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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과-57화 (57/77)

57화

“왜? 신경 쓰여?”

“아니, 그냥 다른 사람이 궁금해하길래.”

몰염치한 자신을 의식하며 얼른 덧붙인 핑계에 정해준의 입가가 도로 딱딱하게 굳었다. 조금 전 단순히 짜증을 부리던 것과는 질이 다른 분노였다. 단단히 마음 상한 모습에 앞뒤 없이 사과부터 뱉었다.

“미안해.”

“다른 사람 누구? 손아름?”

손아름이 몹시 궁금해하긴 했다. 정말 고해나랑 결혼할까요? 빨리 결혼하라고 성화라는데, 하고.

정확하게 짚어 내자 할 말이 없어졌다. 다른 변명이라도 대야 할 것 같았지만, 뭘 곱씹는지 침묵 속에 점점 화를 키워 가는 정해준의 모습에 사고 회로가 뚝 멈춰 버렸다.

“넌.”

입매가 한쪽만 비스듬히 기울었다. 뒤틀린 속내가 그대로 드러난 입매에 바짝 긴장했다.

“진짜 예의가 없네. 아무리 섹스 파트너라지만 다른 여자 궁금한 거나 대신 물어 주고. 자존심이 없는 건지, 내가 만만한 건지. 아님, 나 같은 건 신경 쓸 필요도 없다는 건가. 그래?”

“그게 아니라.”

“헷갈리니까 제대로 말해. 솔직하게 얘기해도 좋아.”

“그냥, 내가 생각이 짧았어.”

밋밋한 사과를 건네면서 어쩌면 정해준은 화가 난 게 아니라 상처 입은 게 아닐까, 근거 없는 망상을 했다. 아니겠지. 아닐 텐데, 눈빛이 꼭 날카롭게 베인 짐승 같아서.

“실은…….”

도돌이표 같은 얘기에 정해준이 지겨워하지 않기를 바라며, 조심스레 어제 일을 꺼냈다. 김규환이 내가 정해준의 차를 타고 집에 갔다는 걸 알고 있다는 거나, 내가 이사실에 드나드는 횟수를 세고 있는 것 같다는 추측 등을.

“그 스토커 새끼가.”

불쾌하게 중얼거렸지만, 정해준의 날 선 분위기가 눈에 띄게 누그러졌다. 스토커까지는 아닌 것 같다고 말하려다가 괜히 또 심기를 거스를까 싶어 희미하게 웃고 말았다.

“알았어. 주의할게. 집에 데려다주는 건, 그냥 애 핑계 대면 되잖아. 매일 하는 것도 아니고.”

반 발짝만 물러선 정해준에게, 세상에 어느 회사 이사가 일개 사원 어린이집 사정까지 봐주냐고 반문하려다 이 역시 그만두었다. 그런 걸 따지기에는 이미 한참 꼬여 버린 관계였다.

***

시약 재고에 공백이 생겨서 실험이 오전부터 쭉 밀린 상태였다. 가장 기본적인 재고 관리도 제대로 안 하는 거냐고, 팀장이 자재관리부 직원과 격하게 말다툼하는 바람에 종일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퇴근 시간이 됐다고 어린이집에 곧장 달려가기란 여간 눈치 보이는 일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밀린 실험의 결과지에는 떡하니 오류값이 떠 있었다. 통계도 돌리지 못할 수준이었다. 이런 경우에는 결괏값과 함께 사유서를 즉시 제출해야 했다.

‘하필 이런 때에…….’

입술을 깨물며 보고서를 작성하고 나니 이미 하원 시간을 훌쩍 넘겨 있었다. 미리 전화로 양해를 구해 놓긴 했지만 선생님들 얼굴을 어떻게 볼지 벌써 걱정이었다. 헐레벌떡 도롯가로 나왔는데 택시마저 잡히지 않았다.

이러는 와중에도 시간은 계속 흘렀다. 발만 동동 구르던 내 앞에 선 정해준의 차는 구원자의 백마와 동일했다.

“타.”

이런 식으로 만나는 건 가급적 자제하자고, 먼저 뱉어 놓은 말이 있었지만 그런 걸 따질 처지가 안 되었다. 염치 불고하고 올라탔다.

“고마워.”

지난번처럼 샌드위치와 커피가 준비되어 있었지만 먹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정해준도 딱히 권하진 않았다. 대신 자기도 입에 대지 않았을 뿐.

“베이비 시터를 구해 놓는 건 어때? 상시는 아니더라도.”

“애가 좀 예민한 편이라, 낯가림도 심하고. 어린이집도 적응하는 데 한참 걸렸어. 선생님 말로는 까다롭기로는 지금까지 본 애들 중에 일등이래.”

“회식 때 봐 주신 분 있잖아.”

“아……, 김 여사님이셔.”

아무래도 본가에서 일하는 분이다 보니 내가 부르고 싶다고 마음 편히 부를 수 있는 상황이 못 되었다. 지난번 회식 때에도 엄청 어렵게 말을 꺼내지 않았는가. 그때 한 번 시간 내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했다.

“어차피 곧 돌봄 센터 운영할 거니까. 조금만 참아.”

“그래, 그것도 고마워.”

매시근하게 웃어 보이고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겨울과 봄의 경계가 물 머금은 흙냄새를 피워 냈다. 곧 있으면 이 추위도 가시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겠지. 우리가 한창 설레었던 그때처럼.

새 차의 가죽 냄새와 잘게 부서지던 햇살, 우스갯소리에 깔깔거리다 눈이 마주치면 피식 웃으며 핸들을 톡톡 두드리던 정해준의 습관 같은 것들이 무성영화처럼 잔잔하게 눈 앞을 흐르며 가슴을 뻐근하게 조였다.

더 이상은 감당 불가였다. 아리고 벅차서 그냥 눈을 감았다. 기억 속의 장면과 사뭇 다른, 따스하나 메마른 정적이 나를 수면으로 이끌었다.

얼마쯤 눈을 붙였을까. 정적도 너무 심하면 신경을 거스르는 법이라 자연스레 눈이 떠졌다. 시동을 끈 채, 어둑한 그늘 속에서 정해준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앞을 주시하고 있는데 어쩐지 줄곧 시선이 닿아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몽롱한 상태에서도 하원 걱정이 제일 먼저 들었다.

“어……, 승아.”

“방금 도착했어.”

“고마워.”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헐레벌떡 내렸다. 방금 도착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던 듯 아슬아슬하게 승아를 데리고 나왔다. 뒤늦게 전화라도 해서 다시 인사해야 할까, 생각이 들었지만, 저번처럼 정해준의 차가 그 자리에 그대로 세워져 있었다. 다만, 이번에는 밖에 나와 차체에 몸을 기댄 채였다.

“왜 안 가고…….”

뭐 빠트린 게 있나? 아니면 전할 말이라도? 의아해하며 입을 열다가 긴장하여 손을 꼭 잡는 승아를 의식했다.

“승아야, 안녕하세요, 해야지. 이분은 엄마…….”

나도 모르게 친구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승아가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사장님 정도여서 다시 그렇게 말하려는데 정해준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가워. 아저씬 엄마 친구야. 안녕?”

좀처럼 성인 남자를 만날 일 없는 승아가 잽싸게 내 뒤에 숨었다. 옷자락을 움켜쥔 손에 어린아이의 긴박한 속내가 고스란히 배어났다. 난처해하며 어깨를 도닥이다가 문득 정해준을 바라보니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승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왜…….”

여기서 기다리고 있는지. 혹시 그전에도 나를 기다렸던 건지. 기다렸다면 언제까지, 얼마나 기다렸는지. 내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였는지.

수많은 물음표가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 나간 건 하나도 없었다. 그저 멀겋게 서서 이제는 고개를 빼꼼 내밀고 정해준을 관찰하기 시작한 승아를 어루만졌다. 잠깐의 침묵 끝에 정해준이 드디어 용건을 꺼내놓았다.

“물 한 잔만.”

그것도 안 되냐는 투였다. 네 사정을 봐주어 퇴근 후 쉬지도 못하고 데려다줬는데, 물 한잔 정도는 당연히 요구할 수 있다는 듯. 잠시나마 곤란한 감정을 가진 내가 갑자기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네게는 죽 배은망덕한 사람이었을 테지만.

물 한 잔의 보답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집까지는 걸어서 겨우 5분 정도였는데 정해준은 차를 눈짓했다. 승용차를 타 볼 기회가 적었던 승아는 눈을 빛내며 다람쥐처럼 쪼르르 좌석에 올랐다. 놀이기구쯤으로 여기는 게 분명했다.

“이야!”

어린아이다운 천진한 반응에 정해준이 경로를 벗어나 드라이브를 시켜 줬다. 중간중간 차창을 열어 바람을 맞게도 해 주었다. 까르륵, 하고 웃음보가 터진 승아와 그런 승아를 백미러로 보며 흐뭇하게 웃는 정해준 때문에 기분이 묘해졌다.

‘이건 마치…….’

꼭 가족 같아서.

물론 이뤄질 수도, 이뤄져서도 안 될 일이었다.

그럼에도 자꾸만 의식이 그쪽으로 흘렀다. 언젠가 정해준이 말했던 대로 어린아이를 향한 의례적인 호의를 보였을 뿐인데. 그것조차 달리 여기면 나한테 문제가 있는 건데.

이런 이유로 집까지 밀고 들어온 정해준이 물을 마시고 나면 바로 승아 핑계를 대고 내보내려 했다. 목욕을 시켜야 한다든지, 일찍 재워야 한다든지.

그런데 어째 일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정말 당황스럽게도, 대접할 물이 없었다. 생수 주문을 깜박한 게 화근이었다. 남아 있는 거라곤 순한 유아용 보리차뿐이었다.

“저, 아기 보리차 밖에 없는데 이거라도 마실래?”

대답 대신 정해준이 옆에 와 섰다. 냉장고 안쪽을 슥 훑는 눈길에 내 속을 까 보인 것처럼 창피해졌다. 다른 음료가 있는지 살피려는 의도였을지는 모르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대접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마실 것도, 과일 한 조각도. 냉장고 구석에서 초록색 곰팡이에 뒤덮인 채 굴러다니는 귤 한 알이 있기는 했다.

저게 왜 저기 있지?

주기적으로 청소한다고 했는데 미처 몰랐다. 냉장고가 운동장만큼 넓은 것도 아닌데 왜 못 봤지. 부끄러움에 꼭 숙제를 마치지 못한 학생이 선생님의 꾸중을 기다리듯 입술을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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