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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과-75화 (75/77)

75화

“볼래요?”

손아름이 휴대전화를 뒤져 사진 한 장을 보여 주었다. 북적이는 강의실에 앉아 있는 여자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활짝 웃고 있었는데 피곤한 기색은 숨기지 못했다.

그럼에도 사진 속 여자의 눈 밑에 진 그늘에 묘하게 가슴이 뛰었다. 나도 익히 아는 그늘이었다. 자세히 보면 뿌듯함이 음영에 묻어 있다.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벅찬 감정.

“어린애들 따라가느라 힘들대요. 그래도 재미있나 봐요. 가끔 연락하면 신나 하는 게 느껴지거든요.”

“부러워요.”

솔직한 감상을 털어놓았다. 나도 다시 한번 도전해 보고픈 의욕이 가슴 저 밑바닥에서 조용히 끓었다.

“이 언니처럼 진로를 바꾸는 건 아니더라도 사소한 거부터 해 봐요. 해 보다 질리면 그만둬도 뭐 어때요.”

그러면서 정작 부러운 건 이사님을 가진 나라며 손아름이 또 한 번 너스레를 떨었다.

“이사님 가졌으면 다 가진 거죠.”

“아직 다시 시작하는 단계에요.”

조심스러운 반응에도 손아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응당 결혼까지 갈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눈치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를 바라보는 두 눈에 담겨 있던 게 미련이 아니었다고. 꿀이 고이다 못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고.

“청첩장 꼭 주기에요. 알았죠?”

“알았어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손아름이 단정 지어서 말하니 정말 그렇게 될 것 같기도 해서.

실제로 정해준이 매일 같이 결혼하자고 조르고 있긴 했다. 당장 혼인신고부터 하자는 걸 살림을 합치는 걸로 겨우 합의를 봤다.

넌 불순해.

어디 결혼도 안 한 외간 남자와 동거부터 시작하냐고 비난하던 정해준을 떠올리니 다시금 어이가 없어졌다. 그 외간 남자가 바로 본인이라는 자각은 눈곱만큼도 없는 듯했다. 꽤 귀엽긴 했지만.

“보기 좋다.”

“네?”

“해원 씨 잘 안 웃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방긋방긋 웃는 거 보니까 좋네요. 신기하기도 하고. 이래서 다들 연애하나 봐요.”

웃고 있었나. 민망해져 괜히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바깥은 벌써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커피만 마시기로 했는데 얘기가 길어져 저녁 시간도 훌쩍 넘겼다. 그럼에도 이대로 헤어지긴 아쉽다며 손아름이 제안했다.

“우리 따뜻한 국물 먹으러 갈래요? 우동 국물 기가 막힌 데 아는데. 거기 유부초밥도 맛있어요.”

에어컨 바람이 세서 몸이 으슬으슬하던 차에 뜨끈한 우동은 생각만으로도 반가웠다.

“좋아요. 가요. 내가 살게요.”

이럴 거면 처음부터 밥집에 갈 걸 그랬나.

“커피도 샀잖아요. 우동은 제가 살게요.”

“내가 사 주고 싶어서 그래요. 담에 아름 씨가 사요.”

“담에는 청첩장 주러 만나는 거 아니었어요?”

“아이참.”

“어, 혹시 그거예요? 이카? 이사님 카드? 그럼 얻어먹고요.”

사이좋게 주거니 받거니 하며 카페 문을 나섰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서로의 공통 화제인 회사 얘기로 흘러갔다. 때마침 회사 앞을 지나기도 했다. 불 켜진 연구실 창문을 올려다보며 손아름이 김규환의 흉을 봤다.

“웃기지도 않았어요. 자기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해원 씨한테 연락해 보라고 난리 치고. 어휴, 완전 꼴불견. 오죽하면 팀장님도 작작 하라고 쏴 붙였겠어요.”

무수히 찍혀 있던 부재중 통화를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눈앞에서 선을 그을 땐 함구하더니, 당사자 없는 자리에서 활개를 쳤나 보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라 놀랍지도 않았다. 다만 정해준에게 거슬리는 짓을 할까 봐, 그건 좀 걱정이 됐다.

“저기, 아름 씨 입 무거운 건 알지만, 그래도 사람들한테는 비밀로 해 줘요.”

“당연하죠! 아, 그런데…….”

흔쾌히 수긍하던 손아름이 웬일로 내 눈치를 봤다.

“왜요?”

“딱, 진짜 딱 한 사람한테는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리는데, 어떡하죠?”

“누구요?”

사람들과 두루 잘 지내는 손아름인 만큼 선뜻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스스로를 유치하다고 느끼면서도 꼭 상대가 골탕 먹는 꼴을 보고 싶은지 손아름이 바로 의문의 인물을 밝혔다.

“고해나요.”

“아…….”

고해나는 이미 눈치채고 있지 않을까 싶으면서도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였다. 머리론 당연히 아니오, 지만 심정적으로 손아름의 뜻을 들어주고 싶었다.

“음.”

고민하는 사이 명쾌한 대답이 들려왔다.

“고해나, 이미 압니다.”

“어?”

나와 동시에 뒤를 돌아본 손아름이 정해준을 발견하고 반색했다.

“이사님, 안녕하세요!”

“아직 저녁 안 먹었으면 제가 사 주고 싶은데, 시간 괜찮습니까?”

“돼요. 시간은 되는데요, 그런데 제가 두 분 방해하는 거 아니에요?”

“제가 끼어든 거죠. 손아름 씨, 초밥 좋아합니까?”

“어유, 완전 좋아하죠! 마침 초밥 먹으러 가려고 했는데요?”

“잘됐네요.”

우동에 곁들일 유부초밥이 어째서 고급 일식집 초밥으로 둔갑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자기가 잘 아는 곳이 있다며 앞장서는 정해준의 뒤를 잠자코 따랐다.

***

둘이 오붓한 시간 보내라며 식사를 마치자마자 눈치껏 일찍 빠져 준 손아름 덕분에 조금 여유가 났다.

“조금 걸을까…… 어?”

이건 무슨 반응이지? 살며시 깍지를 꼈는데 손을 슥 뒤로 뺀 정해준을 의아한 눈으로 올려보자 얕은 한숨이 들려왔다. 몸을 돌려 나와 정면으로 마주 선 정해준의 표정은 싸늘했다. 식사 자리에서 줄곧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끌 땐 언제고.

내가 뭘 잘못했나? 아님 뭐 불편했던 거라도?

답을 찾기 위해 기억을 더듬는 사이 귀를 의심케 하는 질문이 들려왔다.

“내가 부끄러워?”

“응? 갑자기 무슨……. 그럴 리가 없잖아.”

그 반대라면 모를까. 어디 내놔도 부끄럽기는커녕 실컷 자랑만 해도 모자라다는 항변에 정해준의 미간은 더욱 좁아졌다.

“그럼 나랑 만나는 거 왜 숨기라고 했는데. 무슨 얘길 그렇게 심각하게 하나 했더니 그런 괘씸한 작당이나 하고.”

어디서부터 들은 거지. 오해할 만한 대화가 있었나, 손아름과의 대화를 되짚자 기억을 흩어버리듯 내 머리 근처에 대고 손을 휙휙 저은 정해준이 심술궂게 선언했다.

“너랑 나 사귄다고 사내 게시판 공지로 박아 둘 거야.”

“……진짜?”

그렇게까지 한다고? 얼이 빠져서 멍청히 되묻자 이마에 알밤이 콩 내려앉았다.

“전혀 반갑지 않은 이 얼굴 뭔데.”

“아니…….”

나는 상관없지만, 네 회사잖아. 그냥 하는 말 같기도 하지만 정말로 그럴 것 같아서 문제였다. 반신반의하며 승부수를 던졌다.

“나는, 나는 좋은데 네가…….”

“그래? 진짜 좋아?”

“응.”

한결 누긋해진 말투에 정해준의 꼬인 심사가 어느 정도 풀어졌음을 짐작한다. 틈을 놓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펼쳤다.

“네가 곤란할까 봐 그러지. 아무래도 사내 게시판은 공적인 영역이니까.”

“핑계 좋네.”

왜 또. 말리려는 티가 너무 났나. 애가 타다 못해 혀가 말랐다. 어느 부분에서 심사가 비틀렸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화 많이 났어? 슬쩍 물어보는 게 전부였다. 내 어깨 너머 어딘가를 잠시 응시하던 정해준이 문득 낯을 바꿔 부드럽게 웃었다.

“뽀뽀해 주면 화 풀게.”

“……여기서?”

저녁이라 인적이 드문 건 그렇다 쳐도 회사 앞이었다. 당황해 주위를 둘러보려는 내 턱을 가볍게 쥔 정해준이 불만스럽게 눈살을 찡그렸다.

“솔직히 네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건지 의심스러워. 너, 너무 표현 안 하잖아.”

“아닌데.”

힘없이 중얼거렸다. 이미 종종 들었던 말이라서 아니라는 반박은 설득력이 전혀 없었다. 나름 표현한다고 하는데. 특히 둘만 있을 때는.

그거로는 부족한가. 몇 번, 훤한 대낮 대로변에서 품에 가두려는 걸 피하긴 했다.

“자. 뽀뽀.”

“…….”

턱을 쥐었던 손을 놓고 제 볼을 톡톡 두드리는 정해준의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부끄러움에 벌써부터 얼굴이 홧홧했다. 정말? 간절하게 올려다보는 눈초리에도 정해준은 요지부동이었다. 이렇게 완강하게 버텨도 정작 내가 밀면 밀려 줄 정해준을 안다. 하지만…….

네가 정말 바란다면.

양손으로 가만히 뺨을 쥐자 막상 내가 정말 그럴 줄은 몰랐는지 정해준의 상체가 움찔 떨렸다. 눈을 꼭 감고 정해준이 두드리던 지점에 입술을 눌렀다가 슬그머니 고개를 옮겨 입술을 포갰다. 따스하고 촉촉한 숨결이 정해준과 떨어진 후에도 혀끝에 머물렀다.

“됐, 어?”

돌았나 봐.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르고 나니 너무 대담했다. 그야말로 익힌 사과처럼 뜨거운 뺨을 꾹 누르면서 올려다보니 정해준도 나 못지않게 얼굴이 새빨갰다.

“너는 진짜…….”

“…….”

“미치겠다.”

기가 차서 뇌까린 정해준이 어깨를 확 당겨 안았다. 숨 막히게 그러안았다. 허우적거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건, 이건 좀……!”

“더한 것도 해 놓고.”

자기가 먼저 요구해 놓고 파렴치한 취급이라니. 어이가 없어 째려보자 그마저도 예뻐 죽겠다는 듯 머리를 마구 쓰다듬는다.

“해원아, 이해원. 내가 아주 앓다 죽겠다.”

창피하긴 했어도 이렇게 좋아하는데 얼굴이 팔리는 민망함쯤이야. 충분히 감수할 만했다는 생각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우리 둘을 보고 있는 김규환을 발견하자마자 싹 지워졌다. 설마 일부러?

황당해하며 가슴을 살짝 밀어내자 내가 김규환의 존재를 알아챈 걸 눈치챈 정해준이 도리어 뻔뻔하게 나왔다.

“사내 게시판엔 안 올려도 되겠다.”

그게 김규환 때문이었다고? 말도 안 돼. 손아름과의 대화를 다시금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김규환의 흉을 봤던 것도 같은데, 그게 질투할 거리나 되나? 애초에 비교도 안 되는 걸……. 황당해하자 정해준이 더욱 황당한 소릴 했다.

“좆 달린 놈들은 다 똑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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