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내 허리에 쿠션까지 받쳐 가며 달래듯 조곤조곤 얘기하던 정해준이 꿈 깨라는 듯 친절하게 덧붙였다.
“참고로 말해 두겠는데, 너 위해서 아니고 나 위해서야.”
“어?”
“겨우 한 번 해 놓고 축 늘어지잖아. 반응도 확 죽고. 말 나온 김에, 딜도 취급받는 거 기분 나쁘니까 할 거면 제대로 해.”
“그런……, 그런 취급한 적 없어.”
더듬거리며 황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훤한 대낮이었고 천진무구한 어린이들이 어디고 있었다. 알록달록 아기자기한 인테리어와 아이들의 공주, 왕자 복장 때문에 정말 동화 속이라 해도 손색없을 장소였다. 음담을 주고받기에 여기보다 부적절한 곳이 또 있을까. 하지만 정해준은 여기가 어떤 곳이라는 걸 까맣게 잊은 듯했다.
“그러니까 오늘 밤.”
“그만, 그만!”
주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정해준의 입을 황급히 틀어막았다. 언제까지고 내버려 두었다가 누군가 듣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당황해 울 것 같은 내 반응이 재미있는지 정해준이 웃음을 터트렸다. 입을 단단히 막은 두 손에 부서진 따스한 숨결이 손바닥을 간질였다.
이건 이것대로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보기 좋게 휘어진 눈매와 절반만 드러난 콧대가 그린 듯이 근사했다. 내가 좋아하던 얼굴이었다. 지금도 심장을 세차게 뛰게 만드는. 다른 의미로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워져 손을 떼고 자세를 고쳐 앉아 얌전히 커피를 마셨다.
속도 모르고, 짓궂은 표정으로 상체를 바짝 기울인 정해준이 귓속말했다. 밀어를 속삭이듯이. 귓바퀴를 살살 쓸어내리는 듯한 입김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지만 꾹 참고 온 신경을 귀에 집중했다. 무슨 말이 나올까, 긴장하면서.
“그러니까 오늘 밤은 푹 자라고. 일찍 들여보내 줄게.”
“아…….”
혼자 너무 앞서나갔다. 그런 줄도 모르고 입이나 막고 난리를 쳐 댔으니. 창피함에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겠다.
“뭘 기대한 거야. 은근 밝힌다니까.”
건수 잡은 개구쟁이처럼 놀려 댄다. 밝힌단 말에 발끈했다가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어서 이내 순순히 인정했다.
“오늘 밤, 기대한다고 할 줄 알았어.”
“기대하면.”
문득 정해준의 눈빛이 집요해졌다.
“기대한 만큼 채워 주나?”
“일찍 잘 거야. 푹 자라며.”
실컷 놀려 놓고 뭘 바라나. 오랜만에 보는 정해준의 밝은 표정에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려 새침하게 대꾸했다.
“봐준다.”
너그러운 척 고개를 까딱인 정해준이 다시 쿡쿡 웃으며 커피를 마셨다. 잠시,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별것도 아닌 게 다 별것 같던, 아무 의미 없는 농담에도 넘치게 웃음을 터트렸던 그때로.
안 되는데. 자꾸 그리워하면 안 되는데. 설렘이 두근두근 울리던 가슴 한복판이 어느새 따끔따끔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정해준을 따라 커피를 마셨다. 그렇게 썼던 커피였는데, 아무 맛도 느낄 수 없었다.
***
약속대로 정해준은 우리 둘을 일찍 데려다주고 잘 자라는 인사와 함께 돌아갔다. 무언가 잘못됐다고 느낀 건 잠들기 전 불쑥 물어온 승아의 질문 때문이었다.
“아저씨 또 언제 와?”
“응?”
“승아랑 놀아 주는 아저씨. 승아 심심해.”
“…….”
불현듯 직면한 현실에 얼떨떨해졌다. 시기를 정해 놓진 않았지만 우리 만남은 유한했다. 시작부터 약속된 끝을 받아들일 각오는 하고 있다.
대단치는 않았다. 죽도록 앓으면 되겠지, 하는 마음가짐 정도는 됐다. 설령 앓다 죽어도 헤어짐을 감당하는 건 나 하나만의 몫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기대에 차 대답을 기다리는 승아의 반짝이는 눈망울을 본 순간 이별의 아픔을 오롯이 혼자 겪어 내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빠 없는 승아에게 정해준의 존재가 얼마만큼의 크기로 다가올지 고려하지 않은 채.
미처 예상치 못한 변수에 덜컥 내려앉은 가슴을 간신히 수습하며 승아에게 신신당부했다.
“승아랑 놀아 주는 아저씨 아니야.”
“아니야? 승아랑 또 놀러 가자고 했는데?”
“그건……, 아저씨 많이 바빠. 승아랑 노는 거 당연한 거 아니야. 그런 거 바라면 안 돼.”
금세 승아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잘 다독여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 선뜻 입이 떼어지질 않았다. 승아를 위해서 정해준과 거리를 둬야 한다는 이성적 판단을 마친 뒤에도 그러기 싫은 마음이 자꾸만 주저하게 만드는 것처럼.
그래도 해야만 했다. 어쩔 수 없이 내키지 않는 소리를, 마음을 배반하며 정해준에게 밝혔다. 승아한테 너무 살갑게 굴지 말라고.
“어제처럼 불쑥 찾아와서 애가 혹할 만한 곳에 데려가는 일, 앞으로는 없었으면 좋겠어.”
“같이 잘 놀아놓고 딴소리하는 게 네 특기야?”
정해준이 어이없어하며 비꼬았다. 날 선 눈빛에 속이 아렸지만, 할 말은 하고야 말았다.
“나는 그런 거 선뜻 해 줄 수 없어. 놀이공원, 나한텐 마음먹어야 겨우 다녀오는 곳이야. 그런데 네가 자꾸 해 줘 버릇하면 앞으로 내가 너무 버거울 것 같아서 그래.”
듣기에 따라 협박과 비슷했다. 이게 정말 옳은 걸까. 연신 방긋방긋 웃던 승아의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어쩌면 이조차 내 이기심의 발로인지 모른다. 아이는 핑계일 뿐, 되도록 상처 입지 않기 위해 적당한 선에서 너를 밀어내는 이기적 요구.
더는 안 돼. 선을 지켜 줘.
내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온몸으로 절박하게 이야기하는 나를 한동안 못마땅한 눈으로 쏘아보던 정해준이 후, 답답한 숨을 내쉬며 몇 번 이를 악물었다 놓았다.
“뭐가 그렇게 어렵고 복잡한데. 시간 돼서 즐겁게 논 거, 그게 다야.”
“우리 더 이상 안 보게 되면.”
고통스러운 가정에 숨을 훅 들이켰다. 내가 뱉은 말이 갈비뼈 사이를 날카롭게 저몄다. 이미 예정된 헤어짐인데도 선뜻 입 밖에 내는 게 힘들었다. 잠시 호흡을 골랐다가 아픈 현실을 조용히 뱉어 놓았다.
“어차피 우리 그냥 잠시 만나는 사이잖아. 그러니까 승아하고 너무 친해지지 않는 게……, 서로를 위해서 좋을 것 같아. 그때 되면 애가 많이 혼란스러워 할 거야.”
“…….”
너와 나의 사이란 고작 이런 거라고 말하는 혀가 베인 것처럼 아팠다. 예리한 통증을 감내하며 준비해 온 얘기들을 늘어놓았다.
“아이 키워 본 적 없어서 모르겠지만 정 떼는 거, 어린애한텐 쉬운 일 아니야.”
“너한텐 쉬운 일이고?”
질문인지 혼잣말인지 모를 말에 움찔했다. 쉬울 리가 없잖아. 어느덧 투정 투로 튀어나온 속내가 혹 새어 나갈까 봐 입을 꾹 다물었다. 일자로 다문 입술이 고집스럽게 비쳤을지도 모르겠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정해준이 차게 뇌까렸다.
“하긴. 너랑 나랑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순 없겠지.”
당연한 말인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냥 적당한 선을 유지하기를 원했을 뿐인데 선 밖으로 완전히 밀쳐진 기분은 절망스럽다.
정해준과 재회한 뒤 늘 끝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면서 막상 당사자에게 들으니 목이 졸리는 것처럼 괴로웠다. 말하지 말걸. 그냥 모른 척 네 호의를 누릴걸. 너무 과분해서 이따금 숨 막히도록 두려울지언정, 나 같은 게 감히 그래선 안 된다고 속을 파먹힐지언정.
“……응.”
그래도 내색하지 않고 담담히 수긍하는 나를 정해준이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깊은 물처럼 새까맣게 일렁이는 시선을 받아 내기 버거워 먼저 고개를 돌렸다.
너는 무슨 생각일까.
두 번째 이별을 고하는 건 아마도 정해준의 몫이 되겠지. 공평하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조차도 네겐 한참 부족한 분풀이일걸 알아서. 내가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는 점부터 그랬다. 비겁하게도.
이대로 차게 돌아설 줄 알았는데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정해준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언제 한번 나 사는 거 구경하러 올래?”
“어?”
예상치 못한 상황에 기분이 싱숭생숭해졌다.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의도일까, 하고. 내가 마지막 이별 여행을 계획했듯이 정해준도 그 비슷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나와 해 보고 싶었던 버킷 리스트 같은 거. 퀘스트를 진행하듯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미련 같은 건 산뜻하게 털어내고 훌훌 자유롭게 날아가는 엔딩.
별개로 정해준의 집이 궁금하긴 했다. 승아와 함께 방문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낮 시간을 비우기 위해 하루 휴가를 내겠다는 말에 정해준이 선뜻 그러라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왜?”
“글쎄.”
모호하게 흐린 말끝에 못내 불안해졌다. 시험에 드는 기분으로 쉬이 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정해준이 다시 한번 내 의사를 물었다.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
역시 내 짐작이 맞았구나.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의 방문을 통해 어떤 결단을 내릴 작정인 거다. 불안으로 술렁이는 속을 다스리며 언제 약속을 잡아야 가장 심리적 타격이 적을까 고민했다.
“이번 주 목요일 괜찮아?”
약아빠진 결정이었다. 주말을 통으로 눈물 바람으로 지새긴 싫고, 주 초부터 흔들리기는 싫은 얄팍한 계산속. 이런 순간조차 자신을 지킬 생각뿐인 나를 향해 정해준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목요일, 그래. 나도 그날 시간 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