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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과-54화 (54/77)

54화

무안한 속내가 드러났을 게 뻔한 얼굴을 어깨에 묻어 감췄다. 색색 몰아쉬는 숨소리가 유난히 귓바퀴를 크게 울렸다.

버거워.

품고 있기만도 힘겨운 살덩이가 마구잡이로 드나들고 있었다. 작살에 꿰인 것처럼 꼼짝도 못 하고 파들거렸다. 문득 들락거림을 멈춘 정해준이 반쯤 풀린 동공을 내려다봤다.

“뺄까.”

냉랭한 물음이 떨어졌다. 그 언젠가와 같으나, 다정함이 사라진 물음. 배려 아닌 강요였다. 거역할 수 없는 힘이 담겨 있었으므로.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물러서면 다음이 없다는 걸 알아서. 그래 봤자 파국을 늦출 뿐인 다음이지만.

“아니.”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정해준이 흉흉한 기세로 허리를 놀리기 시작했다. 거침없는 움직임에 몸이 휘청거렸다. 퍽퍽 안을 치받는 거센 몸놀림에 기어이 자세가 무너졌다. 마구 해 대는 통에 자꾸만 몸이 위쪽으로 이동했다. 골반을 잡아 하체를 제 쪽으로 주욱 끌어당긴 정해준이 아래를 뭉근하게 돌려 댔다.

“흐, 아아!”

열 오른 시야에 구겨진 블라우스와 방만하게 출렁이는 가슴, 양쪽으로 벌어져 함부로 달랑거리는 종아리가 보였다. 반면 다리 사이에 갇힌 정해준은 흐트러짐 없이 단정했다. 나와 현저히 다른 모습에 차라리 외면을 택했다. 시야가 차단되자 감각이 생생해졌다.

“읏, 아흣……!”

쾌감이 고조된 흐느낌에 더운 숨이 섞여들었다. 자세를 고쳐 세운 정해준이 가장 잘 느끼는 지점만을 정확히 노려 얕게 치댔다. 움찔움찔 쥐어짜 대는 속살의 움직임에 아랫배 전체가 조여들었다. 달라진 질벽의 반응을 모를 리 없었다. 한층 달아오른 열기를 기민하게 포착한 정해준이 충실하게 흔들어 대던 허리를 멈추고 조롱했다.

“길들여 놓은 그대로네. 음? 아주 구관이 명관이지?”

“그런.”

“그 새끼 건 작아서 느낌도 없었을 것 같은데.”

김성철의 물건이 어떤지 나는 알 길이 없건만, 당황해 멈칫거리는 걸 오해한 정해준이 반쯤 걸쳐 있던 살 기둥을 단숨에 푹 찔러 넣었다.

“비교하지 마. 기분 더러우니까.”

“아니, 읏, 하읏……!”

별안간 세차게 허리를 터는 움직임에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됐다.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흥분한 짐승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아, 아아아! 으흡!”

여기가 어디란 것도 잊고 교성을 지르다가 입 속으로 불쑥 파고든 손가락에 숨이 턱 막혔다. 기이한 소리가 엄지에 눌린 혀 가장자리로 흘러내렸다. 셔츠의 틈으로 꿈틀거리는 복근이 시야에 잡힌 순간, 억눌린 신음 소리와 함께 상체로 뒤로 젖힌 정해준이 파정했다. 일시에 분출한 정액으로 불룩해진 양감이 내벽을 압박했다.

“후으…….”

느긋하게 사정을 마친 정해준이 여운을 즐기듯 허리를 천천히 왕복하며 뿌연 정액으로 흥건한 아래를 반복적으로 되먹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쾌감을 채 떨쳐내지 못한 질벽이 질금질금 애액을 토해 냈다.

선명하게 파들거리는 허벅다리 안쪽을 발견하고 무의식중에 다리를 오므리려 했으나 정해준의 허리만 조이는 꼴이 되고 말았다. 부족하다고, 더 달라는 듯.

경멸을 감추지 않으며, 정해준이 양 발목을 잡아 천천히 제게서 떼어 냈다. 자신은 볼일을 마쳤다는 증거로 콘돔을 쑥 뽑아내고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이어 갑 티슈를 확인한 정해준이 혀를 찼다.

“비었네. 닦아 줄래?”

“어…….”

티슈가 없는 건 피차 마찬가지였다. 잠시 나가서 뭐든 구해 와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 정해준이 원하는 건 따로 있음을 알았다. 멍하니 벌어진 내 입술 사이만을 무언가를 요구하듯 응시하는 시선이.

혹시, 싶어서 자세를 낮추자, 정해준이 기다렸다는 듯이 살 기둥을 곧추세웠다. 주저하다가 귀두를 머금는 걸 시작으로 천천히 나머지를 받아들이자 나른한 신음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정액과 애액이 섞인 오묘한 맛에 절로 몸서리가 쳐졌지만, 버겁도록 입에 담긴 거근은 그대로였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생각했다.

이것도 돈값에 해당할까.

음경 끝에 고여 있던 분비물을 핥아 내는 것으로 티슈 역할은 끝이 났다.

“된 것……, 같아.”

숙제를 검사받는 아이처럼 선 나 자신이 무척 초라해 보였다. 그럼에도 정작 처량한 건 따로 있었다. 바로 뿌듯한 기분이었다.

거칠게 뽑아간 거근에 가랑이 사이가 쓸려 온통 욱신욱신한데, 덴 것처럼 아랫배가 화끈거리는데, 도리어 좋았다. 주인 없이 오래 비워 둔 냉골에 불을 지핀 것처럼 벅찼다.

이토록 뜨거운 열기를 품어 본 것이 너무나 오랜만이라, 게다가 상대가 정해준이라 아무렇게나 대하는 태도에도 씁쓸하기보단 황홀했다. 이 열기의 본질이 싸늘한 경멸이라는 걸 잘 알면서, 미련하게도.

들키진 말아야지. 정해준이 그어 놓은 선을 넘지 않도록.

그런 의미에서 다시 우뚝 솟아오른 그의 중심을 모르는 척하고 일부러 시계를 확인했다. 몰랐는데,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다시 일을 치를 마음은 정해준에게도 없었는지 내게서 깔끔하게 떨어져 나갔다. 그런가 보다, 덤덤히 받아들이며 옷을 추슬렀다. 가슴을 내보인 채 성기를 물고 빨았다고 생각하니 뒤늦게 수치심이 몰려왔다.

“그럼…….”

뭐라고 인사해야 하지. 뭐든 어색할 것 같아 머뭇거리는 사이 정해준이 차 키를 챙겨 들었다.

“늦었잖아. 데려다줄게.”

“…….”

정해준이야 말로 속을 알 수 없었다. 창녀처럼 대하며 모욕해 놓고 이리 태연하게 친절을 베푸는 게.

“애 기다릴 텐데. 설마 그 꼴로 나설 건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멍하니 올려다보자 가벼운 힐난과 함께 정해준이 앞장섰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복도 저 끝에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 켕기는 기분으로 뒤를 따랐다.

***

차 안에서 간단히 식사를 때우는 게 자주 있었던 일인 듯, 샌드위치 포장을 벗기는 정해준의 손길이 능숙했다. 한 입씩 크게 베어 먹는 모습도 깔끔했다. 속을 꽉 채운 샌드위치였는데 부스러기 하나 떨어지지 않았다. 먹을 생각은 않고 샌드위치를 가만히 쥐고만 있는 내게 정해준이 턱짓했다.

“배고플 텐데.”

“왜……, 이렇게 잘해 줘?”

너는 자꾸 내 처지를 잊어버리게 한다. 내가 뭐라도 되는 양, 자꾸 착각하게끔. 그런 거 싫은데. 끝내 어그러질 희망을 갖는 건 절망에 잠겨 있는 것보다 더 슬프니.

조심스러운 질문에 정해준은 딱딱한 목소리로 현실을 일깨웠다.

“한 발만 더 빼자.”

“…….”

“뭐 이런 대답을 원해?”

“…….”

“데려다주는 건 내가 시간 많이 뺏어서고, 샌드위치는 내 거 사는 김에 네 것도 산 것뿐이야. 너 아니라 그 자리에 누가 앉아 있어도 똑같아.”

가당찮다는 듯, 조금 기막혀하는 듯도 했다. 이 정도 배려조차 받지 못하고 지냈던 거라면 내 삶을 돌아보라는 뼈아픈 충고도 곁들였다. 무안은 당했지만 내게는 잘된 일이었다. 피아 구분이 명확한 정해준이었다. 헷갈리는 일은 없을 거라고, 흔들리는 건 나 하나로 족했으므로.

“……잘 먹을게.”

커피를 먼저 한 모금 마시고 포장을 풀자 다시 전방을 주시하기 시작한 정해준이 안심시켰다.

“자녀 돌봄 센터 곧 운영할 거야. 그럼 눈치 보면서 퇴근하는 일도 없을 거고.”

본사처럼 직원 복지 시설을 크게 확대할 생각이라는 말에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샌드위치 포장을 벗겼다. 한입 베어 물고 오물거리자 신선한 채소로 속을 채운 샌드위치가 부담 없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하나를 거의 다 먹어 갈 때쯤 정해준이 자연스럽게 물었다.

“집안이랑은 완전히 연 끊은 거야?”

처음부터 묻지 않았던 건 체하지 말라는 배려였나. 마지막 조각을 꿀꺽 삼키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뭐라고 핑계를 대야 자연스러울지, 잠시 머리를 굴렸다. 의외로 어렵지 않았다. 지난날 내가 뿌려놓은 말들을 토대로 정해준이 답을 조합해 냈으니까.

“쫓겨난 것 같은데, 맞아?”

“……어.”

“많이 엄하다더니.”

으레 그럴 만하다고 여기면서도 본인의 상식으론 납득하기 어려운지 정해준은 혀를 찼다. 거북한 이야기는 알맞은 타이밍에 어린이집 앞에 도착한 덕분에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고마워.”

서둘러 내리며 인사했다. 정해준의 말이 맞았다. 평소처럼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했다면 한참 늦고 말았을 테니.

기다리고 있었는지 입구를 향해 목을 쭉 빼고 있던 승아가 냉큼 달려들어 다리를 끌어안았다.

“엄마!”

“재미있었어?”

머리를 쓰다듬자 선생님이 할 말이 있다는 듯 다가왔다. 요즈음 들어 아이가 자주 처져 있다고. 좋아하는 동화책을 읽어줘도 멍하니 정신을 팔 때가 잦아졌다고. 어리광이 많이 늘었지만 충분히 보듬어 주시라고.

“아무래도 아파서 그런 것 같아요. 아이들이 피부에 난 게 뭐냐고 궁금해하기도 하고 놀리기도 하거든요.”

조심스러운 귀띔에 속이 상했다. 호기심 많은 아이들이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건 알지만……. 선생님께 그래도 다른 아이들이 너무 승아의 피부에 집중하지 않게 좀 더 주의를 기울여 달라고 얘기하려다가 이미 충분히 신경 써 주고 있는 마당에 실례일까 싶어 그만두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큰 병원 예약해 두었어요.”

그리 길지 않은 대화였는데 몇 마디 더 주고받고 나서 승아를 데리고 나오니 바깥은 어느새 어둑어둑했다. 조막만 한 손을 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 시선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니 아직도 정해준의 차가 그 자리에 주차되어 있었다.

“엄마, 뭐 해?”

선탠이 짙어서 잘 보이지 않는 내부를 눈에 힘주어 바라보다 어서 가자고 팔을 당기는 승아의 재촉에 그냥 돌아섰다.

설마 기다린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하지만, 그럼 부르지 않고 왜? 이것저것 가정해 보다 승아가 저녁밥을 다 먹어 치울 무렵에야 근처에 다른 볼일이 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어 홀로 얼굴이 홧홧해졌다.

“엄마, 아파?”

눈에 띄게 붉어진 낯빛에 승아가 내 이마를 짚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니야. 힘없이 고개를 저으며 자책했다.

진짜 어리석다,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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