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이모, 저거 나 탈 수 있어?”
“글쎄. 안 될 것 같은데. 승아 아직 110cm 안 되지 아마?”
“피.”
정해준이 승아가 가리킨 어트랙션을 보며 새삼스러워했다.
“저건 새로 생겼네.”
그때도 돌아다니지 않았으니 뭐가 새로 생겼는지 알 턱이 없었다. 시계탑이 그대로라는 것만 알겠다. 놀이공원이 오랜만인 우리 둘과 달리 며칠 전에도 제 부모와 이곳에 들른 승아는 거침없이 가고 싶은 곳을 손가락질해 댔다.
“저거 재미있어, 이모. 나랑 같이 타. 나 저거는 탈 수 있어.”
날아다니는 양탄자 모양의 기구를 향해 파닥거리던 승아가 갑자기 손을 놓고 내달렸다.
“어? 어어? 승아야!”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얼른 뒤쫓았지만 승아는 다람쥐같이 쪼르르 시설물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어른은 입장할 수 없는 그물 놀이터였다. 그새 변덕이 생긴 모양이었다. 기다란 미끄럼틀을 타기 위해 승아가 그물 꼭대기까지 영차영차 기어오르는 모양을 구경하는 동안, 정해준은 나를 보며 싱글거렸다.
“시간 줄 테니까 저기서 문제집 풀든가.”
“아…….”
예전, 콜라 한 잔을 시켜 놓고 모의고사를 풀던 패스트푸드점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기억 속 가게는 꽤 낡은 느낌이었는데 새 단장을 한 듯 버섯 모양 지붕이 반짝반짝했다. 피식, 웃으며 다시 정면을 바라보자 어느새 꼭대기에 오른 승아가 뿌듯한 표정으로 미끄럼틀에 앉으려 하고 있었다.
“소원 하나만 들어주라.”
승아를 향해 환호하며 팔을 흔들어 대는 내게 정해준이 짓궂게 운을 뗐다.
“뭔데.”
짐짓 쌀쌀맞게 대꾸했다.
“야간 퍼레이드 같이 보자.”
그래, 그러자.
마음속으론 당장에 수락하면서도 모르는 척 고개를 기울였다.
“막판에 불꽃놀이도 볼만해서?”
“……기억하네.”
수채화처럼 아련한 기억 한 폭이 소환됐다. 콜라 컵에 맺혀 있던 크고 작은 물방울이나, 그걸 마시는 정해준의 목울대를 곁눈질했던 것, 떠나고 난 빈자리가 유독 허전해 좀처럼 집중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샤프심 같은 것들이.
때마침 미끄럼틀에서 내려온 승아가 달려와 하이파이브하는 바람에 대답 대신 눈빛만 주고받았다.
“이모, 나 잘하지!”
“최고야, 최고!”
꽤 재미있었는지 승아는 다시 그물 요새를 향해 달려 나갔다. 그제야 퍼뜩 생각이 났다.
“아, 이거!”
가방에서 토끼 귀 머리띠를 꺼내자 정해준의 눈빛에 떠올랐던 아스라한 감상은 싹 지워졌다.
“그걸 승아한테 씌우려고?”
그럼 안 되나? 꼭 나쁜 짓인 것처럼 말한다. 물론 낡고 오래되긴 했지만. 아직도 보들보들한데. 보관도 깨끗이 잘해 놨고. 토끼 귀를 만지작거리며 변명했다.
“아깝잖아.”
“안 돼.”
단호하게 자르며 손에서 머리띠를 홱 낚아챈 정해준이 토끼 귀 머리띠를 내 머리에 곱게 씌워 주었다.
“너 준 거잖아. 너만 써.”
그 언젠가 그랬듯 토끼 머리띠를 쓴 내가 담뿍 담긴 정해준의 눈동자가 부드럽게 일렁였다.
“이걸 여태 갖고 있었네.”
“……그때 같이 퍼레이드 구경하고 싶었어.”
몇 년이나 지나서 내놓는 속마음이 수줍다. 오래도록 묵혀 둔 미안함을 끌어와 물었다.
“멋있었어?”
“글쎄. 나도 봐야 알겠는데.”
“응?”
기억이 안 난다는 건지, 퍼레이드 구성이 바뀌었을지 몰라서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어 쳐다보자 담담히 웃은 정해준이 가만히 손을 마주 잡아 왔다.
“안 봤어, 그날.”
“왜?”
“그냥.”
싱겁게 대꾸한 정해준이 두 번째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장한 승아를 번쩍 들어 안고 땀에 젖어 이마에 찰싹 붙은 머리카락을 떼 주었다. 곱게 매만진 머리카락이 도로 헝클어질 예정이라는 것도 모른 채.
“한 번 더!”
“승아, 물 좀 마시고 하자.”
검지를 치켜들고선 숨을 몰아쉬는 승아의 자그마한 입에 물병을 대 주었다. 꼴깍, 꼴깍, 물 넘어가는 소리가 달기도 했다. 금세 볼록해진 배를 하고서 승아가 다시 달려 나갔다. 저러면 배 속이 출렁거려서 멀미 날 것 같은데.
작은 배 속에 파도가 치는 엉뚱한 상상에 젖어 있는데 정해준이 잡은 손을 만지작거리며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그날 나도 일찍 갔어. 네 뒷모습 보고 나니까 갑자기 다 재미없더라.”
“……몰랐어.”
처음 듣는 얘기였다. 사귈 때도 듣지 못했다. 둘만의 시간에 푹 빠져서 지난 일 같은 건 염두에 없었으니까. 이미 돌이킬 수 없건만, 미안해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나를 정해준이 자상하게 다독였다.
“늦게라도 소원 들어줘서 고마워.”
몇 년이나 지체된 원풀이가 성공적이길 바라며 저녁 날씨를 확인했다. 다행히 비 소식은 없었다. 기온도 적당한 편이고.
세 번째 그물 요새를 정복하고 돌아온 승아가 드디어 다른 놀이기구로 걸음을 떼었다. 놀이기구를 모조리 섭렵할 듯 들뜬 승아에게는 미안하지만 빨리 밤이 되었으면 했다.
“완전히 잠들었어.”
왜건 안에서 색색 숨소리를 내며 웅크린 승아에게 담요를 덮어 준 정해준이 퍼레이드가 지나가는 길목 쪽으로 방향을 들었다. 시간이 30여 분 정도 남아 있었는데 벌써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아예 돗자리까지 펴고 앉은 사람들을 보며 정해준이 혀를 내둘렀다.
“다들 여기서 사나? 아주 정보를 꿰고 있나 봐.”
여기서 사는지는 몰라도 현명해 보이긴 했다. 종일 걸어 땡땡해진 종아리는 아픈데 마땅히 앉을 곳이 없었으니까.
“여기 어때.”
“괜찮은 것 같아, 꺅!”
적당한 자리를 고른 정해준이 털썩 주저앉으면서 동시에 나를 당겨 안았다. 별안간 소리 지른 것과 다 큰 여자가 남자 무릎에 어린이처럼 앉은 것 중 어느 게 더 부끄러운지 알 수 없어 얼굴이나 가렸다. 와중에도 승아는 잘만 잤다.
요란한 음악 소리와 함께 휘황찬란한 조명으로 눈부시게 치장한 여러 대의 꽃마차와 수십 명의 광대들이 연이어 지나갈 동안 승아는 눈 한 번 뜨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어린아이같이 구는 건 나였다. 눈을 떼지 못하고 연신 탄성을 질러 대기 바빴으니까. 끝에 가서는 벌떡 일어나 펄쩍 뛰는 나를 귀여워 못 참겠다고 중얼거리며 꽉 껴안은 정해준이 굳게 다짐했다.
“우리 해원이, 자주 데려와야겠네.”
괜스레 눈물이 고였다. 주책이다, 멋쩍은 웃음을 흘리면서도 자꾸만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덕분에 빛이 번져 알록달록 아롱아롱 춤을 췄다.
아름답고, 황홀하고, 뜨거웠다. 일부러 눈을 깜박이지 않고 그 모양을 지켜보았다. 그러자 환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반짝이는 행렬을 구경하며 환호하는 내 어린 시절의 뒷모습이. 오도카니 앉아 있는 자세는 같은데 눈앞의 이해원은 초등학생이었다가, 중학생이었다가, 고등학생이었다가, 다시 초등학생이었다가, 자꾸 들쑥날쑥했다. 한결같이 쓸쓸한 모습으로.
그 시절에 이걸 봤으면 외로운 동심이 조금이나마 채워졌을까.
영영 해답을 알 길 없는 의문을 품었다가 이내 털어 내고 기죽어 움츠러든 내 안의 나를 어루만졌다.
괜찮아. 이제라도 봤으니까, 그럼 된 거지.
보상받은 유년은 너무 달콤해서, 끝내 눈물이 주르륵 흘러 버렸다. 지난 설움을 씻어 내듯이. 젖은 손등에 몹시 당황한 정해준이 내 몸을 돌려세웠다.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너무, 너무 예뻐서 그래.”
절정은 불꽃놀이 때 찾아왔다. 볼만한 정도가 아니라 압권이었다. 붉은 꽃, 푸른 소용돌이, 새하얀 분수……. 각양각색으로 터지는 불꽃에 완전히 마음을 앗겼다. 마지막은 밤하늘을 빼곡히 수놓은 불꽃으로 장식됐다.
“와…….”
마지막 불티가 사그라질 때까지 넋을 놓고 하늘을 보았다. 다시 조명이 켜지기 전, 암전 속 화약 냄새만이 자욱한 이때. 한껏 젖힌 고개 위를 어두운 그림자가 덮었다.
촉.
따스하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도장을 찍듯 입술에 꾹 닿았다 떨어졌다. 동시에 사방이 환해졌다. 방금, 뭐지? 얼떨떨하여 옆을 바라보다가 붓으로 찍은 것처럼 빨개진 정해준의 귀 끝을 발견했다. 입맞춤 한 번 한 것치곤 과한 반응에 어리둥절해졌다. 부끄럽긴 해도 더한 것도 한 사이인데…….
“사실.”
시선을 피하며 정해준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때 내 진짜 소원 이거였거든.”
“아…….”
불꽃놀이는 핑계였단 고백에 덩달아 귀 끝이 따가울 정도로 화끈거렸다. 꼭 고등학생 이해원으로 돌아간 것처럼.
“그런데, 우리 손도 잡기 전이었잖아.”
“알다시피 내가 진도가 좀 빨라.”
“뭐?”
밉지 않게 슬쩍 눈을 흘겼다가 살포시 웃으며 나란히 손을 잡고 걸었다. 앞으로 펼쳐질 우리만의 시간을 따라서.
***
깜박깜박, 느리게 움직이던 눈꺼풀이 완전히 떨어졌다. 잠깐 눈 좀 붙이라고 해도 운전하는데 옆에서 자고 있으면 미안하다며 끝끝내 버티더니, 집에 다다라서야 기절하듯 잠든 이해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깊이 잠들었는지 힘이 풀어진 손가락 끝에 아슬아슬 걸려 있던 토끼 머리띠가 스르륵 바닥으로 굴렀다.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주워 부드러운 토끼 귀를 만지작거리자, 종일 쓰고 있던 머리띠에서 희미한 사과 향이 났다.
자연히 면접을 핑계로 해원을 5년 만에 만났던 기억이 떠올랐다.
삶에 지쳐 시들한 모습임에도 은은히 풋사과 향을 풍기고 있던 이해원을. 생각보다 여위어 화가 났던가. 그보다,
바짝 발기했었지.
형편없이 구겨진 치맛자락, 그 아래 나란한 허벅지 사이 검은 굴을 보고.
피우지도 않는 담배를 핑계 삼아 우연을 가장해 이해원을 관찰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살점 하나 남기는 법 없이 낱낱이 씹어 삼켜 배 속에 가두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새삼스럽지 않았다. 철저히 감추고 있었을 뿐, 이해원을 볼 때마다 그랬으니까.
이 예쁜 걸 품으면 얼마나 흡족할까. 말도 안 되는 망상인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저한테 가학적 성향이 있었나. 어쩔 수 없이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부분이었다.
실컷 조롱하고 내치려 했는데. 아주 나락으로 떨어지길 바랐는데. 여지없이 흔들렸다. 개처럼 발정해서는. 만일을 위해 콘돔을 박스째 쟁여 놓는 스스로가 한심해서 화가 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도무지 제어할 수 없었다.
기도 안 차서.
아예 콘돔이 박스째 들어 있는 글러브박스를 노려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 바람에 해원이 으응, 몸을 뒤채며 미간을 찡그렸다.
“쉬이.”
이제 우는 일은 없어야지, 해원아.
속마음으로 달래며 엄지손가락을 살살 이마를 쓸었다. 잠깐 새에 무슨 꿈을 꾸는지 미소가 곱게도 번졌다. 순간 가슴이 뻐근해졌다. 이건 반칙이다. 사람이 적당히 예뻐야지 지나치면 쓰나.
심장에 해롭다고 여기면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비 오는 날, 우중충한 교실에서 홀로 빛나던 이해원을 본 그 순간부터.
누구는 사랑이 걸어 들어온다고 하던데 이건 그냥 한계 시속으로 들이박은 수준이었다.
명백한 사고였다. 덕분에 오래도록 마음을 절었다.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다시 그 비 오는 날로 돌아간다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해원을 택할 테다. 맨 뒷자리로 서슴없이 걸어가 뻣뻣해진 사타구니 때문에 줄곧 엎드려 있다가 종례 후에나 겨우 우산을 건네겠지.
똑같은 아픔을 겪어야 한다 해도 얼마든지 견딜 각오가 되어 있다.
기어이 만나고야 말 테니까.
[ 낙과, 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