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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과-60화 (60/77)

60화

아, 어쩜 저렇게 제 엄마랑 꼭 빼닮았을까.

승아의 동그란 얼굴에 이소원의 못된 표정이 고스란히 겹쳐진 순간 이성을 가늘게 지탱하던 인내가 툭 끊어졌다. 승아의 가자미눈에 독살스러운 말들이 사납게 머릿속을 채웠다.

나도 싫어. 다 싫다고. 다 내려놓고 싶다고. 내가 원한 것도 아닌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의 아이…….

‘잠깐, 내가…….’

점점 악의에 젖어 가다가 할머니가 어릴 적 내게 퍼부었던 악담을 똑같이 떠올리고 있는 자신에게 소스라치게 놀랐다. 희게 질린 건 다음이었다.

부릅뜬 내 눈에 놀라 어린 것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공포에 질린 걸 알면서도 굳은 얼굴을 쉬이 풀 수 없었다.

무시무시한 괴물 같겠지. 악독한 마녀 같겠지. 내가 봐도 미친 여자가 따로 없는데.

“엄마, 엄마…….”

겁에 질린 승아가 무릎걸음으로 기어와 다리에 매달렸다.

“엄마, 엄마! 미안해, 사랑해.”

단풍잎만 한 두 손을 싹싹 비비며 애처롭게 용서를 구하는 작은 아이 앞에 그대로 무너졌다. 내가 대체 뭘 한 거지. 이소원에게 향해야 할 화살을 아무 죄 없는 승아한테…….

후회와 자괴감에 속이 있는 대로 파 먹혔다. 몸서리치며 승아를 당겨 안았다. 와중에 떠올린 독설을 입 밖에 내지 않은 걸로 그나마 안도하는 스스로를 경멸하며.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건 막 승아에게 미안하다고, 엄마가 잘못했다고, 사과하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였다. 어디서부터 지켜봤는지 정해준이 현관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언제…….”

내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여전히 느껴 우는 승아 앞에 눈높이를 맞춰 앉은 정해준이 포장해 온 봉투를 들어 보였다.

“승아, 누룽지 좋아해?”

끄덕끄덕.

“닭고기는? 닭고기 좋아해?”

“응.”

이번에도 작은 고갯짓이 반복됐다.

“그럼 같이 먹자. 배고프지? 아저씨가 누룽지 삼계탕 사 왔어.”

작은 주먹으로 눈물을 쓱쓱 훔친 승아가 잠자코 정해준의 손을 잡고 식탁으로 향했다. 곧 고소한 냄새가 집 안에 감돌았다. 승아가 누룽지를 떠먹는 사이사이 정해준은 잘게 찢어 둔 닭고기를 제비 새끼처럼 쩍쩍 벌리는 어린 입에 잘도 넣어 주었다.

겨우 넋 나간 정신을 수습하고 주섬주섬 나머지를 주워 담았다. 쓰레기봉투 세 개를 꽉 묶어 버릴 동안 승아는 나를 보지 않았다. 나를 외면하느라 고집스럽게 돌려 앉은 등에서 분노와 원망이 느껴졌다.

뒤늦게라도 충분히 달래 주려 마음먹었지만, 저녁 식사를 마친 승아는 곧바로 잠들었다. 여전히 속눈썹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설움과 무력감이 쌓였을 가슴을 몇 번 토닥이다가 거실로 나오니 정해준이 그늘진 낯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미안해.”

그런 꼴 보게 해서. 덧붙이고 작게 웃었다. 얼마나 한심할까. 누가 봐도 아이 선물로 보이는 물건들을 바리바리 쓰레기봉투에 싸놓은 거나, 무서운 표정을 짓고 서 있던 거나, 숨 막히게 경직된 집 안의 분위기나.

“많이 힘들어?”

“…….”

“아무리 힘들어도.”

한숨을 참으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정해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이의 식사를 챙겨 주는 동안 내내 작정하고 있었던 것처럼 막힘이 없었다.

“실수는 네가 해 놓고 애꿎은 애한테 괜히 화풀이하지 마. 애는 아무 잘못 없잖아. 부모 중 누구와 살지 선택권도 없었고.”

최악의 모습만 보여 서글프면서도 아이는 아무 잘못이 없다는 단정이 기뻤다. 누구라도 좋으니 어린 내게 너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얘기해 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누구도 잘못이라고 일러 주지 않던 할머니와 새엄마에게, 이해원은 선택권조차 없었지 않냐고 일침을 놓아주었더라면. 그럼 적어도 스스로를 갉아먹는 사람으로 자라진 않았을 텐데.

“……고마워.”

비록 뒤늦은 위로지만 반가운 건 매한가지였다. 진심을 담아 전한 인사였는데 의외의 반응이었는지 정해준은 한참이나 매시근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널……, 진짜 모르겠다.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머릿속인지.”

나도 그래. 엉망이지. 속으로만 대꾸하며 발끝만 내려다봤다.

“오늘 넌 진짜 실망스럽다.”

정해준은 나를 두고 하는 말이겠지만, 내게는 어린 시절 냉랭하게만 나를 대하던 어른들을 질책하는 걸로만 들려서 기뻤다. 그리고 그 어른들을 닮아가는 나를 나쁘다고 해서 마음 한편에 안도감도 들었다.

기쁜데 또 슬퍼서 눈가가 자꾸만 이지러졌다. 웃으면서 소리 없이 흐느끼는, 이조차 정해준에겐 이해할 수 없는 낯이리라.

얕은 한숨과 함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정해준이 나를 보지 않은 채 손을 저었다.

“할 수만 있다면 네 머리 뚜껑을 열어서 안을 들여다보고 싶을 지경인데……. 들어가. 너 머리 좀 식히고 나서 얘기하자.”

“……진짜 고마워.”

정떨어졌겠지. 학을 뗐겠지. 어쩐지 당분간 정해준이 연락을 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와중에 그딴 거나 재고 있는 나 자신에게 환멸이 일었다. 번민에 싸여 오래도록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

당분간 찾지 않을 거란 예상과 달리 정해준은 아침 일찍부터 우리 집 소파에 앉아 있었다. 목이 말라 거실에 나왔다가 잠결에 헛것이라도 본 줄 알았다.

잠시 후 잠에서 깬 승아가 눈을 비비며 나오다 정해준을 보고 양팔을 벌리며 다다다 달려들었다. 초반에 가졌던 얄팍한 경계심은 완전 해제된 모습으로. 정해준이 번쩍 안아 들어 비행기를 태워주자 꺄! 기분 좋은 비명을 질러 댄 승아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아저씨는 회사에서 키가 제일 커요.”

“승아가 그걸 어떻게 알았지?”

“엄마가 사장님은 회사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랬거든요!”

순진한 아이의 해석에 정해준이 쿡쿡, 웃음을 흘렸다. 민망함은 내 몫이었다.

물론 정해준이 회사에서 키도 제일 크고 직급도 가장 높은 건 맞지만, 맞는데……. 최대한 아이 눈높이에 맞춰서 설명했는데, 엉뚱한 반응에 쩔쩔매는 사이 정해준이 승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눈을 맞췄다.

“승아야, 아저씨랑 재밌는 데 갈래?”

“어디?”

“승아 커서 뭐 되고 싶어?”

“으응…….”

골똘히 머리를 굴리던 승아가 힘차게 답했다.

“공주님!”

하하, 웃은 정해준이 그럼 공주님 놀이하러 가자고 흔쾌히 끄덕였다.

공주님 놀이라니, 그런 걸 하는 데가 있나? 직업 체험관 같은, 뭐 그런 곳인가? 어린이집에서 한 번 견학 다녀온 적은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대신 승아 밥 많이 먹어야 돼. 그래야 기운 내서 놀지.”

“네에!”

공주님이 된다니 눈을 반짝이며 씩씩하게 대답한 승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식탁 의자에 올랐다. 언제 데워 놨는지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갈비탕이 그 앞에 놓였다.

“뭐야?”

당황 속에 담긴 부담감을 읽은 정해준이 내 몫도 챙겨 줬다.

“별것 아니야. 갈비탕은 포장해 온 거고.”

“아니…….”

“우렁각시, 뭐 그런 거라고 생각하든가.”

하지만 넌 각시가 아니잖아. 무심코 떠오른 말이 스스로 듣기에도 우스꽝스러워 말문이 막힌 사이 갈비탕에 말아 금세 절반 정도 밥을 비운 승아가 참견했다.

“나도 알아, 우렁각시.”

“승아도 알아?”

“네, 동화책에서 봤어요. 우렁각시는 항아리 속에서 살아요.”

“승아는 척척박사님이네.”

갈비탕의 고기를 우물거리며 척척박사가 뭐냐고 물어본 승아는 똑똑한 사람이라는 말에 몹시 만족하며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그러자 이번에는 밥도 잘 먹는 멋진 어린이라는 칭찬이 덤으로 떨어졌다.

아이에게 칭찬이 어떤 약보다 값지다는 걸 알지만 훈육이란 미명하에 혼내기 급급한 나를 돌아보며 반성했다. 어려운 것도 아닌데, 잘했다는 말이 그렇게 어려웠다. 안 돼, 하고 막는 건 잘만 하면서.

심각해진 내 표정에 정해준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솔직하게 털어놓자 의외로 따뜻한 위로가 돌아왔다.

“넌 엄마고 난 남이잖아. 잠깐 예뻐해 주는 건 누가 못해.”

그런가. 정말 그런 거라면 다행이지만, 실은 내 어린 시절을 승아에게 투영하는 건 아닐까 내심 걱정이 됐다. 칭찬에 인색한 건, 받아 본 적이 별로 없어서일 거라고. 그렇다면 그건 서로에게 너무 불행하다.

‘앞으론 나도 노력해야지.’

다짐하며 뒷정리를 마쳤다.

정해준이 데려간 곳은 여러 가지 코스프레를 하고 뛰어놀 수 있는 키즈 카페였다. 규모가 꽤 큰 곳이었는데 승아 말고도 여러 공주들이 곳곳을 누비고 있었다. 온통 분홍색 일색인 드레스를 입고 드레스와 같은 분홍색 보석이 박힌 왕관 모양 머리띠를 한 승아가 소꿉놀이를 시작했다. 정해준과 나는 근처에 자리를 잡고 커피를 마셨다. 쓰기만 한 커피는 맛이 없었지만, 모처럼의 휴식이 달콤했다.

그런데, 여길 데이트…… 장소로 잡은 건 아니겠지? 순전히 승아를 위해서인가? 별로 안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처음 승아를 훑어보던 정해준의 냉담한 눈초리를 떠올렸다. 그때만 해도 정해준이 승아와 이렇게 잘 놀아 주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여기 어떻게 알고 오자고 했어?”

엄마인 나보다 정보가 빠삭한 것 같다. 신기해서 물어보자 뜻밖의 대답이 들려왔다.

“육아, 힘에 부쳐 하는 것 같아서. 좀 쉬라고.”

“…….”

“너, 많이 지쳐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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