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ck 3. L.I.M.F 04:33
제목의 뜻은 ‘Let me Introduce My Family’. 통통 튀는 가사와 절로 어깨가 들썩이는 뭄바톤 비트가 어우러진 신명 나는 곡이다. 브릿지 이후에 기타와 베이스, 그리고 드럼이 래그 타임 스타일의 연주를 하는 동안 “Ladies & Gentlemen-”으로 시작하는 능청맞은 랩이 재미를 선사한다. 그리고 매 공연마다 달라진다고 하는 각 세션별 독주가 무척 흥미진진하다.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비가’의 제작발표회 때 석호진은 여민찬에 대해 ‘소신 있는 모습이 멋진 천재 뮤지션’이라고 좋은 평을 했다. 하지만 ‘소신있다’라는 말이 영 아니꼽게 들렸던 여민찬은 그저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여민찬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대뜸 밝힌 석호진의 성적 지향에 대해 함구했다. 준희 앞에서는 십 원짜리보다 싸다고 평을 듣는 가벼운 입일지언정, 평상시에는 하등 관계없는 남의 일을 가지고 떠드는 타입이 아니었다. 여기저기에 떠들어 댈 정도로 관심이 가지도 않았고 말이다.
영화 ‘비가’는 제작에 들어갔고, 알아서들 써먹으라고 주제곡을 넘긴 블랙웨일즈는 북미 투어를 마치고 가졌던 짧은 휴식기를 접고 영국 투어 콘서트를 위해 출국했다. 맨체스터, 뉴캐슬, 레스터를 찍고 런던 해머스미스에서 3일간 이어지는 총 일주일간의 강행군이었다.
처음에 ‘Whale’s Song’이 UK 차트 순위권에 진입했을 당시, 대중음악평론가들은 블랙웨일즈가 빌보드에 입성했을 때보다 한층 더 흥분하여 떠들었다. 록밴드가 영국 차트에서 상위권에 오른 것은 빌보드 차트에 입성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건이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비틀즈, 퀸, 그리고 라디오헤드에 콜드플레이까지. 전설이라고 불리는 록밴드들의 모국이자 록의 본고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영국 본토의 록 음악 팬들은, 특히 타국의 록밴드에 대해 까다로운 잣대를 두고 평가를 하곤 했기 때문이다.
그런 영국에서도 블랙웨일즈가 통한 것을 두고 평론가들은 여러 가지 분석을 내놓았다. 특히, 비평을 위한 비평을 하는 것으로 유명한 평론가들은 블랙웨일즈의 음악 자체보다는, 잘생긴 외모, 보이 그룹 같은 이미지와 스타일, 그리고 흔히들 ‘예능감’이라고 부르는 엔터테이너로서의 재능이 먹혔을 것이라고 했다. 결국은 현지의 록 음악 팬들이 아니라, K-POP 팬들에 의해 순위에 올랐을 것이라는 분석이었다.
그런 분석을 내놓은 평론가들은, 블랙웨일즈의 여성 팬 비중이 월등히 높은 것과, 또 최근 ‘땅거미’ 뮤직비디오가 발표된 이후로 영미권에서의 인지도와 그 인기가 급격히 올라간 것을 거론했다. 그러면서 블랙웨일즈는 K-POP의 전세계적 인기몰이에 편승하여 떴을 뿐이라고 일침을 했다.
런던에서의 마지막 날 공연을 위해 로열 하먼 홀로 향하는 차 안에서, 야박하기로 유명한 평론가가 쓴 칼럼을 읽고 대화를 나누던 중 여민찬이 투덜거렸다.
“준희 잘생겼다는 말을 거참 어렵게도 하네.”
“이런 비평만 감내한다면야 뭐, 잘생겨서 손해 볼 건 전혀 없지.”
장범수도 여민찬과 같은 의견이었다. 외모 때문에 팬이 많은 거라고 암만 까 내려 봤자, 외모가 뒷받침이 안 돼서 팬이 적은 것보다는 한결 좋았다. 절대로 나쁘지 않았다. 그런 소신을 가지고 있는 장범수가 한소리를 더 덧붙였다.
“오로지 음악으로만 승부해서 아티스트로 인정받고 싶으면 준희가 머리 길러서 얼굴 반 가린 다음에 무대에 안경 쓰고 올라가면 돼.”
“싫어-”
장범수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이어진 준희의 불퉁한 대답 덕분에 한바탕 웃음이 지나갔다. 자존감이 하늘을 찌르는 녀석이 너무나 귀여웠던 민찬은, “으이구우-” 하면서 준희의 머리통을 끌어안아 뺨을 대고 부비적거렸다.
운전 중 백미러로 뒤쪽을 힐끔대고 있는 영국인 로드 매니저와 조수석에 탄 현지 코디네이터를 의식한 장범수가 미간을 와락 구기고서 여민찬을 노려보았다. 말없이 눈총으로 구박을 했다. 바가지 안 새게 조심하라고. 여기 지금 우리 식구만 있는 거 아니라고.
눈치가 없진 않아서, 어느새 10년 지기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참 성향 안 맞는 리더의 말 없는 잔소리를 제대로 알아 먹은 여민찬은 “쳇!” 하며 끌어안고 비비적거리던 녀석을 놓아 주었다.
블랙웨일즈는 제준희나 여민찬의 외모, 그리고 배재민과 장범수의 범접할 수 없는 캐릭터가 인기에 한몫을 했다는 분석에 대해 그다지 반박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냥 그러려니 하며 평론가들의 말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준희가 너무 잘생겨서 이런 말도 나오는 것 아니겠느냐고 하면서, 외모적인 부분과 엔터테이너적인 측면을 높게 평가해준 평론가들에게 오히려 감사하기로 했다.
멤버들과 블루오션 식구들이 그런 말들을 나누는 동안 해외 에이전시에서 준비해 준 스프린터 벤이 하이드 파크를 지나 공연장이 있는 광장으로 진입했다. 오늘은 6일간 이어진 영국 투어의 마지막 날이었다.
공연 시작 세 시간 전이었지만 로열 하먼 홀 주변을 빙 둘러선 사람들의 수가 무척 많았다. 리허설을 위해 일찍 올 것이 분명한 블랙웨일즈를 기다리는 팬들과 공연 마지막 날 현장의 열기를 취재하기 위해 찾아온 기자들이었다.
차량을 알아보고 환호하며 손을 흔드는 팬들을 보며 민찬은 준희에게 현장 분위기를 쫑알거렸다.
“확실히 플랜카드는 한국 팬들이 기가 막히게 만드는 것 같아. 여기는, 내용 안 읽고 보면 무슨 시위 현장 같아.”
역시나 창밖을 보고 있었던 배재민이 민찬의 말에 동의하며 하하하하 호쾌하게 웃었다. 그 옆에 앉은 장범수도 배재민의 허벅지를 손으로 짚고, 고개를 쭉 빼 창밖을 보았다. 기울어진 범수의 몸이 흔들리지 않도록 양손으로 허리를 단단히 잡아 주던 재민이 “음?” 하고 눈을 키우더니 물었다.
“형, 살 좀 빠진 거 아냐?”
“약간. 많이는 아냐.”
그러고들 있는 동안 우영과 동수, 그리고 여진도 마찬가지로 창밖을 살폈다.
내내 창밖 풍경을 쫑알거리던 여민찬이 자못 사나워진 눈초리로 팬들 사이를 살피다가 중얼거렸다.
“오늘은 야광 안 왔나?”
배재민의 허벅지를 짚고 있던 팔을 펴서 몸을 일으킨 장범수가 여민찬의 말 중 잘못된 부분을 정정했다.
“형광이야. 야광이 아니라.”
“뭐? 그게 그거 아냐?”
“엄연히 다르지 인마.”
민찬은 하등 중요하지 않은 부분을 지적해 대는 리더를 향해 “참나. 뭐가 그렇게 깐깐해? 형광이나 야광이나.” 하며 어이없어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준희가, 일반 상식은 좀 떨어져도 음악적으론 천재여서 무척 존경하고 있는 남자의 손등 위를 톡톡톡, 두들기며 다독였다.
“형. 달라. 많이 달라.”
애인이 제 편을 들어 주는 줄 알고 어깨를 바짝 펴고 있었던 여민찬이 “따아, 씨.” 하며 허무해했고, 그 순간에 모두가 파하하, 웃었다. 장범수는 “준희, 나이스.” 하며 만족스러움에 입가를 끌어올렸다.
현지인 로드매니저는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에 뭣도 모르면서 그저 따라 웃고 있었는데, 조수석의 코디네이터가 상황을 통역해 주었다. 그러자 그제야 껄껄껄, 하며 함께 웃었다.
웃고 떠들고 있긴 했지만, 사실, 진짜 야광인 거 아닌가 싶은 형광색 슈트를 입고 나타나는 남자는 그냥 웃어넘길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형광 슈트를 입은 남자는 준희의 극성팬이었다. 유럽투어를 다니는 동안 공연장마다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매 공연장을 다 따라다니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은 아니다. 그런 팬이 어디 한둘이랴. 하지만 준희의 눈에 띄고 싶어 안달이 난 듯한 남자는, 정도를 한참 넘어선 과격한 행동을 계속했었다.
공연 첫째 날, 형광 남자는 콘서트홀 뒤쪽의 공연자들이 출입하는 입구 쪽에 쳐놓은 슬레이트 뒤쪽 팬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에이전시에서 배치한 경호원들과 슬레이트 사이로 몸을 내밀고 팔을 뻗어 민찬의 손을 잡고 따라가던 준희의 손을 잡았다. 잡는 것까진 그럴 수 있다곤 쳐도 잡은 손을 놔주질 않았다. 그 바람에, 준희의 반대쪽 손을 잡고 당기다가 말고 짜증이 난 여민찬이 성큼 다가가 팔을 쭉 뻗어 주황색 형광 슈트의 멱살을 잡을 뻔한 것을, 식겁한 배재민과 장범수가 간신히 말린 일이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날에 형광 남자는 준희의 머리카락을 뽑아갔었다. 민찬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팬들 속에서 홀연히 나타난 남자는 준희의 머리를 쥐고 뜯었다. ‘아!’ 하는 비명 소리를 듣고 놀라서 홱 돌아본 민찬은, 머리카락이 뽑혀 나간 자리가 꽤나 얼얼해서 멍청해진 준희를 덥석 끌어안고 제 뒤로 숨긴 후에, 준희의 머리카락 뭉치를 손에 들고 감격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의 머리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쪽 머리카락도 죄 뽑아 버릴 작정이었다. 무척 화가 난 여민찬이 살벌한 표정을 하고서 손을 뻗는 것을 보고 또 식겁한 배재민과 장범수가 간신히 막았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보고를 받은 에이전시 측에서는 준희를 전담하는 경호 인력을 붙였다. 그래 봤자 준희를 지키겠다는 일념이 남다른 여민찬이 지키는 것만 못했다. 팬들 사이사이로 허리를 숙이고 다가온 형광 남자는 준희를 둘러싼 경호원들 사이로 손을 넣어 준희의 엉덩이를 잡았다. 소스라치게 놀라버린 준희는 몹시 불쾌했지만 티는 많이 못 내고 그저 낯을 잔뜩 굳혀야 했다. 한발 늦은 경호원들은 형광 남자를 얼른 떼어 내고 밀쳐버렸다.
그랬거나 말거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형광 남자는 준희의 엉덩이를 만진 제 손을 번쩍 들어 올리고서 황홀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아아아! 앞으로 백 년간 이 손을 씻지 않겠어!>
그런데 그걸 또 하필이면 여민찬이 보아버렸다. 이번엔 진짜로 참을 수가 없었던지라 무시무시하게 인상을 구긴 여민찬은 형광색을 잡으러 뛰어갔다. 살기를 느낀 형광은 무작정 도망쳤다. 하지만 블랙웨일즈의 기타리스트는 초중고 내내 계주 라스트 주자이던 남자였다. 이를 악물고 달린 결과 민찬은 형광 남자를 곧장 따라잡았고 형광색 덜미를 잡기 직전 비죽 한쪽 입술을 끌어올리는 그 찰나에 그만, 뒤따라온 특수부대 출신 괴력남에게 허리를 붙잡혀 버리고 말았다. 여민찬은 덜컥 멈춰서야 했고 형광 남자는 그길로 줄행랑을 쳤다.
배재민은 약이 바짝 올라 씩씩거리는 여민찬을 달랬다. 네 심정은 이해하겠는데, 팬이라고 찾아온 사람이랑 불미스러운 일 생기면 준희한테도 이로울 것 없다고.
나중에 들린 소식에 따르면 도망쳤던 형광 남자는 다시 돌아와 공연을 관람했다고 한다. 팬들이 찍어 올린 영상 속 곳곳에 <준희이이이!!!>를 외치며 자지러지는 모습이 잡혀 있었다. 신 스틸러가 따로 없었다.
일주일간의 공연이 중반을 지나 막바지로 향하는 동안 하루걸러 벌어진 이러한 소동이 크게 화제가 되었다. 보컬을 사이에 두고 열성 팬과 기타리스트가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이 세간의 큰 관심을 끈 것이다. 형광색 슈트를 입은 남자는 ‘글리터맨’이라고 불리며 유명 인사가 되었고, 그의 행동을 나무라는 팬들이 고발 차원에서 찍은 영상은 영국 현지 뉴스의 가십으로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덕분에 타국 록밴드의 투어 공연에 현지 방송국의 사회부 기자들까지 뉴스거리를 노리고 현장에 나와 있는 사태에 이르러 있었다. 게다가 마지막 날 공연이었으니, 여느 날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기자들이 팬들 사이에 포진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드디어 밴의 뒷문이 열렸고, 블랙진에 차콜 셔츠를 입고 선글라스를 쓴 여민찬이 내렸다. 간지가 좔좔 흐르고 넘치는 남자의 등장에 팬들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이어서, 여민찬의 손을 잡고 따라 내리는 남자는 분명히 준희일 것이었기 때문에 팬들은 얼굴을 보기도 전에 무작정 소리부터 질렀다. 박시한 후드티를 입은 준희는 후드를 푹 뒤집어쓴 채로 바닥을 보고 걷고 있었다. 그런데,
응?
팬들은 ‘뭔가 이상하다?’ 싶었다. 구부정한 자세, 소극적인 걸음걸이, 어딘가 모르게 준희 같지가 않았다. 무엇보다도 옷태가 영 평범했다. 밀가루 포대를 씌워 놔도 스타일리시할 거란 평을 듣는 준희인데, 오늘은 그렇지가 않았다. 평범한 후디에 면바지를 입은 준희는 평범한 옷만큼이나 평범했다. 하지만 여민찬의 손을 잡고 걸어오는 것이 준희가 아닐 리는 없었기 때문에 ‘이상하다?’ 싶은 와중에도 그저 무작정 환호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형광 슈트가 오늘은 왜 안 나타나지?’ 내심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오늘은 형광 연두색 슈트를 입은 남자가 팬들 사이를 헤치고 등장했다. 슬레이트 밑을 지나 경호원들을 요리조리 피해 빠른 속도로 다가갔다. 아니 무슨 과거에 럭비팀 쿼터백이었던 건가 싶은 느낌으로 수비들을 요리조리 재치고 빠르게 진입하더니만 준희를 그야말로 덥석! 끌어안았다.
그 순간에, 카메라를 든 기자들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이제 여민찬이 반격에 들어갈 차례였기 때문에,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까 기대하며 기다렸다.
그러나 여민찬은 “앗.” 하더니만 준희의 손을 놓아버렸다. 옜다 먹어라, 하며 줘버리다시피 한 느낌이었다. 그랬다 보니, 어리둥절해진 팬들과 기자들은 준희가 형광 연두색 남자에게 질질 끌려가는데도 마땅히 반응을 못 하고 있었다.
잠시 넋을 놓았던 팬들은 이내 정신을 차렸고 준희를 구하기 위해 형광 남자를 향해 몰려갔다. 기자들의 카메라 또한 그쪽을 향했다. 그러고들 있는 사이에,
“웃샤!”
하며 벤에서 풀쩍 쿵 뛰어내린 남자가 있었다. 세계에서 제일 섹시한 남자를 꼽는 순위에 빠지지 않는 남자, 드러머 배재민이었다. 휑해진 앞쪽 상황을 보고 “우하!” 하고 웃더니, 데리고 내린 남자의 손을 쥐고 뛰었다. 그런데 배재민의 손을 잡고 뛰는 사람은-
<어!>
준희였다!
버킷 햇으로 얼굴의 절반 이상이 가려져 있었지만, 청바지 위에 무늬 없는 흰 티셔츠, 그리고 타탄체크 셔츠 하나 아무렇게나 걸쳤을 뿐인데도 스타일리시하고 난리인 사람은 분명히 제준희였다! 이 준희가 진짜 제준희가 확실했다!
<준희다!>
한눈에 제준희를 알아본 팬 중 하나가 소리쳤고, 대부분 형광 남자 쪽으로 향해있었던 시선들이 동시에 스플리터 밴 쪽으로 향했다.
‘아 속았구나!’ 깨달은 즉시 다시 달려들기 시작한 사람들의 사이로, 준희의 손을 잡은 배재민이 전력 질주를 시작했다. 저 앞에, 이미 뛸 준비를 마치고서 손을 쭉 내밀고 있는 남자, 여민찬을 향해서 말이다.
주인이랑 원반던지기 할 때 잔뜩 신이 난 대형견 같은 표정으로 달려온 배재민으로부터 준희를 넘겨받은 여민찬은 “에이, 씨. 대체 왜 그렇게 신이 났어?”라며 즐거워 보이는 배재민을 면박 주었다. 그리고 준희의 어깨를 끌어당겨 품에 안다시피 한 자세로 뛰었다. 고등학교 마지막 체육대회 때 13개 반을 제치고 1등을 했던 계주팀의 라스트 주자였던 남자는, 그야말로 ‘겁나’ 빠르게 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그때까지 형광 연두색 남자에게 붙잡혀있다가 팬들의 도움으로 풀려난 남자의 모자가 벗겨졌을 때, 형광 남자도 놀라고, 팬들도 놀랐다. 여민찬의 손을 잡고 오는 바람에 모두가 제준희일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남자는, 제준희가 아니라, 블랙웨일즈의 전담 매니저인 이우영이었다.
대부분의 기자들도 속았다. 하지만 앞자리 선점에 실패하여 큰 그림으로 멀리서 찍고 있었던 몇몇 기자들에 의해 촬영된 영상이 뉴스에 나갔고, 준희를 바통으로 한 이어달리기 영상이 또다시 크게 화제가 되었다. 기자들과 앵커들은 무력 충돌 없이 여유롭게 하드코어 팬을 따돌린 블랙웨일즈의 기지를 칭찬했다.
무려 BBC 방송국 연예가 뉴스의 헤드 라인에 등장한 소식을 접하고, 첩보영화의 한 장면을 방불케 하는 영상을 보게 된 고국의 팬들은 일단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 후에, 참 블랙웨일즈답다, 싶어서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여러모로 난리였던 영국 투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난감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이 준희의 친모라 주장하는 여자가 나타난 것이었다.
메일을 처음으로 접한 우영은 혼자 고민할 내용이 아니다 싶어 범수에게 넌지시 사실을 전했다.
“홍채이색증이래요. 준희랑 눈 색깔이 똑같아.”
범수는 메일 내용을 읽어 보았다. 메일은 준희의 친모라 주장하는 여자의 남편이라 하는 남자가 보낸 것이었다.
준희가 젖도 못 떼었을 즈음 친부가 사고로 사망했고, 친모는 집을 나갔다는 가정사를 준희로부터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던 범수는 메일 내용을 신중하게 살폈다.
메일 내용은 길지 않았다. 자신의 처 되는 사람이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았고 남편이 죽자 감당하기 힘들어 도망쳐 나왔다고 했다. 그리고 친모라 주장하는 여자의 얼굴 중 눈만 찍어서 첨부했다. 유전력이 강하다는 홍채이색증이라면서, 제준희의 친모가 확실하다고, 그러니까 만났으면 한다고 했다. 혹 만나고 싶지 않다면, 사례금으로 1억을 준다면 언론에 밝히지 않겠다는, 그런 말로 마무리된 메일이었다.
얼굴 한가득 걱정이 가득한 우영이, 짧은 메일을 시간을 들여 꼼꼼히 읽어보고 있는 범수에게 물었다.
“1억 운운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사기겠죠? 준희 가정사는 팬들도 이미 다 아는 거니까, 이런 말 지어내기 어렵지 않잖아요. 눈 색깔도 포샵하면 충분히 만들 수 있고. 그죠?”
“그럴 가능성도 있지.”
그렇게 말해 놓고 좀 더 고민해 보던 범수가 덧붙였다.
“아닐 수도 있고.”
그러나 유전자 검사 한 번이면 명백한 답이 나올 문제를 굳이 추측하여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장범수는 팀의 리더이자 기획사의 대표로서 취해야 할 응당 마땅한 대응을 했다. 최대한 정중한 느낌으로 답신을 보냈다.
「기획사 블루오션의 대표 장범수입니다. 당사자들 간의 대면 여부를 고려하기 전에 먼저 유전자 검사를 진행했으면 합니다. 진단검사기관의 물색과 검사 비용 일체는 저희 쪽에서 부담할 터이니, 가능한 날짜를 알려 주시면 예약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다시 보내온 답장이 기가 막혔다.
「회사 대표라는 사람이 사람을 사기꾼 취급하고 그래도 됩니까. 내딴엔 들은 내용이 있스니 사실을 알려준 것뿐인대 솔천히 기분이 나쁘고요. 사기꾼 취급을 받아가면서까지 내가 댁들하고 예기할건 업으니 만나기 실으면 관둡씨다. 나하고 친한 이가 엠비씨 기자인데 명예해손으로다가 지금 이 내용을 고소할 테니까 그리 아시고. 나는 손해볼껏 하등 업지만서도 당신 때문에 제준희씨가 생모를 못 보게 되었다는것만 알아두시면 돼겠습니다.」
미친놈인가.
장범수는 잠시 반응을 하지 못했을 정도로 당황했다. 아니 황당했다. 함께 있었던 이우영도 적잖이 놀라서 합, 입을 다물었다.
메이저 데뷔 이후 별의별 기상천외한 소문과 비방이 있었지만 일일이 대응하지 않았었다. 사실이 아닌 일은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고는 했기 때문이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명예훼손 사유가 될 만한 내용도 없었기 때문에, 경찰도 아니고 기자한테 고소를 하겠다는, 상식은 물론이고 맞춤법도 부족한 인간을 겁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사진 속의 이 여자가 진짜로 준희의 친모가 맞다면 그땐 그냥 곤란한 정도가 아닐 터였다.
아무래도, 준희가 이 사람을 만나 볼지 말지에 대한 결정을 먼저 하는 것이 맞는 듯했다. 유전자 검사를 할지 말지도 그 후에 생각해 볼 문제였고 말이다.
다른 놈들, 특히 여민찬의 문제였으면 대신 나서서 개입을 했겠지만 준희의 흔들림 없는 멘탈과 깡다구, 그리고 제대로 박힌 정신머리를 믿고 있는 범수는, 준희 스스로 생각해 보고 결정하도록 일임하기로 했다. 그래서 장범수는 주고받은 메일 전문을 여민찬에게 재전송했다. 준희에게 보여 주라고.
그때 마침 민찬과 준희는 지하 작업실에서 놀고 있었다. 최근에 너무 처지는 노래만 썼으니, 이번에는 신나고 경쾌한 노래를 만들어 보자면서 기타 치고 건반 치며 놀고 있었다. 민찬의 연주에 맞추어 건반을 치는 중에 계속 막춤을 추는 준희 덕분에 웃음이 끊이질 않고 있었다. 누가 봐도 정신줄 놓고 노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러고 놀다 보면 어느 순간 좋은 리프와 멜로디와 신선한 코드 전개가 떠오르곤 했다. 준희와 노는 것은 여민찬이 곡을 쓰는 과정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렇게 낄낄대며 노는 중에 장범수의 전화를 받고 급격히 어두워진 얼굴로 메일을 열어 본 민찬은, 짧은 내용을 먼저 빠르게 훑어 본 후에 한숨을 한번 쉬었다.
그리고 준희에게 메일 내용을 빠짐없이 읽어 주었다. 1억을 사례하면 함구하겠다는 문장을 읽을 때는 치미는 화를 참기가 좀 힘들었다. 이건 아니지 않나 싶었다. 혹시 친모가 맞다 해도 그랬다. 젖도 아직 못 뗀 어린 아기를 버릴 땐 언제고, 이제 와서 1억 운운하며 만나자는 것이 영 불쾌했다. 민찬의 지금 기분상으로는 ‘그냥 무시해버리자’ 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보다 야무지고 똘똘할 뿐 아니라 이 문제의 당사자인 녀석의 판단이 중요한 듯했다.
민찬은 메일 내용을 가만히 다 듣고 난 후에도 한동안 말없이 앉아있는 녀석에게 물었다.
“사진, 볼래?”
눈을 천천히 두어 번 깜박일 정도의 시간 동안 고민해 본 준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겠다고.
에이, 씨. 뭐가 이렇게 찝찝하냐.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한 민찬은 영 편하지 않은 얼굴로 사진을 확대했다. 모니터 한가득 사진을 확대하자, 준희도 초록색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준희가 사진을 물끄러미 보는 사이에 민찬도 사진을 보면서 ‘준희랑 닮았나?’ 따져 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닮은 것도 같고, 어떻게 보면 영 딴판인 것도 같았다. 눈만 봐서는 판단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눈동자 색만큼은 준희와 꽤나 흡사했다.
아. 모르겠다.
결국 그런 결론을 낸 민찬은 준희의 대답을 기다려 보다가 물었다.
“어떻게… 할래?”
또 한동안, 민찬이 좀 답답해지기 시작했을 즈음까지 침묵하던 준희가 대답했다.
“만나 볼래.”
영 내키지 않았던 민찬은 인상을 썼지만, 그런 마음이 말투에 배어 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그러자 그럼.”
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속이 심란한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터인 녀석이 걱정되는지라, 준희의 몸에 팔을 두르고 끌었다. 민찬이 끄는 대로 힘없이 끌려온 준희는, 넓고 각진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기댈 곳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며칠 후. 한남동에 위치한 프라이빗 레스토랑.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민찬과 준희는 예약한 룸으로 안내받았다. 모든 자리가 개별실로 이루어져 있어 셀럽들의 비밀 데이트 장소로 유명한 곳이었다.
이곳을 소개해 준 이는 당연하지만 장범수였다. 변호사로 일할 때부터 알고 있었던 곳인데, 직원들 입단속은 물론이고 기자들도 출입 못 하게 보안이 철저한 곳이라고.
여민찬으로부터 준희가 친모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만나 보겠다고 한다는 의사를 전해 들었을 때, 똘똘한 준희가 스스로 결정하도록 개입하지 않겠다던 장범수는, 약속 날짜 조율에 장소 물색부터 예약까지 모든 일을 도맡았다. 그래도 걱정이 되었는지 종국에는 자신이 준희와 함께 나가겠다고 했다. 그런 범수에게 준희가 말했었다.
‘그냥 민찬 형이랑 다녀올게.’
준희가 그렇게 말하니, 그 옆에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녀석을 한껏 째려봐 준 장범수는, 그 이후로 한동안 여민찬을 붙잡아 놓고 잔소리를 했다. 절대 이쪽에서 불리할 수 있는 허튼소리 하지 말라고. 말이 많아질수록 실수가 생기는 법이니 절대, 절대로 아무 말이나 하지 말라고. 상대방 쪽 변호인에게 틈을 주면 안 된다고.
그러자 준희는 ‘변호인?’ 하며 웃었다. 이미 법정까지 가 있는 리더 형을 향해 씩, 편안하게 웃어 보인 준희가 너무 걱정하지 말라면서, 오히려 범수를 안심시켰었다.
그런 연유로 민찬과 함께 테이블 한쪽에 나란히 앉아있는 준희는 실내이지만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연예인이랍시고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니다. 도수가 들어간 것으로, 안 썼을 때보다는 그나마 시야가 선명했다.
양팔을 테이블 위에 올린 민찬은 좀처럼 가만히 있지 못하는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에서 건반을 치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러다 잠자코 있는 준희의 손을 덥석 잡으며 물었다.
“긴장돼? 형이 손잡아 줄까?”
이미 잡아 놓고 묻고 있는 남자의 손이 찼다. 토독토독 하며 연신 테이블을 두드리던 손가락부터 차게 식은 손까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남자를 향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준희는 테이블 위에 두었던 손을 뒤집어 마주 잡아 주었다.
준희의 따뜻한 손 덕분에 오히려 안심이 된 민찬이 어느 정도 진정했을 즈음, 노크 소리가 들렸고, 매너 시간이 짧게 흐른 후에 문이 열렸다. 그러는 사이에 잡았던 손을 놓고 내린 두 사람은 동시에 문 쪽을 보았다.
서버가 먼저 들어섰고, 모셔온 손님들을 자리로 안내했다. 아웃도어 브랜드의 기능성 셔츠를 입은 술배가 나온 중년 남자와, 레이온 소재의 잔잔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유행과는 거리가 먼 듯한 단발머리를 한 중년 여자였다.
할아버지 손에 자란 준희는 물론이고, 성격 보통 아닌 고모에게 등짝 맞아가면서 큰 민찬 또한 몸에 밴 예의범절 덕분에 자동으로 기립을 했다.
중년 남자는 외양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충분히 예상이 가능한 걸걸한 목소리로 “반갑습니다?” 하고 인사하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두 사람 사이의 중간 즈음으로 내밀어진 손은 민찬이 잡았다.
“아하. 기타리스트라 그런가, 손이 엄청 크시네? 나도 왕년에는 기타 좀 쳤어요. 하하하.”
상대방이 그랬듯이 인사치레 소리 따위 할 생각 전혀 없었던 민찬은, 이 정도면 악수다, 싶은 정도에서 먼저 손을 놓았다.
중년 부부가 먼저 앉고 난 후 민찬과 준희도 자리에 앉았다. 뭐가 그리 급한지, 엉덩이가 채 닿기도 전에 남자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아. 이게 이제. 모든 정황상으로는, 우리 제준희 씨가 제 처의 친자라는 것이 거진 99.999퍼센트 확실하거든요? 보시다시피, 토종 한국인 눈알 색이 이게, 이런 게, 이게 절대로 흔한 게 아니잖아요. 그죠?”
남자는 고개를 숙인 여자의 턱을 잡아 들어 보이며 말하다가 던지듯이 틱 놓고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 처도 따악 27년 전 즈음해서 얼라를 하나 낳았었다고 하더라고? 하! 마침 이게 딱 떨어지는데! 아니 내가 어떻게 두고 볼 수가 있겠어? 부모 자식 사이는 천륜인데, 안 그래요? 나 하나만 마음을 넓게 쓰면, 응? 이게 너도 나도 다 좋은 거니까, 그죠?”
민찬은 남자가 시끄럽게 떠드는 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자를 관찰했다. 눈동자 색만 비슷할 뿐, 눈이며 코며, 입술이며, 얼굴형까지, 이목구비 중에 어느 한군데 준희와 닮은 곳은 없었다. 그러느라 눈초리가 매서워진 민찬의 눈치를 힐끔힐끔 보면서, 남자가 더 큰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나의 고종 사촌이 지금 방송국 기자란 말입니다. 내가 이거를 그냥 기자 나부랭이한테 터트려도 되거든? 그러려다 보니까, 아이고, 이, 블랙웨일스가, 이제는 국민 밴드 정도가 아니라 세계적인 밴드란 말이지? 근데 이, 유전자 검사니 뭐니 하다가 소문이라도 나면 이게 국가적으로 손실 아니겄어? 그래서 내가 조용히 좋게, 좋게, 해결할 수 있는 방향으로다가 수소문을 했지. 블랙웨일스는 나한테 감사해야 해. 안 그래요?”
전혀 공감되지 않는 소리를 되물으니 그 누구도 대답하고 있지 않은 가운데, 남자는 진짜 본론을 말하기 전에 밑밥을 깔았다.
“이 여편네가, 아주 힘들게 살았어. 고깃집 기름 접시 닦고, 빌딩 똥간 청소하고, 그러면서 겨우 자식 놈들 입에 풀칠이나 간신히 했다고. 그런데 뉴스에서 듣자 하니까, 뭐? 블랙웨일스가 한 해 CF로만 벌어들인 수입이 어마어마하다대? 어? 몇십 억이니, 몇백 억이니, 하대? 아니. 생모가 이렇게 어렵게 살았는데, 생판 나 몰라라, 했다는 게, 이게 이게 이미지상 절대로 좋을 수가 없거든?”
이제껏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배를 불룩 내민 채로 떠들던 남자는, 끙 하며 등을 떼고 상체를 앞으로 내밀어 거리를 좁혔다. 그러고는 한껏 낮춘 목소리로 본론을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딱 더도 말고 껌값만 받고 떨어질게. 1억. 딱 1억만 주면, 우리가 조용히 입 닫고 살겠다고. 그쪽한텐 껌값이잖아? 1억? 그지? 안 그런가? 어?”
그때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들렸고, 서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메뉴판을 내려놓는 서버에게 남자가 말했다.
“우리가 쪼까 중요한 얘기 중이라, 일단 시원한 냉커피 한 잔씩 주시고, 이야기 잘 되면 식사도 주문하고 그럴 텐게. 일단은 나가보쇼.”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영 투박한 소리였지만 최대한 공손하게 응대를 마친 서버가 문을 닫고 나간 후, 상대방 의사도 묻지 않고 멋대로 주문을 해버린 남자는 준희 쪽을 보고 말했다.
“그 아무리 연예인이라도 그렇지, 이쪽이 애비뻘 되는 사람인데, 그렇게 시꺼먼 안경 쓰고 뻣뻣하게 앉아있으니까 썩 기분이 좋진 않네?”
“말이 좀-”
심하다고, 민찬이 아까부터 참고 참았던 말을 하려는데, 준희가 민찬의 팔뚝을 잡았다. 그러지 말라고. 그리고 준희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죄송하다고 조용한 소리로 사과했다. 준희가 선글라스를 벗고 고개를 들자, “아따….” 하고 소리 내어 감탄한 남자가 떠들었다.
“거 실물로 보니까 얼굴이 진짜 그려 놓은 듯이 생겼네. 아버지 되는 사람이 생전에 한 인물 하셨는가 봐?”
친탁했나 본다고. 누가 봐도 닮지 않은 얼굴에 대해 그런 식으로 둘러댄 남자는 준희의 눈을 보았다가 또 여자의 턱을 들어 올려 여자의 눈을 들여다보았다가 하면서 주절거렸다.
“근데, 거, 눈알은 아주 그냥, 이야… 판박이네. 판박이야. 따져 볼 것도 없이 핏줄이잖아? 어? 안 그래?”
또 눈알. 그 소리가 되게 거슬리다 보니 민찬의 인상은 점점 험상궂어지고 있었다.
어쨌든, 따져 볼 것도 없이 핏줄이라는 말이 전혀 공감되지 않는 민찬은, 준희가 혹시나 남자의 헛소리에 혹하기라도 하면 저분이랑 너랑 얼굴 진짜 하나도 안 닮았다고 얘기해 주면서, 기자니 뭐니 겁먹지 말고 유전자 검사부터 하자고 할 생각으로 입을 꾹 닫고 있었다. 한마디라도 했다간 거센 소리부터 나갈 것 같았다. 말을 많이 하면 불리하니까 신중하라던 범수의 말을 떠올리며 참고 앉아있는데, 준희가 입을 열었다. 묻는 말에 대답을 하는 대신 엉뚱한 이야기를 했다.
“고향이… 춘천이라고 하셨어요.”
“에? 춘천?”
“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친엄마 만나고 싶으면, 춘천으로 찾아가 보라고, 그런 얘기를 해 주셨어요.”
“아아. 아. 그렇지. 아. 맞다. 아. 그러고 보니까 당신 춘천에 살았었다고 안 했어? 장모님 고향이 춘천이랬지? 어? 맞잖아. 어?”
남자가 대답을 강요하자, 곤란한 표정을 숨기려고 더 고개를 숙인 여자가 고개를 아주 살짝 끄덕였다. 그러자 남자는 박수를 치며 소리를 높여 웃었다.
“아. 하하하! 춘천이라네? 이야! 이거 진짜 검사해 볼 것도 없네! 친아들 맞네! 맞아! 아하하하!”
남자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잦아들었을 때, 흐음, 하고 큰 숨을 내쉰 준희가 물었다.
“숙진 이모 아세요?”
“이모?”
“네. ‘숙진 이모’라는 분이 여덟 살 무렵인가까지 찾아왔었어요.”
준희가 친절하게 건네는 힌트를 또 덥석 문 남자는, 허공에서 검지를 흔들어 기억을 더듬는 척을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아- 그, 저기, 저기 말하나 보다, 왜 저기 있잖아, 그, 당신, 그 고모네 딸, 거기 이름이 그 숙진이라고 안 했어?”
그리고 여자는 또 고개를 숙인 채로 끄덕였다. 수동적인 고갯짓에서 체념이 느껴졌다.
누가 봐도 준희 말에 맞장구쳐 대며 거짓말 치고 앉아있는 것이 빤히 보이는 상황에 민찬은 어이가 없었다. 이쪽이 종잇장같이 귀가 얇은 등신들도 아닌데, 진짜로 먹힐 거라고 생각해서 저러고 있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그래서 어디까지 하나 한번 보자, 하는 심정으로 팔짱 딱 끼고 지켜보았다.
여자의 고개가 올라오질 못하고 있고, 남자의 호들갑스러운 맞장구가 잠시 사그라졌을 때 고요한 침묵이 찾아왔다. 침묵이 불편했던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뭐, 유명인 되어서 억 소리 나게 잘나가는 그쪽 사람들 사정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닌데, 이제 와서 우리 같은 사람들 부모랍시고 부양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딱 1억, 1억만 해 주면 이 여편네 데리고 깔끔하게 떨어져 줄 테니까, 우리 그냥, 유전자 검사니 뭐니 부모 자식 간에 구정물 같은 짓거리 하지 말고, 좋게 좋게, 쉽게 쉽게, 갑시다. 응? 그게 맞는 거 같지?”
남자는 이쪽저쪽 준희와 민찬 쪽을 번갈아 보며 의향을 물었다.
남자는 물었고, 이제 이쪽에서 대답할 차례였다. 대답할 차례인 쪽에서 대답을 안 하고 있으니 또다시 침묵이 지나갔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고요해진 가운데 민찬은, 준희가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존중하자고 다짐했다. 존중하긴 하되, 나중에 준희 모르게 유전자 검사 등의 확인을 해야겠다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준희가 대답하기를 기다렸다.
꽤나 한참 동안 침묵하고 테이블 중간을 바라보던 준희가 한숨부터 쉬었다. 고개를 들고, 시선을 들었다. 남자 쪽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제 어머니였던 분은,”
돈을 요구하고 있는 남자가 끄덕, 바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 끌지 말고 좀 빨리 말해 보라는 의사표현이었다. 그런데 준희는 또 잠시 입을 다물고 시간을 흘려보냈다. 이제는 너무 사랑하는 녀석의 모든 뜻을 존중하겠다고 맘먹은 바 있는 민찬도 좀 답답해지려는 찰나, 가볍게 숨을 들이켠 준희가 말을 이었다.
“고아셨어요.”
응?
눈이 휘둥그레진 건 남자뿐만이 아니었다. 남자만큼은 아니지만 평소보다 눈이 커진 민찬도 준희 쪽을 돌아보았다. 시선을 느꼈을 테지만 민찬 쪽을 보지 않은 준희는 맞은편에 앉은 남자의 인영을 향해 또박또박한 어조로 말했다.
“제 어머니였다는 분은, 춘천에 있는 보육원 출신이고, 숙진 이모는 같은 보육원에 있었던 분입니다.”
그런 말을 침착하게 하고 있는 녀석의 얼굴이 너무나 태연해서 민찬은 또다시 놀라고 말았다.
와. 이 또라이 같은 자식.
논두렁에 떨어진 핵폭탄 버금가는 충격적인 발언 한방에, 시끄럽게 떠들던 남자의 말문이 막혀 버렸다. 일그러진 눈가가 파르르 경련했다. 장모님이니, 고모네 딸이니, 해 대며 방정을 떨었던 제 입을 탓하고 있을 테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아니, 그, 저기-”
야물게 뜬 눈으로 맞은편 남자 쪽을 마주 봐 주고 있는 녀석을 빤히 보던 민찬은, ‘세상에. 얘는 대체 뭐지?’ 하며 놀라워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남자를 보았다. 저 남자가 이제 뭐라고 둘러댈 건지가 너무나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즈음 민찬은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게 지금 놀란 건지 신난 건지 통쾌한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심장박동이 빨라져 있었다. 웃을 분위기가 아닌데 웃음이 터질 것만 같은 입을 앙다물고 참고 있던 그때, 민찬의 핸드폰이 진동을 했다. 민찬은 전화를 받았고, 할 말을 찾아 뻐끔거리며 허공만 수차례 삼키고 있는 남자에게 전화기를 내밀었다. 할 말 더 있으면 여기다가 하라고.
남자는 경황없는 통에 제 앞에 다가온 핸드폰을 받아 귓가에 댔다.
“여… 보세요?”
[쌍문동 사시는 68년생 최규식 씨?]
“예…에? 누구…?”
[현재 최규식 씨께서, 사실혼 관계에 있는 동거인의 친자라 주장하고 있는 녀석, 제준희의 전담 변호사입니다. 당연히 그럴 것이라 예상하셨겠지만, 지금까지 말씀하신 내용은 모두 녹취되었습니다. 오른쪽 위쪽 모서리에 보시겠어요?]
“예?”
[네, 감사합니다. 제대로 영상으로도 녹화 되었구요. 최규식 씨는 형사소송법 347조에 의거, 사기죄로 10년 이하의 징역이나 벌금형에 처해질 수도 있습니다.]
“사기? 아니 나는, 진짠 줄 알았-”
[춘천에 계신다는 장모님의 존재 여부와 고모님의 딸이라는 분의 성함이 숙진 씨가 아닐 경우, 지금 ‘진짜인 줄 알았다’는 말이 추가 진술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응, 자, 잠깐만요, 저기, 그게 아니라-”
[먹고 떨어져 주겠다, 는 등의 조건을 걸고 실제로 1억 원이 지급될 경우에는 사기죄가 성립되며, 이후에는 형사소송으로 진행됩니다.]
“에? 아니, 나는, 그게,”
[소송으로 진행할 경우, 1억 원에 대한 환급은 물론이고 합의금으로 최대 2천만 원까지 준비하셔야 할 수도 있습니다.]
“에에? 내가 왜-,”
[그래도 괜찮으시면, 1억, 지금 바로 해 드리고?]
“에이 씨발! 대체 무슨 소리야!”
파고들 틈이 없는 청산유수의 맥을 끊지 못해 아, 니 저, 니 하던 남자가 욕설을 싸지르며 대뜸 전화기를 집어 던졌다.
“아님 말지! 뭔 말이 그렇게 많아!”
하지만 테이블 위로 던져진 전화기 너머에 있는 사람은 여전히 브레이크 고장 난 불도저 몰고 일방통행 중이었다.
[방금 집어 던지신 핸드폰은 삼정 하이폰 프리미엄 프로 모델로 시중가 110만 원에 책정되어 있으며, 만약 기능상의 문제가 생길 경우 그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까지 함께 진행될 수 있습니다.]
큭, 하며 터진 웃음을 참지 못한 것은 여민찬이었다. 준희는 표정 없이 앉아있었고, 벌떡 일어선 남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오들오들 떨고 있는 여자의 팔뚝을 거칠게 잡아 일으켰다.
“아 싸게 인나! 뭘 잘했다고 그러고 퍼져 앉아있어! 에이! 꼴 보기 싫은 년! 씨발! 눈깔을 확 그냥 마 뽑아버릴까 보다! 에이 씨!”
그러고는, 잠자코 앉아서 조용히 올려다보고 있는 유명한 젊은 놈들에게 삿대질을 했다.
“별 천하의 재수 없는 새끼들 다 보겠네! 연예인이면 다야! 니네가 끽해야 딴따라지, 뭐, 벼슬이라도 했냐! 씨! 더럽게 잘난 척하고 앉아있네, 씨팔!”
그런 소리를 남기고, 여자의 팔뚝을 감아쥔 남자는 쿵쾅거리며 룸 밖으로 나갔다.
그때 마침 서버가 아이스 커피 넉 잔을 들고 왔고, 일행 중 두 명이 다시 안 돌아올 사람들처럼 자리를 떠버린 상황에서 커피 총 넉 잔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일없이 욕먹은 것이 기가 차서, 참나, 하고 혀를 찬 민찬은 테이블 위에 던져져 있는 핸드폰을 들고 말했다.
“근방에 있는 거 알아. 얼른 와. 냉커피 마셔.”
‘냉커피’라는 말이 웃겼던 준희는 픽, 웃었다. 씁쓸함이 지워지지 못한 희미한 웃음이었다.
서빙을 마친 서버가 문을 닫고 나간 뒤, 민찬은 허망한 낯으로 멍하니 앉아있는 녀석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잘했어, 준희야. 정말 멋지다. 속이 다 시원했어.”
그리고, 가만히 안긴 채로 넓고 따뜻한 품안의 온기를 오롯이 느끼던 준희는 현재의 속마음을 그대로 전했다.
“같이 있어 줘서 고마워. 형.”
*
예전에 함께 일했던 지인의 도움을 받아서 상대방의 신상을 캐내고, 여차하면 출동할 요량으로 배재민을 끼고 근처에서 대기 중이었던 장범수가 머쓱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거의 녹지 않은 얼음이 그대로인 아이스 커피 앞에 앉자마자 준희의 안부부터 물었다.
“준희, 괜찮아?”
“그래. 괜찮아? 들어 보니까 그 남자 뚫린 입이라고 말 막 하던데.”
장범수와 함께 대화 내용을 듣고 있었던 배재민도 우려가 한가득 담긴 얼굴로 안부를 물었다. 배재민은 사실 여민찬의 핸드폰으로 도청을 하는 내내, 당장 달려가서 함부로 말하고 있는 남자의 주둥이를 비틀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참느라 힘들었다.
준희는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고.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어깨에서 힘을 뺀 장범수가 말했다.
“처음에 준희가 만나 보겠다고 했을 때는 사실 말리고 싶었어. 온갖 억지를 부리면서 최종적으로 돈을 요구하는 이런 인간들, 앞으로 계속 만나게 될 거거든. 일일이 상대할 필요가 있나, 싶었는데, 아까 말하는 것 들어 보니까, 이런 남자는 대충 끊어내 봤자 앞으로 계속 질척댔겠더라고. 지금처럼, 어퍼컷 제대로 먹이고 지구 끝까지 날려버리는 편이 깔끔한 것 같기도 해.”
여민찬과 배재민은 동감하여 고개를 끄덕이는데, 준희는 그저 흐리게 웃을 뿐이었다. 재민이 물었다.
“근데 준희야. 너 아까 그 여자가 네 엄마 아닌 거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
준희는 슬며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과했다.
“미안.”
준희는, 다 함께 출동해준 형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친모가 아닌 것을 알았으면서 말하지 않은 것도 미안했다.
절대로 미안해하라고 물어본 것이 아닌 재민은 “에이!” 하며 커다란 손을 휘휘 저었고, 미안해하지 말라고 다독였다.
“뭐가 미안하냐? 네 일이 곧 우리의 일인데, 당연한 거지.”
약간 오글거리긴 하지만 무척 공감되는 소리였다. 장범수는 헛기침을 했고, 여민찬은 준희한테 자신보다 멋진 소리를 해 대고 앉아있는 녀석을 흘기고 있는데, 그런 것 아랑곳 않는 배재민이 다시 물었다.
“근데, 아까 그 사람들 왜 만나 준 거야?”
자신의 행동을 곰곰이 돌이켜 보던 준희가 대답했다.
“그냥….”
귀를 쫑긋이 세우고서 준희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남자들에게 먼저 들려온 것은 참 듣기 좋아 고막이 슬쩍 간지러운 웃음소리였다. 그러고는 한다는 소리가,
“형들 자랑하고 싶어서.”
…였다.
“흠.”
무안했던 장범수는 또 헛기침을 했고, 여민찬은 “크으-” 하고 콧잔등을 찌푸리더니 준희를 덥석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세상에 이런 귀여운 또라이 자식을 봤나!”
하면서 터트릴 듯이 힘주어 안은 녀석을 이리저리로 흔들었다. 배재민은 우하하하하! 하면서 커다랗게 웃었다.
그리고 민찬에게 붙잡혀 세차게 흔들리느라 정신이 없어서 “어어, 어어,” 하던 준희도 결국에는 “하하!” 하고 웃어버렸다.
야무지고 똘똘한 제 애인이 귀여워서 어쩔 줄을 모르던 여민찬은 “준희 짜부라지겠다 인마.” 하는 장범수의 구박을 듣고 나서야, 얼싸안고 흔들던 녀석을 아쉽다는 듯 놔주었다.
무척 아끼는 팀의 막내 녀석이 짜부라질 뻔한 위기에서 구해 놓고 난 후 시계를 본 장범수는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라고 중얼거리더니 말했다.
“온 김에 저녁 먹고 갈까? 여기 필레미뇽이 괜찮아.”
“필, 뭐?”
여민찬이 인상을 북 구기며 되물었다. 장범수가 하아, 하고 한숨을 쉬더니 다시 말해 주었다.
“안, 심, 스, 테, 이, 크. 인마.”
“아. 참, 나. 그렇게 말하면 될 것을.”
여민찬은 어이없어했고, 장범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들 있으니, 여민찬과 장범수가 투닥거리는 것이 웃음 지뢰인 준희가 웃음을 터트렸다. 준희가 웃으니 재민이도 따라 웃었고 배재민이 엄청난 소리로 웃으니 영향을 받은 준희도 덩달아 웃음소리의 데시벨이 높아졌다. 박장대소를 하기 시작한 놈들 사이에서, 이 정도로 웃긴 일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한 여민찬이 핀잔을 주었다.
“얌마, 뭐가 그렇게 웃겨?”
“뭐가 그렇게들 웃-”
그런데 여민찬이 핀잔을 날리던 그 순간에 장범수가 동시에 토씨 하나 틀린 소리를 하다가 말고 멈추었다. 성향 참 안 맞는 사이에 이구동성을 해버린 것이 무안했던 두 사람은,
“아이, 씨-”
“에이, 씨-”
하며, 동시에 짜증을 냈다. 그게 또 웃겨서 준희는 배꼽을 쥐고 포복절도하기 시작했다. 재민이는 전염성 강한 웃음 바이러스 준희가 웃자 따라서 하하하하 웃고 있었는데, 재민이의 웃음소리가 웃겼던 준희가 또 따라서 학학거리며 웃었다. 그러다 보니 두 사람은 서로의 웃음의 꼬리를 물고 꽤나 길게 웃어댔다.
“배꼽 떨어지겠다, 인마. 그만 웃어-”
그렇게 구박을 하는 여민찬도 웃고 있었다. 독특하게 꺾어지는 웃음소리 덕분에 웃음의 전염성이 무척 강한 준희와, 웃음소리 데시벨이 크다 보니 파급력이 대단한 배재민이 합동으로 공격을 하는데 버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장범수도 “참나.” 하고 어이없어하면서도 결국 흐흥, 하며 웃고 말았다. 네 사람이 모였을 때면 늘상 벌어지곤 하는 아주 흔한 풍경이었다.
준희는, 자신처럼 초록색 눈동자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행복하냐고 묻고 싶었다. 만약 지금 행복하지 않다고 하면, 말해 주고 싶었다. 초록색 눈동자 때문에 불행한 건 아니라고. 남들처럼 보이지 않아서 불행한 것도 아니고. 만약 지금 당신이 불행하다면, 아껴 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과 함께 있지 못해서 불행한 거라고, 그런 말을 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준희는, 친모의 얼굴도 모르는 장애인의 삶이 불행할 것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보여 주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어서, 가족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함께해 주어서, 이렇게 신나게 웃을 수 있다고. 그래서 지금의 자신은 무척 행복하다고. 하루하루가 즐겁고 매 순간이 소중하다고. 그런 말을 하고 싶었다.
잠시 후 호출을 받은 서버가 들어왔고, 메뉴판을 받아서 몇 장 넘겨보던 장범수가 주문을 했다.
“일단 필레미뇽으로-”
“참, 나.”
또 그 소린가 싶었던 여민찬이 혀를 찼고, 준희와 재민의 채 삭이지 못한 웃음이 또다시 빵 터져 버리고 말았다.
요즘 최고로 유명한 남자들이 신나게들 웃고 있으니, 뭣도 모르는 서버도 덩달아 하하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Let me Introduce My Family.’
이날 준희의 머릿속을 스쳐 간 가사가 입혀진 노래에 붙게 될 제목이었다. 냉정한 듯 보여도 그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범수 형, 포용력과 공감 능력이 주먹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재민이 형, 천재는 이기적일 것이라는 편견을 깨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사랑을 보여 준 민찬 형까지. 피 한 방울 안 섞였지만, 준희에겐 그 누구와도 바꾸고 싶지 않은 소중한 가족들이었다.
함께 있으면 늘 즐겁고 재밌고 또 행복한 이 사람들과 아마도 평생 함께하게 될 것이란 사실이 너무나 좋아서, 오늘도 준희는 쉽사리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계속 웃는 녀석을 실실 웃으며 지켜보던 민찬이 한쪽 눈가를 찌푸리며 물었다.
“이 자식 허파 터진 거 아니야?”
“허파에 바람이 든 거겠지 인마. 허파가 터졌는데 어떻게 저렇게 웃냐.”
“하- 참, 나. 거 되게 따져 싸네.”
“아하하학!”
슬슬 진정 국면으로 접어드는가 싶었던 준희의 웃음이 또 빵 터져버리고 말았다.
한번 터졌는데 쉽사리 그쳐지지 않는 웃음보는 사실 준희의 행복 주머니였다.
남들보다 흐린 눈이지만 용기 내어 한 걸음을 내딛고 손을 뻗어 찾아낸 행복 주머니였다. 이후로 새 나가지 않도록 주머니의 입구를 꽉 잡아 주는 남자의 도움을 받아 차곡차곡 채워 넣은 준희의 행복 주머니는 앞으로 한동안 가득 찬 채로 비워지지 않을 듯했다. 아빠가 되어 주고 엄마가 되어 주고 형이 되어 주는 소중한 사람들. 이들과 함께라면 아마도 한동안, 아니 꽤나 한참, 아니 어쩌면 한평생 비워지지 않을 듯했다. 아마도 그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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