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응.”
다른 취직 자리를 알아볼까. 그러기엔 경력이 너무 부족하지 않나.
팀장의 말처럼 너무 대책 없이 그만뒀다 싶기도 하다. 당시엔 그것만이 답이라고 생각했는데, 상황이 바뀌고 나니 간사하게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쪽 업계에서 넥스트메디텍만큼 대우가 좋은 회사는 찾기 힘들기도 하고.
괜히 구인 사이트에 접속해 제약회사와 바이오벤처를 둘러보는 내게 정해준이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같은 업계 갈 생각은 하지 마. 그럴 거면 다시 우리 회사 다녀. 멀쩡한 회사 놔두고 왜.”
“그럼?”
앞가림하라며. 자고로 앞가림에 경제적 독립만큼 중요한 게 있나.
“다시 공부할 마음은 없어?”
“어?”
“간절했잖아, 너.”
“…….”
“천천히 생각해 봐. 네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뭔지.”
정말 하고 싶은 게 뭔지 모르고 지낸 지 오래됐다. 수능 전날 늦도록 할머니 앞에 꿇어 있을 때, 꺾여 있던 건 무릎이 아니라 희망이었다. 그때 좌절을 맛본 이후로 줄곧 후들거리며 여기까지 흘러왔다.
바로 설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지며 정해준의 등을 슬며시 떠밀었다.
“늦겠다. 어서 가.”
“그럼 내 월급 좀 깍지 뭐.”
우스갯소리와 함께 이마에 따스한 입맞춤이 떨어졌다. 말캉말캉한 입술 도장이 남겨 놓은 달콤함을 기분 좋게 음미했다. 한번으론 아쉬웠는지 촉촉한 숨결이 몇 번 더 이마를 간질였다.
“다녀올게.”
“응.”
오후에는 손아름과 만나기로 약속했다. 밤새 짐을 싸느라 제대로 눈을 붙이지 못했다. 사야 할 물건도 몇 개 있어서 조금 잠을 청했다가 약속 시간보다 이르게 나가 볼 예정이었다.
***
다른 사람은 몰라도 손아름한테만큼은 꼭 전후 사정을 밝히고 싶었다. 갑작스레 사표를 제출했을 때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게 손아름이었다. 입사 초기부터 동고동락한 사이라 그새 정이 많이 들었다.
서운한 건 손아름도 마찬가지였는지, 만나자마자 발을 동동 굴러가며 속마음을 와르르 쏟아 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저 진짜 놀랐잖아요. 연락도 안 되고,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갑자기 얘기도 안 하고 그만둬서 미안해요. 많이 놀랐죠.”
“뭐, 저한테 미안할 일은 아니죠. 혹시……, 승아 많이 아픈 건 아니고요?”
“아, 치료받고 있어요. 지금은 경과보고 있는데 다행히 나쁘진 않은 것 같아요.”
“휴, 다행이다.”
가슴을 쓸어내린 손아름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내가 진짜, 어디 잘못된 건가 해서 물어보지도 못하고 얼마나 마음 졸였다고요.”
그러면서 이제는 얼른 제대로 된 얘기를 털어놓으라는 듯 눈을 반짝였다.
“그게…….”
막상 털어놓으려니 말문이 막혔다. 손아름이 정해준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옆에서 낱낱이 봐 왔는데 바로 그 정해준과 만나고 있다고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망설이다가 입술만 움찔거리고 마는 내게 손아름이 검지를 흔들어 보였다.
“잠깐잠깐, 내가 맞춰 봐도 돼요?”
손바닥을 잘게 비빈 손아름이 은밀한 이야기라도 나누듯 상체를 숙여 속닥거렸다.
“결혼?”
덩달아 긴장했다가 너무 앞서나간 가정에 풋, 웃음이 터졌다.
“아니에요, 그런 거.”
“에이, 난 또 청첩장 주려고 부른 줄 알았네. 그럼, 만나는 사람은 있어요?”
그냥 떠보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알고 묻는 것 같았다. 어차피 다 털어놓기 위해 나온 마당에 숨기는 건 무의미해 순순히 인정했다.
“네, 있어요. 손아름 씨도 아는 사람이에요.”
“아…….”
이번엔 손아름이 김샌 탄식을 뱉었다. 조금은 실망한 표정으로, 그러면서도 으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누군지 알 것 같아요. 이사님이죠?”
“네.”
민망해하면서도 뺨을 발갛게 물들이며 수줍게 피어난 미소에 손아름이 밉지 않게 입술을 삐죽거렸다.
“뭐야. 남자 친구 자랑하려고 불렀구나?”
“아니에요, 그런 거.”
“알아요. 그냥 장난친 거예요. 이해원 씨 그런 성격 아닌 거 내가 잘 알죠.”
그러니 이제 제대로 된 연애담을 털어놓으라며 상체까지 바싹 기울인 손아름이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도 놓치지 않겠다고 투지를 불태웠다.
“음, 사실 우린 원래 알던 사이였는데요, 고등학교 때부터요.”
“와.”
햇수를 꼽아 보던 손아름이 참을성 없이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요? 그때부터 조짐이 있었던 거예요?”
“고등학교 졸업하면서 사귀었어요. 그, 해준이랑 약속했었거든요. 대학 가면 사귀자고…….”
“웬일이야, 웬일이야. 뭐야, 잠깐만. 그럼 중간에 헤어졌다 다시 만난 거예요? 이사님이 우리 회사 인수하면서? 와, 무슨 이런 인연이 다 있어.”
호들갑을 떨던 손아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완전 운명이네요!”
손아름의 그럴듯한 포장에 아무래도 상세히 털어놓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깊이 들어가는 건 손아름이 받아들이기에 너무 무거운 얘기였다. 그래도 사실 승아는 동생의 아이인데 사정이 있어서 내가 키웠다고 언급은 가볍게 해 두었다.
“지금은 다시 동생한테 갔어요.”
“세상에. 해원 씨 너무 대단하다. 저라면 절대로 그렇게 못 했을걸요. 아무리 핏줄이라도 조카랑 자식은 엄연히 다르죠.”
그 사정이란 게 철없는 동생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 정도로 여긴 손아름이 승아가 내 친딸이 아니라는 걸 이사님도 알았던 거냐고 물었다.
“처음엔 몰랐는데…….”
“대박.”
말을 채 맺기도 전에 탄식을 터트린 손아름이 이거 무슨 드라마 아니냐고 되물었다.
“대본도 이렇게 쓰면 망할걸요?”
“그러게요.”
나도 가끔 내가 너무 현실 같은 꿈을 꾸는 건 아닌지 헷갈리는 만큼 손아름의 반응이 충분히 이해됐다. 어느 정도 털어놓고 나자 이제는 내 쪽에서 궁금증이 생겼다. 그렇게 정해준을 좋아했으면서 생각 외로 담담한 손아름이 의아해서.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요? 상대가 정해준이라는 거.”
“그야, 이사님 진짜 많이 좋아했으니까.”
“…….”
“아, 오해는 하지 말아요. 나, 지금은 마음 접었다고요. 이해원 씨가 털어놓기 전부터. 그러니까 미안하단 말도 금지. 그게 사람 더 비참하게 만드는 거 알죠?”
미리 선수 치는 것도 손아름다운 배려라 생각하며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하니까 보이더라고요. 이사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아…….”
내게 진득하게 들러붙어선 좀처럼 떨어질 줄 모르는 정해준의 눈길에 갸웃할 때가 많았다며.
“그런데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 줄은 몰랐네요.”
내가 지나친 순간에도 내게 닿아 있었다는 정해준의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미안해서 콧날이 시큰해졌다. 붉어진 눈시울을 모른 척하며 손아름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회사는 왜 그만둔 거예요? 사내 연애는 좀 그래서? 아니면 이직? 괜찮은 데 있으면 나도 같이 데려가요.”
“언젠 넥스트메디텍에 뼈를 묻겠다면서요.”
“그건 그래요.”
자신의 너스레에 능청스레 대꾸하자 손아름이 깔깔 웃으며 손뼉을 쳤다. 마주 웃다가 조금 마음이 느슨해진 틈을 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정말 해 보고 싶은 게 뭔지 모르겠다고. 남들은 경력을 쌓아가는 시기에 새로이 무얼 시작하는 게 옳은 선택인지도 모르겠다고.
“나이가 대수인가요. 보아하니 이사님이 팍팍 지원해 줄 것 같은데 도전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도 복이라고요.”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정해준이 내게 베푸는 특별한 호의가 누구에게나 쉽게 주어지는 행운이 아니라는 걸 잘 안다. 하지만 그래서 두려웠다. 실패할까 봐, 모처럼의 기회를 날려버릴까 봐.
주저하는 내게 손아름이 마침 생각났다며 지인 얘기를 들려주었다.
“같은 과 동기 중에 학번은 같은데 삼수해서 나이는 두 살 많은 언니가 있었거든요. 의대가 목표였는데 수능을 망치는 바람에 대강 점수 맞춰 왔대서 그런가 보다 했죠.”
손아름이 내 사정을 알고 하는 얘기도 아닐 텐데, 비슷한 점이 많아 절로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얘기였다.
“학교 다닐 때도 엄청 방황하더라고요. 적성에도 안 맞고, 학사경고도 한 번인가, 두 번 받고. 성적이 안 좋으니까 졸업하고서도 전공 살리지 못하고 동네 작은 보습학원에서 애들 가르쳤어요.”
“그럴 만하네요.”
나도 즐겁게 다니진 않았다. 다시 공부할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대학 졸업장이라도 따자고 억지로 버텼다.
“그래서요?”
“하루는 자려고 누웠는데 도무지 잠이 오질 않더래요. 나는 이렇게 살다 죽는 건가? 뭐 그런 생각이 뜬금없이 들었대요.”
“…….”
“죽으면 뭐가 제일 후회될까, 자연히 그런 쪽으로 생각이 흘렀다나 봐요. 곰곰이 떠올려 보니까 한 번 더 도전해 보지 않은 게 후회될 것 같았대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그것만은 꼭! 해 볼걸, 하는 거요.”
자신의 얘기에 몰입하다 못해 자못 심각해진 내 분위기에 손아름이 그럴 거 없다며 손등을 토닥였다.
“그 언니처럼 비장할 건 없지만, 미련 남는 일 하나 정도는 누구나 있게 마련이잖아요. 전 대학 때 해외여행 길게 다녀오지 못한 게 후회돼요. 그때 집안 사정이 살짝 안 좋았었거든요. 그래도 간다면 보내 줬을 텐데 괜히 부모님 눈치 보느라. 에이, 빚을 내서라도 다녀올걸. 이제는 시간도 없고 체력도 영 예전 같지 않고.”
자기 말하는 것 좀 보라며, 꼭 할머니 같다고 손아름이 또 깔깔 웃었다.
“그래서 그 언니는 어떻게 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