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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과-71화 (71/77)

71화

상처 입은 동물을 대하듯 조심스럽게 다가온 정해준이 젖은 뺨을 감싸 쥐었다. 올곧은 시선이 날카롭게 심연을 꿰뚫었다.

“그러니 알아야겠어. 해원아, 이해원.”

아기를 달래듯 다정한 음성은 집요했다. 흔들림 없이 가장 약한 틈만을 파고들었다.

“너 왜.”

말하면서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는 듯 정해준이 헛웃음을 흘렸다.

“왜 남의 아이를 키우고 있어? 대체 네가 왜…….”

애써 포장해도 고약한 냄새는 숨길 수 없다. 아무리 오래 묻어 두어도 끝내 드러나고 마는 진실은 얼마나 추악한가. 허물 벗겨진 살갗에 소금을 뿌린 것처럼 온몸이 아려 한껏 움츠러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걸 숨겨 왔기 때문에 정해준은 정작 아무것도 모르는데 스스로에게 쏘아붙이는 눈총이 그렇게나 따갑다. 하물며 네 비난은 얼마나 아플까. 많이 아팠으면 좋겠다. 아파서 콱 죽어 버렸으면, 그랬으면 좋겠다.

“빚……, 갚아야 해서.”

두려움에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이제야 깨닫는다. 네게 미움받는 것보다 초라한 내 모습이 밝혀질까 더 무서워했다는 것을. 이 얼마나 이기적인 사고방식인가.

“빚?”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듯 잠시 침묵을 지키던 정해준이 연달아 질문을 퍼부었다.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듯했으나 분노로 가늘게 떨리는 음성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무슨 빚? 그게, 그게 얼만데? 아니, 아니지. 빚을 얼마를 졌든 그게 말이 돼? 피 한 방울 안 섞인 생판 남의 애를? 어떤 미친 인간이…….”

“내가 그렇게 자랐으니까. 나 자체가 빚이야.”

“……그게, 그게 무슨…….”

경악으로 벌어진 정해준의 눈을 차마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무어라 말할 것처럼 어물어물하던 정해준이 입을 틀어막았다. 단단히 가로막힌 입술 사이로 무거운 침음이 흘러나왔다.

“승아, 이소원 아이야. 나하고 배도 다르고 씨도 다른 내 동생.”

“당장 얘기하지 않아도 돼. 강요 안 해.”

자신이 건드린 게 곪을 대로 곪은 상처라는 걸 알아챈 정해준이 급하게 막았지만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막상 털어놓으니 별일도 아니었다. 후련하기만 한데, 왜 진작 얘기하지 못했을까. 아마, 정해준과 같은 이유에서일 거다.

너니까. 너라서. 네가 좋아하는 내 모습을 포기할 수 없어서.

“이해원.”

“나를 낳아 주신 어머니는 내가 아주 어릴 때 돌아가셨거든. 초등학교 때 아빠가 이소원네 엄마랑 재혼하셨어. 그런데 아빠마저 얼마 안 있다 돌아가셔서……. 그런 시시한 얘기야.”

이만하면 설명이 충분히 되었을까. 모르겠다. 그냥 한없이 쓸쓸하기만 했다.

“부잣집 공주님도 아니고, 엄격하고 검소한 가풍에서 바르게 자란 것도 아니야. 그런 거 바라면 안 되는 처지기도 했고…….”

그런데 정해준이 공주님이라고 하니까 정말 공주님이 된 것 같았다. 바르다고 하니까 정말 바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네가 원하는 사람이면 그게 무어든 되고 싶었다. 그마저 거짓이겠지만.

“내가 말했잖아. 난 진짜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름 언질을 줬으니 너를 완전히 속인 건 아니었다는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을까. 몇 번이고 되뇌었다. 난 진짜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렇게 보잘것없는 나라서 미안하고 죄스러웠다고. 그런 주제에 너를 욕심내서…….

“숨겨서 미안해.”

“…….”

“정말 미안해.”

이럴 줄 알았으면, 이렇게 말도 안 되게 허무하게 밝혀질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그때 밝힐 걸 그랬다. 그럼 널 그토록 아프게 하지 않았을 텐데.

정해준의 눈가가 승아를 업고 오던 길의 석양만큼 붉었다. 처참하고 아름다웠다. 감히 담지 못하고 체념하며 눈을 감았다.

해가 저물면 완전한 암전이겠지.

섣부른 체념이었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찌르는 듯한 흉통과 함께 눈을 떴을 때 정해준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오랜 기다림의 끝자락을 빌어서.

“그래서.”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후에 입을 연 정해준의 음성은 차분했다. 표정을 확인했으나 또한 평온해 보여 더욱 헷갈렸다.

“넌 어떻게 하고 싶어?”

가만가만 눈물 젖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는 손길이 다정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답지 않게 손끝이 차게 식어 있었다. 그래서 정해준이 내게 내색하지 않으려 화를 꾹 눌러 참고 있다는 걸 알았다.

어디를 향한 분노일까. 오그라드는 기분으로 작게 대꾸했다.

“어떻게 하고 싶냐니, 뭘?”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한 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승아와 둘의 소박한 일상을 꾸려 나가고 정해준은 정해준 대로 각자의 길을 걸어가는 거라고.

그러나 정해준에게는 아니었나 보다. 나와의 새로운 시작을 꿈꾸고 있다는 걸, 강한 의지가 드러나는 눈빛에서 알았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

자신이 없었다. 자유로워지는 순간을 그려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마음 한구석에서 늘 갈망해 왔다. 아마도 먼 훗날에, 승아가 어른이 되고 나면 가능할 거라고. 비밀스러운 욕망이었다.

어쩌면, 아니 확실했다. 정해준이 내가 원하는 바대로 이뤄 줄 거라는 건. 하지만 막상 바라던 순간이 오자 망설여졌다.

그래도 될까. 승아가……, 많이 혼란스러울 텐데.

나를 따라 승아가 잠들어 있는 문을 흘긋 바라본 정해준의 낯에 잠시 안쓰러운 빛이 스쳤다. 이어 그보다 몇 배는 애달픈 눈빛이 내 뺨에 닿았다.

“네가 감당할 몫이 아니야.”

멈칫거리는 속을 낱낱이 읽어 낸 정해준이 신중하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다른 식으로 지켜 주고 사랑할 방법이 있을 거야.”

그 방법이 꼭 엄마로서는 아니라고, 정해준이 부드럽게 설득했다.

“승아, 자라면서 부족한 거 없도록 내가 아낌없이 지원할게. 필요하다면 심리 치료도 병행할 거고.”

“……고마워.”

자꾸, 고마운 일이 생긴다. 예전에도 지금도. 갚을 수 있을까. 생을 이어 갈수록 빚질 일만 늘어 간다. 죄스러워 명치 아래에 추가 매달린 것처럼 가슴이 내려앉았다. 동시에 꺼림칙한 감정이 일었다. 엄밀히 따지면 이건 정해준이 책임질 일이 아닌데. 정해준은 그들에게 아무것도 빚지지 않았으니까.

주저하는 속내를 정확히 읽어 낸 정해준이 명심하라며 단호하게 딱 잘라 말했다.

“분명히 말해 두는데, 아이 위해서 하는 거 아니야. 너 위해서지.”

그 언젠가 할머니가 했던 말이 겹쳐졌다. 양육비를 비롯한 생활비를 대주는 거, 승아를 위해서지, 나를 위한 게 아니라고.

이런 식으로 상처를 또 지워주는구나 싶어 그저 고마웠다. 분에 넘치게 고마워서 몸 둘 바를 모르는 나를 정해준이 나직하게 달랬다.

“그러니까, 해원아.”

“…….”

“괜찮으니까 네 마음이 어떤지 말해 봐.”

해원아, 솔직하게.

부드러운 채근에 겨우 입을 벙긋거렸다. 차가운 자갈을 문 것처럼 혀가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겨우 신음처럼 토해 낸 세 마디를 정해준은 용케 알아들었다.

버거워.

***

몇 년 전이지만 한번 따끔하게 혼난 적이 있어서인지 이소원은 제가 알아서 설설 기고 있었다. 와중에도 정해준과 나란히 앉아 있는 나를 선망의 눈길로 훔쳐보다가 우리가 꼭 마주 잡은 손에 질시 어린 속내를 숨기지 않기도 했다.

“무슨 일로……, 보자고 했어?”

용건을 대강 짐작하는 것 같으면서도 이소원이 조심스럽게 물으며 반응을 살폈다. 정해준이 즉각 받아쳤다.

“왜 불렀을 것 같아?”

거추장스러운 가식 따윈 싹 걷어 낸 정해준의 기세가 흉흉하다. 위압감을 느낀 이소원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잘 모르겠…….”

못된 짓을 하다 들킨 어린애처럼 눈알을 굴리며 회피하려는 이소원의 모습에 정해준의 낯에서 웃음기가 지워졌다. 말이 통하지 않는 금수를 대하듯 가차 없이 쏘아붙였다.

“모르긴 뭘 몰라. 가증스럽게 굴진 말자.”

어물쩍 넘어갈 상황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이소원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입술을 비죽였다. 그래도 용케 참은 건 워낙 분위기가 살벌한 탓일 거다. 한참 망설인 끝에 이소원이 겨우 입술을 씰룩거렸다.

“할머니랑 얘기하세요.”

한심한 대응에 당장 정해준의 입매가 비딱해졌다.

“성인이잖아.”

“그래도 집안의 제일 큰 어른한테 먼저 얘기하는 게 순서 같은데…….”

스스로도 민망했는지 이소원이 말끝을 흐렸다. 재밌네, 음산하게 중얼거리는 정해준을 놀란 눈으로 살피며.

“그럼 섹스할 때도 어르신하고 상의하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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