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13/27)

공연 후 이어진 깜짝 팬미팅까지 모두 끝난 후, 청소를 자청한 팬들은 광장 바닥이 호텔 로비처럼 깔끔해진 이후로도 돌아가지 않고 서성거렸다. 그런 팬들을 달래고 달래서 돌려보내고 뒷정리까지 모두 마친 후에 미리 부킹해 둔 호텔로 들어왔을 때에는 자정을 훌쩍 넘어 있었다.

호텔 로비에는 공연 둘째 날이 생일인 준희에게 보내는 팬들의 선물이 산더미같이 쌓여있었기 때문에, 이제 좀 쉬는가 싶었던 멤버들과 블루오션의 식구들은 선물을 밴에 싣는 일도 해야 했다. 호텔 직원들도 팔을 걷어붙이고 도왔다.

룸은 4개를 잡았다. 여민찬과 제준희가 한 방을 쓰고, 재민과 범수, 그리고 동수와 우영이 한 방을 쓰고 나머지 한 방은 여진이 쓰기로 했다.

독방의 키를 챙기면서 송여진은, 다시 느끼지만 블루오션은 진짜로 최고의 직장이라고, 그런 말을 남겼다. 트럭 뒤편에서 멤버들의 의상과 헤어 스타일을 챙기느라 공연 내내 동동거리며 뛰어다녔고 그러느라 다크서클이 턱 아래까지 내려왔으면서 말이다. 장범수는 즐겁게 일해 주는 여진에게 진심으로 고맙다고 했다. 그러자 여진은,

“고마우면, 여기서 정년까지 일할 수 있게 해 줘.”

…라고 했다. 의미심장한 발언이었고, 그 자리의 모두가 부디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취향과 성향은 영 다른 듯 보이지만 블랙웨일즈의 팬이라는 공통점이 있어 죽이 잘 맞는 우영과 동수도 재잘거리며 자신들의 방으로 올라갔다. 특히 강동수는 핑크 고래 계정에 올려야 할 영상을 잔뜩 찍어 놓은지라 슬쩍 흥분 상태였다. 범수는 영상은 나중에 올리고 오늘은 일단 쉬라고 타일렀으나, 아마도 그러지 않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스탭들을 먼저 올려 보내고 난 후 여민찬에게 카드를 주면서 장범수가 말했다.

“준희 생일 선물이야.”

“이게?”

“어.”

“참 나.”

어이가 없다는 투로 카드를 챙긴 민찬이 준희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자. 짠돌이 옮겠다.” 하면서.

그 뒤에서 생일 선물의 의미를 이미 알고 있는 재민과 또 범수는 흥, 하고 많이 닮아진 얼굴로 웃었다.

*

카드에 쓰인 룸 넘버를 확인하고 방문을 열었을 때, 여민찬은 적잖이 당황하고 말았다. ‘생일 선물’이라는 말의 의미를 그제야 알 수가 있었다. 일반 디럭스 타입이었던 나머지 룸과는 달리 두 사람의 방은 그랜드 스위트 룸이었다.

“와.”

여민찬은 둘이 쓰기에는 심하게 크고 호화로운 내부를 빙 둘러본 후 준희를 잡아끌었다. 신발을 벗다 말고 휘청하고 끌려간 준희는 깽깽이 발을 하고 소리쳤다.

“자, 잠깐만! 신발 다 못 벗었어!”

“하하. 미안.”

허리를 숙인 민찬은 준희가 덜렁 들고 있는 쪽 발의 신발을 벗겨 휙 던져버리고 다시 준희를 끌었다. 일단 야경이 꽤 근사한 거실에 놓인 테이블 위에는 와인과 과일 바구니가 있었다.

“하여간 와인 되게 좋아해.”

…라고 웃는 투로 투덜거린 민찬은 준희를 끌고 욕실로 가 보았다. 뭐가 되게 시끄럽다 했더니만 따뜻한 물이 가득 채워진 2인용 제트 스파가 부글부글하고 있었다. 귀를 기울여 본 준희가 물었다.

“뭐야? 뭐가 이렇게 부글부글해? 뭐가 끓고 있어?”

“형아의 사랑이 끓고 있지.”

“아 뭐래.”

준희는 초록색 눈동자를 빙글 돌리며 무안해했고, 흥, 하고 웃은 민찬은 그런 녀석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끌어당기면서 하얀 뺨에 쪽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 나서 욕실 안에 끓고 있는 것의 정체를 설명해 주자 준희는 무척 흥미로워했다. 온양 여행 이후로 같이 목욕하는 것을 되게 좋아하는 녀석의 구미를 당기는 물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대망의 침실로 가 보았더니, 라지 킹 사이즈의 커다란 침대 위에, 제발 없었으면, 하고 바랐던 장미꽃잎 하트가 있었다. 전반적으로 흐리게 보이는 가운데 커다란 빨간색 하트가 눈에 들어온 준희가 미간을 찡그렸다.

“저게 대체 뭐야?”

“말하기 싫다.”

그리 말하며 민찬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

안 마시면 안 될 것 같은 와인을 한 잔씩 들고, 안 하면 안 될 것 같은 포스를 풍기는 제트 스파에 나란히 들어앉은 두 사람은 여독인지 공연독인지 모를 피로를 풀었다.

뜨끈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는 물속에 들어앉아 있자니, 민찬은 여태 몰랐던 오른팔의 근육통이 느껴졌다. 메이저 데뷔 이후로는 블루오션 정기 공연을 하지 않았으니 12곡을 쉬지 않고 연주하는 것이 간만이었다. 물론 지난 며칠간 공연 레퍼토리로 연습을 하긴 했지만 연습과 본공연은 텐션의 차이가 확실히 있었다. 게다가 한 달 정도는 제대로 치지 못했으니, 이 정도 공연에도 팔에 부담이 된 모양이었다. 머리를 기대고서 물속에 넣은 오른손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해보았다. 그러면서 오늘 공연을 돌이켜보던 민찬이 말했다.

“은근히 빡세다 이거.”

“어. 근데 난 재밌었어.”

“그래? 어디 아픈 데는 없어?”

“어.”

고민할 것도 없이 나오는 듯한 대답에 “넌 아직 젊구나.” 하고 중얼거리는데, 기대고 있던 상체를 들어 민찬 쪽으로 가까이 다가온 준희가 반짝 뜬 눈으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나 오늘은 넣고 싶어.”

“뭐 인마?”

대화의 흐름을 벗어난 난데없는 소리에 감고 있던 눈을 뜬 민찬이 미간을 찌푸리고 되묻자 준희는 못 들은 척하며 ‘뭐 인마’를 불렀다. 민찬은 능청거리고 있는 녀석의 얼굴에 물을 확 뿌렸고, 노래 부르다 말고 휙 끼얹어진 물 덕분에 콜록콜록 기침을 한 준희가 얼굴을 훔치고는 씩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졸랐다.

“자정 지났으니까 이제부터 내 생일이잖아.”

“그래서 기타 사 줬잖아.”

“범수 형한테 짠돌이가 옮았네.”

“자식이 진짜.”

…하며 민찬은 결국 너털웃음을 터트려버렸다.

이후에 함께 몸을 씻고 또 서로 씻겨 주었다. 씻겨준다는 명목으로 상대의 몸을 슬슬 만지다 결국은 꼴렸고, 바짝 달아오른 알몸 위에 샤워 가운만 대강 걸친 두 사람은 서둘러 침실로 돌아왔다.

생일이니까 자신이 왕이라는 녀석의 고집에 따라, 오늘은 오랜만에 삽입 섹스를 하기로 했다. 사실 민찬은 매일이 아니라 하루에 열두 번을 하라고 해도 할 수 있었지만 참고 참았다. 준희도 그걸 알기 때문에 민찬이 정한 주기에 따라 주고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꼭 하고 싶었다.

“내일도 공연해야 하는데, 컨디션 안 좋다고 나 원망하지 마라.”

“내일이 아니고 오늘이지. 그리고 노래는 거기로 하는 게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십쇼.”

근본을 알 수 없는 능청맞은 존댓말에 흥, 하고 웃음을 터트린 민찬이 중얼거렸다.

“이 자식 이거 왜 이렇게 능청맞아졌지?”

“같이 사는 사람이 능청맞아서 그렇지. 능청이 옮았네.”

“입만 살아가지고.”

“눈이 안 보이니까 입이라도 살아야지.”

말로는 도저히 상대가 안 된다고 생각하며 허탈하게 웃은 민찬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입씨름을 하는 와중에도 바삐 손가락을 움직이며 충분히 준비를 끝낸 아래에 녀석이 원하는 것을 넣어 주었다.

꾸욱 밀고 들어오는 순간에 손끝 발끝까지 성감이 번진 준희는 제 사이를 벌린 남자의 몸을 양다리로 꽉 옥죄었고, 그래도 진정이 되지 않는 몸을 부르르, 떨며 신음했다.

“하아아, 좋하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제준희답다, 생각한 민찬은 픽 웃었지만 그 웃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이내 여유가 없어진 얼굴을 굳히고, 비좁은 곳을 벌리고 밀어 넣었던 성기를 다시 뒤로 물렸다.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의 어마어마한 성감에, 민찬 또한 “하윽 씨….” 하고 신음을 흘리며 미간을 구깃, 구겨야 했다.

*

막 섹스를 끝낸 후, 기진맥진하여 늘어진 준희는 눈꺼풀 들어 올릴 힘도 없는지, 눈을 감고서 헐떡였다.

“화아, 진짜- 하아, 너무 좋아-”

준희와 마찬가지로 기진맥진이었지만, 너무 좋았다는 소리에 기분이 좋아진 민찬은 억지로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배앓이가 걱정되어 착용했던 콘돔을 빼내 정리하고 티슈를 뽑아 큰 대자로 널브러진 녀석의 몸에 묻은 정액을 닦아 주었다. 준희는 섹스 중에 두 번 갔기 때문에 양이 많았다.

“다시 씻을래?”

민찬은 콘돔과 휴지를 뭉쳐 쥐고 침대에서 내려서며 물었고, 준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눈꺼풀 들어 올리기도 귀찮은 판에 샤워라니, 불가능했다.

“좀 자고 일어나서 씻을래….”

어린애 같은 소리에 흥, 하고 웃은 민찬은 욕실로 향했다.

*

잠시 후. 거의 잠들기 직전이던 준희는 생소한 느낌에 가늘게 눈을 떴다. 실루엣만 봐도 설레는 남자가 허연 뭉치로 제 배를 닦고 있었다. 졸려서 안 씻겠다고 하긴 했지만 사실은 좀 찝찝했는데, 따뜻한 수건이 배와 허벅지와 성기를 닦아 주는 느낌이 꽤 좋았다. 기분 좋은 감각 덕분에 자꾸만 멀어져 가는 정신머리를 잡으려 노력하고 있는 준희는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소리 없이 웃은 민찬은 그런 녀석의 미간을 검지로 꾹 눌렀다. 왜 인상 쓰고 있냐고. 졸리면 그냥 자라고.

준희는 시키는 대로 미간에 힘을 뺐다. 그러자 한층 더 빠른 속도로 머릿속이 아득해지고 있었다. 정신은 가라앉는데 몸은 오히려 붕 뜨는 느낌이었다. 범수 형도 아니고, 와인 한 잔에 취기를 느낄 리도 없는데 취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그런 정신 상태로 따뜻한 반면 시원하기도 한 기분 좋은 감각을 즐기고 있는데, 어느 정도 닦아졌는지 몸 위를 오가던 수건이 떨어졌다.

따뜻했는데.

몽롱한 와중에도 아쉬움이 몰려왔다. 따뜻한 것이 떨어지니 상대적으로 한기가 든다 싶었는데 마침 이불을 스륵 덮어 주는 통에 만족한 준희는 입가를 씩 끌어 올리고 잠을 청했다. 그러고 있는데, 이불 속으로 들어온 손이 준희의 팔목을 잡아 꺼내고 있었다.

뭐 하려고 그러지?

준희는 눈도 뜨지 않은 채로 생각했다. 이불 밖으로 끌려 나간 손목 위에 뭔가 둘리는 느낌이 들었다.

뭐지?

궁금했던 준희는 결국 눈을 떴다.

“뭐야?”

준희는 손목 위에 둘린 검은 줄을 보며 물었고 민찬은 멋쩍은 느낌으로 웃더니 대답했다.

“선물.”

선물?

준희는 무슨 선물을 또 주나 싶었고, 아무래도 팔찌인가 보다 싶은 것이 둘린 팔목을 들어 눈앞으로 바짝 가져와 구경했다. 은색의 길쭉한 펜던트가 검은색 가죽 스트랩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일단 모양은 예쁜데,

“여기 뭐라고 쓰여있는 거야?”

“어? 음…, 제준희 바보.”

“아?”

“어.”

그렇다고 하며 여민찬은 웃었다.

웃는 것도 그렇고, 멋져 보이라고 차는 팔찌에 그렇게 쓰여 있을 리가 없기 때문에 준희는 미간에 힘을 빡 주고 은색 펜던트에 쓰인 글씨를 읽어보려 했다. 하지만 역시나 가물가물했다. 다시 물었다.

“뭐라고 쓰여 있는데?”

“제준희 똥개.”

“아 씨.”

민찬의 장난에 궁금증이 폭발한 준희가 짜증을 부렸다. 그러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밑으로 내려섰다. 알몸으로 척척 걸어가는 녀석의 팔뚝을 잡은 민찬이 물었다.

“어디 가?”

“돋보기 사러.”

“뭐? 하하, 얌마. 씨, 알았어. 알려 줄게.”

민찬은 놔두면 진짜로 돋보기를 사러 갈 태세인 녀석을 잡아끌었고 준희는 못 이기는 척하며 민찬의 옆에 앉았다. 흠, 하고 헛기침을 한 민찬이 팔찌를 채워 준 손을 잡고 어째 잘 안 떨어지는 입을 열었다.

“뭐라고 쓰여있냐면….”

“…?”

“음…….”

“……?”

“그러니까….”

“아 씨. 돋보기 사러 갈래.”

조급증이 났던 준희가 다시 벌떡 일어섰고 민찬은 그런 녀석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미안, 미안, 사과하며 킬킬 웃었다. 다시 자리에 앉은 준희는 한 번만 더 뜸 들이면 안 봐주겠다는 전투적인 얼굴로 민찬을 쏘아보았다.

준희가 노려볼 때 얼굴이 특히 더 예뻐 보이는 민찬은 입술을 물고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영원히 사랑해.”

I love you forever

펜던트에 영어로 쓰인 글을 해석해 말한 민찬은 멋쩍은 기분에 흐흥, 하고 웃었다.

그리고 준희는, 잘 안 보이는 팔찌의 글귀를 내려다보며 눈을 깜박, 깜박, 하고 있었다. 그러고 앉아서 꽤 한참 말이 없어서, 민찬의 얼굴에 서렸던 웃음이 희미해졌다. 조용해진 녀석과 녀석이 보고 있는 팔찌를 번갈아 보고 있는데,

툭,

팔찌 바로 옆, 팔목 위로 떨어져 내린 것을 본 민찬이 눈을 크게 떴다.

당황한 준희는 “아 씨.” 하며, 얼른 손을 들어 제 눈을 가렸다. 사랑한다는 말 처음 듣는 것도 아닌데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당황을 넘어서 몹시 놀란 민찬은 눈물을 보인 녀석의 어깨를 잡아 서둘러 끌어안았다. 눈물의 의미가 뭔지는 알 것 같았지만, 어쨌든 녀석을 울렸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가슴이 아팠다. 너무 아팠다. 그리고 민찬은, 제 어깨에 얼굴을 묻은 녀석의 등을 소중하게 쓸면서 굳게 다짐했다. 앞으로, 이 녀석이 우는 일 만큼은 절대로 없게끔 하겠다고. 슬프고 속상해서 우는 일은 당연히 없게 할 것이고, 기쁘고 행복해서 우는 일도 없게 하겠다고 말이다. 기뻐할 만한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계속 기쁘게 해 줘서 행복에 무뎌진 녀석이 이런 하찮은 선물 따위에 우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고, 그런 다짐을 했다.

동경하는 마음이 애정이 되고 그것이 결국 사랑이 되어버린 이후로, 그 색채가 한결 짙어지고 또 깊어진 날이었다. 제준희에게는 생일다운 날이었고, 여민찬에게는 생일과도 같은, 그런 날이었다.

16783868233414.jpg Black Whales’ TMI

제준희가 무대에 오를 때마다 항상 차고 나와서 ‘애착 팔찌’라고 불리는 검은색 가죽 스트랩 팔찌가 팬들 사이에서 대유행을 했습니다. 그러다 펜던트에 쓰여있는 글씨를 확대해서 결국 알아내고야 만 CSI 성향의 팬들은 일단 짜릿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애정이 뚝뚝 떨어지다 못해 철철 넘치고 있는 글귀가 새겨진 애착 팔찌를 여민찬이 주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의심할 수 있어도, 제준희에게 팔찌를 준 사람이 여민찬이라는 사실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들 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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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둘째 날.

호텔 체크아웃 후에 미리 점 찍어 두었던 대게 코스 요리 전문점을 찾은 블루오션의 식구들은 점심을 먹기 전에 케이크에 불을 켜 놓고 준희의 생일을 축하했다.

준희의 얼굴에 생크림으로 연지곤지를 찍어 놓고 킬킬대는 여민찬과, 짓궂은 형이 장난을 치거나 말거나 그저 말갛게 웃으며 무척 행복해하고 있는 준희의 영상이 실시간으로 핑크 고래 계정에 올라갔다.

‘준희의 생일을 축하합니다’라는 제목의 영상 밑으로 생일을 축하하는 팬들의 댓글 또한 실시간으로 올라갔는데 그 속도와 개수 면에서 역대급의 화력을 뽐냈다.

점심을 먹고 난 후, 차로 1시간이 소요되는 다음 도시로 이동을 했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팬들에게 보답을 하고 싶었던 준희는 민찬의 핸드폰으로 직접 영상을 찍었다.

“생일을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아- 보답으로 여민찬 씨가 운전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아-”

셀카로 찍던 화면을 돌린 준희는 렌즈를 민찬 쪽으로 향하게 했다.

“제대로 찍히고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25톤 트럭을 운전하는 민찬 형의 모습입니다. 섹시한가요?”

제준희와 마찬가지로 선글라스를 낀 여민찬은 핸들을 쥐지 않은 손으로 브이를 하며 씩 웃어 보였다. 그러고 있는 중에 틀어 놓은 노래가 Nirvana의 ‘Smells Like Teen Spirit’로 바뀌었고, 그러자 두 사람은 동시에 리듬을 타며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흥얼흥얼이 아니라 본격적인 모창이었다.

제준희가 직접 찍었다는 것만으로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 영상 밑으로 딱따구리 나무 찧는 속도로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섹시한가요?! 섹시한가요??!! 섹시한가요???!!!

-흥부자들ㅋㅋㅋㅋㅋㅋㅋ 제발같이살게해조라 하루만 지내고 나갈게ㅠ

-출구 어디있는지 아시는 분 지금 18342번째 돌려보고 있는데 못 끊겠어요

-안 그래도 영상 정신 없어서 토할 것 같은데 50번째 돌려보는 중임 198번만 더 봐야지

*

달리는 콘서트의 둘째 날 공연 장소는 시청 앞 광장이었다. 평소 지역 주민들을 위한 벼룩시장이나 박람회가 열리곤 했던 곳이 오늘은 곧 있을 게릴라 콘서트를 위한 열기로 가득 차있었다. 첫 번째 날과 다름없이 팬들은 일찌감치 객석을 채워 주었다.

공연 시작 시각이 임박하였다. 준희가 밴에서 단장을 하고 있고 나머지 멤버들이 공연 무대 세팅을 마무리하는 동안, 팬들은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배짱 있고 목청 큰 누군가가 처음 시작한 노래는 세 번 정도 도는 사이에 떼창으로 번졌고, 이제는 자리에 모인 팬들이 다 함께 입을 모아 합창을 하고 있었다. 튜닝을 하던 여민찬이 팬들이 만든 노래의 음을 정확히 잡아 반주를 시작했고, 그러자 팬들은 감격하여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가 이내 천재 기타리스트가 연주하는 반주에 맞춰 더욱더 소리를 높여 노래를 불렀다. 흥이 난 배재민이 적절하게 비트를 넣으며 따라붙었고, 한 사람이 시작한 노래는 어느새 이천여 명이 함께 부르는 멋진 합주가 되어있었다.

아래에서 시빌런스 체크를 하던 장범수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저. 천재 자식 저거.”

팬들이 부르는 노래에 음정을 맞춰 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냥 대충 치는 것도 아니고 엄청나게 화려한 코드의 하모나이즈드 밴딩으로 연주를 하고 있었다.

절대음감이라고 제준희 칭찬을 입이 닳도록 하고 다니는 여민찬 자식도 절대음감이었다. 천재였다. 천재가 두 명이나 포진된 밴드에서 리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 이제 생각하니 영 어이가 없었던 장범수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자신감이 붙은 팬들은 이제 삼협화음을 넣어서 부르기 시작했다. 천재 기타리스트와 흥신흥왕 드러머의 연주를 반주로 한 ‘생일 축가’는 그 횟수가 올라갈수록 더욱더 완벽해지고 있었다.

생일 축가가 8사이클 정도 반복되었을 즈음, 마음이 급해진 준희가 약속한 시각 전에 문을 열었고 밴에서 튕겨 나오다시피 하다가 그만 유도 블록에 걸려 넘어지는 사고가 있었다.

놀라서 연주를 멈춘 여민찬은 기타를 멘 채로 트럭에서 뛰어내렸다. 마치 날아오르기라도 할 듯한 기세로 뛰어내려 케이블 잭이 뽑히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고 달려간 여민찬은 그사이에 혼자서 씩씩하게 일어선 제준희를 부축했다.

이 장면이 팬들 속에 몰래 포진해 있던 기자들의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고, 이와 관련하여 수많은 기사가 쏟아졌다.

경미한 사고가 있긴 했지만 그로 인해 객석을 가득 메운 팬들의 열기는 더욱더 후끈 달아올랐다. 제준희의 생일 당일인 데다가, ‘민찬×준희 커플’의 특별한 모멘트를 생눈으로 보게 된 팬들은 10개 도시 공연 중 이 도시 공연이 제일 특별할 것이라며 한껏 뿌듯해했다.

*

팬들이 화음을 넣어 부르는 떼창에 반주를 맞추어 가고 결국 훌륭한 합주를 해낸 즉흥 이벤트 영상은 ‘록밴드와 팬들의 남다른 생일 축가’라는 제목으로 동영상 공유 사이트에 올라갔고, 이례적인 조회 수를 기록하면서 일반 대중들로부터 큰 관심을 받았다.

그와 함께, 넘어진 제준희에게 날아가는 여민찬의 영상도 온갖 각도에서 찍힌 채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특히 여민찬이 트럭에서 날아오르는 순간을 캡처한 사진은 육상 멀리뛰기 선수들의 포즈와 흡사하다며 비교가 되기 시작했고 멀리뛰기 선수들 사이에 기타를 멘 남자가 함께 뛰는 합성사진이 돌았다.

그리고 그날이 지나가기 35분 전,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제준희 생일 축하해’가 올라갔다. 이 또한 팬들이 힘을 모아 만들어 낸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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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셋째 날.

‘이벤트성 무료 콘서트’라고 하면 어느 정도 테두리를 정해 놓고 이 정도 선에서 합의를 봤겠지 하는 예측치가 있다.

블랙웨일즈의 열성 팬까지는 아니고 노래가 좋아 찾아 듣고 하는 정도인 사람들은 사실, 블랙웨일즈가 지방 공연을 온다는 지역 뉴스나 시청발 홍보성 게시글을 보고도 반신반의했었다. 노래는 좋지만 굳이 찾아가서 볼 필요까지 있을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앞선 두 개 지역의 공연에 대한 후기와 기사를 접하고는 흥미가 일었다. 한 시간 반을 훌쩍 넘는 러닝타임에 공연의 질 또한 훌륭하다는데, 게다가 무료라 하니, 저녁 먹고 남는 시간에 산책 삼아 구경 가 보자 하는 마음이 든 것이다. 특히 ‘생일 축가 즉흥 연주와 팬들의 떼창’ 영상이 공연 홍보에 크게 한몫을 했다.

그런 연유로, 셋째 날 공연부터는 해당 시 시청 관계자들조차 예상하지 못한 인파가 몰리기 시작했다. 넓기로 소문난 공립고등학교 운동장에 깔아 놓은 플라스틱 의자는 다섯 시간 전부터 대기했던 열성 팬들이 선점했고, 주변이나 뒤쪽으로는 노래가 좋아 찾아온 사람들이 돗자리를 깔고 앉거나 아니면 맨바닥에 앉은 채로 혹은 그냥 선 채로 공연을 구경하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인파가 몰리면 늘 안전 사고의 위험이 뒤따르기 때문에 시청 관계자들은 공무원이 갖추어야 할 덕목에 해당하지 않는 ‘시간 외 근무’를 자청하였다. 안전요원 및 안내요원 역할을 하며 어수선한 객석을 정리했다.

그러면서, 관계자석 정도 될 것인 맨 앞줄 바닥에 앉아 블랙웨일즈의 공연도 관람했기 때문에 초과 근무에 대한 큰 불만은 없었다.

1열에서 공연을 본 시청 관계자들은 블랙웨일즈의 팬이 되었고, 공연 후 팬미팅에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모바일 이벤트를 할 때에도 골수팬들 못지않게 열심히 참여했는데, 결국 시청 직원 중 한 사람은 블랙웨일즈 굿즈 세트를 타 내고는 펄쩍펄쩍 뛰면서 날아갈 듯이 기뻐했다. 굿즈는 범고래 펜던트가 달린 초크 목걸이와 수건과 맥주 전용 스텐 텀블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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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넷째 날에는 사회면이 들썩일 정도의 큰 사건이 터졌다.

유명한 아이돌 그룹의 데뷔 조였다는 남자가 일간지를 상대로 충격적인 고백을 해서 온라인과 오프라인 할 것 없이 난리가 난 것이다.

한때 몸담았던 대형 기획사에서,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그룹 계열사 엔터테인먼트 회사 대표를 상대로 몸 접대를 강요했다는 내용이었다. 거절하자 자신은 팀의 센터에서 밀려났고 결국은 데뷔하지 못하고 하차하게 된 것이라는, 그런 고백이었다.

「단독 입수! 아이돌 센터였던 남자의 충격 고백!」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채 인터뷰 기사가 공개된 이후로, 기사에서 언급한 ‘유명 아이돌’이 어떤 팀인지에 대한 추측성 댓글이 그야말로 장마 둘째 날 내리는 비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이 기사로 인해 포털 사이트의 서버가 잠시 먹통이 되었을 정도였다.

만약 이 인터뷰의 내용이 진실이라면, 현재 유명하다는 아이돌 그룹의 센터 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기획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뜻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더 난리인 모양이었다.

다음 도시로 이동하는 도중에 이 기사를 접한 블랙웨일즈는 일단 무척 놀랐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쉽지 않은 고백을 한 남자를 응원했다. 응원하는 한편으로는 예상치 못한 사건이 터져 당황스럽기도 했다. 달리는 콘서트에 시민들이 몰리기 시작하면서 관련 기사가 점차 늘고 있었는데, 이렇게 사상 초유의 큰 사건이 터져버리면 아무래도 흐름이 꺾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나, 자신들의 기사가 묻히는 한이 있더라도 이번 일이 제대로 화제가 되어서 잘못된 일이 바로잡아지길 바랐다. 록밴드가 트럭 몰고 콘서트 하는 것보다는 성상납 문제가 우선시 되는 것이 맞았다.

트럭 팀과 밴 팀은 스피커 모드로 통화를 하면서 이런저런 심경을 나누었다. 그러다, 주고받는 통화의 말미에 ‘어쩔 수 없지 뭐.’로 결론을 낸 블랙웨일즈는 우리는 공연이나 열심히 하자면서 다음 도시로 이동을 했다.

*

그러나, 기사를 접하고 난 후 달리는 중에 통화까지 해 가며 이러쿵저러쿵했던 일곱 명 중 그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넷째 날 공연 장소는 지난해 군부대가 이전한 후 비어있는 공유지였다. 아파트 시공권을 따내기 위한 건설사들의 경쟁이 치열한 황금터이고, 무엇보다 군홧발에 잘 다져진 부지가 넓고 또 매끄럽다는 시청 직원의 자랑을 들었던 곳이다. 그런가 보다 했던 공연 장소 근처에 도착했을 때,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여민찬이 브레이크를 밟으며 속도를 줄였다.

미리부터 찾아온 팬들이야 이제껏 계속 그랬으니 그럴 수 있다고 쳐도, 공유지 입구에 몰려있는 기자들의 수가 심상치 않았다. 아니, 충격 고백을 했다는 ‘전 아이돌’은 서울에 있는데 대체 왜 여기들 몰려와서 저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직 군부대 냄새가 남아있는 입구를 넘어서서 천천히 트럭을 몰자, 트럭 주변을 에워싼 기자들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러다 한 놈 밟겠는데? 싶었던 여민찬은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시청 직원의 안내에 따라 천천히 트럭을 몰았고, 여차여차해서 무사히 정차 위치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주차를 마친 후에, 준희에게 내리지 말라고 당부를 한 여민찬이 먼저 트럭에서 내려섰다. 그러자 스탠바이를 한 채로 기다리고 있었던 기자들은 녹음 버튼을 누른 핸드폰을 일제히 뻗었다. 얼굴을 찌를 법한 기세로 핸드폰을 치켜들고는 동시에 소리쳐 물어 대기 시작했다.

“기타 왜 부순 겁니까!”

“그때 모형준 이사 앞에서 기타를 부순 것이 이번 성상납 의혹 사건과 관련이 있습니까!”

“모형준 이사가 제준희 씨에게도 성상납을 요구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접대를 거절한 것과, 이번에 달리는 콘서트를 하게 된 것이 관련이 있습니까!”

한 명 한 명의 말을 풀어쓰면 그랬다는 거지, 이걸 동시에 외치고들 있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들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 잔뜩 당황한 얼굴을 한 여민찬이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시간을 벌고 있는 동안, 장범수는 밴에서 내리기 전에 일단 상황 파악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내,

“와 씨.”

…하며 하마터면 터질 뻔한 욕설을 입안으로 삼켰다.

‘누구나 아는 그룹 계열사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대표’는 이미 SJ 미디어의 모형준 이사인 것으로 결론이 나 있었다. 그리고 전대미문의 연예계 성상납 스캔들 사건에 촉각을 곤두세운 여론의 레이더는 난데없이 블랙웨일즈에게로 향해있었다. 일전에 여민찬이 집 앞으로 찾아온 모형준 이사의 벤틀리 앞에서 기타를 부쉈던 일이 다시금 회자되면서, 모형준 이사의 성상납 요구를 거부한 블랙웨일즈가 방송은커녕 공연조차 잡지 못하고 전전하다가 결국 트럭을 몰고 지방 공연을 나간 것이 아니겠냐는, 그런 이야기가 만들어져 있었다. 아직 어디라고 밝혀지진 않았지만 소속 가수에게 성상납을 시킨 기획사는 쓰레기만도 못한 포주 취급을 받고 있었고, 공연과 방송을 포기하면서까지 제준희를 지켜 낸 블랙웨일즈는 소신 있는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었다.

아니 뭐, 얼추 흐름은 비슷한데.

생각하며, 장범수는 트럭 앞 상황을 다시 보았다. 잔뜩 몰려든 사람들 정중앙에 키가 머리 하나 큰 녀석이 잔뜩 곤란한 얼굴을 하고서 밴이 있는 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흥, 하고 코웃음을 친 장범수는 오랜만에 당황한 녀석을 더 구경하고 싶었다. 씩 웃으면서,

“도와주기 싫은데?”

…라고 중얼거렸더니, 뒷자리에 송여진과 이우영 그리고 강동수가 난리였다. 빨리 가 보라고! 저러다 민찬 형 가루 되겠다고! 이러다 멘탈 나가서 공연 망치면 책임질 거냐고! 그런 원성을 산 후에야 장범수는 차 문을 열었다.

장범수가 차에서 내리자, 허우대만 대단하고 기타만 끝내주게 잘 치지 이제 보니 영 어리바리하다 싶었던 남자 덕분에 은근히 갑갑했던 기자들이,

“장범수다!”

…라고 소리를 친 후에 일제히 방향을 틀어 몰려갔다. 이리저리 둘러봐도 뜯어먹을 것이 없어 보이는 먹잇감을 아쉬운 마음으로 질근거리던 중에, 살점 두둑이 붙은 싱싱한 먹잇감을 발견한 3세대 좀비 떼들 같았다.

*

장범수는 ‘모형준’이라는 이름을 단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으면서, 그 누구에게도 피해가 가지 아니하되, 오로지 자신들에게만 유리한 방향으로 긴급 기자회견을 했다.

누구나 아는 이름이나 기업명이 철저하게 은닉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 만한 사람은 알겠다 싶은 정도의 명쾌한 답변에 기자들은 속이 다 후련했고, 장범수가 의도한 대로 송출된 기사들이 하나둘 퍼지면서 블랙웨일즈는 권력에 굴하지 않은 소신 있는 뮤지션의 아이콘으로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분명히 얼마 전까지 ‘쓰리 빌런 원 엔젤’이었던 블랙웨일즈는 어느새 ‘쓰리 히어로 원 엔젤’이 되어있었다.

리더의 명쾌한 답변에 속 시원하게 기사 작성을 마친 기자들은 지방까지 내려온 김에 취재를 빌미로 공연을 구경했다. 그렇다 보니 성상납 사건과 관련하여 작성한 기사의 말미에는 권력에 굴하지 않아 거리로 쫓겨난 블랙웨일즈의 공연에 대한 감상평을 쓰고 있었는데, 당연히 호평 일색이었다. 이런 기사들이 사회면 헤드라인에 실리고 있었고, 아무래도 전대미문의 사건인지라 조회 수가 폭발하고 있는 기사들은 블랙웨일즈의 달리는 콘서트에 대한 홍보를 자청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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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다섯째 날.

관객도 늘었고, 기자들의 수도 늘었다. 해당 시청의 관계자들은 자체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라 판단하고 전문 안전 인력을 투입해야 했다.

그리고 이미 첫날 공연부터 최선을 다하고 있었던 블랙웨일즈는 동요하지 않았다. 지금껏 하던 대로 매 공연에 최선을 다했다.

최선을 다하는 건 좋은데, 너무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준희의 컨디션이 괜찮은 건지, 형들은 무척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특히 두 번째 곡인 ‘뭐 인마?’ 클라이맥스 때 목을 너무 긁는 것 아니냐고, 그러다가 공연 초반에 성대 나가면 큰일 나니까 조금만 자제하라는 형들의 당부가 있었지만, 팬들의 함성만 들으면 도무지 자제가 안 되는 준희는 다섯째 날 공연에서 또한 온 힘을 다해 샤우팅을 했다. 개구쟁이같이 웃는 얼굴을 한 보컬이 기타를 향해 서서 샤우팅을 하면 관객들도 덩달아 샤우팅 창법으로 소리를 질렀다. 기타는 한쪽 눈썹을 찌푸리고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면서도 결국에는 웃음을 터트리는 것이 ‘뭐 인마?’ 공연의 묘미였다.

시력을 잃은 대신 강철 성대를 선물 받은 제준희는 초반에 성대를 박박 긁어 놓고도 끄떡없었다. 이후로 모든 곡을 완벽하게 소화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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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여섯째 날.

‘원’ 무대의 브릿지에서 기타 솔로를 하는 중에 여민찬의 기타 줄이 끊어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끊어지면서 튕겨 나간 줄이 뺨을 긁으며 생채기가 났다. 그런데 아무도 줄이 끊어진 것을 몰랐다. 관객들은 물론이고 멤버들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원’ 무대가 끝난 후에 곧바로 다음 곡으로 넘어가려는 준희에게 여민찬은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준희야, 형 기타 좀 바꿀게-]

그제야 멤버들은 기타 줄이 끊어진 것을 알았고, 내심으로 무척 놀랐다. 대체 언제서부터 끊어졌던 건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곡이 끝날 때까지 빈 구석을 전혀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여민찬은 줄이 끊어진 펜더 대신 여분으로 준비했던 깁슨으로 바꿔 들고 간단하게 튜닝을 한 후에 공연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날 공연이 끝난 후, 특히 라인이 화려한 ‘원’의 브릿지 기타 솔로 중간에 줄이 끊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멤버들은 경악을 했다.

“야 이 미친 자식아.”

범수는 너무 놀란 나머지 욕을 했다. 배재민은 “와아….” 하고 감탄하다 말고 어이없는 김에 와하하하, 하고 웃어버렸다. 그리고 그 옆에 준희는 좀 세게 뛰기 시작한 심장을 지그시 눌렀다.

줄이 끊어진 기타로 곡을 완벽하게 연주해 내는 영상이 동영상 공유 사이트에 올라간 후에 팬덤 또한 한바탕 뒤집어졌다. 6현으로 연주할 때와 줄이 끊어진 5현으로 연주할 때의 영상 두 개를 이어 붙여서 지판운지를 비교한 영상이 돌았고, 기타 좀 친다는 사람들의 감탄조의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세 번째 줄이 끊어지면 진짜로 대책 없는데, 대책 없는 상황에서 다른 줄을 짚어 원곡과 비교했을 때 한 음도 빠지는 것이 없도록 쳐 냈다며 놀라워했다.

이번 일로, 외모 때문에 실력이 가려지는 대표적인 케이스인 여민찬은 ‘찐 실력자’가 맞다고 인정을 받았다. 안 그래도 지금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인물인 모형준 앞에서 기타를 부순 사건 때문에 대중의 호감도가 급상승한 상태였다. 여기에 덩달아 실력까지 인정받게 되면서, 천재 기타리스트 여민찬과 그가 속한 밴드인 블랙웨일즈의 주가는 무서울 정도로 치솟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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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일곱째 날.

블랙웨일즈는 모형준 게이트에 엮여 예상치 못했던 관심을 받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매 공연에 관객은 물론이고 취재 나온 기자들이 넘쳐났고 공연 후 쏟아지는 기사가 무서울 정도였다.

결국 7일째 공연은 장소가 바뀌었다. 시청 앞 광장에서, 수용 가능한 인원이 무제한인 모기업의 디스플레이 공장의 야외 주차장 부지로 변경된 것이다. 근처의 회사 기숙사에 기거하던 직원들이 모두 나와 본 통에 7일째 공연에는 특히 관객이 많았다.

사기가 충만한 나머지 공연만 시작했다 하면 날아다니고들 있는 것과는 별개로, 체력적으로는 모두가 슬슬 지쳐 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혹시라도 배추벌레 같은 놈들이 밤에 쓸데없이 힘이라도 뺄까 봐, 그간 장범수는 준희의 생일이었던 첫날을 제외하곤 여민찬과 준희 방의 침대도 트윈 베드로 배정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고리타분하게 굴고 있는 리더 아저씨 흉을 실컷 보면서 욕실에서, 좁은 침대 위에서, 알뜰하게 붙어먹곤 했었고 말이다.

그랬던 배추벌레 커플도 7일째 공연을 성황리에 마친 그날 밤은 달리는 콘서트를 시작한 이후 최초로 씻고 쓰러져 그냥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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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여덟째 날.

호텔 체크아웃 후에 다음 도시로 이동하는 중에는 매번 그 도시의 유명하다는 맛집을 찾아다녔다. 공연 전에 저녁을 도시락으로 간단히 때우는 대신 점심을 훌륭하게 챙겨 먹곤 한 것인데, 이것이 또 쏠쏠한 재미를 주었다. 장범수와 이우영은 파워 블로거의 광고성 후기를 매의 눈으로 걸러 내고 현지인들이 인정한 진짜 맛집을 찾아냈고 지금껏 모두의 호평을 받았다.

오늘 선정된 맛집은 코다리 강정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이 음식점의 삼대째 사장이라는 40대 초중반 남성분이 가게로 들어서는 블랙웨일즈를 한눈에 알아보고는 호들갑을 떨었다. 장사만 아니었으면 공연에 따라갔을 거라면서 ‘눈먼 고래의 노래’를 한 소절 부르기까지 했다. 음치였다.

아무래도 팬심이 들어간 듯 그 양이 너무 많은 감자전부터 도토리묵, 열무김치 등 정갈한 밑반찬도 좋았다. 더불어 살이 큼직하게 붙은 코다리 강정은 달달하고 짭짤한 양념 맛이 일품으로 모두가 맛있다고 극찬을 했다.

여민찬이 준희 앞으로 음식 쌓기 바쁜 와중에 가게 한쪽 벽에 걸린 티브이에서는 뉴스가 한창 방영 중이었고 최근 핫이슈인 ‘모형준 게이트’에 대한 최신 소식을 보도하고 있었다. 모형준 이사 비서진의 통신 기록을 확인하여 그동안 접촉했던 연예인의 리스트가 만들어졌는데, 그것이 기자의 손에 흘러 들어가 문서화된 채로 퍼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리스트에 오른 연예인들의 소속 기획사가 일제히 사실무근이라며 반박에 들어갔다는 뉴스였다. 그러던 중,

[이 리스트에는 현재 지방 순회공연 중인 블랙웨일즈의 보컬 제준희 씨의 이름도 올라있었으나, 블랙웨일즈 측에서는 전날 기자회견을 통해 실제로 몇 차례 식사 자리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이를 토대로, 이 리스트가 신빙성이 있는 자료인 듯하다는 누리꾼들의 추측성 댓글이 줄을 잇고 있는 가운데, 블랙웨일즈의 멤버 여민찬 씨가 집 앞으로 찾아온 모형준 이사의 앞에서 기타를 부쉈던 일이 다시금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윙 기타 풀 스윙’이라는, 라임 죽이는 제목이 붙여진 영상이 ‘또’ 나왔다. 지긋지긋하게 봤던 영상이 또 나오자 여민찬은 어휴, 하면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동영상 속 당사자 외에 가게 사장님을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은 뉴스에 초집중을 했고, 준희 또한 귀를 좀 더 기울였다. 리스트에 올라있는 사람들 중 블랙웨일즈의 제준희만큼은 결백하다는 느낌의 마무리를 짓고 난 후 다른 뉴스로 넘어갔고, 장범수가 소감을 밝혔다.

“여민찬 이 자식은, 가만 보면 은근히 뒷걸음질 치다가 소 잡는 스타일이야.”

그러자 옆 테이블에 앉아 함께 뉴스를 보고 있었던 가게 사장님을 포함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격렬히 수긍했다. 저 포악하고 무식한 반발이 이런 결과를 초래할 줄은 정말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만약 여민찬이 저 때 저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달리는 콘서트고 자시고 간에 모두 접고 서울로 올라가 제준희는 결백하다는 것에 대한 증거 자료를 준비하고 있었어야 할 터였다. 다행이었다.

다들 십 년 감수한 표정들을 하고서 산더미처럼 쌓인 코다리 강정으로 젓가락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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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아홉째 날.

공중파 방송국의 유명한 캐스터가 공연 취재를 나왔다. 황금시간대인 금요일 밤 9시에 한 주간의 연예가 소식을 모아서 보여 주는 티브이 프로그램의 간판 캐스터였다. 그간 스카이미디어 소속 연예인들 관련 소식만 주야장천 내보내더니만 여긴 어쩐 일인가 싶었다.

블랙웨일즈 멤버들은 공연 준비를 마치고 트럭 뒤에 쭈그리고 앉아서 팬들이 보내준 도시락을 먹다가 말고 인터뷰 요청에 응해야 했다.

“저 진! 짜로, 블랙웨일즈 찐찐찐찐팬이에요. 공연 영상이랑 비하인드까지 다 찾아봤잖아요! 노래가 정말 다! 너무 좋아! 노래도 좋지만, 공연할 때 있잖아요, 네 분들 각자가 풍기는 포스가 완전히 다른데, 그게 한데 어우러지면서, 막, 그 아우라가, 아, 뭐라 그래야 되지? 하여간 진짜 너무 근사하고 멋있어요! 그런데 무대 뒤에선 또 완전 개구쟁이잖아요! 넷이 진짜 웃기게 놀잖아! 그게 또 팬 입장에선 너무 재밌거든요. 무대 위에서 풍기는 느낌과 무대 뒤에서 하는 행동의 갭이 이 밴드의 수만 가지 매력 중 하나인 거 같아요!”

호들갑 떠는 것으로 유명한 캐스터는 인터뷰 초장부터 심하게 호들갑을 떨었는데, 나란히 앉은 블랙웨일즈 멤버들이 그런 캐스터를 신기하다는 듯이 웃음기 어린 얼굴로 지그시 바라보았다. 어디 얼마나 호들갑을 떠나 어디 한번 보자?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고들 있자, 캐스터는 카메라맨을 향해 애로사항을 토로했다.

“어머. 왜들 저렇게 쳐다보는 거야? 나 가슴이 너무 뛰는데 어떡하지?”

카메라맨은 계속 진행하라는 의미로 손을 휙휙 저었다.

“자. 이, 블랙웨일즈를 맨날 뉴스에서만 보다 보니까, 팬들 말고 일반 대중들에게는 좀 사고뭉치 그룹으로 인식된 경향이 있거든요? 이번 기회에, 블랙웨일즈를 잘 모르셨거나 잘못 알고 계신 대중분들에게 다시 한번 제대로 인사 부탁드릴게요. 우리, 리더인 장범수 씨부터.”

시키는 대로, 캐스터 가까이 앉은 장범수부터 돌아가면서 자신의 팀 내 포지션과 이름을 말하고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블랙웨일즈에서 베이스와 고령자를 맡고 있는 장범수입니다.”

“저는 팀 내에서 아름다운 한국말과 드럼을 담당하고 있는 배재민입니다. 반갑습니다.”

아 나 이런 개그 진짜 받기 싫은데, 라고 중얼거린 여민찬도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전기 배선 담당 여민찬입니다.”

‘고령자’에서부터 캐스터와 함께 빵 터진 준희는, 영어 못한다는 말을 돌려 말한 배재민 덕분에 크윽! 하며 코 먹는 소리까지 내며 웃었다. 점입가경으로 기타에 대한 언급은 하지도 않고 전기 배선 담당이라는 남자의 자기소개 덕분에 숨이 넘어갈 지경으로 웃어 댔고, 결국 제 차례에서도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배를 쥐고 끅끅거리고 있는 녀석을 씩 웃으며 내려다보던 여민찬이 대신 소개를 했다.

“얘는 제, 준희입니다. 정통 댄스 그룹 블랙웨일즈의 안무 담당이고, 웃다가 숨넘어가는 것이 특기입니다.”

띄어 읽기를 영 이상하게 해서 훗날 팬들로 하여금 ‘여민찬의 찜 멘트’라고 불리며 편집 영상이 생성된 대리 인사말을 끝으로 캐스터의 질문 폭격이 쏟아졌다.

그동안 얼마나 묻고 싶었는지 모른다는 말을 한 세 번인가 하면서, 다 지나간 사건들을 언급했다. 이미 많이 알려진 네 사람의 과거 이력을 ‘또’ 물었고, 예사롭지 못한 데뷔부터, 무역 센터 사고 후의 심경에 대해서도 물었다. 그리고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제준희와 여민찬의 스캔들에 대해서도 물었다.

“같이 살고, 친형제 못지않게 친하다 보니까 자꾸 그런 소문이 나는데, 둘 다 재밌어합니다. 은근히 즐기고들 있는 것 같아요.”

밝히고 싶어서 안달이 난 여민찬 자식이나 거짓말이 서툰 준희에게 대답을 맡기기 영 불안했던 장범수가 대신 대답을 했다.

인터뷰는 공연 시간이 임박해서야 끝이 났고 결국 블랙웨일즈 멤버들은 저녁을 거르다시피 한 채로 무대에 올라야 했다.

캐스터는 촬영이 끝난 뒤 객석 맨 뒤에 서서 끝까지 공연을 관람했다. 공연 처음부터 끝까지 여느 팬들 못지않게 호들갑을 떨면서 전곡을 완벽하게 따라 불러서, ‘연밤 캐스터 이유미 블랙웨일즈 찐 팬 인증’이라는 영상이 돌아다녔다.

*

여느 날과 다름없이 최선을 다한 공연을 무사히 끝내고 나서, 인터넷 뉴스 검색을 하던 블랙웨일즈 멤버들과 블루오션의 식구들은 입을 딱 벌리고 기함을 하고 말았다.

도대체 왜 공중파 연예 정보 프로에서 취재를 나왔나 했더니만,

몸 접대를 거부해서 센터에서 밀려났고 결국 데뷔하지 못했다는 남자가 스카이미디어의 연습생이었으며 무려 ‘스카이하이’의 데뷔 조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스카이미디어는 음해성 유언비어에 대한 법적 대응에 나선다고 밝혔고, 스카이미디어 소속 연예인들의 모든 방송 스케줄이 취소되었다.

그리고, 펑크가 난 자리를 메꿔야 하는 상황에서 방송국 섭외 관계자들의 머릿속에 동시에 떠오른 이름이 바로, ‘블랙웨일즈’였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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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마지막 날.

‘마지막 날’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데다가, 팔도 한 바퀴를 돌고 돌아 마지막으로 찾은 도시가 서울에서 제법 가까운 지역이었던 덕분에 공연장을 찾은 사람들의 수는 역대급으로 많았다. 관객의 수뿐만 아니라 기자들의 수 또한 역대급이었다.

그럴 만도 했던 것이, ‘남자 아이돌 몸 접대 스캔들’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건이 터졌고, 이제 보니 사건의 핵에 서 있었으나 끝까지 흔들리지 않은 ‘뚝심 있는 그룹’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블랙웨일즈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었기 때문이다. 팔리는 기사를 써야만 하는 기자들은 만사 제쳐 두고 공연장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예정된 공연 장소에 트럭을 몰고 들어가는 길에 여민찬은 무서울 정도로 모여든 사람들을 보고 솔직한 심경을 밝혔다.

“이거 좀 무서운데?”

“어?”

“아냐.”

하지만 준희를 불안하게 해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애써 웃었다. 하지만 인간의 냄새를 맡은 3세대 좀비들 같은 모양새로 트럭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한 기자들의 모양새가 역시 좀 무서웠다. 천천히 트럭을 몰아 보던 여민찬은 결국 브레이크를 밟아야 했다.

*

먼저 밴에서 내려 심하게 많은 좀비, 아니 기자들을 제 쪽으로 유인해 낸 장범수가 길바닥 기자회견을 하는 동안, 눈치를 보다가 트럭에서 내린 여민찬은 준희의 손을 잡고 밴으로 뛰었다. 달려드는 좀비들에게 하마터면 붙잡힐 뻔한 상황에서 가까스로 준희가 탄 밴의 문을 닫을 수 있었다.

자신을 희생해 준희를 살린 여민찬은 몰려든 좀, 아니 그러니까 기자들에게 포위된 채로 트럭 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뭔 소린지 도무지 모를 소리들을 적당히 무시하면서 입 꾹 다문 채로 공연 준비를 시작했다. 저쪽에 말 잘하는 인간 놔두고 왜 나한테 이러는지 모르겠네, 속으로 짜증을 내면서 말이다.

밴드의 기타리스트와 드러머가 손수 트럭 문을 올리고 인버터의 시동을 걸고 케이블 배선을 하고 앰프와 악기 세팅을 하고 있는 모양새를 찍는 기자들의 수가 여느 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계속해서 눈치를 좀 보아야 했지만, 평소와 다름없이 묵묵히 제 할 일을 했다.

*

그리고 드디어 수천 명의 팬들이 고대하고 기다리던 공연 시작 시간이 임박했다. 기타 두 개의 튜닝을 마친 여민찬이 트럭에서 뛰어 내려와 제준희가 있는 밴으로 향하는 모습이 열 번째 버전으로 영상에 담겼다.

주변 상황이 영 차분하지 않다 보니, 평소보다 더 침착하게 뛰지 않고 걸어간 민찬은 밴의 문을 똑똑 두드렸다.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던 여진이 문을 열었고, 완벽하게 스타일링 된 준희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퍽 만족하여 환하게 웃은 민찬이 손을 내밀었고, 준희가 그 손을 잡았다. 그러자 엄청난 데시벨의 함성이 터졌고 동시에 플래시 터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어느새 찾아온 봄기운에 스르륵 녹은 땅 위를 두 손 꼭 맞잡고 걸어가는 두 사람의 발아래로, 깊숙이, 또 단단하게 뿌리가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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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J 미디어의 모형준 이사와 스카이미디어의 대표는 검찰 조사에 들어갔다. SJ 미디어와 스카이미디어의 주가는 급락했으며, 소속 연예인들의 손절이 이어졌다. 몸 접대를 통해 센터 자리를 차지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스카이하이의 정유빈은 칩거에 들어갔으나, 모형준 이사 사무실의 압수수색을 통해 정유빈과의 관련성이 밝혀지면 조만간 검찰 소환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그리고 블랙웨일즈는 또다시 연예인들을 대상으로 온갖 차트를 만들어 방송하는 프로그램에서 ‘함부로 덤비지 말아야 할 연예인’ 1위에 뽑혔다. 일전에 무역 센터 칼부림 사건 당시에 이와 비슷한 느낌의 순위를 급조해서 1위를 주었던 것 같은데, 또다시 말만 조금 바꾼 듯한 순위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그 의미가 좀 달랐다. 전직 변호사가 리더이고, UDT 출신의 드러머가 포진되어 있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건드리면 안 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인터넷상 떠도는 말들을 토대로 하여 그들의 언어로 요약해 보자면,

‘깔 것 없는 그룹이고, 함부로 깠다가는 상대방이 나가리된다.’

…하는, 그런 느낌의 1위였다.

블랙웨일즈와 안 좋게 엮였던 스카이미디어와 스카이하이, 그리고 모형준까지 모두가, 아무래도 올라올 수 없을 듯 보이는 나락으로 떨어진 것을 빗대어 하는 말들이었다. 순위를 매긴 프로그램과 관련 기사를 본 대중들은 몹시 수긍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연예 뉴스 보도 프로그램으로 공중파에 첫 입성을 한 블랙웨일즈는, 그 이후로 밀려드는 스케줄 덕분에 즐거운 비명을 질러야 했다.

일단, 각 지상파 라디오의 ‘화제의 인물 초대석’을 모두 섭렵했고, 지상파와 케이블 3사의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상위권에 랭크되었다. 적극적으로 방송을 탄 ‘사랑개’는 발매 두 달 만에 4대 음원 차트에서 1위로 올라섰다.

그와 동시에 은근히 노리고 있었던 명곡 다시 부르기 프로그램에도 출연했고, 여민찬의 이색적이면서도 심금을 울리는 편곡과 제준희의 폭발적인 가창력을 앞세워 연승을 거두었다.

이후로 청량음료와 커피, 그리고 맥주 CF를 찍었다. 신나게 공연한 후 구슬땀을 흘리던 멤버들이 다 함께 청량음료를 원 샷 했고, 리더 장범수는 공연 전 무대 아래에서 긴장하고 있는 멤버들에게 커피를 돌리며 응원을 했다. 공연이 끝난 후 회식 자리에서는 병맥주를 높이 들어 올리며 건배했다.

공연 중에는 물을 마시고, 공연 전에 긴장 별로 안 하며, 혹 긴장을 했다 한들 커피를 마실 것 같진 않았고, 회식 때에는 대부분 소주, 아니면 와인을 마시는 블랙웨일즈 멤버들은 ‘광고는 결국 사기구나!’라고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도 준희는 스타일 파급력 측면에서 ‘탑 급’이라고 인정을 받은 대세 연예인만 찍는다고 알려져 있는 이동통신 광고 촬영을 앞두고 있었다. 콘티는 아무래도 시력 문제 때문에 삶의 제한을 받지 않고 자유를 만끽한다는, 그런 느낌으로 진행될 듯했다.

그리고 여민찬은 신형 스포츠 세단의 모델로 낙점되었다. 25톤 트럭을 몰고 다닌 이력이 아무래도 광고주들에게 무척 인상 깊었던 모양이었다.

장범수는 ‘뇌섹남’이라고 불리는 고학력자 연예인들이 출연하여 두뇌 회전을 뽐내는 예능 프로에 한 번 출연했다가 재치와 입담을 인정받아 고정 자리를 꿰찼다. 완벽주의 성향인지라 뭐든지 일단 열심히 해서 잘하고 보는 장범수는, 온갖 장르의 난센스 퀴즈와 퍼즐을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풀어 놓고는 집에 돌아와 자괴감에 빠졌다. 나 왜 성냥개비 옮겨서 집짓기 하고 있지? 그거 하려고 머리 싸매고 공부해서 서울대 법대에 들어간 거였나? 하면서 말이다. 배재민은 그런 리더 형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위로해 주었다.

더불어 배재민은 몸 써서 게임하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스위트한 말투로 허를 찌르는 괴력남’ 캐릭터를 구축해 인기를 끌었다. 알고 봤더니 힘만 센 것이 아니었고, UDT 출신이란 배경이 괜한 것이 아니었던 배재민은 만능 스포츠맨으로 군림했다. 그리고 함께 예능을 하는 멤버들이 같은 팀이 되고 싶다고 가장 먼저 손에 꼽는 인물이 되었다.

자칫하면 스카이미디어와 계약할 뻔했었던 당시를 생각하면 재미있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밴드이고 결국 한 팀이니 개인 활동은 하지 않는다면서 대형 기획사의 제안도 까 버리지 않았는가. 그럴 땐 언제고 결국 닥치고 몰려드니 정신없는 와중에 들어오는 대로 다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여민찬은 이러다 잘하면 연기도 하겠다? 싶어 정신을 다잡고 있었다. 이것저것 재밌어 보이는 건 다 하고 있었지만 연기만큼은 절대로 할 생각 없었다.

어쨌든 블랙웨일즈는, 역대 메이저 가요 판에 입성했던 록밴드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이례적이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로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하지만 멤버들은 이 인기도 한때이며 물 들어왔을 때 충분히 노를 저어 놓아야 한다는 데에 의견이 일치했다. 그래서 잠잘 시간을 줄여가면서 좀 심하다 싶게 몰려든 스케줄을 소화해 내는 와중에도, 우리는 연주하고 노래할 수 있는 무대만 있다면 행복한 ‘밴드’라고 되뇌었다. 멤버들은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틈날 때마다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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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얼마 후, 송여진의 숙원이 이루어졌다. 여민찬과 제준희가 화제의 인물들만 찍는다는 ‘그들이 사는 세상’에 캐스팅이 된 것이다.

관찰 카메라 촬영 당일, 신일 맨션 2층 두 사람의 보금자리 곳곳 구석구석에 카메라가 설치된 채로 만 하루 동안 일상생활 촬영을 했다.

제발 조심하라고, 촬영 전부터 여민찬에게 신신당부를 했던 장범수는 촬영이 끝난 후로도 혹시나 수상한 짓 한 건 아니냐고, 계속해서 묻고, 확인하고, 또 의심을 했다. 결국 여민찬은 짜증을 냈다. 안 건드렸다고! 내가 무슨 동물원에서 섹스 쇼하는 짐승도 아니고 온 사방에 카메란데 붙어먹었겠냐고! 하면서. 옆에 있던 배재민이 ‘요즘엔 동물원에서 섹스 쇼도 해?’라고 물었고 여민찬과 장범수가 동시에 ‘닥쳐 인마!’라고 소리쳤다.

장범수의 위장을 꽤나 아프게 만든 일상생활 촬영을 마치고 나서 며칠 뒤.

문을 열고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서는 훤칠한 남자를 보고 동시에 일어선 사회자와 패널들이 열렬히 박수를 보내며 오늘의 게스트를 반겼다. 연예인들의 연예인이라고 불리는 블랙웨일즈를 실제로 보게 된 패널들은 흥분과 팬심을 감추지 못했다.

“어머! 여민찬 씨는 실제로 보니까 키가 진짜 크시네! 더 크신 거 아니에요?”

“지금 나이에 계속 크면 병이지 않나요?”

“아 그렇죠. 하하하! 아니 근데, 제준희 씨도 같이 오시지!”

“그 녀석은 저희 팀의 신비주의를 담당하고 있어서요.”

“아하- 그렇구나. 아니 그러면 여민찬 씨는요?”

“저는 팀 내에서 막 굴리는 포지션입니다.”

한바탕 웃음이 지나갔다. 하지만 민찬의 웃음은 좀 씁쓸했다. 일상 촬영을 함께 한 준희에게 스튜디오 녹화 때에도 함께 나가는 것을 권했으나, 끝내 준희는 사양했다. 모니터도 안 보이는데 나가서 멍하니 있는 것 싫다면서. 제작진들도 참 많이 아쉬워했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보니 끈질기게 권하진 못했다.

그래서 민찬은 지금 집에 남겨 두고 온 녀석 걱정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장시간 떨어져 보게 되었는데, 불안감이 장난 아니었다.

허우대 엄청난 남자가 분리 불안 증상을 겪고 있는 줄도 모르고, 패널들은 이제 여민찬이 입은 의상을 칭찬하기 시작했다. 양쪽 무릎이 시원하게 찢어진 검은색 진에 와인색의 터틀넥 니트를 매칭한 것이 너무 분위기 있고 섹시하다면서 한동안 의상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이런 옷을 목폴라라고 하나요?”

“터틀넥이라고 하죠.”

“맞아요. 터틀넥. 이런 거 입을 때 이렇게 턱 한참 아래에서 딱 끝나는 게 너무 멋있지 않아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이런 거 입으면 귀밑까지 올라오잖아.”

패널들끼리 주고받는 이야기를 귀담아듣던 여민찬은 “귀밑!” 하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어쨌든 웃어 주면 최고인 개그우먼 진행자가 퍽 만족한 얼굴로 따졌다.

“아니 여민찬 씨, 지금요. 저 목 짧다고 무시하는 거예요?”

“아뇨. 아뇨. 그런 거 아니고. 말씀하시는 게 너무 웃겨서.”

“웃겼으면 됐지. 용서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후로, 옷 잘 입는 연예인이나 사복 패션 베스트 등의 순위를 꼽을 때면 항상 상위권에 여민찬의 이름이 있다는 이야기도 오갔다. 여민찬은 또 겸손한 소리를 했다.

“사실은 다 협찬이고요, 스타일리스트 누나가 일을 잘해서 그런 겁니다.”

“에이, 겸손한 소리 하신다. 그래도 사복 패션이 항상 화제가 되었잖아요?”

“어디까지 사복이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사실 제가 스스로 매칭해 입는 건 집 앞에 나갈 때 추리닝 정도고요, 그마저도 준희가 먼저 하나 입어버리면 짝짝이로 입어야 돼요.”

“그러니까 결론은, 패션의 완성은 얼굴과 몸이라는 거죠.”

메인 진행자가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고 할 때 모든 패널이 다 함께 합창을 했다.

죽이 잘 맞는 사람들 사이에서 당황한 민찬은 웃으면서 아니라고 절레절레하고 있는데, 메인 진행자가 다시 물었다.

“자, 여민찬 씨? 내 패션의 비결은 얼굴과 몸이다, 인정하십니까?”

“음…, 인정 안 하면 계속 서있으라 하실 것 같아서, 인정하겠습니다.”

대답에 만족한 패널들이 웃으면서 또 왁자지껄 떠들었다. 여러 사람들이 동시에 말하는 상황에 약한 민찬은, 남들 웃을 때 따라 웃으면서도 눈동자를 바삐 굴렸다.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을 해야 했다.

정신없게 만드는 패널들 속에서 게스트가 정신 차리려고 무던히 노력하는 듯한 느낌의 인사를 마치고 난 후 자리에 앉았다.

이제 생활 밀착 영상에 대한 코멘터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처음 섭외 요청이 들어왔을 때부터 장범수가 예상하고 우려했던 바대로, 매 컷마다 수많은 화젯거리를 양산하기 시작했다.

일단 첫 장면인 아침 기상 풍경이 화제가 되었다. 나란히 붙어있는 침대 위에 모로 누운 여민찬은 양손을 다소곳이 얼굴 앞에 모은 채로 자고 있고, 제준희는 큰 대자로 팔다리를 벌리고 자고 있었다. 제준희의 발 하나가 여민찬의 허벅지 위로 올라가 있는 것이 포인트였다. 화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진행자가 코멘트를 했다.

“별명 부자인 여민찬 씨 예전에 줄리엣이란 별명 있었잖아요.”

“아. 네. 담배 피울 때.”

“지금 저 장면 보면 여전히 줄리엣이에요.”

“흥, 그런가요.”

“반면에 제준희 씨는 한 송이 꽃 같은 외모인데 자는 모습만 보면 장군감이네요.”

“평소 성격도 장군감이에요.”

픽 웃음을 터트린 여민찬의 폭로에 또다시 한바탕 웃음이 지나갔다.

이어서 모니터 화면 속에서는 알람 소리를 듣고 일어난 여민찬이 제준희 발아래 둘둘 말려있는 이불을 끌어 올려 덮어 준 후에 침실에서 나오는 장면이 나왔다. 자신의 부스스한 모습을 유심히 보던 민찬은 카메라 너머 제작진들 쪽을 보며 사심 없이 물었다.

“와. 이런 거 편집 안 해 주시는구나.”

“네. 안 합니다.”

진행자의 시간 차 없는 대답 덕분에 또다시 웃음이 터졌고, 패널들은 별반 당황한 것 같아 보이지 않는 남자를 안심시켰다.

“근데 막 일어났을 때도 멋있어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가요계에서 아이돌과 밴드를 총망라하여 미모 원탑으로 꼽히고 있는 제준희가 일어났다. 침대를 더듬어 안경을 찾아 쓰고 침실을 빠져나오는데, 화면 속에 커다란 느낌표가 떠올랐다. 잔뜩 뻗친 머리에 뱅뱅이 안경을 쓰고 젖은 빨래 모양으로 터덜터덜 걸어 나오는 모습이 가히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메인 진행자가 급하게 엑스자를 그리며 “타임!”을 외쳤다. 그러는 바람에 제준희는 터덜터덜 걸어 나오는 중에 일시 정지된 채로 멈춰 있어야 했다. 벌떡 일어난 진행자가 여민찬에게 따졌다.

“아니 잠깐만요! 여민찬 씨! 신비주의 담당이라면서요!”

농담조의 삿대질을 하며 따지는 진행자를 피해 슬금 몸을 물린 여민찬이 화면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신비롭잖아요?”

“하하하! 아니 이 사람이 진짜!”

이후로 한동안 제준희의 털털함을 화제로 한 대화가 이어졌고, 그제야 문지방을 넘어선 채로 멈춰져 있었던 제준희는 다시 터덜터덜 걸어 나올 수 있었다. 그 모습을, 턱을 괴고 흐뭇하게 바라보던 민찬이 물었다.

“근데, 되게 귀엽지 않아요?”

그러자 패널들도 한마디씩 덧붙였다.

“맞아요. 막 흉하고 이런 게 아니라, 묘하게 귀여워요.”

“팬들은 또 이런 모습을 되게 좋아하거든요.”

빈말이 아니었다. 패널들이 예상하기에도 이번 편이 방송되는 당일 방송국 홈페이지의 실시간 댓글 창이 난리가 날 것 같았다. 록밴드 블랙웨일즈의 보컬 제준희는, ‘눈먼 고래의 노래’를 부를 때는 아련하고 처연한 느낌을 주어 감수성 충만한 이들을 눈물짓게 했다. 반면 ‘원’이나 ‘뭐 인마?’를 부를 때는 퇴폐적이면서도 카리스마가 넘쳐 났고, ‘온양야설’이나 ‘사랑개’를 부를 때는 또 몹시 사랑스러웠다. 그야말로 팔색조의 매력을 가진 남자의 여태껏 보지 못했던 모습을 보게 된 팬들은 기상 직후 잔뜩 헝클어진 제준희의 모습을 ‘반전 매력’으로 받아들일 것이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제준희 중에서 ‘기상 제준희’를 앓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이 분명했다. 리얼한 사생활을 가감 없이 공개했는데 흐트러진 모습조차도 무척 귀여운 남자의 주가는 더 올라갈 것이었다.

그렇다 보니 그 누구도 준희의 흐트러진 모습을 별로 염려하지 않고 있는 가운데 화면이 바뀌었다.

촬영이라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두 사람은 흩어져서 각자의 볼일을 보고 있었다. 여민찬은 부엌에서 간단한 아침상을 준비하고 있었고, 욕실로 들어갔던 제준희는 씻고 나서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탈탈 털며 나오고 있었다.

그러던 그때, 침실에 놓아둔 제준희의 핸드폰이 울었다. 벨 소리는 헤비메탈이었는데, 부엌에서 여유로운 느낌으로 아침을 준비하던 여민찬과 수건을 들고 욕실에서 나오던 제준희가 동시에 음악에 맞춰 머리를 흔드는 장면이 한 카메라에 잡혔다. 그리고 ‘블랙웨일즈의 각 잡힌 군무’라는 자막이 지나갔다. 패널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 진짜 웃기다! 평소에 저러고 노는구나! 이거 짠 거 아니죠?”

“몰랐어요.”

여민찬은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들어 몰랐다고 손사래를 치면서 웃었다. 노래 들으면서 함께 즐기는 것이 일상이긴 했지만 벨 소리를 듣고 리듬을 탈 때 녀석도 같이 저러고 있는 줄은 몰랐다. 준희가 방으로 들어가 핸드폰을 찾아 받으면서 록밴드의 보컬과 기타리스트의 군무는 끝났다.

“와하. 두 분이 진짜 소울메이트이시네요.”

소울메이트 정도가 아닌지라 민찬은 그저 픽 웃을 따름이었다.

이후로 여민찬이 차린 아침상이 또 화제가 되었다. 아침에는 간단하게 시리얼이나 빵을 먹는다고 설명을 하는데, 간단히 차렸다곤 하지만 시리얼에 견과류도 넣고, 블루베리와 바나나도 썰어 넣었으며, 양상추와 양파 샐러드에 채 썬 당근과 삶은 계란을 얹고 그 위에 발사믹 소스까지 뿌린 상차림이 꽤나 화려했다.

“여민찬 씨는 요리를 좀 하세요?”

“막 즐기진 않는데, 레시피 보면서 그냥 따라 해요. 배달 음식 지겨울 때가 있어서.”

그런 대화를 하는 중에 마주 보고 앉아 아침 식사를 하는 장면이 나왔다. 여민찬이 샐러드를 떠서 앞 접시에 덜어 제준희의 앞에 놓아 주는데, 패널 중 한 사람이 화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당근 다 준희 씨 접시로 갔죠?”

“아? 진짜? 진짜 그러네?”

샐러드 위에 장식처럼 올라가 있던 채 썬 당근은 빠짐없이 제준희의 앞 접시에 올라가 있었다. 블랙웨일즈의 찐 팬인 패널이 아는 바를 말했다.

“여민찬 씨가 당근 못 먹는 걸로 유명하잖아요.”

“그런 걸로 유명하고 싶진 않은데,”라며 웃음기 어린 소리로 부정하던 남자가 애로사항을 말했다.

“당근 먹으면 어지러워요.”

당근 못 먹는 사람 중 제일 유명한 남자가 인상을 푹 쓰고 정색하며 하는 말에 또다시 웃음이 터졌다. 무대 위에서 기타를 칠 때면 카리스마가 좔좔 넘치는 키 187cm의 기타리스트가 당근을 먹으면 어지럽다고 하소연하는 모양새가 꽤나 인상적이었다.

“아니 근데, 당근 싫어하면서 왜 굳이 저기다 당근을 넣어요? 그냥 안 넣으면 되잖아요?”

“쟤는 먹어야 되거든요.”

“에? 왜요?”

패널들이 의아함에 반문했고, 여민찬은 픽 웃으면서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토끼 닮았잖아요.”

비하인드 영상에서 자기들끼리 하곤 했던 말을 공중파 방송에서도 하고 앉아있는 남자의 대범함에 놀란 찐 팬 패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그 순간에 장범수의 잔소리 장전한 얼굴이 떠오른 여민찬은 “농담이고요,”라고 하면서 해명을 했다.

“당근에 비타민 A랑 베타카로틴이 많은데 그게 눈에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당근 말고도 블루베리가 또 눈에 좋다고 준희 팬분들이 엄청 많이 보내 주셔서, 시리얼 안에 블루베리도 잔뜩 들어있어요.”

꽤 열심히 해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블랙웨일즈의 팬인 패널은 이거 방송 나가고 나면 기사가 백만 개 정도는 쏟아지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와중에 화면 속의 남자들은 저들끼리만 통하는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킬킬거리고 있었다.

[어째, 눈이 좀 밝아진 기분이 드시나요? 토 선생님?]

[흐음. 글쎄요. 어디 보자.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렇소.]

[아하하! 토 선생은 어디 가고 갑자기 능천 장군이 납시었소?]

[무엄하구나.]

식사 내내 쫑알거린 두 사람이, 차려진 아침 식사를 얼추 다 먹고 난 후 동시에 손을 내미는 장면이 나왔다. 뭣들 하는 건가 했더니만, 손을 붙이고 하는 가위바위보였다. 주먹을 맞대고 흔들면서 “가위, 바위, 보?” 했는데 제준희가 가위, 여민찬이 보, 였다. 제준희의 가위를 여민찬이 보자기로 감싸 잡고 흔들다가 약 오른다는 듯 픽 던져버리는 시늉을 하고는 이내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고요해진 분위기 속에서 볼을 씰룩씰룩하던 메인 진행자가 참지 못하고 터트렸다.

“아니 근데요! 지금 분위기 좀 이상하지 않았어요? 저거 지금 뭐죠? 가위바위보를 대체 왜 저렇게 하는 거죠?”

“몰라요. 계속하다 보니까 어느새 저렇게 됐어요.”

“예? 아니 무슨 그런 대답이. 근데 와, 저거 진짜 설렌다. 가위바위보가 저렇게 야한 건 줄 몰랐네?”

“그래요?”

원래부터 내내 손을 잡고 다니는데, 손 붙이고 하는 가위바위보 정도로 야하다고 하니까 영 의아했던 민찬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던 그때 패널 중의 한 사람이 이의를 제기했다.

“근데요, 여민찬 씨가 좀 늦게 내지 않았어요?”

“맞아. 진짜. 나도 그 생각 했어요.”

“레퍼리! 비디오 판독 요청합니다! 화면 다시 돌려봐 주세요. 늦게 낸 거 같은데?”

“근데 제가 졌잖아요.”

늦게 냈거나 말거나 제가 졌으니 관계없지 않으냐는 민찬의 투정에도 제작진은 화면을 다시 돌리고 느리게 재생시키고 있었다.

어이없다는 듯이 웃고 있는 여민찬을 제외한 패널들은 의자를 가지고 화면 앞으로 몰려갔고, 비디오 판독을 시작했다.

비디오 판독 결과, 처음 늦게 냈다고 제안한 패널의 눈썰미가 맞았음이 밝혀졌다. 제준희가 가위를 내고 나서 한 박자 늦게 여민찬이 손을 활짝 펴고 있었다.

“맞네! 늦게 냈네!”

“아니 근데 제가 졌잖아요!”

여민찬은 웃음기 섞인 소리로 다시 한번 더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패널들은 한동안 늦게 냈다고, 반칙했다고, 몰아가기를 했다.

늦게 내고도 진 남자를 한동안 놀려 먹고 난 후, 이어서 가위바위보에서 진 여민찬이 설거지를 하는 장면이 지나갔다. 패널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이제 보니까 민찬 씨가 일부러 져 준 거네.”

그 말에 또 다른 패널이 물어왔다.

“아. 그런 거예요? 져 준 거예요? 설거지하려고?”

당황한 여민찬이 “아니에요.” 하고 웃으면서 손을 저었다. 하지만,

“그러네. 져 준 거네. 이제 보니까 여민찬 씨가 스위트하시네.”

이미 여민찬은 동생에게 일부러 져 주는 스위트한 남자가 되어있었다. 민찬은 다시 해명했다.

“저 진짜로 가위바위보를 못 해요. 상대의 손을 보는 순간 놀라서 늦게 내는데 하필이면 지는 것을 내는 버릇이 있어요.”

“에이. 세상에 그런 몹쓸 버릇이 어디 있어요?”

“그거 옛날에 유머일번지에서 나오던 개그 캐릭터잖아요!”

“아하하, 그러네!”

패널들은 믿지 않았고, 민찬은 “진짠데.” 하며 제 뺨을 쓸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패널들은 ‘유머일번지’를 모르는 세대와 아는 세대로 나누어져서 분쟁 중이었다.

시종일관 화젯거리를 만들고 있는 영상은 계속되었고, 이제는 두 사람이 작업실에 있는 장면이 나왔다. 그리고 키보드 앞에 앉은 제준희는 마이크의 팝 필터를 앞에 두고 목을 푸는 김에 개인기를 선보였다. ‘명곡 다시 부르기’에 나가기 위해 선곡을 하는 과정에서 접했던 옛날 가요들 모창이었다.

[기도하는-]

가왕이라 칭해지는 전설적인 가수의 매우 유명한 노래3)도 그 특징을 정확히 살려 따라 부르고,

[날 요옹- 서해-]

특유의 비음이 도드라지는 가수의 곡4)도 그럴싸하게 따라 불렀다. 비음이 센 곡이다 보니 콧구멍을 한껏 모으는 표정이 능청맞았다.

상당히 비슷한 데다가 몹시 익살맞은 표정을 하고서 부르고 있는 모창 퍼레이드 덕분에 화면 속의 여민찬은 시종일관 박장대소를 하고 있었다. 화면 밖의 패널들 또한 가창력이 없으면 모창도 할 수 없다는 대가수들 위주의 모창을 무척 신기해하고 또 놀라워했으며 또 다 함께 박장대소를 했다.

자신은 전혀 웃지 않으면서 화면 속 여민찬과 화면 밖 패널들을 심하게 웃긴 제준희는 목 풀기를 마친 이후 진지 모드로 돌입하였고, 제대로 건반 연주를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이번에는 모창이 아니라, 자신의 진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힘겨운 아침 햇살을-5)]

옆에 앉아 조용히 감상을 하는 여민찬의 얼굴과 교차 편집된 노래가 나가는 동안 스튜디오 안은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다.

화면 속의 여민찬과 화면 밖의 여민찬은 똑같은 얼굴을 하고서 제준희의 노래를 감상하고 있었다. 난 널 사랑해- 하는, 그 유명한 클라이맥스의 꽤 높이 올라가는 고음에서 하얀 미간이 살짝 좁아지는 것을 보며, 화면 안과 화면 밖의 여민찬이 동시에 덩달아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노래의 1절을 부른 제준희의 열창은 중간 편집 없이 모두 나갔다. 노래가 끝나고 마지막 음절의 여운이 모두 가신 이후로도 3초 후, 좀 늦은 감이 있다 싶은 시점에서야 깊은 감동에서 겨우 빠져나온 패널들은 일제히 기립을 했고, 열렬히 환호하며 박수를 보냈다.

“우와. 진짜 눈물 나게 잘 부른다….”

“아… 준희 씨는 진짜 미친 거 같아요…. 사람이 아니야…. 어떻게 저렇게 잘 부르지?”

“목소리가, 음색이 진짜 독특해요. 허스키한데 맑아. 저런 목소리가 잘 없거든.”

“그리고 어떻게 저렇게 시원시원하게 올라가죠?”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팔불출은 묻지도 않은 대답을 했다.

“지금 저게 여자 키예요. 저 녀석 지금 여자 키로 저렇게 부르고 있는 거예요.”

두 번이나 강조해서 하는 말에 패널들은 우와, 하고 놀라워했다. 메인 진행자가 타 방송사의 대중문화 리뷰 프로그램 녹화 중에 들었던 말을 전했다.

“대중가요 평론가 유명식 씨가 그랬거든요, 겨우 스물다섯에 노래로 한을 표현하는 것이 정말로 대단한 거라고, 보컬리스트 제준희의 십 년 뒤를 상상하면 소름이 끼친다고.”

“맞아요. 지금도 저렇게 잘 부르는데, 저기에 세월의 연륜까지 쌓이면, 와.”

한동안 제준희의 노래에 대한 칭찬을 주고받던 중에, 한 패널이 물었다.

“근데, 중간에 여민찬 씨 울지 않았어요?”

“에? 아닌….”

…하며 당황한 민찬이 소심하게 손을 한번 저었는데, 이번엔 아니라고 말로 부정하지 못했다. 패널들은 또다시 비디오 판독을 요청했다. 그리고 제준희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여민찬을 잡았던 부분을 다시 돌려보고 눈을 클로즈업했는데, 붉어진 눈가에 눈시울 또한 촉촉했다.

“우는데?”

“그러네? 여민찬 씨 지금 누가 봐도 우는데요?”

패널들의 몰아가기에 당황한 민찬이 시선을 화면에 꽂아 놓은 채로 변명을 했다.

“아니, 모르겠, 그, 제가, 안 울려고 했는데, 그..., 울었, 나 봐요.”

그러다 결국은 인정했다. 제준희가 저 노래를 부를 때 몹시 감동했었고,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기분을 억지로 참았던 기억은 있었다. 그런데 화면으로 다시 보니 확실히 눈물이 맺힌 듯했다. 유년기 이후로는 울어 본 기억이 없는데, 준희의 노래를 들으면 속에 있는 뭔가가 자꾸만 건드려지는 기분이었고, 민찬은 매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준희 노래 들으면, 가슴속이 막 뭉클해지는 게 있거든요. 처음에도 그래서 쫓아다녔는데, 지금도 여전해요. 지금도 저 녀석 노래를 들으면 울컥할 때가 있어요.”

충분히 공감이 되는 말에 토를 다는 이는 없었다. 그저, 이거 나중에 기사 수억 개 쏟아져 나오겠구만,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고개만 끄덕끄덕했다.

노래가 끝난 후 제준희의 목덜미에 손을 턱 올린 여민찬이 잘했다고 흔들흔들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사실 저 때 사방에 카메라가 있다는 사실을 잊고 하마터면 끌어당겨 키스할 뻔했었다. 목덜미를 잡고 흔들다가 가까이 가던 중에서야 상황이 생각났고, 화면 속 여민찬은 실수할 뻔한 손을 급히 내리고 있었다. 다시 봐도 가슴이 철렁한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그런 거 당연히 알 리 없는 패널들이 한마디씩 했다.

“두 분 사이가 진짜 좋아 보이네요.”

“맞아요. 두 분이 정말 너무 잘 어울려요.”

“고맙습니다.”

난데없는 감사에 패널들은 또 눈이 휘둥그레졌다.

“에? 아니 여기서 고맙다고 하시면 분위기 이상해지는데.”

“아? 아. 그런가요? 그러면 취소하겠습니다. 편집해 주세요.”

“네? 이 사람이 아까부터 진짜. 하하하.”

이후로 두 사람이 손잡고 산책을 다녀오는 길에 해동 슈퍼에 들러 장을 봐 오는 장면과 저녁으로 돼지고기 김치찜을 해 먹는 장면도 나왔다.

“와! 저런 것도 만들어요?”

“전에 시켜 먹어 봤는데, 재료가 있길래 한번 따라 해 봤어요.”

“맛은 어땠어요?”

“뭐….”

그때 화면 속 제준희가 엄지를 척 치켜드는 장면이 나왔다.

“와 맛있나 보다!”

제작진이 스케치북을 들어 올렸다. ‘제준희와 통화연결!’이라고 쓰여 있었고, 신이 난 패널들이 여민찬을 닦달했다. 준희 씨한테 전화 걸어 보라고.

제작진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우영으로부터 핸드폰을 건네받은 민찬은 단축번호 0번을 눌렀고, 패널들은 또 난리가 났다.

“저기요? 단축번호가 0번인데요?”

“이거 나가도 괜찮은 거 맞아요?”

이번에는 또 단축번호 때문에 시끄러워진 와중이었는데, 통화 연결음 한 번이 채 지나가기도 전에 상대가 바로 전화를 받는 통에 시끄럽던 패널들이 동시에 손가락을 입술에 붙이고 서로서로에게 쉿! 을 외쳤다.

[어- 형- 녹화 끝났어-?]

“아냐. 아직 녹화 중이야.”

[힉- 아직도오-? 힘들겠다- 틈틈이 엉덩이 들썩들썩해- 그러다 욕창 생길라-]

“어. 흥. 알았어.”

그때까지 입을 꽉 막고 있던 패널들이 참지 못하고 동시에 왁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욕창이라뇨!” 하면서.

[…….]

놀랐는지 전화기 너머가 고요해졌고, 민찬이 서둘러 해명했다.

“준희야 지금 녹화 중인데, 너랑 통화하고 싶다고들 하셔서.”

[아. 그래? 어… 안녕하세요- 저는 제준희입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진행자가 호들갑을 떨었다.

“아유아유아유 알죠 알죠! 오늘 같이 안 나오셔서 저희가 얼마나 섭섭해하고 있었는데요. 준희 씨 영상 지금 잘 보고 있어요. 특히 노래가 너무 좋았어요. 너무 감동적으로 잘 들었고요, 그것 말고도 오늘 여러 군데서 빵빵 터져가지고, 시청률 엄청 잘 나올 것 같으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근데 준희 씨, 아침에 일어났을 때 모습도 나갈 건데, 그래도 괜찮아요?”

[네, 괜찮습니다- 시청률만 잘 나오면 관계없습니다-]

또다시 한바탕 웃음이 지나갔고, 함께 웃던 여민찬이 말했다.

“이 자식 성격 장군감이라니까요.”

“하하하하하. 진짜 그러네요.”

민찬은 야무진 표정을 짓고 있을 녀석을 상상하며 흐뭇하게 웃고 있는데, 진행자가 전화기 너머의 남자에게 본론을 물었다.

“오늘 전화를 드린 건 다름이 아니라, 여민찬 씨가 만든 돼지고기 김치찜 있잖아요?”

[네.]

“그거 먹고 엄지 척 드신 게, 진짜 맛있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맛은 더럽게 없지만 고생했으니까 옜다 이거나 먹어라 하고 들어 주신 건지, 그게 궁금해서요.”

[아아-. 그거 진짜 맛있었어요. 배달 음식 먹어보고 따라 한 건데 형이 한 게 더 맛있었어요.]

“와 진짜요? 여민찬 씨가 또 어떤 요리를 해 주었어요?”

[음…, 북엇국도 잘하고요, 소고기뭇국도 맛있었고, 또 스파게티 같은 것도 맛있어요. 귀찮으면 카레 만드는데, 그것도 맛있어요. 당근이 너무 많아서 좀 그렇긴 한데, 그래도 맛있어요. 형 요리 되게 잘해요.]

맛있다는 말을 대체 몇 번이나 하는지. 노래는 25년 차 가수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끝내주게 잘하지만 하는 얘기를 들어 보면 영락없이 스물다섯인 어린 남자가 하는 말이 귀여웠던 패널들이 빙그레 미소 짓고 있었다. 꾸밈없이 솔직한 성격으로 유명한 제준희가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진짜로 맛있었던 모양이라고 생각한 패널이 느낀 바를 유감없이 말했다.

“여민찬 씨가 진짜 요리 잘하시나 보다.”

“아니요. 잘하는 정도는 아니에요.”

[잘하는 거야-]

전화기 너머에서 툭 끼어든 녀석 덕분에 또 스튜디오 안에 웃음이 터졌다. 그러다 패널 중 한 사람이 준희에게 물었다.

“준희 씨는 요리 안 해요?”

[형이 못하게 해요. 손 자른다고.]

“하하하! 자른다니요! 준희 씨 어휘가 지금 너무 살벌했어요!”

[민찬 형이 진짜 그렇게 말했어요. ‘그러다 손 잘라 인마-’]

여민찬의 말투를 흉내 낸 능청맞은 성대모사 덕분에 또다시 커다란 웃음이 지나갔고, 같이 웃던 여민찬이 웃음기 어린 소리로 변명을 했다.

“이 자식 고집이 세서, 그 정도로 세게 말하지 않으면 말을 잘 안 들어요.”

“아하. 그렇구나. 아니 근데. 두 분 같이 산 지 10개월 차라 하셨는데, 이야기 들어보면 10년 차는 된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아니 또 뭐가 감사해요! 이제 보니까 두 분이서 말하는 것도 똑같네!”

스튜디오 안의 여민찬과 전화기 너머의 제준희가 꽤 닮아있는 소리로 흐흥, 하고 웃었다. 똑같이 닮아있는 것은 비단 말투뿐만이 아니었다.

*

며칠 후, ‘그들이 사는 세상 블랙웨일즈 편’이 방송되는 당일.

프로그램 홈페이지 내의 실시간 토크 게시판에는 눈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작진들과 패널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기사가 실시간 토크와 엇비슷한 속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여민찬의 와인색 터틀넥 패션 화제, 터틀넥을 입었을 때 턱 아래 어디까지 오는지가 패완몸의 증거?」

「블랙웨일즈의 여민찬×제준희 나란히 붙어있는 침대에 팬들 술렁」

「줄리엣과 장군님, 뒤바뀐 포지션에 블랙웨일즈 팬들 환호」

「‘기상 제준희’ 화제, 아침 기상 후 흐트러진 모습조차 사랑스러운 팔색조 매력의 남자 덕분에 팬들은 심쿵심쿵」

「깐준희 덮준희 개준희 온양준희 다 좋지만 최애는 뭐니뭐니해도 ‘기상 제준희’라는 팬들」

「여민찬이 제준희에게 당근을 먹이는 이유는, 토끼를 닮아서?」

「”제준희는 토끼를 닮았다” 여민찬의 애정 어린 멘트에 팬들 현실 설렘」

「여민찬과 제준희 손잡고 가위바위보 너무 야한 것 아닌지? 방송에 19금 표시하라는 팬들 덕분에 웃음보」

「가위바위보 일부러 져 주는 여민찬의 스윗함에 팬들은 덕통사고」

「”놀라서 늦게 낸 것” … ‘유머일번지’ 식 여민찬 해명에 출연진 ‘폭소’」

「제준희의 능청맞은 모창, 십 점 만점에 백 점! 여민찬의 포복절도에 팬들도 흐뭇」

「블랙웨일즈의 제준희, 집에서 홈 마이크에 대고 부른 노래 화제」

「”제준희가 부른 노래 뭐야?” … ‘그사세’ 게시판 마비」

「그사세 블랙웨일즈 편 제준희, 여자 키로 시원하게 부른 노래에 감탄사가 절로」

「이미 완성형 보컬인 제준희의 십 년 뒤가 궁금하다. 어디까지 대단해져 있을지?」

「제준희 노래 들으며 감동하여 눈물지은 여민찬, 울었다고 솔직하게 인정」

「처음이나 지금이나 제준희 노래를 들으면 울컥한다는 여민찬, 보기 좋다는 말에 “고맙습니다.” 대답해서 팬들 일동 당황」

「제준희, “배달 음식보다 여민찬 음식이 더 맛있어” 여민찬 대세 ‘요섹남’ 반열에 우뚝」

「제준희, 동거 10년 차 같다는 말에 “감사합니다” 여민찬과 똑같은 화법에 팬들 폭소.」

‘그들이 사는 세상’이 첫 방송을 시작한 이래로 가히 역대급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많은 기사가 쏟아지고 있었다. 방송을 보면서 실시간 반응을 살펴보던 장범수가 “아이고.” 하고 위를 움켜잡으며 허공에 대고 절규했다.

“차라리 커밍아웃을 해라 이 자식들아!”

배재민이 하하하 웃으며 그런 범수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진정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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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들어온다 싶을 때 죽어라 노를 저은 블랙웨일즈는, 절대적 수면 부족에서 기인한 눈 밑 다크서클을 하나씩 얻은 대신에 연예인 브랜드 평판에서 보이그룹 부분 1위에 등극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건 좋다. 좋은데,

보이그룹이라고?

처음 순위를 접했을 때 멤버들은 정체성 혼란을 겪어야 했다. 블랙웨일즈 밑으로 모두 아이돌이었고 50위권 내에 밴드는 블랙웨일즈 외에 단 두 팀뿐이었다. 그리고 그 두 팀마저도 모두 대형 기획사 소속으로 다년간의 연습생 시절을 거쳐 밴드로 구성된 그룹이었다.

1위라니까 물론 좋았지만, 반면으로는 우리가 보이그룹이었던가? 그런 건가? 하며 심각하게 고민을 해야 했다. 특히 팀의 리더이자 고령자를 맡고 있는 장범수가 무척 혼란스러워했다.

어쨌든, 보이그룹 부분에서 1위를 한 블랙웨일즈는 가수 브랜드 평판에서는 전 국민을 주무르고 있는 트로트 가수에게 밀려 2위를 했고, 연예인 종합순위에서도 8위에 올랐다. 기획사도 없이 시작한 언더그라운드 밴드 출신으로서는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그래서 이 정도면 다 올라온 건 줄 알았다.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는 줄 알았다. 꼭대기를 밟았으니 이제는 내려갈 일만 남았다고, 그게 순리라고, 블랙웨일즈 멤버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를 대비해서 절대로 자만하지 말자고, 초심을 잃지 말자고, 틈이 날 때마다 모여서 그런 말들을 나누면서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있었다.

그랬는데, 그 또한 자만이었던 모양이었다.

메이저 데뷔 계기부터 성장기까지의 과정이 좀처럼 예사롭지 못하다 보니 ‘신이 점지한 스타’라고 불리고 있었던 블랙웨일즈를 성공의 길로 이끈 바로 그 신은, 이제 보니 영 만족을 모르는 양반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눈코를 제대로 뜰 새가 없을 정도로 하도 바쁘다 보니 잠시 기억 속에서 놓고 있었던 멀리 암스테르담에서 도저히 믿기 힘든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일단, 달리는 콘서트 장면까지 추가하여 국제 다큐 영화제에 출품을 했던 ‘디렉터 K’의 ‘Whale’s Song’은 경쟁 부문 진출에 실패했다. 프로의 세계는 냉정했고, 진입 문턱 또한 높았다. 열혈 팬심을 가진 1인이 호기롭게 제작한 영상물로는 넘기 힘든 벽이었다. 무엇보다도 듣도 보도 못한 아시아인 밴드의 이야기가 세계인들의 가슴을 울릴 수는 없었을 것이었다. 자신들의 이야기이다 보니 맘에 들었던 것과는 별개로 어느 정도 그럴 것이라 예상을 하고 있었던 여민찬과 장범수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강동수를 위로해 주었다.

“아마 외국인들 보기에는 범수 형 캐릭터가 좀 무서웠나 보지.”

“웃기지 마. 네가 웃통 벗어서 그래. 쓸데없이 외설적이라서 심의에 걸렸을 거야 아마.”

탈락 원인을 자신들 탓(엄밀히는 서로의 탓)으로 돌리며 의기소침해진 남자를 다독여 주고 있는데,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우영이 사색이 된 채로 범수에게 소리를 질렀다.

“아! 사장님! 대체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녀!”

“아?”

그다지 싸돌아다닌 것 같진 않았던 장범수가 말간 얼굴로 아? 하고 되물었다.

기획실에 얌전히 있지 않고 콘텐츠 제작실에 넘어와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싸돌아다닌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우영이 황급히 손짓을 했다. 나오라고! 빨리 나오라고! 빨리빨리 나오라고!

대체 뭔 일인가 싶었던 것은 장범수뿐만이 아니었다. 마주 보고 ‘왜 저래?’, ‘글쎄?’ 정도 되는 눈빛을 주고받은 여민찬과 강동수도, 불난 호떡집의 종업원과 사장님 포스로 헐레벌떡 앞서간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가 보았다.

사색이 된 이우영이 장범수의 팔을 잡아끌고 데려간 곳은 매니지먼트 사무실이었다. 이우영은 제 컴퓨터의 모니터를 손으로 척 가리키며 눈을 부라렸다. 이것 좀 보시라고! 그러고는 소리쳤다.

“내용이 이해가 안 돼요! 해석은 되는데,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돼!”

해석은 되는데 이해가 안 돼?

장범수는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라고 하며 우영이 가리킨 곳을 보았다. 화면에는 메일 팝업창이 띄워져 있었는데 그다지 길지 않은 영문 메일이 열려있었다. 장범수는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리며 메일 내용을 읽어보았다. 원어민급으로 영어 잘하는 남자이다 보니 줄줄 막힘없이 읽어 내려가다 말고,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요!”

그러고들 있으니 궁금해진 민찬은 장범수의 어깨너머로 힐끔 들여다봤다. 영어가 아니라 아프리카어라도 쓰여 있는 건가? 싶어서 말이다.

그 와중에 다시 한번 더 내용을 살펴본 장범수가, 자신보다 영어가 떨어지는 우영을 보며 물었다.

“지금 이게…, 그러니까…, 러셀 루소… 제작사에서 보냈다는 거야?”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내가 사장님한테 먼저 물어봤는데!”

갑갑했던 이우영이 이미 높았던 언성을 더 높였고, 장범수는 다시 메일을 읽었다. 해석은 되는데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녀석의 말이 십분 이해가 되었다. 모르는 단어도 없고 완벽하게 해석은 되는데, 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선뜻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우리 얘기를 영화화하고 싶다는 거야? 러셀 루소가?”

“아니 그러니까! 왜 나한테 묻냐고요! 내가 사장님한테 물어본 건데!”

“이 러셀 루소가 그 러셀 루소가 맞아? 피에르의 여름 만든?”

“아 내가 어떻게 알아요! 아니 근데 왜 자꾸 나한테 묻는데!”

장범수와 이우영이 마치 방음벽을 사이에 두고 대화하는 듯한 느낌으로 말을 주고받는 동안, 러셀 루소가 누군지도 모르고 피에르의 여름이 뭔지도 모르는 여민찬은 눈을 껌벅껌벅하고 있었다. 그리고 러셀 루소가 누군지 너무 잘 알며 ‘피에르의 여름’을 열 번도 더 본 영화 마니아 강동수는,

“허…….”

기절하려고 했다.

눈알 뒤집고 뒤로 넘어가는 녀석을 보고 놀란 여민찬이 “어어!” 하며 어깨를 붙들었다. 그리고 장범수는, 해석은 되는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메일 전문을 다시 읽었다.

「안녕하세요. 여기는 영화 제작사인 ‘라이브 네이선 프로덕션’입니다. 암스테르담 영화제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러셀 루소’ 씨가 ‘Whale’s Song’을 무척 인상 깊게 보았고, 특히 장애에 굴하지 않고 언제나 당당했던 훌륭한 싱어 ‘준희’의 이야기와, 그의 곁에서 힘이 되어준 동료들의 이야기에 몹시 감동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록밴드 블랙웨일즈의 결성부터 성장까지의 이야기를 영화화하고 Whale’s Song을 OST로 삽입하고 싶다는 의견을 주셨습니다. 러셀 루소는 이 프로젝트가 반드시 성사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답신을 기다리겠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장범수의 머릿속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닷속에서 헤엄치며 잘 놀고 있었던 고래들에게 ‘자 이제 어디 한번 새처럼 하늘을 날아 보실까?’라고 대뜸 주문을 한다고 해서, 그런 얼토당토않은 소리가 한 번에 쉽사리 이해가 될 리 없었다.

“우리 얘기를… 영화로… 만든다고…? 러셀 루소가…?”

그래서 이미 세 번인가 한 소리를 또 하며 허공을 향해 되물을 따름이었다. 이우영은 어휴, 하며 이마를 짚었다.

*

그 시간 제준희는 기획실에서 배재민과 놀고 있었다. 배재민으로부터 호신술을 한 가지 전수받은 준희는 날카로워진 눈매를 번뜩이며 입을 앙, 다물고서 앞쪽으로 팔을 쭉 빼 장전을 했다. 그리고 “촤핫!” 하면서 제 등 뒤에 서있는 배재민의 배를 팔꿈치로 쿡! 찍었다. 준희로부터 회심의 공격을 받은 배재민은 그저 씩 웃을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의욕만 충만한 계란으로 바위 치기 공격에 빵 터진 송여진은 학학대며 웃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더니만 한갓지게 놀고들 있는 것은 아니고, 리얼리티 예능 ‘맛있는 음악 여행(가제)’의 제작 미팅을 위해 방송국으로 가기 전에 잠시 대기하는 중이었다. ‘맛있는 음악 여행’은 블랙웨일즈 멤버들이 전 세계 각국을 돌며 길거리 버스킹을 하고 그러는 와중에 각국의 맛집을 찾아 ‘먹방’을 하는 콘셉트로 제작될 예정이었다. 멤버들은 처음 기획 의도를 듣고 출연 제안을 받았을 때 몹시 흥분했었다. 아마도 달리는 콘서트의 세계판이 될 터인데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특히 장범수는 홍보비 일 원도 안 쓰고 방송국 제작비로 다 해 먹을 수 있다는 점을 가장 좋게 생각했다. 그랬다가 멤버들로부터 속물 취급을 받았다.

어쨌든, 대기하며 놀다가 말고 기획실 건너 사무실에서의 수선스러운 웅성거림을 듣게 된 준희와 재민과 여진도 무슨 일인가 싶어 나와 보았고, 매니지먼트 사무실 문틈으로 고개를 쑥 내밀었다. 163cm의 여진과 176cm의 준희 그리고 190cm의 재민이 겹쳐 서서 들여다보고 있으니 마치 세로 모양 신호등 같았다.

“무슨 일이야?”

“왜들 그래?”

신호등답게 차례를 지켜 묻고 있는 송여진과 배재민은, 그 소리에 돌아보는 네 사람의 얼이 빠진 얼굴을 보자 겁이 덜컥 났다. 또 뭔 사고가 생겼는가 보다 싶어서 말이다. 한동안 잠잠하다 했는데 또 사회면에 가는 건가? 그런 생각에 바짝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입은 네 개나 되는데 대답이 늦자, 중간 신호등 준희도 물었다.

“범수 형? 민찬 형? 무슨 일 있어?”

그때까지도 여전히 머릿속이 꼬인 상태인 범수가 대답했다.

“그… 우리… 새 될지도 모르겠다…?”

“뭐어?”

“뭐야?”

여진과 재민이 동시에 인상을 푹 쓰며 되물었다.

국내 가요계 정상 정도가 아니라, 어쩌면 세계 무대에서 날아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뜻으로 한 소리인데, 하필이면 ‘완전히 망했다’라는 뜻의 은어와 닮아있었던 것이 문제였다. 배재민과 송여진이 시간 차 없이 거의 동시에 소리쳤다.

“뭐, 뭐야! 무슨 일인데!”

“왜 새가 됐는데!”

아무래도 뭔 일이 났는가 보다 싶긴 했지만 그동안 하도 큰일을 많이 겪어서 이제 별로 걱정도 되지 않는 준희는 그저, 소리가 나는 쪽으로 눈알을 굴리면서 이쪽을 봤다, 저쪽을 봤다, 하고 있을 뿐이었다. 확실히 여기 모인 일곱 중 제일 흔들림 없는 타입이었다.

거대한 군함이 일으키는 거친 파도에도 굴하지 않았으며, 절대 녹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커다란 빙벽을 앞에 두고도 물러서지 않았던 고래들은 이제, 자유로운 새가 되어 하늘 높이 날아올라야 할지도 모르게 되었다. ‘눈먼 고래의 노래’ 가사 중 한 구절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모진 바람 불던 날 찾아온 바닷새가 말하길,

너도 날개가 있구나 그럼 우리 함께 날자’

아무래도, 아늑한 바닷속에서 헤엄치고 놀기에 딱 좋은 정도였던 지느러미를 좀 더 갈고닦아야 할 모양이었다.

16783868233414.jpg Black Whales’ TMI

누군가는 김칫국 마시는 거 아니냐고도 했지만, 한 수 앞을 내다보는 선견지명으로 한강 변 로얄층 아파트를 소유한 남자 장범수는 곧바로 원어민 영어 과외 교사를 물색했습니다. 이날 이후로 블랙웨일즈 멤버들과 블루오션 식구들은 혹독한 스피킹 훈련에 돌입했습니다. 머리 좋은 준희는 그럴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의외로 고등학교 진학과 동시에 책을 손에서 놓은 여민찬이 또 영어가 빨리 늘어서 다들 신기해했는데, 알고 보니 수백 곡씩 외우고 다닌 팝송 가사 덕분이었습니다. 굿모닝 팝스는 진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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