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안의 체감 온도는 사하라 사막의 한낮 기온보다도 높은 듯했다. 사무실 한가운데에 마주 선 장범수와 여민찬은 그 지경이 되도록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미 길게 찢어진 눈을 가늘게 떠서 더욱 날카롭게 만들고 노려보던 장범수가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그놈이랑 계속 붙어먹겠다, 이거야?”
코웃음을 친 여민찬은 눈가를 기울여 삼백안을 만들고는 대답했다.
“그렇다면?”
“이 자식이 진짜!”
찢어진 눈을 커다랗게 치뜬 장범수는, 여전히 여유를 잃지 않고 있는 녀석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멱살이 잡힌 여민찬은, 자신의 입가에 거친 콧김을 내뿜고 있는 남자를 그윽하게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키스해도 돼?”」
빵 터진 사람들이 일제히 하하하하하! 하며 배를 쥐고 웃기 시작했다. 조수석의 준희는 시트 밑으로 굴러 들어갈 기세로 포복절도하고 있었고, 낭송을 하던 배재민은 우하하하! 우하하하하하! 하면서 차 밖 백여 미터 인근까지 들릴 정도의 매우 커다란 소리로 웃었다. 뒷자리의 송여진은 “왜! 학! 아니 갑자기 왜 하학! 키스를!” 하면서 숨이 넘어가려고 했고, 강동수와 이우영은 서로의 옷자락을 잡고 뜯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신명 나게 웃어 젖혔다.
모두가 웃고 있는 와중에, 웃고 있지 않은 단 두 사람 중 한 명인 여민찬이 운전대를 돌리며 짜증을 부렸다.
“아 시끄러.”
그리고 하필 여민찬의 바로 뒤에 앉아 팔짱을 끼고 있는 장범수는 쯧, 하고 혀를 찼다. 가까스로 시트 밑으로 굴러 들어가지 않은 준희가 배꼽을 쥔 채로 요청했다.
“형이 한 번만 해 줘! 이 대사 카하학! 형이 아하하하! 해 주라!”
마침 신호가 걸렸고, 까짓, 싶었던 민찬이 고개를 돌렸다. 지문에 나왔듯이 눈가를 기울여 삼백안을 만들고는 준희를 향해 대사를 쳤다.
“키스해도 돼?”
“안 된다, 이 자식아.”
그러나 뒷자리의 장범수가 곧장 받아쳤기에, 능청맞은 대사는 결국 장범수에게 한 말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또다시 빵! 터진 사람들이 일제히 웃었다. 준희는 또다시 시트 밑으로 기어들어 갈 지경으로 반으로 접어진 채 웃어댔고, 배재민의 웃음소리는 이제 십 리 밖까지 들릴 지경이었다. 송여진은 “아학학! 안, 학! 안 된다 이 자식! 아학학!” 하며 호흡 곤란이라도 온 사람 같았다. 그리고 강동수와 이우영은 또다시 서로의 웃을 쥐고 찢을 듯이 흔들며 신나게 웃었다.
인기가 꽤 많아서 음원을 냈다 하면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1위를 찍곤 하는 어느 록밴드와 스탭진들의 지극히 일상적인 날들 중 하루였다.
네이선 프로덕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눈먼 고래의 노래’의 영어버전인 ‘Whale’s Song’을 제준희가 직접 불러줬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그게 아무나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아닌데 어떻게 하려고 그러나, 두고 보았던 블랙웨일즈 멤버들은 콧방귀를 뀌며 으쓱해 했다. 그러면 그렇지. 필 모리스 지가 히어로면 히어로지 애초부터 제준희만 부를 수 있도록 맞춤으로 만들어진 노래를 연습 좀 한다고 해서 구사할 수는 없었을 터였다.
그런 이유로, 제준희의 애인이자 동료이자 수행 비서이자 노래의 원작자인 여민찬이 모든 스케줄을 정리하고 동반 출국을 하게 되었다.
장범수가 배재민과 함께 공항까지 배웅을 나왔다. 배재민이 캐리어를 내리는 동안 장범수는 여민찬을 붙잡고 신신당부를 했다.
‘먹사노라 독일 편’ 이후로 해외 팬들이 꽤 늘었으니까, 알아보는 사람 없다고 길거리에서 제발! 좀 수상한 짓 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던 장범수가, 누가 보면 오해할 수 있을 정도로 여민찬의 귓가에 가까이 입술을 붙이고서 속삭여 물었다.
“너 인마, 동료끼리 만져도 되는 곳과 만지면 안 되는 곳이 어딘지 정도는 구별하는 거 맞지? 어?”
“아, 참 나. 당연히 알지. 불알은 안 되고, 엉덩이는 되지?”
장범수가 음습하게 속삭인 것이 무색하게도 돌아오는 대답은 거참 상쾌 발랄했다. 장범수의 이마가 불끈하더니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엉! 덩이도 안 돼! 인마!”
“그래? 쳇. 고지식하네.”
“고! 지식한 게 아니고 인마!”
더 잔소리를 할 태세를 취하는 리더를 어깨로 쭉 밀어버린 여민찬은 차에 기대어 기다리고 있는 준희에게로 갔다.
“가 봅시다! 세계적인 보컬리스트 토끼님!”
*
어깨에 보스턴 백 하나를 멘 여민찬은 대형 캐리어 하나에 두 사람의 짐을 모두 담아 한 손에 끌었고 남은 한 손으로는 캐리어보다 소중한 것을 잡고 끌었다.
공식적인 스케줄이 아닌데도 팬들이 많았다. 개인적인 일로 공항에 있다가 우연히 두 사람을 보게 된 팬들의 수가 이렇게나 많은 것을 보면 코어 팬의 수뿐만 아니라 대중적인 인기 또한 꽤나 올라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쨌든 두 사람은 주변을 에워싼 팬들과 함께 게이트까지 동행했다.
촬영이 아닌지라 편안한 조거 팬츠에 소재가 다른 집업 저지를 입어 시밀러룩을 입은 두 사람의 ‘분명히 아무것도 아닌데 무시무시한’ 패션 때문에 팬들은 또 한숨을 쉬어야 했다. 오늘 공식적으로 출국 예정인 아이돌을 찍으러 왔다가 블랙웨일즈를 맞닥뜨리게 된 기자들은 어차피 대단히 꾸미고 올 것이 분명한 아이돌을 놔두고 블랙웨일즈의 사진을 찍었다.
「공식 스케줄 없는 여민찬과 제준희 동반 출국. 우정 여행인가?」
「여민찬 제준희 꾸미지 않았지만 멋스러운 시밀러룩에 선글라스 공항패션 화제, 트레이닝복에서 품격이 느껴지는 이유는?」
「제준희가 입은 후리스 저지는 어디 것? 사랑스러움 플러스시키는 아이템에 팬들 문의 쇄도」
「다리가 너무 긴 여민찬, 조거 팬츠 아래로 드러난 발목과 복숭아뼈가 패션의 화룡점정」
*
이제 두 사람은 장거리 비행이 어느 정도 익숙해졌기 때문에 긴 비행시간 내내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고 잘 노닥거렸다. 꾸준히 운동을 하는 여민찬은 물론이고 보이는 것에 비해 깡다구가 좋은 제준희도 기초 체력이 좋았다. 살인적인 스케줄 속에서도 지치지 않는 비결이었다.
네이선 프로덕션에서는 퍼스트 클래스 항공권과 공항 픽업 및 일정 매니지먼트 그리고 호텔 숙박을 모두 제공하기로 했다. 두 사람이 도착하는 시간에 맞추어 공항으로 마중을 나온 프로덕션 측 매니저의 이름은 ‘팀’이라고 했다. 재미교포 2세이며 그래서 한국말이 능숙하다는 남자는, 앞으로 전 일정 동행을 할 것이라며 간략한 스케줄을 브리핑해 주었다. 여독을 배려한 건지 도착한 당일에는 스케줄이 없다고 했다.
팀은 두 사람을 LA에 위치한 스튜디오 근처 호텔로 데려갔다. 저녁식사는 호텔 내 레스토랑에서 먹도록 하고 쉬었다가 내일 아침 9시에 픽업하러 로비로 오겠다고 했다. 헐리우드 명예의 거리가 바로 근처니까 구경을 다녀와도 좋을 거라고 권해 주었다.
“연예인 할 만하네.”
팀과 헤어진 후, 꽤 좋은 컨디션의 호텔방 안을 둘러보고 만져 보던 준희는 씩 웃으며 그런 소리를 했다. 지방 행사 뛰고 돌아와서 두 시간 자고 일어나 생방송 새벽 라디오 방송하러 갔던 일은 싹 다 잊은 모양으로 말이다. 그래서 피식 웃은 민찬은 긍정적이라서 더 사랑스러운 녀석의 머리를 부스스하게 헝클어트렸다. 기본적으로 결이 좋은 머리는 굳이 다시 만지고 다듬지 않아도 제자리를 찾아갔다.
*
팀이 권한 대로 호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난 후, 두 사람은 호텔 바로 근처인 헐리우드 명예의 거리를 걸어 보았다. 네온사인이 번쩍번쩍하다 보니 어둡진 않았지만 그래도 야밤이었기 때문에 민찬은 준희의 기분을 계속 신경 썼다. 아닌 것 같다 싶으면 바로 호텔로 돌아가려고 말이다. 하지만 준희의 기분은 내내 좋아 보였다. 준희와 사귀면서 말수가 열 배 이상 많아진 민찬은 눈에 보이는 것을 최대한 말로 만들어 떠들었다.
“여기는 가로수가 야자나무구나, 와, 스파이더맨이 호객 행위 하고 있다, 아? 지금 우리 발밑에 있었네? 그 왜, 유명인들 손바닥 찍은 그거 말이야. 근데 이거 막 밟아도 되는 건가? 어! 마이클 잭슨이다!”
민찬의 외침에 두 사람은 미리 짠 것처럼 동시에 바닥에 넙죽 엎드려 만져 보았다. 마이클 잭슨의 손도장이라면 절대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결국 손도장을 배경으로 셀카까지 찍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고, 또 이것저것 쫑알쫑알 떠들며 화려한 밤거리를 걸었다.
민찬이 설명하는 것을 귀담아들으면서 여기저기 둘러보던 준희가 말했다.
“공기가 좀 다르긴 하다. 그지? 형?”
“응.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독일하고는 또 분위기가 좀 달라서, 손을 잡고 걷고 있는 두 사람을 쳐다보는 시선이 꽤 많고 또 집요하기도 했다. 그런 말까진 굳이 하지 않은 민찬은, 곱지만은 않은 시선들을 대충 무시하면서 한층 넓어진 세상 속으로 준희를 끌었다.
*
콧바람 쐬는 정도로 거리 구경을 하고 돌아오니 확실히 피곤하긴 했다. 욕실의 구조가 익숙하지 않은 준희를 위해서, 라는 명분을 만들어 시시덕거리며 함께 씻고 난 후 침대에 누웠다. 킹사이즈 더블베드였다.
체크인 당시 여민찬은 팀에게 더블베드를 부탁했었다. 그때 팀은 살짝 수상한 눈초리를 보내긴 했지만 별다른 해명을 하지 않은 민찬은 그저 꿋꿋하게 웃어 보였다. 뭐. 왜. 어쩌라고. 속으로 따지면서 말이다. 그래서 사수하게 된 킹사이즈 더블베드 위 푹신한 침구 속에 몸을 묻고 준희를 끌어당겨 안고 나니, 정신없었던 하루가 파노라마같이 스쳐 지나갔고, 그제야 ‘맞다. 여기가 미국이었지.’ 하는 실감이 났다.
민찬의 품 안에 들어와 눈을 감고 있던 준희가 잠겨서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 미국이었지….”
자신의 생각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고대로 말하는 것이 웃겼던 민찬이 빙긋 웃는데, 준희가 또 한 소리를 덧붙였다.
“형이 있으니까… 마음이 편안해서… 여기가 미국인 것도 깜박했네….”
그러면서 준희는 민찬의 가슴 위에 얼굴을 묻었다. 흠, 흠, 하며 티셔츠 너머 살 냄새를 맡는가 싶더니 손을 올려 민찬의 티셔츠 안으로 집어넣었다. 배를 간지럽히고 올라와 가슴을 더듬던 손이 민찬의 젖꼭지를 찾아냈고 꼼지락꼼지락 만지기 시작했다. 명백한 유혹이었다.
거절할 생각 전혀 없는 민찬은 안고 있던 손을 내려 준희의 바지 안으로 집어넣었다. 만지면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엉덩이를 쓸고 내려가 골 사이를 벌리고 구멍 주위를 만졌다.
흐음, 하고 깊어진 숨을 내쉰 준희는 젖꼭지를 만지작대던 손을 내려 민찬의 바지 안으로 집어넣었다. 팬티 사이를 벌리고 들어가 성기를 잡고 만졌다.
민찬은 준희의 정수리에 코와 입술을 묻고 있었고, 준희는 민찬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흐음, 흐음, 하며 상대의 체취를 흡입하는 소리가 점차 커졌고 또 깊어졌다. 그즈음 민찬의 손가락은 준희의 몸 안으로 들어가 안쪽을 휘젓고 있었고, 한쪽 다리를 세워 손가락을 넣기 쉽도록 다리를 들어 주고 있는 준희는 선액이 흘러 미끄러워진 민찬의 성기를 본격적으로 죽죽 잡아 훑고 있었다.
손도 안 댔는데 딴딴해진 성기를 민찬의 허벅지에 대고 비비던 준희가 결국 먼저 말했다.
“하아, 오늘은 형 거 넣어 주라.”
노래할 때만 섹시한 것이 아닌 목소리로 읊어지는 음란하기 그지없는 대사를 듣는 순간 오싹하게 올라오는 성감이 대단했다. 그래서 미간을 쿡, 구겨야 했던 민찬은 엉덩이 사이에서 손가락을 빼는 동시에 모로 누워있던 녀석을 밀어 눕히면서 곧장 입술을 내려 키스했다.
키스에 심취한 나머지 양손으로 민찬의 목덜미를 끌어안고서 입술과 혀를 움직이느라 바쁜 준희와는 달리, 민찬의 매끄러운 연결 동작은 빈틈없이 흘러갔다. 키스를 하는 중에 부드럽게 움직인 손들은 준희의 바지를 허벅지 아래까지 내려놓았다. 다시 올라온 손은 팬티 위로 주물주물 성기를 만져 주다가 팬티 허리를 잡아 내렸다. 팬티를 허벅지 근처에 있던 바지와 함께 잡아 무릎 근처까지 내리는 동시에 마중 나온 발은 무릎 아래 걸쳐진 바지와 팬티를 휘감아 발목 아래로 쑥 밀어 벗겨 버렸다. 그와 동시에 한 손은 허벅지 사이를 벌렸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자신의 바지 허리를 잡아 내렸다.
누구처럼 일일이 파자마를 챙겨 입진 않다 보니 편안한 고무줄 바지를 입고 있었던 민찬은 준희에게 계속 키스를 하면서 제 바지와 속옷을 잡고 치골 근처까지 내렸다. 준희가 젖꼭지를 만질 때부터 서기 시작해서 지금은 최대치로 발기한 자신의 성기를 잡고 문질러 미끈미끈하게 만든 후에, 허벅지로 준희의 허벅지를 밀어 올리면서 동시에 적당히 만져 놓았던 구멍 사이로 밀어 넣었다.
“흐음….”
처음 들어갈 때 심호흡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남자는 집요하게 키스를 이어가던 입술을 물려 주고 숨 쉴 틈을 주었다. 그러는 사이에는 귓가에 입맞춤을 퍼부었다. 귓구멍과 키스라도 하듯이 혀를 밀어 넣고 귓바퀴 속을 샅샅이 핥았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고 신중한 느낌의 진입을 계속했다.
준희는 기대감으로 인해 점점 차오르는 숨을 고르며 기다렸다. 자신의 몸속 깊은 곳에는 최대 성감대가 있었다. 삽입 섹스를 한 이후로 처음 알게 된 그곳이 만져지고 눌리고 비벼질 때의 자극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강렬했다. 국부에서 터지는 쾌감이 어찌나 센지 사지가 다 저릿저릿하여 진저리를 쳐야만 할 정도로, 그 정도로 대단했다. 기분이 좋은 정도가 아닌 자극인지라 첫 섹스 이후로 대번에 중독이 되어버렸고, 그 이후로 며칠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긴장이 되어 엉덩이에 움찔 힘이 들어갈 정도였었다.
애초에 성행위를 하도록 만들어진 기관이 아니라면서 매일 해 주지 않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이해는 하면서도, 그런 것이 자제가 되는 남자에게 가끔은 화가 날 때도 있었다. 그 정도로 준희는 민찬과 하는 섹스가 좋았다.
매일이 아니라 하루에 세 번씩 하라 해도 할 수는 있지만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참고 인내하는, 그런 사랑을 하고 있는 민찬의 심정도 준희 못지않았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로 덜하진 않았다. 오랜만에 하게 된 삽입 섹스에 대한 기대로 인해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민찬은 그 정도로 준희와 하는 섹스가 좋았다.
단번에 쑤셔 박아 거칠게 흔들고 싶은 본능을 거슬러야만 하는 민찬은, 악다문 턱 근육이 움찔움찔할 정도로 인내하면서 최대한 조심하고 있었다. 반응을 살펴 가며 천천히 진입을 하는 동안, 이제는 두 사람 모두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지점에 닿고 지나갔다. 그 즈음해서 준희가 진저리를 쳤고, 발기하여 배에 딱 달라붙은 분홍색 성기 끝에서 주르륵 정액이 흘러내렸다. 그런 녀석의 몸을 꼭 끌어안고 끝까지 밀어 넣은 민찬은 참았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고개를 든 민찬은 준희의 눈을 마주하고 물었다.
“할게?”
“어.”
평소보다 한층 허스키한 목소리로 씩씩하게 대답하는 녀석 덕분에 웃은 민찬은 사랑스러운 입술 위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춘 후에 허리를 움직였다.
두 사람은 늘, 마주 보고 바짝 끌어안은 자세로 섹스를 했다. 민찬은 준희의 이마에 이마를 맞대고 초록색 눈동자를 마주 보면서 허리를 움직였다. 좀 더 시간이 지나면 후배위 등 다른 체위를 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지금 이 자세가 가장 좋았다. 신체의 가장 은밀한 곳을 결합한 채 음란한 쾌감을 주는 곳을 조이고 누르고 비벼 대면서, 서로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고 대화를 했다. 섹스 중에 눈빛으로 나누는 교감은 두 사람이 하체의 결합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었다. 상대가 지금 얼마나 좋은지, 어떤 기분인지, 어떤 상태인지, 자신이 느끼는 쾌감을 상대도 비슷하게 느끼고 있는지 그런 것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사랑하는 감정에서 기인한 이타적이고 배려가 넘치는 섹스는 몸의 만족뿐만 아니라 마음속까지도 가득 차게 해 주었다.
그러다 너무 좋으면 절로 픽 웃음이 터지는 시점이 있는데, 행복이 차고 넘쳐서 터지는 웃음이 겸연쩍어진 두 사람은 다시 입술을 맞물리고 키스를 나누었다.
사랑이라고 이름 붙일 수밖에 없는 쾌락의 행위를 끝내고 싶지 않았기에 사정하고 싶은 욕구를 참는 시점부터는, 말투부터 행동까지 많이 닮아진 두 사람은 거울이라도 보듯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미간을 좁히고, 눈가를 찌푸렸다. 아랫입술을 물거나, 어금니를 악다물면서 깊어지고 빨라진 숨을 씨근거렸다. 그러는 중에도 서로의 눈동자에 고정한 시선만큼은 흔들리지 않았다. 민찬의 허리 움직임이 빨라지고 깊어지고 또 과격해졌지만, 그에 맞추어 큰 반동으로 흔들리는 중에도 두 사람은 계속해서 서로의 눈을 보았다. 눈빛을 섞고, 깊어진 콧숨을 섞었다. 이제는 툭 터지고 벌어져 더 이상 참아내지 못한 신음 소리를 흘리기 시작한 입술을 맞물리며 타액을 섞었다.
민찬의 허릿짓이 절정으로 치달았고, 그즈음 절정을 느낀 준희가 집요하게 뜨고 있었던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준희의 성기 끝에서 퓨븃 하며 사정액이 튀어 올랐다. 준희의 사정을 확인한 민찬은 자신의 사정을 서둘렀다. 속도와 세기를 더욱 높였다.
어느 시점부터 꽤 커졌던 두 개의 신음 소리도 악다문 입술 안으로 사라졌다. 숨을 참고, 가능한 최고의 속도로 빠르게 허리를 올려 치고 있는 남자의 허벅지와, 이제는 눈을 질끈 감아버린 남자의 둔부가 부딪치는 소리만이 요란한 가운데,
빠른 속도로 세차게 올려 치던 민찬이 마지막으로 힘차게 콱! 박아 넣으면서 준희와 마찬가지로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흐윽! 하아….”
입을 꾹 다물고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몰아붙이던 남자가 툭 터트린 신음 소리 때문에 또다시 전신으로 느껴버린 준희가 손에 쥔 팔뚝을 꽉 움켜잡으며 “흐흐흑!” 하고 진저리를 쳤다. 두 번째 사정이었다.
다음 날 아침. 시간 맞춰 픽업을 하러 온 팀의 차를 타고 스튜디오로 향하는 길에도 민찬은 계속해서 눈에 보이는 것을 떠들었다.
“여기도 야자나무가 많네. 근데 저게 야자나무가 맞아? 바나나 나무인가? 근데 준희야, 집들이 죄다 으리으리하다? 수영장은 뭐 기본이구나. 우리도 돈 많이 벌어서 저런 집 짓자?”
“어, 허허.”
그러고들 있는 동안 백미러를 통해 뒷좌석을 힐끔거린 팀은, 쉴 새 없이 떠드는 남자를 보며 풍기는 이미지랑 다르게 꽤나 수다스럽다고 생각을 했다.
스튜디오에 도착해서 앞장을 서는 팀의 뒤로 민찬이 준희의 손을 잡고 따라갔다. 브리핑 룸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총 다섯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붉은색 멜빵을 멘, 배가 상당히 많이 나온 남자가 벌떡 일어섰고 풍채에 비해 날랜 동작으로 다가와 문을 열고 들어선 세 사람 중 준희를 덥석 끌어안았다.
<오 세상에, 준희! 반가워요!>
준희는 빵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고, 그 와중에도 제 손을 놓지 않고 있는 남자의 손에 꾸욱,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팀은 한발 늦은 시점에 “이분이 러셀 루소 씨예요.”라고 소개를 해 주었다. 러셀 루소거나 말거나 언짢아진 민찬이 ‘슬슬 잡고 떼어 낼까?’ 생각했을 즈음해서 준희를 놓아 준 남자는 <민찬!> 하더니, 이번에는 민찬을 끌어안으려 했고 한발 물러선 민찬은 얼른 손을 내밀어 악수를 유도했다.
브리핑 룸에 있었던 다섯 사람 중에는 제작 초기 시나리오 작업을 위한 인터뷰 당시 만났던 적이 있었던 여자도 있었다. 시나리오에 참고한다면서 두 사람의 이야기와 관계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던 여자 또한 초면이 아닌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다.
본격적으로 녹음에 들어가기 전에 필 모리스가 무대에서 노래를 하는 촬영분을 다 함께 보았다. 민찬의 한쪽 눈가가 설핏 찌그러졌고 준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합주와 노래가 엉망이었다.
음악감독이라는 남자가 얼른 코멘트를 했다. 놀라지 말라고. 연주나 노래가 허접하다고 생각되겠지만, 더빙 작업을 거치면 달라질 거라고. 여기에 마스터 세션의 연주와 준희의 목소리가 입혀지게 되는 거라고 말이다.
장범수의 성화에 떠밀려 틈날 때마다 영어 공부를 해 둔 덕에 이제는 두 사람 모두 리스닝이 꽤 되긴 하지만 아무래도 전문 용어가 많다 보니 오역을 우려한 팀이 계속해서 통역을 했다. 녹음 방식에 대한 설명을 꽤 자세하게 듣고 난 후, 다 함께 더빙 스튜디오로 이동을 했다.
민찬은 당연하다는 듯이 준희의 손을 잡고 걸었고, 러셀 루소는 그런 두 사람을 가리키면서 즐거워했다. 마치 디즈니랜드에서 만화 속 캐릭터라도 만난 어린아이 같은 느낌으로 신이나 있었다.
*
부스 안에 설치된 모니터를 보면서 필 모리스와 입을 맞추어 노래를 부르는 더빙 작업이 단 한 번 불러 오케이 될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고된 작업이었다. 특히 화면 속의 입 모양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준희는 헤드셋 속 필의 목소리를 들으며 거기에 맞추어 불러야 했다. 다른 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제대로 노래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필이 부른 노래를 어느 정도 익힌 후에는, 한쪽 귀에는 필의 목소리가 나오는 이어셋을 걸고 다른 쪽 귀에는 자신의 목소리와 연결된 인이어를 착용하고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준희가 같은 구간을 수십 차례 반복해서 부르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 민찬은 안타까워서 미칠 것 같은 심정이었다. 그런 와중에 슬슬 걱정도 되기 시작했다. 너무 여러 번 반복하는 것을 보니 뭔가 잘못되고 있는 건가 싶어서 말이다.
하지만 마스터링을 맡은 엔지니어들은 보컬이 센스가 있어서 작업이 빠르다며 좋아하고 있었다. 이게 지금 빠른 것인 모양이었다. 그렇다 하니 민찬은 할 말이 없어졌고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해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준희가 힘들진 않을까, 목 컨디션은 괜찮은 건가, 내내 걱정하고 안절부절못하면서 말이다.
잠깐씩 휴식을 가지면서 이어간 녹음이 세 시간째에 접어들었을 무렵, 스튜디오를 방문한 남자들이 있었다. 민찬이 앉아있는 소파 뒤에 서서 팔짱을 낀 남자가 함께 온 동행에게 물었다.
<저 남자가 준희야?>
<어. 그런가 봐. 와 음색이 정말 유니크하다. 멋진데?>
<그럼 뭐해. 눈이 안 보이는데. 불쌍한 인생이지 뭐.>
그 대화를 들어버린 민찬이 삐그덕 고개를 돌리고 올려다보았다. 어떤 정신 나간 새끼가 헛소리를 지껄이나 보려고 말이다. 그런데 어쭈, 민찬도 아는 얼굴이었다. 필 모리스인지 필 모지리인지 하는 그놈이었다.
부스 안쪽을 관전하다가 말고 무심코 내려다본 남자가, 고개를 꺾고서 무시무시하게 노려보는 남자의 기세에 놀라서 움찔한 후에 필 모리스를 팔꿈치로 툭 쳤다. <응? 왜?> 하며 돌아보았다가 턱짓을 끄덕하는 남자의 시선을 따라가 본 필 모리스 또한 움찔 놀라며 팔짱을 풀었고 삐딱하게 서있던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런 필 모리스를 빤히 노려보던 민찬이 말했다.
<저 녀석, 절대로 불쌍하지 않아. 헛소리하지 마.>
헤비한 곡에 툭하면 등장하는 가사인 ‘Cut the bullshit.’을 날린 남자는 그러고도 한참을 더 쏘아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팔짱을 낀 손으로 제 팔뚝을 꽈악 짓누른 민찬은, 꼴랑 시력 하나 좋은 것 가지고 대단한 인생인 양 허세 부리고 있는 저 같잖은 새끼보다는 위로 올라가고 싶다는, 그런 바람을 가슴에 품었다.
‘먹사노라 미국 편’이 제작되었고 방영되었다. 독일 편 못지않은 히트를 쳤고, 미국 편에서는 특히 멤버들의 유창한 영어 실력이 화제가 되었다. 각자의 실력과 서로를 믿는 믿음이 뒷받침된 자신감에서 우러난 여유롭고 또 흠잡을 데 없는 훌륭한 라이브 공연 영상은 조회 수 신기록을 갱신해 나갔다. 블랙웨일즈의 동영상 클립 밑으로는 영어 댓글이 심심치 않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곡 작업을 한 블랙웨일즈는 정규 2집 앨범을 냈고, 국내 4대 음원 차트 1위부터 10위까지 줄 세우기를 하며 승승장구했다.
그리고 장범수는 본격적으로 해외 진출을 해 보는 것은 어떤지, 멤버들과 블루오션 식구들에게 의사를 물었다. 이탈리아, 독일, 미국에서 공연을 해 본 결과 승산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딱히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고, 특히 여민찬이 공격적으로 찬성을 했다.
그렇다 하니, 해외 시장 진출을 도와줄 수 있는 국내 매니지먼트사와 제휴를 맺는 방향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해 보던 중, 거장이라 불리는 영화감독 러셀 루소가 제작을 하고 직접 메가폰을 잡은 영화 웨일즈송(Whale’s Song)이 전 세계 동시 개봉을 했고, 대히트를 쳤다.
‘눈먼 고래의 노래’ 영어버전인 Whale’s Song이 ‘빌보드 HOT 100’에 15위로 데뷔한 이후 3위까지 올라갔다.
국내 가요계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었다. 8년의 무명시절을 거쳐 우여곡절 끝에 데뷔한 블랙웨일즈가 이뤄낸 성과를 놀라워하는 한편 한마음 한뜻으로 응원을 했다. 한때 스카이하이의 팬이었고 블랙웨일즈의 안티였던 사람들까지도 마음을 돌렸다. 국가대항전에 국가대표로 나간 팀을 까는 것은 요즘 말로 하자면 ‘국룰에 위배되는 행위’였다.
국내에서 난리가 난 것과는 달리 해외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라이언과 닉 역할을 한 필 모리스와 대니 마이클이 폭발적인 인기를 끈 것과 달리 곡의 원작자이자 OST를 직접 부른 블랙웨일즈에 대한 관심은 그다지 크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다 영화와 노래만 남고 모델인 밴드와 곡의 원작자들은 묻히는 것 아닌가 우려했던 기간은 따지고 보면 아주 잠시였다.
예정된 수순이라도 밟듯 글래스톤베리 뮤직 페스티벌에 초대된 블랙웨일즈는 세계 최정상의 가수인 카샤를 대신해 마지막 날 공연의 헤드라이너로 섰고, 그 유명한 노래 ‘Tomboy’를 즉석에서 록밴드 버전으로 편곡하여 부르면서, 그야말로 대형 사고를 터트리고 만 것이다.
해외 시장 진출을 노리고 국내 매니지먼트사와 제휴 계약을 하려던 계획은 전면 취소되었다. 세계 3대 음악 레이블이라고 칭해지는 U뮤직과, S뮤직, 그리고 W뮤직에서 동시에 블랙웨일즈에게 러브콜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이건 사고다’ 싶은 느낌으로 해외 진출을 하게 된 이후, 세계적인 기획사의 매니지먼트를 받게 된 블랙웨일즈는 세계무대에서 훨훨 날았다. ‘지미 제리 쇼’를 비롯한 온갖 유명한 쇼에 단독 게스트로 얼굴을 비추었고, 정상급의 가수들만 선다 하는 무대를 차곡차곡 밟아나갔다.
다행히도 블랙웨일즈 멤버들은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는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스케줄 속에서도 침착하게 대응했다. 늘 그랬듯이 여유를 잃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인기에 붕 떠서 경거망동한다거나 하지도 않았다.
카샤와의 충돌 사고를 딛고 그야말로 ‘빵’ 뜨기 이전에 몇 달 전부터 차곡차곡 준비를 해 온 덕분이기도 했지만, 보컬 제준희를 필두로 네 사람 모두 멘탈이 건강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넷 중 멘탈이 제일 약한 사람이, 무대의 스케일에 주눅 들지 않고 똘똘하게 할 말 다 하는 장범수이니 말 다 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블랙웨일즈는, V사의 란제리 패션쇼에 게스트로 초대되었다. 란제리 패션쇼라고는 해도 역대 이 행사에 게스트로 초대된 가수들의 라인업을 보자면 그래미나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의 역대 위너들 중 최고로 섹시하다고 평가를 받는 남자 가수들만 모아둔, 그런 느낌이었던지라, 이 행사에 초대되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패션쇼 당일. 리허설을 거쳐 본 쇼가 시작되었고, 중반을 지나 어느덧 하이라이트로 접어들었다.
펄이나 스팽글은 기본이고 깃털이나 크리스탈이 주렁주렁 장식된 화려한 브라에 손바닥 반도 안 되는 사이즈의 팬티를 입고 가터벨트를 찬 모델들이 런웨이를 걷는 중에 스크린이 열리고 블랙웨일즈가 등장했다. 관객들의 환호성이 대단한 가운데, 배재민의 화려한 필인으로 ‘Circle’의 전주가 시작되었다.
레일 위를 이동하는 동그란 무대가 앞쪽으로 움직였고 모델들의 워킹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형적인 워킹이 아니라 블랙웨일즈의 연주에 맞춘 댄싱 타임이었다.
무대감독의 성화에 따라, 배재민과 여민찬은 드로어즈의 허리 라인이 드러나도록 내려 입은 진 차림에 상의를 아예 탈의했고, 장범수는 화이트 드레스 셔츠의 단추를 가슴 아래까지 풀어야 했다.
그리고 준희는, 내년도 S/S 맨즈패션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크롭 티셔츠 차림이었다. 박시한 티셔츠는 허리 윗선에서 잘려 있었고, 드로어즈의 허리 라인이 보이도록 내려 입은 청바지, 그 위로 보이는 고래가 섹시 포인트였다. 처음 준희의 의상은 민소매 탱크탑이었으나 장골 위의 문신을 본 무대감독은 곧장 마음을 바꾸었다. 저 섹시한 고래가 보이지 않는 의상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면서 말이다.
‘인플루언서’라고 불리는 게이가 아닌 셀럽들이 배꼽티를 입기 시작하는 분위기를 경계하고 있었던 남성들에겐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번 공연 이후로 남성 크롭 티셔츠가 대유행을 하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 정도로 거부감 없이 잘 어울렸다.
[Bluesy Eyes! Mixed Face! Carrots Cowed Freaky!]
춤을 추며 런웨이를 지나간 모델들 중 메인 모델들이 원형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영어 버전 ‘원’을 합주하고 있는 멤버들의 옆에 서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리허설까지 했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은 멤버들은 동요하지 않았고 원래 하던 대로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민찬과 파트너인 모델의 끼와 흥이 대단했다. 12cm짜리 하이힐을 신으니 거의 민찬만큼이나 키가 커진 여성이 리허설 때보다 한결 더 몸을 붙여 오기 시작했다. 젖꼭지만 겨우 가려졌고 젖가슴은 거의 대부분 드러나다시피 한 여성이 몸을 붙여 오다 보니, 닿지 않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거기에 시선을 두고 있긴 하지만, 민찬은 사실 너무 가까이에서 출렁이는 가슴을 보면서 가슴보다 엉덩이가 좋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그래서 준희가 부르는 노래에 맞춰서 속으로,
‘엉덩이! 엉덩이! 엉덩 엉덩 엉덩이!’
그런 소리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랬을 뿐이었다.
*
그런데 이날 공연 이후로 여민찬의 신상이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일단, 란제리 패션쇼 무대에 선 블랙웨일즈의 공연 동영상 클립은 억 소리 나는 조회 수를 기록하며 화제가 되었다. 노출이 많았던 의상을 매우 섹시하게 잘 소화해 냈을 뿐 아니라, 전라에 가까운 8등신 미녀들에게 둘러싸인 와중에도 흔들림 없이 완벽하게 공연을 해낸 멤버들을 칭찬하는 댓글이 이어졌다.
무엇보다도, 웬만해선 보이지 않는 제준희와 여민찬의 고래 문신이 온전히 드러난 흔치 않은 무대였던지라 팬들로부터 엄청난 지지와 관심을 받았다.
특히, 한 손으로 허리를 짚은 여민찬이 다른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는 모습과, 하늘을 향해 검지를 쭉 펴들고 ‘One’을 상징하는 마무리 제스처를 하는 제준희가 함께 찍힌 사진은 전 세계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두 사람의 고래 문신을 잘라서 이어붙이면 ‘고래 키스’가 된다는 것이 이때 밝혀졌다. 민찬과 준희 또한 처음 알게 된 사실에 신기해했고 또 무척 재밌어했다.
그 정도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얼마 후 여민찬의 스캔들이 터지고 말았다. 여민찬의 파트너였던 모델이 개인 SNS에 의미심장한 글을 올린 것이 시작이었다.
「다들 어땠냐고 물어보는데, 보면 몰라? 그는 죽여주게 섹시했어! 원한다면 그에게 내 가슴을 줄 수 있어!」
주어가 생략된 이 글의 대상이 여민찬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후로 패션쇼 현장에서 리허설까지 함께 했던 모델과 여민찬이 함께 찍힌 사진이 무수하게 올라갔고, 전혀 그런 적 없는 일들이 사실인 양 떠돌기 시작했다. 어디서 만났다더라, 어디에 함께 갔다더라, 무엇을 같이 먹었다더라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여민찬과 모델이 착용한 패션 아이템들 속에서 비슷한 것을 찾아내어 커플 아이템으로 몰아가기 시작하더니, 그 모델 근처에 얼굴이 가려진 남자 사진이 떴다 하면 ‘여민찬 아냐?’라고 의심하는 글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 공연 이후로 단 한 번도 그 모델을 만난 적이 없었던 민찬으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겠거니 하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을 줄 알았던 스캔들은 소다에 식초라도 들이부은 느낌으로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고, 결국 준희가 폭발하고 말았다.
스케줄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단기 렌트한 숙소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기자들이 일제히 달려들었고 준희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여민찬을 둘러싸고 전투적으로 물었다.
<제시에게 선물한 목걸이가 7만 파운드짜리라고 하던데! 무슨 의미로 준 것입니까!>
<제시의 측근이 말하길, 두 사람이 조만간 약혼을 할 거라고 했다는데, 사실입니까!>
<보트 바운드 클럽에서 찍힌 사진 속의 남자는 민찬이 맞습니까!>
<준희! 준희! 제시와 함께 만난 적 있습니까? 두 사람 사이는 사실인가요?>
<준희! 민찬이 연애를 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준희! 준희!!>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말하는 상황에 몹시 약한 민찬은 <죄송합니다, 하나도 못 알아듣겠습니다.>만 반복하면서 준희를 잡아끌었다.
*
가까스로 집으로 들어왔을 때, 안경을 쓸 생각을 하지 않고 소파에 털썩 앉는 준희는 입이 좀 나와 있었다. 민찬은 “씻을 거지? 물 받는다?” 그런 소리나 하면서 눈치를 슬슬 보아야 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곰곰이 뭔가를 생각하던 준희가 물어 왔다.
“형, 진짜 그 여자 만난 거 아냐?”
“뭐?”
“아니. 기자들이 하는 말이 너무 세세하잖아.”
하아. 민찬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미칠 노릇이었다. 대체 소문이란 것은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져서 어떻게 퍼지는 건지, 그 과정을 조금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 너랑 계속 붙어있었는데 어디서 어떻게 만나.”
변명할 여지도 없는 뜬소문이라는 뜻으로 한 소리가, 슬쩍 화가 난 준희에게는 한 타래 꼬여서 들어갔다.
“나 때문에 못 만났다, 그런 뜻이야?”
“그럴 리가 있냐!”
도통 말이 안 되는 소리에 언성을 높여버린 그 순간에 민찬은 데자뷔를 느꼈다. 이 비슷한 싸움을 분명히 준희와 한 적이 있었다. 그 싸움이 한 달인가 두 달인가 꽤 길게 갔던 것도, 그 기간 동안 하마터면 미칠 뻔했던 심정 또한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에이 씨, 라고 짜증을 낸 민찬은 소파를 돌아왔고 기대고 앉아있는 녀석의 위를 덮치고 키스를 퍼부었다. 그럴 기분이 아닌지라 처음에는 얼굴을 돌리며 거부하던 준희도 나중에는 집요한 키스에 응해주었다. 그냥 하는 가벼운 키스가 아니라, 아래가 설 정도의 짙은 키스를 꽤 길게 한 민찬이 입술을 떼고 초록색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나, 홀딱 벗은 여자 가슴 봐도, 네 엉덩이 생각밖에 안 나. 이제는 이거, 너 아니면 절대로 안 서니까, 너만큼은 그런 오해 하지 마.”
준희의 손을 잡아 제 물건을 꾹 잡아 보게 하면서 단호한 느낌의 고백을 한 이후, 또다시 거친 느낌의 키스를 이어갔다. 이 주제로 말 섞어 봐야 싸움이 될 것이 뻔하니 입 꾹 다물고 몸으로 증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혀와 입술을 이용해 싸우는 듯한 키스를 하던 중에 입술을 물린 준희가 말했다.
“넣어 줘.”
“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몰라 그런 거. 지금 하고 싶으니까, 넣어 줘.”
흠, 하고 못마땅하다는 듯한 한숨을 쉰 민찬이 상체를 일으켰다. 무릎을 짚고 서서 바지 버클을 푸는데, 준희도 주섬주섬 일어나 앉았다. 민찬의 다리 사이에서 빠져나오더니 자신의 바지 버클을 직접 풀었다. 그리고 소파 아래로 내려서면서 무릎을 꿇더니 바지와 속옷을 허벅지 아래까지 내리고는 소파 위에 엎드렸다.
“?”
이 자세를 이해할 수 없었던 민찬이 바지 풀던 것을 멈추고 맹하게 물었다.
“뭐 하자고?”
“뒤에서 넣어 줘.”
“어?”
“오늘은 형 얼굴 안 보고 생각 좀 하고 싶으니까, 뒤에서 넣어 달라고.”
“뭘 생각하는데?”
“말 안 해 줄 거야. 뒤에서 넣어 봐.”
옹고집 자식의 무뚝뚝한 소리에 기분이 상했던 민찬은 참 나. 하고 혀를 찼다. 그러면서도 시키는 대로 소파 아래로 내려서서 준희의 뒤에 무릎을 꿇었다.
그나마 각도는 하기 좋네.
제 얼굴 안 보고 싶다는 녀석과 섹스하면서 기분이 마냥 좋을 리 없는 민찬은, 집어넣기 딱 좋은 각으로 벌어져 있는 소담스러운 엉덩이를 보며 위안을 삼아야 했다.
키스하는 중에 얼추 일어선 성기를 툭툭 흔들어 바짝 세운 후에 넣기 딱 좋은 위치에 있는 구멍에 대고 꾹 밀어 넣었다.
소파 위에 양팔을 올리고 그 위에 얼굴을 묻은 준희는 주먹에 힘을 주면서 흐으으, 하고 신음을 했다. 하지만 얼굴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민찬은, 양쪽이 폭 파여 들어가는 새하얀 엉덩이 사이로 제 성기를 꽉 물어 조이는 분홍색 구멍이 훤하게 보이고 있다 보니, 섭섭한 심정과는 별개로 대단히 흥분이 되고 있었다. 그래서 좀 민망했다. 어쨌든 싸우다 말고 하는 섹스인지라 무게는 좀 잡아야겠기에 입을 꾹 다문 상태로 허리를 쳐올렸다. 하지만,
와 씨. 미치겠네.
역시. 파악파악 하는 소리가 무척이나 찰지고 야했다. 민찬이 부딪힐 때마다 반동으로 흔들리는 하얀 엉덩이는 또 엄청나게 섹시했다. 어느 순간부터 진정하고 무게 잡기가 힘들어진 민찬은 에라 모르겠다 하며 엎드려 준희의 몸을 꼭 끌어 잡고 쳐올렸다. 이 자세 이거, 개들이 교미할 때 이렇게 하지 않나? 그런 생각도 잠시 했지만 그런 생각 또한 찰나였다. 하얀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미친 듯이 쳐올리고 있자니 금세 절정이 찾아왔다.
그리고, 생각할 게 있으니 뒤로 하자던 준희는 지금 실상 아무 생각도 없었다. ‘아 씨 좋아! 좋아! 엄청 좋아아아!’ 그 생각으로 온통 뒤덮인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 따위는 없었다. 아. 한 가지 더 있었다. 삐쳐서 싸우다 말고 하는 섹스이다 보니 너무 많이 좋아하지 않으려고 애는 쓰고 있었다. 제 팔뚝을 물어 잡고 막 질러버리게 될 것만 같은 신음을 꾹 눌러 참고 있었다. 그러다 빠른 속도로 찾아온 절정이 견디기 힘들어진 순간에 소리를 질렀다.
“하아, 하아! 싸고, 흑, 싶어! 잡아 줘!”
잡으라는 소리에 얼른 손을 앞으로 내민 민찬이 준희의 성기를 꽉 움켜쥐자, 준희는 손을 뒤로 뻗어 민찬의 엉덩이를 콱 틀어잡으며 사정했다. 사정하고 축 늘어지는 녀석의 뒤에서 속도를 높인 민찬 또한 굳이 오래 버티지 않고 싸버렸다. 좋은 건 좋은 거고, 녀석이 섹스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가 궁금해서 뒤질 것 같았다.
*
무릎이 벌게진 섹스였다.
주륵 성기를 뽑아내고, 무릎 되게 아프다, 생각하면서 민찬은 준희의 뒤처리를 해 주었다. 할 건 해 주면서, 내내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무슨 생각 했어?”
“…….”
별 생각 못 했지만,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자존심이 좀 상했던 준희는 섹스 중에 하려고 했던 생각을 빠르게 간추려서 해버리고는 대답했다.
“형이 바람을 피우든 안 피우든, 난 형이랑 계속 밴드 할 거야.”
“야이 씨! 안! 피웠다니까!”
“그렇다고 쳐.”
“그렇! 다고 치자니! 진짜 안 만났다고! 그 여자 그 공연 이후로 본 적도 없어! 나 맨날 너랑 같이 있었잖아!”
“마음만 먹으면 자다가 말고 나갈 수도 있지 뭘 그래.”
“하아 씨 미치겠네.”
미치겠는 와중에도 성심성의껏 뒤처리를 하는 손가락만큼은 다정했다. 입을 쭉 내밀고 뒤처리라고 이름 붙이기엔 너무 좋은 마무리 서비스를 받던 준희는 씩씩거리고 있는 남자 몰래 픽, 웃어버렸다.
절대로 변하지 않을 사람이란 것을 믿은 지는 이미 꽤 오래되었는데, 가끔 이런 심술을 부리고 싶을 때가 있었다. 너무 잔잔하기만 하면 좀 지루하니까 말이다.
여민찬이 SNS에 올린 「I Love Rabbit!!!」 덕분에 국내외 팬들이 동시에 한바탕 뒤집어진 이후, 때지도 않은 굴뚝에서 거참 자욱하게도 연기가 퍼졌던 어이없는 스캔들은 진정이 되는 듯했다. 그동안 스캔들을 즐기는 듯 보였던 제시 측에서 토끼 귀가 달린 머리띠를 하고 찍은 사진을 올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와아아아! 씨! 환장하겠네!”
여민찬은 환장하려고 했고, 장범수는 당장 커밍아웃하겠다는 녀석을 말리느라 한동안 애를 먹어야 했다. 그 정도면 인마 커밍아웃한 거라고, 그러면 뭐, ‘나는 토끼랑 섹스한다’라고 올리기라도 할 거냐고? 너는 그런 짐승 같은 소리를 꼭 공식적으로 해야 직성이 풀리겠냐고? 하면서 말이다. 시간이 답이라고. 계속 준희만 붙잡고 다니면서 기다리라고. 그러면 언젠가는 다 해결될 거라고. 그런 거짓말로, 미치고 팔짝 뛰어도 이상할 것 하나 없는 상황에 놓인 녀석을 달래고 또 달랬다.
모델 제시 해밀턴은 여민찬과 스캔들을 못 내서 안달이고, 필 모리스는 자신이 주연한 영화의 실제 모델인 제준희가 자신보다 더 주목받기 시작한 것에 대해 불편한 심경을 드러낸 가운데, 블랙웨일즈와 엮였다가 진창에 빠져버린 카샤의 공격 또한 계속되고 있었다.
자신의 공격적인 멘션에 맞대응을 하기는커녕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태연하기 그지없는 블랙웨일즈 때문에 바짝 약이 올라있었던 카샤가 그만 폭발하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그날은 연말 시상식 전야제 파티였다. 골드 스팽글이 번쩍번쩍 달린 초미니 드레스로 한껏 멋을 낸 카샤와, 록밴드답게 시크한 느낌의 올 블랙 패션으로 나타난 블랙웨일즈가 맞닥뜨린 이후로 파티장의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고조되기 시작했다. 앙숙 관계인 두 팀의 만남에 흥분한 사람들이 혹시 재미난 일이라도 터지지 않을까 기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블랙웨일즈라고 해서 카샤의 기분을 모르지 않았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미안하게 생각하는 부분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천성이 여유롭다 보니 평소 하던 대로 행동했을 뿐이고, 굳이 나서서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자는 합의하에 얌전히 입 다물고 있었을 뿐인데, 태연한 척 굴며 카샤를 약 올린다는 식으로 몰아가는 여론이 좀 섭섭했을 뿐이다.
민찬은 준희에게 어딜 가던 하곤 했던 귀엣말을 속삭였다.
“헉. 카샤다. 엄청 노려보고 있어.”
“힉. 진짜?”
“어. 황금색 원피스 입고 우리 쪽을 엄청나게 째려보고 있어. 와 씨. 황금범수랑 붙여 보고 싶다.”
대화 중 난데없는 황금범수의 등장에 빵 터진 준희가 허리를 잡고 웃자 플래시 터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카샤는 씩씩거리고 서서 노려보고 있는데, 그 독한 시선을 정통으로 받고 있는 블랙웨일즈는 지들끼리 킬킬대고 있으니, 진짜로 사람 약 올리는 건가, 기자들도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당사자인 카샤는 어떠했으랴.
쏟아지는 관심을 정통으로 받고 있다 보니 목이 좀 탔던 민찬이 아마 준희도 목이 탈 것이라는 생각에 펀치를 가지러 간 사이, 아까 킬킬대며 자신을 놀렸던 ‘비치 같은 자식’에게 머리끝까지 화가 난 카샤가 전투적인 걸음을 옮겼고,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집어서 준희를 향해 던지고야 말았다.
“와우!”
뭔가 터지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반가움에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일제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펀치 두 잔을 들고 오다가 달려와 막은 여민찬의 가슴에 꾸덕꾸덕한 생크림 치즈 케이크가 쩍 달라붙었다가 1초, 2초 정도 뒤에 뚝 떨어져 내렸다. 시크한 블랙 셔츠의 가슴팍이 하얀색으로 더럽혀졌다. 황당해하고 있는 민찬과, 그 뒤에서 고개를 쏙 내밀고 무슨 일인가 살피는 준희, 좀 떨어진 곳에 있다가 돌아보고 경악한 범수, 그리고 눈이 커진 재민.
“아. 젠장.”
…하고 중얼거린 민찬은 뒤따라 나오려 하는 심한 욕을 삼켰다. 옆에 있는 초코무스케이크에 시선이 잠깐 가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눈밭에서 애들끼리 눈싸움하는 것도 아니고. 안 될 말이었다. 맞받아 던지고 싶은 심정을 꾹 참아낸 민찬은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 제 가슴에 묻은 것을 툭툭 털었다.
록밴드 주제에 고상을 떨고 있는 게 또 약이 올랐던 카샤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고, 어어, 하며 눈을 키운 민찬은 준희의 어깨를 잡고 큰 걸음으로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카샤가 저 둘 중 과연 누구의 머리채를 잡을 것인가를 기대하며 관전하던 사람들은,
“오오!”
…하며 한목소리로 경탄했다. 자신이 던진 치즈 케이크를 밟고 미끄러진 카샤가 하늘로 붕 뜨는 그 순간에는 백만 마리 메뚜기 떼들이 일제히 날아가는 듯한 플래시 소리가 요란했다. 이어서 높이 떴던 카샤가 바로 그 치즈 케이크 위로 엉덩이부터 떨어져 내리는 그 순간에는
“으으!”
…하며 제 엉덩이가 아픈 기분에 탄식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컸다. 으으, 하며 인상을 구기는 사람들 속에는 한숨을 푹 쉬는 장범수와, 웃음을 꾹 참고 있는 재민도 섞여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대한민국.
사람들이 북적이는 거리거리마다 캐럴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을 즈음의 토요일 저녁, 경기도 일산의 한 프랜차이즈 뷔페 레스토랑의 대형 파티 룸에선 돌잔치가 한창이었다.
행사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다 보니 레스토랑에서 섭외해 준 사회자까지 있었는데, 능청맞은 진행 덕분에 연회장 내에서는 연신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 외에는 지극히 평범한 돌잔치였고 전체적인 순서상에도 그다지 특별한 것이 없는 듯 보였다.
먼저, 부부의 만남과 결혼부터, 아기가 태어난 이후로 50일, 100일, 1년이 되기까지의 성장 영상을 다 함께 시청했다.
이어서 돌잡이를 했는데, 아기는 판사 봉을 잡았다. 아기의 부모와 친가 외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만세삼창을 하며 뛸 듯이 좋아했다. 특히 아기의 외할아버지는 감격스러움에 눈시울을 붉혔고, 그래서 외할머니로부터 핀잔을 받았다. 외할아버지의 눈물을 놓치지 않은 진행자가 “외할아버님께서는 이미 손녀딸이 사법고시 패스한 분위기인데요?”라고 해서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왁자지껄했던 돌잡이 순서를 끝내고 난 후 마지막으로 행운권 추첨 순서를 남겨 두었을 즈음, 전화 통화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온 아기 엄마가 사회자에게 귀엣말을 했다. 사회자는 도통 모를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예에?” 하고 다시 한번 되물었고, 아기 엄마는 다시금 무언가를 속닥였다. 사회자는 슬쩍 황당한 속내를 미처 다 숨기지 못한 채로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음… 네…. 축가가… 준비되어 있다고 하는데요? 제가 돌잔치 진행만 햇수로 십 년째인데 축가는 처음 보는 듯합니다. 하하!”
돌잔치에서 축가 들어본 적 없기는 하객들도 마찬가지였던지라 곳곳에서 실소가 터졌다.
“자, 오늘 축가는 우리 채린이의 삼촌들이 준비해 주셨다고 합니다.”
돌잔치에서 축가를 듣는 건 처음이지만, 생각해 보니 우락부락한 삼촌들이 나와서 굵직한 목소리로 동요라도 불러 주면 꽤 재밌겠다고 생각한 진행자의 표정이 밝았다.
“삼촌들 어디 계시죠?”
이어서 진행자는 하객들이 앉아있는 테이블 쪽을 보고 쭉 뺀 고개를 주억거리며 삼촌들을 찾았다. 그런데,
“어?”
앞쪽 테이블에 앉아있던 아기엄마가 눈을 키우며 입을 틀어막았다. 바로 그 옆에 앉아있던 아기 엄마도 “어머!”하고 화들짝 놀라며 삿대질을 했다.
아기 엄마의 산후조리원 동기들이 앉아있는 테이블 쪽에서 연이은 비명이 터지자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진행자가 아기 엄마들이 가리킨 파티 룸의 입구 쪽을 돌아보았는데,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진행자는 그만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지난 십 년간 돌잔치, 회갑연, 결혼식 등의 행사 진행을 셀 수도 없이 많이 하고 다녔는데 놀라서 말문이 막힌 것은 그야말로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등장만으로 장내에 모인 사람들을 충격의 도가니에 빠트린 인물들은, 놀랍다 못해 경악스럽게도 블랙웨일즈였다. 해외 진출에 성공해서 빌보드에 차트 인한 이후로 세계적인 음악 페스티벌에서 헤드라이너로 설 정도로 세계적인 스타반열에 오른 밴드가 지극히 평범한 돌잔치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기타를 어깨에 멘 여민찬이 마이크를 쥔 제준희의 손을 잡고 등장했다. 그 뒤로 베이스를 멘 장범수와 드럼 대신 박스카혼을 든 배재민까지 등장했다. 장범수와 배재민은 하나씩 들고 들어온 포타블 앰프 두 대를 양 사이드로 셋팅했다.
난데없는 일에도 정도가 있지. 무려 블랙웨일즈가 돌잔치에 나타났으니 축하객들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충격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무 놀라서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경악을 하고 있거나 말거나, 직접 공수해온 노이만 핸드 마이크를 쥔 제준희가 거참 발랄하게도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블랙웨일즈입니다! 채린이의 첫 생일을 축하하며, 채린이가 평소 좋아했다고 하는 둠체타체! 불러드리겠습니다!]
현실성 없는 인물들의 등장에 너무 놀랐던 나머지 입만 딱 벌리고 앉아서 여태껏 마땅히 환호를 해 주지 못했던 사람들이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일제히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질렀다.
박수 소리와 환호성이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자, 카혼 위에 앉은 배재민은 아예 그냥 박수 소리에 맞추어 연주를 시작했다. 요즘 실용음악과 실기시험 곡으로 자주 등장한다고 하는 ‘둠체타체’는 오프 비트가 극대화된 곡으로 드럼 연주자가 그 실력을 한껏 뽐낼 수 있는 매우 어려운 곡이었다. 다시 말하면 어느 정도 실력이 되지 않고는 연주할 수 없는 곡이란 뜻이었다. 하지만 배재민은 카혼만으로 그 어렵다는 비트를 완벽하게 구현해 내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더욱 환호성을 질렀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두리번대던 오늘의 주인공, 태명은 ‘하뚜’요 이름은 ‘정채린’인 돌쟁이 아기는, 아기의 눈으로 보기에도 어딘가 좀 달라서 눈길이 갈 수밖에 없는 신기한 사람, 준희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익히 잘 아는 리듬이 나오자 덩실덩실 엉덩이 바운스로 댄스를 추기 시작했다. 사실 이 노래만 나오면 아기들이 춤을 춘다는 제보가 꽤 있었고 실제로 영상 공유 사이트에도 이 노래에 맞추어 엉덩이춤을 추는 아기들의 영상이 심심치 않게 올라오곤 했다. 채린이 또한 이 노래를 무척 좋아한다 했고, 일전에 오민희는 이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채린이의 영상을 찍어 민찬에게 보낸 적이 있었다. 컴퓨터 모니터로 크게 재생한 영상을 준희와 함께 보던 민찬이 ‘아기가 노래에 맞춰서 스쿼트를 하고 있다’라고 하는 바람에 준희는 박장대소를 했었다. 그래서 축가로 이 곡을 준비한 것이었다.
배재민의 비트에 맞춰 스카 리듬의 전주를 연주하던 민찬은 쪼그만 녀석이 꽤나 비트를 잘 맞추는 것을 보고 웃다가, 마찬가지로 흥겹게 비트를 타고 있는 준희에게 상체를 기울이고 귓가에 외쳤다.
“네 바로 앞에 있는 조그맣고 빨간 거! 채린이!”
그 말에 준희는 멀리 두었던 시선을 내려 제 앞에서 둥실둥실하고 있는 빨갛고 작은 인영을 내려다보았다. 노래에 맞춰 스쿼트를 한다는 설명을 미리 들은 바가 있어 지금 어떤 춤을 추고 있는지 대강 알 것 같았던 준희는 “아하하하!” 하고 커다란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이윽고 채린이와 마주 보고 서서 흥겹고 신나는 비트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그러다 전주가 끝나갈 무렵 마이크를 입술에 붙이고 첫 소절을 불렀다.
[둠, 체, 타, 체, 아, 아하, 하! 둠, 체, 타, 체 아, 아하, 하!]
준희가 그 유니크한 목소리에 공기를 실어 의성어만으로 이루어진 첫 소절을 부르자, 더 웃기는 일이 벌어졌다. 돌잔치에 하객으로 초대받아 온 다른 아기들도 덩달아 제 자리에서 같은 느낌의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이었다. 제 아이가 춤을 추면 부모는 그 춤을 따라 추게 되어있는 법이었던지라, 결국 곳곳에서 가족 단위 춤판이 벌어지고 말았다.
주말에 지인의 돌잔치를 축하하면서 식사나 할 겸 찾아왔던 사람들은 생애 두 번 겪어 보지 못할 경험을 하게 되었다. 놓치면 안 되는 특별한 경험인지라 자리한 모든 사람들의 눈과 귀와 손과 온몸이 바빴다. 뷔페 식당 돌잔치에서 축가를 부르면서도 정색을 하고 아주 제대로 부르고 있는 월드 스타들도 봐야 했고, 또 곳곳에서 난리가 난 아기들의 재롱도 봐야 했다. 그리고 춤을 추기 시작한 아기들의 부모들까지 일어나서 따라 흔들고 있었으니 앉아있기가 오히려 민망해진 상황에서 다 같이 일어나 박수를 치며 어깨춤을 추어야 했다. 그 와중에 핸드폰을 들고 촬영까지 하고 있는 사람들은 더더욱 바빴다. 흥겹고 즐겁고 신나다 못해 아주 그냥 생난리였다.
*
1년 전 민찬의 고모 댁에 초대받아 갔을 때, 민찬의 결혼식에서 축가를 해 주지 않겠냐는 요청에 대한 대답을 회피하기 위해 했던 약속을 지키고자 했던 준희는, 여민찬의 조카 하뚜의 돌잔치에서 진짜로 축가를 불렀다.
준희가 그러겠다고 마음먹었으면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돌잔치에서 뭔 축가를 하느냐며 황당해했던 실제 삼촌 여민찬은 결국 반주를 하게 되었고, 재밌는 구경이 되겠군 싶어 따라온 장범수와 배재민까지 축가에 합류하면서 결국 블랙웨일즈 완전체가 평범한 규모의 뷔페식당에서 열린 돌잔치에서 축가를 부르게 된 것이다.
아기들의 춤판이 벌어져 분위기가 너무 좋았던 데다가, 첫 곡이 끝난 이후로 몇몇 아기 아버지들이 각혈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소리로 앵콜을 부르짖었기 때문에, 도저히 한 곡만 하고 빠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블랙웨일즈는 이런 분위기에서 부르기에 딱 적당한 ‘사랑개’와 ‘온양야설’까지 두 곡을 더 불러야 했다.
그러고 나서, 그야말로 난데없이 등장했던 블랙웨일즈는 챙겨 왔던 악기와 앰프를 들고 아주 쿨하게 퇴장했다. 민찬의 고모 여현주는 식사하고 가라며 네 사람을 붙잡았지만, 옆 홀에서 열리고 있는 다른 잔치의 하객들이 죄다 몰려왔을 뿐 아니라, 주방의 직원들까지 모두 나와 구경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 머물 수는 없었다. 오히려 민폐가 될 것이 분명했다.
*
그리고 몇 시간 후, ‘태어나 보니 삼촌이 블랙웨일즈’라는 제목으로 공유 사이트에 올라간 영상 밑으로 어마어마한 수의 댓글이 달렸다. 돌잔치에서 축가를 하는 것도 신기한데 그 축가를 무려 블랙웨일즈가 했으니, 기함하는 댓글들이 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놀라워하는 글들과 함께 여민찬의 조카를 부러워하는 글들로 도배가 되다시피 했다. 그러한 가운데, 돌잔치가 아니라 클럽 같다는 댓글과, 클럽도 아니고 술기운 거나하게 오른 회갑연 같다는 댓글도 달렸다. 특히 몸을 구부려 자세를 낮춘 제준희와 빨간 원피스를 입은 아기가 마주 보고 춤을 추는 모습이 크게 화제가 되었다. 치명적으로 사랑스러운 제준희와 아기의 케미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이 끙끙 앓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서, 고품질의 먹이를 덥석 문 기자들에 의해 관련 기사 수십 개가 올라왔다.
「의리의 블랙웨일즈, 여민찬 조카 돌잔치에서 완전체로 축가 불러」
「쇼킹! 뷔페식당 돌잔치에 등장한 월드 스타!」
「태어나보니 삼촌이 여민찬? 아기는 좋겠네~ 돌잔치의 축가를 무려 블랙웨일즈가!」
「제준희와 돌 지난 아기의 댄스 배틀! 누가 더 사랑스럽게?」
「블랙웨일즈 사전에 ‘적당히’란 말은 없다! 돌잔치 축가 퀄리티 무슨 일이야!」
「드럼 대신 카혼으로 돌잔치에서 혼신의 연주 중인 배재민, 손이 안 보여!」
「아기들 재롱에 카리스마 리더 장범수도 무장해제! 이렇게 웃는 거 처음 보는데?」
이날 이후로 아기와 아빠가 함께 ‘둠체타체’ 춤을 추는 챌린지 영상이 대유행을 했다. 또 이후로 한동안 돌잔치에 밴드를 불러 축가를 부르는 것이 유행을 했다. 그리고 연예계에서는 조카의 돌잔치에 깜짝 출연해서 ‘조카 바보 삼촌’ 이미지를 홍보하는 마케팅이 유행을 했다. 흔히 ‘블랙웨일즈 효과’라고들 부르는 수많은 유행들 중 소소한 편에 속하는, 지극히 단편적인 사례였다.
이듬해 봄.
준희의 생일 즈음해서 지어졌기 때문에 아무래도 여민찬이 준희의 생일 선물로 지은 것 아니겠느냐 소문이 돌았던 우월동의 단독주택이 완공되었다.
재건축 결정이 난 오덕 빌라 부지를 매입해 거기에 단독주택을 짓겠다는 녀석을, 장범수는 한동안 말렸었다. 쓰리고에 흔들기까지 한 상황에서 스스로 피박 먹고 똥 싸는 격이라고. 연립 주택을 죄 매입해서 단독주택을 짓겠다니. 그게 지금 무슨 당치도 않은 소리냐고. 왜째서(기가 막힌 나머지 말도 절었다) 그 손해를 보려 하느냐고. 지금 그거,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 위장 아프게 만드는 개망나니 짓이라고.
그렇게까지 심하게 말했건만 여민찬은 귓등으로 흘려버렸다. 왜냐하면 민찬은 이 동네가 좋았다. 이 동네에서 준희와 처음 만나고, 알아가고, 좋아하게 되고, 또 사랑하게 된 소중한 기억을 평생 간직하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준희의 하나뿐인 가족이었던 할아버님과의 추억 또한 지켜 주고 싶었다.
“어휴.”
…하며 위장을 부여잡은 범수는 당분간 그 집 집들이는 못가니 그리 알라 했다. 그 집 볼 때마다 위가 아플 것 같다면서 말이다. 여민찬은
“참 나. 속물 아니랄까 봐.”
…라고 했고, 장범수는 “뭐 인마!”라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준희는 ‘뭐 인마’를 흥얼흥얼 불렀다.
블루오션 식구들 입장에서는 기가 막힌다 싶었을 정도로 정확한 내막이 담긴 소문이 떠돌았던 그 집은 LA 부촌에 있는 집들과 그 느낌이 좀 비슷했다. 파란 지붕을 얹은 하얀 집이 참 동네하고 안 어울렸다.
언젠가 준희와 미국에 갔을 때 ‘우리도 나중에 저런 집 짓고 살자’라는 약속을 지킨 것인데, 준희는 그게 그렇게나 진지한 이야기였던 거냐면서 조금 어이없어했다. 익숙한 동네에서 평생 살게 된 것이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그 와중에 살짝 어이가 없는 건 준희 또한 마찬가지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던 것이지만, 기타 치는 다정한 형은 역시나 ‘정도’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고, 준희는 그리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이 사는 세상’ 제작진들과의 의리를 지킨 여민찬은 국내 활동을 하는 기간 동안 새로 지은 집에서의 촬영을 흔쾌히 수락했다.
무려 블랙웨일즈의 사생활을 찍게 된 제작진들은 몹시 흥분한 상태로 카메라를 세팅했다. 23평짜리 연립 주택에서 찍을 때보다 카메라 수가 세 배로 들어가긴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
그리고 방송 당일.
명실상부 국민 밴드이자 월드 스타인 블랙웨일즈의 여민찬과 제준희의 자택 내부가 처음으로 공개되는 날이다 보니, 방송 며칠 전부터 뉴스 연예면이 들썩들썩했었다. 그리고 방송 몇 시간 전부터 방송사 홈페이지의 실시간 댓글 창과 비공개 팬 사이트 등에 모여든 팬들의 기대하는 글들이 계속해서 올라오고 있었다.
-이번에도 여민찬 혼자 나올까?
-제준희도 같이 나오면 좋겠다ㅠ-ㅠ
-나는 완전체로 나올 때가 제일 재밌더라
└동감. 장범수랑 여민찬이 붙어야 웃겨
└맞아. 준희랑 배재민 웃음소리가 들려야 분위기가 살아
그리고 드디어 방송이 시작되었고, 패널들이 먼저 나와 이미 다 알고 있는 오늘의 게스트에 대한 기대를 부르는 멘트를 몇 마디 던졌다.
“자, 오늘 나오는 분들은 정말 어마어마한 분들이에요.”
“누구죠? 혹시 그분들인가?”
“누구요?”
“그 저 있잖아요. 파란 집에 사시는.”
“파란 집? 청와대요?”
“아니 그 왜 있잖아요. 파란 집.”
패널들이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는 동안 댓글 창에서는 원성이 자자했다.
-누군지 다 알아요 빨리 불러 주세요
-헛소리 그만하고 게스트 불러 주세요 현기증 나
-나 심장 터질 것 같애ㅠㅠ 제준희도 같이 나오면 기절할 것 같은데ㅠㅠ
이미 녹화를 끝내고 편집을 마친 방송분이다 보니 패널들이 팬들의 댓글을 보고 더 빨리 부른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어느 정도 적당히 시간을 끈 후에 메인 진행자가,
“오늘의 게스트 나와 주세요!”
…라고 외쳤고, 문이 열리면서 제일 처음 등장한 사람은 모두가 예상하고 있었던 여민찬이었다. 찢어진 블랙진에 검은색 터틀넥을 입은 올블랙 스타일이었다.
-미친올블랙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스타일ㅠ-ㅠ
-패션의 몸은 완성이다
-여민찬은 몸선이 진짜 이쁜 거 같아
-어깨 넓이 무슨 일이야ㅠㅠ
-좐나 멋있 헉 제준희다!
엄지손가락 타자들이 어찌나 빠른지 그 짧은 시간에 여민찬의 착장에 대한 감상을 남기던 시청자들은 바로 뒤에 이어서 손을 잡고 들어온 남자를 보고 난리가 났다.
-제준희다!!!!!
-제준희다!!!
-제준희다!!!!
-제준희!!!
-제준히다ㅠ-ㅠ
-제준다ㅠ0ㅠ
몇 해 전 ‘그사세’에 출연했을 때 스튜디오 촬영을 거부했던 적이 있었던 제준희가 나올 것이라는 기대를 별로 하지 않고 있었던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등장에 몹시 놀랐다. 안 나올 것이라 예상을 하면서도 그래도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바람이 이루어졌으니 기쁨의 눈물이 범람하고 있는 가운데,
-꺄아아아!!!! 다 나왔어!!!!
-리더오빠아아!!!!
-재미나아아아!!!!
-얼씨구나 완전체다아!!!!
준희의 뒤로 꾸벅 인사하며 들어서는 남자들 덕분에 시청자 게시판이 한바탕 뒤집어진 가운데, 연한 색 청바지에 포근해 보이는 흰색 니트를 입은 제준희와, 심플한 라운드 티셔츠에 카디건을 입었지만 몸이 심플하지 않은 배재민, 그리고 진갈색 슬랙스에 베이지색 터틀넥을 입은 장범수까지 4인 4색 개성을 살린 스타일로 착장을 한 멤버들이 패널들의 중간에 자리를 잡고 섰다. 패널들은 팬들만큼이나 반가워했다.
“와아! 역시 블랙웨일즈는 다 같이 있을 때 제일 멋있어요!”
“지난번에 혼자 나와서 죄송합니다.”
“아이구, 그런 뜻이 아니구요!”
짓궂은 멘트를 하긴 했지만, 다 함께 나와서 지금 제일 좋은 사람은 사실 여민찬이었다. 특히 준희와 꼭 같이 나가고 싶었던 민찬은 범수와 재민에게 함께 나가 달라고 부탁을 했다. 멘트를 메꿔 주는 멤버들이 같이 있으면 카메라가 분산되다 보니 틈틈이 준희에게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을 터이고 그러면 준희도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준희의 기분을 신경 쓰고 있는데, 고개를 쭉 빼고 서서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멤버들을 힐끔대던 패널 중 한 명이 준희의 얼굴을 보고 한마디를 했다.
“와아, 근데 준희 씨는 진짜 얼굴이 대단하시다.”
“감사합니다.”
“아하하. 역시. 안 빼. 이런 성격을 팬들이 엄청 좋아하시죠?”
“네.”
“아니 근데, 그렇게 생긴 분들은 대체 아침에 거울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해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던진 질문이었는데, 질문을 던진 당사자까지 포함하여 모두의 얼굴 위로 아차, 하는 표정이 지나갔다. 하지만 별로 기분이 상하지 않은 듯 씩 웃은 준희가 발랄하게 대답했다.
“거참 잘생겼구나, 생각합니다.”
보이지도 않는 얼굴을 보고 그런 생각 할 리 없는 남자의 능청스러운 거짓 대답 덕분에, 슬쩍 위험했던 분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다만 팬들은 속상해했다.
-아… 질문 좀 생각하고 해주세요…
-준희 너무 착해…ㅠ-ㅠ
-천사준희야… 이모가 평생 뒷바라지 해줄게… 준희는 하고 싶은 거 다해… ㅠ-ㅠ
다른 출연자들과는 달리 총 2회에 걸쳐 편성이 되어있다 보니, 여유로운 느낌의 참 길다 싶은 인사말이 이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편집팀의 눈에는 네 사람이 나란히 서있기만 해도 멋지고, 재밌고, 흥미진진했기 때문에 불필요하여 자를 만한 부분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확실히 길긴 긴데 팬들이고 제작진이고 길다고 느껴지지 않는 인사말을 마치고 이제, 본영상이 시작되었다. 처음 시작은 기상 장면부터 찍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있다 보니, 팬들은 꽤나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설마 같이 자는 건 아니겠지…
-저 집에 방이 몇 갠데 그럴 리가…
-한방에서 같이 자면 대형 사고 각인데…
-한 침대에서 같이 자면 지구 폭발…
그런데, 팬들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그 큰 집에 수많은 방을 놔두고 굳이 한 방에서, 게다가 저 넓은 방에 남는 공간도 많아 보이는데 굳이 침대 하나를 두고, 그 위에서 함께 자고 있는 남자들의 모습이 나왔다. 그 순간, 팬들은 잠시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아노미 상태와도 같은 정적이 2초인가 지나간 후, 벌새의 날갯짓보다 빠른 속도로 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가, 같이 자……?
-헐
-대박!!!
-진짜가 나타났다!
-저 둘은 찐이다. 찐
-리얼 맞네ㅠㅠㅠㅠㅠㅠㅠㅠ
얼굴 앞에 다소곳이 손을 모은 여민찬과 장군처럼 큰 대자로 벌리고 자는 제준희, 그리고 여민찬의 다리 위에 올라간 제준희의 발 하나. 데자뷔인가 싶도록 1년 전과 흡사한 아침 모습에 당황한 것은 패널들도 마찬가지였다.
“저 이거, 1년 전에 그 영상 아니죠? 저 왜 이 영상을 1년 전에 본 것 같죠?”
“근데 새로 지은 집에 방 많지 않아요? 왜 같이 주무시는 거예요?”
패널의 순진한 (척하는) 질문에 게시판에서는 또다시 난리가 났다.
-아악! 그런 거 물어보지 마아아!!!!
-제발 생각 좀 하고 질문해주세요오오오!!!!
-침실 침대 언금 부탁드려요!!!!!
이게 대체 몇 번째 난리인지. 어쨌든 너무나 당연한 걸 묻는 패널 때문에 어이가 없었던 팬들의 원성이 자자한 가운데, 여민찬은 준희에게 화면 설명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장범수가 나서서 둘이 함께 자는 이유에 대한 해명을 했다.
“준희가 자꾸 이불을 차 내서요. 준희가 감기 걸리면 저희는 활동중지잖아요? 그래서 민찬이가 이불 덮어 주려고 같이 자요.”
그러자 실시간 게시판의 팬들은 리더의 변명을 두고 애정이 담긴 한마디씩을 하기 시작했다.
-장 리더님 본업인 철벽실드를 시작하셨습니다
-와 대단해. 말 안 되는 소린데 말 되는 소리로 들린다
-멋진 개소리다
-진정한 사랑개는 장 리더님인 듯
팬들과 같은 생각일 것이 분명한 패널들 또한 적당히 넘어가기 위한 중간 멘트를 던지고 있었다.
“아이구. 그러면 차라리 수면 잠옷을 입히시지.”
“수면 잠옷이요?”
여민찬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고, 패널이 대답해 주었다.
“이불감으로 만들어진 잠옷이 있거든요.”
“아.”
민찬은 설렁설렁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준희의 잠버릇을 아는 팬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시끄러웠다. 특히 비공개 팬 사이트의 게시판에 모인 팬들은 세상만사 달관하여 초월한 느낌의 글들을 올렸다.
-그런 거 입혀놨다가는 죄다 벗어 던졌겠지
-그랬으면 오늘 영상은 청불
-여민찬 대충 그냥 수긍하는 척하는 거 봐. 영혼 없어ㅋㅋㅋ
-장범수랑 배재민은 두 사람 관계 다 알겠지?
└알 듯?
└백퍼. 장리더님 지금 위장 아픈 표정 보면 모를 리가 없음ㅋㅋㅋ
활기찬 실시간 게시판과는 달리 어쩐지 좀 고요해진 스튜디오 안의 분위기를 감지한 장범수가 재차 나섰다.
“사정이 있어서 민찬이가 없을 땐 저나 재민이가 준희랑 함께 자요. 준희 녀석이 잠버릇이 워낙 안 좋아서요.”
그 소리에 패널들은 끄덕끄덕하는 분위기인데 팬들은 여전했다.
-모두들 믿어주는 척해 주세요! 우리 리더님 위 아프면 안 돼요!ㅠ-ㅠ
└믿습니다!
└리더님의 말을 믿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실시간 게시판은 사이비 종교단체의 집회현장 같아진 가운데 화면 속에서는 여민찬이 먼저 일어났다. 팬들이 다음 상황을 점쳤다.
-이제 곧 이불을 덮어 줄 테고,
-한동안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겠지,
-그러다 여민찬은 밥하러 먼저 나갈 테고,
-그리고 그다음엔 기상준희를 보겠지?
-오랜만이야 기상준희ㅠ-ㅠ
실시간 게시판에는 다음 상황을 점치고 기대하는 글들이 속속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화면 속 상황은 팬들이 예상한 대로 흘러가는 듯했다. 부스스한 몰골로 두리번거리던 여민찬이 침대 아래로 떨어져 내린 이불을 끌어왔고, 준희에게 덮어주, 려고 했는데, 그 순간에 이불을 차낸 준희의 발이 여민찬의 관자놀이에 정통으로 날아들었다. 화면 안에는 아주 커다란 느낌표가 떠올랐고, [억!] 하는 비명 소리와 함께 휘청거렸다가 제자리로 돌아온 남자가 끙, 신음하며 머리를 감싸고 비볐다.
-헉! 아프겠다!ㅋㅋㅋㅋ
-제대로 찼어!ㅋㅋㅋㅋㅋㅋ
-괜찮은 거야?ㅋㅋㅋㅋㅋ
-여민찬 날아가는 줄ㅋㅋㅋㅋㅋ
-개그콤비냐고ㅋㅋㅋㅋ
-아침 댓바람부터 몸 개그 중인 월드스타들ㅋㅋㅋㅋ
스튜디오 안의 패널들이 폭소하며 뒤집어진 건 당연하고 실시간 게시판의 팬들 또한 빵 터져버린 웃음을 어쩌질 못한 채로 여민찬의 안부를 걱정하고 있는 사이에, 화면 속에서는 부스스 눈을 뜬 준희가, 비몽사몽 간에 사태를 파악하고는 [하하하하하!] 특유의 허스키함이 한결 심해진 소리로 웃으며 사과했다.
[미안- 괜찮아-?]
그러고는 여민찬의 얼굴 앞으로 제 얼굴을 닿을 듯이 들이밀고 발로 찬 부위를 살피는 장면이 나왔는데-
-처, 청불?
-이대로 청불?
-이거 방송 괜찮아요?
-와. 안 죽고 살아있길 잘했다.
-내 생전에 이런 걸 다 보네.
반응속도가 마하 급인 시청자 게시판은 이미 폭주했고, 그보다 한발 늦게 장범수가 나섰다.
“준희가 원래, 안경을, 그 안 쓰면 그, 습관적으로, 사람 얼굴 볼 때, 저렇게, 저럽, 참 나, 저럽니다.”
하지만 실시간 게시판은 고군분투 중인 리더의 외로운 싸움을 놓치지 않았다.
-리더님 말 꼬였다ㅋㅋㅋㅋ
-지금 혀 차지 않았어?
-장리더님 혀찼어. 참 나, 했어
-리더님 찐당황ㅋㅋㅋ 악 웃겨 죽겠다ㅋㅋㅋ
-장리더님 파이팅! 오늘 위장약 꼭 드시고 주무세요.
└이거 녹화방송이에요ㅋㅋㅋ
리더의 위장이야 어찌 되었든지 간에, 준희의 발차기 어택 덕분에 같이 일어나게 된 두 사람이 동시에 침실 밖으로 나왔고 팬들은 중간에 사고가 있긴 했지만 무사히 다시 만나게 된 기상준희에게 인사를 건넸다.
-기상준희 오랜만이야ㅠ-ㅠ
-너무 보고 싶었어 기상준희ㅠㅠ
-내 최애는 기상준희ㅠ-ㅠ
-저는 거짓말 아니고요, 기상준희 보고 팬 됐어요ㅠㅠ
-기상준희 누나가 격하게 아낀다 진짜ㅠㅠ
기상준희를 앓는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한결 넓어진 거실과 주방, 그리고 욕실이 나왔다. 주방에서는 여민찬이 특유의 여유로운 느낌으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고, 욕실에서는 거울 따위 쳐다보지도 않는 준희가 야무지게 세수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기요? 욕조가 2인용인데요?
-저기요, 피디님? 이거 비방용인 거 같은데요?
-상상하니까 코피가…
-벗은 사람 한 명도 없는데 왜 방송이 야하지?
2인용 욕조를 못 본 것일 수도 있고, 봤지만 눈치껏 모른 척하는 것일 수도 있고, 어쨌든 스튜디오 안에서는 욕조에 대한 언급 없이 넘어가는 듯했다. 화면이 다시 주방으로 바뀌는 즈음해서 장범수가 아주 미세하게 한숨을 쉬었는데, 그게 또, 팬들의 눈에는 보였다.
-장리더님 한숨 쉬었어ㅋㅋㅋㅋ
-누가 봐도 안도의 한숨ㅋㅋㅋㅋ
-리더님 수고했어요ㅋㅋㅋㅋ
-이제부터는 욕실 언금 부탁드려요
└침실도 언금인데 욕실도 언금이야ㅋㅋㅋㅋ
잔뜩 긴장한 것이 분명한 장범수에게는 고문과도 같은 영상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젖은 빨래 같았던 준희가 잠이 깬 순간부터는 화면 속의 텐션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계속 노래를 흥얼거리던 준희는 자기 노래에 맞추어 아무것도 없이 휑한 거실에서 막춤을 추기 시작했다. 느낌 충만한 춤사위가 꽤나 현란했는데, 주방에서 뒷정리를 하던 여민찬이 힐끔 돌아보고는 “다치면 혼나!”라고 소리를 치자 “어!” 하고 대답하더니만, 이제는 ‘어’가 가사인 노래를 “어! 어어! 어, 어!” 하고 부르면서 뭐라고 형언하기 힘든 춤을 이어갔다. 여민찬을 비롯한 블랙웨일즈 멤버들은 자주 본 모습인지라 귀엽다는 듯이 빙긋 웃고 있고, 나머지 패널들은 박장대소를 하고 있는 가운데, 웃음을 멈추지 못한 메인 진행자가 이유를 물었다.
“저기요, 준희 씨? 대체 왜 저러시는 거죠? 아침에 먹은 음식에 먹으면 안 되는 것이 들어있었나요?”
약물 복용을 의심받고 있는 준희가 제 행동에 대한 변명을 했다.
“저기가 너무 넓어서요.”
자신의 원맨쇼로 인해 모두가 빵 터진 상황에서 별로 민망해하는 것도 없는 녀석의 씩씩한 대답이 맘에 들었던 배재민이 하하하하하! 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 홀린 듯 패널들은 다 같이 비슷한 느낌으로 하하하하하! 웃었다. 한바탕 웃음이 지나간 후 패널이 느낀 바를 물었다.
“근데 춤추고 싶어질 만도 하다. 거실에 진짜로 뭐가 하나도 없네요?”
“이사한 지 얼마 안 돼서 세간이 별로 없어요. 근데 아마도 저 상태로 계속 갈 것 같아요. 준희가 넓다고 좋아해서요.”
민찬의 대답에 메인 진행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좋아하시는 것 같네요.”
또다시 왁자하게 웃음이 지나갔다. 의심할 여지 없이 제준희는 거실이 넓어서 좋아하고 있었으니까.
그러고들 있는데 화면 속에서 반가운 인물들이 등장했다. 장범수와 배재민, 그리고 블랙웨일즈 팬들이 제일 부러워하는 여성 1위인 스타일리스트 송여진과, ‘극한 매니저’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매사에 절규하는 모습으로 큰 웃음을 주었던 이우영, 그리고 핑크 고래 오빠로 유명한 강동수까지 블루오션의 식구들이 집들이를 온 것이었다.
이미 자주 드나들었던 다른 이들과는 달리 집에 처음 오는 것인 화면 속의 장범수를 가리킨 민찬이 고발을 했다.
“범수 형 지금 기분 안 좋아요.”
“네? 왜요?”
이유를 말하기 싫은 여민찬을 대신해서 재민이 나서 주었다.
“범수 형이 손해 보고 집 지었다고 민찬이한테 되게 뭐라 그랬어요. 저 집만 생각하면 속이 쓰리다고 그동안 안 가 보다가, 저 날 처음 가 본 거예요.”
“아, 그러셨구나. 지금은 괜찮으세요?”
“안 괜찮아요.”
장범수의 단호한 부정에 또 한바탕 웃음이 지나갔다. 메인 진행자가 상황에 매우 적절한 코멘트를 했다.
“그렇죠. 사촌이 땅 사면 배가 아프듯이, 제 식구가 손해 보면 또 배가 아프고 그런 거죠. 그러고 보면 진짜 가족이네, 이 팀은.”
하지만 여전히 손해 본 금액이 아까워 속이 쓰리는 장범수는 말없이 여민찬을 째려봤다.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는 느낌이 충만했다. 여민찬은 눈빛으로 잔소리를 하고 있는 장범수의 시선을 피하면서 중얼거렸다.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도 있는 거야.”
그 비슷한 소리를 열 번도 더 들은 바 있는 장범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배재민이 하하하하하, 호쾌하게 웃었다.
-민찬♡범수 포에버
-민찬♡범수 포에버
-민찬♡범수 포에버
-민찬♡범수 포에버
-민찬♡범수 포에버
견원지간 사이에 낀 평화의 비둘기 같은 느낌의 대화가 지나가는 동안 마이너 커플링을 미는 극소수 팬들이 등장해 잠시 게시판을 도배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집 구경을 다니기 시작한 장범수 덕분에 시청자들 또한 집 안 구석구석을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반대를 하긴 했지만 일단 궁금은 했던 모양으로 참 꼼꼼하게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참견하고 잔소리를 하는 남자를 보며 패널들은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겉모습만 보자면 냉정하고 침착하게 사리판단을 하는 실리주의자로 보이는 리더의 실상은 정 많고 따뜻한 남자라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그런 장면이었다. 팬들도 충분히 느끼는 모양으로 게시판 분위기가 훈훈해졌다.
-리더형은 사랑입니다.
-저건 찐 부모의 마음이다.
-장리더님, 부디 만수무강하세요.
집 구경을 빙자한 온갖 잔소리를 마친 후에, 점심으로 중국요리 배달을 시켰다. 취향도 가지가지라 짬뽕, 짜장, 볶음밥에 송이 덮밥까지 고루고루 시켜 놓고 본격적으로 먹방이 지나갔다. 다들 참 잘 먹긴 하는데, 특히 입이 짧을 것처럼 생긴 준희가 짜장면을 크게 집어 입에 넣고 후루룩 후루룩 흡입하는 모습은 연달아 세 번이나 지나갔다. 보는 사람도 되게 먹고 싶어지게 만드는 영상이었다.
“아유, 다들 잘 드시네요.”
“그러게요. 근데 준희 씨가 의외로 되게 잘 드시네? 준희 씨가 저렇게 잘 드시는데, 왜 내가 살이 찌는 거죠?”
“죄송합니다.”
제준희의 공손한 사죄의 말에 또 웃음이 지나갔다.
중화요릿집 실시간 매출 올라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먹방을 끝낸 이후로, 일곱 사람은 자연스럽게 지하에 있는 스튜디오로 모여들었다.
완벽하게 방음 처리가 된 스튜디오 내부는 원목으로 마감을 해서 따뜻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한편에는 믹싱 부스가 있었고, 또 한편에는 한단 위로 올라간 무대도 있었는데, 벽과 바닥이 전반적으로 밝은 천연 원목 컬러인 반면 무대는 어두운 오크체리색으로 대비가 뚜렷했다. 준희의 시력을 고려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대 위에는 8기통 드럼과 키보드가 있었고 거치대에는 베이스와 일렉 기타가 놓여있었다. 그리고 언제라도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마이크 세팅이 완벽하게 되어있었다. 이곳에서 합주로 녹음을 딸 경우 세션별로 각자 따로 녹음을 했을 때와 진배없는 퀄리티를 낼 수 있었다.
국내에는 밴드의 합주를 녹음할 수 있는 전문 스튜디오는 물론이고 방음 시공이 제대로 되어있는 연습실의 수 또한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다 보니 밴드를 하는 이들에게는 아마도 꿈의 공간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만한, 그런 공간일 터였다.
송여진과 강동수와 이우영은 자연스레 중앙에 놓인 소파에 착석했고, 멤버들 또한 자연스럽게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 섰다.
이 공간에 하루에도 열 번씩 들락거렸다 보니 눈을 감고도 다닐 수 있을 정도인 준희는, 민찬의 손에 의지하지 않고도 자신감 있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여민찬이 지어서 선물했다는 이 집에서만큼은, 제준희 또한 남들처럼 또렷하고 환한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범수는 생기발랄하게 돌아다니는 준희를 흐뭇하게 구경하다가, 거치대에 걸린 베이스를 들어 보면서 빙긋 웃었고, 처음으로 칭찬을 했다.
[여긴, 뭐, 좋네.]
일전에 이미 이 공간을 구경했으며 신나게 연주도 해 보았던 재민도 꽤 닮아진 얼굴로 빙긋 웃었다.
G코드를 잡고 둥둥둥 튕겨 보면서 앰프의 톤을 느껴 본 범수가 꽤 만족한 얼굴로 제안을 했다.
[한 곡 맞춰 볼까?]
그 말에 대답들을 하는 대신, 여민찬은 기타를 들어서 멨고, 배재민은 스틱을 들었다. 그리고 준희는 키보드의 전원을 켰다.
장범수가 오늘의 관객이 되어 줄 훌륭한 동료들을 향해 물었다.
[신청곡 있으십니까?]
블랙웨일즈의 곡은 하나같이 다 좋아서 뭐 하나를 고를 수가 없다 보니 난관에 부딪힌 세 사람 중, 제일 연장자인 여진이 말했다.
[이 멤버로 관객들 앞에서 처음으로 합주했던 날의 첫 곡!]
어떻게 보면 관심 퀴즈이기도 했다. 연인들 끼리 첫 키스 했던 장소나 처음 만난 장소 등을 물어 보며 이구동성으로 대답하는 그런 게임 말이다.
무대에 선 네 사람은 암묵적 합의하에 서로가 무슨 곡을 생각하는지 말하지 않았고, 그저 음흉한 느낌으로 웃었다. 한 명 한 명이 개성이 무척 강했지만, 이럴 때 보면 또 넷이서 하는 짓이나 표정들이 꽤나 닮아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송여진이 빙긋 웃고 있는데, 장범수가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블랙웨일즈입니다. 오늘은 저희 블랙웨일즈 멤버들 모두에게 특별한 날입니다. 새로 합류한 보석 같은 보컬, 제준희와 함께하는 첫 공연이기 때문입니다.]
장범수가 했던 멘트를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는 멤버들과 오늘의 관객이 되어준 세 사람이 모두 웃었다.
[하여간 변태라니까.]
장범수의 기억력을 징그러워하는 여민찬이 피식 웃으며 한 소리를 했다.
-민찬♡범수 포에버
-민찬♡범수 포에버
└지금 그런 분위기 아니거든요?
게시판에 또다시 등장한 마이너 팬이 도배를 하려다가 질책을 받고 조용히 사라졌다.
그날 자신이 했던 멘트는 물론이고 제스쳐까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장범수가 허공을 쿡 찌르며 외쳤다.
[바로 첫 곡 갑니다! Starlight!8)]
세 명의 관객들이 커다랗게 환호성을 보내 주는 가운데 장범수가 스타트를 끊었다. 이어서 배재민이 절로 어깨가 들썩이는 비트로 따라붙었고, 곧이어 제준희의 키보드 사운드가 등장했다. 새까만 밤하늘에 별똥별이 우수수 떨어지는 느낌으로 반짝반짝한 키보드 소리에 흥이 오른 여민찬은 관객들이 박수를 쳐 주어야 하는 부분을 뮤트와 타핑으로 멋지게 재현해 냈다. 통통 튀는 멜로디를 연주하던 제준희는 마이크 앞으로 웃음이 걸린 입술을 가져갔다. 눈을 지그시 감고 첫 소절을 불렀다.
[Far away-]
한배에 탄 이후로 리더를 믿고 열심히 노를 저은 네 사람은 아주 멀고 먼 줄만 알았던 곳까지 순항을 하고 있었다.
종착지는 없었다. 밤하늘에 별이 떠있는 한 계속해서 항해를 해 나가겠다는 네 남자의 다짐이 어우러진 합주가 마치, 끝이란 것은 없는 네 사람의 미래를 얘기하는 것만 같았다.
[Starlight-]
별을 쫓아 항해하다가 결국 자신들이 별이 된 남자들의 노래가 팬들의 마음에 크게 울리고 있었다. 주야장천 떠들어 대던 게시판에 글 올리는 것을 잠시 잊게 만들었을 정도였다.
즉흥적으로 맞췄음에도 불구하고 완벽 그 자체였던 무대에서 편집점을 찾지 못한 편집팀은 지하 스튜디오에서의 합주를 풀버전으로 내보냈다.
-제준희 음색… 와아아아아… 진짜 미쳤… 와아아아아…
-추리닝 입고 기타 치는데 저렇게 섹시할 일이냐고…ㅠㅠ
-이런 게 바로 귀호강 눈호강이구나…ㅠㅠ
-피디님, 작가님, 복 받으세요…. 만수무강하세요….
실시간 게시판에서는 합주 영상을 자르지 않고 내보내 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글들이 우수수 올라가고 있었다. 예능이나 토크쇼에서 다재다능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도 물론 좋지만, 역시나 블랙웨일즈는 노래하고 연주할 때가 제일 멋있었다.
이후로, 블루오션 식구들의 요청에 의해 1년 사이 레퍼토리가 더 많아진 제준희의 모창 개인기 퍼레이드가 이어졌다. 박장대소하는 사람들 속에서 누가 봐도 여민찬이 제일 좋아하고 있었다. 포복절도하면서 발을 구르다가 배재민을 찰싹찰싹 때리고 아주 그냥 난리였다.
꽤나 한참 스튜디오에서 놀다가 올라왔을 때는 저녁 무렵이 되어있었고, 팬들 사이에선 이미 꽤나 유명한 장범수의 요리 실력이 공개되었다. 생계의 문제로 평범하게 요리를 잘하는 편인 여민찬과는 차원이 달랐다. 유럽풍 요리 마스터 급인 장범수는 감바스 알 아히요, 부채살 볼로네제 딸리아텔레, 트러플 포테이토 뇨끼, 시즈널 스타터 샐러드를 척척 만들어 냈다. 장범수로부터 요리의 제목을 듣던 여민찬이 [뭐?]하며 인상을 구겨서 스튜디오 안과 실시간 게시판 내에서 큰 웃음이 터졌다.
-여민찬 표정ㅋㅋㅋㅋㅋㅋ
-여민찬 지금 진심으로 어이없엌ㅋㅋㅋㅋㅋㅋㅋ
-저거 살몬 샌드위치 표정 아니야?ㅋㅋㅋㅋㅋㅋ
└살몬 샌드위칰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
이름이야 어쨌든 맛은 있었던 요리를 둘러앉아 먹는 동안 수다가 끊이질 않았다. 활동 중의 재밌었던 일, 감동적이었던 일, 아찔했던 일 등의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 사람이 무슨 얘기를 했다 하면 나머지 여섯 명이 그 일에 대해 돌아가며 한마디씩 다 하고 있었다. 화면을 한가득 채우는 자막에서 편집팀의 당황과 노고가 느껴졌다.
-자막팀 고생하셨어요ㅋㅋㅋㅋ
-어째 조용한 인간이 하나도 없냐고ㅋㅋㅋ
-다 시끄러워ㅋㅋㅋㅋ
-진짜 정신없다ㅋㅋㅋㅋㅋ
식사를 마치고 난 후 설거지 내기 가위바위보를 했는데 다 내려놓은 표정을 짓고 임한 여민찬이 꼴찌로 당첨되었고, 하하하하하, 호쾌하게 웃은 배재민이 같이 개수대 앞에 서서 설거지를 도왔다.
키 187cm, 190cm인 남자 둘이 나란히 서서 설거지를 하는 모습이 묘하게 시선을 끌었기에 신선한 느낌의 뒷모습이 꽤 장시간 화면에 나갔다. 나란히 서서 한 사람은 비누칠하고 한 사람은 헹구면서, 두 사람은 쉬지 않고 주절주절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한 60년 함께 산 부부 같았다. 그 모습을 홀린 듯 보던 패널이 물었다.
“아니 지금 느낌이요, 사고 치는 자식 얘기 주고받는 부부 같은데요? 설거지하면서 대체 무슨 말씀들을 저렇게 하시는 거예요?”
“모르겠어요. 그냥 계속 범수 형 흉본 거 같은데.”
민찬의 대답에 빵 터진 준희가 제 허벅지를 치면서 고음의 상쾌한 소리로 웃었고, 팔짱을 낀 배재민은 낮고 호탕한 소리로 웃었다. 장범수는 여민찬을 삐죽 노려보았다. 민찬♡범수를 밀고 있는 팬들이 또다시 실시간 게시판에 등장했다.
뒷정리를 마치고 집들이 왔던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후, 저 큰 집에 단둘이 남았으니 이제는 좀 적막하겠구나, 싶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내내 말이 많은 여민찬은 머리띠를 했고, 저녁이 되니 텐션이 절정으로 올라간 제준희는 똑딱핀 두 개를 꽂았다. 각자 다른 방식으로 앞머리를 훌렁 깐 두 사람은 잘 준비를 한답시고 나란히 서서 양치질을 했다.
-깐민찬 깐준희는 사랑입니다♡
-둘 다 이마선 진짜 예쁘다ㅠ-ㅠ
시청자들과 마찬가지로 패널들 또한 진짜 잘생겼다느니, 이마선이 예쁘다느니 하며 한마디씩 했다. 그러던 중 메인 진행자가 한 소리를 덧붙였다.
“두 분은 탈모 안 오실 것 같네요.”
“아. 그래요?”
반갑게 되묻는 민찬에게 고개까지 끄덕하며 확답을 해 주었다.
“네. 제가 그쪽으로 좀 알아본 게 있어서 이마선 보면 대강 미래가 보이거든요. 두 분은 탈모 안 오겠어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여민찬과 제준희가 미리 코드라도 맞춘 듯한 화음으로 동시에 감사 인사를 해서 또 웃음이 지나갔다.
그리고 화면 속에서는 양치질하는 중에 누군가가 먼저 시작한 흥얼거림이 어느새 듀엣이 되어있었다.
-잠시도 조용히 있지를 않는구나^^
-그 와중에 노래가 좋고 난리야ㅋㅋㅋㅋ
양치하며 대충 불렀는데도 좋고 난리인 노래를 칭찬하는 글들이 쏟아져 올라오고 있는 가운데, 아무래도 촬영 중이다 보니 간단히 씻고 침실로 들어온 두 사람은 침대 위에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여민찬은 침대 옆 협탁 아래에 꽂혀있는 책들 중 한 권을 꺼내 들었다. ‘거울 속의 거울’이라는 제목의 심리학 관련 책이었다.
-잠깐, 책꽂이에 미친 사랑 있지 않았어?
└나도 본 거 같은데? 미친 사랑?
└미친 사랑이 뭐예요?
└아크로바틱 **로 유명한 팬픽이에요.
-나중에 방송 돌려봐야겠다. 진짜로 미친 사랑 있었던 거 같아ㅋㅋㅋㅋㅋ
스쳐 지나간 책 한 권 때문에 실시간 게시판이 난리가 날 것이라는 것을 당연히 알지 못하고 있는 여민찬은 한껏 뻐기는 얼굴로 코멘트를 했다.
“준희 책 읽어 주려고요.”
“하하하하하.”
배재민이 난데없이 커다랗게 웃었고, 픽 따라 웃은 여민찬이 “왜 웃냐?” 하며 웃음기 어린 소리로 따졌다.
배재민이 웃은 이유가 궁금해진 가운데 화면 속에서는 여민찬이 책을 펼쳤다. 제준희가 물었다.
[뭐야?]
[거울 속의 거울]
[아.]
그리고 두 사람은 하하하하하, 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마주 보고 꽤 오래 웃었다. 한동안 배재민처럼 웃다가 겨우 멈추었고, 얼굴에서 웃음이 채 가시지 않은 여민찬은 책 겉장을 열었다. 제일 첫 장을 펴더니 소개 글을 읽어 내려갔다.
[어디 보자… 인간이 겪는 불안과 우울에는 늘 기질적인 요인이 작용을 하게 되는데- 크흥,]
읽다가 말고 또 웃음을 터트려버린 여민찬과 따라 웃어버린 제준희가 또 하하하하하, 하면서 동시에 배재민처럼 웃기 시작했다.
일없이 웃는 게 웃겨서 덩달아 따라 웃던 메인 진행자가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었다.
“아니 대체 왜들 저러시는 거죠?”
“예? 아뇨. 책이 웃겨서.”
“예에? 어디가 웃기죠?”
“아뇨. 그. 모르겠는데. 그냥 웃겼어요.”
여민찬이 얼버무리는 동안 픽, 하고 비웃음을 장전한 장범수가 사실을 말해주었다.
“저 자식들 지금, 카메라 있다고, 평소에 읽지 않는 책 들고 쇼하는 거예요.”
“아하하하! 그렇구나. 어쩐지! 그럼 평소에는 무슨 책을 읽으시는데요?”
-미친사랑
-미친사랑
-미친사랑
-미친사랑
-미친사랑
비공개 팬 사이트 게시판에 모인 팬들이 정답을 말하고 있는 동안 준희가 똘똘하게 대답했다.
“판타지 무협 소설도 읽어주고 가끔은 로맨스 소설도 읽어줘요.”
-미친 사랑이 로맨스였던가?
-미친 사랑은 판타지 무협에 가깝지.
여전히 팬들은 미친 사랑을 외치고 있는 가운데, 화면 속의 여민찬과 제준희는 ‘읽는 척’하던 책을 던져버리고는 “자자?” 하더니 나란히 누웠다. 불이 꺼진 어둠 속에서 여민찬이 말했다.
[범수 형은 무슨 저런 책을 읽으라고 줬대?]
[흐흥. 대중음악 오래 하려면 대중의 심리를 잘 파악하는 게 중요하대.]
[참 나.]
검은 화면 속에서 이쪽저쪽 오가는 대화 위로 자막이 입혀져 있었다. 풍기는 이미지와 안 어울리게 참 말이 많은 남자들은 잠들기 직전까지도 수다가 끊이질 않았다.
[근데 형, 아까 먹었던 요리 이름 기억나?]
[그럴 리가 있냐.]
[킥.]
[하여간 변태라니까 범수 형은.]
[하하하!]
커다란 웃음을 터트리는 것으로 어느 정도 동감을 표한 준희가 얼른 덧붙였다.
[그래도 범수 형 좋아.]
[참 나. 누가 안 좋대냐.]
[흐흐.]
이후로도 한동안 오디오는 꺼지지 않았다. 두 번에 한 번꼴로 실소와 웃음이 터지는 대화가 꽤 오래 계속되었다. 매일 보는 사이에 뭐가 저렇게 할 말이 많은지. 우정을 넘어 가족애가 느껴지는 남자들에게서 편안함을 느낀 패널들과 또 시청자들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절로 지어지고 있었다.
그날은 준희의 생일이었다. 누군가의 생일 때면 늘 그랬듯이 모여서 왁자지껄 생일파티를 했는데, 그날따라 다들 좀처럼 돌아갈 생각을 하질 않았다. 그런 멤버들과 블루오션의 동료들을 등 떠밀어 보내버린 민찬은 준희를 데리고 스튜디오로 내려갔다.
이 공간을 무척 좋아하는 준희는 이곳에 내려온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은지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런 녀석을 소파 위에 앉혀두고, 민찬은 무대 중앙 키보드 앞에 앉았다. 반짝 눈을 키운 준희가 늘어졌던 몸을 바로 하고 물었다.
“건반 치게?”
“어. 잘 못 친다고 놀리지 마.”
“와. 씨 나 가까이에서 볼래.”
준희는 ‘피아노 치는 교회 오빠’ 좋아하는 바로 그 느낌으로 설렜다. 실상은 자신이 바로 그 ‘피아노 치는 교회 오빠’면서 말이다.
“안 돼, 인마- 그냥 거기 앉아서 들어.”
가까이에서 보겠다며 코를 들이밀고 다가오는 녀석을 어르고 달랜 민찬은 준희를 도로 소파 위에 앉혀 두었다.
기대감에 초록색 눈동자를 반짝반짝반짝 빛내고 있는 녀석을 보고 웃음을 한번 툭, 터트린 후에, 민찬은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준희야. 생일 축하해- 그리고, 음…, 사랑해?]
준희는 으으으! 하며 제 몸을 끌어안고 몸부림을 치면서 웃었다. 낯간지러운데 좋아죽겠다는 표현을 온몸으로 하는 녀석 덕분에 또 웃어버린 민찬이 입가에 미소를 건 채로 건반 연주를 시작했다. 준희처럼 건반 위에서 화려하게 날아다니지는 못하지만 담백한 느낌으로 기교 없이 치는 정도는 가능했다.
그리고 전주만 듣고도 무슨 노래인지 바로 알아챈 준희의 머릿속으로 노래의 가사가 빠르게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이어서 심장이 말도 못 하게 뛰기 시작했다.
이 노래9)는 좀 위험한데…,
그런 생각이 든 준희의 얼굴 위에 내내 서려있었던 장난기가 걷혔다. 사뭇 진지해진 얼굴을 하고서 곧 나올 첫 소절에 귀를 기울였다.
[If I had to live my life-]
네가 없는 인생은 모든 날들이 공허하고 매일 밤이 너무나 외로울 것 같다고, 가사를 통해 담담히 심정을 고백하는 남자의 노래는 무척 듣기 좋았다. 준희와는 결이 다른 느낌으로 허스키한 음색이었는데, 무게감이 있는 목소리가 담백하면서도 따뜻했다. 보컬 자리가 비었을 때에는 메인으로 노래도 했었고, 지금은 서브 보컬로서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는 남자이다 보니 별다른 기교를 부리지 않는 가창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준희는, 과거에 많은 여자들을 홀렸던 멋진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건반 앞에 앉은 인영을 바라보았다. 흐릿한 인영만으로도 설레게 하는 남자를 바라보면서, 길고 커다란 손이 건반 위에서 어떻게 움직이고 있을지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높은 음으로 올라갈 때 미간을 살짝 좁혔을 남자의 표정을 상상해 보았다. 그러면서, 따뜻한 울림으로 가슴을 떨리게 하는 목소리의 주인이 노래를 통해 전하고 싶은 말을 오롯이 가슴에 담았다.
너 이전에는 사랑을 몰랐다고, 너와의 사랑은 이전에 경험해 본 적 없는 강렬한 느낌이라고, 야무지게 개사까지 했다. 첫사랑에 집착하는 남자가 가사를 천연덕스럽게 바꿔 부르면서 나 지금 진지하다고 어필하고 있을 얼굴을 상상해 보았다. 상상 속의 그 얼굴이 웃겨서, 준희는 빙긋 웃었다.
우리의 꿈이 아직 어리다는 걸 알아. 하지만 우리가 꾸는 꿈들이 우리를 그곳으로 데려가 줄 거야.
함께 꿈을 꾸고 함께 꿈을 이루길 바라는 가사처럼, 자신의 꿈을 함께 이뤄 주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는 준희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게 빛나고 있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진지하게 꿈을 노래하고 있을 남자의 얼굴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이제 노래는 절정 바로 직전 감정의 빌드업이 필요한 구간으로 들어섰다.
내 손을 잡아 줘. 나를 안아 줘. 나는 너 없이는 단 하루도 살고 싶지 않아.
음절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불렀기 때문만은 아닌 이유로, 가사의 의미가 준희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와 닿았다. 바로 준희가 하고 싶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늘 손을 잡아 주었고, 늘 자신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준 남자가 없는 세상에서는 단 하루도 살고 싶지 않았다.
드디어 노래는 클라이맥스로 올라섰다. 널 향한 나의 사랑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고, 절대로 변치 않을 사랑을 맹세하는 가사의 한 음절도 가벼이 흘리지 않고 힘주어 부르고 있는 남자가 전하는 노래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즈음 준희는, 건반 앞에 앉아 열창을 하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 음 한 음 정성껏 건반을 누르고 있는 커다란 손이 보였고, 걷어 올린 소매 아래로 보이는 믿음직한 팔뚝이 보였다. 따뜻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넓은 가슴과, 반듯하게 각이 져서 설레게 하는 어깨가 보였다. 진심을 노래하는 사랑스러운 입술이 보였고, 고음에 올라섰을 때 눈썹 사이의 한 줄 주름과, 그리고 건반을 내려다보고 있는 긴 눈이 보였다. 그 모습이 지금, 너무 또렷하게 보여서, 준희는 급격히 숨이 차올랐다.
너는 그저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만 알면 돼. 나는 너의 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너무나 보고 싶었던 남자가, 조건 없는 사랑을 고백하는 모습을 또렷하게 그려보게 된 것이 너무 감격스러워서, 준희는 코끝이 아렸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세상이 우리의 삶을 바꿔 놓았지만, 널 향한 나의 사랑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거야.
지나간 소절에서 했던 것보다 한층 극진해진 사랑의 맹세에 결국, 준희의 눈에서 툭 터져 나온 눈물이 흰 뺨을 타고 주르륵 흘렀다.
우리가 가는 길에 어려움이 있다 해도, 우리의 사랑이 밤하늘의 별처럼 길을 알려 줄 거야.
준희는 걷잡을 수 없이 흐르기 시작한 눈물을 닦아 내고 또 닦아 냈다. 우는 것이 창피해서가 아니었다. 지금 또렷이 보이기 시작한 남자의 모습이 다시 흐려질까 봐, 눈물에 가려서 사라질까 봐, 그래서 계속해서 눈물을 닦아 냈다.
내 손을 잡아. 나와 함께 미래를 보자. 영원한 사랑을 볼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줄게.
닦아도 소용없이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열심히 닦아 내고 또 닦아 내면서, 준희는 지금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또다시 흐려질 남자의 모습을 마음 깊이 새겼다.
네가 나를 필요로 할 때면, 언제나 그랬듯이 나는 너의 곁에 있을 거야. 다시 말하지만, 나는 너를 사랑하니까.
남자가 아름다운 노래에 실어 전하고 있는 뜨거운 사랑과, 그가 말하는 미래를 가슴에 담았다. 벌써부터 아쉬워지는 마음을 애써 물리고, 지금 눈앞에 또렷이 보이는 남자의 모습을 머릿속에, 또 마음속에 단단히 새기고 또 아로새겼다.
[Nothing’s gonna change my love for you-]
기교 없이 불러 가사에 담은 진심이 더 크게 와닿았던 노래가 끝났고, 정직하게 연주해서 순수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던 멜로디도 끝이 났다. 마지막 건반의 울림까지 모두 사그라졌을 즈음, 남자의 모습도 점차 흐려졌다. 아쉬움에 꾹, 눈을 감은 준희는, 오늘 선물로 보게 된 남자의 모습을 절대 잊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주, 준희야!”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자신을 보고 당황하여 소리쳐 부른 남자가 곧장 제게로 달려오는 소리를 듣고, 준희는 양팔을 활짝 벌리며 환하게 웃었다. 이제 곧 품에 안게 될 남자를 그 짧은 순간에도 그리워하면서 기다렸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온 가슴을 열어 사랑하겠노라고 다짐하면서, 온몸을 부딪쳐 오며 빈틈이 없도록 단단히 안아 주는 남자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눈먼 고래의 노래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