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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과-72화 (72/77)

72화

이소원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너무 직설적인 나머지 제가 뭘 들은 건지 이해가 안 되는 듯했다. 멍청히 눈만 껌벅이는 이소원에게 정해준이 친절히 일러 주었다.

“너 사고 친 거 말하는 거야. 승아, 네 아이 맞지?”

“그건, 그게…….”

“남의 둥지에 알 낳는 뻐꾸기도 아니고 사람 노릇은 해야 할 거 아니야.”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 집에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사지 멀쩡히 잘만 지내면서 애를 버리는 건.”

“버린 게 아니고, 할머니랑 엄마가…….”

더듬거리던 이소원이 원망 섞인 시선을 내게 돌렸다. 이내 정해준이 다시 잡아채 갔지만.

“남 탓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어?”

이번만큼은 이소원도 할 말이 많은 듯했다. 꽉 쥔 주먹이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렸다. 과연 뭐라 할까. 자못 궁금한 마음으로 지켜봤다. 대체 네가 그리 분할 일이 무엇인지.

“퍼트리고 다니면 어떡해? 비밀 지키기로 한 거 아니었어?”

“뭐……?”

이소원의 터진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너무 황당해 어안이 벙벙했다. 이소원의 적반하장에 정해준조차도 조금 놀란 듯했다. 이내 미간을 확 구기긴 했지만.

“이건 뭐 말이 안 통하네.”

거친 말투에 이소원이 움찔 놀라 상체를 젖혔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 어디 있어? 됐고, 협조 좀 하자. 개망신당하기 싫으면.”

정해준이 긴 팔을 뻗어 이소원의 머리카락을 움켰다. 힘들이지 않고 머리카락 여러 가닥을 손에 쥐었다. 비닐봉지에 담기는 머리카락을 보는 이소원의 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그거로 뭐 하려는……?”

“보면 알겠지. 그 전에 네가 먼저 어른들 설득하면 더 고맙겠다.”

전혀 기대하지 않는 투였다. 정해준이 깔끔하게 할 일을 마치자마자 휴대전화 진동이 울렸다.

“잠시만.”

“다녀와.”

오랜 시간 자매로 지냈는데, 막상 둘만 남자 할 말이 없었다. 정해준의 공백과 동시에 감돌기 시작한 이소원의 적의가 살갗을 찔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이소원이 너무 흥분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승아 호적 옮겨도 바로 보내진 않을 거야. 승아가 잘 적응할 수 있게 심리상담도 병행할 거고.”

최대한 협조하겠다는 의견은 바로 묵살당했다.

“정 없는 년.”

“…….”

“애가 불쌍하지도 않아? 아니지, 너같이 매정한 년 밑에서 큰 승아가 불쌍하지.”

궁금했다. 가까운 시일 내에 반드시 만취할 이소원이, 이렇게 독살스럽게 굴어 놓고도 내게 주정을 부릴지. 이제는 받아 주지 않을 거지만.

“내 잘못 아니야.”

“뭐라는 거야?”

히스테릭하게 되묻는 이소원에게 다시 한번 차분히 답했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어린 시절의 내게도 꼭 들려 주고 싶은 말이었다.

“나한텐 선택권이 없었어. 너처럼 어렸으니까. 네가 엄마 손에 이끌려 우리와 인연을 맺었듯이, 나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너희 집에 맡겨졌을 뿐이야. 난, 아무 잘못 없어.”

“와, 이 뻔뻔스러운 게 먹튀를 하려고 하네? 그래서, 우리 집에서 너한테 들어간 거, 날름날름 받아먹고 이제 와서 발뺌하려고? 야!”

“고마웠던 건 인정해. 좋은 집에서 예쁜 옷 입고 맛있는 거 먹으면서 덕분에 잘 지냈어. 그런데 소원아.”

“왜!”

꽥 쏘아붙이는 이소원에게 가만히 짚어 주었다.

“그거, 네가 한 거 아니잖아.”

“뭐, 미친, 야, 뭐라고?”

“엄마하고 할머니가 해 주신 거잖아. 넌 나한테 그러면 안 돼.”

얼빠진 이소원의 표정이 정말 미친 여자를 만난 듯했다. 내게 욕할 생각도 잊고 숨이 막혔다 터지는 듯한 헛웃음만 연신 흘려 댔다.

“승아 때문에 받았던 양육비, 생활비 다 돌려 드릴 거야. 그동안 키워 준 값, 달라면 드릴 거고.”

계산이 될까. 키워 준 값이라는 게. 말 그대로 재워 주고 입혀 주고 먹여 주기만 했을 뿐, 내게 준 애정이 없으니 산술적으로는 쉬울 듯도 했다.

“빚진 거 없어, 이제.”

말은 담담히 잘 꺼냈는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가. 다신 보지 말자.”

이만하면 알아들었을 법도 한데, 이소원은 움직이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확인하니 어느새 이소원의 두 눈도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무슨 의미인지 구태여 헤아리지 않으려 애썼다. 일일이 따지기엔 얽힌 상처가 복잡했다.

“거짓말이야.”

이만 악연으로부터 등을 돌리자, 이소원의 고백이 비수처럼 꽂혔다. 갑자기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하게 되돌아봤다.

“뭐?”

“너희 아빠, 꽃뱀이라는 거 거짓말이라고.”

“지금 그게…….”

눈앞이 하얗게 번지며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대로 주저앉은 내 눈치를 살피며 안절부절못하는 이소원을 차게 쏘아보았다. 정확히는 노려본 게 아니라 눈에 힘을 준 거였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혼란하여 정신이 어떻게 되어 버릴 것 같았다.

“뭐라고…… 했어?”

“거짓말이라고. 네 아빠가, 우리 집…… 망쳤다는 거. 꽃뱀 아니래!”

“…….”

“미안!”

거듭 같은 소리를 들었음에도 여전히 이소원이 뭐라는 건지, 오래도록 세뇌되어 온 뇌는 상반되는 정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물음표만 띄웠다. 쉬이 믿지 않는 눈치에 이소원이 술술 털어놓았다.

“어른들끼리 얘기하는 거 들었어. 엄마가, 처음에 유부녀인 거 속이고 접근했었대. 이혼까지 하고 오니까 너희 아빠가 어쩔 수 없이 받아 준 거고.”

“…….”

“그때쯤엔 우리 엄마한테 은근 정도 들었던 것 같아.”

이소원이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재산 노린 것도 아니었다고, 엄마 집안에 관해선 결혼하고 나서 알았다고. 아빠는 그냥 단란한 가족을 꾸리고 싶어 했던 것뿐이라고.

생애 전반을 부정당한 기분에 멍해졌다. 다 거짓이었다고? 돈만 밝히는 더러운 핏줄도, 은혜를 모르는 짐승 같은 핏줄도, 다 아니었다고? 그거야말로 진짜 거짓말 같아서, 거짓말이어야 하는 이유를 찾았다.

“그 얘기를, ……왜 지금에서야 해?”

“나, 사실대로 얘기해 줬으니까 승아한테 김성철 나쁘게 말하지 말라고.”

“하, 하하.”

너무 기가 막히면 웃음이 나온다는 사실을 새로이 배웠다. 사람이 이렇게 끝까지 자기만 생각할 수 있나. 다 알고 있었으면서, 그동안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는데?

혐오감이 치밀어 올랐다. 당장에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은데, 뺨이라도 올려붙여야 할 것 같은데, 할 수 있는 거라곤 겨우 자리를 뜨는 것뿐이었다.

“해원아.”

근처에서 말없이 지켜보던 정해준이 안쓰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 힘든 일은 다 끝났다고, 따스한 눈빛으로 나를 감싸 안으며. 안온한 품이 시린 세상을 가려 비로소 울 수 있었다.

“우리, 우리 아빠가, 아빠가……! 어떻게 그래? 사람도 아니야, 다들……!”

“알아. 다……, 알아.”

두서없이 쏟아 내는 아픔을 온전히 떠안으며 정해준이 가만가만 달랬다. 오늘은 실컷 울라고. 아빠를 모셔 둔 납골당에도 다녀오자고. 그다음에는 그저 행복하기만 하자고. 고통도 슬픔도 더는 없을 거라고.

“내가 다 잊게 해 줄게.”

나직하나 힘이 실린 언약에 울음이 잦아들었다. 잘게 흐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석 부리듯 새끼손가락을 찾아 걸자, 뜨거운 입맞춤이 이마에 떨어졌다. 사랑이 달콤하게 내려앉았다.

***

나 혼자 보내기엔 영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정해준은 휴가까지 내가며 납골당에 따라왔다. 한사코 괜찮다고 만류하자 꼭 같이 가야만 하는 이유를 대며 진지하게 설득해 왔다.

“나도 아버님께 인사드리고 싶어서 그래.”

“어?”

“말씀드려야 할 거 아니야. 우리 예쁜 해원이 낳아 주셔서 감사했고 이젠 내가 책임지고 행복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편히 쉬시라고.”

“…….”

“사위 녀석 얼굴도 보여드려야 하고.”

고맙다는 말밖엔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마저도 하지 못했다. 목이 메어서……. 시큰하게 달아오른 눈가를 모른 체, 잔디밭을 천천히 지나며 정해준이 물었다.

“얼마 만이야?”

“음, 거의 처음인 것 같아.”

부끄럽지만 사실이었다. 아빠를 보고 싶어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말마따나 멀쩡한 남의 가정을 깨트린 나쁜 사람이니까.

세상에 없는 아빠 대신 죄를 짊어지면서 원망도 많이 했다. 아빠가 미운데 또 보고 싶어서,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다시 응석을 부려 보고 싶어서, 그런 내가 싫어서 온통 혼란했던 어린 시절을 곱씹다 보니 어느새 납골당 내부였다.

안치되어 있는 유골함에 새겨진 이름을 하나하나 확인하다 마침내 익숙한 이름 앞에 섰다.

이진헌.

한때는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였던 이름을 조심조심 불렀다.

“이, 진자, 헌자. 우리 아빠 성함이야.”

“안녕하세요.”

마치 진짜 아빠가 있는 것처럼 정해준이 자연스럽게 인사했다. 우스운 상황이 아닌데, 너무 천연덕스러운 게 어이없어서 입꼬리가 절로 호를 그렸다. 유골함 옆에 놓인 사진을 확인한 정해준이 감탄했다.

“네가 누구 닮아서 예쁜지 알겠다.”

그러곤 다시 정중하게 인사했다.

“해원이 예쁘게 낳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님. 정해준이라고 합니다. 해원이 남자 친구, 아, 곧 결혼할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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