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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과-67화 (67/77)

67화

어떡하지.

울고 싶은 기분으로 이별을 고할 장소를 떠올렸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적당한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산, 바다, 너른 들은 제외였다. 호텔, 카페 같은 특정 업종도 제외했다. 고궁이나 타워 같은 도심의 랜드마크는 당연히 제외.

여기 빼고 저기 빼고 나니 정말 갈 곳이 없었다. 허탈해서 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장소 같은 건 의미 없을지 모른다. 너와 헤어지고 나서 너를 떠올리지 않은 순간이 없었으니까. 언제, 어디에 있든.

머릿속으로 곳곳을 누비며 안 된다고 마음을 접는 동안 목적지를 정한 정해준은 운전대를 잡고 콧노래를 낮게 흥얼거렸다. 고막으로 흘러든 낮은 음이 죄책감과 뒤엉켜 온통 혼란케 했다. 편리한 선택이 유혹적으로 떠올랐다.

차라리 다음으로 미룰까.

오늘은 그냥 보내는 거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정해준의 어머님과 나눴던 대화 같은 건 잠시 뒤로 미루고. 그래, 그러자.

비겁한 결심은 도심을 관통하는 너른 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고층 파인 다이닝에서 여지없이 꺾였다. 장미색 와인 잔을 손안에서 굴리며 정해준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누가 먼저 할까.”

“어?”

“할 말 있다고 했잖아. 오늘, 아니야?”

“…….”

눈앞이 어질했다. 할 말을 고백 정도로 받아들인 게 분명했다. 누가 먼저 할지 고르라는 건 정해준 역시 고백할 계획을 갖고 있다는 뜻일 테다. 고백 전에 터트릴지, 고백 후에 거절할지는 이제 내 몫으로 남았다.

어느 쪽이 덜 괴로울지 잴 수도 없이 그저 아득했다. 입 안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 와인 한 모금을 겨우 마셨다. 그 사이 아뮤즈 부쉬가 앞에 놓였다.

“먹고 천천히 얘기하자. 배고프지. 전에 바이어랑 왔었는데 좋아서, 너 꼭 데려오고 싶었어.”

구운 관자와 브로콜리 굴 소스라는 설명을 들었음에도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연이어 나오는 게 요리도, 스테이크도, 정해준은 너무 달다며 밀어 놓은 디저트도 마찬가지였다. 맛도 모르고 기계적으로 음식을 입에 넣었다. 길게 이어지는 코스가 고역이었다.

마지막으로 차가 나올 즈음엔 정해준도 무언가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뭔데.”

시선을 창 너머로 둔 채 차를 가장자리로 치워 놓은 정해준이 자기 앞으로 위스키를 새로 주문했다. 싸한 독주의 향이 둘 사이를 불길하게 감돌았다.

“아무래도 네 할 말 먼저 들어야 할 것 같다.”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고 죄지은 사람처럼 눈만 껌벅였다. 따뜻한 찻잔을 쥐고 있음에도 손끝이 싸늘하게 굳어 갔다. 혀에 세로로 긴 바늘이 박힌 것 같았다. 움직이려 할 때마다 입 안이 온통 욱신욱신했다. 혀를 잘라 내고 싶은 고통을 참으며 겨우 한마디 지껄였다.

“……헤어지자.”

면전에서 즉각 실소가 터졌다. 기가 차서, 신경질적으로 터진 웃음에 동통이 일었다. 차라리 컵에 든 냉수라도 얼굴에 끼얹어 줬으면. 뺨이라도 올려붙였으면. 그렇게 허무한 미소 짓지 말고, 제발.

절박하게 빌며 누군지도 모를 이를 원망했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고 하지 않았나.

순 거짓말이었다. 처음은 심장을 도려내는 것 같더니 두 번째는 살을 깎아 내는 듯했다.

반면 정해준은 한 번 겪어 본 이별의 순간이 이제는 정말 쉬운 듯했다. 잠깐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손에 든 잔을 응시하며 심심하게 만지작거리더니 천천히 호박색 액체를 음미했다.

5년 전과 같은 애달픔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심상했다. 어이없게도, 정해준이 잔을 다 비우도록 그런 걸 따졌다.

“예전부터 아주 제멋대로네.”

주의를 환기하듯 유리잔을 부러 소리 나게 내려놓은 정해준이 차분하게 힐난했다.

“네가 헤어지자면 네, 알겠습니다, 하고 꺼져야 하는 사람이야, 내가?”

“그런 게 아니라…….”

“네 맘대로 쥐락펴락하지 마. 전처럼은 안 돼. 끝내는 쪽은 나야.”

“해준아.”

“나 왜 만났어, 너. 나랑 잘래? 그렇게 먼저 유혹한 거 너잖아.”

“……외로워서.”

바로잡을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는데, 이런 순간이 닥쳐서야 독해지고 마는 나란 사람의 바닥은 어디일까. 끝이 있긴 할까.

“마음이 시려서, 몸뚱이라도 뜨거우면 좀 나을까 하고.”

“그래서.”

“재미도 보고 돈도 벌고. 나쁘지 않잖아.”

줄곧 침착하던 정해준도 이번엔 흔들렸다.

“너……, 미쳤어?”

“나 원래 이런 사람이야. 이미 한 번 겪어 봤으면서 새삼스럽게…….”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왔다. 정해준 입장에선 비웃음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잘된 노릇이려나.

“내가 그걸 알고 너랑 붙어먹었다고?”

“아니야?”

“……너 진짜 잔인하다.”

이를 악문 잇새로 새어 나온 중얼거림에 차마 시선을 바로 할 수 없었다. 그저 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잠깐의 침묵 후, 정해준의 입매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분노로 뒤틀린 속을 내보이듯이.

“그렇다 치고,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한 번만 자자.”

“…….”

“안 돼? 원 없이 섹스하면 놓아주기 쉬울 것도 같아서.”

좀 도와줘. 덧붙이며 정해준이 악의 없이 웃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마지막, 한 번만.

붙잡으려는 시도인지, 정말 미련을 떼려는 의도인지, 아니면 그저 나를 조롱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내게도 필요한 마지막이었다. 딱 한 번만, 너를 안고, 숨을 나누고, 너의 체온을 느낄 수 있다면. 마지막으로 내 몸에 너를 새길 수 있다면.

옳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레스토랑 위층의 룸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를 때 특히 그랬다.

‘지금이라도…….’

돌이킬까. 이건 아닌 것 같다고.

“뭐 해?”

선뜻 문고리를 쥐지 못하고 망설이자, 어딘지 싸늘하게 들리는 물음이 떨어졌다. 순간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표정을 살피고 싶었지만 정해준이 등 뒤에 바짝 밀착해 서 있는 탓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등에 닿는 가슴팍이 단단한 벽처럼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

퇴로는 없구나.

체념하며 안으로 한 발 디뎠을 때, 강한 힘에 떠밀렸다. 휘청거릴 틈도 주지 않고 입술을 붙인 정해준이 함부로 혀를 짓씹어 댔다. 날카로운 통각에 눈물이 맺혔지만 그저 애틋하게 받았다. 정해준이 쏟아붓는 열기를.

“아, 해준, 아……!”

고작 허우적거리는 게 전부인 채, 입술 닿는 자리마다 뜨겁게 데이며 감히 바랐다. 차라리 네가 물이기를. 하여 네 안에 잠겨 죽기를.

침대에 어떻게 올랐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나신이었다. 축축하게 젖어 벌름거리는 음부에 막 정해준의 성기가 진입하고 있었다. 읏, 하고 작게 앓다가 무언가 눈에 설어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려 시선을 모았다.

생살이, 얇은 한 겹의 막조차 두르지 않은 살 기둥이 꾸역꾸역 밀려들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 정해준을 저지했다.

“안, 안 돼……!”

반쯤 세운 상반신을 쉽게 밀어 넘어뜨리며 정해준이 다정하게도 웃었다.

“실수 한 번만 더 하자, 해원아.”

“무슨, 아, 안, 제발…….”

밀어내 봤자 끄떡도 하지 않던 정해준이 아예 상반신을 빈틈없이 겹쳐 왔다. 집요하게 파고드는 혀를 피해 고개를 저으면서도 머릿속으론 빠르게 주기를 떠올렸다. 공교롭게도 배란일과 딱 맞아떨어졌다. 자연 임신 확률이 얼마였지, 삼십 퍼센트 내외였던 것 같은데.

그래도, 정말 되면 어쩌지…….

확률을 따지는 건 무의미했다. 내게 벌어진 이상 백 퍼센트가 될 테니. 막막한 두려움에 휩싸여 흐느꼈다. 찝찔한 눈물이 맞물린 호흡의 틈을 파고들었다. 내가 울고 있다는 걸 못 알아챘을 리 없는데도 정해준은 멈추지 않았다.

“싫어, 이런 거, 싫어…….”

지금이라도 그만둬 달라는 애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안을 찧는 움직임이 거세어졌을 뿐. 끝내 파정하고 말리라는 의지가 담긴 몸짓에 뒤늦게 후회했다. 어째서 마지막이라는 말에 넘어갔을까. 내가 바라는 마지막 같은 건 환상일 뿐이었는데. 아름다운 이별 같은 건 우리 사이에 존재할 수 없는데.

절망하여 흔들렸다. 암캐처럼 헉헉대고, 끝내 절정에 오르며. 정해준의 성기를 물고 강하게 쥐어짜던 속살에 정해준의 체온과 꼭 닮은 열기가 주르륵, 뿜어졌다. 보다 은밀한 구멍을 찾아 진하게 스며들었다.

“으흑, 흑…….”

오로지 수정을 위해 정액을 주입하는 것만이 목적인 것 같은 섹스가 끝이 났다. 한 방울도 흘리는 걸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마개처럼 아래를 꽉 틀어막아 놓은 채 허리를 곧추세운 정해준이 냉담한 눈으로 나를 쏘아봤다.

질 나쁜 후련함이 어린 낯이었다. 기어이 나와 끝을 보고야 말겠다는. 만약 이번 일로 임신이 되지 않으면 다음에도 기회를 노려 같은 짓을 반복할까? 아니, 아니야. 그래선 안 돼. 설령 아이를 가진다 해도…….

“네 아이 생겨도 지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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