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과-66화 (66/77)

66화

“뭐…….”

정해준은 별 관심 없는 투로 대꾸하며 노트북에 띄워놓은 레시피를 확인했다. 뜬금없이 고해나 얘기는 왜 하냐고 묻지도 않았다. 관심이 별로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안중에도 없어 보이는 태도에 살짝 마음을 놓으려는 찰나, 정해준이 문득 모니터 너머로 짓궂은 눈빛을 보냈다.

“왜, 질투 나?”

은근 기대 어린 질문에 솔직히 말했다.

“질투 나. 나는데…….”

흠. 첫 대답은 마음에 들지만 뒤에 붙은 사족이 영 탐탁지 않은 듯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나는데?”

“내가 그럴 감이 되나 싶어서. 고해나 씨 대단한 사람이잖아.”

비단 출중한 능력만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사랑받고 자란 사람에게선 사랑받은 사람 특유의 냄새가 난다. 봄날의 햇살을 응축시켜 놓은 것 같은 냄새가. 주린 사람이 음식 냄새에 반응하듯 사랑에 고픈 나 역시 그 냄새에 민감했다.

고해나에게서 나는 사랑의 냄새에 대해 설명하자 정해준의 표정이 묘해졌다.

실수했나? 살짝 늦게 정해준에게는 의외였을지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맘고생 없이 부잣집에서 곱게만 자란 줄 알고 있을 테니.

“너 아직 내 사랑을 덜 받았구나.”

“어?”

“얼마나 퍼부어야 그런 헛소리가 쏙 들어갈까.”

이따가 승아를 재우고 나면 사랑을 실컷 퍼부어 주겠다는 말에 얼굴이 새빨개져 더듬거렸다.

“그, 그만 퍼부어도 돼.”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지는데.”

뭘 상상하고 있는지 훤히 머릿속을 들여다본 정해준이 음흉하게 웃었다. 덕분에 완성된 감자전을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삼켰다. 승아 말로는 쫄깃쫄깃하고 고소하다는데.

“별로야? 어째 먹는 게 시원찮네.”

“아니야. 맛있어.”

대강 대답하자 정해준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적당히 먹어. 이따가 더 맛있는 거 먹여 줄 테니까.”

“…….”

그 맛있는 게 입으로 먹는 게 아닌 건 분명했다. 아, 진짜. 원망의 눈초리로 쏘아보자 정해준이 눈을 반달처럼 휘어 가며 쿡쿡 웃었다. 놀리는 게 그렇게 재미있나. 어이없어하면서도 긴장이 탁 풀려 마주 웃었다. 겨우 감자전의 맛이 느껴졌다. 마냥 고소했다.

***

누군가 우리 사이를 알면 위기가 닥칠 것만 같은 불안은 현실이 됐다.

고해나의 경고가 있은 지 며칠 안 되어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평소 같으면 모르는 번호라 받지 않았겠지만, 끝 네 자리가 정해준의 생일이라 받았다. 알 수 없는 예감에 가슴이 절로 졸아들었다.

-이해원 씨 맞나요?

“네, 맞습니다만…….”

-나, 해준이 엄마예요.

순간 사고가 정지했다. 멍하니 숨을 참고 있다가 가까스로 안녕하세요, 더듬거리며 인사했다. 만나자는 말에 그저 알았다고 대답한 게 전부인 짧은 통화를 마친 후에도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아 한동안 아이처럼 몸을 웅크렸다.

꼭 처음 전화 받았을 때처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는 정해준의 어머니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해원입니다.”

“반가워요. 오느라 힘들진 않았어요? 어서 앉아요.”

“네.”

마주 앉고 보니 낯이 익었다.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이인 것처럼. 이미 정해준의 앨범에서 여러 번 보아 왔던 젊은 시절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어서 그런가? 어쩌면 회사 홈페이지 메인에 걸려 있는 사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매일 로그인할 때마다 보는 얼굴이니 눈에 익을밖에.

정해준 어머님이 입가를 주의 깊게 쓸며 고개를 갸웃했다.

“내 얼굴에 뭐 묻었나?”

나도 모르게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봤나 보다. 실례라는 걸 인지한 순간 황급히 시선을 내렸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죄송합니다. 저, 낯이 많이 익어서.”

“그러게. 나도 친근하네.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나?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무튼, 반가워요.”

정해준과 닮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머니가 명함을 내밀었다. 배윤경. 이름 석 자 밑에 익숙한 사명이 적혀 있었다. 넥스트메디텍, 대표.

사무적으로 건네진 명함 모서리가 유난히 날카롭다. 손바닥의 반도 안 되는 종이 한 장이 천근처럼 무겁다고 생각하며 말끄러미 명함을 내려다보는 나를 정해준의 어머니가 찬찬히 관찰했다.

“사진으로 봤던 것보다 훨씬 예쁘네. 우리 해준이가 왜 그렇게 목매는지 알겠어요.”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우둔해 보일 걸 알면서도 애꿎은 셔츠 밑자락만 쥐었다 놓았다 했다. 식은땀이 축축이 배어나는 손을 쥐락펴락하는 모습에서 초조함을 읽어 낸 정해준의 어머니가 딱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뿐이었다.

잠시 여유를 주어도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는 내가 답답한지 정해준의 어머님이 먼저 용건을 꺼내놓았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자기 아들 여친 찾아가서 행패 부리는 거, 나 참 촌스럽다고 생각했거든. 자기들이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다고 남의 집 귀한 딸한테 저러나, 다 큰 성인인데 알아서 하게 놔두지 저게 뭐 하는 짓인가 욕도 하고 말이야.”

“네…….”

“그런데 그 촌스러운 짓을 내가 해야겠네.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죄송……, 합니다.”

“우리 해준이, 해원 씨 때문에 많이 힘들어했어요. 원래는 고등학교 때 한 학기만 있기로 했던 거 알아요?”

“네.”

그랬었다. 할아버지 병세가 안 좋아지셔서 마지막 임종 지켜드릴 때까지 있다가 다시 나갈 거라고. 나로 인해 틀어진 계획이기도 했다.

“갑자기 미국 안 들어올 거라고 해서 어지간히 속 썩었지. 고등학생이 운명의 상대 운운하는데 어찌나 기도 안 차던지. 그때 해준이랑 엄청 싸웠어요. 처음이에요. 애랑 그렇게 끔찍할 정도로 싸운 건. 보스턴에선 계획이 다 있었거든. 우리가 같이 세운 미래.”

“…….”

“다신 미국 땅 안 밟을 것처럼 그러더니 어느 날 훌쩍 돌아와서 이제는 다신 한국 안 갈 거라 그러대? 애가 밥도 안 먹고 내리 2주일을 죽은 것처럼 잠만 자는데 저러다 잘못되는 거 아닌가…….”

음성 끝이 가늘게 떨려 확인하니 눈시울이 붉게 젖어 있었다.

“이런 얘기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해준이 죽을 뻔했어요. 수면제를 과량으로……. 위세척하고도 한동안 의식이 없다가 겨우 살아났어요.”

자살 시도를 암시하는 말에 깜짝 놀라 정해준의 어머님을 올려다봤다가, 죄스러운 마음에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어 다시 고개가 푹 꺾였다.

“최근까지도 영 마음 못 잡고 있던 애가 갑자기 의욕이 넘치기에 기쁘면서도 의아했거든. 찝찝하기도 했고……. 혹시나 해서 알아보니 역시나 이해원 씨가 있었네?”

“…….”

“그래서 반대한다는 거예요. 이해원 씨가 미혼모라는 건 해준이가 중심 못 잡고 흔들리는 거에 비하면 사소한 문제죠. 우리 해준이가 정신을 못 차려서, 자꾸 자기를 놔 버려서. 난 그런 관계는 아주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내 말, 이해해요, 해원 씨?”

“네, 이해……합니다.”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해준의 어머니가 좋은 어머니라서, 충분히 그 마음이 공감돼서, 따를 수밖에 없어서.

“다른 회사로 이직 원하면 자리 알아봐 줄게요. 휴직 기간 동안 월급에 상응하는 금액도 지불할 거고. 이외에도 원하는 거 있으면 솔직하게 말해 봐요. 최대한 맞춰 줄 테니까.”

“아닙니다. 그런 건, 신경 써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알량한 자존심을 세웠다. 일을 그만두면 당장 어디서건 돈 나올 구멍이 없는 처지면서도. 헤어짐의 대가로 그런 것들을 받고 싶지 않았다. 이미 네게 받은 게 넘쳐나는데, 뭘 더.

한 번 해 봤으니 두 번째는 더 수월할 거라 생각하며 담담히 약속했다.

“해준이한테는, 제가 잘 얘기할게요.”

“그래 줄래요? 고마워요. 참, 해준이는 나 해원 씨 만나는 거 모르니까 비밀로 해 주기에요?”

본인은 일이 바빠서 먼저 일어날 테니 마저 차를 마시고 나오라는 말과 함께 만남은 깔끔하게 끝났다.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나서야 긴장이 서서히 풀어졌지만, 차게 식은 손만은 그대로였다. 한 입도 대지 않은 커피잔을 움켜쥐었다. 미미한 온기라도 느끼고 싶었으나 이미 식어 빠진 커피잔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대신 뜨뜻미지근한 것이 손등 위로 한 방울, 두 방울 연이어 떨어져 따스하게 번졌다 차게 식기를 반복했다.

***

김 여사님께 부탁해 승아를 맡겼다. 데이트하는 거냐고, 신경 쓰지 말고 좋은 시간 보내고 오라는 상냥한 말씨에 앞으론 이런 일 없을 거란 얘기는 차마 하지 못했다.

모처럼 둘만의 데이트에 정해준의 기분은 무척 좋아 보였다. 어디에 갈까 고민하면서 연신 들뜬 모습이었다.

“바다 보러 갈까. 아, 너무 먼가.”

멀어서 부담스러워 안 되겠다는 핑계에 직감했다. 우리가 동시에 제주에서의 마지막 여행을 떠올렸음을. 그렇다면 차라리 바다에 가는 게 낫지 않을까. 네게 끔찍한 곳이 하나 더 생기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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