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울먹이며 내 뜻을 밝히는 게 전부인 반항에 정해준이 언젠가 회식 자리에서 팀장과 나눴던 얘기를 끄집어냈다.
“언젠 내 허락이라도 받을 생각이었어? 난 상관없으니 낳아서 키우지 그래? 딸이길 바랄게. 승아한테 자매 생기면 좋을 것 같다고 했잖아.”
“임신으로 어떻게 해 볼 생각 같은 건 하지 말라며.”
“…….”
줄곧 흔들림 없이 우위를 점하고 있던 정해준의 낯에 실금이 갔다. 그걸 보고 있는 나도 하얗게 질리긴 마찬가지였다. 정해준의 등 뒤에 꽂은 칼이 관통하여 내 심장에도 박힌 꼴이었다. 맹세코 상처 주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냥, 상기시켜 주고 싶었다. 우리 재회는 처음부터 어그러져 있었다는 것을.
“내가 아이 빌미로 작정하고 흔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그러니 멀리 달아나기를. 다신 내가 있는 쪽으론 고개도 돌리지 않기를.
하지만 애처롭고 같잖은 협박은 조금도 먹히지 못했다. 사납게 이를 드러내며 웃은 정해준이 박아 두었던 허리를 뭉근히 돌렸다. 묽은 반죽 같은 정액이 휘저어져 쿨쩍쿨쩍 외설스러운 소리를 냈다.
“작정하고 흔들어 봐. 얼마든지 흔들려 줄게.”
“…….”
“안 하면 내가 흔들고.”
묻어 놓았던 허리 아래를 다시금 음란하게 쳐올렸다. 벗어날 생각 말라는 경고와도 같았다.
싫어, 안 돼, 제발……. 수많은 거부는 젖은 살이 맞비벼지며 울리는 마찰음에 묻혀 버렸다. 목소리를 드높이자 형벌처럼 혀를 빨렸다. 그예 어린아이처럼 목 놓아 울었다.
“왜 울어.”
몸을 물린 정해준이 아프게 웃었다.
“울고 싶은 건 난데 왜 네가 울어.”
온통 엉망이었다. 난잡하게 흐트러진 침대 위, 서럽게 눈물을 쏟는 나, 그런 나를 바라보는 음울한 눈초리까지.
가장 끔찍한 건 젖어 있는 정해준의 뺨이었다. 정해준이……, 울고 있었다.
너무 놀라 숨마저 멎어 버렸다. 더듬더듬 뻗은 손을 피해 고개를 젖힌 정해준이 허탈한 실소를 흘렸다.
“너 하나 보겠다고 도산 직전 회사까지 인수했어.”
처음 듣는 얘기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우리 만남이 우연이 아니었다니. 너무 엄청난 얘기여서 사실이 아니었으면 바랐다.
“내 아이만 아니면, 그래, 내 아이만 아니면 버리자 다짐했는데. 네 아이라니까 예뻐 보여. 그게 혹이라면 제아무리 주렁주렁 달고 있어도 상관없다고. 말도 안 되지. 돌았어? 남의 애새끼 가진 여자랑 미쳤다고 왜 만나.”
자문자답한 정해준이 쓰게 뱉었다.
“그런데 미친놈처럼 그게 돼.”
“…….”
“내가 너 얼마나 증오했는지 알아? 다시 만나기만 하면 그렇게 나 버리고 가더니 꼴좋다고, 대차게 비웃어 줘야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아주 진창으로 처박아 버려야지!”
격양되었던 정해준의 음성이 비통에 잠겨 먹먹한 물기를 띠었다.
“근데 내가 너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는데. 도저히 방법을 모르겠더라.”
“…….”
“해원아.”
나직한 부름에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참았어야 했다. 욕심은 언제고 내 목을 조른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았어야 했다. 감히 너를 다시 바라지 말았어야 했고, 설레는 나를 꾸짖었어야 했다.
“그래, 다 잊자. 잊고 새로 시작하자…… 그렇게 마음먹었어. 그런데 헤어지자고?”
스산하게 가라앉은 낯, 음울한 음성, 붉게 물든 눈가, 축축하게 젖은 뺨.
너는 이래서는 안 되는데. 태양처럼 빛나고 바다처럼 찬란해야 하는데. 결국 또 내가 다 망쳐 버렸다. 찰나의 탐이 빚어낸 과오가 이토록 고통스러울 줄 미리 알았더라면…….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다가도 결국, 그래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는 나 자신, 지독한 이기심에 완전히 기가 질려 버렸다.
“난 어떻게 해야 해? 해원아, 내가 더 이상 뭘 어떻게…….”
그만둬야 해. 이미 늦었지만 더 끔찍해지기 전에.
누구에게랄 것도 없는 경고를 던지며 미친 사람처럼 일어나 아무렇게나 떨어진 옷가지를 주워들었다. 끝내 떠날 생각임을 눈치챈 정해준이 어린아이처럼 팔을 활짝 벌려 앞을 막았다. 애처롭게 매달렸다.
“가지 마. 가지 마, 이해원. 제발, 가지 마.”
빌지 마, 제발. 제발 빌지 마.
목구멍이 콱 막혀서, 귀라도 막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서 옷이 잘 꿰어지지가 않았다. 단추를 제대로 채웠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가방을 집어 들었다.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나의 죄악으로부터.
“가, 가 볼게.”
무의미한 인사를 건네고 정해준의 곁에서 달아났다.
인정하지 않겠다는 듯 완고하게 등 돌린 정해준의 뒷모습이 우리의 마지막이었다.
***
우선 팀장에게 사직 의사를 밝히기로 했다. 출근하자마자 굳은 마음으로 연구실에 들어섰는데 모여선 사람들의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팀장과 바로 면담하는 건 어쩔 수 없이 조금 미루기로 했다.
어차피 끝내지 못한 작업도 남아 있으니까, 오늘 중으로만 얘기하면 되지. 조급한 마음을 달래며 권하는 커피도 마다하고 자리에 앉았다.
“고해나 씨, 오늘 왜 이렇게 예쁘게 하고 왔어?”
팀장의 물음에 무의식적으로 고해나에게 시선이 갔다. 크림색 상의와 하늘색 치마를 입고 진주 귀걸이와 목걸이를 걸친 고해나가 화사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언젠 제가 추레하게 하고 다니나요?”
“그건 아니고, 평소보다 힘 좀 준 것 같아서 그렇지.”
“그야, 시어머니 만나는 자리니까 신경 좀 썼죠.”
“시어머니?”
갸웃하며 되묻던 팀장이 이내 속뜻을 깨닫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사님 어머니 만나?”
“네. 가족 모임 자주 가진다고 했잖아요. 이번에 오랜만에 한국 들어오셔서 해준 오빠랑 좋은 곳 모시고 가기로 했어요.”
“그럼. 오죽 좋은 데 가겠어? 이야, 부럽네.”
다른 사람들도 궁금했는지 어디 예약했냐고 한 마디씩 묻는데, 나는 그냥 모니터에 두 눈을 박았다. 나로선 억지로도 낄 수 없는 대화였다. 내게는 헤어짐을 말씀하시며 선을 긋던 정해준의 어머님이 고해나에게는 딸처럼 살갑게 대하는 장면을 쉽게 그릴 수 있었다.
“이번에 결혼식 날 잡자는 얘기도 나올 것 같아요. 청첩장 나오면 우리 팀원들한테 제일 먼저 돌릴게요.”
“진짜? 그럼 올가을엔 국수 먹나?”
“요즘 누가 국수 먹어요? 스테이크 썰게 해 드릴게요. 다들 오실 거죠?”
“당연히 가야지. 다 같이 휴가 내는 한이 있더라도 가자고.”
다 같이 즐겁게 한 마디씩 보태는데 혼자만 가만히 있기도 뭐해 볼일을 보러 가는 척 슬그머니 일어났다. 거북살스러운 혹이 뒤에 따라붙은 줄도 모르고.
때문에 숨을 고르며 상심한 속을 달래다가 나왔을 때, 김규환을 마주치고 작게 비명을 지른 건 당연했다.
“전임님.”
“해원 씨, 무슨 안 좋은 일 있어요? 표정이 영 안 좋은데. 아님 어디 아픈가? 혹시 그날, 아, 아니다.”
생리 중인지 확인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끈적끈적한 눈빛이 징그러웠다. 자기가 선을 넘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는 듯 우물거리는 입술을 보자 소름이 쭉 끼쳤다. 혼자 나를 상대로 무슨 망상을 하고 있는 건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전임님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닌 것 같아요.”
마음 같아서는 상관 말라고 맵게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회사인 만큼 예의를 차리고 싶었다. 그만두려는 마당이라 더더욱 그랬다. 아무래도 마음에 찝찝하게 남을 일은 사양이었다. 다행히 인기척이 있어 김규환의 집적거림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어머, 이해원 씨, 여기서 뭐 해요? 김 전임님이랑?”
누가 와 주어서 고맙다고 여긴 건 잠시였다. 고해나를 확인한 순간 낭패감에 입술을 물었다. 여우 떠난 굴에 호랑이가 찾은 격이었다.
“둘이 무슨 사이에요? 설마 고백? 나 이거 비밀로 해야 하는 거예요?”
모르고 묻는 게 아니었다. 화장실 앞에서 고백이라니. 내 반응을 재미있어하는 고해나의 조롱인 줄도 모르고 귀까지 불그죽죽해진 김규환이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었다. 구질구질한 상황에 가뜩이나 저조하던 기분이 바닥까지 처박혔다.
참자. 어차피 곧 안 볼 사람들이야.
곤욕스러워도 그냥 자리를 지킬 걸, 괜히 환기하겠다고 이탈한 게 잘못이었다. 한숨을 삼키며 고해나를 등졌는데, 날카로운 비꼼이 목덜미에 비수처럼 박혔다.
“이해원 씨는 보험 많아서 좋겠다.”
“네?”
보험이라니 갑자기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어서 얼뜨기처럼 되물었다.
“그렇잖아요. 해준 오빠랑 안 될 것 같으니까 바로 김규환 씨로 갈아타는 거.”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님 말지 왜 발끈해요. 어? 오빠!”
고해나가 반갑게 오빠라고 부르는 게 굳이 누구인지는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낭떠러지로 떠밀리는 기분으로 걸음을 뗐다. 그 곁을 스칠 때 조금 비척거렸는지도 모르겠다. 반사적으로 내밀어진 정해준의 팔을 용케 피해 지나쳐선 곧장 팀장에게 향했다. 더는 재고 따질 틈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