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어떻게든 한 번은 더 대면할 일이 생길 거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그렇습니까.”
시선은 나와 똑바로 맞춘 채, 정해준이 진중한 태도로 고개를 살짝 위아래로 흔들었다. 마치 김 여사님의 얘기를 경청하기라도 하듯이.
시간대를 미뤄 볼 때, 다행히 둘은 조금 전 우연히 마주친 듯했다. 내가 걱정할 만한 얘기도 오가지 않았다.
“해원 학생이 애 보느라 평소에도 먹는 게 부실하거든. 애가 아프니 끼니나 제대로 챙기나 모르겠네.”
소소한 한담인데도 이상하게 속이 울렁거렸다. 예기치 않게 맞닥뜨린 정해준 때문인지, 상황이 뜻하지 않게 흘러갈까 봐 이는 조바심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당장 김 여사님께 알은체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조차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이러지 말고 같이 들어가자. 해준 학생도 반찬 좀 챙겨가. 내가 손맛은 자신 있거든.”
“그럴까요.”
주인도 없는 집을 향해 사이좋게 걸음을 옮기는 둘을 멍하니 보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제 그렇게 돌아서 놓고 정해준과 집 안에 단둘이 남게 될 상황을 그리니 눈앞이 아찔했다.
내가 쫓는 줄도 모르고 김 여사님은 여전히 친근하게 정해준에게 수다를 늘어놓았다.
“그나저나 걱정이야. 어쩌면 다행이라 해야 할지.”
“다행이라고요?”
“승아랑 둘이 혈액형이 달라서. 해원 학생이 제 피라도 몽땅 뽑아 줄 태세라 어찌나 마음이 안 좋던지.”
“네.”
울렁거림이 더욱 심해졌다. 금방이라도 구역질이 올라올 것처럼 가슴이 선득거렸다. 김 여사님께는 죄송하지만 이제 그만 입을 다물어 주었으면 했다. 그러나 끝내…….
“승아가 AB형이거든.”
숨기고 싶던, 숨겨야만 했던 진실이 비죽 비어져 나왔다.
“……AB형이요.”
알아 버렸구나. 무언가를 감지한 듯 낮게 억눌린 음성에 울렁거리던 속이 싸하게 내려앉았다. 혈액형쯤이야 우리가 사귀기로 한 첫날, 궁금한 것 물어보기를 주고받으며 이미 다 밝힌 바였다. 우리가 유일하게 같은 점이기도 했다. O형.
승아의 친부가 어떤 혈액형을 갖고 있든 내가 O형인 이상 AB형이 나올 확률은 극히 희박했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정해준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김 여사님 어깨너머의 나를 응시했다. 어둡게 가라앉은 두 눈에 붙들린 듯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미묘하게 달라진 분위기에 정해준을 따라 뒤를 돌아본 김 여사님이 나를 발견하고 환히 웃으며 다가왔다.
“어? 해원 학생! 오는 길에 차는 안 막혔어? 마침 잘됐다. 얼른 들어가서 밥 차려 먹어. 어유, 이 앙상한 팔 좀 봐. 그러니까 꼭 챙겨 먹어. 새 밥 해 놨으니까, 응? 냉장고에 있는 반찬통 꺼내서 뚜껑만 열면 돼. 둘이 먹음 딱 좋겠네.”
“고맙습니다.”
콱 막힌 목구멍을 쥐어짜 겨우 대답했다. 내가 사표 낸 걸 알 길이 없는 김 여사님은 마냥 흐뭇해하셨다.
“둘이 붙여 놓으니까 아주 그냥 선남선녀네. 내가 방해하면 안 되지. 좋은 시간 보내요들.”
김 여사님의 수선스러운 웃음이 사라지자마자 사위에 둔중한 정적이 내리깔렸다. 김 여사님과의 대화를 곱씹는 듯 혼란한 표정으로 한참을 이를 악물고 섰던 정해준의 두 눈이 등에 업힌 채 잠든 승아의 동그란 얼굴에 잠시 머물렀다 도로 내게로 향했다.
“내가 지금.”
기막혀하는 웃음이 탁 터져 발치에 가시처럼 뿌려졌다.
“재밌는 얘기를 들은 것 같아서.”
“…….”
“재미는 있는데…….”
“…….”
“이해가 안 되네.”
정해준은 이미 답을 찾았다. 그러니 해명을 요구하는 거겠지. 단단히 버티고 선 자세에서 진실을 듣기 전엔 한 발짝도 떼지 않겠다는 의지가 읽혔다.
어떻게 하지. 절망스러운 기분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언제까지고 기다릴 정해준을 알아서, 늘 그랬듯이.
숨 막히는 대치 속에 잠에서 깬 승아가 눈을 비비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엄마, 다 왔어?”
몽롱한 목소리에 힘이 실린 건 정해준을 발견하고 나서였다.
“어? 아저씨!”
“……승아 저녁 먹여야 해.”
잠시 팽팽했던 긴장이 풀린 틈을 타 겨우 정해준을 지나쳐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석상같이 서 있던 정해준이 바로 뒤따르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차마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디 하나 숨을 구석 없는 좁은 집 안에 들어서자 막막한 기분은 배가 됐다. 솔직히 말하면 다음에 다시 약속을 잡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은 이만 가 주었으면 했다. 내 감정조차도 버거운 이런 날엔.
“……오늘 어머님 만나는 거 아니었어?”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
도무지 정해준을 상대할 자신이 없어 겨우 어색하게 운을 뗀다는 게 악수를 두고 말았다. 고해나 씨, 하고 어물거리다 꼭 고자질하는 모양새에 그냥 입을 다물고 괜히 시간이나 계산했다.
아예 가족 모임에 가지 않았거나 식사 후 바로 온 것 같은데,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몰라도 오랜만에 귀국한 어머니와 회포를 풀기엔 너무 부족한 시간 아닌가. 이 와중에 무슨 오지랖인지.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무슨 일 있었냐는 걱정 어린 물음을 접고 끊어 내듯 뱉었다.
“여긴 왜 왔어.”
“그냥 네가 신경 쓰여서. 너 왜…….”
“…….”
자신도 믿기지가 않는 것처럼 이마를 짚고 잠시 말이 없던 정해준이 거칠게 뱉었다.
“아까 왜 그렇게 울 것처럼 서 있었는데.”
“…….”
틈을 보아 이만 가 달라고 요구하려 했는데, 그만 말문이 탁 막혔다. 고작 그거 때문에. 나 같은 여자 때문에, 내가 뭐라고, 네가 왜. 울고 싶은 심정으로 이를 앙다물었다.
때마침 옷을 갈아입고 나온 승아가 의사 놀이를 하자고 정해준을 이끌어 뜨겁게 맺힌 눈물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저녁을 준비하는 척, 잽싸게 눈물을 훔치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냥, 그냥 평소처럼만…….
하나 정해준이 한 공간에 머무르는 이상 좀처럼 평정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결국 묵묵히 앉아 모래알을 씹는 기분으로 밥만 퍼먹었다.
드문드문 아이를 사이에 두고 기묘한 대화가 이어지기도 했다. 내가 승아에게 이야기하면 승아가 그걸 정해준에게 전달하고, 다시 정해준이 승아를 통해 내게 할 말을 전하는.
다행히 승아는 둘 사이에 흐르는 긴장을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그저 정해준이 재미있게 놀아 주니 마냥 즐거운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밥풀 한 알 남기는 법 없이 밥 한 그릇을 싹싹 비운 승아는 웬일로 칭얼거림 없이 씻는 것까지 일사천리로 끝냈다. 잠자는 시간이 아까운 듯 억지로 눈을 깜박이며 종알거리던 승아가 겨우 잠든 후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처럼 적막만이 흘렀다.
도무지 거실로 나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가슴을 꾹 누르고 들쑥날쑥한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야 겨우 문을 열었다. 불 꺼진 거실에 혹 돌아갔나 싶어 안심한 것도 잠깐이었다. 소파에 앉아 있는 검은 인영을 본 순간 애써 가라앉힌 숨이 도로 불규칙해졌다.
턱을 괴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정해준이 문 닫히는 소리에 시선을 내게 못 박았다. 어둠 속에서도 형형한 두 눈이 설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 순간, 잠시나마 나약해졌었던 자신을 탓한다. 감히, 네게 의지하고, 너를 바랐던 나를.
그래서는 안 됐다. 얄팍한 빈껍데기조차 산산이 부서질 선택 같은 건. 까짓 알량한 자존심이야 얼마든 버릴 수 있지만, 긴 시간 내게 속고, 또 속은 너를 위해서는. 설령 내가 속인 걸 알더라도 기꺼이 속아줄 너라는 걸 알면서, 그래선 안 됐다고.
정해준을 기만한 벌은 끝내 진실을 숨기는 걸로 대신하려 한다. 또, 홀로 침잠할 시간이었다. 잠시나마 물 밖에 나와 숨통이 트였던 걸로 충분하다고. 그리던 달을 봐서 기뻤다고, 그거면 됐다고.
“해 줄 얘기 없어. 이만 돌아가 줘.”
나와 승아와의 관계가 어떻든 정해준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그러니 이제 우리의 삶에서 나가 달라고. 한 마디 한 마디 담담하게 뱉을 때마다 비수에 베인 듯 혀에 날카로운 통증이 일었다.
“그래.”
좀 더 고집부릴 거란 예상과 다르게 정해준은 돌아가 달라는 내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가기 전에 승아한테 인사는 하고. 그건 되지?”
그것마저 쳐 내면 너무 매정한 것 같았다. 승아에게 무척 다정했던 정해준이었으니까. 고개를 끄덕이자 겉옷을 집어 든 정해준이 승아의 방으로 향했다. 허탈한 기분으로, 홀린 것처럼 정해준의 뒤를 따랐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해준은 잠든 승아의 머리를 조심조심 쓸어내리며 조막만 한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마음이 너무 아픈 나머지 열이 끓는 것만 같다. 무심코 이마를 짚다가 정해준의 손바닥에 놓인 승아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 발견하고 사고가 정지했다. 하얗게 탈색된 머릿속에 친자 확인, 유전자 검사 같은 용어가 혼란하게 떠올랐다 사라졌다.
“네가 얘기 안 하면 내가 직접 확인해.”
“왜…….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마지막으로 승아를 보고 가겠다는 정해준의 말에 다른 의도가 숨어 있으리란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내가 절망으로 암울하게 물들수록 정해준은 차게 가라앉았다. 단순히 남의 아이를 키우게 된 사정이 아닌, 보다 음습하고 퀴퀴한 냄새를 맡은 낌새가 역력했다.
“제발…….”
음성의 끝자락이 가늘게 떨렸다. 내가 소리 없이 흐느끼고 있던 걸 알게 된 정해준이 담담하게, 그러나 단단하게 답해 왔다.
“너니까.”
“…….”
“너는 포기가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