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날 맞은 팀장의 표정은 사직 의사를 밝히자마자 대번에 구겨졌다. 사직서 한 번, 나 한 번 번갈아 쳐다보고 한숨을 푹 내쉬길 반복하던 팀장이 질책했다.
“아니,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이해원 씨, 이거 지금 되게 무책임한 행동인 거 알아요?”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태도가 강경하자 팀장이 좋게 타이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이런 법이 어디 있냐고, 무슨 사정인지 얘기나 들어 보자고. 들려주기 난처한 사정이라고 함구하자 낯빛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아무래도 연구 실적이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진행하는 프로젝트까지는 마쳐야지. 안 그래?”
“인수인계는 철저히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인수인계 정도로 되겠어? 사람 손 많이 타는 일인 거 알면서. 기다려 봐요. 나도 위에 얘기는 해야 하니까.”
“네, 그리고 저……, 오늘 오전 근무 마치고 병원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이것도 정말 죄송합니다.”
“아이가 많이 아파요? 그래서 그런 거야? 그럴수록 직장은 놓으면 안 되지. 병원비도 만만찮을 텐데. 붙잡으려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같이 애 키우는 입장이라 자꾸 말이 길어지네. 해원 씨, 다시 생각해.”
“고맙습니다, 팀장님.”
마지막 인사는 진심이었다. 이렇게 진정으로 생각해 주는 사람이 몇 없었으니까. 진심으로 고마웠다. 그럼에도 굳은 퇴사 의지를 확인한 팀장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단 보류해 둘 테니까 며칠 더 생각해 봐. 병원은 다녀오고.”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고 제 자리로 돌아와 실험 스케줄을 조정했다. 손아름의 걱정스러운 눈빛이 따라붙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였다. 겉으론 담담하게 평온을 가장했으나 속은 진창이었다. 인수인계를 위해 지난 데이터를 정리하려다 그냥 건드리기만 한 꼴로 연구실을 나섰다.
***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진료실에 들어선 순간 직감했다. 큰 병원으로 가 보라고 권유했던 의사의 눈이 매처럼 정확했다는 것을. 긴장하며 귀를 기울였지만, 납득할 수 없는 단어들만 들려왔다.
희귀, 난치, 예후 불량…….
“자가 면역 질환의 일종으로 보고 있는데, 아직 정확한 기전은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몹시 애석해하며 운을 뗀 의사는 승아의 피부에 난 자반이나 멍이 내장 조직에서도 이미 다수 발발해 있을 거라고 단언했다. 규명되지 않은 원인에 의해 적혈구의 형태가 비정상적이며, 이를 외부인자로 인식한 체내에서 과도한 면역 반응이 일어나고 있다고.
“현재로서 적용할 수 있는 치료법은 주기적인 적혈구 수혈 정도입니다.”
“수혈……이요?”
“빈혈 증상이 있었을 텐데, 아이가 자주 피곤해하거나 짜증을 부리진 않던가요? 이유 없이 멍할 때도 종종 있었을 거고.”
“그게…….”
아파서 그런 거였다니. 까맣게 몰랐다. 울컥 터진 눈물에 서둘러 눈가를 훔치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릴 때는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며 건조한 위로를 건넨 담당의의 표정이 문득 무거워졌다.
“당분간은 수혈하며 경과를 관찰하겠지만, 심할 경우에는 비장 절제술을 고려해야 합니다.”
수술이란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수술의 예후는 좋은 편이라지만 그로 인해 생길 가능성이 있다며 나열하는 합병증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자연적으로 회복되는 증례도 보고되고 있으니 미리 걱정하지는 마세요. 무엇보다 보호자가 마음을 굳게 먹는 게 중요해요.”
“네.”
맥없이 대꾸하고 진료실을 나와 눈에 보이는 아무 벤치에 쓰러지듯 기댔다. 엎친 데 덮친다고 연달아 안 좋은 일이 겹치니 정신적인 피로감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멍하니 앉아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최소 5년이 넘는 긴 싸움이 될 거라는 예고에 팀장의 충고가 떠올랐다. 아이를 지키려면 직장을 잡고 있어야 한다고. 그러자 과연 그만두는 게 옳은 걸까, 이직은 할 수 있을까, 회의감이 들었다. 업계 신입보다 많은 나이, 변변찮은 경력, 여유롭지 않은 재정 상황.
원하는 게 있으면 얼마든지 얘기해 보라던 정해준 어머니의 말씀도 떠올랐다. 그녀가 제시했던 유혹적인 조건들이 우수수 떠올랐다. 명함까지 받았지만, 차마 연락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아직 고생을 덜 했나.’
쓰게 웃다가 휴대전화의 진동을 느꼈다. 발신인을 확인한 것도 아닌데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화면을 내려다보자 김 여사님의 번호가 찍혀 있었다. 왜 정해준이라고 생각했을까.
‘바보같이.’
정해준은 지금쯤 고해나와 함께 오랜만에 귀국한 어머니를 만나고 있을 텐데. 실망한 스스로를 벌주는 기분으로 피가 맺히도록 입술을 씹었다가 통화 연결 버튼을 눌렀다. 자상한 김 여사님의 걱정이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오늘이라고 하지 않았어? 승아 검사 결과 들으러 가는 날?
“네, 지금 병원이에요.”
-그럼 내가 승아 하원시켜 줄까?
울컥, 뜨거운 덩어리가 목구멍을 치받았다. 침묵에 묻어나는 물기를 눈치챈 김 여사님이 작게 혀를 찼다. 저 너머에서 안타까움에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서성이는 움직임이 그대로 느껴졌다.
“괜찮아요, 지금 돌아가는 길이에요.”
-결과 많이 안 좋대? 그래도 너무 걱정하진 말고. 처음부터 기운 빼면 힘들어. 같이 방법을 궁리해 보자. 그럼 뭐라도 될 거야.
같이, 한 마디에 망망대해에 혼자 남겨진 것 같던 막막함이, 태산 같던 근심의 한 귀퉁이가 조금이나마 덜어졌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해요.”
-빈말 아니야. 좀 기대면서 살아도 돼. 응? 해원 학생.
어릴 때부터 뭐든 혼자 끌어안고 속으로 삭이는 것 같아 지켜보는 마음이 늘 조마조마했더라는 김 여사님의 뒤늦은 고백에 끝내 참아 왔던 눈물이 터졌다. 한참 울음이 이어질 동안 김 여사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지만 귀 기울여 듣고 있음을 알았다. 그치지 말고 울고 싶으면 언제까지라도 울어도 된다는 듯이.
겨우 진정한 후엔 투정을 부리듯 승아의 병에 대해 들은 대로 고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상황이 좋지 않다 여기셨는지 무거운 탄식이 길게 쏟아졌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탄식이 사그라진 자리를 침묵이 대신했다. 서둘러 끊지 않고 근심 어린 숨소리를 나누는 시간이 큰 위로로 다가왔다. 조금 진정한 후에 목멘 소릴 겨우 뱉었다.
“정말 감사해요, 여사님.”
이제는 기운을 차려야 할 때였다. 한바탕 쏟아 내고 얼마간 후련해진 속을 가다듬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을 승아에게 향했다.
평소보다 일찍 데리러 갔는데, 승아는 한쪽 구석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부수 증상인 빈혈로 인한 피로라는 게, 이제야 눈에 보였다. 못나게도…….
선생님과 검사 결과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짧은 시간 동안, 등에 업힌 승아는 완전히 깊이 잠들어 버렸다. 자세가 기울어지지 않도록 잘 추슬러 업고 걸음을 돌렸다. 받쳐 안은 엉덩이의 뼈가 손바닥을 뾰족하게 눌렀다. 살집이 그만큼 없다는 의미였다.
‘가벼워.’
또래보다 마른 편인 승아지만, 나도 체력이 썩 좋은 편이 아니라 자주 업어 주지 못하고 칭얼거리는 아이를 채근해 걷게 하곤 했던 기억이 뒤늦게 가슴을 때렸다. 고꾸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군말 않고 업어 줄걸. 더 많이 안아 줄걸. 때늦은 후회가 자꾸만 발목을 잡아 걸음을 늦췄다.
잠시 멈춰 고개를 들자 오후의 석양이 세상을 선혈처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처참하나 아름다운 광경을 넋 놓고 보다가 끝내 날이 완전히 저문 후에야 저녁 어스름에 정신을 차렸다. 한바탕 꿈에서 깨어나 마주한 현실은 이렇게나 암울하다고.
줄곧 곁을 지키던 그림자마저 삼켜버린 짙은 어둠 속, 나 홀로 남은 길 위를 다시 묵묵히 걸었다. 응급상황이라면 모를까, 원칙적으로는 같은 혈액형끼리 수혈해야 한다는 담당의의 얘기를 곱씹으며.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미리 수혈해 줄 사람을 확보해 두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내가 알기로 이소원의 혈액형은 B형이었다. 그렇다는 건 김성철이 A형 아니면 AB형이란 얘긴데 되도록 승아와 같은 AB형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직접 연락할까, 이소원을 통해 알리는 게 좋을까.
고민하다 보니 어느새 집 앞이었다. 김 여사님의 목소리가 두런두런 길목을 울리고 있었다. 약속도 없이? 의아해하다가 김 여사님이라면 안쓰러운 마음에 반찬이라도 채울 요량으로 오셨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한데 누구랑 대화 중이실까. 몇 번 승아를 돌봐 주면서 동네 엄마를 사귀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어귀를 돌다가 그대로 멈춰 섰다.
“…….”
정해준이 김 여사님과 마주 서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