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로 코냑 한 병을 거의 혼자 다 마신 여민찬은 소파와 테이블 사이 바닥에 궁상맞게 주저앉아서 무릎에 팔꿈치를 괸 손으로 이마를 받치고 있었다. 그런 모양새를 하고 앉아서 주사를 부리고 있었다. 주사는 최악의 경우인 ‘했던 말 또 하기’였다.
“형이 뭔데 그러냐고… 형이 대체 뭐냐고… 고개 바짝 쳐들고 따지는데… 얼굴이 막… 겁나 예쁜 거야… 그렇게 예쁜 자식이… 제 일에 상관하지 말라고 바락바락 대드는데… 하아… 씨, 도저히 못 참겠더라고…. 미친놈…. 나 진짜 돌았나 봐….”
여민찬은 지금 이 비슷한 레퍼토리의 이야기를 이미 여섯 번째 하고 있었다. 사실은 지난번에도 그랬었다고. 고개 쳐들고 따지고 드는 녀석 얼굴이 예뻐서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했었다고. 그런데 그땐 이성이 이겼었다고. 참아 냈었다고. 그런데 이번에는 참지 못했다고. 정신 차려보니까 이미 해버리고 난 후였다고.
“그러니까 네가 매저라는 거야, 인마.”
장범수도 이 비슷한 대답을 여섯 번째 하고 있다. 처음엔 여민찬의 취향을 분석해서 길고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었으나, 여섯 번째 같은 대답을 해 주고 있는 지금은 앞뒤 다 자르고 결론만 툭 던졌다. 바락바락 따지고 든다고 해서 키스하고 싶어지면 그건 매저키스트라고.
“민찬이 취향이 그런 줄도 모르고, 이 자식한테 잘 보이려고 다정하게 굴었을 과거의 여자들이 그러고 보니 좀 안타깝다?”
배재민 또한 지금 한 말과 비슷한 성질의 이야기를 여섯 번째 하고 있었다. 그동안 너한테 다들 잘 보이려고만 했지 그런 식으로 할 말 다 해 가면서 따박따박 대든 상대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네가 여태껏 제대로 사랑을 못 해 본 것 아니겠냐고, 그런 말을 해 주었다.
어떻게 해 볼 생각이 있다고 한다면, 남자를 상대할 때 괜찮은 접근 방법이나 아니면 남자끼리의 연애 방법을 주제로 얘기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딱 잘라 가능성 전혀 없다고 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해 볼 생각도 없다고 하니, 이미 두 사람 만남부터 그동안 지내 온 사정까지 다 아는 세 사람은 지금 여섯 번 반복한 이 이야기만 끝없이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대드는 게 예뻐서 키스했고, 그러니까 너는 매저고, 그래서 여태 제대로 사랑을 못 한 거라고. 세 사람은 그 이야기만 무한 반복하고 있었다. 그것 외에는 따로 할 말이 없었다.
“무슨… 고양이같이 치켜뜬 눈에… 쌍심지를 화아악, 켰는데… 그러니까 눈동자 색이 더 예뻐… 막 반짝반짝반짜아아악… 하는 거야… 거기 홀린 건지… 도저히 못 참겠더라고….”
“그러니까 너는 매저라고, 인마.”
“아이고. 우리 준희가 민찬이 취향 존에 딱 스트라이크를 꽂아버렸구나?”
맞다고. 꽂았고, 제대로 꽂혔다고. 꽂힌 데가 지금 너무 아프다고. 그런 의미로 끄덕끄덕끄덕끄덕… 하면서 앞으로 점차 기울던 민찬은 결국 쾅, 하는 굉음을 내면서 테이블에 이마를 처박았다. 그러고는 미동이 없었다.
“아이고 저런.”
엄청난 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던 배재민이 안타까워해 주었고, 쯧쯧쯧, 하며 혀를 찬 장범수가 눈으로 본 그대로의 감상을 말했다.
“이마에 구멍 났겠는데?”
테이블에 이마를 처박은 채로 잠이 든 남자를, 인정이 넘치는 배재민이 소파 위로 끌어 올려놓았다. 덕분에 그나마 바닥이 아니라 소파 위에서 잔뜩 웅크려 불쌍한 모양새로 잠이 든 여민찬은, 다음 날 아침 엄청난 두통을 느끼고 깨어났다.
관자놀이가 짓누르듯이 아픈 건 숙취 때문이라 치고 이마는 대체 왜 아픈 걸까, 생각하면서 주섬주섬 일어나 앉았는데,
……
안방 침대 정리를 마치고 나오던 배재민과 막 씻고 욕실에서 나온 장범수가 동시에 여민찬의 시야에 들어왔다. 배재민은 상체 탈의 상태고, 장범수는 목욕가운만 입었다. 두통 때문에 애초부터 표정이 곱지 않았던 여민찬이 미간을 좀 더 좁히고 물었다.
“둘이 혹시….”
“아니야, 인마! 너 또 이상한 생각하지, 이 변태 자식아!”
반만 떴던 눈을 찌푸려 인상을 쓰면서 “아니면 말지 왜 소리는 질러….”라고 쉰 목소리로 중얼거린 민찬은 심하게 욱신거리는 오른쪽 관자놀이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그러고는 시계를 찾다가 테이블에 올려놓은 제 핸드폰을 열었다. 준희로부터 전화 온 것이 있나, 기대하며 열어 봤는데 없었다. 실망하여 툭 어깨를 떨구는데, 젖은 머리카락에 헤어 팩을 발라 오른쪽 어깨로 가지런히 모아 놓은 모양새가 제법 단아한 장범수가 까슬까슬한 어투로 제안했다.
“준희 데리고 있을 자신 없으면 여기로 보내.”
어젯밤, 전직 변호사라는 타이틀이 부끄러워질 정도의 궤변에 헛소리를 남발해서 급한 불은 간신히 껐지만 아무래도 이쪽 폭탄에는 아직 불씨가 남은 듯했다. 그런 상황에서 행여나 준희를 상대로 키스 이상의 것이 하고 싶어지거나 하면 큰일이니까 말이다.
합리적이라서 더 짜증 나는 장범수의 제안에 삐죽, 눈만 쳐들고 노려보던 여민찬이 쳇, 하고 혀를 차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대답했다.
“됐어. 두 번 실수 안 하니까 걱정하지 마.”
“음주 뺑소니 운전자들이 판사 앞에서 제일 많이 하는 변명이다 그거. 그리고 대개는 결국 재범을 저지르지.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거든.”
평소에도 그런 편이지만 오늘따라 더 얄미운 전직 변호사를 쏘아보던 민찬은, 입가를 꾹 눌러 다문 채로 욕실로 향했다.
*
외박을 한 민찬이 제 처지에 아주 걸맞은 모양새로 잔뜩 눈치를 보며 집으로 들어갔을 때, 준희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침실 문간에 선 민찬은, 대한민국 만세를 하고 잠든 녀석을 애잔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발뒤꿈치를 들고 들어갔다. 조심스럽게 팔을 뻗어 가슴 바로 아래까지 올라간 티셔츠를 내려 주었다. 그리고 다리 아래 둘둘 말려있는 이불을 펴서 팬티 바람인 썰렁한 하체 위에 덮어 주었다. 매일 밤 녀석이 잠들고 난 후에 하고는 했던 일이었다. 업어 가도 모를 지경으로 깊이 잠든 녀석을 한동안 바라보던 민찬은, 소리 없는 한숨을 한 번 쉬고 몸을 돌렸다.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나왔다.
지난밤 안주도 없이 퍼붓다시피 했던지라 속이 쓰렸던 민찬은 해동 슈퍼에서 콩나물 한 봉지와 말린 북어를 사 왔다. 원래는 즉석조리 북엇국을 사려고 했는데 ‘고딴 걸로 해장이 디야?’ 하며 등장한 해동 슈퍼 할머니가 콩나물과 말린 북어로 북엇국 끓이는 법을 묻지도 않았는데 알려 주셨다. 그래서 민찬은 전기밥솥에 밥을 안치고 전수받은 레시피대로 북엇국을 끓였다. 30분 뒤 밥은 다 되었고, 국물이 적당히 우러나 뽀얘진 북엇국의 불을 껐는데도 제준희는 일어나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서 3층 창틀에 기대 빈속에 담배 한 대를 태우다가, 눈이 마주친 행인과 꾸벅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고 돌아온 민찬은 작업실로 들어가 곡 수정을 시작했다. 최근에 준희와 눈만 맞으면 싸워 댔는데, 이 모든 싸움의 원인 제공자인 발정 난 개자식에게 화풀이한답시고 쓴 펑크록 곡이었다. 욕설이 잔뜩 들어간 가사를 붙인 다음에 준희가 SJ 미디어와 스카이미디어를 향해 분노의 샤우팅을 하는 그런 상상을 하면서 만들었다.
준희는 어젯밤 늦게 잠들었는지 해가 중천인데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참 아침잠이 많은 녀석이었다. 그게 무척 귀여웠는데, 오늘은 마냥 귀엽다기보다는 걱정이 좀 되었다. 혹시 어젯밤에 자신이 한 짓 때문에 잠을 못 이루고 뒤척거린 것은 아닌지, 아니 뭐, 확실히 그러지 않았을까 싶지만, 그래서 걱정이 되었다.
그런 이유로 작업실 문을 열어 놓고, 스피커 볼륨을 최저로 줄여 놓고, 헤드셋도 끼지 않은 민찬은 곡 수정을 하는 내내 문밖의 소리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사실 민찬 또한 밝은 대낮에 작업하는 스타일은 아니라서 별로 집중이 되지도 않고 있었다. 하지만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겠어서 곡 작업하는 척을 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더 맞았다.
그러고 있는데 정오를 훌쩍 지나고 한 시에 가까운 시간이 되어서야 침실 쪽에서 기척이 들렸다. 화들짝 놀란 민찬은 내려 두었던 기타를 얼른 끌어안고 뭔가를 쳤다. 앰프에 연결되지 않은 기타에서는 탁음만 들렸다. 지금 뭘 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아무거나 손닿는 대로 치는 척을 하다가, 멈추었다. 동작을 멈추어 소리를 죽이고서 방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온 신경을 기울였다.
욕실 문 여는 소리에 이어서 직직 슬리퍼를 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정적. 곧이어, 이제는 자주 들어서 아주 익숙한, 시원한 물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 귀여워.
눈썹을 시옷 자 모양으로 끌어 올리고 흐뭇하게 웃던 민찬은, 하다 하다, 소변보는 소리조차 귀엽다고 생각해버린 어떤 변태 같은 놈의 머리채를 쥐어뜯었다. ‘야 이 미친놈아! 이러다 범수 형한테 준희 뺏긴다!’ 하고 스스로를 협박했다.
볼일을 보고 난 후 욕실에서 나온 제준희는 티셔츠 아랫자락을 들추고 집어넣은 손으로 배를 북북 긁으며 거실을 가로질러 부엌으로 향하다가 말고 우뚝 멈추어 섰다. 멈추어 서서, 문이 반쯤 열려있는 작업실 안을 보고 있었다.
민찬도 슬쩍 눈동자를 틀어 방 밖에 선 녀석을 보았다. 잔뜩 뻗친 머리를 하고 안경을 쓴 녀석이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은 채 서 있었다. 여전히 팬티 바람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두 사람은 소리를 내지 않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로 대치했다.
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 먼저 말을 건 사람은, 여태껏 옷 속에 넣은 채로 멈추어있었던 손을 천천히 내리고 뺀 준희였다.
“형?”
안경을 쓰긴 했지만 시야가 흐린 준희는 데스크톱이 놓인 책상 앞에 앉은 물체가 움직이길 기다렸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움직이질 않으니, 한참을 지켜보다가 불러 본 것이다.
고개는 돌리지 않고 눈동자만 비튼 채로 지켜보고 있었던 민찬은 여태 몰랐고 이제 막 알았다는 듯이 빙글 몸을 돌렸다. 태연한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걱정하며 대답했다.
“어.”
형 맞다고 대답을 했는데도 다가오지 않고 빤히 바라만 보던 준희가 물었다.
“거기서 뭐 해?”
곡 작업하는 ‘척’을 했다. 그렇게 말할 순 없고.
“아니. 그냥. 다 했어. 밥 먹을래? 북엇국 끓였는데.”
“북엇국?”
…하며 되묻는 녀석의 눈썹 사이에 한 줄 주름이 졌다. 그러고 또 한참을 빤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새로 지은 밥과 북엇국에 김치. 소박한 밥상을 가운데 두고 식탁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민찬은 준희가 쓴 안경을 힐끔거렸다. 안경을 썼다는 것을 용서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했다. 지난번에 분명히 형 보기 싫어서 안경을 안 썼다고 했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보기 싫은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는 건가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밥 말은 북엇국이나 떠먹고 있는데, 막 일어나면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녀석이 언제나와 같이 국물이나 한두 술 떠먹어 보더니, 고개도 들지 않은 채로 물어 왔다.
“술 마셨어?”
“어? …어.”
괜히 북엇국을 끓였다고 후회하면서, 민찬은 솔직히 대답했다.
“윤미소랑?”
어젯밤 사태의 진화를 위해 잠시 동원되었던 윤미연이다. 하지만 더 이상 이 일에 개입시켜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아니, 걔 말고, 다른… 사람 만났어.”
“누구? 배가령?”
“…너는 말해도 몰라.”
“하.”
민찬은 수저질을 멈추었고 마주 앉은 녀석의 안색을 살폈다. 코웃음을 팡 치고 있는 녀석의 얼굴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표정이 영 좋지 않은 녀석의 눈치를 보던 민찬은, 그러고 보니 아직 어젯밤의 일을 사과하지 않았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여태 밥 잘 먹다 말고 갑자기 붙어서 잘 떨어지지 않는 입을 가까스로 떼었다.
“어제… 일은,”
“신경 안 써.”
제 말을 툭 자르고 들어온 쌀쌀맞은 소리에, 민찬은 가까스로 벌렸던 입을 다시 다물어야 했다.
아…. 그렇구나…. 신경… 안 쓰는구나….
어떻게 보면 다행이어야 하는 말인데, 왜 가슴을 쿡 찌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밴드를 계속 유지하고 싶고, 그래서 마음을 정리하기로 했고, 그렇다면 어제 일을 신경 안 쓴다는 것이 어쩌면 다행인 건데. 그 차가운 말이 왜 섭섭한 건지. 어째서 지금 가슴이 욱신거렸던 건지. 코끝은 또 왜 찡해지는 건지. 신경 쓰인다고 했대도 당황스러웠을 테지만, 신경 안 쓴다고 하니 또 되게 섭섭했다. 제가 지금 도대체 어쩌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국 안을 휘휘 젓기만 하던 녀석이 수저를 내려놓고 일어섰다.
“그만 먹을래.”
‘뭘 먹었다고 그래. 더 먹어.’라고 하고 싶었지만 민찬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먼저 일어선 녀석이 욕실로 들어갈 때까지 국 안에 들어간 채로 멈추어있었던 수저를 다시 움직였다. 지은 죄가 있다 보니, 열 개여도 할 말이 없는 주제에 대형 사고나 쳐버린 쓸모없는 입안으로 국에 만 밥이나 쑤셔 넣었다. 넣긴 넣었는데 넘어갈 것 같지가 않았다. 준희와의 사이가 단단히 틀어진 것 같았다. 바로잡을 수 있을까,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억지로 삼켰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목구멍 아래에서 더 이상 내려가지 않는 것 같았다. 수저를 내려놓은 민찬은 꽉 쥔 주먹으로 명치를 꾹 눌렀다. 꽉 막힌 가슴이 답답했고, 좀 아팠다.
*
욕실로 들어간 준희는 뚜껑을 내린 변기 위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어젯밤의 일을 생각했다.
어젯밤에, 모형준 이사 일로 또 싸우다가 어깨가 잡혀 밀쳐졌는데 그게 서러워서 악을 쓰며 대들었다. 어디를 한 대 얻어맞은 것도 아니고 단지 밀쳐진 것뿐이었다. 하필 뒤에 신발장이 있어서 등이 부딪힌 타격감에 비해 소리가 너무 컸고, 그래서 감정이 더 격해진 것 같았다. 사실은 밀쳐진 것이 서러웠지만 그렇게 말하기는 어쩐지 쪽팔려서, 왜 욕하냐고, 왜 상관하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서 절대 울지 않으려고 눈에 힘을 주고 버텼는데, 그 얼굴이 참 고약했을 것이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에 아마 콧구멍도 벌름거렸을 것이 분명하다. 그랬을 것인데, 갑자기 입맞춤을 당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어 넋이 나가있는데 싸우다 말고 난데없이 입을 맞춘 사람이 이유를 말해 주었다.
‘남자 상대하는 게 얼마나 끔찍한 건지, 네가 잊어버린 것 같아서.’
이유가 영 이상했다. 보통 그런 이유로 키스를 하나? 물어보려고 했는데,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
그런 말을 남기고 훌쩍 나가버린 남자는 이후로 담배 한 대가 하니라 한 보루를 다 피웠을 정도의 시간을 기다려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후로, 평소보다 썰렁하게 느껴지는 침대 위에 웅크리고 앉아서 참 많은 생각을 했었다.
민찬이 형이 왜 키스한 걸까. 모형준 이사를 독대하겠다는 말에 화를 낸 이유는 뭘까. 범수 형이나 재민 형은 그렇게까지 화를 내진 않는데 왜 민찬 형만 화가 난 걸까. 화를 내다가 말고 키스를 하는 사람의 심리는 뭘까.
그런 것들에 대해서 고민해 보았다.
하지만 실상은, 답이 다 나와 있는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키스의 의미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키스는 좋아하는 상대에게나 하는 것이고, 섹스 전에 야릇한 분위기를 만들 때에나 하는 것이라고,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자를 좋아하고, 그동안 여자하고만 관계했던 사람이 왜 남자인 자신에게 키스를 했는지, 그게 의아했고, 그래서 제가 내린 답이 정답이 맞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민찬 형은, 나를… 여자들 좋아하듯이… 그렇게… 좋아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자 속이 좀 울렁거렸었다. 토할 것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위장이 있는 배 쪽이 아니라, 심장이 있는 가슴 쪽이 울렁거렸다. 웅크린 다리와 무릎을 감싸 안은 팔에서 힘이 좀 빠지는 것도 같았고, 덩달아 숨도 약간 차는 것 같았다.
민찬 형은 혹시 나하고… 여자들하고 했던 그런… 걸 하고 싶은 걸까…?
그런 질문을 던져 놓은 후에, 그렇다면 자신은 어쩌고 싶은 건가 생각해 보았었다. 능천과 채홍이 했던 행위에 자신과, 또 제게 키스하고 도망쳐버린 남자를 대입해 보았었다. 자신이 체구가 작으니 채홍 역을 했다. 발가벗고, 배를 붙이고 누워서, 제 위에 올라탄 남자가 딱딱해진 고추를 제 몸에 넣는 구체적인 행위를 그려보던 중에 불현듯,
‘하아, 준희야!’
…하고, 신음이 섞인 중저음의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머릿속을 스쳤다. 그리고 그 순간에 아랫배 쪽이 오싹하게 저렸다. 이미 웅크리고 있었던 몸을 더욱 바짝 웅크림과 동시에 발가락을 오그라트리면서 아랫입술을 쿡 물어야 했다. 이러다가 뭔 짓 하겠다, 싶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면서 삽입 직전인 머릿속의 상상을 치워버렸다. 그러고 난 후, 침대 위를 더듬어 핸드폰을 찾아 들었다.
폴더형 핸드폰을 열고 숫자 1번에 손가락을 올렸다.
……
그러고 가만히 고민하다가, 2번으로 옮겨갔다. 담배 한 대 피우고 온다고 하더니만 한 시간 째 감감무소식인 사람과 통화하기는 조금 겁이 났다. 방금 전 섹스 직전까지 갔던 사람의 목소리를 실제로 들어버리면 안 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범수 형과 통화를 하면서 마음을 좀 가라앉혀 볼 생각이었다. 이렇게까지 안 들어온다면 블루오션이나 범수 형 집에 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런데,
‘그 자식 화나면 성별 안 가리고 막 입 맞추는 버릇 있거든. 꼭지 돌면 눈에 뵈는 게 없나 봐. 입 닥치라는 뜻이겠지.’
그런 황당한 소리를 들어버렸다. 제 귀로 듣고도 납득이 안 돼서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따지려는데,
‘왜, 천재 소리 들어 가며 예술하는 인간들 중에 상식 밖의 또라이 짓거리하는 인간들 있잖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납득이 되는 동시에 맥이 풀려버렸다. 범수 형이 그런 말을 하기 전부터 천재형 예술가 중에 괴짜가 많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분명히 있었다. ‘눈먼 고래의 노래’를 비롯해 귀가 아니라 가슴을 울리는 노래들을 만든 남자도 천재가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천재치고 너무 정상적으로 온건하다 했더니만, 그런 문제가 숨어 있었던 모양이다.
키스는 좋아하는 사람에게나 하는 것이고, 섹스 전에 분위기 잡을 때나 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상식의 틀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천재고 괴짜라서, 화가 나면 이성을 상실한 나머지 아무에게나 입 맞춰버리는 사람도 할 수 있는 것이 키스였던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할아버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아침에 일찍 일어났었기 때문에 그때 당시 챙겨 보았던(정확히는 챙겨 들었던) 아침드라마에서도 그런 장면이 종종 나왔었다. 싸우다가 말고 난데없이 입을 맞추고 폭력적으로 안으면서 화풀이를 하는 그런 장면 말이다. 대체 왜 저럴까, 싶었던 그런 사람이 드라마 밖 현실 속에도 존재하는 모양이었고, 꽤 가까이에 있었다는 사실이 어이가 없었다. 그런 생각들을 하느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지금은 윤미소 만나서 호텔이나 갔을 거다. 요즘에 다시 만난다고 하는 거 같은데?’
그런 소리를 들어버렸다. 그렇다는데,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통화를 끝낸 후에, 처음과는 좀 다른 의미로 힘이 빠져버린 손에서 전화기를 툭 떨궈버렸었다.
그때 빠져버린 손아귀 힘이 여전히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변기 뚜껑 모서리를 잡은 채 늘어진 상체를 지탱하고 있는 양손이 가늘게 떨렸다.
다시 생각해 봐도, 범수 형에게 먼저 전화한 것이 천만다행인 듯했다. 안 그랬으면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한 채로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러버릴 뻔했다.
봐 보아야 희끄무레할 뿐인 화장실 벽타일 어딘가를 의미 없이 쏘아보고 있는데, 욕실 문 밖에서 달그락, 하며 그릇 옮기는 소리가 났다. 준희는 팔을 뻗어 세면대 레버를 올리고 물을 틀었다. 세찬 물소리 뒤에서 중얼거렸다.
“윤미소에 배가령 말고, 누가 또 있어?”
상대방에게 들릴 리가 없는 뒤늦은 쏴붙임이었다.
그래 놓고는,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양이 한심했던 준희는 다리를 끌어 올려 웅크린 무릎 위로 얼굴을 묻었다. 화나면 아무에게나 막 해 대는 그깟 입맞춤 한 번에 설레서 섹스하는 상상까지 하다가 꼴렸던 지난밤 자신의 모습이 무척 수치스러웠다.
짜증 나, 씨….
준희는 지금, 자신에게 괴짜 같은 짓을 해 놓고는 나가서 여자들이나 만나고 술이나 퍼마신 남자에게 몹시 짜증이 났다.
스카이하이 버프를 타고 정상 근처에 똑 떨어진 이후로 나름 열심히 산행을 한 블랙웨일즈의 활동은 길을 가로막고 딱 버티고 선 스카이미디어 암벽을 만나 제자리걸음 중이었다. 정상 아래만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그 와중에 비바람과 폭풍우는 잦아들 기미가 없었다. 온갖 스캔들과 구설수가 끊이질 않고 있었다. ‘여민찬 제준희 리얼커플설’ 같은 것은 애교였다. 그건 그저 팬들 사이의 놀이 정도로 치부되고 있었다. 실제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여민찬의 윤미소와 배가령 양다리 스캔들’과, ‘여민찬과 제준희의 불화설’이었다.
불화설이 불거진 이유는 디자인 플라자 야외광장에서 열린 행사 무대 때문이었다. 그 무대에서 여민찬이 무대 중간까지 손을 잡고 올라온 제준희의 어깨를 만져 주며 귓속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제준희가 여민찬이 쓴 곡인 온양야설을 부르는 중에 여느 때처럼 웃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대가 끝난 후에 악기를 정리하고 있는 여민찬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내려가버리다가 무대 끝에서 넘어진 제준희를 장범수가 부축했고, 놀라서 달려온 여민찬이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제준희를 노려보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사이가 좋지 않아 말을 섞기는커녕 겸상도 하지 않고 있는 유수 밴드나 아이돌 그룹들의 사례와 비교하자면 얼토당토않은 이유였다. 하지만 그간 실과 바늘, 팬티에 고무줄, 파전에 막걸리, 해 싸며 찰떡궁합 한 쌍으로 치부되던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신경전이 팬들의 눈에는 포착되었다.
디자인 플라자 무대 이야기를 시작으로 뒤이어, ‘그러고 보니-’라는 말로 운을 뗀 팬들이 비공개 커뮤니티에 올라왔었던 우월동 목격담을 언급했다.
집 앞에서 여민찬이 행인이랑 부딪힐 뻔한 제준희에게 고함을 질렀는데 그때 좀 무서웠다더라. 그리고 최근에 삼정 카드 러블리 데이 행사 끝나고 나서 집에 들어갔던 여민찬이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도로 나와서 차를 타고 가버렸는데, 그날 밤새 들어오지 않았다더라. 하면서 말이다.
이렇듯 두 사람 사이의 신경전을 예측할 수 있는 글들이 속속 올라오면서, 두 사람을 아끼는 팬들은 두 사람 사이에 뭔가 변화가 생긴 것 같다는 걱정의 글들을 뒤따라 올리기 시작했다.
이 무렵 블랙웨일즈 멤버들의 과거 사진도 함께 돌기 시작했다. 헐리웃 전쟁 영화 스틸컷인 줄 알았다고들 하는 배재민의 특전사 시절 사진이나, 한국증권법학회 당시 학회 회원 단체 사진 속에서 찾아낸 장범수의 수염 없는 말끔한 얼굴에 슬릭백 헤어 같은 것은 별문제 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제준희의 중학교 시절 사진이나, 여민찬의 고교 시절 사진은 문제가 되었다.
두꺼운 안경을 쓰고 앞머리를 길게 기른 제준희의 사진을 접한 사람들은 제준희가 왕따였고 학교폭력을 당했을 거라는 추측성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제준희의 학폭 피해자 설은 추측의 말이 퍼져나가는 과정에서 종국에는 기정사실이었던 것처럼 되어 있었다.
그리고 고교 시절 사진 속 여민찬은 교복 셔츠 단추를 풀어헤치고 넥타이는 매는 둥 마는 둥 한 데다가 총 다섯 개의 피어싱을 걸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 폭력 주모자였다’라는 근거 없는 소문이 돌았고 소문에는 점점 살이 붙기 시작했다. 사실이 아니다 보니 별로 해명할 생각 없는 여민찬 대신 고교 동창들이 나서서 이건 학교 축제 때 공연 후에 찍은 사진이고, 평소에는 이러고 다니지 않았다고 해명을 했지만 그럼에도 ‘학폭 가해자’ 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최종적으로 고3 때 담임 선생님까지 등판을 했다. 여민찬이 수업 시간에 잠은 좀 많이 잤지만 의외로 사고는 단 한 번도 친 적이 없다고, 그런 증언을 했다.
고교 담임의 등판으로 여민찬의 일진설은 일단락되었지만, 학폭 피해자설이 돈 제준희와, 학폭 가해자설이 돈 여민찬이 한 그룹 내에 있는 것을 두고 또 뒷얘기가 솔솔 나오고 있었다.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혹시 여민찬이 제준희를 괴롭히고 있는 것 아니냐, 그런 말들이 암암리에 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구설수들이 두 사람의 불화설에 더욱더 불을 지피고 있었다.
*
그리고 며칠 후 한 대학의 개교 기념 행사에 초대되어 갔을 때의 일 때문에 ‘여민찬 제준희 불화설’은 정점을 찍었다.
무대 아래에서 대기하다가 무대로 올라가는 스태프의 사인을 들은 준희가, 여민찬이 아니라 배재민의 손을 잡은 것이다. 당황한 재민과, 적잖이 놀란 범수, 그리고 충격을 받은 민찬은 잠시 말이 없었다. 배재민은 혹시 준희가 착각을 했나 싶어서 물었다.
“준희야, 나 재민인데?”
“알아. 오늘은 형 손 잡으면 안 돼?”
“어?”
“우리 한 팀인데, 누구 손을 잡든 관계없잖아.”
“그렇… 긴 하지만….”
…하면서 재민은 민찬의 눈치를 심하게 보았다. 열 받은 얼음 조각처럼 살벌하고 싸늘한 느낌으로 얼굴을 굳힌 여민찬은 먼저 무대로 올라가버렸고, 그날 준희는 배재민의 손을 잡고 무대에 올랐다.
이 일로 인해, 두 사람을 리얼 커플로 밀고 있었던 각종 커뮤니티는 그야말로 한바탕 뒤집어졌다.
*
결국 블랙웨일즈의 보컬 제준희와 기타리스트 여민찬의 불화설이 기사로 떴다.
「블랙웨일즈 멤버 간의 불화설 솔솔」
「블랙웨일즈, 갑자기 뜬 밴드의 수순 밟나?」
팬들이 커뮤니티에서 떠드는 이야기를 덥석 문 기자들이 흥미성으로 기사를 쓴 것이 그만 퍼지고 불어나 종국에는 「블랙웨일즈 해체 위기」라는 기사까지 나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기자들은 곡을 주로 쓰는 기타와, 프론트맨인 보컬 사이의 불화로 인해 해체한 국내외 유명 밴드의 사례를 예로 들었고, 불화의 이유는 여타 다른 밴드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팀 내 기여도나 인기에 따른 지분 분쟁 때문일 것이라고들 추측하고 있었다.
여민찬이 제준희를 좋아해서 키스를 해버린 관계로 팀 내 분위기가 지금 말도 못 한다, 그런 변명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블랙웨일즈는 언덕을 구르는 눈덩이같이 불어나고 있는 불화설에 대응도 하지 못하고 잠자코 있는 수밖에 없었다.
스카이하이 버프를 탈까 말까 결정하기 전에 장범수는 ‘니네 멘탈 세냐? 버틸 수 있겠냐?’ 물은 바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슬슬 본인의 멘탈 붕괴 한계선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밖에서 불어오는 태풍만의 문제라면 넷이서 어깨 잡고 똘똘 뭉쳐서 어떻게든 견디어 보겠는데, 어깨 잡고 뭉쳐야 할 녀석들 중 두 놈이 삐끗한 상태로 팀 내부가 흔들리고 있다 보니 버티기가 힘들었다.
이 지경인 속에서 기획실로 모두를 불러 모은 장범수가 거의 하루도 쉬는 날 없이 빼곡하게 행사가 적혀있는 스케줄러 위를 볼펜 끝으로 툭툭 치다가 말했다.
“블랙웨일즈는 다음 달 초쯤 해체 예정이야.”
그야말로 청천벽력의 말에, 기획실에 모여있던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입을 딱 벌린 배재민과 숙이고 있었던 고개를 번쩍 쳐든 제준희, 그리고 심장이 거의 떨어져 내리다시피 한지라 미동도 하지 못한 여민찬은 물론이고 송여진과 강동수, 이우영 또한 심히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엄청난 소리를 하여 모두를 놀라게 한 장범수가 피식 웃었다.
“기사에 따르면 그래. 블랙웨일즈, 이대로 가면 해체 수순 밟는다. 이르면 다음 달 초?”
“아- 씨.” 하며, 욕은 아니지만 욕처럼 들리는 소리가 동시에 이곳저곳에서 터졌다. 예상했던 반응이 재밌어서 조금 더 킬킬거린 범수가 여민찬을 향해 말했다.
“너랑 준희랑 안 친하니까 이런 기사가 나잖아 인마.”
“안 친하긴 뭐가.”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는 녀석을 지나 배재민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앉은 녀석에게도 말했다.
“준희, 아직도 화났어? 모형준 이사 못 만나게 해서?”
“화 안 났어. 형들이 내 걱정해서 판단한 건데. 뭐.”
준희는 좀 머쓱했다. 이제 생각해 보니 자신이 정말 엄청난 발언을 했다 싶어 반성하고 있었다. 대머리까진 아저씨를 독대하겠다느니 그딴 소리를 했다는 것이 참 믿을 수가 없었다. 아이돌과의 염문을 뿌리고 다니는 남자에게 화가 나서 맞불을 놓는다는 것이 그만 너무 나간 것 같았다. 그래서 민찬 형을 화나게 만들었고, 화가 나면 정신없는 와중에 버릇처럼 한다는 ‘그런 짓’까지 하게 만들었다. 그때 일을 또 생각해버린 준희는 짜증이 났고 남들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후에 인상을 썼다. 이제 제발 그만 좀 생각하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내가 회의 때 모형준 이사 얘기 꺼낸 바람에 민찬 형이랑 준희랑 싸운 거잖아. 그래서 나 되게 미안했어.”
회의 중 모형준 이사 문제를 들먹여 분위기를 냉각시킨 바 있었던 이우영이 모두에게 사과를 했다. 그럴 필요 없다고 고개를 저은 장범수가 인과관계를 정정했다.
“네가 미안할 건 아니지. 굳이 잘못을 따지자면, 여민찬 자식이 준희 일에 너무 예민하게 굴고 있는 것이 잘못이지.”
모두가 공감했다. 오죽하면 당사자인 여민찬과 제준희도 범수의 진단에 공감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고개를 끄덕이거나 하진 않았다.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저 자식은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 같으니 어쩔 수 없고.”
또다시 모두가 공감하고 있는 말을 중얼거린 범수가 민찬과, 요즘 들어 폭탄 사이 가드 역할을 어쩌다 보니 하고 있는 재민이 건너에 앉은 준희를 번갈아 보며 타일렀다.
“어쨌든 지금 두 사람 사이 애매한 것 팬들 눈에는 다 보이는 모양이니까, 하루라도 빨리 예전 관계 회복해 줬으면 좋겠어. 나나,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도 사실은 좀 불편해. 안 그래?”
송여진과 강동수, 이우영은 여민찬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고개를 끄덕였다. 불편하다고. 특히 강동수는 최근에 비하인드 영상으로 올릴 거리가 없어서 영 아쉬웠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가 다시 회복되기를 절실히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테이블 위에 깍지 껴 올려놓은 제 손만 보고 있는 준희와,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꽂고 비스듬히 기대앉아 테이블 어딘가에 시선을 두고 있는 민찬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끄덕이지 못했다.
두 사람은, 서로 관계가 회복되기를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절실히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만 하는 건지 도저히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예전처럼 행동한다고 했는데도 팬들 눈에는 이상하단다. 그 이유는 아마도 두 사람의 불편한 마음이 표정으로 다 드러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행동은 물론 표정까지 예전처럼 연기를 해야 한다는 건데, 그게 가능했으면 진작에 배우 했지. 마음이 예전 같지가 않은데, 어떻게 예전처럼 하라는 건지. 그 방법을 알 수가 없었던 두 사람은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마음이 불편했고 또 답답했다.
그날 밤.
홀로 씻으러 들어간 준희가 욕실 문을 잠그는 소리를 들은 민찬이 푹, 한숨을 쉬고 욕실 문을 두드렸다.
“제준희. 문은 잠그지 마.”
그러나 안에서 들려온 소리는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신경 꺼.”
또다시 커다란 한숨을 푹 내쉰 민찬은 곧장 담뱃갑을 쥐고 밖으로 나왔다. 집 앞에 있는 사람들이 개수를 세면서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줄담배나 피우며 뒤집어진 속을 가라앉혀 볼 생각이었다. 창틀에 팔을 걸치고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다가 말고, 문득 든 생각에 물었던 담배를 도로 쑤셔 넣었다. 그 길로 계단을 내려와 건물 밖으로 나온 민찬은 곧장 해동 슈퍼로 향했다.
*
잠시 후.
여민찬이 술을 잔뜩 사가지고 집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이 커뮤니티에 퍼졌고, 장범수와 배재민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장범수가 여민찬에게 전화해 우려에서 비롯된 잔소리를 했다. 너 인마 혹시 술 취해서 준희 덮치거나 하면 그땐 진짜 가만 안 둔다, 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민찬은 장범수에게 걱정 말라고, 나는 안 마실 거라고, 먹는 척만 할 거라고 했다.
장범수와 통화를 끝내자마자 이번엔 배재민이 전화를 걸어 왔다. 괜찮겠느냐고, 지금이라도 내가 그리로 가는 편이 낫지 않겠냐고, 의사를 물어왔다. 민찬은 배재민에게 절대 오지 말라고 당부했다. 준희랑 술 마시면서 허심탄회하게 대화해 볼 테니까, 끼어들지 말아 달라고. 배재민은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다가 속마음까지 죄다 털어놓는 것 아닌가, 걱정을 했지만 여민찬의 의사를 존중해 주기로 했다. 두 사람 문제니 두 사람이 해결하는 것이 맞았다.
이윽고. 싹 씻은 후에 티셔츠에 반바지까지 옷도 제대로 갖춰 입고 나온 준희는 욕실 입구에서 안경을 뿍뿍 닦아 바로 썼다. 그리고 침실로 들어가려는데, 테이블에 술상을 차려 놓고 앉아서 그런 준희를 빤히 보고 있었던 민찬이 불렀다.
“이리 와. 형이랑 술 한잔하자.”
“…….”
망설이고 있는 준희를 민찬이 설득했다.
“우리, 밴드 계속해야 하잖아. 그러려면 너랑 나랑, 풀어야지.”
맞는 말이었지만, 그럼에도 준희는 망설였다. 풀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나는 형을 좋아하고, 형은 여자를 좋아한다. 누구 한 사람의 마음이 빙글 돌지 않는 한 절대로 끝나지 않을 꼬리잡기였다. 이제껏 여자만 안았고 또 여자를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 부지불식간에 마음을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아무래도 제 쪽에서 마음을 돌려야 이 게임이 끝난다는 건 알겠는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랬다. 제 마음이라 해서 멋대로 조정할 수가 없었다.
준희는 요즘 잠들기 전에, 옆에 누워 자는 형이 젖꼭지를 만져 주면 기분이 어떨까, 그런 망상이나 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마음을 인지한 데다가 그 마음은 어째 걷잡을 수도 없이 무럭무럭 자라났고, 가끔이라기에는 빈번하게 능천이 아닌 민찬과 채홍이 아닌 준희가 등장하는 소설을 상상하기에 이르렀다. 이 지경이 되어버렸는데, 필요한 상황이라 해서 바로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이건 시간이 필요한 문제였다. 그리고 또, 이미 무척 좋아하게 되어버린 상대와 거리가 필요한 문제 같기도 했다.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데에 생각이 미친 준희는 침실 쪽으로 향했던 몸을 틀어 거실로 갔다. 오덕 빌라로 가든, 아니면 범수 형에게 신세를 지든, 당분간 떨어져 지내자는 말을 할 생각이었다. 결코 쉽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기에 술기운이 좀 필요할 듯했다. 그런 요량으로 제안을 받아들인 준희는 초록 병과 갈색 병, 아무래도 소주와 맥주인가 보다 싶은 것들이 바글바글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소주 마실래? 아니면 맥주?”
“…소주.”
초록 병 중 하나가 들렸고 까득, 뚜껑 여는 소리가 들렸다. 준희의 앞으로 다가온 초록 병이 기울어졌고 꼴꼴꼴, 잔 채우는 소리가 들렸다. 초록 병이 물러갔고, 뻗어온 손이 준희의 손등을 잡았다. 잡힌 손에서 힘이 쭉 빠지는지라 미간을 조금 구긴 준희는 잠자코 있었다. 준희의 손을 잡아 올려 작은 술잔을 감싸 쥐게 한 남자가 말했다.
“마시자.”
말로는 ‘렛츠 드링크 투게더’인데, 잔은 하나만 채운 것이 이상했던 준희가 물었다.
“형은?”
“아.”
그렇게 물어올 줄 몰랐기에 당황한 민찬이 잠깐 내려놓았던 병을 도로 들었다.
“난 병째로 마시려고.”
“아.”
준희는 민찬도 정말로 마시고 있는가, 귓가에 힘을 주고 소리에 신경을 쓰면서 소주 한잔을 주욱 비워 냈다. 술기운을 빌려 해야 할 말이 있긴 하지만 혼자만 취해서 추태 부리는 건 싫었다. 마실 거면 같이 마시고 싶었다.
“한 잔 더 할래?”
주량이 꽤 되는 녀석이 한 잔 가지고 취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는 민찬이 한 잔 더 권했고, 가만히 생각해 보던 준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제안했다.
“형도 잔에다 마셔. 병으로 마시니까 얼마나 마시는지 모르겠어.”
입만 슬쩍 댔다가 내려놓았던 민찬은 뜨끔했다. 용의주도한 자식 같으니. 하고 속으로만 불만을 표한 후 테이블 어귀에서 놀고 있었던 잔을 끌어왔다.
“어. 그래.”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답해 놓고 술병을 들어 잔을 반만 채웠는데,
“왜 조금 따라?”
눈만 잘 안 보일 뿐 귀 밝고 감 좋은 자식은 모든 걸 다 알고 있었다. 철두철미한 자식 같으니. 하고 속으로만 또 불만을 표현한 민찬은 내리려던 병을 다시 들어 한 잔 가득 채우며 말했다.
“아닌데? 다 채우려고 했어.”
그렇게 제 잔을 다 채워 놓고, 준희 앞에 놓인 빈 잔도 채웠다. 민찬이 잔을 들자 준희도 잔을 들었고, 민찬이 잔을 입가로 가져가자 준희도 그렇게 했다. 민찬이 고개를 꺾는 각도를 신경 쓰면서, 준희도 고개를 꺾었다. 마주 앉은 녀석이 그러고 있으니, 민찬은 도저히 마시는 척만 할 수가 없었다. 술 한 잔씩 털어 넣고 난 후 목구멍이 얼얼한 김에 두 사람은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형이, 너 많이 좋아하는 거 알지?”
흠칫 놀라며 미간을 좁히는 녀석을 보고 더 놀란 민찬은 서둘러 단서를 붙였다.
“동생으로서 말이야.”
“아…. 어.”
그제야 어깨를 떨구는 녀석을 보고 안심한 민찬이 술병을 들었다. 제가 좋아한다고 하니 금세 긴장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술이 좀 더 필요한 것 같았다. 제준희의 빈 잔에 술을 채우고, 또 녀석이 빤히 바라보고 있는 제 잔에도 술을 가득 채웠다. 민찬이 먼저 잔을 들면서 “마시자.” 했고 준희는 민찬이 진짜로 마시고 있는지 신경을 쓰면서 또 한 잔을 비웠다. 민찬도 한 잔을 다 털어 넣으면서, 그래도 자신이 술이 좀 더 세니까 먼저 취하진 않겠지, 그런 생각을 했다. 술잔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일전에 내가 그… 실수를 좀 하긴 했는데….”
“키스한 거?”
“어? 어.”
딸랑 두 잔 마신 것 가지고는 간에 기별도 없긴 하지만, 어쨌든 술기운을 빌려 에둘러 말하던 민찬은 훅 들어온 ‘키스’ 소리에 적잖이 당황했다. 당황했지만, 당황하지 않은 척하려 애쓰며 하던 말을 계속했다.
“내가 그날, 살짝, 제정신이 아니었거든. 대체 왜 그랬는지 후회스럽고.”
“후회해?”
“어? …어.”
“그렇구나.”
그렇게 말하면서 제준희는 코웃음을 쳤는데, 민찬은 그 웃음의 의미가 되게 헷갈렸다. 비웃는 건지, 아니면 안심한 건지, 둘 중의 하나일 듯한데, 명확한 뜻을 알 수가 없었다. 두꺼운 안경 너머로 눈동자를 숨기고 있어서 더 헷갈렸다. 비웃는 것이든, 안심해서 그런 것이든. 어쨌든 민찬이 해야 하는 말은 달라지지 않았다. 술 몇 잔 가지고는 입이 잘 안 떨어진다 싶었던 민찬은 준희의 빈 술잔을 채웠고, 제 술잔도 채웠다. 두 사람은 또 함께 잔을 비웠다.
“어쨌든 나는, 너하고 예전처럼 지내고 싶어.”
“예전처럼? 어떻게?”
이번에는 코웃음을 치지 않았지만, 웃지 않고 말하니 그 말투가 좀 차갑다는 느낌도 들었다.
아닌가? 그냥 진지한 건가?
안경 너머로 표정이 가려져있는 녀석 덕분에 또 헷갈려 하면서 민찬은 하고 싶은 말을 골라 보았다.
“아니 뭐…, 네가 그래도 된다고 하면…, 예전처럼 네 옆에 앉고 싶고….”
그렇게 말해 놓고 민찬은 무척 창피했다. 준희가 배재민의 옆에 앉을 때마다 참 많이 속상했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긴 했는데, 제가 지금 한 말이 마치 초등학생이 하는 말 같았다. ‘나랑 짝꿍 할래?’와 별반 다르지 않은 거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이미 해버린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었기에 계속해서 말했다. 제가 뭘 하고 싶은지를.
“전처럼, 같이 노래도 만들고 싶고….”
준희가 작업실에 안 들어온 지는 좀 되었다. 이 또한 준희에게 그 짓을 해버렸던 그 시점부터였다. 아니다. 정확히는 그전에 모형준 이사 문제로 싸웠던 그즈음부터였다. 민찬은 준희가 옆에 있지 않으니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기타를 잡아 보아도 바깥에 있는 녀석만 신경 쓰게 되고 그러는 중에 머릿속은 마치 소파 밑 같았다. 전반적으로 컴컴했고, 쓸모없는 먼지만 굴러다녔다. 어쩌다 쓸모 있는 건가 싶은 것도 고작 십 원짜리 정도였다. 준희와 싸운 이후로 민찬의 곡 작업은 전혀 진도가 나가질 않고 있었다. 기타를 들고 뭔가 쳐 보려고만 하면 시끄럽고 무거운 리프들만 쏟아져 나왔다. 지금 민찬의 속마음이 그랬기 때문이다.
“또….”
전처럼 남들 눈치 안 보고 만지고 싶었다. 무대 시작 전에 어깨나 목덜미를 잡고 눌러 주거나, 귓가에 입술을 붙이고 귓속말도 하고 싶었다. 뒤에서 끌어안고 기타를 가르쳐 주거나, 커다란 패딩 안에 함께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면서 녀석의 머리에서 나는 체향이 살짝 섞인 향긋한 환경호르몬 냄새도 맡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준희의 손은 자신만 잡고 싶었다. 배재민이 잡는 건 싫었다. 정말 싫었다.
그런 말을 일일이 다 했다가는 제준희가 또다시 접근 금지 명령을 내릴 것만 같았기에, 민찬은 그런, 이제 생각하니 참 변태 같은 짓거리들 외에 또 뭐가 하고 싶은지 생각해 보았다. 그러느라 말미를 좀 끄는 사이, 제준희가 빈 술잔을 잡는 것이 보였고 민찬은 얼른 병을 들어 채워 주었다.
“형도.”
“어.”
민찬은 제 잔도 가득 채웠고 두 사람은 또 술잔을 기울였다. 뜯어놓은 과자 봉지에는 손도 대지 않고 연거푸 몇 잔을 마셨더니, 귓가에 뜨끈한 기운이 돌긴 했다. 하지만 여전히 정신은 말짱했다. 제준희도 그럴 터였다. 정신 말짱할 것이 분명한 녀석이 “한 잔 더 줘.” 했고 민찬은 얼른 명령에 따랐다. 두 사람은 또 한 잔씩을 비웠다. 비운 잔을 내려놓고 만지작거리던 준희가 말했다.
“나는 그게 첫 키스야.”
“어?”
제정신인 녀석이 한다는 소리가 무척 놀라웠던지라, 민찬은 일없이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은 그때 일을 입에 담기도 힘들어 ‘그 짓’, ‘그때 일’ 하며 얼버무렸는데, 제준희는 아까도 ‘키스’라고 정확한 명칭을 입에 담더니, 이번에도 또 그러고 있었다. 누차 느끼는 거지만 참 대단한 녀석이었다.
“나는 그게 첫 키스인데, 경험 많은 형한테는 그냥 실수고, 후회할 짓이고. 그렇다는 게 나는 화가 나.”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던 민찬은 고개를 숙였고, 그 속에서 “미안.” 하고 조그만 소리로 사과했다. 듣고 보니 화가 날 법도 했다. 소중히 아꼈… 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첫 키스가 그렇게나 얼렁뚱땅 지나가버렸으니 말이다. 자신이야 물론 첫 키스, 첫 경험, 그런 것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다 보니까 녀석이 하는 말에 백 퍼센트 공감할 순 없었지만, 무슨 뜻인지 대강 이해는 되었다. 어쨌든 결론적으로는 여자랑도 해 본 적 없는 키스를 남자한테 당해서 화가 난다는 뜻인 것 같았다. 미안했다. 미안한 한편, 하지만 그때 한 것이 사실 키스는 아니지 않나, 그냥 좀 묵직한 뽀뽀였지 않나, 그런 생각에 약간 억울해하고 있는데, 준희는 또 술잔을 내밀었고 민찬은 얼른 술병을 들어 잔을 채워 주었다.
“형도.”
왜 이 자식이 꼬박꼬박 상대방의 음주량까지 신경을 쓰는 건진 모르겠지만, 지금 빌고 있는 입장에서 해 달라는 대로 해 줄 수밖에 없었던 민찬은 빈 병을 내려놓고 새 병을 땄다. 까득, 소주병 따는 소리를 유심히 듣고 있는 녀석 눈치를 보면서 제 잔도 가득 채웠고 두 사람은 또 가득 찬 소주 한 잔을 비웠다.
“만약, 형하고 싸운 사람이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었으면, 그게 범수 형이나 재민이 형이었으면, 형은 그 사람들한테 키스했을 거잖아. 나는 그것도 화나.”
민찬은 커다란 한숨을 쉬었다. 그럴 일은 결단코 없지만, 이미 그렇다고 알고 있는 녀석에게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민찬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을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인 준희는 흐음, 하며 어깨가 툭 떨어질 정도의 공격적인 한숨을 내쉬고는 또 잔을 내밀었다.
이 녀석 너무 많이 마시는 것 아닌가, 싶었지만 죄지은 형 입장에서 이래라저래라 잔소리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되는지라, 민찬은 잠자코 술을 따랐다. 이번에는 ‘형도’라고 하기 전에 알아서 제 술잔도 가득 채웠다. 민찬도 지금 술이 필요했다. 두 번이나 ‘화가 났다’라고 얘기하는 녀석과 화해할 수 있을까, 예전처럼 지낼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고 그래서 속이 답답했다. 한 잔씩을 비웠는데, “한 잔 더 줘.”라고 하는 바람에 주저하다가 한 잔을 더 따랐고 연달아 두 잔을 마시고 탁, 소리가 나도록 잔을 내려놓으면서 손으로 입술을 훔친 준희가 말했다.
“나는, 형이랑 예전처럼 지내는 거, 안 될 것 같아.”
그 말에 민찬은 제 가슴속에서 뭔가가 쿵, 하고 떨어지는 느낌이 들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한 잔 더 재촉해 얻어 낸 술잔을 홀랑 꺾어 단숨에 비워버린 준희는 쉬지 않고 민찬의 마음을 공격했다.
“나는 그게 첫 키스인데, 형한테는 그냥 실수였다는 게 화가 나.”
아까 했던 말 같은데, 싶었지만 민찬은 잠자코 있었다. 얼마나 화가 나면 몇 번씩이나 강조해서 말할까 싶었다. 하지만 역시 다시 생각해 봐도 첫 키스를 강탈했다는 식의 발언은 좀 억울한 것 같기도 하고. 그 와중에 빈 술잔을 턱, 내밀고 있는 녀석의 잔을 채워 주고 난 후 제 잔도 채웠다. 두 사람은 또 연거푸 몇 잔을 비웠다.
“형한테는 그냥 후회할 짓이라는 거잖아. 나는 그게 첫 키스인데.”
“미안해….”
솔직히 말하면, 알았다 인마 그만해라, 하고 싶었지만 민찬은 그 또한 참았다. 변명 따위 일절 하지 않고 사과의 말만 반복하면서 그저 화풀이를 들어주었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은 또 몇 잔을 비웠다.
“이 사람 저 사람한테도 다 하는 짓을 나한테도 막 했다는 게, 나는 너무 화가 나. 나는 그게 첫 키스인데.”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고 있는 녀석의 말을 듣고 있자니 화가 난 포인트가 약간 헷갈리는 것도 같았지만, 민찬은 지금 깊게 생각해 볼 수가 없었다. 민찬도 지금 소주를 두 병 이상 마신 상태였다. 제준희가 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았으면 아마도 여민찬이 반복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행히 아직 주사 부릴 정도로 취하지 않은 민찬은 거듭 사과했다.
“미안….”
“씨. 미안하다면 다야? 나는 그게 첫 키스인데!”
아니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 싶었지만 그렇게 따져댈 수 있는 입장이 아닌 민찬은 아랫입술을 꾹 물어 잡고 그저 조용히 있었다. 사과하는 것도 싫다는 건데, 그러면 이제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민찬이 그러고 있는 사이 준희는 팔을 뻗어 허공을 휘젓다가 술병을 낚아챘고 제 잔에 따르려다 말고 그냥 병째 들고 마시기 시작했다.
“야. 좀.”
술병을 빼앗지는 못하고 그런 말로 소심하게 작작 좀 마시라는 뜻은 내비칠 수밖에 없었던 민찬은 괜히 술 마시자고 했나, 후회를 좀 했다. 단단히 화가 난 듯한 녀석에게 부드러워진 분위기에서 제대로 사과하고 싶었던 것뿐인데,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듯했다.
거의 다 비워버린 술병을 툭, 내려놓은 제준희가, “씨.” 하더니 엉덩이를 들었다. 그러고는 무릎으로 몇 걸음 걷다가 휘청, 하더니만 손으로 바닥을 짚고는 이제 엉금엉금 기기 시작했다. 휘청할 때 반사적으로 뻗었던 팔을 아직 내리지 못한 민찬은 엉금엉금 기기 시작한 녀석을 걱정스레 지켜보았다. 많이 취한 듯 보이는 제준희는 개처럼 기어서 테이블을 돌았고 맞은편에 앉은 여민찬에게로 다가왔다.
와, 준희는 취하면 개가 되는구나. 근데 이러다 한 대 치면 어떡하지?
공포 영화의 한 장면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새로 비척비척 기어서 다가오는 녀석을 보며 민찬은 그런 걱정을 잠시 했고, 한 대 쳐서 풀릴 것 같으면 차라리 때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동시에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걱정으로 들었던 팔을 서서히 내려놓았는데, 민찬의 근처까지 다가온 녀석이 민찬의 양반다리 중 왼쪽 무릎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휘청거리고 있는 녀석을 지지하려고 애매한 위치에 들려있는 민찬의 팔뚝을 잡았다가 놓은 준희가 민찬의 어깨를 잡았다. 민찬의 어깨를 양손으로 눌러 지지하고 무릎으로 일어선 준희는 적잖이 당황하여 올려다보고 있는 민찬을 내려다보다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형도 한번 당해 봐.”
그러고는 민찬의 관자놀이를 양손으로 꽉 움켜쥐고는 공격적인 속도로 얼굴을 내렸다. 콱 부딪힌 입술 너머 앞니가 얼얼할 정도로 세게 입을 맞추었다.
민찬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차라리 주먹으로 한 대 치지. 어금니 악다물고 한다는 소리가, 너도 한번 당해 봐, 였다. 그러더니 제준희는 주먹이 아니라 얼굴로 들이받았다. 입술로 있는 힘을 다해 들이박는데, 민찬은 부딪힌 입술이 아니라 저 아래 가슴이 욱신욱신 아팠다. 그때 그 입맞춤이 얼마나 싫었으면 너도 한번 똑같이 당해보라면서 제게 이런 짓을 하는지. 막 씻고 나온 녀석에게서 확 풍겨온 보디워시 냄새가 제 것과 똑같아서, 그래서 마음이 더 아팠다.
그런데 어쩌냐, 준희야. 나는 너처럼 싫지가 않은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공격에 가까운 입맞춤 덕분에 생긴 가슴의 통증을 견디고 있자니, 막 쑤셔 넣었던 술기운과 함께 저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것이 있었다. 오기였다. 사람 좋아하는 게 죽을죄도 아니고, 씨. 민찬은 그런 생각이 들어버렸다. 입술 좀 맞췄다고 몇 날 며칠 화를 내고 있는 녀석에게 섭섭한 감정이 불쑥 치밀었다. 민찬은 아플 정도로 제 입술을 짓누르고 있는 녀석의 머리를 두 손으로 잡고 떼어 냈다.
“내가 전에 한 건, 키스가 아니야.”
“뭐?”
민찬에게 양 뺨이 잡혀 볼이 찍 늘어난 준희가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되물었고, 민찬은 양손으로 잡은 얼굴을 끌어내리며 답을 해 주었다.
“키스는 이거지.”
그런 말을 남긴 민찬은 당황한 나머지 헤 벌어져 있는 입술 사이를 벌리고 혀를 밀어 넣었다. 흑! 하고 놀란 숨을 들이켜면서 제 관자놀이를 아프게 꼬집어 움켜쥐는 녀석의 머리를 지지 않을 정도의 악력으로 꽉 움켜잡은 후에 혀끝을 더욱 깊숙이 밀어 넣었다. 이것이야말로 강제추행이었다. 억지로 하는 키스였다. 그걸 민찬도 모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제 얘랑은 진짜로 끝났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 안타까워 죽겠는데, 첫 키스 강탈했다고 따지는 녀석에게 화도 좀 나고, 그런 것에 화가 나는 자신이 하찮게 느껴져 심히 짜증도 났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인 와중에 ‘아무리 섭섭하고 화가 나도 이건 진짜로 하면 안 되는 건데.’ 그런 생각이 또다시 들긴 들었다. 하지만 연속으로 들이부었던 술기운이 슬슬 올라오기 시작한 관계로 사고가 제대로 되지 않는 민찬은,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너무나 좋아하고 있는 녀석의 입술 사이를 가르고 깊숙이 혀를 집어넣는 순간에 아래로 퍼진 만족감은 금세 성감으로 바뀌고 있었다. 취한 것이 분명한 민찬은 본능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 어디 한번 제대로나 빨아보자고 입술을 벌리는데,
“흡!”
민찬은 안와로 부딪혀 오는 딱딱한 물체 덕분에 미간을 구기면서 한 김 새나간 신음을 삼켜야 했다. 눈가를 아프게 때린 후에 얼굴을 꽉 짓누르고 있는 것은 준희의 안경이었다. 아니, 안경이 문제가 아니라, 제준희는 안경이 그 지경이 되도록 얼굴과 입술을 바짝 붙여 오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민찬이 밀어 넣었던 혀를 입술로 꽉 조여 물었다가 쭉 소리를 내며 놓아준 녀석이 이번에는 민찬의 혀를 제 혀로 밀면서 입속으로 깊숙이 밀어 넣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 자식!
이번엔 민찬이 당황했다. 당황한 건 당황한 거고, 적극적으로 키스에 응해 오는 정도가 아닌 녀석이 전투적으로 빨아대기 시작한 통에 거기에 맞춰 혀와 입술을 움직이고 있는 민찬은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맞닿은 혀를 비틀어 얽으면서 크게 벌린 입술을 맞물리고 쭈욱 빨았다. 빨아올리느라 거리가 멀어지기가 무섭게 다시 내민 혀를 맞부딪히고 더욱 거세게 빨아올렸다. 키스가 처음이라고 화를 냈던 녀석이었는데, 민찬도 마찬가지였다. 키스가 처음은 아니지만 이런 키스는 처음이었다. 이렇게, 한 삼 일 굶었다가 맞닥뜨린 생고기라도 뜯어 먹는 듯한 느낌의 게걸스러운 키스는 난생처음이었다.
무릎을 꿇고 서서 위에서 찍어 누르고 있는 준희가 안경이 비뚤어지도록 들이대고 있다 보니 점차 뒤로 밀린 민찬은 소파에 등을 기대고 눕다시피 해버렸다. 민찬이 뒤로 넘어가는 통에 덩달아 비스듬해졌던 준희의 몸이 앞으로 기우뚱 기울었다. 그걸 느낀 민찬은 뺨과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내리고 뻗었다. 준희의 허벅지를 잡고 끌어서 제 위에 아예 올라앉도록 만들어 놓았고, 그러는 사이에도 멈추지 않았던 키스를 계속 이어갔다.
민찬의 다리 위에 올라앉아 편한 자세를 잡은 준희는 더욱더 맹렬하게 빨아 댔다. 그리고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민찬은 이제 준희가 혀와 입술을 움직이는 대로 맞춰 주기 시작했다. 한쪽은 적극적이고 다른 한쪽은 노련했다. 처음에 엉망진창으로 엇나가던 키스는 이제 본격적으로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혀를 맞대고 얽었다가 입술을 오므려 쭉 소리가 나도록 빨고, 다시 혀를 맞대고 얽었다가 또다시 양 뺨이 움푹 파일 정도로 힘주어 빨았다. 이쪽저쪽을 오가면서 한데 섞인 타액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찰나의 순간 외에는 계속해서 서로의 입술과 혀와 체액을 빨고 삼키고 탐했다.
뜨거워진 콧김이 훅훅 섞였다. 거칠어진 숨소리는 신음에 가까웠다. 젖은 살덩이가 붙었다가 떨어지고 또 붙었다가 떨어지는 외설적인 소리가 이미 한껏 흥분한 두 사람을 더욱더 흥분시키고 있었다. 빠르게 뛰고 있는 두 개의 심장에 가속도가 붙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움직인 손들이 상대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고, 허벅지에서 엉덩이를 쓸고 허리로 올라갔던 민찬의 손이 가운데로 파고 들어가 준희의 다리 사이를 만졌는데,
어… 딱딱…
…하다고 느낀 그 순간에 정신이 번쩍 난 건 민찬뿐만이 아니었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입술을 물린 준희는, 여태껏 민찬의 머리를 엉망으로 헝클이고 목덜미와 귀를 오가며 정신없이 만지고 주물러 대고 있었던 손을 내려 어깨를 잡아 밀었다. 편하게 올라앉아 있었던 다리 위에서 떨어져 내려오자마자 엉덩이로 뒷걸음질을 치다가 말고 헉! 하며 당황한 숨을 삼켰다. 잔뜩 발기해 팽팽하게 일어선 제 바지 앞섶을 손으로 잡아 가리고는 얼른 몸을 뒤집었다. 그러고는 다시 아까의 개 모양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욕실을 향해서.
욕실 앞에서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몹시 당황한 데다가 술기운까지 퍼진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문턱에 걸려 넘어졌고, 욕실 바닥에 다시 개처럼 엎드려야 했다.
“하아 씨, 미치겠네….”
미칠 것 같은 심정을 한숨과 함께 입 밖으로 툭 터트린 준희는 한 손으로 변기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세면대를 잡아 몸을 일으켰다. 찬물이라도 맞을 생각으로 샤워기가 있는 쪽을 향해 손을 뻗는데 뒤에서 덜컥 팔목을 잡는 것이 느껴져 눈을 부릅떴다. 샤워기 쪽을 향해 뻗던 준희의 팔목을 잡아 멈춘 것은 뒤따라온 민찬이었다.
“원래 다 그런 거야. 그냥 한번 빼, 준희야.”
잡아 내린 팔과 함께 준희의 몸을 뒤에서 끌어안은 민찬은 다른 한 손을 내려 준희의 바지 안으로 집어넣었다.
“흑!”
준희는 허리를 굽히며 쿡 터질 뻔한 신음을 꽉 다문 입속으로 삼켰다. 팽팽하게 늘어나 예민해진 살갗에 타인의 손이 닿는 것은 처음이었다. 손이 닿는 것도 처음인데, 발기한 살덩이를 움켜쥔 커다란 손이 이제는 혼자 자위할 때나 하는 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죽죽 잡아 훑고 있었다. 준희는 제 바지 안으로 들어와 성기를 감아쥐고서 흔들어 대고 있는 손의 손목을 쥐고 끌어내려 했다.
“내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나가.”
하지만 등 뒤에 달라붙은 남자는 손을 빼지 않았다. 손을 빼기는커녕 뒤에서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며 몸을 더욱 바투 밀착시키고 있었다. 그 자세로 귓가에 더운 숨을 두 번 불어넣은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 지금 취했어. 위험해. 형이 해 줄게.”
놓아줄 생각 전혀 없다는 의사를 확실하게 전달받은 준희는 더 이상 반항하지 않았다. 반항할 수도 없었다. 온몸에 힘이 풀려버렸다. 뒤에서 끌어안고 있지 않다면 당장에 주저앉아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에 세면대를 꽉 움켜잡았다. 뜨거운 손에 잡힌 채로 죽죽 소리를 내며 훑어지고 있는 성기에서 퍼지는 느낌이 말도 못 하게 좋았다. 혼자 해도 좋은 짓은 어째 남이 해 주니까 더 좋았다.
심호흡을 하면서 가빠진 숨을 골라 보던 준희는 하체에 번진 오싹한 느낌 사이로 불시에 치고 올라온 짜릿한 감각에 놀라 흑! 하며 몸을 움츠렸다. 극심한 쾌감이 등줄기를 타고 빠르게 올라가 머리를 뚫고 지나간 기분이었다. 머리끝까지 바짝 서는 쾌감 때문에 점점 더 몸을 둥글게 말고 있는데, 제 몸을 끌어안은 손이 바지 허리를 잡고 끌어내리는 느낌과 함께 뜨겁게 훑어지던 아래가 불현듯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둔탁하게 탁탁 울리던 마찰 소리가 한결 선명하게 들려왔다. 제대로 보이진 않지만 지금 제 성기가 밖으로 나왔다는 것을 확실히 알 것 같았던 준희는 치미는 부끄러움에 좀 더 몸을 말아서 숨기려고 했으나, 억세게 가슴을 끌어안은 팔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형, 이거, 이런 거, 하면, 흣, 안, 하아.”
“괜찮아. 가만있어 봐.”
귓가에 대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호흡도 실상 썩 곱지는 않았다. 준희 못지않았다. 전혀 안 괜찮은 것 같은데, 괜찮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사람의 빠르고 깊어진 숨이 귓가에 닿는 것을 느끼는 순간에 또다시 온몸을 관통하고 정수리를 주뼛 세우는 성감이 치고 올라왔다. 준희는 또다시 흡! 하고 입을 악다물며 몸을 움츠려야 했다. 그리고 그 순간에 참기 힘든 사정감이 찾아왔다. 당장 싸버리고 싶다는 갈망과, 싸면 쪽팔릴 것 같다는 염려 속에 갈팡질팡하던 준희는,
“참지 말고, 그냥 싸 준희야. 이미 줄줄 흐르고 있어.”
귓가를 훅 덮친 뜨거운 목소리가 하는 원색적인 말에 심하게 자극을 받아버렸다. 진저리가 쳐질 정도로 크게 지나간 성감을 이겨 내지 못한 준희는 결국 눈을 질끈 감으면서 둔부에 힘을 콱 주고 말았다. 젖은 성기를 훑느라 질척해진 소리 사이로 퓻! 소리를 내며 발사된 정액이 투두둑! 하며 욕실 벽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씨…. 소리가 왜 이렇게 크지…. 쪽팔리게….
그 생각 이후로 준희는 필름이 끊겼다.
욱신거리는 두통을 느끼고 이맛살을 찡그리던 준희는, 막 잠에서 깬 사람답지 않게 번쩍 눈을 떴다. 제 침대 위였다. 그런 것 같았다. 불이 꺼진 방 안에 해가 드는 느낌으로 적당히 밝았다. 정확하진 않지만 한낮인 것 같았다. 급히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런 것 같았다. 슬쩍 팔을 뻗어 옆자리를 만져 보았다. 정말로 아무도 없었다. 그제야 준희는 상체를 일으켰다.
“윽….”
양 주먹으로 지끈지끈한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소리 죽여 신음했다. 신음하다가 말고 여기저기 눈치를 보았다. 혹시 누가 있는 것 아닌가 하고.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준희는 침대 위를 더듬었다. 매일 안경을 두는 자리에 놓여있는 안경을 쓰려다가 말고,
이걸 누가 여기에 뒀지?
생각했다. 자신이 습관적으로 그 자리에 벗어 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자신이 안경 놓는 자리를 자신만큼이나 잘 아는, 이 집에 함께 사는 사람이 둔 것일 수도 있었다.
아무래도 후자일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준희는 아랫입술을 끌어 물었다. 지금 입고 있는 티셔츠도 어젯밤 입고 있던 것이 아니고, 지금 입고 있는 팬티도 어젯밤에 입은 것이 아니었다. 티셔츠 앞자락을 만지작만지작하다가 바깥 부엌 쪽에서 들리는 기척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
그 시간 민찬은 북엇국을 끓이고 있었다. 전에 보니 준희가 북엇국을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서 다른 해장국 레시피를 얻고자 해동 슈퍼에 다녀오려고 했는데, 집 앞에 계시던 분이 아무 말 없이 북어포와 콩나물 한 봉지를 내밀었다. 감사하다고 꾸벅 인사를 건네고 다시 들어온 민찬은 결국 콩나물 넣은 북엇국을 끓이고 있었다. 팔팔 끓여 뽀얗게 우러난 국에 콩나물을 집어넣던 민찬은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았다. 준희가 뻗친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서 있었다.
“일어났어?”
민찬이 그리 묻자, 준희는 대답 대신 안경을 벗었다. 그러고는 계속 뒤통수에 뻗친 머리를 만져 댔다.
그 모습을 보고, 민찬은 소리 없이 빙긋 웃었다. 안경을 벗는 것이 ‘꼴 보기 싫어서’라고 잠시 착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원래 알고 있었던 바대로, 준희는 잘 보이고 싶어서 안경을 벗는 것이었다. 단둘이 사는 집 안에서 잘 보이고 싶은 상대는 두말할 것도 없이 자신일 터였다.
귀여운 자식. 저거 귀여워서 어쩌지, 저거?
어젯밤 민찬은 취하지 않았다. 양주 한두 병을 죄 마셔야 겨우 취하는데, 소주 두세 병 가지고는 어림없었다. 다시 말해 민찬은 어젯밤 준희와 있었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그게 첫 키스인데, 형한테는 그냥 실수였다는 게 화가 나.’
‘형한테는 그냥 후회할 짓이라는 거잖아. 나는 그게 첫 키스인데.’
‘이 사람 저 사람한테도 다 하는 짓을 나한테도 막 했다는 게, 나는 너무 화가 나. 나는 그게 첫 키스인데.’
‘씨. 미안하다면 다야? 나는 그게 첫 키스인데!’
도대체 이 자식이 왜 이렇게 ‘첫 키스’에 집착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런 놈도 있으니 그런 놈도 있나 보다 하며 무작정 사과를 하긴 했지만 사실 화내는 포인트가 잘 와 닿지 않았다. 그런데,
‘형도 한번 당해 봐.’
그런 소리와 함께 준희가 먼저 입을 맞추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화내는 건 줄 알았다. 그런데, 오기가 생겨 혀를 한번 집어넣었더니만, 이후로 달려드는 기세가 무서울 정도였다. 그러다 흥분한 녀석은, 아래를 세웠다.
‘팬심인지 아닌지 구별하기는 쉽지. 가슴만 저리면 팬심이고, 아랫도리까지 같이 저리면 그건 연심이고.’
배재민의 이론대로라면, 저 녀석도 자신을 같은 마음으로 바라봤다는 뜻이 되는 것이었다. 녀석은 첫 키스를 빼앗긴 것에 화를 낸 것이 아니라, 그 첫 키스를 단지 ‘후회스러운 실수’였다고 치부해버린 것에 화를 낸 것이었다.
어젯밤의 일로 진심을 알게 되자, 안경을 벗고 서서 까치집을 매만지고 있는 녀석의 행동이 달리 보였다. 그런 행동들이 무척이나 귀여웠던 민찬은, 계속 보고 있다가는 자칫하면 큰 소리로 웃어버릴 것만 같았기에 다시 돌아섰다. 이제 콩나물 숨이 죽을 때까지 시간 들여 끓이기만 하면 되는 북엇국에 괜히 수저를 넣고 저으면서 말했다.
“북엇국 끓였어. 씻고 와.”
그렇게 말해놓고 슬쩍 돌아보니, 시키는 대로 욕실로 향하는 녀석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 귀여워. 미치겠네.
민찬은 가슴 앞자락을 꽉 움켜잡았다. 너무 귀여워서 심장이 다 아팠다. 어제까지만 해도 실연의 아픔으로 인해 만신창이었던 가슴에, 지금은 영 다른 느낌으로 무리가 가고 있었다. 이래도 아프고 저래도 아프고. 이러다가는 오래 못 살 것 같았다. 민찬은 그런 허튼 생각을 했다.
어젯밤 민찬은, 한 발 빼고 나니 축 늘어지는 녀석을 침실로 옮겨 놓고, 따뜻한 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새 티셔츠와 속옷으로 갈아입힌 후에, 막 죽은 시체처럼 깊이 잠이 든 녀석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준희야. 그동안 너도 나처럼 힘들었던 거야?
그런 생각을 하니 못내 안쓰러워서, 민찬은 자고 있는 녀석의 얼굴을 꽤 오랫동안 바라보았었다. 뻔히 보고 있는데도 보고 싶어서, 계속 보았다. 보고 또 보고, 또 계속 보다가, 잠들기를 아쉬워하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랬었는데, 아마도 너무 오래 본 모양이다. 대낮부터 맨정신에 헛것이 다 보이기 시작했다. 부글부글 끓고 있는 북엇국 속에 어젯밤 내내 바라보았던 천사 같은 얼굴이 둥둥 떠있었다.
중증이다 인마.
민찬은 제 상태에 대한 진단을 내려 놓고는 피식, 웃었다. 지금껏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배재민의 말이 맞는 듯했다. 아무래도 첫사랑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야이 씨.
싱크대 모서리를 한 손으로 짚어 삐딱하게 기대고 선 민찬은 수저를 쥔 손등으로 입을 가렸다. 제가 지금 한 생각이 영 창피하고 쑥스러웠던지라 자꾸만 벌어지는 입을 가리고 킬킬, 소리 죽여 웃었다.
*
스케줄은 오후 늦게 있었다. 하지만 준희는 씻는 김에 머리까지 감았고 그런 후에는 드라이기로 말리기까지 했다. 평소 같았으면 수건으로 대충 물기만 탈탈 털어 내고 난 후 돌아다녔을 것인데, 오늘은 좀 달랐다. 어느 정도 말려 차분한 머리를 만들고서 부엌으로 왔다. 식탁 제 자리에 앉아서 밑반찬 두어 가지가 놓여있는 곳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대접에 북엇국을 가득 담아 두 그릇을 들고 온 민찬은 준희의 앞에 먼저 놓아 주면서 말했다.
“뜨겁다?”
고개를 끄덕였으나 여전히 시선을 들지 않고 있는 녀석은 식탁 위를 더듬어 수저를 들고 북엇국에 담갔다. 한술 떠서 입에 넣다가 말고, 앗 뜨, 하면서 흠칫 어깨를 떨었다.
“얌마, 뜨겁다니까.”
뜨겁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불어서 식히지도 않고 홀랑 입에 넣어버린 자식을 짐짓 엄한 소리로 타이른 민찬은, 이제는 호호 불어서 조심조심 입에 넣고 있는 녀석의 정수리를 보다가 툭,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도 북엇국을 한술 떠서 입에 넣고는, 아 진짜 뜨겁네, 생각했다.
수저로 밥 반 공기를 떠서 국에 말아 넣고 한 수저 떠먹은 민찬은 대충 몇 번 씹어 삼키는 내도록 앞에 앉은 녀석을 관찰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국물만 연신 떠먹고 있는 녀석을 한눈팔지 않고 지켜보았다. 밥이랑 같이 먹으라고 할까 하다가, 원래도 아침밥 잘 안 먹는 녀석이 속도 안 좋을 터인 이 와중에 밥 생각이 날 리가 없었기 때문에 관두었다. 관두었지만, 그래도 계속 지켜보았다. 제가 끓인 북엇국을 호록호록 떠먹고 있는 녀석의 정수리를 보다가 물었다.
“혹시 어제 일 기억나?”
헐렁하게 쥐긴 했어도 내내 이어지던 수저질이 멈추었다. 대답은 곧장 나오지 않았다. 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던 녀석이 북엇국에 시선을 둔 채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민찬은, 기억 안 난다고 고개를 젓고는 또다시 호록호록 국물을 떠먹는 녀석의 정수리를 보며 조금 전 대답의 저의를 헤아려 보았다. 대답을 주저하던 그사이에 어제 일을 떠올려 본 건지, 아니면 어제 일이 생각난다고 할까 안 난다고 할까 갈등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이유야 뭐가 되었든, 생각 안 난다는 녀석에게 캐물을 생각 별로 없었던 민찬은 그저, “그렇구나.” 하고 말았다. 생각이 나건 안 나건 관계없었으니까. 자고로 취중 진담이라 하지 않았던가. 개가 될 정도로 취한 상태였긴 했지만 어쨌든 녀석이 남자를 상대로도 선다는 것을 알았다. 그랬으면 된 거다. 남자는 끔찍하다고 했던 녀석이었지만, 자신은 끔찍하지 않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 것 같았다. 그런 것도 모르고, 군필자 아니랄까 봐 신나게 삽질이나 하고 있었던 과거의 자신을 찾아가 아둔한 머리통을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사랑을 하면 멍청해진다더니, 제 꼴이 딱 그랬다.
준희와의 관계 진전에 대한 가능성을 엿본 후 자신감이 붙은 민찬은 머릿속으로 계략을 세웠다. 지난밤 일은 묻어 주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진짜로 필름이 끊겨 생각이 안 나는 것일 수도 있는데, 네가 나한테 먼저 입 맞췄고 키스하다가 발기해서 내가 대딸을 해줬다, 라고 하면 경악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만약, 생각이 나면서 안 나는 척하고 있는 것이라면, 아무래도 그런 것 같긴 한데,
아이 씨, 귀여워.
만약 그런 거라면, 진짜로 모르는 척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취중에 민망한 짓을 해 버렸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녀석을 곤란하게 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다.
아침부터 머리까지 매만지고 나와 굳이 안경도 안 쓰고 앉아있는 녀석,
…까지 생각하던 민찬은 수저를 쥔 손을 들어 손등으로 입을 막았다. 자꾸 웃음이 터질 것 같은 입을 막아 놓고 계속 생각했다.
제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고 있는 귀여운 녀석을 매 순간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다. 경악하게 만들거나 곤란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세웠으면 된 거다. 어젯밤에 세웠던 것 기억나냐 안 나냐, 하며 따질 필요는 없었다. 기억이 나건 안 나건 간에 녀석이 세웠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으니까 말이다.
흠, 하고 헛기침을 하면서 웃음을 참아 낸 민찬은 좋아서 잘 넘어가지 않는 북엇국을 수저로 헤집으면서 말했다.
“형 있잖아. 요즘에 여자 봐도 안 서.”
“큼!”
호로록, 하는 중에 들어버린 기가 차는 소리에 기도와 식도의 협동에 실패한 준희가 먹던 국물이 그만 기도로 넘어가버렸다. 쿨럭쿨럭 기침을 하고 있으니, 벌떡 일어선 민찬이 키친타월 한 장을 뜯어 왔다. 입을 막은 손 말고 다른 손에 키친타월을 쥐여 주었다.
“조심해 인마. 그러다 죽어.”
준희는 코로 나오기 시작한 북엇국을 닦아 내면서 제가 지금 들은 소리에 대해 따져 보았다.
여자를 봐도 안 선다고?
헷갈렸다. ‘여자’를 봐도 안 선다는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안 선다’라는 걸 말하는데 그냥 당연하게 ‘여자’가 붙은 건지, 그게 헷갈렸다. 아무래도 다시 확인을 해 봐야겠다는 생각에 코를 닦던 휴지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계속 숙이고 있었던 고개가 좀 아프다, 생각하며 물었다.
“안… 선다고?”
“어.”
상대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다 보니 말투에 집중을 하게 되는 준희는, 간결한 대답 속에 웃음기가 묻어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래도 민찬 형이 지금 웃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조금 약이 올랐다.
“담배 많이 피워서 그런 거 아냐?”
“그런가.”
그 대답에도 역시 웃음이 섞여있었다. 준희는 들었던 고개를 다시 숙이고 적당히 식은 국을 휘휘 저었다. 그런데 실제로 흥, 하고 한번 웃는가 싶더니 뒤이어 한다는 소리가,
“근데 또 설 때는 서.”
준희는 수저를 들고 목적 없이 움직이던 손을 멈추었다.
“전에 네가 물었잖아. 요즘에 뭐 보고 빼냐고.”
그랬다. 그때 들었던 대답도 기억하고 있다. 야동이나 그런 것 보고 뺀다고 대답했었다.
“사실은 나 야동 안 봐.”
그럼 뭐 보는데. 준희는 속으로 물어 놓고 한참을 기다렸지만 대답이 들려오질 않았다. 에이 씨. 속으로 신경질을 내며 결국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물어야 했다.
“그럼 뭐 보는데.”
“음. 뭐, 가끔은 책도 보고. 너랑 전에 읽던, 남자가능, 그거.”
띄어 읽기 이상하게 하지 마, 생각하며 삐죽 눈을 들었다가 금세 내린 준희는 그냥 “그래?” 하고 말았다.
“그리고 대부분은….”
‘너 생각하면서 빼.’ 그 말을 혀끝에 걸쳐 놓고. 민찬은 잠시 고민했다.
고백할까 말까.
민찬은, 어젯밤 일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녀석이 기억 안 난다고 잡아떼는 의도가 뭔지 궁금했다. 남자가 가능한 것에 대해 당황한 건지.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인 건지. 아직 그 정도로 자신을 좋아하는 것은 아닌 건지. 그렇다면 섣불리 고백했다가 역효과가 나는 건 아닐는지.
그간 준희와의 사이가 틀어지는 바람에 참 많이 힘들었던 민찬은, 그래서 결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준희와의 사이가 이 이상 벌어지는 것은 싫었다. 어색해지는 것도 싫었다. 그냥 터트려버리고 난 후 돌진하는 것이 오히려 빠를 수도 있다. 하지만 좀 돌아가더라도, 최대한 안전하고 편안한 길로 가고 싶었다. 준희의 마음이 확실해지면, 갈등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녀석이 제대로 결정을 하면, 그때 터트려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
생각이 많았던 민찬이 참 오래 말을 하지 않는 바람에 준희 쪽에서 그만 안달이 나고 말았다. 에이 씨, 궁금해 죽겠네. 생각하며 결국 물어야 했다.
“대부분은, 뭔데? 왜 자꾸 말을 하다가 말아?”
톡 쏘는 말투와 그에 어울리는 표정이 귀여웠던 민찬은 빙긋, 소리 없이 웃었다.
왜 나는 얘가 화를 내는 게 좋지?
범수 형 말마따나 진짜로 매저인가 보다, 생각하며 대답을 골랐다.
너 생각하면서 빼. 네가 노래하는 영상 틀어 놓고, 네 노래 들으면서 빼.
그렇게 말해버릴까, 생각하다가 민찬은 또 웃었다.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았다. 아직은 말이다.
“대부분은….”
뭘 보고 뺀다고 할까. 북엇국에 떠있는 네 얼굴 보고 뺀다고 할 수도 없고. 적당히 둘러댈 거리가 생각나지 않아 미간을 좁힌 민찬이 턱을 괸 속으로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할 거리를 찾고 있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절묘한 타이밍에 등장해 준 사람이 반가웠던 민찬은 “누구지?” 하며 일어서서 현관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기 전에 인터폰 화면을 먼저 보았는데, 푸른빛이 도는 단색 화면으로 보니 인상이 한층 지능형 범죄자처럼 보이는 범수 형이 보였고, 그 옆에 턱 아래만 보이는 녀석은 보나 마나 배재민이었다. 헛웃음을 터트린 민찬은 “참 나. 신경 끄라니까.”라고, 부엌에 앉아있는 녀석 귀에는 닿지 않을 정도로 중얼거리며 문을 열었다.
평소 같았으면 요란을 떨며 들어왔을 장범수와 배재민은 소리 없이 눈알을 굴리며 거실 분위기를 살피다가, 민찬을 향해 붕어들처럼 뻐금거리며 무음으로 물었다.
밤에 별일 없었어?
준희는 어디 있어?
민찬은 턱짓으로 부엌을 가리켰다. 저기 있다고.
아.
범수와 재민은 왜 긴장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흠, 흠, 헛기침들을 하고는 준희를 불렀다.
“준희야, 형 왔다-.”
“나도 왔어-.”
준희는 그저 “어.”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범수와 재민은 안경을 쓰지 않고 있는 녀석의 표정을 보며 기분을 살폈다. 화가 난 듯도 하고, 또 아닌 듯도 했다. 확실한 건 웃고 있진 않다는 것이었다. 표정만 보고는 답을 알 수 없었던 범수와 재민은 결국 또다시 뻐끔뻐끔 붕어들처럼 물었다.
술 마시고 어떻게 됐어?
화해한 거야?
그리 물으면서 식탁 위를 살펴보니 좀 전까지 마주 앉아 식사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한지라, 범수와 재민은 조금 안심했다. 민찬은 뻐끔뻐끔 건네 온 질문에 대답을 하는 대신 의사를 물었다.
“점심 먹었어? 북엇국 먹을래?”
“어. 좋지.”
재민이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는데, 범수가 우람한 팔뚝을 주먹으로 툭 치면서 눈치를 주었다. 혹시 분위기가 더 살벌해졌을까 봐 찾아온 것이었다. 당장 큰 문제가 없다면 빠져 주는 것이 맞았다.
그러고들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그 속이 다 읽히는 민찬은, 못 말린다는 듯이 웃으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고 다시 권했다.
“앉아. 넉넉히 끓였어.”
그렇다고 하니, 마주 보며 어깨를 으쓱한 범수와 재민은 4인용 식탁의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리고 범수는, 고개를 푹 숙이고서 국물을 후룩후룩 떠먹고 있는 녀석에게 물었다.
“준희야, 맛있냐?”
“어. 시원해.”
“어젯밤에 술 마셨어?”
“…어.”
대답 앞에 놓인 주저함 속에서, 분명히 뭔 일이 있긴 있었구나, 감을 잡은 범수는 재민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뭔가 진전이 있었던 모양이야.
어. 그런 것 같아.
사실 두 사람이 찾아온 이유는 ‘걱정이 되어서’라기 보다는 ‘궁금해서’라고 하는 편이 맞았다.
여민찬이 준희에게 키스해 놓고 도망쳐 와서는 준희를 좋아하고 있다고 고백을 했던 그 밤 이후로 며칠간 관찰을 해 본 결과, 준희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화’가 아니라 ‘초조함’이었다. 지은 죄가 있다 보니 예전처럼 능청맞게 스킨십을 하지 못하고 일정 거리를 두고 있는 민찬이 자식을 온몸으로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 두 사람의 눈에 훤히 보였다. 그러다 한두 번씩 준희는 얼굴 생긴 것에 아주 그럴싸하게 어울리는 여우 짓도 했다. 식당에서 재민이 옆에 앉는다든지, 무대에 재민이 손을 잡고 올라간다든지. 그렇게 떠보는 짓을 해 놓고는 또 매우 심하게 민찬이 자식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 너무나 투명하게 다 들여다 보였다.
그래서 범수와 재민은, 혹시 이 녀석들 쌍방인 거 아니냐고, 서로 좋아하는데 지들만 모르고 있는 거 아니냐고, 우리가 혹시 여민찬 자식이 바보같이 삽질하는데 포크레인 빌려준 거 아니냐고, 그런 의견을 주고받았었다. 매우 중차대한 비밀이다 보니 남들은 절대 듣지 못하는 아주 구석진 곳에서 그런 이야기를 속닥속닥했었다. 그런 모습들이 매의 눈을 지닌 팬들에게 포착되었고, 그래서 최근에 ‘재민×범수’ 커플링이 탄생했다. ‘초대형견공×장발까칠수’ 팬픽도 등장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좀 멋쩍었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여민찬 자식은 ‘탑’ 급 허우대에다가 기본적으로 다정한 성격 덕분에 이 사람 저 사람 홀리는 데는 탁월했지만 그런 주제에 정작 본인은 연애 고자였다. 그런 녀석이 아둔하게 구는 건 아닐까 싶었던 범수와 재민은 걱정도 되고 궁금도 하여 참을 수가 없어졌기에 이쯤이면 적당히 정리되었겠지 싶은 시간에 찾아오기에 이른 것이다.
“그냥 밥 말아 줄게?”
눈치 보던 중에 들려온 소리에 움찔 놀란 범수와 재민이 “어.” 하고 동시에 대답했다. 민찬은 커다란 대접에 적당히 밥을 뜨고 북엇국을 올려서 두 그릇을 들고 왔다. 여전히 표정이 편치 않은 두 사람 앞에 놓아 주면서 물었다.
“왜들 그래?”
“어? 아니? 왜? 뭐가?”
범수가 딱 잡아뗐다. 사고 치고 수습 중인 건 이 자식인데 내가 왜 긴장을 하는지 모르겠네, 생각하면서.
“와 진짜 시원하다.”
그새 썩썩 말아 한 큰술을 입에 넣은 배재민이 감탄했다. 두 번 씹을 것도 없이 꿀떡 삼켜버리고는 물었다.
“이런 것도 만들 줄 알았어?”
“최근에 배웠어. 해동 슈퍼 할머니한테. 괜찮아?”
“어. 시원하고 좋네.”
여민찬과 20년 지기 부부 같은 대화를 나눈 재민이 이번에는 옆자리 준희 쪽을 보고 물었다.
“준희, 어제 술 많이 마셨어?”
“…어. 좀.”
“준희는 주량이 어떻게 돼?”
“……잘-”
참 궁금한 것도 많은 형에게 모르겠다고 대답하려다 말고, 준희는 힐끔 시선을 들어 제 앞에 앉은 남자의 눈치를 보았다. 민찬이 대신 대답해 주었다.
“소주 한 서너 병은 되더라.”
“와, 세네?”
재민은 무척 신기해했다. 생긴 걸로 보자면 소주 한 병 정도 마시고 나가떨어지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범수 형은 와인 반병이지?”
“뭐? 그거보단 더 마실 수 있어.”
“전에 와인 반병 마시고 잠들었잖아?”
“그건 졸려서 잠든 거지 인마. 취한 게 아니라.”
두 사람의 티격태격을 듣던 준희가 대화가 끊긴 틈을 타 물었다.
“재민 형은 주량이 얼마나 돼?”
“음. 글쎄? 나는 아직 취해서 필름이 끊길 정도로 마셔 본 적이 없다?”
“그렇구나. 그러면….”
사실 재민의 주량을 물을 때부터 궁금한 사람은 따로 있었던 준희가 말미를 끌었는데, 눈치가 빠른 건지, 아니면 눈치가 없는 건지 모를 재민이 대뜸 대답해 주었다.
“민찬이 자식은 와인 두 병에 플러스 양주 한 병은 마셔야 떨어지지. 하하.”
여민찬이 어마어마한 소리를 내며 테이블에 이마를 처박았던 것이 생각난 재민이 껄껄 웃었다. 범수도 픽 코웃음을 치며 웃었다. 민찬은 참 나, 하며 혀를 차고 있었고.
그런 말들을 주고받으며 다들 웃고 있는데, 따라 웃지 못하고 있는 단 한 사람, 준희는 입가를 꾹 눌러 닫아 표정을 굳히고서 생각했다.
소주 세 병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겠네.
…라고.
그러고 있는데, 궁금한 것 참 많은 재민이 웃음을 그치자마자 민찬에게 물었다.
“혹시 준희도 주사가 있어?”
“뭐…. 그냥… 자던데?”
소주 서너 병 마시더니 개처럼 기다가 키스했다고 할 생각 전혀 없는 민찬은 거짓말을 둘러댔다.
그 순간에 수저질을 멈추고, 어깨까지 바짝 굳히고 있었던 준희는 후,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더 푹 숙여버렸다.
Black Whales’ TMI 이 무렵 여민찬은 ‘사랑개’라는 제목의 노래를 씁니다. 천사의 얼굴에 개의 몸을 한 ‘사랑개’는 사랑에 빠져서 정신줄을 놓고 바보 짓거리를 해 대고 있는 두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전설적인 존재라고 합니다. 훗날 가사를 쓰기 위해 여민찬의 설명을 가만히 듣던 준희가 “이 씨 이거 나잖아!” 하며 성질을 부렸습니다. 준희가 화내는 걸 꽤 좋아하는 여민찬은 그저 씩 웃었습니다. 자신이 만든 모든 곡의 모티브는 언제나 준희였던지라 딱히 부정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여담으로, 해탈한 팬들은 제목을 듣자마자 한숨을 쉬었습니다. 제준희잖아. 하면서 말입니다. 제준희는 취하면 개가 된다는, 블랙웨일즈 멤버들의 주사에 관한 예전 인터뷰 기사가 소환되었습니다. |
살얼음판 위를 걷는 느낌으로 불안한 날들이 이후로 며칠 더 계속되었다.
근데 이게 어째, 여민찬이 술을 사가지고 들어갔던 그날을 기점으로 해서 그냥 살얼음판과는 또 양상이 달라졌다. 그냥 얼음판이 아니라 그 아래 뭔가 뜨끈한 불씨 같은 것이 놓인 느낌이었다. 그래서 주변인들은 한층 더 불안했다. 이 얄팍한 막이 언제 녹아버릴지 모르니, 그 위에 서서 드럼 치고 베이스 치고 해야 하는 인간들은 매일이 긴장의 연속으로 아주 죽을 맛이었다.
그렇다 해도, 이제부터는 둘이서 해결할 문제라고 의견 일치를 본 범수와 재민은 더 이상 나서지 않았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 집에 살면서 솥뚜껑이랑 밥주걱 나눠 쥔 놈들끼리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일전에 섣불리 나섰다가 하마터면 못 돌아올 강을 건널 뻔했던 일도 있고 하니, 시간이 흘러 계절이 바뀌면 언젠가는 녹겠지, 생각하며 개입하지 않고 기다리기로 했다.
*
그러던 어느 날.
아슬아슬한 살얼음판이 부디 큰 사고 없이 서서히 녹아 주길 바라고 있었던 사람들의 기대가 무색하게도, 두 사람 사이에 큰불이 놓이는 정도가 아니라, 열화우라늄탄이 터지는 것에 준하는 사건이 발발하고 말았다.
그날은 무역 센터에서 열린 윈터 페스티벌의 폐막 행사가 있는 날이었다.
블랙웨일즈는 여전히 방송 출연이 자유롭지 못했다. 그렇다 보니 불러 주는 행사를 마다하지 않았다. 애나 어른이나 다 아는 빅 히트곡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터무니없는 출연료를 부르지 않는 블랙웨일즈는 특히 서울시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러는 사이에 서울시에서 주최하는 행사에는 블랙웨일즈가 오프닝 무대를 여는 것이 매우 당연한 일처럼 정해져버렸다.
서울시민을 대상으로 한 무료 공연이었고, 스카이미디어 소속 가수들은 없었지만 블랙웨일즈를 필두로 볼 만한 가수들이 대거 출연을 했다. 그 때문에 행사장 내에는 일찌감치 몰려든 각 가수의 팬들이 만든 줄이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여 가기 시작했다. 시작 전부터 후끈한 열기가 가득했고 이미 성공한 행사라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행사 취재를 나온 기자들은 이럴 때마다 스카이미디어가 블랙웨일즈 보이콧하다가 지네가 되레 왕따 된 것 같다는 말들을 수군거렸다. 그리고 최근 불화설이 불거진 블랙웨일즈를 걱정하는 말들도 했다. 밴드가 이렇게까지 흥한 것이 참 오랜만인데, 해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런 바람을 내비쳤다. 기자회견 때부터 이어져 온 호감이 그동안 발표한 너무 좋은 곡들을 접하면서 더욱 커졌고, 이제는 거의 블랙웨일즈의 팬이 되었다 싶은 기자들이 꽤 많았다. 라인업을 살펴보던 기자들은 블랙웨일즈가 피날레인 것을 두고 또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스카이미디어만 아니었으면 진작 엔딩 무대에 섰을 그룹인데 이제서야 선다며 안타까운 심정들을 토로했다.
하지만 실상은 기자들의 추측과 조금 달랐다. 블랙웨일즈는 오히려 오프닝 무대를 선호했다. 최근에는 엔딩으로 컨택을 많이 받았지만 블랙웨일즈 측에서 가능하면 오프닝을 하고 싶다고 했다. 밴드이다 보니 공연 전에 준비 과정을 가지기 위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서울시는 모여든 사람들이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것에 크게 의미를 두었다. 그래서 ‘서울시의 아들들’이라고 불리는 블랙웨일즈에게 이번 공연만큼은 피날레를 해 달라고 부탁을 해 왔다. 무대 전에 추첨 행사를 해서 시간을 끌 테니 그사이에 준비를 하면 넉넉할 거라고, 그렇게 딜을 해 왔다. 그래서 오늘의 피날레는 블랙웨일즈였다.
엔딩 무대인 블랙웨일즈는 다른 가수들과 다름없이 공연 리허설 시작 전에 행사장에 도착했고, 완벽주의자인 장범수를 중심으로 철두철미하게 공연 준비를 해 나갔다.
기다리고 있는 팬들의 체감으로는 실제보다 더디게 시간이 흐른 후에 본 공연이 시작되었다. 사복 차림으로 리허설을 한 후에 메이크업과 무대 의상 착장을 마친 블랙웨일즈 멤버들은 지정된 대기실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블랙웨일즈의 핵심 멤버 두 사람의 술래잡기가 계속되었다. 이유도 잘 기억나지 않는 이유로 시작된 술래잡기였는데 좀처럼 끝이 나질 않다 보니 이제는 블루오션의 식구들 눈에도 그 양상이 훤히 들여다보이고 있었다.
제준희가 대기실 한편에 앉아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듣고 있는데 여민찬이 넓은 자리 놔두고 굳이 그 옆에 앉았다. 그러자 보지도 않고 누군지 대번에 아는 듯 보이는 제준희는 벌떡 일어서서 다른 사람을 찾으며 딴청을 부렸다.
“여진이 누나, 나 목 뒤가 좀 따끔거려.”
“어? 어. 알았어. 봐 줄게.”
두 사람을 걱정스레 지켜보고 있었던 여진은 얼른 출동해 준희의 목덜미를 들추며 뭐가 있나 봐 주었고, 그러는 사이에 여민찬의 빤한 시선을 감당해야 했다. 송여진은 겨울 끝 무렵에 웬 식은땀이 다 흐르는 경험을 했다.
이런 식의 쫓고 쫓기는 대치가 계속되었는데, 누가 봐도 쫓는 사람 쪽은 여유가 있었고, 쫓기는 사람 쪽이 초조해 보였다.
이우영과 강동수는, 준희가 민찬이 형한테 약점이라도 잡힌 거 아니냐고, 그런 소리를 수군거리며 걱정을 했다. 두 사람은 기획사 블루오션의 직원이기 이전에 블랙웨일즈의 골수팬이었다. 구성상 완벽해 보이는 블랙웨일즈 내에서 멤버 변동이 있다거나 혹은 팀 자체가 해체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기를, 여느 팬들보다도 절실히 바라고 있었다.
그렇게, 쫓고 쫓기고, 모른 척하고 눈치 보고, 고민하고 걱정하며 나름의 시간들을 보내는 동안 블랙웨일즈를 제외한 모든 출연진들이 성공적인 공연을 마무리했고, 약속했던 추첨 행사가 시작되었다.
사회자가 허리 높이에 올라올 정도로 커다란 투명 아크릴 상자 안에 손을 집어넣고 휘휘 저으며 당첨자를 뽑았다. 각종 생활가전과 스마트 기기가 걸려 있는 행운권 추첨을 하는 동안, 등 뒤에 ‘STAFF’라고 적힌 조끼를 입고 무대 위로 올라온 사람들이 기타와 베이스를 앰프에 연결하고 키보드를 세팅하고 드럼의 마이킹을 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블랙웨일즈가 나오는가 보다, 싶었던 팬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추첨이 거의 끝나가고 1등인 노트북 당첨자의 발표만 남아있는 즈음해서 무대 준비도 마무리되었다. 행사 관계자가 대기실로 들어와 “블랙웨일즈 올라갈게요!”라고 외쳤고, 준희는 옆에 딱 붙어 있었던 배재민의 손을 잡으려고 팔을 뻗었다. 그런데,
준희보다 빠르게 팔을 뻗은 민찬이 준희의 손을 낚아채고 꽉 잡았다. 그리고 언젠가 준희가 했던 말을 고대로 돌려주었다.
“우리 한 팀인데, 누구 손을 잡든 관계없잖아?”
그리고 픽, 웃으며 “가자.” 하고 귓가에 대고 속삭이면서 잡은 손을 끌었다.
당황한 듯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싫은 기색은 또 아닌,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준희는 못 이기는 척하며 고분고분 뒤따라 걸음을 옮겼다.
*
그리고 잠시 후,
지금껏 수런수런했던 장내에 일순 정적이 있었다. 해일이 덮치기 바로 직전의 고요와도 같은 침묵 뒤로, 한껏 들이마시는 숨으로써 일제히 함성을 장전 하는 시간이 지나갔고, 그와 거의 동시에,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아직은 암전된 무대 위로 올라오는 인영을 본 팬들이 소리를 지른 것이다. 워낙 멤버 개인별로 캐릭터성이 짙은 그룹이다 보니 실루엣만 보고도 누군지 대번에 맞출 수 있었는데, 제일 먼저 등장한 것은 누가 봐도 여민찬이었다. 각이 진 넓은 어깨, 긴 다리. 그림자만 봐도 한껏 설레게 하는 기타리스트 여민찬의 등장에 팬들은 있는 힘껏 목청을 높여 환호해 주었다.
그리고 이어서, 팬들이 지르는 함성이 두 배, 아니, 세 배로 커졌다. 팬들은 아까 여민찬이 등장할 때 최대로 질렀다고 생각했는데, 제 목청이 더 커질 수도 있구나 싶어서 스스로도 놀랐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민찬의 뒤로 뻗은 손을 잡고 등장한 사람이 바로, 보컬 제준희였기 때문이다.
블랙웨일즈의 팬들은 최근에 계속 그랬듯이 제준희가 이번에도 배재민과 함께 등장하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 밖으로 여민찬의 손을 잡고 등장했고, 두 사람이 손잡고 등장한 것이 너무 좋았던 나머지 인간의 목으로 낼 수 있는 소리의 한계를 넘어서는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마치 익룡의 부활 현장 같았다. 팬들은 그동안 블랙웨일즈만의 시그니처 라고도 볼 수 있었던 ‘기타와 보컬의 손 잡고 등장’을 볼 수 없어서 무척 안타까워했다. 동시에 두 사람 사이를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팬들은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등장하자 기쁨을 넘어서 감격적인 심정이었고, 그로 인한 흥분감을 도저히 억제할 수가 없었다.
등장만으로 장내를 뒤집어 놓다시피 한 두 사람에 이어서 배재민 아니면 큰일 날 커다란 그림자가 뒤따랐고, 오늘은 반만 묶어 머리끝을 예쁘게 정돈한 리더 형이 제일 마지막으로 올라왔다.
팬들의 함성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는 가운데, 준희를 무대 중앙 키보드 앞까지 데리고 온 민찬은 귓속말을 속삭였다.
“오늘도 너, 되게 예쁘다.”
아직은 암전된 무대였기 때문에 실루엣만 보이고 있었다. 준희의 당황한 표정까지는 보지 못한 팬들은,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두 사람이 입맞춤이라도 한 것 아닌가 싶은 그림자 퍼포먼스를 보고 열광했다.
팬들 못지않게 신이 난 기자들은,
「다시 손잡은 여민찬과 제준희, 팬들은 기쁨에 겨워 환호」
「블랙웨일즈 여민찬과 제준희 극적 화해, 팬들을 위한 그림자 퍼포먼스까지 선보여」
「블랙웨일즈, 해체 위기설 종식시키며 여전한 우정 과시」
…라는, 좀 섣부른 듯한 느낌의 타이틀로 기사를 송출할 준비를 시작했다.
드디어 무대의 조명이 켜졌고, 남녀를 불문하고 길 가다 한두 명 꼭 만날 정도로 대유행을 시킨 착장인 오버핏 니트에 가죽 느낌의 스키니진을 입고 워커를 신은 제준희가 마이크를 잡고 인사를 건네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블랙웨일즈입니다. 마지막까지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첫 곡으로 눈먼 고래의 노래, 들려드리겠습니다.]
비하인드 영상에서 보면 지들끼리 참 잘들 논다 싶은 블랙웨일즈이지만 무대 위에서 그다지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너무 간단해서 더 근사하게 느껴지는 인사말 이후로 곧장 기타 선율이 뒤따랐다. 제준희의 오버핏 니트와 함께 돌풍을 일으킨 가죽 라이더 재킷에 슬림핏의 진, 그리고 전투화를 멋들어지게 소화해 낸 여민찬이 안 불러 주면 섭섭한 블랙웨일즈의 대표곡 ‘눈먼 고래의 노래’의 전주를 여느 날과 다름없이 감성적으로 연주했다.
드럼과 베이스, 그리고 건반이 합류하여 풍성해진 합주 속에 노래가 시작되었다. 보컬 제준희는 늘 훌륭한 무대매너와 흔들림 없는 노래를 들려줬지만 그동안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의 아주 미묘한 냉기로 인해 팬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달라 보였다. 이 또한 말로 설명하기 힘든 변화인데, 확실히 뭔가 달라 보였다. 뭐가 다르냐고 묻는다면 말로 바꾸어 대답할 길은 없었지만, 분명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뭔가가 있었다.
미디엄 템포인 ‘온양야설’을 부를 때는 보컬인 제준희가 하도 웃어대서 그게 그 곡의 시그니처였다. 그러다 최근에는 억지로 옅은 웃음이라도 지어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영 힘들어 보여서 문제가 되긴 했지만 말이다. 반면에 느린 템포로 시작하여 점차 격정적으로 바뀌는 ‘눈먼 고래의 노래’를 부를 때에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곡의 초반에는 아련하고 서정적이다 못해 쓸쓸한 느낌을 주다가 격정적인 클라이맥스에서 내지를 때에는 애달프고 처연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오늘 또한 제준희는 그런 느낌을 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눈을 지그시 감은 채로 부르고 있었는데, 오늘따라 입가가 씰룩 올라가 있었다. 아주 미세한 차이였지만 팬들의 눈에는 그게 보였다. 공연이 끝나고 난 후 ‘웃고 싶은데 웃지 못하는 제준희’라는 제목으로 돌아다니게 될 사진들이 무수히 찍혔다.
그렇게 ‘눈먼 고래의 노래’를 끝내고, 두 번째 곡으로 ‘원’을 불렀다. 눈먼 고래의 후렴구가 워낙 고음이다 보니 쉽사리 따라 하지 못하는 반면, ‘원’ 같은 경우에는 중독성 강한 후렴의 후크 라인이 누구나 따라 부르기 쉬운 패턴이었던지라 팬들이 함께하는 ‘떼창’의 화력이 특히 컸다. 그리고 특징적인 드럼 박자에 맞추어 팬들이 이름 붙인 ‘원 박수’를 치는 재미가 있었기 때문에 공연장에서 부르면 현장 분위기가 무척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간 브릿지에서 뒤로 돌아선 제준희가, 현란한 테크닉을 뽐내고 있는 기타 쪽을 향해 서서 추는 춤이 일품이었다. 제준희 입장에선 기타에 맞추어 그냥 리듬을 탄 것뿐이라고 하지만 팬들 역시 ‘춤’이라고 불렀다. 그럴 때마다 여민찬이 제준희에게 보내는 살인적인 미소가 그야말로 죽여줬기 때문에 팬들은 열광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늘 무대에서 제준희는 뒤돌아서서 기타를 보며 춤을 추진 않았다. 하지만 팬들 쪽을 향해 서서 리듬을 탔고, 팬들은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지만 여민찬의 시선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을 보게 된 정도로 마음을 달래야 했다.
이어서 세 번째이자 마지막 곡인 ‘온양야설’의 전주가 시작되었다. 또 하나의 빅 히트곡인 ‘온양야설’의 전주가 시작되자 관객들은 처음과 다르지 않은 함성으로 화답해 주었다. 그리고 골수팬들은 은근히 기대하면서 기다렸다. 그동안 온양야설 무대에서 웃지 못하는 바람에 팬들을 안타깝게 했던 제준희가 오늘은 어떨는지 무척 궁금했다. 앞선 무대에선 기분이 퍽 좋아 보였는데 말이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연상되지만 마음이 따뜻해지는 전주가 지나갔다. 양손으로 스탠드 마이크를 잡아 막은 제준희는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러다 노래를 불러야 하는 시점에서 마이크 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무대 초반 부활했다가 잠시 쉬고 있었던 익룡들이 재등장을 했다. 팬들은 신이 나서 함성을 질렀다. ‘눈먼 고래의 노래’에서 자꾸만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겨우겨우 참는 듯 보이던 제준희가 결국 ‘도저히 못 참겠다’ 싶은 느낌으로 활짝 웃으면서 노래를 시작한 것이다.
팬들은 제준희가 웃으니 마냥 좋아서 열광했고, 팀 내에 있었던 문제가 해결이 되었구나 싶었던 기자들도 팬들과 한마음 한뜻으로 기뻐했다.
그렇게 마지막 곡인 온양야설의 1절이 끝나갈 무렵이었고, 행사를 주최한 서울시 행사 관계자뿐 아니라 그 자리에 모인 모두가 성공적인 행사의 마무리를 점치고 있을 때였다.
무대에서 공연 중인 멤버들의 시점에서 오른쪽 무대 끝에서 한 남자가 올라왔다. 군청색 볼캡 모자를 쓰고 등 뒤에 ‘STAFF’라고 쓰인 행사 관계자 조끼를 입은 남자가 올라왔으니, 다들 무슨 일인가 바라만 볼 뿐 제지를 하거나 하진 않았다.
여민찬도 제 오른쪽에서 불쑥 올라와 눈앞을 지나가는 남자를 도대체 뭔 일인가 하고 보면서도 손으로는 계속해서 기타를 쳤다. 키보드나 중앙 마이크에 문제가 있는 모양으로, 남자는 무대 중앙 보컬이 서있는 쪽으로 향했다. 얼굴 한가득 물음표가 그려진 배재민과 장범수도 연주를 멈추지 않은 상태에서 남자를 주목했다.
온 신경이 갑자기 등장한 남자에게로 쏠려있는지라 거의 전자동 모드로 기타를 치고 있는 여민찬은, 남자의 키가 자신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 세 시간 내내 이곳에 있으면서 배재민 외에는 자신과 비슷한 키를 가진 남자를 본 적 없었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 생각을 했을 때에는, 모자를 쓴 남자와 무대 정중앙에 있는 제준희와의 간격이 불과 다섯 발자국 정도였을 즈음이었다.
그러다, 모자 아래 드러난 각진 턱이 어째 눈에 익다? 생각을 했을 때, 여민찬은 연주를 멈추었다. 갑자기 비어버린 사운드에 놀란 범수와 재민이 기타 쪽을 보았을 때 여민찬은 이미 제 자리를 이탈해 무대 중앙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앞줄 정중앙에 있었던 여성 팬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른 것이 시작이었다.
이윽고, 무대 위의 상황을 맨눈으로 보게 된 앞줄의 팬들이 지르는 비명 소리가 해일이라도 지나가는 듯한 속도로 퍼져나갔다. 내내 커다란 함성과 환호성으로 가득 찼던 공연장 내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고성이 섞여 들었다. 인간 파도를 타고 퍼진 경악과 공포가 객석 제일 끝까지 도달했을 때에는, 행사장은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