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죽을 만큼 아프다는데.”
처음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그렇게 아프지 않았다. 통각에 가까운 쾌감은 있지만. 뭔가 대화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겠다고 생각한 순간, 정해준이 쓰게 뱉었다.
“화나.”
“……뭐가?”
“너 그렇게 아프고 힘들 때 곁에 있어 주지 못한 거. 그런데 난 그럴 자격도 없었다는 거. 그 새끼는? 왔었어?”
“…….”
뒤늦게 임신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 문제에 있어선 유구무언이었다. 김성철이 이소원의 출산에 왔었나. 모르겠다. 관심 없었으니까. 잠깐이나마 아기가 잘못되길 바라곤 악랄한 속마음에 놀라 소스라치게 놀랐던 순간만이 아물지 않은 딱지처럼 박혀 있었다.
당시의 죄악감을 상기하는 동안 정해준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 힘주어 가슴을 움켜쥐곤 젖을 짜내듯 손을 앞뒤로 흔들며 중얼거렸다.
“별로 안 진해졌네.”
색깔이 초콜릿처럼 진해졌던 이소원의 젖꼭판을 떠올렸다. 당연히 나는 그럴 일이 없었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난감해하는 사이 심술궂게 젖을 짜내던 동작을 멈춘 정해준이 부드럽게 젖꼭지를 비비며 궁금해했다.
“입덧은? 심했어?”
“……별로.”
실제로도 이소원은 입덧이 거의 없었다. 입덧은커녕 매일 새로운 음식을 해 내오라고 김 여사님을 들들 볶았다. 먹덧이라고도 한다던데, 시작이 불온했던 만큼 승아는 들키지 않도록 이소원의 배에 조용히 웅크려 있었다.
물어볼 게 쌓여 있었던 듯 이번엔 손을 조금 더 아래로 내린 정해준이 납작한 배를 쓰다듬으면서 트진 않았냐고 물어봤다. 임신선하고 같이 사라진 건지, 원래부터 튼살 없이 괜찮았는지.
“살성이 좋은가? 얇은 거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문득 생각난 듯 정해준이 처박아 두었던 성기를 슬근슬근 흔들었다. 제 분신으로 야트막하게 부풀었다 가라앉는 배를 쓰다듬으며.
“궁금해. 태동 어떤 느낌인지.”
갸웃하던 정해준이 내 손을 끌어다 제 손 밑에 겹치며 허리를 반복적으로 쳐올렸다. 흐윽, 앓는 소리에 섞여 황당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거랑 비슷한가?”
“…….”
기도 막히고 말문도 막혔다. 임신한 적이 없으니 태동 또한 느껴 본 적 없지만, 이렇듯 뱃가죽을 뚫을 듯 꾹꾹 찔러 대는 성기의 움직임이 태동하고 조금도 비슷하지 않다는 건 잘 알겠다. 어이가 없어 대꾸도 하지 않는 사이 추삽질의 강도가 점점 세졌다. 밀어 낼 엄두 같은 건 내지도 못하고 흔들렸다.
“해준, 아……!”
“이젠 넣어만 줘도 가는 거야?”
눈앞이 반사적으로 아찔해졌다. 피식 웃는 입매 사이로 내뱉어진 조롱과 함께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땐 온몸이 말끔했다. 잠옷까지 입혀진 채였다. 누가 한 건지 짐작이 됐다. 기운도 좋지, 혀를 내두르며 끄응, 몸을 뒤채자 아랫배를 감싼 큰 손이 느껴졌다. 줄곧 얹혀 있었던 듯했다.
“너 곧 생리하겠다.”
“어떻게 알아?”
그렇지 않아도 주기가 가까워지긴 했는데. 사귈 때야 워낙 붙어 지내니 자연스레 주기를 알게 됐다 해도 지금 이렇게 딱 맞추는 건 불가사의했다. 설마 그동안 계속 세 오진 않았을 테고. 나도 달력을 확인해야 하는 걸 어떻게?
물론 자각증상이 있긴 했다. 가슴이 묵직하다거나 아랫배가 콕콕 쑤신다든가 하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자각증상이었다. 살을 수백 번 섞어 한 몸으로 이어진다 해도 정해준은 알 리 없는 감각.
“진짜 어떻게?”
레이더라도 달려 있나? 신기해하며 재촉하는 내게 정해준이 그런 것쯤 어려운 것도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나를 속속들이 아는 자기에겐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라고.
“배가 차가워서.”
“아.”
새삼 정해준의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체감한다. 미세한 온도의 차이를 분간해 내기 위해 셀 수 없이 살갗을 어루만져 내 체온을 손에 익혔을 시간들을, 그 깊은 애정을.
염치없이 희망이 솟았다. 괜찮지 않을까. 이런 정해준이라면. 믿고 온전히 나를 맡겨도 되지 않을까.
“저, 할 얘기가 있어.”
“음?”
충동적으로 말을 꺼냈다가 혀를 깨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만약 승아가 걸린 병이 치료비가 많이 들어간다면, 어떡하지? 정해준의 재력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나의 짐을 함께 지울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중요한 얘기야?”
갑자기 심각해진 분위기에 의아해하며 정해준이 표정을 살폈다.
“아니, 갑자기 승아 병원 예약해 둔 게 떠올라서.”
“별일 없을 거야. 별일이어도 내가 도울 거고. 너무 걱정하지 마. 그런데, 할 얘기란 게 그거야?”
“아, 나중에. 나중에 얘기할게.”
“뭔데 이렇게 비장해.”
“아니…….”
“알았어. 기대할게.”
기대할 만한 성질의 얘기는 아니었다. 그래도 의미 있는 한걸음이 될 거라 믿으며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정해준과 헤어지고 나서는 새벽을 기다리는 사람이 됐다. 새로운 시작을 기다린다든가 하는 희망찬 얘기는 아니다. 눈이라도 붙여 볼까 싶어 침대에 누우면 온갖 상념이 떠올랐다.
행복한 기억들에 미친 것처럼 실실 웃다가 화들짝 놀라 정해준과의 마지막을 강박적으로 곱씹었다. 스스로 자아낸 괴로움에 시달리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재회하고 나서 새벽은 또 다른 기다림의 시간이 됐다. 노력하지 않아도 일찍 눈이 떠졌다. 하루를 성실히 보내고 싶었다. 다시 함께하는 시간이 헛되지 않도록.
소중한 건 지키고 싶기 마련이라 조심성도 많아졌다. 그런 불안이 있었다. 누군가 우리 관계를 알아채면 지금의 평온이 흔들릴 것 같다는, 근거 없는 불안.
혼자 신경 쓴다고 될 건 아니겠지만, 나름대로는 최대한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노력했다. 정해준 얘기만 나오면 광선이라도 뿜어낼 것처럼 눈을 반짝이는 손아름 때문에라도 절로 몸이 사려졌다. 더하여 늘 나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김규환도.
일만 잘하면 되지, 일만.
다짐하면서도 어딘가 불편한 느낌이 있었다. 내가 너무 예민한가. 스스로를 돌아도 보았지만 실험실 앞에서 만난 고해나의 날 선 눈빛을 보면 착각은 아닌 듯했다.
실험실을 같이 쓰긴 하지만 프로토콜에 따라 시간을 정해 놓고 각자 분리된 실험을 진행하는 이상 마주치는 건 드문 일인데, 일부러 나를 기다린 듯했다.
“안녕하세요.”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하고 예약해 둔 실험대로 향하려는 나를 고해나가 잡아 세웠다.
“뭐 하는 거예요?”
“갑자기 무슨 얘긴지…….”
“해준 오빠는 원래 그래요. 뭐 하나 빠지면 뒤도 안 돌아보는 스타일이고. 어릴 때부터 그랬거든요. 그런데 이해원 씨는 그럼 안 되죠. 양심 없어요? 그냥 되는대로 사고부터 치고 보는 성격인가 봐?”
“저에 대해서 잘 아는 것도 아니면서 그런 말은 좀 불편하네요.”
“불편하라고 하는 소리예요. 그럼 곱게 말할까? 곱게 말하면 순순히 꺼져 줄 거예요?”
점점 과격해지는 말투에 아예 대응할 생각을 말아야지, 입을 다물었다. 그게 고해나의 화를 더 돋운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해준 오빠 두고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애 딸린 여자한테 코 꿰서 신세 조졌다고 해요. 지난번 회식 때 팀장님 얘기도 못 들었냐고요.”
“왜 그런 얘기가 도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얘기는 불편하다고, 이제 그만해 주었으면 했지만 고해나는 말허리를 뚝 잘라 먹고 제 할 말만 했다.
“해원 씨 퇴근 시간만 되면 만사 제쳐두고 주차장 내려가니까 그렇겠죠.”
“그건, 아이 어린이집 하원 시간이 늦어져서…….”
“그걸 왜 해준 오빠가 하냐고요!”
진심으로 분한지 고해나가 발을 굴렀다. 어디까지 뻔뻔해질 수 있나 두고 보자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누구 하나는 브레이크 잡아 줘야죠. 안 그래요?”
내가 왜 고해나에게 이런 소리까지 들어야 하는지, 솔직히 불쾌했지만 정해준을 생각해서 꾹 참았다. 어릴 적부터 알아 왔고 부모님들끼리도 친하다는데 혹시라도 나로 인해 둘의 관계가 껄끄러워지는 건 원치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고분고분하게 대했다.
“해준이 생각해 주는 마음은 잘 알겠어요. 앞으로 조심할게요.”
딴엔 많이 숙였다고 여겼는데 이조차도 정답이 아닌 듯했다. ‘해준이’라고 친근하게 부른 시작부터 눈매가 기다란 세모꼴로 쭉 찢어진 고해나는 진저리치며 쌩하니 곁을 지나쳤다.
고해나가 윽박지르던 모습은 뇌리에 강렬하게 남아 퇴근 후에도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멍하니 상념에 잠겨 저녁 메뉴인 감자전을 준비했다. 나란히 서서 나는 필러로 감자 껍질을 벗기고 정해준은 강판에 감자를 가는 식이었다.
같은 장면을 반복해 떠올리느라 집중을 못 하니 별 어렵지도 않은 단순 노동에도 자꾸만 손이 미끄러졌다. 그 모양을 가만히 지켜보던 정해준이 손에서 필러를 앗아 갔다. 자칫 정신 팔다간 강판에 감자가 아니라 손이 갈린다며 또한 못하게 막았다.
별수 없이 승아의 색칠 공부를 도우려 식탁에 앉았다. 얌전히 집중하던 승아가 제가 할 거라고 소리치며 내 손에 들린 색연필을 쏙 뽑아갔다. 시무룩하게 앉아 있자 도구와 재료를 식탁으로 옮겨 온 정해준이 석석 시원한 소리와 함께 감자를 갈아 댔다.
“오늘은 기분이 영 별로인가 봐?”
“……고해나 씨랑 많이 친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