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과-63화 (63/77)

63화

차에 올라서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던 건, 마치 나를 외면하듯 앞만 주시하는 정해준 때문이었다. 뭐라도 좋으니 언질이라도 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마음을 접어 둔 채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늦은 오후의 햇빛이 강렬해서 바깥의 색이 온통 뭉뚱그려져 있었다. 하나 같이 바랜 것처럼 희게 돌변한 세상이 낯설었다. 입사 후 이 시간에는 돌아다닌 적이 거의 없어서 더욱 그랬다.

“네가 얘기했던 승아 문제, 그래, 내가 불쑥불쑥 찾아갔던 건 미안해. 조심했어야 했는데, 솔직히 거기까진 생각 못했어.”

“……괜찮아.”

이렇게까지 미안해할 일은 아닌데. 과한 사과는 관계의 단절을 예고하는 걸까. 앞으론 다신 그런 일 없을 거라는.

궁금한 건 많았지만 아무것도 묻지 못한 채 집 앞에 도착했다. 차라도 한 잔 권할까 싶었으나, 안전띠를 그대로 매고 있는 정해준을 보고 가볍게 인사만 했다.

“조심해서 들어가.”

“너도.”

탁, 차 문 닫히는 소리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대로 너와 내 사이가 완전히 가로막히나 싶어서.

태연한 척 입구로 향하는 몇 걸음이 몹시도 어색하다. 정해준의 차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정차한 채였다. 차창 안에서 지켜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끝내 뒤돌아보지 않았다.

뒤돌아보면 매달리게 될 것만 같았으니까.

***

깨달음은 통렬했다. 말 그대로 호의였는데, 삶에 찌든 불쌍한 애 엄마한테 굳이 베푼 동정을 연애 감정이라 착각했다.

바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얼마간은 진심이 섞였을 거라고. 낯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떳떳지 못한 바람을 품었다.

안이했었다는 자책과 함께 종일 싱숭생숭하던 금요일이 지났다. 정해준에게선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주말마다 함께 보낸 것도 아닌데 무얼 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입맛이 없어 승아의 아침만 겨우 챙겨준 후, 의욕 없이 블록 놀이를 지켜보았다.

온통 조용하기만 한 거실이 시끄러운 것 같기도 하고, 돌연 귀가 먹먹한 것 같기도 했다. 어수선한 속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모르겠다. 상황이 이런 만큼 토요일 아침부터 언질도 없이 들어선 정해준을 보며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머뭇거리는 나와 달리 현관문 여닫히는 소리에 번개같이 튀어 나간 승아가 주인 맞는 강아지처럼 온몸을 흔들어 가며 정해준을 반기고 있었다.

“승아야, 오늘은 아저씨랑 토끼 보러 갈까? 승아 토끼 좋아해?”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일까. 나와의 관계는 배제하고라도 갑자기 불쑥불쑥 찾아오는 일은 없게 하겠다고 약속했던 것 같은데. 내 얘기를 건성으로 들은 건지 의심스러워졌다. 대체 그날의 대화는 뭐였는지.

우두커니 서서 홀린 기분으로 정해준에게 달려들어 갖은 애교를 피우는 승아를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았다.

“와아! 토끼 죠아요! 아조씨 체고!”

웬 토끼? 갑자기? 아니, 그보다 승아 발음이 왜 저러지.

정해준 앞에서 점점 혀가 짧아지는 승아를 의식하며 정해준의 복장을 훑었다. 편안한 검정 슬랙스에 회색 브이넥 니트가 잘 어울리는 말쑥한 차림이었다. 저절로 그에 어울리는 상의와 하의를 계산하는 사이, 엄지를 번쩍 치켜들고 펄쩍펄쩍 뛰던 승아가 고양이 세수를 하고 와선 나를 옷장 앞으로 이끌었다.

“이고! 이고!”

서랍을 연 승아가 척척 손짓했다. 분홍색 쫄쫄이바지에 역시 분홍색 티였다. 대문짝만한 앞니를 드러내고 씩 웃는 토끼가 그려진 티. 아직 혼자서 팔을 꿰는 게 익숙지 않은 승아가 급한 마음에 저 혼자 끙끙거린 끝에 내게 옷가지들을 내밀었다.

“입혀죠.”

“입혀 주세요, 똑바로 말해야지?”

“입혀 주세요.”

“그래.”

양발을 바지에 착착, 다시 양팔을 티셔츠에 차례차례 끼워 주는 짧은 시간 동안에도 안달이 나 있던 승아가 옷을 다 입자마자 날 듯이 문을 나섰다. 신나는 기분을 주체 못 하는 승아를 보며 착잡해졌다. 도무지 정해준의 속을 짐작할 수 없었다. 조심한다던 약속은 깡그리 잊은 건가?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닌지도…….

복잡한 마음에 다소 어두운 얼굴로 거실에 들어섰건만 정해준은 산뜻하기만 했다.

“날씨 좋더라. 가볍게 입고 나와.”

“응…….”

이게 맞나. 의심하면서 잠자코 나갈 준비를 마치고 정해준과 승아의 뒤를 따랐다.

정해준이 이번에 고른 장소는 어린이들을 위한 동물 농장이었다. 토끼와 햄스터, 오리와 양 떼뿐인 작은 규모의 농장은 자잘한 꽃들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밥, 토끼 밥 또 사죠!”

금세 당근 바구니를 비운 승아가 폴짝폴짝 뛰며 졸랐다. 열성적으로 달려들어 먹이를 얻어먹은 토끼들이 금세 입 싹 닫고 다른 관광객에게 깡충깡충 뛰어가는 모양이 조금 얄미웠다.

입장료도 따로 받더니 동물 사료값을 관광객에게 다 씌우는구나.

비딱하게 꼬아 생각했다. 건초 냄새를 맡고 구름떼처럼 몰려온 양 떼를 보았을 때도 비슷한 감상이었다. 동심이 메마른 모양이었다. 아님 이 상황 자체가 불편하기 때문인지도.

“별로야? 애들이 좋아한대서. 우리가 보긴 좀 시시하지.”

먹이 바구니를 둘이나 사서 승아의 양손에 뿌듯이 쥐여 준 정해준이 눈치를 살폈다.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굳은 표정에 기분이 별로 안 좋은 줄 안 듯했다. 물론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멋대로 휘둘리는 게. 나뿐만 아니라 승아까지.

“주말에 연락도 없이 와서 좀 놀랐어.”

“그러게. 평일에 불러서 섹스나 해야 되는데.”

“말을 왜 그렇게…….”

비딱한 대꾸에 당황해 주위를 돌아봤지만 다행히 들은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승아도 토끼 먹이기에 정신이 팔려 있었고. 그래도 이쯤에서 그만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못 참고 짚고야 말았다.

“조심한다고 하지 않았어? 갑자기 이렇게…….”

종잡을 수 없는 정해준의 행동에 방어적으로 구느라 다소 뾰족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 놓고 또 마음에 걸려 눈치나 살피는 스스로가 청승맞다.

“알아.”

“…….”

알아, 한마디에 안도했다. 내치지 않는구나. 끊어 내진 않았어.

날카로워졌던 신경이 조금 누그러진 기분으로 웅얼거렸다.

“그날……, 별말이 없어서. 이렇게 다시 볼 줄 몰랐어.”

투정처럼 들리려나. 그럴 입장이 아닌데도. 살짝 표정을 살폈다가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매에 속이 술렁였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정해준이 비로소 정한 마음을 꺼내놓았다.

“네가 그랬지. 하나하나 계산하고 만나지 않았다고.”

간신히 끄덕였다. 대꾸를 하고 싶어도 목구멍에 뜨거운 알 같은 것이 걸려 혀마저 꽉 눌린 기분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끝, 그다음, 생각한 적 없어.”

“…….”

정해준이 조심스럽게 손가락 끝을 부딪쳐 왔다. 섬세하게 손끝을 쓸고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차례로 겹쳐 왔다. 손바닥 사이에 빈틈이 없도록 완전히 맞잡은 후엔 깊은 물밑을 들여다보듯 내 두 눈을 응시했다.

마치 세상에 우리 둘밖에 없는 것처럼.

“생각해 봤는데, 끝이 있어서 문제라면 끝없이 만나자, 우리.”

“…….”

“헤어지지 말자는 뜻이야.”

나직하나 굳은 의지가 전해지는 속삭임에 염치없이 가슴이 벅찼다. 뜨겁게 고인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그게……, 그게 무슨 의민지 알아?”

한편으론 엄청난 얘기여서 숨통이 다 짓눌렸다. 죽을 때까지 이어질 나의 부채를 함께 지겠다는 게, 감히 그런 걸 바라선 안 된다는 걸 알기에.

“확인해 본다는 게…….”

“그날, 너 잠깐 머물다 간 집이 그렇게 허전하더라. 텅 빈 것 같고. 당장 돌아가서 다시 너 데려오고 싶었어.”

“…….”

“그건 다른 누구로 채울 수 없다는 게 내 결론이야. 네가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해원아.”

“난, 나는…….”

반사적으로 승아에게 시선이 꽂혔다. 그것만으로도 내 의중을 파악한 정해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승아만 정 붙이는 거 아니야. 나도 정들었어.”

“…….”

“네 딸이어서 그런지 하는 짓도 다 귀엽고.”

내 딸 아니야.

순간 부정할 뻔했다. 가려진 진실마저도 기꺼이 안고 가려는 정해준에게 모든 걸 밝히고픈 충동을 부인하지 못하겠다. 혼란에 빠져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승아가 환히 웃으며 빈 바구니를 내밀었다.

“또 죠!”

덕분에 잠시 복잡한 머리를 가라앉히고 진정할 틈을 가졌다.

“승아야, 이제 그만.”

아무리 어린아이라지만 한번 들어주기 시작하면 조르는 데 끝이 없다. 누울 자리 보고 다리 뻗는다고, 안 된다는 내 말에 아예 정해준 쪽으로 몸을 틀어 바구니를 흔드는 모양에 기가 막혔다.

“자꾸 떼쓰면 나쁜 아이야.”

엄하게 타이르며 표정을 굳혔지만 못 들은 척, 못 본 척, 연기가 선수급이다. 난 어릴 때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럴 기회도 없었지만. 아무래도 이소원을 닮은 걸까? 원하는 걸 쟁취할 때까지 막무가내로 억지 부리는 이소원을 떠올리며 괘씸한 기분에 눈썹까지 뾰족하게 모았지만 둘 사이에 끼어든 정해준이 승아 편을 들었다.

“나쁜 아이가 아니라 토끼를 배불리 먹이고 싶어 하는 착한 아이지?”

“녜!”

제 뜻이 통하자 신난 승아가 먹이 판매대 쪽을 향해 뛰었다. 이번만큼은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