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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과-53화 (53/77)

53화

찝찝했다니 어떤 점이. 내 존재가 유쾌하지 않으리란 건 알지만, 뒤끝이 개운하지 않을 정도였다는 말에 지난 차 안에서의 충동적이었던 오럴 섹스를 떠올렸다. 그리고 또 이렇게 일하다 말고 불려와 정해준의 양 무릎 사이에 자리한 내 모습을.

“너답지 않아서, 이건 또 무슨 꿍꿍이인가 혼자 고민했거든. 속 모를 사람이잖아, 너.”

약간의 비난 다음에 바로 긍정이 이어졌다.

“그런데 목적이 돈이라면 뭐.”

명쾌하게 결론 내린 정해준이 우리 사이를 정의 내렸다. 필요로 잠시 엮인 가벼운 관계. 그 정도쯤, 기꺼이 함께 놀아날 수 있다고.

“……그래.”

정해준의 말이 맞았다. 어쩌면 이게 서로에게 좋은 거라고. 나도 이제 주제를 안다. 진창에 처박힌 공주를 구해 헌신하는 왕자는 동화 속에서나 존재한다는 것을.

아니, 애초에 공주는 진창에 처박힐 일도 없다는 것을.

“고마워.”

마침내 무릎 주변에 떨어져 있던 돈을 수습해 모아 쥐고 고분고분 말하자 정해준이 고저 없는 음성으로 냉랭하게 비꼬았다. 약간의 경멸이 묻어나는 말투도 함께였다.

“도도한 공주님께서 어쩌다 몸 파는 신세가 되셨나.”

여기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일어서서 마주친 정해준의 눈에 깃든 일말의 동정에는 끝내 평정을 잃었다. 손에 쥔 지폐의 두께를 가늠하듯 엄지로 모서리를 긁으며 답지 않게 자조했다. 입가에 서글픔이 비스듬히 걸렸다.

“공주님 몸값치곤 너무 싼 것 아니야?”

애초에 공주님도 아니지만.

일견 정해준의 눈빛이 사납게 돌변했다. 분노가 끓는 눈에 집어삼켜질 것만 같아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우스꽝스럽고 볼썽사나웠다.

“가, 가 볼게.”

정신없이 화장실로 걸음을 옮기는 동안, 정해준이 이것저것 지시하던 게 떠올랐다. 좀 더 목구멍 깊숙이 빨아 보라거나, 아이스크림처럼 끄트머리만 핥아 보라거나. 섹스할 때 곧잘 체위를 바꾸던 것처럼 여러 시도를 해 보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처음부터 대가를 지불할 작정으로 서비스를 요구한 거였다.

“우욱!”

깨달음과 동시에 토기가 올라왔다. 황급히 변기를 부여잡고 속엣것을 게워 냈다. 마침내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때까지.

기진하여 입가를 닦고 나서도 배 속 저 아래에 엉킨 정액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언제까지고 기생하여 안을 갉아먹을 듯이.

처지를 비관하는 건 질렸다. 그저 처한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다. 토사물의 시큼한 냄새가 감도는 화장실 칸 안에 오도카니 앉아 있다가 겨우 입을 헹구고 시궁창에 푹 절여진 쥐새끼 꼴로 자리에 돌아와 대강 책상을 정리했다.

다른 팀원들은 대부분 퇴근해서 연구실이 텅 비어 있었다. 몇몇 자리에 아직 겉옷이 걸쳐져 있는 게 보였지만, 그런 경우는 실험실에 틀어박혀 밤을 새운다고 봐도 무방했다. 어쨌거나 아무도 마주칠 일이 없다는 점에서는 다행이었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꼭 달아나듯 문을 나섰다가 누군가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흉한 꼴을 들키나 싶어 당황했다가 상대가 정해준임을 알고 침음했다. 하필 또…….

“왜, 내가 역겨워?”

구역질 소리가 컸을까. 그렇다 한들 어떻게 들었을까. 설마 쫓아온 건 아닐 테고. 아니, 그건가? 하지만 왜?

이해 못 할 눈으로 직시하다가 먼저 시선을 돌린 건 나였다. 정해준의 눈이 활활 타고 있었다. 분노를 이해하면서도 한편 서글펐다.

역겨운 건 네가 아니라 난데.

“그런 게 아니라…….”

팔뚝이 잡혔다. 강한 힘으로 끌려갔다. 누가 볼세라 걱정하는 건 나뿐인 듯, 복도를 살피느라 정신이 팔려 있다가 거칠게 이사실 안에 밀어 넣어졌다. 정해준이 등 뒤로 손을 돌려 달칵, 문 잠그는 소리가 선명했다.

“뭐 해. 벗어.”

언제가 되든 정해준과 살을 섞으리란 건 예감하고 있었다. 이렇게 이를 줄은 몰랐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기도 했고.

“몸값 제대로 쳐 줄 테니까, 돈값 해.”

상의를 거칠게 벗어젖히며 정해준이 잔혹하게 뇌까렸다. 더 비참한 건 어느 쪽일까. 정해준에게 돈값만큼 흔들리는 시간과 모욕적인 언사에도 팽팽하게 당겨진 셔츠 앞을 보고 마른침을 삼키는 나 자신, 둘 중에.

무의미한 비교였다. 어느 쪽이나 바닥인 건 마찬가지였으므로.

정말 바보 같다. 아니면 미친 건가. 스스로에게 비웃음을 날리며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긴장한 것치곤 손가락이 매끄럽게 움직였다. 하얗게 드러난 앙가슴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정해준이 서서히 시선을 들었다.

눈길이 지난 자리마다 진득한 열기가 묻어났다. 마침내 마주친 두 눈, 끝내 욕구를 관철시키고야 말겠다는 눈빛에 먼저 고개를 돌린 건 나였다.

우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내 기억은 지금도 풋풋했던 과거의 시간 속을 배회하는데.

문득 헛웃음이 흘렀다. 막 세 번째 단추가 세로로 난 단춧구멍에서 풀려났을 때였다. 단추 하나는 지성, 둘은 야성, 셋은…….

“실성했네.”

정해준이 농담할 때는 재밌었는데, 내 입으로 뱉고 나니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더군다나 이런 상황에.

무심코 흘려 버린 실없는 농담에 정해준의 안면이 딱딱하게 굳었다. 더 기다리지 않고 성큼 다가온 정해준이 곧장 아래로 파고들었다.

“앗, 아직, 아…….”

이미 축축하게 젖은 비부를 확인한 정해준이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흘렸다.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며 어물어물 핑계를 찾았다.

“아까,”

안 하느니만 못한 변명에 도로 입을 다물었다. 내가 자신의 성기를 애무하며 사정으로 이끌 동안 정해준은 내게 손끝 한 번 댄 적 없으니. 한마디로 혼자 발정한 것과 다름없었다. 그것도 정해준의 다리 사이에 매달려서. 그게 정해준의 흥미를 자극한 듯했다.

“계속 이랬어? 내 거 빨 때마다?”

“읏, 응!”

대답할 틈이 없었다. 홀로 달아올라선 미련을 떨며 빈 안쪽을 움켜 대던 내벽이 길게 진입한 손가락에 잘게 떨어 댔다. 열렬한 반응에 손가락 끝을 굽힌 정해준이 내가 느끼는 지점을 정확히 찔렀다. 명료한 도발에 허리가 움찔 튀며 눈앞이 하얗게 번졌다.

“아아!”

“여기.”

쫀쫀하게 조여드는 속살을 연신 능란하게 문질러 대며 정해준이 중얼거렸다.

“깊이 숨어 있는 편이라 다른 놈들 거론 만족 못 했을 텐데.”

“하으……!”

오랜만에 이물을 받아들인 압박감이 너무 자극적이었다. 파르르 떨며 손가락 두 개를 구멍에 꽂은 채 나머지론 음부 전체를 받치고 있는 손바닥에 점도 낮은 말간 액을 질펀하게 쏟아 냈다.

“아, 안 돼…….”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정신이 멍해졌다. 손을 꺼낸 정해준이 흠뻑 젖어 번들거리는 모양을 확인했다.

“물 많은 건 여전하네.”

충분히 준비된 걸 확인한 정해준이 서랍에서 콘돔을 꺼내 들었다. 막 포장을 찢기 전에 작게 속삭였다.

“안 껴도 돼. 그, 그냥 해도…….”

“…….”

동작을 멈추고 빤히 바라보는 정해준의 눈초리에 낯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피임약 먹고 있어. 아이 수영장 때문에.”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대비한 건 아니었다. 어린이집에서 워터 파크 소풍을 계획하고 있었다. 워낙 안전사고가 잦으니 걱정스러운 마음에 도우미를 자원했는데, 혹 생리 주기랑 겹칠까 봐 피임약을 먹고 있었다.

납득할 만한 이유라고 생각했는데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보다. 제주에서 콘돔 없이 해도 된다고 정해준에게 속삭였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또한 나뿐인 듯했다. 잠깐 정신이 어떻게 됐던 거 아닐까. 자책할 정도로 정해준의 반응은 냉담했다.

“아.”

작게 고개를 끄덕인 정해준이 다시 콘돔 포장을 지익, 찢었다. 곧추선 성기에 그것을 끼우는 손짓이 태연하다.

“널 뭘 믿고.”

“…….”

“임신이라도 하면 어떡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데. 네 눈에 비치는 나는 그런 여자구나. 몸을 빌미 삼아 돈을 뜯어내고, 임신을 무기 삼아 협박하고. 입술을 깨물며 힘없이 동의했다.

“안전하면 좋지.”

대꾸하지 않고, 정해준이 내 다리 사이에 자리 잡았다. 한 손으로 골반을 잡고 기둥을 쥔 다른 손으론 밑구멍을 찾아 무심한 표정으로 삽입했다.

“하흐으, 읏!”

장대한 기둥이 무자비하게 파고들었다. 끊임없이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진입에 길게 앓으면서 습관적으로 그의 목을 그러안았다.

입술을 맞추고 싶었다. 첫 삽입 때 달래듯 숨을 불어 넣어 주고 부드럽게 혀를 빨아 주었던 기억이, 관계 내내 어디고 들러붙어 있던 입술 안쪽 점막의 젖은 감촉이 여전히 살갗에 남아 있었다.

그때처럼 키스하고 싶었다. 혼을 나누듯 숨을 나누면 예전, 과방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을 두고 아무 데서나 접 붙는 게 흘레붙는 개새끼랑 뭐가 다르냐고 힐난하던 정해준의 사무실에서 기꺼이 다리를 벌리고 있는 비참함이 조금은 달래질 것도 같았다.

그러나 막 숨결이 느껴지도록 입술이 가까워지자 정해준이 고개를 슬쩍 젖혀 피해 버렸다. 마치 박고 흔들다 싸는 것만이 목적이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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