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너 지금 회사로 전화한 거야? 겨우 그거 따지려고?”
-네가 안 받잖아! 그리고 겨우 아니거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난번 통화 이후로 이소원의 번호를 차단해 두었던 게 기억났다. 시도 때도 없이 화풀이성 전화를 걸어 오는 걸 막기 위함이었는데 이소원에게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간과했다.
“잠깐만 기다려. 내가 전화할 테니까.”
-싫은데? 나도 너 차단했어. 그러니까 지금 바로 용건만 말해. 안 그럼 계속 전화 걸 테니까.
이소원의 목소리가 워낙 까랑까랑해서 내 목소리보다 더 크게 연구실에 울렸다. 다들 모른 척, 안 들리는 척하고 있지만 잔뜩 귀를 기울이고 있을 게 뻔했다. 한숨이 나오는 상황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최대한 조용히 목소리를 낮추고 이소원의 말대로 용건만 간단히 전달했다.
“승아가 아파. 그래서,”
-허!
이소원의 한탄이 천둥처럼 왕왕 울렸다. 욕지기가 올라오려는 걸 꾹 참고 다시 상황을 설명하려는 찰나.
-너 치료비 뜯어내려고 그러는구나? 야, 됐어. 양육비도 일시로 다 받아 갔으면서……. 꿈도 꾸지 마! 양심도 없니? 진짜 어이가 없어서! 끊어!
예고도 없이 뚝 끊어진 전화에 맥이 쑥 빠졌다. 고해나가 작게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와, 엉거주춤 일어나 조심스레 사과했다.
“죄송, 합니다.”
앞으론 이런 일 없게 하겠다는 약속은 차마 하지 못했다. 다만 차단해 두었던 이소원의 번호를 수신 가능하도록 설정을 바꾸어 놓았다.
엉망인 기분으로 오전을 보냈다. 이소원이 전화해 난리 칠 동안 실험실에 있었던 손아름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행복하기만 한 모양이었다. 처음으로 정해준이 자신을 알아보고 먼저 눈인사를 건넸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조금 거북스러운 주제긴 하지만, 차라리 잘됐다 싶기도 했다. 손아름이 어쭙잖은 위로라도 하려고 했다면 표정 관리를 못 해 그녀와의 관계마저 서먹서먹해졌을 테니.
이소원의 전화 이후, 오며 가며 어쩌다 마주친 팀원들마다 눈에 띄게 어색한 태도를 보였던 걸 떠올리자 입맛이 뚝 떨어졌다. 동정과 경멸의 사이에 어중간하게 자리 잡은 눈빛들.
파렴치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려나. 대책 없이 낳은 애로 양육비나 뜯어내고 그것도 모자라서 치료비 명목으로 또 돈을 요구하려 한다고.
일일이 나서서 해명할 생각은 없었다. 뭐라 해도 뻔뻔스러운 변명이라 생각할 텐데 그게 무슨 의미인가 싶었다. 그냥, 모른 척해 주면 그것만으로도 다행인 거지.
“해원 씨, 어디 안 좋아요?”
“네?”
“양이 줄질 않아서요. 두부전골 좋아하잖아요.”
“아, 그냥……. 오늘은 입맛이 좀…….”
그러는 손아름도 양이 줄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정해준과 마주쳤던 순간에 몰입한 나머지 수저 뜰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갑자기 조명이 켜진 것처럼 주변이 환해졌다, 지나고 나서야 그게 후광인 걸 알았다, 대화를 나누진 않았지만 분명 호감이 느껴졌다, 등등.
“이사님 향수 뭘까요? 되게 청량하던데. 너무 궁금해요.”
실버 포레스트였나. 손아름의 설명대로 맑고 시원한 향이라면 그게 맞았다.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아 부러 허공에 뿌리고 코를 킁킁대면 정해준의 웃음이 훨씬 시원하게 터지곤 했던 향. 기울어진 육각뿔 모양의 향수병이 그린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라, 하마터면 손아름에게 향수 이름을 말해 줄 뻔했다.
“이사님 보면 되게 감각 있는 것 같아요. 명품으로 아무리 휘감아도 안 어울리는 사람은 촌스럽잖아요. 그런데 이사님은 딱 명품이 인간화된 것 같달까? 하긴, 사람 자체가 명품이긴 하죠.”
사랑에 푹 빠진 모습으로, 손아름은 식사하는 내내 정해준을 찬양하기 바빴다. 정해준이 소유한 차나 시계, 살고 있는 아파트까지 낱낱이 알고 있는 게 신기했다. 사람들은 어디서 잘도 그런 정보를 캐 오는 걸까. 차나 시계는 눈에 보이니 어쩔 수 없다 해도 주소지까지 알고 있는 건 역시 이상하다.
어쩔 수 없이 손아름의 열띤 얼굴 위로 이소원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이소원이 내게 정해준 얘기를 떠들어 댔을 때처럼 대강 대꾸하며 머릿속에도 지우개가 있었으면, 간절히 바랐다. 정해준에 대한 정보는 사소한 거라도 더 이상 늘리고 싶지 않았다. 홀로 안고 있는 과거의 기억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우니까.
“정말 어떤 여자가 채갈까요? 이사님이요. 완벽한 신랑감이잖아요.”
“그러게요.”
“아, 나라는 오점을 남겨 주고 싶다.”
순간,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인내심이 바닥났다. 손아름의 끝없는 수다에 대강 대꾸해 주는 것도 고역으로 느껴져 수저를 내려놓고 낯을 굳혔다. 굳이 이렇게 해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자제력을 발휘하기 전에 말이 튀어 나가고 말았다.
“저, 아름 씨, 좋아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이제 이사님 얘기는 그만 듣고 싶어요.”
“네? 아, 미안해요. 너무 내 얘기만 했죠?”
“아름 씨 얘기 듣는 거 좋아해요. 그런데 이사님은, ……제가 별로 관심이 없어서요.”
“어…….”
너무 직설적으로 말했나. 역시 괜히 말했다. 업무 시간도 아니고 둘이 밥 먹는 자리에서 무슨 얘기든 나올 수 있는 건데. 사과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순간 엉거주춤 일어난 손아름이 누군가를 향해 떨떠름하게 인사했다. 그러니까 내 뒤쪽 계산대에 서 있는 사람에게.
“이사님, 안녕하세요. 식사하셨어요?”
이사님, 그 세 글자를 듣자마자 사고가 정지해 버렸다. 일개 사원인 이상 상사가 바로 뒤에 있다는 걸 인지했으면 인사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머릿속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만 반복해서 떠올랐다.
들었을까? 들었겠지. 들었을 거야. 못 들었을 리 없어. 거리가 가까운 만큼 분명…….
“네, 신경 쓰지 말고 편히 식사하세요.”
얼어붙어 있는 사이 예사로운 어조로 대꾸한 정해준이 대꾸를 마치고 식당을 나섰다. 그가 완전히 시야에서 벗어난 걸 확인한 손아름이 울상을 지었다.
“어떡해요. 다 들렸겠죠? 짝사랑하는 거 다 들켰네요. 아, 쪽팔려.”
짝사랑은 차라리 낫지 않나. 대놓고 정해준에 관한 건 듣기 싫다고 잘라낸 것보다는. 부끄러움과 당황스러움으로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르는 손아름을 보면 정해준이 우리 얘기를 들은 건 확실해 보였다. 팔다리에 기운이 쭉 빠지는 것 같으면서도 위로를 건넸다.
“……괜찮을 거예요.”
“진짜요?”
뭐라도 붙잡고 싶은 얼굴로 손아름이 재차 물었다.
“완전 가까웠는데 안 들렸을까요?”
“들었어도 마지막만 들었을 거예요. 제가 관심 없다고 한 것 말이에요……. 계산하는 데 얼마 안 걸리잖아요.”
“그런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안심했는지 손아름의 혈색이 금세 돌아왔다. 내 걱정까지 할 정도로 여유도 되찾고.
“어떡해요. 해원 씨 미운털 박히면.”
“전 괜찮아요. 다 먹었으면 올라가요.”
어차피 더 미운털 박힐 구석도 없지 않나. 설령 한두 개 더 박힌다고 무어 달라질 게 있다고. 쓰게 웃으며 자리를 정리했다.
***
“혀를 더 써 봐. 이 세우지 말고.”
혹시 예민한 표피가 긁힐까 싶어 혀를 최대한 내밀어 성기를 쓸어 올렸다. 동시에 정해준의 말대로 입술을 더욱 동그랗게 모았다. 입술을 모으자 내내 벌어져 있던 턱에 압박이 가해져 뻐근한 통증이 심해졌지만, 나른해진 정해준의 신음에 꾹 참고 부단히 고개를 움직였다.
“나한테 관심 없다면서 좆은 잘 빠네.”
직설적인 표현에 놀라 움찔 떨었으나 이마저 정해준을 자극한 듯했다. 정액이 바로 목구멍으로 쏘아졌다. 입 안 가득한 뭉클한 덩어리를 따로 뱉을 데가 없어서 그냥 삼키고 마는 모양을 정해준이 뚫어지게 응시했다. 꼭 감시하는 것처럼.
“왜……?”
멍하니 묻다가 입 안에서 거미줄처럼 가느다란 정액 줄을 치는 감각에 얼른 입술을 꽉 다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 욕구를 채운 정해준은 바로 눈앞에서 유유히 지퍼를 올렸다. 나 같은 여자 앞에선 조심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낀 건 정해준이 지갑을 꺼내 지폐 서너 장을 떨어트렸을 때였다. 무릎에 떨어진 지폐 특유의 감촉에 화들짝 놀라 부정했다.
“아니야, 이런 거…….”
대가를 바라지 않은 행위였다. 돈이 탐나서가 아니라, 육욕뿐인 만남이라도 정해준과 같이 있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동시에 아까부터 묘하게 불편했던 감정의 정체를 꼬집을 수 있었다. 마치 창녀를 취급하듯 함부로 대하는 행동 때문이라는 것을.
우린 정말로 달라졌구나.
다시금 사무치게 체감하며 돈을 주울 생각도 않고 얼빠진 채 앉아 있는 내 앞에서 정해준이 도로 지갑을 열었다.
“부족해? 내가 시세를 잘 몰라서. 더 필요하면 말하고.”
“그런…….”
“뺄 거 없어. 애 아프다며.”
“…….”
벌써 들었구나. 듣는 귀가 많았으니 전해 줄 입도 많았을 거다.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알아도 풀 수 없는 오해라서 눈앞이 캄캄했다.
내가 얼어 있는 동안 매무새를 정리한 정해준이 여전히 자신의 성기를 빨던 자세 그대로 무릎을 굽혀 앉은 나를 찬찬히 훑었다.
“차라리 이편이 깔끔하고 좋은 것 같다. 솔직히 좀 찝찝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