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과-62화 (62/77)

62화

그냥 바로 다음 날 보자고 할걸. 월요일부터 괴로워하며 스스로를 탓했다. 제 꾀에 제가 빠진 꼴이었다. 목요일 전날 밤에는 초조한 나머지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

선을 지켜 달라고 요구한 이후로 정해준은 연락을 뚝 끊어 버렸다. 이사실로 부르는 일도, 우연으로도 마주치는 일도 없었다. 회사 안팎에서 그토록 자주 맞닥뜨렸는데 이제는 신기할 정도로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그게, 두려웠다. 헤어지면 고스란히 겪어야 할 너의 무관심이.

나를 경멸하더라도, 냉담한 태도로 일관하더라도, 실은 끝까지 네 곁에 남고 싶은 갈망을 정해준의 부재로 인해 역설적으로 깨닫는다.

그러니 만용이었다. 함부로 끝을 입에 올리고, 닥쳐올 이별을 준비했던 지난 시간들은.

괜찮을 리 없다. 나는 망가질 거라고, 단정 지으며 하얗게 밝아온 아침을 맞았다. 말라비틀어진 기분으로 승아를 배웅하고 정해준이 알려 준 주소로 향했다.

“왔어? 들어와.”

“응, 이거.”

어떤 걸 준비해야 할지 몰라 고심 끝에 사 온 디저트를 내밀었다. 얇게 저민 망고가 겹겹이 올라간 작은 케이크였다.

“뭘 이런 걸 다.”

“좋아할 것 같아서.”

“맛있겠다. 고마워.”

막상 닥치니 덤덤했다. 케이크를 가볍게 받아 들고 안으로 향하는 정해준의 뒤를 따르며 집 안을 둘러보았다.

사는 곳은 바뀌었지만 인테리어는 그때와 비슷했다. 넉넉한 공간이 주는 여유를 잠시 느끼다가 책장으로 다가갔다. 추리소설 신간이 나오면 나를 위해 즉각 사서 꽂아놓고는 모른 척 내 반응을 즐기던 정해준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대강 눈으로 훑으니 전공 서적이 조금 늘어난 정도였는데, 못 보던 앨범이 하나 꽂혀 있었다. 이미 정해준의 앨범은 닳도록 봤는데 새로운 앨범이 있으니 호기심이 생긴 건 당연했다.

별생각 없이 앨범 모서리를 잡아내려 펼친 순간, 첫 페이지 가운데에 금박으로 박혀 있는 세 글자를 발견하고 황급히 덮었다.

첫 여행.

무엇을 기념하려는 앨범인지 명확했다. 정해준이 첫 여행이라고 부를 만한 건 함께 했던 제주도에서의 시간밖에 없으니까. 눈만 깜박여도 줄기차게 사진을 찍어대던 정해준이 떠올랐다.

언제 이걸 만들었을까. 확실한 건 적어도 내가 일방적으로 이별을 고한 다음이라는 거였다. 여행이 끝난 후 만들어진 앨범이니까.

“와인 괜찮아? 그냥 과일 주스도 있어.”

돌처럼 굳어 있는 사이 정해준이 마실 것을 들고 가까이 다가왔다. 반사적으로 앨범을 등 뒤에 숨겼다. 내 물건도 아니면서 우스운 짓이었다. 어색한 몸짓, 희게 굳은 안면에 정해준은 바로 내가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뭔데.”

그러곤 손쉽게 등 뒤로 팔을 뻗어 내가 들고 있던 앨범을 가로채 갔다. 내가 감추려던 게 무엇인지 확인한 순간 정해준의 낯에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 이내 태연하게 굴긴 했지만, 석상처럼 굳어졌던 찰나를 목격한 이상 똑같이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는 없었다.

“이거…….”

무슨 심정이었냐고. 너한테 상처로 남았을 시간들을 뭐가 좋다고 이렇게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냐고, 차마 묻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묻지 않았음에도 무심히 앨범의 첫 장을 넘기며 정해준이 대꾸했다.

“헤어진 거 실감이 안 나서. 당연히 돌아올 줄 알았어.”

“…….”

“만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같이 앨범 구경하려고 했고.”

작은 고동을 모아 만들었던 사진 속 하트를 음울하게 내려다보던 정해준의 낯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미신 같은 거였는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관광지에서 다음에 다시 올 것을 기약하며 던지는 행운의 동전 같은 거였다고. 앨범을 탁, 소리 나게 덮은 정해준이 그것을 내밀었다. 꼭 나를 시험하는 것처럼.

“볼래?”

“……아니.”

당시의 나를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입매를 끌어올리고 있을, 그럼에도 눈매 어딘가에 남아 있을 슬픔의 흔적을. 한편 가증스럽게 느껴지기도 할 내 모습을 외면하며 앨범을 제 자리에 꽂아놓았다.

과거의 한 자락이 앨범에 봉인된 채 책장 사이로 접혀 들어갔다. 밝은 색깔의 앨범 등이 도발하듯 반짝였다. 마냥 묻지만 말고 어디 한번 캐내 보라는 듯.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진실을 드러내는 건 여전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째서 네게 그런 상처를 줘야 했는지, 우리 아픔의 의미는 무엇이었는지.

그건 일종의 사고였다고, 이소원으로부터 촉발된 사고에 우리 둘 다 치여 고통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치부하기엔 나 또한 네게 솔직하지 못했다. 작정하고 속인 건 아니었지만…….

은폐도 거짓과 마찬가지로 한번 시작하면 종내에는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난다는 걸, 너무 큰 대가를 치르고서야 배웠다.

차라리 솔직했더라면, 그럼 우린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일까.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는데.

남자애들끼리 체육관에서 나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평가할 때,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사귀기로 했을 때, 수도 없이 네 집에 드나들 때, 하다못해 우리의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에서라도.

씁쓸한 건, 지금도 함구하고 있는 내 모습이었다. 지금 와서 돌이키기엔 많은 것들이 얽혀있다고 자위해 보지만, 본질은 같았다.

겁쟁이.

염치없이 기만을 저지르면서 네게 미움받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내가 비루하게 남아 와인을 받아 들었다. 아직 훤한 낮이지만 취기를 빌리고 싶었다.

이후로는 얌전히 앉아 정해준의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알싸한 마늘 향이 기름에 볶이며 점점 입맛을 당기는 맛있는 냄새로 변해갔다. 자연스럽게 처음 정해준의 공간을 방문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파스타를 해 줬었는데…….

파스타의 열기에 눅진하게 녹아내렸던 아기 치즈가 잔상처럼 눈앞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리움에 젖어 있기엔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자리가 불편했다. 이조차 무슨 의도가 숨어 있는 게 아닐까, 속을 재 보는 것처럼 여겨지는 건 너무 비약일까.

어느새 완성된 파스타를 깨작거리는 내게 정해준이 물었다.

“맛없어?”

“아, 아니. 맛, 있어. 맛있어.”

솔직히 말하면 미각이 마비된 것처럼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씹고 있는 게 면인지 밥알인지조차 구분이 되지 않았다. 미친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다 집어치우고 정해준과 침대로 가고 싶었다. 아무 생각 않고 살을 섞으면 온 신경을 갉아 먹는 이 불안도 조금은 달래지지 않을까.

타는 속만큼 목도 바짝바짝 말라 들어가서, 거푸 물만 들이마시자 이미 제 몫을 비운 정해준이 반도 넘게 남은 내 접시를 빤히 바라보았다.

“영 별로인가 봐.”

“그냥, 오늘은 좀 입맛이 없어서. ……미안.”

“미안할 것까진 없고.”

화났을까. 원래도 식사 중에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건 알지만, 유난히 정해준의 침묵이 마음에 걸렸다. 지난 사흘간 무슨 생각을 했던 건지, 그래서 어떤 결론에 다다랐는지. 묻는 대신 악수를 두었다.

“……오늘은 안 해?”

생각에 잠겨 와인 잔을 손에서 천천히 굴리고 있던 정해준이 동작을 멈추고 맞은편의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허를 찌르는 눈빛에 시선을 내리고 말았다. 괜히 남은 파스타를 뒤적거리는 포크 끝에 정해준이 뱉은 헛웃음이 걸렸다.

“내가 섹스에 미친 놈인 줄 아나 본데.”

“…….”

“너랑 그렇고 그런 관계, 이제 그만두고 싶어졌어.”

나도 모르게 움찔 떨었다. 그만두고 싶다, 라…….

진작부터 선고받은 형을 실행하는 순간을 맞이하는 감정이 묘했다. 울 수도 없고, 웃을 수도 없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애매한 웃음기가 입가에 걸렸다가 바로 떨어져 나갔다.

‘매달리면.’

넌 나를 받아줄까. 담담히 받아들이겠다는 굳은 마음가짐 따위 어디로 가고 줏대 없이 속이 흔들렸다.

“하나만 묻자.”

“말해.”

“우리 잠시 만나는 사이라고 했던 거. 또, 더 이상 정붙이지 말자고 한 거.”

내 혀끝에서 뱉어 놓은 말이 정해준의 입을 빌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다. 네 귀에도 그렇게 들렸을까. 그래서 이토록 화가 났을까. 기가 막혀서, 감히 누가 할 소릴, 하고.

“나랑 사귈 때도 그랬어?”

“갑자기 그게 무슨 얘기인지…….”

“우리 관계가 어떤 건지, 어떻게 될 건지 계산해서 하나하나 따졌냐고.”

“……아니야.”

“…….”

“그런 적 없어.”

얕은 한숨이 들려왔다. 안도한 것 같기도 했고, 조금은 화가 풀린 듯도 했다. 아니, 솔직히 알 수 없었다.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식탁 모서리를 깎아 낼 듯 날카롭게 응시하던 정해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바래다줄게.”

이게 끝이라고? 어리둥절했지만 잠자코 따라나서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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