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내일은 뭐 해?”
“그냥, 아이 반찬 만들고, 밀린 빨래도 하고…….”
일상은 추레하다. 매일 쌓이는 설거짓감과 빨랫감, 돌아서면 밥 돌아서면 간식 돌아서면 다시 밥. 아이 하나 거둬 먹이는 게 그렇게 끝없는 수고를 요했다. 하지만 정해준은 영 이해 못 할 표정으로 냉장고 안 한 번, 나 한 번, 번갈아 봤다.
“아이 반찬만? 네 건? 집에서 뭘 먹긴 해?”
승아 몫의 소고기구이 팩을 들고 성인이 먹기엔 한참 부족한 양을 확인한 정해준이 눈살을 찌푸렸다.
“난 그냥 별로 배가 안 고파서.”
별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대꾸도 하지 않는 정해준에게 다시 핑계를 댔다.
“나 먹을 건 김 여사님이 가끔 해 주셔.”
한 달에 한 번 정도지만 그것도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김 여사님의 손맛은 심심해서 승아에게 먹일 만한 찬이 꽤 있었다. 그럼 주말이 좀 느긋하게 지나갔다. 하지만 그게 변명거리가 되진 못했다. 콩나물, 멸치볶음, 콩자반 약간씩. 조촐한 아이 반찬 몇 개만 있는 냉장고가 그 증거였다. 하는 수 없이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식빵도 많이 얼려 놨어.”
해명하면 할수록 궁색해졌다. 그냥 입을 다무는 게 최선이란 판단이 들었다. 너무 뒤늦은 판단이었지만. 역시나, 속사정을 바로 간파한 정해준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요점을 콕 집었다.
“그러니까, 네 입으로 들어가는 건 빵 쪼가리뿐이네.”
근처에 앉아 블록을 만지작거리며 가만히 우리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승아가 웃음을 빵 터트렸다.
“쪼가리! 쪼가리!”
발음이 재미있는지 몇 번이고 되뇌더니 노래까지 만들어 불렀다.
“하, 나가자.”
“나가자고? 지금? 어딜?”
“마트. 가기 전에 요기도 하고. 승아야, 승아 뭐 좋아해? 아저씨가 맛있는 거 사 줄게.”
겅중겅중 뛰면서 쪼가리를 외치던 승아가 딱 멈췄다. 외식 또한 경험이 별로 없으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한참 생각하더니 겨우 자그마한 혀로 끄집어낸 게 계란찜이었다. 즉시 정해준에게서 힐난의 눈빛이 돌아왔다.
“애들은 원래 집밥 먹고 크는 거야. 바깥 음식이 뭐가 좋다고. 간도 세고…….”
가벼운 비웃음이 돌아왔다. 내 얘기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정해준이 승아 앞에 손가락 세 개를 세워 검지에 짜장면, 중지에 돈가스, 약지에 숯불갈비를 읊으며 그중 하나를 고르라고 시켰다. 무슨 메뉴가 중구난방이야. 속으로 웅얼거리면서도 아이가 좋아할 만한 메뉴라는 건 곱게 인정했다.
“수뿔? 수! 뿔! 가알비!”
이번에도 발음이 재미있었는지 승아가 폴짝 뛰며 정해준의 약지를 잡고 흔들었다.
“아저씨도 어릴 때 그거 제일 좋아했어.”
잘됐다고 머리를 쓰다듬은 정해준이 승아와 나란히 손을 잡고 현관을 나서는 모습을 홀린 기분으로 바라보다 뒤늦게 따랐다.
***
저녁 늦게 도착한 마트는 꽤 한산해 소화도 시킬 겸 느긋하게 걸었다. 카트에 앉은 승아는 별세계에라도 온 듯 동그랗게 뜬 눈을 깜박이지도 않고 구경했다. 대형 마트는 처음이니 그럴 법도 했다. 차도 없는 데다 겨우 두 식구 살림살이에는 동네 마트로도 충분했으니까.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두부 코너 앞을 지나칠 때 특히 그랬다. 집들이를 한답시고 처음 둘이 마트에 갔을 때, 여러 개의 제품을 두고 한참 동안 고민했던 게 떠올랐다. 이건, 반칙이었다.
하여 승아가 정신 팔린 틈을 타, 가만히 물었다. 물어야 할 것 같았다.
이건 좀, 우리 사이에 너무 과한 것 아니냐고. 편리하지도, 깔끔하지도 않은 것 같다고. 그건 네가 원하던 관계가 아니지 않냐고.
“이것도 배려야?”
“아니.”
정해준이 건조하게 대꾸했다.
“오늘 너랑 자고 갈 건데.”
곧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렇구나, 하고 작은 중얼거림에 목 끝까지 차오른 서글픔이 슬쩍 밀려갔다 다시 돌아와 찰랑거렸다.
이후로는 기계적으로 필요한 것만 담았다. 사실 필요한 게 무엇이었는지 모르겠다. 애초에 나는 장 볼 생각이 없었으니까. 정해준이 골라서 건네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물건을 쌓아 올렸다. 다만 정해준이 두부 코너를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는 것만 알았다.
두부 진열대가 보이면 의식적으로 길을 돌았으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기묘했던 장보기가 끝이 났다. 대형 마트 안을 연신 두리번거리며 감탄하던 승아는 선물 받은 찰흙 놀이 세트를 꼭 끌어안고 잠들어 있었다. ‘수뿔’ 갈비를 얼마나 좋아하던지, 부른 배가 아직도 꺼지지 않아 슬며시 웃음이 났다.
깊이 잠든 승아를 조심스레 자리에 누이고 장 본 음식들을 정리하는 동안, 정해준은 노트북과 서류를 꺼내와 일에 몰두했다. 비좁은 2인용 식탁에 노트북을 펴고 업무를 보는 정해준이 낯설었다. 잠깐이면 되겠지 했는데 승아 책상까지 보조로 옆에 두고 본격적으로 서류들을 뒤적이는 게 금방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커피를 뜨끈하게 내려 옆에 놓아주고 멀찍이 떨어져 앉아 발가락만 꼼지락거렸다. 고요한 거실에 이따금 서류 넘기는 소리만이 치열하게 울렸다.
‘할 일이 있었는데 미루고 온 건가?’
굳이? 왜?
채 해결되지 않은 의문 위로 새로운 의문이 첩첩이 쌓여 간다.
‘혹시…….’
이렇게까지 신호를 주고 있는데 내가 둔한 건가? 애써 부정하면서, 희망 한 톨마저 품지 않으려고.
아무리 그래도 나를 좋아하냐고 차마 물을 수 없었다. 정해준의 속내를 좋아하는 감정 운운해 가며 예사롭게 떠볼 정도로 뻔뻔스럽지는 못했다. 대신 익숙한 확인을 했다.
“아직.”
“…….”
“나 많이 미워하는 거, 맞지.”
대답 대신 정해준의 안면이 딱딱하게 굳었다. 언짢아하는 기색이 역력해 뒤늦게 자책했다. 그걸 꼭 정해준의 입으로 들어야 아나? 당연한 것을.
돌연 가라앉은 분위기에 역시 그렇구나, 납득하면서도 어쩐지 기운이 빠졌다. 용케 내색하진 않았다. 무슨 자격이 있다고 내색씩이나.
대신에 애꿎은 토끼 인형을 집어 들고 귀를 까딱까딱 흔들었다. 나한테 토끼 같은 긴 귀가, 개처럼 살랑거리는 꼬리가 없어서 다행이라는 엉뚱한 상상과 함께. 만약 그랬다면 축 처진 귀와 꼬리로 금세 속마음을 들켰을 테니까.
인간이란 건 편하구나.
마음먹은 대로 남도 속여 먹고 나도 속여 먹고. 그래서 제 꾀에 제가 넘어가고. 쌤통이라고, 스스로를 향해 신랄한 조소를 날리는데 탁, 노트북 닫는 소리가 들렸다. 그 외에 정해준이 별다른 행동을 취한 것도 아닌데 긴장했다.
“어디서 씻어?”
“어? 아, 저기.”
엉거주춤 일어나 화장실 문을 가리켰다. 정해준이 그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은 순간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화장실 상태도 냉장고처럼 형편없으면 어떡하지? 멍청하게 앉아서 시간만 죽이지 말고 물이라도 한번 뿌려 놓을걸. 거울이라도 한번 훔쳐 놓을걸.
다른 건 몰라도 승아의 물놀이 장난감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건 자명했다. 그럼 그거라도 주워서 정리해 놓을걸. 후회해 봤자 이미 때는 늦었다.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르고 화장실 앞을 서성이다가 소리도 없이 나온 정해준과 마주치곤 깜짝 놀랐다.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며 정해준이 여상하게 물었다.
“침실은?”
“그게…….”
바로 어제까지도 몸을 섞은 사이인데 이상하게 긴장했다. 돌이켜보니 내 공간에 정해준을 들인 건 처음이었다. 꽤 오랜 시간 붙어 지냈는데도. 은밀히 숨겨 왔던 내면이 샅샅이 파헤쳐지는 기분이랄까. 실상 침실에 별것도 없는데도 그랬다.
“여긴데…….”
침대 하나, 옷장 하나, 화장대 겸해서 쓰고 있는 책상 하나. 단출한 방을 휘 둘러본 정해준이 퀸사이즈 침대를 곱지 않은 눈으로 훑었다.
“처음엔 아이랑 둘이 잤거든. 그리고 내가 넓은 침대를 좋아해서.”
이게 무슨 변명이지. 꼭 다른 남자는 들인 적 없다고, 그런 목적도 아니라고 설득하는 것처럼. 그러거나 말거나 정해준한테 나는 이미 닳을 대로 닳아빠진 여자인데.
어색하게 서 있는 나와 달리 먼저 침대에 앉은 정해준이 침대의 성능을 확인하듯 반동을 주었다.
“폭신하네.”
“어…….”
“안 와?”
마치 자기 침대처럼 옆자리를 두드린다. 내가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다면, 학창 시절에 남자 친구인 정해준을 우리 집에 초대했을 때 모습이 지금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긴장 섞인 설렘을 느끼며 침대가 어떠니, 벽지가 어떠니, 떠들어 대면서.
그리는 것만으로도 풋풋하고 예쁜 상상이었다. 당시에는 상황이 워낙 빡빡하니 정해준을 향한 감정을 온전히 느끼지 못했고 그러다 보니 내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도 못했다.
지금 와 돌이켜보면 정해준을 많이도 좋아했던 것 같다. 교복 입은 정해준이 이토록 그리운 걸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