

병실로 들어가 침상 곁에 앉은 재민은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해 잔뜩 미안해하고 있는 준희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다.

“와. 특실 진짜 좋다? 나도 한 번쯤은 병원에 입원해 보고 싶었거든. 근데 난 통 어디를 아파 본 적이 없어서, 하하하하하.”

안 어울리게 너스레를 떨고 있는 커다란 남자를 힐끔거리며 눈치를 좀 살피던 준희가 물었다.

“다… 갔어요?”

“음. 아니? 민찬이는 밖에, 복도에 있어. 집에 안 들어가겠대.”

“아….”

고개를 숙이고서 잔뜩 곤란하여 미간을 구기는 준희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살피던 재민이 흥, 하고 웃었다. 그리고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내가, 네 얘기 해 줄까?”

“제… 얘기요?”

“응. 너랑, 민찬이 얘기.”

맞잡은 제 손 위에 시선을 두고 곰곰이 생각해 보던 준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락에 신이 난 배재민이 팡! 하고 박수를 쳐서 준희를 화들짝 놀라게 한 후 커다랗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래! 좋아! 어디 보자….”

제 턱을 쓸면서 과거를 돌이켜 보던 재민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경찰서에서 성추행범으로 의심을 받았던 민찬이가, 며칠 후에 교회에 가게 되었어. 조명이 나갔다고 전기 수리 요청을 받은 거지. 근데 거기서 기똥차게 노래 잘 부르는 녀석을 본 거야. 그 녀석 말로는, 천사가 내려와서 노래하는 줄 알았대. 하하하하하!”

배재민이 호쾌하게 웃었고, 아직 이 커다란 웃음소리에 적응이 안 된 준희는 또 어깨를 움찔했다.

“아이구. 미안, 놀랐어?”

하고 사과를 한 배재민은 “괜찮아요.”라고 조그마한 소리로 대답하는 녀석의 안색을 살피다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때 당시에 우리 팀에 보컬이 없었거든? 노래하는 천사가 너무 탐났던 민찬이 녀석이 노래를 마치고 내려오는 너의 뒤를 졸졸 따라가서 밴드 같이하지 않겠냐고 물었던 거지. 어떻게 됐게?”

“음… 잘….”

“잔뜩 인상을 쓴 네가 팩! 하고 노려보면서, 계속 따라오면 곧장 경찰서로 갈 거라고 엄포를 놓았나 봐. 그래서 민찬이가 그냥 포기했냐. 아니지. 그랬으면 블랙웨일즈가 없지.”

사족이 좀 많은 이야기 스타일이었고 그래서 준희는 좀 감질이 났다. 군더더기 쳐내고 요점만 얘기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지만, 일단 토를 달지 않고 이야기를 들었다.

*

김규리를 데려다주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온 장범수는 복도 끝에 멈추어 서서 푸욱, 한숨을 쉬었다. 저-기 앞 맞은편 복도 끝,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는 녀석이, 원 세상에, 너무 처량 맞아 보였다. 어휴, 하고 혀를 찬 범수는 짠내가 진동을 하는 복도를 지나 여민찬이 앉아있는 준희의 병실 앞까지 걸어갔다.

“대기실에라도 가 있지, 인마.”

“…….”

“네가 이러고 있으면 간호사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냐.”

“…….”

“나 원 참.”

하며 못마땅하단 듯이 혀를 찬 범수는 민찬의 옆에 같은 모양으로 앉았다.

힐끔거리는 간호사들 눈치 같은 것도 안 보이는 판에, 다른 사람 살필 겨를이 없는 민찬은 범수에게 그만 들어가 보라든지 하는 그런 말도 하지 못했다. 몇 시간에 걸쳐 눈물을 쏟았으니 이제는 아예 텅 비어버린 눈으로 반대편 벽만 바라보고 있었다. 장범수는, 사랑하는 녀석이 자신을 잊어버렸다는 충격에 넋이 나가버린 녀석에게는 좀 많이 아플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는 꼭 해 줘야 하는 말을 꺼냈다.

“사라진 기억이라는 게, 갑자기 돌아오기도 하지만, 또… 영영 안 돌아 올 수도 있는 거거든.”

“…….”

“그렇다 해도 준희 배 속 아이의 아빠가 너라는 건 바뀌지 않는데, 준희랑 아기, 책임져야 할 것 아냐.”

“…….”

“넋 나간 사람처럼 그러고 있지 말고, 정신 챙기라고, 인마. 준희한테 다시 잘 보여야 할 것 아냐. 다시 잘 보이고, 다시 좋아하게 만들고, 다시, 흠, 사랑하면 되지.”

“…….”

배재민이나 할 법한 소리를 하느라 상당히 멋쩍었던 범수는 반대편 벽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러다, 아무런 대답이 없는 녀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아, 이런….

텅 비어있었던 녀석의 눈에 또다시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괴로운 듯 얼굴을 구기던 녀석은 흐윽! 하고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범수는 오늘따라 작고 왜소해 보이는 녀석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툭툭툭, 두들겨 주었다.

“힘내라, 인마….”

*

여민찬이 전직 경찰이었던 범인을 잡은 이야기, 이후로 함께 ‘눈먼 고래의 노래’를 만든 이야기, 범수 형이 운영하는 블루오션에서 공연을 하고, 다 함께 온양에 놀러 갔던 이야기, 데뷔를 앞두고 스카이미디어에 노래를 빼앗길 뻔했던 이야기, 스카이미디어가 보이콧 하는 바람에 활동이 힘들었던 이야기까지.

배재민은, 그러고 보니 거참 다사다난했구나, 생각하며 얘기를 계속했다.

활동이 힘든 시기에 스폰 제안이 왔었고 그 때문에 두 사람이 많이 싸웠던 이야기, 싸우다 말고 뽀뽀를 해버리고 놀라서 도망쳐 나온 녀석이 범수 형의 집으로 찾아왔었던 이야기도 했다. 그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는 계속 웃음이 터져서 참기가 힘들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둘러대고 나서 한고비 넘겼나? 했는데, 네가, ‘형이랑도 했어…?’ 하고 물어 오는 거야! 하하하! 그때 범수 형 표정이, 하하하! 진짜 웃겼어!”

그즈음 준희는 영 이상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귓가가 빨개진 채로 웃음을 참으려고 울상이 되어버린 얼굴이 되게 귀여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배재민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했다. 그날 여민찬이 얼마나 힘들어했는지를 이야기했다. 술도 센 녀석이 취하도록 마시고는 테이블에 이마를 처박은 이야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이 얘기 준희한테는 처음 하는 거 아닌가, 생각하면서, 민찬이 준희를 좋아해서 참 많이 힘들어했던 이야기는 좀 더 길고 자세하게 했다.

그러다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던 얇은 장벽이 와르르 무너졌던 사건도 이야기했다.

공연 중에 전직 경찰이 무대 위로 난입했고, 준희의 얼굴을 해치려고 날아들던 칼을 여민찬이 손으로 막아냈던 이야기를 했다. 당시에 앞에 있는 녀석이 무척 힘들어했었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하면서는 계속해서 눈치를 보고 또 안색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까, 그때 너도 민찬이 수술실 앞에서 울다가 쓰러질 뻔했었어. 지금 민찬이처럼 말이야.”

그 말을 해 놓고 잠시 침묵이 지나갔는데, 그 순간에 재민은 여전히 병실 밖에 있을 것이 분명한 녀석을 생각했다. 그리고 준희는 설마 아직도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했다.

이후로 배재민은 블랙웨일즈가 성장한 이야기를 했다. 강동수가 만든 다큐멘터리를 본 유명한 외국인 감독이 블랙웨일즈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고, 주제곡으로 들어갔던 ‘눈먼 고래의 노래’는 빌보드에 진출했다고. 그리고 그 해에 처음으로, 세계적인 음악 페스티벌에 헤드라이너로 섰었다고. 준희가 몹시 황당하다는 듯한 얼굴로 물어왔다.

“글래스톤베리에서… 노래를 했다구요…? 내가요…?”

“하하하하하! 글래스톤베리 뿐만 아니라, 우드스탁, 코첼라, 록앰링, 후지, 지산, 펜타포트 다 갔어 인마!”

준희의 얼굴 위로 ‘헐-’ 이라는 글자가 쓰였다. 그런 얼굴이었다. 그래서 배재민은 와하하하하! 하고 신나게 웃었다. 이제 커다란 웃음소리에 좀 적응이 된 준희는 따라 웃는 대신에, 영 못 믿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뻥인 것 같은데.”

뻥도 어느 정도껏 쳐야 받아들이는 시늉이라도 하지, 이건 뭐 스케일이 우주 대스타 급이니 준희는 믿어 보려는 노력조차 해 볼 수가 없었다.

“아 참. 중요한 얘기 안 했다.”

슬슬, 사실은 이 남자가 허언증이 심한 과대망상 환자였던 건 아닌가, 의심하게 되는지라 표정이 좋지 못한 준희가 뭔데요? 라고 묻는 듯한 얼굴로 뚱하게 쳐다보았다.

“너 원래 살던 집 있잖아. 불났다고 했던. 그 주택 3동 민찬이가 다 사들여서 단독주택 지었어. 네 생일선물로.”

“네에에?”

하고 놀라는 준희는 눈알이 튀어나오고 턱이 빠질 지경이었다. 그 얼굴이 상당히 웃겨서 배재민은 또 신나게 웃었다.

이건 진짜로 믿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 따라 웃을 기분이 아니었던 준희는 실제로 “헐-”하고 황당한 심정을 입 밖으로 내보였다.

“안 믿어지겠지만, 어쩌겠냐. 사실인걸. 퇴원해서 집에 가 보면 알 거야. 이 우주대환장개뻥 같은 소리가 다 사실이라는 것을. 하하하하하!”

아주아주 신나게 웃던 재민은 “아아- 미치겠다.” 하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입가에 건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생각이 많아 보이는 녀석의 표정을 관찰했다. 여전히 혼란스러워 보이는 가운데, 결이 다른 감정이 엿보이고 있었다. 누군가를 향한 미안함인 듯했다. 동정심인 듯도 하고. 하지만 지금 그 마음이 누굴 향한 건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배재민은 이 길고 긴 이야기의 끝에 꼭 해 주고 싶은 말을 건넸다.

“민찬이, 그런 녀석이야. 너밖에 몰라. 그러니까,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준희야.”

“…….”

고개를 돌리고 숙여 제 맞잡은 손만 물끄러미 보던 준희가 물었다.

“나도… 그 사람을… 그 정도로… 좋아했어요…?”

물론, 이라고 대답하려던 배재민은 대답을 잠시 미루고 고민해 보았다. 민찬이 자식이 준희를 심하게 좋아해서 머리 위에 이고 지고 다니면서 간이고 쓸개고 췌장이고 다 빼다 바친 것에 대한 증거와 그것을 방증할 수 있는 일화는 차고 넘쳤다. 그런데 준희가 민찬이 자식을 그 정도로 좋아했냐고 물어 온다면? 물론 곁에서 지켜본 결과 분명히 준희도 많이 좋아한 것이 분명한데, 그에 대한 확신은 하는데, 막상 마땅한 증거랍시고 내밀 만한 것이 충분치가 않았다.

그래서 재민은 대답하는 대신 핸드폰을 꺼냈다.

“우리 블랙웨일즈의 노래는 전부 다 민찬이가 만들고, 네가 가사를 썼어. 그중에 사랑 노래들은 네가 민찬이를 생각하며 쓴 거니까, 들어 보면 아마도 네 마음이 느껴지지 않을까 싶다.”

그런 말을 해 놓고 재민은 ‘사랑개’를 재생했다.

그리고 전주 첫 한마디 만에, 준희의 눈이 슬쩍 커졌다. 투 기타의 싱그러운 하모니를 듣자마자 몹시 설렜기 때문이었다. 가슴이 콩콩 뛰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신체 반응에 당황한 준희는, 노래가 참 좋네, 라고 억지로 일축하여 생각하면서 이런 노래를 만들었다는 남자를 생각해 보았다. 여전히 병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남자를 말이다. 그러자 콩콩 뛰던 가슴이 이번에는 먹먹하게 조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준희는 흐음, 하고 심호흡을 해야 했다. 그러는 사이에 이제, 전주가 끝나고 본 노래가 시작되었다.

[닿지 않는 하늘을 잡고 싶을 때엔 차라리 땅을 짚고 엎드려. 대지의 품 안에 안겨 있으면 아마도 따뜻할 거야. 보이지 않는 사랑에 닿고 싶을 때엔 있는 힘껏 앞발을 뻗어 볼 거야. 거기 있나요 날 보고 있나요, 부르고 또 불러 볼 거야.]

앞을 가로막은 커다란 장벽에도 굴하지 않고 한발 한발 나아가려는 의지가 엿보이는 가사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자신에게 가사를 쓰라고 한다면 아마도 이런 가사를 썼을 거라고, 준희는 그런 생각을 했다.

[마주 보면 바보가 돼. 말도 안 되는 헛소리가 말 되는 소리로 들려. 뒤집어진 시공간에 단 하나의 목소리만 들려.]

그리고 노래의 화자는, 좋아하는 이 앞에서 바보가 되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신기해하고 있었다. 멜로디와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보니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가사의 내용을 집중하여 듣던 준희는,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가사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껏 사랑을 해 본 적도 없는 자신인데, 어째서 이 가사가 이렇게나 절절하게 공감이 되는 건지,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눈을 감고 외쳐 봐, 있는 힘껏 짖어 봐.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마지막 소절의 가장 끝 한 음절까지도 행복한, 사랑으로 가득 찬 노래였다. 첫사랑으로 설레는 마음을 순수하게 고백하면서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용감하게 외치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준희는 지금, 자신이 잊어버렸다는 자기 자신에게 부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노래를 만들어 준 남자에게 자신도 사랑받고 싶다고, 자신도 이렇게 그를 사랑하고 싶다고, 노래를 듣는 동안 준희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게, 노래가 끝났다.

총 4분 12초의 노래를 끝까지 들은 준희는 아무 말이 없었다.

말없이 조용히 앉아있는 녀석의 눈치를 보던 재민은 다른 노래도 들려줄까 하며 플레이 리스트를 뒤적였다. 최근 곡인 ‘비가’랑 ‘땅거미’는 너무 슬프고, ‘온양야설’을 만들 당시에 두 사람 사이는 사랑보단 우정에 가까웠다. ‘뭐 인마?’ 는 싸우는 노래고.

흠. 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준희가 물어 왔다.

“그 사람… 아직도 밖에… 있어요?”

재민은 플레이 리스트를 뒤지던 손을 멈추고 시선을 들었다. 흔들림 없는 초록색 눈동자를 보고 깨달았다. 이 용감한 녀석은, 기억 속에선 지워졌지만 가슴 속에 온전히 자리한 자신의 반쪽을 마주할 마음의 준비가 되었구나, 하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씨익, 진하게 웃어준 재민이 대답했다.

“물론.”

*

병실 문을 열고 나온 재민은 복도 벽에 등을 기대고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을 보고 눈을 키웠다. 민찬이 녀석이 죽치고 있을 거라는 사실은 의심하지 않았는데, 범수 형까지 있을 줄은 몰랐다.

“어? 형도 있었어?”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닌지라 별반 대답을 하지 않은 두 사람이 몸을 일으켰다. 서둘러 일어선 여민찬이, 동작만큼이나 조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준희 괜찮아?”

“응. 뭐. 일단 몸은 건강해 보여.”

이 와중에 그건 그나마 다행이었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 녀석을 향해 환하게 웃어 준 재민이 말했다.

“준희가, 너 들어오래.”

“어?”

들어오라는데, 민찬은 어? 하고 되물었을 뿐, 잠시 미동을 하지 못했다. 만나 주겠다고 허락만 해 주면 날듯이 뛰어 들어갈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기다렸던 순간이 코앞에 닥치자 덜컥 겁이 난 것이다. 두려움이 서린 눈동자가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보던 재민이 어깨를 툭툭 쳐 주었다.

“민찬아. 저 안에 있는 사람, 준희야. 뭘 그렇게 겁내고 있어.”

*

‘흥분하지 말고, 질질 짜지 말고, 멍청한 소리 하지 말고! 매력 어필해! 파이팅!’

병실로 들어오기 직전에 장범수가 여민찬의 귀에 대고 속삭여 외친 말이었다.

그런데 어쩌나. 문을 열고 몸을 반쪽 밀어 넣으면서 침상에 동그마니 앉은 녀석이 제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민찬은 벌써 눈물이 핑 돌았다. 기척을 느낀 녀석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마주 보게 되었을 때에는 와락 달려가 끌어 안아버리고 싶었다. 안고 나면 아마도 통곡을 했을 것이고. 민찬은 지금 그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흥분하지 말고. 질질 짜지 말고.

범수의 조언을 되뇌며 눈물을 참아낸 민찬은 천천히 침상 곁으로 다가갔다. 침상에서 반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서서, 경계심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는 녀석에게 말했다.

“나는… 여, 민, 찬 이야. …서른한 살. 밴드에서… 기타…, 쳐.”

볼썽사납게 울먹여버릴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 내고 그렇게 자기소개를 했다.

준희는 하얀 미간에 한 줄 주름을 만들고서, 자기소개를 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사람 입장에서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저 바라만 보던 준희는, 고개를 돌리고 숙이더니 제 손을 보며 대답했다.

“이야기 들었는데… 기억… 안 나요.”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을 준희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이건 뭐, 완전 새로운 충격이었다. 새로운 충격이자 훨씬 더 강렬한 충격이었다. 심장이 뜨끔 하고 아팠던 민찬의 눈가가 구깃, 구겨졌다.

흥분하지 말고. 질질 짜지 말고.

또다시 범수의 조언을 반복해서 되뇌며, 당장 끌어안고서 펑펑 울어버리고 싶은 심정을 억눌렀다. 제 목소리가 괜찮길 바라며 물었다.

“앉아도… 돼?”

준희는 눈을 두어 번 깜박일 정도의 시간을 지체한 후 고개를 끄덕여 허락을 했다.

민찬이 의자에 앉고 난 후, 하얀색 시트 위로 잠시 침묵이 쌓였다. 천장 위에 공기청정기 팬 돌아가는 소리가 고요한 공간을 채워 주고 있었다. 준희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덩달아 민찬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의미 없이 허벅지 위에 널브러져 있는 제 손들만 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민찬은 계속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몸은 괜찮으냐고 물어볼까 했지만, 너무 식상한 소리인 것 같았다. 배는 어떠냐고 물어볼까도 생각해 봤지만, 아까 배 속의 아기 아빠가 자신이라는 말을 듣게 된 준희가 놀라서 발작하다시피 했던 일에 대한 충격이 채 가시지 않았다. 아기 얘기는 입도 벙긋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면 무슨 얘길 해야 할까. 흥분하지 말고, 질질 짜지 말고, 멍청한 소리 하지 말고. 매력 어필. 매력 어필. 매력 어필. 매력. 내 매력이 뭐더라. 팬들이 손이라고 한 거 같은데. 손을 어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그런 생각들을 하느라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데, 고요한 공기 속으로 작은 숨소리가 섞여 들었다.

민찬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즈음 함께 고개를 들고 천천히 돌린 준희와 민찬의 눈이 마주했다. 민찬은, 분명히 낯설지 않은데 어딘가 모르게 낯선 준희를 보았다. 그리고 준희는, 분명히 낯선 사람인데 이상하게 낯설지 않은 남자를 보았다.

그렇게,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서로를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다가, 언제나 그랬듯이, 준희가 먼저 용기를 냈다. 분홍색 입술을 움짓, 또 움찔해 보다가, 자꾸만 다물어지는 입술에 힘을 주어 톡 터트렸다.

“안녕하세요.”

꾸벅 숙였던 고개를 들면서 제 소개를 했다.

“…저는, 제준희입니다.”

그리고 그즈음, 사고 이후로 도무지 마를 새가 없었던 남자의 눈에 또다시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결국 차고 넘쳐버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눈물이 너무나 맑고 순수했던 나머지, 남자의 눈물을 미처 보지 못한 준희는 또다시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런 말로,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보이는 용감한 녀석을 보며, 민찬은 웃었다. 흠뻑 젖고 또 일그러진 얼굴로 웃던 민찬이, 울음을 꾹 삼키고 말했다.

“나도… 반가워.”

각각 지구 반대편에 다시 태어났다 해도, 지구 반을 걸어가 찾아내어 결국에는 사랑하겠노라 맹세한 녀석이었다. 그러니, 모든 걸 다 잊고 결국 자신까지 지워버렸다 해도 관계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결국에는 다시 사랑하고야 말 것이라고, 그런 다짐을 한 민찬은, 푹 젖은 얼굴로 애써 웃음을 지으며 다시 한번 더 인사를 건넸다.

“…반갑다, 준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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