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2 (22/27)

Track 2. 비가(悲歌) 04:23

80년대풍 발라드로, 어쿠스틱 기타가 이끄는 서정적인 멜로디 전개가 아름다운 작품이다. 후회 속에서 떠나보낸 연인이 행복하길 바라는 애절한 가사와 호소력 짙은 보컬의 목소리가 깊은 여운을 준다. 블랙웨일즈의 특장점인 견고한 짜임새와 균형 잡힌 사운드는 여전하다.

희귀 난치병을 앓는 팬을 위해서였다고는 하지만, 메이저에서 활동하는 그룹 중에서는 아무래도 최초 아닌가 싶은 동성애 뮤직드라마를 찍는 바람에 한동안 화제가 되었던 록밴드 블랙웨일즈는 다시금 본연의 활동에 매진했다.

공연장의 규모나 대상자를 가리지 않고, 팬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 연주하고 노래를 불렀다. 특히 짬이 날 때마다 병원이나 복지관을 돌며 노 개런티로 공연을 했다.

그리고 그러한 무료 공연은 블랙웨일즈와 관계가 좋은 기자들에 의해 연예 뉴스의 목 좋은 자리에 실렸다.

그렇다 보니 뮤직드라마를 기점으로 삐끗하지 않을까 했던 블랙웨일즈의 인지도와 인기는 하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록밴드의 훈훈한 행보를 칭찬하는 여론의 힘을 등에 업고 계속해서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공연을 주로 하고, 종종 예능에 모습을 비추긴 하지만 음악 외에 다른 분야에는 일절 손을 대지 않고 있는 블랙웨일즈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음악 외의 다른 분야에서 러브 콜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없기는커녕, 혹시나 하며 의사를 묻고 문을 두드리는 손들이 꽤나 많았다.

준희의 경우에는 패션 물류 업계에서 좀처럼 가만히 두질 않았다. 옷, 가방, 신발은 물론이고 선글라스, 액세서리, 시계 등 온갖 패션 아이템 업체에서 준희가 써주고 착장해 주길 바라며 로비 경쟁을 벌였다. 제준희의 몸에 스치기만 해도 매진된다는, 실제 통계에 근거한 썰과 함께 제준희가 ‘대세 완판남’으로 불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유명 해외 명품 브랜드인 H사와 D사에서는 준희에게 앰배서더 계약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렇듯, 국내외 패션 관련 회사 홍보 마케팅 부서의 수많은 로비스트들이 손을 내밀고 있는 남자의 전담 스타일리스트인 송여진은, 넘쳐나는 유혹의 손길 속에서 멘탈을 다잡아야 했다. 자칫하다가 끌려다니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여민찬의 경우에는 영화와 드라마 쪽에서 러브 콜이 끊이질 않았다. 원래부터 꾸준히 있어 왔던 연기 제안은 뮤직드라마를 기점으로 폭발하다시피 했고, 이우영은 쓰나미에 버금가는 느낌으로 쏟아지고 밀려드는 제작사들의 인터뷰 요청을 모두 쳐내느라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여민찬 스스로 ‘연기는 절대로 할 생각이 없다’라는 말을 매체 인터뷰마다 꼬박꼬박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사그라지질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여민찬은 장신의 기준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요즘 시대의 트렌디한 남주 스타일에 완벽히 부합되는 깨끗하고 매력적인 마스크와 피지컬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게다가 록밴드의 기타리스트라는 반전 배경까지 완벽하다 보니, 관계자들은 여민찬을 주연으로 캐스팅할 경우 작품성 관계없이 흥행은 무조건 보장된 것이라고들 했다. 그렇다 보니 본인이 안 한다고- 안 한다고- 노래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욕심들을 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멤버들과 블루오션 직원들의 단합을 위해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꼭 가지는 정례회를 위해 모인 자리에서 이우영이 말했다.

“민찬 형 연기 쪽 생각 안 하는 건 나도 아는데, 이건 좀 아까운 것 같아.”

뭔데 그러나 싶었던 모두의 눈이 모여든 가운데, 우영이 이어서 말했다.

“‘한오백년’ 한지승 감독이 메가폰 잡게 된 멜로라는데, 남주 캐스팅 1순위로 민찬 형이 물망에 올랐대. 기타리스트 역할이라나 봐. 시나리오라도 읽어 봐 달라고 보내 왔는데 어쩌지?”

‘한오백년’은 한국 무속신앙을 배경으로 무당의 일생을 그린 영화로, 재작년 각종 국제영화제에서 비평가 상을 휩쓸었다. 이후로 메가폰을 잡은 한지승 감독은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와, 씨.”

그래서 장범수가 욕 비슷한 소리를 했다. 한오백년의 한지승이 만드는 멜로라니. 이걸 걷어차면 여민찬은 멍충이 정도가 아니라 아주그냥 상멍충이, 아니 미친놈 소리를 들어도 쌌다. 터놓고 말한 적은 없지만, 팀의 기타 잘 치고 노래 잘 만드는 녀석에게 의외로 꽤나 애정을 가지고 있는 장범수가, ‘멍청한 미친놈’ 소리를 듣기 전에 정보를 주었다.

“너야 뭐 안 봤겠지만, ‘한오백년’은 영화사에 길이길이 남을 세기의 명작이야. 한지승 감독은 거장 반열에 오른 대단한 사람이고.”

“참, 나. 그러니까 더 내가 하면 안 되는 거 아냐? 세기의 명작에다가 똥칠할 일 있어? 거장이 만드는 영화에 껴서 발연기하고 오라고?”

이 대목에서 다들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땅거미 뮤직드라마를 찍어본 결과, 이 팀의 기타리스트가 알고 보니 꽤나 연기가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발연기… 까진 아니던데?”

그래서 장범수는, 의외로 연기력이 훌륭했던 녀석을 그런 말로 돌려 칭찬했다. 안 그래도 잘난 것 많아서 저 잘난 맛에 사는 녀석인데 제대로 칭찬해 주기는 또 싫었다.

그러자 이우영이 장범수의 말에 동감한다는 뜻으로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땅거미 뮤비가 아니었다면 이우영 또한 한지승 감독의 제안이 왔다는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여민찬의 말마따나 세기의 명작이 될지도 모르는 영화에 발연기로 똥칠하면 안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여민찬의 연기를 옆에서 지켜본 결과 가슴이 뭉클해질 정도의 감동을 받았고, 그동안 연기를 못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하기 싫어서 안 한 것이었구나, 하는 결론을 내린 바 있었다. 그렇다 보니 이 정도의 어마어마한 기회는 가능하면 걷어차지 않아 주었으면 한 것이다.

그러나 여민찬의 생각은 달랐다. 픽, 여유롭게 웃으며 능청맞은 소리를 했다.

“상대가 준희니까 그렇게 연기한 거지. 이제 여자 상대로는 서지도 않는데 어떻게 멜로 연기를 해?”

적나라한 소리에 놀란 우영이 읍, 하고 기함을 했고, 동수는 눈동자를 데록데록 굴리고 있었다. 장범수는 하아, 하고 한숨을 쉬었고 흐흥, 하고 웃은 재민이 그런 범수의 어깨를 다독였다. 진정하라고.

그리고 여진과 준희는 킥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민찬은 준희의 머리를 손으로 헝클이면서 여진을 향해 사과했다.

“미안?”

편한 사람들 앞인지라 사심 없이 말해버리고 나니 이것도 성희롱에 들어가는 거 아닌가 싶어져서 한 사과였다. 기분 전혀 나쁘지 않았던 여진은 그저 킬킬거리며 웃었고, 장범수가 대신 대답을 했다.

“여진이한테만 사과할 게 아니라, 모든 배우들한테 사과해. 세상에 어떤 연기자가 영화 찍다가 말고 상대 배우 상대로 흥분해서 거길 그-”

“세우냐고?”

“그래, 인마.”

남은 차마 하지 못하고 있는 말을,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대뜸 던지는 능청맞은 자식을 향해 장범수는 쯧, 혀를 찼다.

실없는 대화가 오갔으니, 이제 여민찬은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진지한 대답을 해야만 했다. 미간을 좁히고서, 으음, 하며 아주 짧은 시간 고민해 보던 남자는 역시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 못 해. 여자 상대로는 무리야. 준희 닮은 배우라도 있으면 모를까.”

“참, 나.”

이번엔 준희가 혀를 찼다. 민찬은 뜨끔한 표정을 하고서 제가 한 말에 실수가 있었나, 하고 돌이켜 보았다. 꽁하는 성격이 아닌 준희는 혀를 찬 이유를 바로 말해 주었다.

“나 닮은 배우면 가능한가 보지?”

“어?”

“나랑 얼굴 닮았으면 가능하냐고.”

“아.”

그제야 제 실수를 깨달은 민찬이 서둘러 부연을 했다.

“아니? 얼굴만 가지고는 안 되지. 목소리도 제준희 보컬님이랑 같아야 되고, 춤도 준희만큼 섹시하게 잘 춰야 되고, 또 성격도 대차야지. 우리 준희처럼.”

그런 소리를 해 놓고는, 준희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검지로 뺨을 톡톡 두드리면서 씩 웃었다. 안 웃으려고 참고 있는 준희의 얼굴도 씰룩거렸다. 지켜보던 장범수가 짜증을 냈다.

“야 이 배추벌레 같은 자식들아. 사랑싸움은 집에 가서 해.”

“네-”

“네-”

두 마리 배추벌레가 화음을 넣어 동시에 대답을 했다. 천생연분이 따로 없었다.

*

그런 이유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영화감독의 러브 콜을 거절한 격이 된 블랙웨일즈는, 주연배우로 출연하는 것을 고사하는 대신 OST 작업에 참여하고 연기자들의 기타 교습이나 현실 고증 등을 돕겠다고 했다. 한지승 감독 측은, 아쉬움이 좀 남긴 하지만, 그래도 블랙웨일즈의 OST 제작 참여는 무척 바라고 있었던 일이라며 깊은 감사의 뜻을 전했다.

<비가>라는 제목의 영화 시나리오를 받고 곡을 만들게 된 여민찬은, 가사를 써야 하는 준희에게 시나리오를 읽어 주었다. 이 집에 함께 사는 두 사람이 무척 좋아하는 지하 스튜디오 소파 위에 나란히 앉은 채였다.

배경은 1980년대였다. 유흥업소를 전전하던 기타리스트가 업소 내 인기 가수의 뒤에서 코러스를 주로 담당하는 무명 가수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사랑을 하던 두 사람 사이에 위기가 찾아온다. 여자에게 스폰서 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여자의 행복을 위해 보내 주려는 남자와,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자신은 성공 안 해도 된다고 소리치는 여자.

“연희 씨. 당신은, 노래할 때 제일 예뻐. 지금보다 더 큰 무대에서 노래한다면 정말 아름답게 빛날 거예요. 싫어요! 민욱 씨와 함께 할 수 없다면! 당신이 행복하지 않다면! 난 노래해도 행복하지 않아! 연희 씨. 난 괜찮아요. 당신만 행복할 수 있다면, 당신의 행복을 보며 행복할 자신 있어요. 정말로 난 괜찮아요. 와, 씨. 나 이거 이입 안 된다.”

여자 목소리 연기까지 해 가며 1인 2역으로 대사를 읽어 내려가던 민찬이 읽던 것을 멈추고 사족을 달았다. 그러자 같은 생각이던 준희도 동감을 표했다.

“어 나도 그래. 끝까지 잡아 줘야지. 사랑하니까 떠나보내 준다는 식으로 말하면, 나는 주먹 날아갈 거 같은데.”

“하하! 얌마. 여기서 여자가 주먹을 날리면 어떡하냐?”

“만약 형이 그랬으면 난 주먹 날릴 거야.”

“하하하!”

웃고는 있지만, 민찬은 이 자식이 농담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민찬은 기분이 좋았다. 이런 녀석이니까 내가 좋아하지, 그런 생각도 했고 말이다.

따지고 보면 두 사람에게도 이 시나리오와 엇비슷한 일이 있었다. 블랙웨일즈 활동이 순탄치 않았던 시절에 준희에게 스폰 제의가 들어왔었고, 준희는 알쏭달쏭했던 민찬과의 관계에 짜증이 났던 나머지 홧김에 스폰 제의를 받겠다고, 떠보는 소리를 했었다. 그리고 민찬은 그런 준희에게 불같이 화를 내다가 욱해서 입을 맞췄다. 그때 생각이 났던 민찬이 흐흥, 하고 웃었다.

“그러고 보니까 이 사람들, 우리하고 완전 정반대인데?”

“어. 사랑하면 끝까지 잡아야지. 사랑하니까 보내 준다는 건 말이 안 돼.”

“동감. 우리는 그러지 말자?”

“어. 나는 형이 헤어지자고 해도 바짓가랑이 잡고 물귀신같이 늘어질 거니까, 걱정하지 마.”

“고맙다, 인마.”

준희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기분 좋게 웃은 민찬은 나머지 시나리오를 읽어 내려갔다.

다행히도 여자는 끝내 스폰을 거절했다. 이후로 남자는 공사장에서 일하고, 여자는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며 어려운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에게 병이 찾아온다. 간 이식을 해야 하는데 수술비를 감당할 수가 없다. 결국 여자는 수술비를 벌기 위해 예전에 스폰 제안을 했던 남자를 찾아가 무릎을 꿇는다.

흐음, 하고 생각해 보던 민찬이 준희에게 물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넌 어떻게 할래?”

“범수 형한테 돈 빌릴래.”

“아. 하하.”

귀여운 대답이긴 한데, 이 시나리오 속에는 범수 형이 없다. 영화에 등장했다가는 현실성 없다고 욕먹을 캐릭터이다.

“범수 형도 없고, 주변에 돈 빌릴 사람도 없어. 그러면 어떻게 할래?”

“씨.”

짜증을 낸 준희가 끙끙거리며 고민해 보다가 되물었다.

“형은 어떻게 할 건데? 내가 아프고, 형은 돈이 없는데, 신주경이 돈 줄 테니까 같이 자자고 하면, 잘 거야?”

“야이, 씨. 왜 또 여기서 신주경이 나오냐.”

“그 여자가 틈만 나면 형 언급하니까.”

그랬다. 블랙웨일즈의 해외 투어콘서트 중 LA MLB파크에서 열렸던 공연에 신주경이 나타났고 좋은 자리에서 지인과 함께 공연을 관람한 것이 꽤나 화제가 되었다. 신주경은 개인 SNS에 블랙웨일즈 공연 인증 사진을 올리면서 해시태그로 ‘#여민찬’을 걸었다. 그 덕분에 여민찬이 신주경을 공연에 초대한 것 아니냐는, 그야말로 허튼 소문이 기사로 떴었고, 당시 연예 뉴스 면이 한참 시끄러웠었다.

“하, 참나.”

신주경과는 일면식도 없는 민찬은 일단 혀를 차 놓고, 눈빛으로 추궁하고 있는 녀석의 끈끈한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며 고민해 보다가 대답했다.

“범수 형한테 빌릴래.”

“참나. 여기 범수 형 없다며.”

“생겼어. 좀 전에.”

“하! 그게 뭐야! 그러면 나도 범수 형한테 빌릴래!”

“어. 그래라 그럼.”

킥, 웃음을 터트린 민찬은 하하하! 하고 호탕하게 웃었다. 짐짓 삐진 표정을 짓고 있었던 준희도 결국 피식 웃음을 터트린 후에 따라서 상쾌한 소리로 웃었다.

마주 보고 꽤 오래 웃던 두 사람은, 영 이해할 수 없는 시나리오 따위는 던져버린 후에 푹 끌어안고 침대 못지않게 넓은 소파 위로 풀썩 드러누웠다. 준희를 꽉 끌어안고 맞댄 뺨을 비비던 민찬이 진지한 소리로 다시 대답을 했다.

“낮에는 전기설비하고…. 밤에는 막노동하고…. 그래도 안 모이면, 길거리 나가서 돈 받고 맞아드립니다, 그런 것도 하지 뭐…. 그렇게 벌면 언젠가는 돈 모이지 않겠어?”

“…….”

민찬이 말을 끝낸 후로도 한동안 조용하던 준희가 민찬을 안은 팔에 힘을 주며 자신 없는 소리를 했다.

“형은 좋겠다.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서. 나는 끽해야 볼펜 조립일 텐데. 볼펜 조립해서는 절대로 수술비 못 벌어.”

그런 소리를 한 준희는, 민찬이 “얌마. 그런 생각을 뭐 하러 해.”라며 다정한 소리로 타박하는 것을 듣고 난 후 아까보다 좀 더 자신감이 사라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까… 나는 스폰 제안 받아들일지도 모르겠어. 따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

“주먹 날아간다. 인마.”

쯧, 하고 혀를 찬 민찬이 그런 협박을 했고. 준희는 흥, 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이미 꽉 안은 녀석을 더 힘주어 안은 민찬이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프지 말자.”

준희가 민찬의 품 안으로 더욱 파고들어 가면서 대답했다.

“…어.”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대답을 해 놓은 준희가 민찬의 허리를 쓸며 말했다.

“형. 나 안아 줘.”

“응? 안고 있잖아?”

“말고. 넣어 달라고.”

“아…. 하고 싶어?”

“어. 왜? 형은 안 하고 싶어?”

“그럴 리가 있냐.”

하고 싶지만 한 지 얼마 안 되어 참고 있었을 뿐인 민찬이 말 안 되는 소리를 하는 녀석의 이마를 입술로 쥐어박은 후에 쪽쪽 소리를 내며 내려와 입을 맞추었다. 너무 자주 하는 것 같은데, 생각하면서도, 오늘은 어쩐지 기분상 반드시 해야 할 것만 같았기에 준희의 제안을 수용한 민찬은 준희를 밀어 눕히고 올라갔다. 차라리 앓다가 죽고 말지, 남에게 절대로 보내기 싫은 녀석에게 소유권 확인 도장이라도 찍듯이 묵직한 키스를 퍼부었다.

남들 앞에서 손으로 가리고 하는 가짜 키스도 진짜같이 해내는 두 사람이다. 실제 키스 시에는 그 합이 더욱더 좋았기 때문에 혀가 깊숙이 얽히는 키스를 몇 번 하다 보니 금세 흥분하여 꼿꼿하게 발기해버렸다. 아무래도 발기하는 속도가 날이 갈수록 빨라지는 듯했다. 준희의 입술을 잠시 놓은 민찬이 귓가에 코를 대고 흠흠 냄새를 맡으면서 속삭였다.

“우리 점점 더 빨리 서는 것 같지 않아?”

“응.”

“이러다가 나중엔 눈만 맞아도 세우겠는데?”

“하으, 간지러. 그래도 내가 눈 맞춤 사정거리가 하아, 가까우니까 다행이지. 하, 안 그랬으면 무대에서 공연하다 말고 계속 세웠을 거 아냐. 고맙지?”

준희의 귓구멍에 대고 흐흥, 하고 웃어서 안 그래도 비비 꼬고 있는 몸을 또 오그라트린 민찬이 대답했다.

“그래. 대단히 고맙다, 인마.”

그러면서 민찬은 말도 참 예쁘게 하는 예쁜 자식의 예쁜 입술을 다시 덮치고 쭈욱 쭉 빨았다. 다시 집착적인 키스가 시작되었다.

키스를 계속하면서 다분히 본능적으로 이동한 손들이 서로의 것을 만지기 시작했다. 옷 위로 만지는 것이 영 성에 안 찼던 준희는 민찬의 바지를 잡아 벗기기 시작했고, 야무진 손에 의해 빠르게 벗겨져 내려간 민찬의 바지와 속옷은 허벅지에 걸려있었다. 그래 놓고 준희는 민찬의 발기한 성기를 잡고 제 쪽으로 잡아당기면서 졸랐다. 빨리 넣으라고. 빨리 넣어 달라고. 근지러워서 진짜 돌겠다고.

준희가 졸라 대고 있으니 민찬은 빨아도 빨아도 질리지 않는 입술을 놓고 상체를 들었다. 티셔츠 아랫자락을 잡고 끌어 올려 벗어버리고, 준희의 윗옷 자락을 잡아 올렸다. 검은색 고래 문신과 대비를 이루어 더 하얗게 보이는 속살을 보며 입맛을 다시고, 벗기라고 팔을 번쩍 들어 주는 녀석의 티셔츠를 머리 위로 뽑아서 던져버렸다.

사라진 티셔츠와 함께 눈앞에 드러난 두 개의 연한 돌기는 절대로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 모양새였다. 하아, 하며 흥분하여 차오른 숨을 고른 민찬은, ‘어떻게 이렇게 생겼지?’ 싶은 준희의 젖꼭지를 물고 쭉쭉 빨았다. 그러자 준희는, ‘얘 지금 낑낑거리는 건가?’ 싶은 돌아버리게 귀여운 소리를 내며 신음했다. 민찬의 젖꼭지 애무를 받던 준희는 신음하고 몸을 꼬는 와중에도 민찬의 발기한 좆을 양손으로 잡아 제 쪽으로 당기고, 당기고, 또 당기고 있었다. 민찬은 물고 있던 젖꼭지를 놓고 올려다보며 웃는 낯으로 따졌다.

“그러다 늘어나 인마.”

“늘어나면, 하아, 좋은 거 아냐? 고맙지?”

“어. 하하, 고맙다 인마!”

숨찬 소리로 웃은 민찬은 준희의 바지와 속옷을 함께 잡아 내렸다. 멈추지 않고 발끝까지 내려 아예 뽑아버린 후에, 허벅지에 걸려있는 자신의 바지와 속옷도 내려서 벗어버렸다. 그러느라 잠깐 멀어진 좆을 놓쳐버린 준희는 다시 잡으려고 허공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런 준희의 손을 잡아 올려 소파 위에 붙여 놓은 민찬은, 하는 짓 하나하나가 귀여워서 미치겠는 녀석의 입술에 다시 키스했다.

시원스레 나신이 된 두 사람은 키스를 하면서 하체를 붙이고 비볐다. 최대치로 흥분하여 딴딴하게 부푼 성기 끝에서 나온 선액들로 미끌미끌해진 살덩이를 맞대고 비비면서 계속 키스를 하다가, 숨이 찰 지경으로 흥분해 버리고서야 키스를 멈추었다. 민찬이 푹푹 허리를 놀리면서 물었다.

“넣기 전에, 한 번, 하아, 빼 줄까?”

준희는 흠, 흐읍, 하고 숨을 몰아쉬면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냥 빨리 넣어 줘. 안에 근지러워서 미치겠어.”

말 참 예쁘게 한다니까, 생각하며 씩 웃은 민찬은,

“미치면 안 되지.”

하며, 준희의 한쪽 다리를 벌리고 소파 위로 올렸다. 활짝 벌린 엉덩이 사이로 오물오물 하고 있는 분홍색 구멍 안으로 쑤욱 파고 들어갔다.

“하아!”

공기 반 소리 반 섞인 팔세토의 신음 소리가 고막뿐만 아니라 손끝 발끝까지 짜릿하게 만들었기에, 민찬은 양손으로 짚고 있는 소파 가죽을 찢을 듯이 콱 부여잡아야 했다.

*

난데없는 타이밍에 시작된 섹스를 끝낸 두 사람은, 홀딱 벗은 채로 나란히 누워서 시나리오의 나머지 부분을 읽어 내려갔다. 그러는 동안 민찬은 시나리오를 들지 않은 손으로 준희의 고추를 내내 만지작거렸고, 준희도 민찬의 것을 잡고 주물주물했다. 그러고 보면 두 사람은, 스트레스 해소 아이템이라며 손에 쥐고 주무르도록 만들어진 인형 따위는 필요 없었다.

어쨌든, 남자는 익명의 자산가가 보태 준 돈으로 수술을 받게 되고, 여자는 돈 많은 남자의 정부가 되어 큰 무대에서 노래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남자는, 수술 후에 곁을 지켜 준 간병인의 헌신적인 사랑을 받아들이고 간병인과 함께 살기로 한다. 그렇게 두 사람의 인생은 결국 엇갈리고 만다. 장대 같은 비가 내리던 어느 날, 홀로 소주를 기울이던 남자가 티브이에 나오는 여자를 보며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 마지막 장면이었다.

민찬의 허벅지 위에 다리 하나를 올리고서, 내내 손으로 민찬의 것을 주물주물하긴 했지만 대체적으로 얌전히 경청하던 준희가 느낀 점을 말했다.

“해피엔딩이 아니네.”

“평점 높은 영화들은 대개 결말이 좀 그렇더라.”

그런 말을 하며 시나리오를 바닥에 내려놓은 민찬은 양팔로 준희를 꼭 끌어안았다. 여운이 많이 남는 엔딩인지라 가슴이 좀 헛헛했다.

내내 만지작대던 성기를 놓고 마주 끌어안은 준희도 마찬가지였다. 허무해진 가슴이 가득 차기를 바라면서 넓고 따뜻한 가슴에 푹 안겼다. 그리고 준희는 다리를 덜렁 들었다가 내려서 민찬의 허벅지를 다리로 감싼 후에 엉덩이를 밀어 움직이며 파고들어갔다. 그러고는 제 아래를 민찬의 아래에 맞추어 붙였다. 까슬까슬하게 맞닿은 음모끼리 슬금슬금 비벼지는 느낌이 간지럽다고 생각하면서, 준희는 민찬에게 속삭였다.

“다 읽고 나니까, 연희도 이해가 되고, 민욱이도 이해가 돼.”

“그러게. 어쩔 수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형은 그러지 마. 나 없다고 다른 사람 만나지 마.”

“알았다 인마. 고추가 푹 쉬어버리도록 수절할게.”

“좋아.”

“하하. 씨.”

스폰 제안을 받아들인 여자와 새살림을 차린 남자의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대강 이해해 주기로 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러지 말자고 합의한 두 사람은 그렇게 한동안 끌어안고 누워서 빈둥거리다가, 해가 다 졌을 무렵에서야 일어나 곡 작업에 들어갔다.

섹스하는 중에 벗어서 던져 두었던 고무줄 바지를 주워 와 고추가 안 보일 정도로만 대강 걸쳐 입은 민찬은 부스 앞에 앉아 어쿠스틱 기타를 잡고 라인을 만들었다. 민욱이 통기타 연주자였기 때문에, 어쿠스틱 기타에 피아노를 곁들인 서정적인 곡으로 만들어 볼 예정이었다. 눈을 감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감상을 손이 닿는 대로 쳐 보았다. ‘행복해 보이는 일상 뒤에 숨어있는 슬픔’을 노래로 만들어 보고 싶었다. 웃으면서 눈물 한 방울 흘리게 되는, 그런 느낌을 내고자, 장조의 멜로디 아래에 마이너 코드를 깔아 넣었다. 행복한 추억을 노래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아련하고 쓸쓸한 느낌이 드는 곡이었다.

그리고 준희는 팬티 한 장 걸쳐 입고 키보드 앞에 앉았다. 민찬이 연주하는 것을 귀 기울여 듣다가 따라 쳐 보면서 허밍을 했다.

따로 음악을 배우지 않은 준희가 만드는 코드는 정형화된 틀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늘 새로웠고, 그래서 민찬은 수시로 소름이 돋는 경험을 해야 했다. 그 위에 준희의 목소리가 입혀지는 순간에는 소름이 돋다 못해 피가 끓었다. 자칫 선을 넘으면 곡을 만들다 말고 발기할 수도 있을 법한 상태 직전까지 흥분이 되곤 했다.

제대로 시동이 걸려버린 작업은 이후로 몇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멜로디 작업을 끝낸 후에, 베이스기타와 드럼패드로 트랙을 만들어 놓은 민찬은 다시 에피폰을 들었다. 앰프의 게인 채널과 볼륨 노브를 최대로 올리고 픽업 사운드를 톤 다운한 상태로 메인 리프를 연주해 보았다. 바이닐 노이즈 사운드가 빗소리처럼 깔리는 것이 곡의 분위기와 그 느낌이 잘 맞았다.

눈을 감고 가만히 들어 보던 준희가 멜로디 위에 가사를 입혀 불러 보았다.

[우리 처음 만난 그날엔, 비가 왔어요. 그 비가, 차갑지 않았죠. 그땐.]

따뜻한 음색이 감돌도록 오버 드라이브 이펙터를 걸어 기타를 연주하던 민찬은, 준희가 첫 소절을 부르기 시작하자마자 가슴이 빠르게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뻐근해진 가슴을 달래고자 하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중간 음역대에서 읊조리듯 노래를 부를 때에 두드러지는 준희의 미성이 무척 매력적이었다.

[비와 함께 내린 당신의 노래가, 내 마음을 적셨어요.]

음역대가 넓은 준희의 목소리는 저음역, 중간음역, 고음역 할 것 없이 다 매력적이었다. 고음에서 지를 때의 허스키한 음색은 준희의 트레이드 마크라 불릴 정도로 유니크한 매력이 있었다. 그리고 미성이 두드러지는 중간 음역대를 지나 저음으로 내려가도 그 힘을 잃지 않았다. 한껏 낮추어 부를 때에는 섬세한 목관악기 같아진 목소리가 무척 따뜻했는데, 그 소리 또한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좋았다.

그런 목소리를 가진 녀석은, 섹스할 때 내는 신음 소리도 죽여줬다. 초반에 저음으로 시작한 낮은 신음이 고음역대로 올라가면, 머리가 주뼛 서고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칠 정도로 야하고 섹시한 소리를 내곤 했다. 이 세상에 오로지 저만 알고 있는 엄청난 소리였고, 어디다가 터놓고 자랑할 수도 없는 것인지라, 가끔 민찬은 대나무 숲에 가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라고 외쳤다는 그 옛날 그 아저씨의 심정이 이해가 되곤 했다. ‘제준희 섹스할 때 목소리 죽여준다!’ 하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 비가, 그 노래가, 이제는 눈물이 되어 흐르네요.]

장조의 멜로디에 입혀진 슬픈 가사와 마이너 코드의 반주가 만나자 가슴이 영 이상했다. 뭉클한 것도 같고 벅찬 것도 같았다. 덕분에 섹스 쪽으로 잠시 빠졌던 민찬의 정신은 다시 노래로 돌아올 수 있었다. 감동으로 벅차오른 가슴이 뻐근했던 민찬은 다시금 후우, 하고 한숨을 쉬었다. 팬티 바람으로 부르는 노래가 이렇게까지 감동적일 일인가, 싶었다. 인마는 좀 대충 부르지, 팬티 바람인 주제에 뭘 저렇게 정색하고 잘 부르나, 싶었다.

2절에서는 준희의 키보드 연주가 더해졌다. 기타 반주로만 이루어진 1절에서는 가사와 멜로디 그 자체에서 느껴지는 뭉클함이 있었다. 반면 키보드 반주가 더해진 2절에서는 한결 묵직해진 사운드 속에서 가슴속이 웅장해지는, 그런 감동이 더해졌다.

이제 클라이맥스를 앞두고 후렴에서 빌드업이 시작되었고, 민찬은 벅찬 가슴을 털어내고자 몸을 앞뒤로 흔들면서 힘차게 스트로킹을 했다. 민찬이 브릿지 연주를 하는 동안 좌우로 고개를 저으며 음악을 느끼던 준희가 흐음, 하고 큰 숨을 들이켠 후에 클라이맥스를 질렀다.

[행복한 가- 요-, 그댄. 행복한 가- 요-, 그댄, 그댄-]

아, 씨. 터지겠다.

민찬은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기에 아랫입술을 쿡 깨물어야 했다. 준희 녀석 얼굴이라도 보게 되면 진짜로 울어버릴 것만 같아서 시선을 낮춘 민찬의 눈에는 준희의 팬티가 걸려있었다. 안 울려고 일부러 거기에 시선을 두었는데, 어째 팬티 바람의 썰렁한 하체도 이제는 슬퍼 보이고 짠해 보이고 뭉클해 보였다. 그러고 있는데,

[행복한 가- 요- 그댄-]

준희의 전매특허라고도 할 수 있는 한 옥타브 올려 지르기가 시작되었다.

젠장.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진 민찬은 아예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며칠 후, 장범수와 배재민이 소환되었다. 가이드로 깔아 두었던 미디 트랙을 빼고 라이브 드럼과 베이스까지 제대로 녹음을 하기 위해서였다.

스튜디오 중앙 소파에 나란히 앉은 범수와 재민은 진지한 자세로 가이드 음원을 들어 보았다. 자신들이 앉아 있는 바로 그 소파 위에서, 노래 잘 만들고 연주 잘하고, 가사 잘 쓰고 노래 잘 부르는, 말하자면 음악 천재인 자식들이 수시로 달라붙어서 벌거벗고 뒹군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로 말이다.

전주에서부터 이미 좋았다. 쓸쓸한 느낌이 감도는 어쿠스틱 기타의 따뜻한 음색이 첫 귀를 사로잡았다. 그러다 준희가 첫 소절을 부르자, 늘 그랬듯이 “어휴.”, “하아.” 하면서 조용히 한숨들을 쉬었다.

첫 소절 이후로 이미 가만히 있지 못했던 몸들은 2절에 키보드가 더해지고 빌드업되면서부터 더욱 큰 반동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클라이맥스로 치달아 기타의 솔로 연주가 시작된 부분에서는 결국 보이지 않는 스틱과 베이스를 잡고 연주하기 시작했다. 언젠가 지미 제리 쇼에서 보였던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대고 하는 연주가 시작된 것이다. 지미 제리 쇼 당시에는 방청객들이 꽤나 재밌어하면서 한바탕 웃음이 지나갔었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웃지 않았다. 네 사람은, 네 사람만의 공감대 속에서 온몸으로 음악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준희가 한 옥타브를 높여 지르는 순간에는, 흔들던 몸을 멈추고 동시에 주먹을 콱 틀어쥐었다. 특히 장범수는 배재민의 튼실한 허벅지가 물소 가죽 소파인 줄 알고 그만 꽈악 틀어잡아 버렸다.

쓸쓸하고 외롭다 못해 서글퍼지는 기타 연주를 끝으로 노래가 끝났다. 몸에 너무 힘을 주고 들었던 나머지 진이 다 빠져버린 재민과 범수는, 못 말리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느리지만 묵직한 느낌의 박수를 짜악, 짜악, 보냈다. 마치. 새로운 무기로 신기술을 보게 된 조직의 두목과 그의 충직한 오른팔 같았다.

어쨌든 한번 들었으니 이제는 맞춰 볼 차례였다. 무대 위 각자의 지정석에 앉은 남자들은 제 악기의 세팅을 확인하고 사인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의 준비 상태를 눈으로 확인한 민찬이 준희에게, “준희야 간다?”라는 말로 신호를 보냈다. 야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한 준희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민찬의 기타 연주를 스타트로, 스틱 대신 브러시를 잡은 재민이 합류했고, 곧이어 장범수가 합류했다. 전주가 끝나갈 무렵, 음악에 심취한 나머지 미간을 잔뜩 구긴 준희가 첫 소절을 불렀다.

[우리 처음 만난 그날엔, 비가 왔어요. 그 비가, 차갑지 않았죠. 그땐.]

힘을 빼고 이야기하듯 부르는 노래에 깊이 이입한 연주자들 또한 표정이 한결 짙어졌다. 콧구멍을 잔뜩 넓힌 배재민은 흐음, 하고 커다란 콧숨을 내쉬며 박자에 맞추어 고개를 흔들었다. 장범수도 숙였던 고개를 한껏 젖히며 벅찬 숨을 토해 냈다. 그리고 눈가를 찌푸린 여민찬은, 아픈 사랑을 노래하고 있으니 평소보다 한결 애틋해진 녀석의 뒷모습을 한눈팔지 않고 바라보았다.

다년간 합주를 함께하여 손발이 잘 맞는 데다가, 네 사람 모두 각자의 파트에서 천재 소리를 듣는 인물들이었다. 무엇보다도 한 귀에 꽂혀 들도록 임팩트가 강한 곡이었다 보니 한 번 듣고 곧바로 들어간 합주에서도 얼추 맞아떨어졌다. 늘 그랬으니 별로 신기해하지도 않고 있는 네 사람은 수정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 의견을 던졌다. 주로 여민찬이 의견을 냈다.

“재민아, 싸비 두 번째에서 ‘그 비가’ 후에 필 인 할 때 크래시 심벌이 좀 더 세게 터져도 될 거 같아.”

“오케이.”

“형, 준희 한 옥타브 올린 다음에 코러스 세 마디째에서 B 마이너로 트랜스를 한 번 더 줄까?”

“이렇게?”

“어. 좋다. 그리고 준희는.”

재민과 범수에게 지적을 해 댄 여민찬은 준희에게로 다가가 어깨에 팔을 걸쳤다. 준희의 눈앞에 엄지를 들어 보이며 속삭였다.

“완벽해.”

우월동에 위치한 여민찬과 제준희의 자택 지하 스튜디오에서 원 테이크로 녹음한 음원은 곧바로 <비가>의 제작사 측에 전달되었다.

그리고 곧이어 들려온 소식은, 이 노래에 <비가>라는 제목을 붙이고 영화의 주제곡으로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블루오션 레이블의 대표로서, 블랙웨일즈의 모든 곡에 대한 판권과 유통을 책임지고 있는 장범수는 흔쾌히 오케이를 했다. 무려 한지승 감독의 러브 콜은 까버린 상멍충이 여민찬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마음이 상당 부분 해소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 비가의 주연으로 확정이 된 영화배우 석호진 측에서 연락을 해 왔다. 작중에 <비가>를 기타로 연주하는 장면이 꽤 있는데 곡의 원작자인 여민찬에게 개인적으로 코치를 받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한지승 감독의 제안을 까버린 일에 대한 송구한 마음이 채 가시지 않은 데다가, 홍보 측면에서 윈-윈 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고 판단한 장범수는, 제안을 수락하도록 여민찬을 압박했다.

한쪽은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밴드의 프로듀서이자 기타리스트였고, 다른 한쪽은 국내 탑 급의 영화배우였다. 피차 바쁜 사람들 간에 시간 조율이 어려웠지만 스케줄을 쪼개고 쪼개서 시간을 맞추었고, 약속 당일에 석호진이 매니저와 함께 우월동으로 찾아왔다.

한지승 감독이 시나리오를 쓴 영화가 제작에 들어간다는 소식에 한차례 떠들썩했었고, 블랙웨일즈의 여민찬이 주연을 고사한 것 때문에 또 한 번 더 크게 화제가 되었다. 이후로 여민찬이 곡을 만들어 주었다고 해서 또 연예 뉴스 란이 소란했는데, 이번에는 여민찬 대신 주연으로 발탁된 석호진과 여민찬이 만난다고 해서 또 한바탕 시끄러웠다. 게다가 두 사람은 과거에 신주경을 사이에 둔 삼각관계라고 엮여서 스캔들이 난 적이 있었다 보니 연예계는 한층 더 심하게 들썩거렸다.

그렇다 보니 우월동 근처에는 기자들이 꽤 많았고, 그래서 석호진은 공식 석상과 별 다를 바 없는 말쑥한 차림으로 등장했다.

그랬는데…….

대문을 열고 현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여민찬은 밑단이 넓은 트레이닝 팬츠에 티셔츠를 입은 지극히 내추럴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저 뒤에 헤드셋을 끼고 바닥에 납작 드러누워 있는 사람은 분명히 제준희였는데, 짧은 반바지에 헐렁한 티셔츠 차림이었다. 꽤나 차려입은 석호진은 슬쩍 무안한 기분이 들었으나 그래도 무안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요, 블랙웨일즈 노래 진짜 좋아해요. 특히 땅거미가 제 18번이에요. 두 키 낮춰서 부르긴 하지만요. 하하.”

“아, 예. 감사합니다. 저도 출연하신 영화 잘 봤습니다.”

예의상 한 말에 석호진이 “아, 그래요?” 하고 눈을 키우는지라 민찬은 아차 싶었다. 그래서 잡은 손을 얼른 놓고, 잠시만요, 하고는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준희에게로 갔다. 눈을 감고 흥얼거리고 있는 녀석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흥, 하고 웃은 후에 헤드셋 한쪽을 들어 올리고 말했다.

“석호진 씨 왔어.”

“아? 그래?”

그 말에 제준희는 발딱 일어나 무릎을 꿇더니 현관 근처에 서 있는 사람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그래서 여민찬은 또 흐흥, 하고 웃었고 공손하게 인사하는 모습도 오지게 예쁜 녀석의 정수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다가 또 아차, 싶어 얼른 손을 떼고 표정에 호기심이 가득해진 석호진에게 말했다.

“기타는 지하 작업실에 있어요.”

그렇게 말하며 엄지로 계단을 가리킨 민찬은 먼저 앞장을 섰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유명 영화배우는 연습 끝날 때 맞춰 데리러 오라는 말과 함께 매니저를 돌려보냈다. 은근히 함께 있고 싶어 하는 눈치였던 매니저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돌아갔다.

*

피차 바쁜 사람끼리인지라 통성명했으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야 했다. 석호진을 중앙 소파에 앉혀 두고 미리 만들어 둔 <비가>의 타브 악보를 건네준 민찬은 기타를 들어 건네면서 먼저 쳐 보라고 했다. 그리고 부스 앞에 놓여있던 의자를 끌어와 기타를 잡은 남자의 앞에 마주 보고 앉았다.

한지승 감독이 만드는 영화의 주연 자리를 노리는 배우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는 기타를 어느 정도 칠 줄 알아야 한다는 조건이 걸려있었기 때문에 많은 배우들이 이번 역할을 따내기 위해 기타 특훈까지 받았다는 뒷이야기가 있었다. 석호진도 마찬가지였다. 코드를 잡고 스트로킹하면서 ‘비바람이 치던 바다-’ 정도나 치는 수준이었던 그 또한 역할을 따내기 위해 기타를 새로 배웠었다. 그랬지만 역시나 새로운 곡을 듣고 단번에 쳐낼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그렇다 보니 세간에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악보조차 없는 <비가>를 미리 연습하기 위해 여민찬에게 직접 부탁을 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그런데, 기타를 끌어안고 악보를 들여다보던 석호진의 얼굴 위로 난감한 기색이 떠올랐다.

“아 저, 코드표 보는 건 배워서 코드 보면 대부분 잡고 칠 줄 아는데, 이런 악보는… 못 봐요.”

솔직하게 고백하는 말에 그럴 수도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여민찬이 악보와 기타를 검지로 가리키며 설명을 했다.

“코드표 운지 보고 따라 할 줄 알면 이것도 금방 봐요. 여기 줄 여섯 개가 현이고, 여기 이 숫자는, 프랫 번호에요.”

“프랫… 이요?”

“여기가 1이고, 순서대로 2, 3 ,4, 이렇게요.”

“아.”

원래 기타를 좀 칠 줄 알았다 했고, 역할을 위해 기타를 다시 배웠다고 들었는데, 타브 악보 보는 법도 모르는 상태인 남자에게 짜증이 날 법도 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여민찬은 어투에 감정을 싣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담담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귀담아 듣던 석호진이 맹한 얼굴로 물었다.

“0도 있는데?”

“0은 개방현이에요. 아무것도 짚지 말고 그 줄을 치면 돼요.”

“아아.”

설명을 들은 석호진은 악보와 운지판을 번갈아 보면서 첫마디를 연주해 보았다. 느릿느릿 이어진 둔탁한 연주에 하, 하고 소리 없이 한숨을 한 번 쉰 여민찬은 “잘하셨어요.” 하고 영혼이 깃들지 않은 칭찬을 했다.

아무래도, 준희에게 기타를 가르쳐 주었을 때와 비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는 악보 설명 따위 필요 없었다. 음계 짚는 법을 알려 주고 난 후 코드 잡는 법을 알려 줬는데 귀 밝고 영민한 녀석은 어느새 슬라이딩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박수 치는 소리에서도 음계를 잡아내는 절대음감을 가진 녀석이다 보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준희는 땅거미에 스트링 세션을 넣어 주기 위해 오케스트라가 왔을 때 바이올린을 한번 잡고 소리를 내 보더니, 미친놈이 세상에, 곧장 땅거미의 클라이맥스를 연주했었다. 모노톤이긴 했지만 꽤 듣기 좋았던 연주 후에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이 크게 박수를 쳐 주었었다. 바이올린을 생전 처음 잡아 보는 놈이 설명도 듣지 않은 상태에서 손끝의 감에 의지해 음악을 만들어 내는 걸 보고 민찬은 잠깐 소름이 돋았었다. 그런 녀석을 가르쳤으니, 가르치는 내내 신나고 신기하고 재밌었다. 게다가 녀석은 얼굴까지 예쁘고 성격도 귀엽다. 그런데 여기 이 남자는…….

“저기, 2번에서 7번으로 어떻게 가요?”

어떻게 가긴. 날아서 가라 인마.

음악적 센스가 평범 이하인 데다가 전혀 귀엽지도 않은 남자의 질문에 속으로 투덜거린 민찬은 말없이 일어나서 다른 기타를 가져왔다. 그리고 석호진이 물어본 질문에 대한 답을 시범으로 보여 주었다.

“아하. 와아. 손이 크니까 그게 그렇게 쉽게 되네요. 하하?”

안 웃기거든?

또 속으로 투덜거린 민찬이 “해 보세요.”라고 턱짓으로 지시했다. 석호진은 또 더듬더듬 연주를 해 보았다. 2번에서 7번으로 넘어갈 땐 바로 짚지를 못해서 꽤 한참이나 퍼즈가 지나갔다. 하아. 또 소리 없이 한숨을 쉰 민찬이 테이블 위에 굴러다니던 볼펜을 들고 악보를 수정했다.

“단번에 잡기 힘들면 5번줄 4프랫으로 바꿔도 돼요.”

“5번줄… 4프랫….”

가만히 지켜보던 민찬이 지판 위를 배회하고 있는 손가락을 잡아 5현 4프랫 위에 올려 주었다. 무안했는지 귓가가 살짝 붉어진 석호진이 감사 인사를 했다.

“아. 감사합니다.”

감사할 시간에 연습이나 해.

또 속으로 투덜거린 민찬은 뒷부분의 같은 라인도 운지하기 쉬운 전개로 수정했다.

그 이후로 한동안 민찬은 석호진에게 운지법을 알려 주고, 시범을 보여 주고, 안 되면 아예 손가락을 잡아 직접 옮겨서 짚어 줘 가면서 <비가>의 주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다가 연습해도 안 되겠다 싶은 건 아예 일반인이 치기 쉽도록 수정해버렸다.

그러고들 있는데 스튜디오의 문이 열렸다. 악보를 수정하던 민찬은 반짝! 웃음을 지으며 휙 고개를 들고 틀어 문 쪽을 보았다.

석호진은 이제껏 표정이나 텐션의 변화가 거의 없었던 남자의 갑작스러운 돌발 행동에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민찬은, 지금까지 석호진과 대화할 때보다 한 톤 정도 높아진 소리로 반겼다.

“준희 왔어?”

문을 연 사람은 당연하지만 준희였다. 그런데 그냥 준희가 아니었다. 한 팔엔 주스 병을 끼고, 주스 병을 팔에 낀 그 손으로 컵이 올려져 있는 쟁반을 들고서, 나머지 한 손으로 문을 여느라 낑낑대고 있는 준희였다. 민찬은 꼴도 보기 싫은 악보 따위 밀쳐버리고 냉큼 달려가 낑낑대고 있는 녀석을 도왔다. 얼른 컵이 놓인 쟁반을 받아들었는데,

“아하?”

민찬은 그만 웃음을 터트려버렸다. 쟁반 위에는 두 개의 컵뿐만 아니라 사과를 깎아 담은 접시도 있었는데, 그냥 사과가 아니었다. 언젠가 민찬이 준희에게 만들어 주었던 토끼 모양 사과였다.

“얌마! 하하! 손 다치면 어쩌려고 이런 걸 만들었어!”

걱정이 담긴 타박을 하면서도 민찬은 웃고 있었다. 웃다가 또 감상을 말했다.

“토끼들이 왜 이렇게 못생겼어? 어! 얘는 귀가 떨어질라 그런다. 하하하!”

“씨. 그냥 먹어. 입에 들어가면 맛은 똑같아.”

그 소리에 민찬은 또 허리를 숙이며 웃었고, 준희는 그러는 남자를 잠시 흘겨보았다. 그러다가 옆구리에 끼고 있던 주스 병을 민찬에게 건넨 준희는 석호진 쪽을 향해 또 꾸벅 인사를 하며 말했다.

“좋은 시간 되세요-”

“아하하! 인마가 지금 뭐라는 거야!”

클럽 종업원 같은 소리가 영 웃겼던 민찬은 주스 병과 쟁반을 들고 서서 허리를 젖히며 포복절도했다.

흠, 하며 거참 웃음이 헤픈 남자를 잠시 지켜보던 준희가 “그럼 계속 수고해?” 하면서 스튜디오 문을 열고 나갔다.

애틋함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준희가 나가고 닫힌 문을 잠시 바라보던 민찬이 빙글 몸을 돌렸다. 미소가 채 지워지지 않은 얼굴을 하고서 쟁반과 주스 병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는 자랑질을 했다.

“저 자식 눈도 나쁜데, 이거 만드느라 되게 애썼을 거예요. 하 참나. 귀여워 죽겠네 진짜. 하하. 씨.”

그러고는 “주스 드실래요?”라고 물었다. 슬쩍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던 석호진이 빙긋, 웃음을 연기하며 “네, 주세요.” 했다.

민찬은 석호진에게 주스를 따라 건넸고, 포크 하나도 석호진 쪽으로 놓아준 후에 나머지 포크를 들어서 토끼 사과 한 마리의 궁둥이 부근을 콕 찍어 들었다. 도저히 잘했다고 할 수 없는 사과를 보며 킥, 하고 또 웃음을 터트린 후에 서걱, 한 입을 베어 물었다. 그러고도 여전히 웃는 낯인 남자를 가만히 관찰하던 석호진이 느낀 바를 말했다.

“여민찬 씨 생각보다 되게 잘 웃으시네요?”

“에?”

“방금 전까지는 좀 무뚝뚝한 성격인 줄 알았는데, 준희 씨 앞에선 딴판이에요. 다른 사람 같아.”

“아. 그런가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 한 석호진도 포크를 들어 토끼 사과를 찍어 올리고는,

“진짜 귀엽네요.”

하고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서걱, 한 입을 베어 물었다. 그 순간에, 제준희의 등장과 함께 붕 떴었던 분위기가 또 슬쩍 가라앉았다.

방음이 완벽한 곳이라 너무 고요했다. 두 사람이 사과 씹는 소리만 석석 들리는 가운데 사과 조각을 마저 씹어 삼킨 석호진이 흠,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짐짓 가벼운 투로 말하려고 노력하며 물었다.

“신주경 알죠?”

“네. 뭐.”

민찬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청순하고 건강한 이미지로 인기 몰이 중인 대세 여배우였다. 무엇보다도 블랙웨일즈의 팬이며 특히 여민찬을 좋아한다고 당당하게 밝힌 덕분에 제 이름이 엮인 기사가 여러 번 났었던지라 모를 수가 없었다.

“주경이가 민찬 씨 팬인 것도… 알죠?”

여민찬은 “네, 그야.” 하며, 이전과 엇비슷한 대답으로 얼버무렸다. 별로 화제 삼고 싶지 않다는 의사가 다분히 엿보이는 남자의 표정과 대답을 관찰하던 석호진이 또, 흠, 하고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내가 오늘 민찬 씨 만난다니까 주경이가 노골적으로 부탁했어요. 다리 놔 달라고.”

민찬은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쓰게 웃었다. 입꼬리만 겨우 끌어올렸다가 마는 웃음은 누가 봐도 건성이었고, 청소년기에 연기를 시작한지라 연기 경력이 10년 가까이 되는 석호진은 표정으로 드러난 거부의 의사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주경이에겐 미안하지만 더 물어봐야 소용없겠네, 생각하며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예 다른 질문을 했다.

“민찬 씨 혹시…, 그쪽이에요?”

“네?”

그쪽이냐니? 질문의 요지를 파악할 수 없었던 민찬의 미간이 슬쩍 좁아졌다. 양 팔꿈치를 허벅지에 기대어 구부정했던 자세를 펴고 바로 앉은 석호진이 다시 말했다.

“아, 미안해요. 대뜸 그렇게 물으면 역시 당황스럽겠지요.”

그래놓고, “음….” 하고 짧은 시간 고민해 보던 석호진이 난데없는 발언을 했다.

“사실은, 저도 그쪽이거든요.”

민찬은 아까 찡그렸던 인상을 펴지 않고서 되물었다.

“아까부터 그쪽 그쪽 하는데, 대체 그게 뭔데요?”

석호진은, 표정은 물론이고 말투까지 슬쩍 까칠해진 남자를 관찰하다가 빙그레 웃었다.

“저, 남자 좋아해요. 게이에요. 아, 엄밀히는 바이인가. 여자도 가능하니까.”

그제야 ‘그쪽’이 뭔지 알게 된 민찬은, 찡그렸던 것을 다 펴지 않고서, 알아들었다는 의미를 담아 “아.” 하면서 고개만 두어 번 설렁설렁 끄덕였다. 뭐, 놀라운 고백이긴 한데,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가, 싶었다.

여전히 경계를 하고 있는 듯한 남자를 또 잠시 살피던 석호진은 더 자세하게 얘기를 했다.

“이쪽, 그러니까 연예계 쪽에 의외로 꽤 많아요. 까다로운 조건하에 가입 가능한 사교 클럽도 몇 개 있고요. 회원들 이름 들으면, 아마 민찬 씨, 꽤 놀랄걸요?”

꽤 놀랄 거라는 소리에 놀라기는커녕 그저, 그러냐고, 또 고개만 두어 번 끄덕끄덕하는 남자에게 석호진이 연관된 또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요즘 모임 때 제일 핫한 주제가 뭔지 알아요?”

내가 어떻게 아냐? 싶었던지라 뚱한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는 민찬에게 석호진은 곧장 답을 말해 주었다.

“블랙웨일즈요.”

그 소리에 이리 저리로 의미 없이 움직이고 있었던 눈동자가 불현듯 멈추었다. 그런, 놓치기 쉬운 레이더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석호진이 첨언을 했다.

“모였다 하면 민찬 씨랑 준희 씨가 이쪽 맞다 아니다 논쟁하느라 시끄러워요. 다들 관심 엄청 많거든요. 찌라시가 진짜인지 아닌지.”

그런 말을 해 놓고 흐흥, 웃으면서, 딱히 맞다 아니다 대답을 하지 않고 있는 상대방의 표정 변화를 살피던 석호진은 더 솔직해지기로 했다.

“사실 저, 기타 가르쳐 달라고 한 거는 약간은 핑계였어요. 제 시간에 편하게 맞춰 주시는 기타 선생님도 이미 계시고요.”

이 대목에서 민찬이 인상을 한 번 세게 구겼는데, 그에 뜨끔한 석호진이 얼른 부연을 했다.

“아. 오해는 하지 마시구요. 물론 미발표곡 악보도 미리 받고 원작자 연주도 듣고 싶어서가 첫째 이유였어요. 한 번 만나서 다 배워 가겠다는, 그런 마음으로 온 건 아니라는, 그런 뜻이에요”

미간을 콱 구기고 있었던 민찬의 표정이 아주 약간 폈다. 안 그래도 악보 줄 테니까 집에 가서 혼자 죽어라 연습하라고 할 참이었다. 과외를 받든, 학원을 가든, 그건 제 알 바 아니고 말이다. 민찬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석호진은 혼자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민찬 씨가 깐 자리에 주연으로 발탁된 거라 처음엔 자격지심도 없진 않았어요. 저는 전문 배우고, 민찬 씨는 전문 배우도 아니잖아요? 그런 마음도 없진 않았는데, 뭐, 따지고 보면 민찬 씨가 까준 덕분에 저한테 기회가 온 거니까요. 하하.”

민찬은 따라 웃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그래서 나더러 뭐 어쩌라는 건가, 그 생각만 팽배했다. 기타 안 배울 거면 빨리 꺼지라고도 하고 싶고. 준희랑 놀게 말이다. 민찬은 지금, 하등 궁금하지도 않은 소리나 주절거리고 있는 남자는 치워버리고, 당장 올라가서 준희한테 토끼 사과나 다시 만들어 보라고 시켜 보고 싶었다. 그거 만들 때 사과를 코앞에 붙이고 인상을 푹 썼을 거라는 상상만 해도 귀여워서 가슴이 다 아팠다. 민찬이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는 것 역시 알지 못하는 석호진은 계속해서 마음의 소리를 늘어놓았다.

“민찬 씨도 알겠지만, 연예인이다 보니, 이쪽 사람 만나기가 쉽지 않거든요. 일반인 만났다가 소문이라도 새 나가면 그것도 또 곤란하고요. 그래서 같은 처지인 연예인들끼리 모일 수밖에 없더라고요. 서로서로 비밀 지켜 줄 것을 믿으니까.”

그건 뭐 그렇겠네. 생각하고 있는 민찬의 표정이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여전히 미간 사이의 한 줄 옅은 주름은 남아있었다. 왜 자기가 이런 얘기를 들어 주어야 하는지 여전히 이해불가였다. 게이 연예인들 사정이 그렇거나 말거나, 자신은 준희만 옆에 있으면 그만인데 말이다.

“그래서, 민찬 씨랑 준희 씨, 꼭 한번 사적으로 만나 보고 싶었어요. 만약 같은 쪽이면, 제가 속해있는 클럽 소개해 주려고요. 꽤 재미있을 거예요. 분위기도 프리하고요. 아무래도 비밀 유지가 중요하다 보니까 가입 시에 인지도 레벨을 꽤 따지는데, 민찬 씨나 준희 씨라면 무조건 가입 가능해요. 아마 다들 은근히 기다리고 있을걸요?”

아주 길고 긴 말을 마친 석호진은 양손을 펼쳐서 손바닥을 내밀어 보였다. 이렇게까지 얘기했으니, 이제 어디 한 번, 얘기해 보시라고. 그쪽이 맞는지, 아닌지.

대답을 기다리느라 눈을 빛내고 있는 석호진에게 한쪽 눈가를 기울인 민찬이 물었다.

“제가 뭔가 대답을 해야 합니까?”

“아?”

맞다, 아니다가 아니라 ‘대답하기 싫다.’였다. 아니면 아니라고 하면 될 텐데 대답하기 싫다는 남자의 슬쩍 매서워진 표정을 살피던 석호진은 누구나 호감 가질 수밖에 없는 편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뇨. 대답을 강요하는 건 아닙니다.”

그리 말한 석호진은 악보의 귀퉁이에 전화번호를 적은 후에 악보가 손상되지 않도록 조심조심 찢어서 민찬 쪽으로 밀었다.

“제 개인 핸드폰 번호예요. 생각 있으면 언제라도 전화 주세요.”

팔짱을 끼고, 번호를 내려다보던 민찬이 시선을 들고 석호진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그런 일로 연락할 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

“아.”

꽤 당황한 듯 눈을 키웠다가, 이내 하하, 하고 웃은 석호진이 말했다.

“멤버 중에 민찬 씨 앓는 친구들이 꽤 있어요. 왜들 그러나 했더니만, 민찬 씨 진짜 매력 있구나.”

하등 관심 없는 소리에, 팔짱을 끼고 다리도 꼬고 앉은 민찬은 믹싱 부스 쪽에 시선을 두고 심드렁한 낯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음, 하고 간격을 메운 석호진이 또 다른 고백을 했다.

“저는 준희 씨 쪽이 취향이에요.”

그런데 그 한다는 소리가 그야말로 가관인지라 민찬의 눈가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의지와 관계없이 독살스러워진 눈동자를 돌려 석호진 쪽을 보니, 제대로 노려보는 형색이 되어버렸다.

떠보는 말을 할 때부터 대강 예상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한층 반응이 세다고 생각하며, 석호진은 얼른 사과를 했다.

“어? 하하. 죄송해요. 화났어요?”

화가 난 정도가 아니고, 무관심했던 인물에게 악감정까지 생겨버린 민찬이 살벌하게 노려보던 눈을 거두고 일어섰다.

“필요한 자료 있으면 보내드릴 테니까, 매니저 통해 연락 주시죠.”

“예?”

여전히 쇼파에 앉은 채인 석호진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새끼. 배우 아니랄까 봐. 연기하고 앉았네.

속으로 한껏 비아냥거려 준 민찬은 못 알아듣는 척을 하고 앉아있는 능청맞은 연기자 새끼에게 다시 제대로 의사를 전달했다.

“계속 쓸데없는 소리 하는 것 보니까, 기타가 목적이 아닌 것 같아서요. 이만 일어나시죠.”

*

퇴거명령과 다를 바 없는 소리를 해 놓고는 먼저 올라가 버리는 남자를 따라 올라올 수밖에 없었던 석호진은 현관문 옆에 팔짱을 끼고 버티고 선 남자가 온몸으로 전하고 있는 메시지에 따라 곧장 현관 쪽으로 향해야 했다. 벗어 두었던 신발을 신으며 사과했다.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친해지고 싶어서 그런 건데.”

준희가 취향이라는 남자와 친해질 마음 따위 전혀 없는 민찬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뭉그적거리지 말고 빨리 나가라, 그런 의미를 담은 눈으로 석호진의 발끝만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던 그때,

타박타박 맨발 소리와 함께 2층으로 이어진 계단 쪽에서 누군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민찬이 휙, 고개를 돌렸고, 신발을 신던 석호진도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당연하지만 2층에서 내려온 사람은 준희였다.

“어? 벌써 가시- 읍?”

준희는 하던 말을 끝맺지 못했다. 성큼성큼 다가와 준희의 입을 막아버린 남자가 어깨를 단단히 감싼 채로 밀었기 때문이다.

비틀비틀 뒷걸음질을 치는 녀석이 넘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잡고 주방 쪽으로 밀면서, 민찬은 뒤쪽에 대고 대충 외쳤다.

“안녕히 가세요!”

*

안경 너머 눈이 휘둥그레졌을 녀석을 식탁 의자에 앉혀 놓고 난 후, 고개를 빼서 현관의 상황을 살피고 돌아온 민찬에게 준희가 물었다.

“뭐야? 왜 그래?”

민찬은 소리를 잔뜩 죽여 속삭였다.

“저 자식 완전 변태야.”

그렇게 말해 놓고 민찬은 슬쩍 찔렸다. 사실 석호진이 ‘변태’라고 할 만한 말이나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준희가 취향이라는, 그 말 한마디만으로도 민찬에게는 충분히 변태이며 상종 못 할 잡놈이었다.

“변태라고? 석호진 씨가? 왜?”

하고 물음표를 남발하던 준희가 “헉!” 하고 기함을 하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석호진 씨가… 형 거기… 만졌어?”

“아니거든!”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확 끼치는지라 버럭 소리쳐 놓고 나니 준희의 입이 샐쭉 튀어나왔다. 아차, 싶었던 민찬이 사과를 하려는데 준희가 중얼거렸다.

“밀폐된 공간에 단둘이 같이 있었는데 변태라고 하면, 그런 생각 할 수밖에 없는 거 아냐?”

튀어나온 입술뿐만 아니라 어투에서도 섭섭한 기색이 물씬 묻어나는지라, 몹시 당황하여 “아씨” 하며 뒷머리를 벅벅 헝클인 민찬은 식탁 의자 하나를 더 꺼내어 준희의 앞에 마주 앉았다. 그리고, 석호진이 이미 돌아간 것을 눈으로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안심이 안 되어 잔뜩 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석호진 그 자식, 게이래.”

“아아- 진짜?”

“어. 기타는 구실이고, 연예인 게이 클럽? 뭐 그런 거에 끌어들일 목적으로 왔나 봐.”

“아아- 그래? 근데 왜 변태야?”

그렇게 되묻고 있는 준희의 하얀 미간이 슬쩍 구겨졌다. 자신도 남자를 좋아하고 남자랑 섹스하니까 결국은 게이인데, 게이라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변태라고 칭한다는 사실이 기분 나빴다. 그러는 지는? 싶기도 했고 말이다.

준희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졌기 때문에 잠시 눈치를 본 민찬은,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린다는 듯 으으, 하며 진저리를 치더니 여전히 잔뜩 낮춘 소리로 속삭였다.

“그 자식, 너한테 흑심 있어.”

“엥?”

“어.”

“아.”

그런 말 같지 않은 소리들이 오간 후 잠시 정적. 이어서 준희는 좀 전에 했던 말과 토씨 하나 안 틀린 소리로 다시 물었다.

“근데 왜 변태야?”

“뭐?”

“나한테 흑심 있으면 변태야? 그러면 형은?”

“어? 어….”

할 말이 없어진 민찬이 멍청해진 얼굴로 말끝을 끄는 사이 픽, 하고 웃음을 터트린 준희가 안경을 벗어 식탁 위에 두고 손을 뻗었다. 민찬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서로의 코가 닿을 정도까지 얼굴을 가까이 한 후 물었다.

“토끼 먹었어?”

“토끼?”

“토끼 사과.”

그제야 “아아-.” 하고 알은체를 한 민찬이 씩 웃으며 대꾸했다.

“먹었지.”

“어디부터 먹었어?”

흥, 하고 웃음을 터트린 민찬은 코를 붙이고 물어 대는 녀석에게로 팔을 뻗었다. 엉덩이를 감싸 쥐고 끌어와 제 허벅지 위에 앉혀 두고는, 원하는 대답을 해 주었다.

“엉덩이부터 먹었지.”

민찬의 허벅지 위에 올라앉아 시선이 높아진 준희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이제는 코끝이 아니라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한 지경까지 얼굴을 붙이고 속삭였다.

“맛있었어?”

“어.”

준희는 민찬의 양 뺨을 잡고 있던 손 중 하나를 내렸다. 각진 어깨부터 단단한 팔을 쓸고 내려가 제 엉덩이를 감싸 잡은 손을 끌어올려 제 바지 안으로 집어넣으면서 물었다.

“이쪽 토끼 엉덩이도 맛볼래?”

“하하. 씨.”

노골적인 유혹에 어이가 없었던 민찬이 웃음을 터트리자, 흐음, 하고 뜨거운 콧숨을 내뿜은 준희가 나머지 한 손을 내려 민찬의 아래를 잡고 만졌다. 꽤나 힘을 주어 주물럭거리는 손길 덕분에 꼴릿했던 민찬은 눈가를 찌푸렸다가 펴면서 웃는 낯으로 한소리를 했다.

“어쭈, 아주 막 만지네? 이쪽 토끼도 변태였구만-”

흥, 하고 웃은 준희가 웃음기를 지우고 물었다.

“형은?”

“어?”

“제준희한테 흑심 있는 게이는 변태라며. 형은 어떤데?”

그런 말을, 제 성기를 전투적으로 주물러대며 하고 있었다. 헛웃음의 끝에 흠, 하며 신음을 흘려야 했던 민찬이 대답했다.

“변태지. 완전 상변태지 나는.”

제준희 좋아하지. 완전 사랑하지 나는.

원했던 대답을 듣고 그제야 만족한 준희는 씩,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아무래도 세상에서 제일 예쁜 거 아닌가, 싶은 상큼한 미소 덕분에 여유가 없어진 민찬의 얼굴 위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하아, 하고 큰 숨을 내쉬면서 오싹하게 올라오는 성감을 다스린 민찬은 준희의 입술을 힘껏 덮쳤다. 매력이 차고 넘치다 보니 데뷔 후 온갖 데에서 마수를 뻗고 있는 녀석에게 제 거라고 도장이라도 찍듯이, 깊고 짙은 키스를 했다.

키스를 하면서 민찬의 목덜미 위에 올린 손가락을 움직여 날짜를 헤아려 본 준희가 입술을 물렸다.

“오늘은 해도 되지?”

흥, 하고 웃은 민찬이 고개를 끄덕였고, 허락에 만족하여 씩 웃은 준희는 다시 민찬의 입술을 덮치고 빨았다. 혀를 얽고 쭈욱쭈욱 빨다가 넘어오는 타액을 삼켜내고 말했다.

“나는, 하아, 형이랑 키스하는 거, 진짜 좋아.”

말하는 중간 중간에 입을 맞춰 대고 있는지라 쪽, 쪽, 소리가 들어가 있었다.

준희가 하는 짓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귀여웠던 민찬은 으이구- 하면서 준희의 몸통을 꽉 끌어안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팔의 근력이 보통이 아닌 기타리스트에게 끌어안긴 채로 흔들리고 있는 준희는, 으앗, 아앗, 하면서, 올라앉은 허벅지 위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엉덩이에 힘을 주고 중심을 잡아야 했다. 한동안 준희를 안아 흔들던 민찬이 제안했다.

“침실로 갈까?”

준희는 민찬의 목을 끌어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대답했다.

“가다가 쌀 것 같아.”

“하하, 개냐. 아무 데나 막 싸게.”

민찬의 짓궂은 소리에 준희가 곧장 대답했다.

“멍.”

개 맞다고.

제 어깨 위에 입술을 대고 작게 짖는 소리가 너무 귀여웠던지라 민찬은 머리가 다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기분만 그랬던 것이 아니었는지 민찬의 성기가 꿈틀했고, 맞대고 있는 성기를 통해 발정을 고스란히 느낀 준희가 흥, 하고 웃었다.

“형도 개네. 개 짖는 소리에 꼴리는 거 보니까.”

“흐흥, 그러네.”

민찬도 따라 웃었다.

얼굴 맞대고, 거기도 맞대고, 킬킬대면서 웃는 와중에도 흥분감에 훅훅 숨을 몰아쉬다가 준희가 말했다.

“개들끼리는 원래 아무 데서나 막 하는 거잖아. 우리 여기서 그냥 하자. 전봇대 앞에서 하자곤 안 할게.”

하하하! 하고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린 민찬이 “고맙다 인마.” 하며 준희의 이마를 제 이마로 콩 찍었다.

실없는 농담과 함께 초 단위로 웃음이 터지고는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 두 사람 모두 여유가 없었던 지라 가벼운 웃음이 금세 사그라졌다. 두 사람은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짙어진 눈동자를 마주한 채로 깊어진 숨결을 느꼈다.

민찬은 준희의 엉덩이 위를 쓰다듬던 손 중 하나를 올렸다. 검지와 중지로 준희의 입술을 두드리자 준희는 입술을 크게 벌리고 손가락을 빨았다. 성기라도 빨듯이, 손가락 끝을 쭙, 쭙, 빨다가 혀를 내밀어 남들보다 옹골진 손가락 관절 마디를 핥았다.

손가락이 빨리고 핥아지는 느낌 자체도 몹시 야릇했지만, 눈꺼풀을 살포시 내리고 손가락을 빠는 녀석의 표정이 참을 수 없이 야했다. 그걸 보고 있자니 입안이 다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던 민찬은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여야 했다. 그러고도 안 돼서 축인 입술을 쿡 물며 눈가를 찌푸렸다.

시각적 자극이 너무 심했다. 이거 이러다가 손가락 빨리다 말고 싸버리겠다 싶었던 민찬은 준희의 타액으로 흥건해진 손을 빼냈다. 계속 빨겠다고 따라오는 녀석의 머리를 다른 손으로 잡아 말려야 했다. 그리고 젖은 손가락을 내려 제 허벅지 위에 올라앉은 녀석의 바지 안으로 밀어 넣었다. 엉덩이 가운데를 벌린 손가락은 곧장 구멍을 찾아 안쪽으로 미끄러졌다. 준희는 타액이 흘러 번들거리는 아랫입술을 끌어 물며 신음했다.

“흐으…. 하아….”

준희가 굳이 참지 않고 신음을 흘릴 때, 민찬의 목울대도 크게 오르내렸다. 몹시 흥분해버린 남자의 팔뚝 위에는, 클라이맥스에서 고속으로 트릴을 연주할 때와 마찬가지로 핏줄과 심줄이 툭툭 불거져 있었다. 남들보다 한결 긴 손가락이 휘젓고 있는 아래에서는 쿨쩍쿨쩍 하며 음란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고개를 크게 젖혔던 준희가 흐읏, 하고 신음하며 고개를 숙였다. 각진 어깨 위에 이마를 묻었다.

어느 정도 풀어져 눅진해진 곳에서 손가락을 빼낸 민찬은 준희의 바지허리를 잡고 내렸다. 준희는 바닥에 닿은 발에 힘을 주어 엉덩이를 들어 주었다. 그러면서 민찬의 바지와 속옷을 내리고 이미 심하게 발기한 채로 눌려 있었던 성기를 잡아 꺼냈다.

준희는 민찬의 성기를 잡지 않은 다른 손에 제 침을 묻혀서 단단하게 일어선 기둥을 훑었다. 그리고 다시 다리에 힘을 주어 엉덩이를 들었다. 눈치껏 손가락을 빼 주는 남자의 성기 끝에 제 아래를 비비면서 위치를 맞추다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민찬은 준희가 넣기 편하도록 의자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서 비스듬하게 등을 기대야 했다. 준희의 허리를 잡은 손과, 식탁 의자 한쪽을 지지한 손 위로 잔뜩 힘이 들어갔고 심줄과 핏줄이 불거졌다.

“흐, 하아….”

심호흡을 하면서 허리를 내리는 준희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민찬의 허벅지 위에 준희의 엉덩이가 바짝 닿고 눌렸을 정도로 깊은 삽입이었다. 미간을 잔뜩 찡그린 준희가 밭아진 숨 사이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하, 너무, 하, 깊어, 하, 심장이, 하아, 찔리는 거 같아.”

“하하, 얌마, 그렇게 길진 않거든? 아파? 아프면 조금 일어나 봐.”

“아냐. 하아, 좋아. 좋아서 그래. 하, 심장이, 형 거에 찔린 데가, 학, 막 찌르르해.”

“거기까지 안 찔렀다니까!”

민찬은 숨찬 소리로 웃었다. 웃다가 말고 윽, 하고 인상을 썼다. 준희 녀석이 엉덩이에 힘을 꽉 주자 바짝 조여드는 느낌이 대단했다. 준희의 말대로 누워서 할 때보다 삽입이 한결 깊었다 보니 성기를 지나 뱃가죽까지 조이는 듯한 성감이 강렬했다.

준희는 한 손으로 식탁 모서리를 꽉 부여잡고 다른 손으로는 민찬의 어깨를 잡은 채 중심을 잡고 있었는데, 발딱 일어나 뱃가죽 위로 붙어 있는 성기 끝에서 벌써부터 줄줄줄 선액이 흐르고 있었다. 한 손은 준희의 허리를 감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준희의 성기를 잡아 죽죽 훑던 민찬이 물었다.

“움직일 수 있겠어?”

가만히 생각해 보던 준희가 또 인상을 쿡 쓰면서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못 움직이겠다고.

하하, 하고 여유 없는 소리로 숨차게 웃은 민찬이 구박을 했다.

“뭐야, 인마- 이렇게 했으면 네가 움직여야 할 것 아니야-”

“몰라- 하아, 형이, 하아, 해 봐, 하아-”

지금 자세상으로는 아래 있는 민찬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위에 앉은 녀석이 움직여 줘야 하는데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꼼짝할 생각을 하질 않고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결국 민찬은 준희의 엉덩이를 끌어 잡은 후에 읏샤, 하고 힘을 주어 일어나야 했다. 준희가 꽤나 한참 올라앉아 있었던지라 혈액 순환이 좋지 못했던 민찬의 다리에도 힘이 없었다. 한번 휘청, 했다가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난 후 몸을 틀었다. 준희를 식탁 위에 내려놓고 민찬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마터면 성기에 꽂은 녀석이랑 같이 주저앉을 뻔했는데, 그랬으면 되게 볼품없을 뻔했다.

민찬은 걸리적거리는 준희의 바지와 속옷을 마저 벗겨서 뽑아버렸다. 그러는 동안에 슬쩍 빠져나온 성기를 다시 꾸욱 밀어 넣자 준희는 흐윽, 하고 눈가를 찌푸리며 진저리를 쳤다.

민찬은 손을 뻗었다. 엄지로 준희의 눈가를 슬슬 만져 주었다. 거리가 있다 보니 제 얼굴이 안 보일 것이 분명한 녀석에게 손끝으로 제 마음을 전한 것이었다. 준희는 식탁 모서리를 잡고 있었던 손을 놓고 제 뺨을 감싼 손의 팔목을 잡았다. 팔목 위에서 툭, 툭, 평소보다 빠르게 뛰는 박동을 헤아리면서 같은 빠르기로 뛰고 있을 심장을 느꼈다.

“할게.”

너무 다정한 예고의 말이 가슴을 쿡 찌르는지라, 아랫입술을 끌어 문 준희가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준희의 앞머리를 쓸어 넘긴 손으로 정수리를 감싸 잡은 민찬은 느릿느릿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준희는 뒤집어 놓은 개구리 모양으로 바짝 다리를 쳐들었고 민찬은 서 있는 자세였다. 그렇다 보니 평소 섹스할 때보다 결합 부위가 한층 더 훤히 드러나 있었다. 팽팽하게 벌어진 구멍 속으로 제 성기가 드나드는 동안 반짝반짝한 타액이 찌걱찌걱 소리를 내며 틈 사이로 밀려 나와 준희의 엉덩이 뒤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허공을 보면서 하아, 하아, 신음하던 준희가 한 손을 내렸다. 민찬의 성기가 가득 들어차 팽팽하게 벌어진 제 아래가 궁금했는지 접합 부위를 더듬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브이 자 모양으로 만들어 민찬의 성기가 드나들고 있는 곳 위에 올렸다. 손가락에 닿는 느낌을 통해 아래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던 준희는 흐, 하고 웃다가 말고 또, 푹 찔린 배 속이 오싹하게 조이는지라 으읏, 하며 신음했다.

준희 녀석이 넓게 벌어진 제 구멍을 만지작대는 것을 보면서, 홀린 듯이 속도를 올리다가 말고 민찬은 어후, 하면서 눈을 돌려버렸다. 그냥 딴 데를 보기로 했다. 시각적 자극이 너무 심했다. 저런 걸 보고 있으면, 겨우 서너 번 더 박다 말고 싸버릴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고개를 돌렸어도 쩍, 쩍 거리는 소리에 이어 둔부와 허벅지가 터억, 터억 닿는 소리, 그리고, “으, 으응! 흣!” 하며, 준희가 입술을 앙다문 채 내는 신음 소리가 귓가에 푹푹 파고들고 있었다. 소리 자극 또한 시각적 자극 못지않게 심했다. 차라리 눈에 보이는 편이 낫겠다 싶었던 민찬은 하아, 하고 폐부에 가득 찬 숨을 토하면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여전히 아래를 만져 대고 있는 녀석의 팔목을 낚아채 위로 올려버렸다. 그만하라고. 이러다 형, 너보다 빨리 싸버리면 쪽팔린다고.

준희의 손을 치우고 나서 민찬은 한껏 벌어진 구멍 사이로 미끄럽게 젖어 든 제 성기가 빠르게 들고 나는 것을 보았다. 연갈색의 음모 위로 평소보다 색이 짙어져서 끝부분이 불그스레해진 준희의 성기가 툭툭 배를 때리고 있었다. 준희는 이제 맑은 물이 아니라 하얀색 정액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었다. 민찬은 준희의 팔목을 잡고 있던 손을 내려 준희의 성기를 스스로 잡도록 했다. 그리고 준희의 손 위를 감쌌다. 그러자 준희는 읏, 하고 몸을 비틀면서 아래를 조였고, 민찬도 덩달아 흐읍, 하고 숨을 골라야 했다.

준희가 스스로 제 성기를 잡고 비비는 것을 보면서 한동안 아래를 쳐올리던 민찬은 고개를 들어 준희의 얼굴을 보았다. 반만 뜬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면서 제 허릿짓에 맞추어 헐떡이는 녀석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마이크 잡고 노래할 때도 무척 섹시한 입술인데, 섹스 중에 신음할 때에는 지나치게 야했다.

어휴.

어디를 봐도 흥분되는지라 꾸깃 인상을 구긴 민찬은 다시 아래를 보아야 했다.

바짝 조인 채 비벼지고 있는 성기에서 퍼진 쾌감이 가슴께로 치밀고 있었다. 숨이 차다 못해 심장까지 징 하고 울렸다. 그래서 민찬은 후우, 하고 심호흡을 해야 했다. 오래 못 버티겠다, 생각하면서 처박는 속도와 세기를 올렸다.

민찬이 거세게 처박기 시작하자 흐으윽! 하고 숨넘어가는 소리를 낸 준희는 허리를 들어 올리면서 참고 참았던 것을 싸버렸다. 그 순간에 준희의 티셔츠를 위로 걷어 올려 준 민찬은 준희가 배 위에 싸지른 것을 손으로 문질러 넓게 펴 바르다가 그 손으로 준희의 골반 뼈를 잡았다. 어금니에서 으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악다문 민찬은 더욱더 세고 빠르게 콱, 콱, 콱, 처박았다.

사정을 끝낸 준희는 손가락 하나 들어 올리기 버거울 정도로 힘이 빠져있었다. 하지만 아직 사정하지 못한 남자는 제 허벅지를 꽉 잡고 밀면서 아래에 콱, 콱 처박고 있었다. 그럴 때면 준희는 또 다른 감각에 가슴이 벅찼다. 흥분감 위에 덧씌워진 행복감에 가슴이 뻐근할 지경으로 벅차올랐다.

“흠, 흐읍!”

어지러울 정도로 빠르고 거세게 흔들리고 있는 준희는, 더운 콧숨이 느껴지는 거친 신음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사정이 임박한 남자의 얼굴을 상상하고 있었다. 이제는 어렵지 않게 그릴 수 있었다. 절정 바로 직전, 속도를 최대치로 올려 빠르게 거세게 쳐 댈 때는, 흘러내려 눈가를 가린 머리카락 사이로 한결 매서워진 눈이 마치 야밤에 먹이를 노리는 짐승처럼 형형했다. 긴 눈매가 뾰족해지도록 사납게 치켜뜬 얼굴이 좀 무섭기도 했다. 하지만 남자이고, 평평하고, 볼륨 없이 딱딱한 자신의 몸을 보면서 그 정도로 흥분을 했다는 사실 덕분에 준희는 만족스러움을 넘어 안정감을 느끼곤 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콱! 처박을 때에는 어금니에서 으득 소리가 날 지경으로 입을 악다물면서 숨소리조차 내지 않는데, 그 순간에는 미간에 깊은 주름이 지도록 몹시 얼굴을 찡그리곤 했다. 그 얼굴. 그 얼굴을 처음 보았던 그때의 희열을 준희는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평생 잊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철로 새기고 불에 달구는 그런 느낌으로 머릿속에 각인시켰던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상상하면서, 배 안에 뜨끈한 것이 간지럽게 퍼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준희는 하아, 하고 가빠진 숨을 몰아쉬며 미소를 지었다. 배 속이 아니라 가슴속까지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후우,”

참았던 숨을 훅 내뱉은 남자가 또 쿡! 박아 넣는데, 그러면 준희의 배 속에 들어찬 애정의 산물들이 꿀렁 하며 파도를 치고는 했다. 또 한 번 더 쿡, 밀어 넣은 후에, 마지막 남은 것까지 다 쏟아내고 나면 이제, 준희가 정말로 좋아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여러 가지 이유로 섹스를 무척 좋아하는 준희가 섹스의 모든 단계를 통틀어 가장 고대하고 기다리는 순간 중의 하나였다. 오죽하면 사정 임박 바로 직전에 기꺼운 고통을 인내하다가 시원하게 내보내는 그 순간에 느끼는 희열에 버금갈 정도로, 그 정도로 좋아하는 순간이었다.

“하아….”

하고 깊은숨을 내쉰 남자가 준희의 위를 덮쳤다. 준희는 한결 짙어진 살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사라지려 하는 것이 아쉬워서 흐음, 하고 큰 숨을 들이켰다. 기분 좋은 현기증이 일었다. 몽롱해진 기분에 밭은 숨을 내쉰 입가를 끌어올리고 있으면, 뜨거워진 몸을 맞대고 가득 끌어안아 준 남자가, 온몸을 세게 조이면서 귓가에 대고 속삭이곤 했다.

“진짜…. 사랑해…. 준희야….”

오늘도 다르지 않았다. 이제는 꽤 여러 번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슴이 뻐근해지면서 심장이 크게 울렁거리는 고백의 말이었다. 준희는 지금 이 순간을 말로도, 또 글로도 표현하지 못했다. 몇 번 시도해 봤지만 제 기분을 온전히 가사로 담아내지 못했다. 그 정도로, 그 정도로 행복했다.

제대로 숨을 쉴 기운조차 없는 준희는, 남을 힘을 박박 끌어모아 가까스로 “나도 사랑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말로 표현할 길이 없을 정도로 깊이 사랑하고 있는 남자의 몸을 마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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