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갈피를 잡을 수 없어서 고개만 갸웃거리다가 이런 것까지 고민하나 싶어 힘없이 웃었다. 실실 웃고만 있는 걸 싸늘한 눈초리로 노려보던 정해준이 휴대전화를 주워 들고 냉랭하게 말했다.
“설마 문이라도 열어 주길 기다리는 건가.”
“아니야…….”
바란 적 없는데, 그런 마음은 정말 손톱만큼도 없었는데. 오해하는 게 서글퍼서, 정말 마지못해 쫓아 나왔다는 티가 역력해서, 그럴 필요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혼자 갈 수 있어.”
제법 단호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운전석으로 돌아간 정해준 덕에 혼자 허공에 대고 떠들고 있었다.
그냥 걸음을 돌리면 되지 않을까. 발끝을 차로와 반대 방향으로 돌리다가 이상하게 손이 허전하다는 걸 깨달았다. 휴대전화를 주워 든 정해준이 그걸 내게 돌려주지 않았다는 걸 상기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저녁이라 한산한 도로였지만, 한 차로를 떡하니 막고 있는 정해준의 차를 향한 경적 소리도 갈수록 요란해졌다. 마지막은 숫제 뒤에 바짝 붙어 신경질적으로 연속해 경적을 울려 댔다. 쫓기듯 차에 올라타 겨우 한마디 뱉었다.
“……고마워.”
아무 대꾸도 않은 채 정해준이 가속페달을 밟았다. 정해준의 옆자리는 오랜만이었다. 운전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잔잔한 음악 때문에 경계가 조금 풀어졌는지도 모르겠다. 변속기에 가볍게 올려둔 손을 훔쳐보다가 문득 운전에 집중하는 옆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어차피 운전하느라 모를 테지. 그러니 잠깐만, 아주 잠깐만.
염치없는 욕망은 쉽게 양심을 꺾었다. 희미한 가책을 느끼며 흘긋 끌어올린 시선의 끝엔 정해준의 남성적인 목울대가 놓였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한량없는 욕심으로 눈꺼풀이 한껏 벌어졌다. 동시에 눈이 동그래진 건, 꼭 정해준이 정면을 주시하지 않아서만은 아닐 거다.
정해준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대놓고, 뜯어 보듯이. 쳐다본 건 피차 마찬가지인데 못된 짓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심장이 뛰었다. 잠깐 신호에 걸린 사이 내게 향했던 정해준의 눈길이 다시 앞을 향했다. 어딘지 날카롭게 느껴지는 질문과 함께.
“진심이야? 아니잖아.”
“뭐……가?”
본심을 들킨 걸까. 눈은 마음을 비추는 창이랬다고, 아직 너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속내를 읽어 내고만 걸까. 선뜻 답하지 못하고 초조함에 손만 쥐락펴락하는 사이 얕은 한숨과 함께 정해준이 덧붙였다.
“팀장이 소개하는 사람 만나겠다는 거.”
“아…….”
뭘 기대했던 걸까. 기운이 쭉 빠졌다. 어쩐지 입이 마르는 듯해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빨다가 정해준의 헛웃음에 바로 멈추었다. 조금 전까지 잇새에 물려 있다 풀려난 입술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정해준이 못 박았다.
“무슨 수작이실까. 유혹하는 거라면 그만둬.”
무심코 젖은 입술을 엄지로 문지르다 이마저도 오해할까 싶어 황급히 그만두었다. 내가 하는 건 아주 사소한 행동이라도 수작으로 보이는구나. 간교하고 얕은꾀, 헛짓거리, 개수작.
긴장해서 그랬다고, 변명하는 것도 볼품없게만 느껴져 그만두었다. 자꾸 가시 돋친 소리만 하는 정해준의 속도 편치는 않겠지 싶어 농담이라고 겨우 이딴 말이나 던지면서.
“유혹하면, 넘어와?”
네가 뭐가 모자라서. 또 내가 뭐라고. 스스로가 같잖아서 자조적인 웃음이 흘렀다.
발작적인 웃음과 함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수습하며 옆을 돌아보는데 정해준의 낯은 미동도 없이 굳어 있었다. 불쾌한 제안을 받고서 몹시도 기분 상한 사람처럼.
완고하게 일자로 다물린 정해준의 입술에서 어처구니없는 헛웃음이 터져 나온 건 몇 초 뒤였다.
“어떨 것 같은데?”
얼핏 듣기에 도발하는 것 같지만 본질은 냉소를 머금은 비꼼이었다. 냉기 흐르는 겉과 달리 속으론 불같은 화를 꾹 누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해 봐, 한 번.”
어떻게 나오나 두고 보자는 심사는 아닌 게 확실했다. 오히려 어림없을 거란 선전포고와 다름없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떤 재주를 부려도. 그래서 기꺼이 광대가 되었다.
“나랑 잘……래.”
유치한 짓거리, 미친 소리.
“나랑, 잘래……?”
차마 대놓고 묻지 못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 말꼬리를 내려 버린 네 음절이 꽉 막힌 승용차 내부를 부유했다. 운전대를 손가락 끝으로 톡톡 두드리는 정해준의 반응에 별안간 질식할 것처럼 숨이 막혔다. 내가 뱉은 몇 마디 말이 올가미가 되어 숨통을 꽉 옭아매었다.
뒤늦게 후회하며 그냥 해 본 소리였다고, 잊어 달라는 뻔하고 속 보이는 부탁을 위해 말을 골랐다. 필요하다면 용서도 구할 요량으로 막 입을 열려는데 차가 갑자기 급정거했다.
지면을 찢는 듯한 마찰음과 함께 정차한 차 안, 아슬아슬한 긴장감으로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한 채 멍하니 정해준만 바라봤다.
가로등 바로 아래, 훤히 빛을 받고 있는 나와 달리 정해준의 얼굴은 그늘이 져 어둡기만 했다. 흡사 검은 가면을 쓴 것 같은 가운데 정해준의 안광만이 기묘하게 형형했다.
팽팽한 대치 속, 지나가던 차가 경적을 울리자 정해준이 보란 듯 비상등을 켜며 비릿하게 웃었다.
“나쁘지 않은데.”
똑딱똑딱, 반복적으로 울리는 비상등 깜빡이에 맞춰 심장 박동 소리도 점점 커져만 갔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애써 사수하려던 선을 끝내 넘을 것만 같은 예감.
“솔직히 좀 당기긴 하거든. 우리 속궁합 잘 맞았잖아.”
“해준아…….”
나도 모르게 옛날처럼 정해준을 부르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미련한 짓을 저지르기 전에. 그런데 나의 부름이 정해준에게는 일종의 트리거 역할을 한 듯했다. 저 밑바닥에 억누르고 있던 음습하고 흉포한 속내를 끌어내는.
“그런데 역시 내키진 않네. 어떤 놈이 들락거렸을지 모를 구멍을 내가 왜. 성병이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경멸 어린 언사가 가감 없이 쏟아졌다. 눈앞이 아득해진 채 정해준의 혀끝이 쏘아 낸 비수를 버텨 냈다.
“솔직히 네 실수가 한 번이었는지, 두 번이었는지, 아니면 셀 수 없을 정도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 확인할 방법도 없고.”
가차 없는 비웃음이 모질게 쏟아져 정해준이 화를 내고 있음을 알았다.
우리가 연인이었을 때 정해준은 내게 화를 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헤어지는 순간에도 처절하기만 했다. 그래서 정해준의 화를 풀어 주는 법을 몰랐다. 어쩔 줄 몰라 하며 미안해, 만 반복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앵무새처럼 무력하게 미안해만 중얼거리는 꼴을 지켜보던 정해준이 진심으로 궁금해했다.
“뭐가 미안한데?”
정해준이 보기엔 앞뒤가 맞지 않는 사과일 테다. 자자고 했다가, 미안하다고 했다가. 매서운 제 반응에 발뺌처럼 느껴지기도 하겠지. 맹세코 그런 얄팍한 속셈은 아니었다.
“그냥 다…… 미안.”
이건 뒤늦은 속죄다. 당시에 하지 못한 사과를 이제야 전한다. 일부러 야멸차게 구느라 속으로만 삼켰던 무수한 미안해가 적지 않은 시간 딱딱하게 응어리져 더듬더듬 쏟아질 때마다 목구멍을 할퀴었다.
이제 와 미안하다고 해서 용서를 구할 염치는 없었다. 그때도 지금도 몹쓸 짓을 저지르는 나를, 차라리 마음껏 미워하기를.
“해원아.”
문득 다정한 부름이 들려왔을 땐 눈물이 어룽져 시야가 온통 흐릿했다. 주르륵, 눈물 한줄기 떨어트리고 나서 잠깐 명료해진 시야에 들어온 정해준은 아름답게 웃고 있으나 도리어 오싹했다.
“이해원.”
굳어 있는 내게 손을 뻗은 정해준이 엄지손가락으로 내 볼을 힘주어 눌렀다. 긴장으로 맞물려 있던 위턱과 아래턱이 악력으로 인해 뻐근한 통증과 함께 벌어졌다. 자연스레 열린 입술로 가운뎃손가락이 쑤욱 파고들어 혀를 눌렀다.
“여기면 나도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
“괜찮겠어?”
물음이 아니라 강요였다. 내 의중은 상관없다는 듯 이미 혀의 앞뒤를 느릿느릿 문지르고 있는 중지의 움직임이 그랬다. 어느새 검지까지 겹쳐진 입 안이 버겁다. 몇 번 억지로 침을 삼켰지만 역부족이었다. 어쩔 수 없이 수습하지 못한 타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꼴을 보고 손가락을 뺀 정해준이 번들거리는 내 입술을 내려다보며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충분히 젖은 것 같은데.”
정말, 삽입을 위한 구멍처럼 여기는 투였다. 동시에 타액으로 젖은 손이 뒤통수를 휘어잡았다. 절로 상체가 운전석 쪽으로 숙여졌다. 두툼하게 부푼 앞섶의 음영이 확연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비현실적이라 석상처럼 굳어 있는 내 위로 짜증 섞인 한숨이 떨어졌다.
“먼저 하자고 한 건 너야.”
전처럼 일일이 리드 할 마음은 없다고 못 박은 정해준이 성가셔하며 내 손을 쥐고 자신의 허리춤에 올려놓았다. 그것만으로도 큰 관용을 베풀었다는 듯이. 손등을 누르는 손길에서 성마른 압박감을 느끼며 파스너를 내렸으나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은 좀처럼 속옷에 닿지 못했다.
‘이건, 이건 아닌 것 같아.’
지금이라도 늦은 건 아닐지 몰라. 설령 늦었더라도 여기서 멈춰야…….
뒤늦게 상체를 젖히려 했으나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목덜미에 살짝 얹혀 있는 줄만 알았던 정해준의 손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내 고개를 누른 채 정해준이 다른 손 엄지로 속옷을 걸어 비죽 내리자 기다렸다는 듯 거근이 툭 튀어나와 인중을 짓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