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몇 살인데요?”
“어, 마흔한 살.”
“에이.”
참전하지 않고 조용히 관망하던 손아름이 손에 쥔 포크를 잘게 흔들었다.
“너무 많다. 띠동갑도 많은데 그것보다 더 나가면 어떡해요.”
“마흔하나면 한창이지.”
무안했던지 팀장이 발끈했다. 손아름도 지지 않고 따박따박 받아쳤다.
“그래도요, 비슷한 나이가 좋죠. 조금 있으면 환갑인데?”
“뭐? 환갑은 좀 심했다.”
왁자한 웃음이 터졌다. 어디서 웃어야 할지, 이게 정말 웃기기는 한 건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어색하게 입꼬리를 당겼다. 내게는 불쾌한 제안이 사람들에게는 한낱 웃음거리일 수 있구나. 새삼 씁쓸해졌다.
더 비참해진 건 갑작스레 등장한 정해준의 존재 때문이었다.
“어유, 이사님 오셨네. 여기 앉으시죠.”
팀장이 냉큼 가운데 자리를 내주었다. 원래 이사가 팀 회식에도 일일이 참석하나? 낭패감에 보이지 않게 입 안쪽 살을 깨물었다.
“늦었습니다. 무슨 얘기 중이었습니까?”
“결혼 얘기 중이었어, 오빠.”
“밖이어도 팀 회식인 이상 호칭은 제대로 해 줬으면 좋겠는데.”
부드럽지만 단호한 정해준의 지적에 고해나가 입술을 비죽거렸다. 손아름이 내게만 입 모양으로 ‘나이스!’ 하며 테이블 밑으로 주먹을 살짝 당기는 게 보였다. 팀장이 나서서 정리했다.
“연구 1팀에 청춘 남녀가 많다 보니, 하하.”
“우리 회사에서 제일 미혼이 많은 팀으로 알고 있습니다.”
“덕분에 저까지 젊어지는 기분입니다. 집사람하고 연애할 때 기억도 새록새록 나고.”
“그렇습니까.”
호의적으로 대꾸하며 정해준이 막 제 몫으로 채워진 잔을 쥐었다. 건배 같은 걸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빈 맥주잔을 내려다보는데, 조용히 있던 김규환이 거친 숨을 토해 냈다.
“팀장님, 그러는 거 아닙니다.”
“규환 씨, 갑자기……, 아니, 취했어? 내가 뭘 어쨌다고?”
“해원 씨가 어때서 혹까지 딸린 늙은 남자를 소개한다 그러세요?”
“아니, 혹 달고 있는 건 해원 씨도 피차일반이지!”
정말 취했나?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두고 오가는 얘기에 마음이 심히 불편해졌다. 설전이 오가는 둘을 보며 손아름이 눈치껏 귓속말했다.
“전임님이요, 사람이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게 음침하더니, 사고 칠 줄 알았어요.”
그러면서 안쓰러운 눈초리로 손등을 토닥이는데, 그런 손아름의 손을 뿌리치고 싶을 만큼 기분이 엉망이었다. 팀장이 아무리 붙잡고 협박해도 2차까진 따라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지만 고해나는 오히려 지금의 소란이 반가운 모양이었다. 흥미 가득한 눈으로 팀장과 김규환을 번갈아 보더니 말리진 못할망정 활활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부었다.
“어머, 뭐야. 이제 보니 김 전임님이 이해원 씨 좋아하나 보네. 맞아요?”
“진짜? 그런 거야? 난 또, 갑자기 왜 그러나 했네.”
굳이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김규환의 얼굴은 취기로 인한 홍조로 보기엔 무리가 있었으니까. 얼마 전 복도에서 끈질기게 옆에 붙어 관심도 없는 질문들을 던지던 게 생각났다.
아무래도 이 자리는 내가 없어야 다른 화제로 넘어갈 것 같아, 잠시 볼일 보러 가는 척 일어섰다. 몇 걸음 지나지 않았는데 내가 시야에서 보이지 않자 팀장이 진지하게 태도를 바꿔 김규환을 타일렀다.
“근데, 생각 잘해야 한다. 총각이 애 딸린 여자랑……, 그거 부모 가슴에 대못 박는 거야. 세상에 그런 불효가 어디 있어.”
숨이 턱 막혀 그대로 벽에 기대섰다.
이런 얘기 들을 이유 없어. 설령 승아가 정말 내 아이라 해도. 머릿속에서 아우성이 일었지만 현실은 숨어서 떨리는 가슴이나 진정시키려 노력하는 게 전부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꼴로 남의 얘기나 엿들으면서.
“그냥 애 딸린 여자가 아니라 이해원 씨잖아요.”
이대로 집에 가 버릴까. 그럼 또 뒷말이 무성할까. 모처럼 참석해서 결국 분위기를 파투냈다고, 사교성 없는 낙오자라 딱지 붙일까.
괜히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김 여사님께 전화라도 오면 더없이 고마울 것 같았다. 누구라도 좋으니, 내 얘기를 들어 주지 않아도 좋으니 이 상황을 버틸 수 있게 곁에 있어 주었으면 했다.
거짓말처럼, 정말 신이 내 얘기를 들은 것처럼, 누군가 내가 숨어 있는 그림자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반가움도 잠시, 상대를 확인한 순간 방금 전까지 아무라도 다가와 주었으면 했던 마음이 싹 바뀌었다.
“절절하네.”
정해준이 김규환 쪽을 턱짓하며 비웃었다. 내가 없어진 자리여서, 더하여 다른 사람들의 은근한 부추김에 용기백배해진 김규환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팀장님, 저요, 태어나서 그렇게 생긴 사람, 처음 봤습니다. 천사인 줄 알았어요.”
정해준의 존재 때문에, 김규환의 열띤 찬양은 더할 나위 없는 조롱이 되고 말았다. 천사라니, 가당치 않은 평가였다. 더더군다나 눈앞의 정해준에겐.
나를 빤히 바라보는 정해준의 시선을 무시한 채, 막다른 길에 몰린 기분으로 황급히 자리로 돌아갔다. 고작 몇 걸음을 떼는 짧은 순간에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왜 항상 가장 비참한 순간을 네게 목격당하고 마는 걸까. 두서없는 의문은 자학으로 이어졌다. 언제나 최저라고 생각했던 지점 밑에 더한 바닥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궁금해진다. 옛 연인의 추락은 네게도 상처일까. 이따위 저급한 여자랑 한때나마 이어졌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긁힐까.
그렇다면 난 네게 미안할 일만 남았네.
자조하며 남은 잔을 비우자 손아름이 눈치껏 다시 술을 채워줬다.
팀장과 김규환은 여전히 토론 중이었다. 당사자의 의견은 조금도 고려되지 않은 채였다. 마치 총각이고 딸린 아이도 없는 김규환이 원하면 나는 감지덕지 받아들여야 한다는 듯이, 그러나 김규환의 늙은 부모를 생각해서라도 일이 그렇게 되도록 두어서는 안 된다는 듯이.
그래서 그랬다. 팀장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들려 주면서, 김규환도 깔끔히 단념하도록.
“팀장님 말씀이 옳아요.”
“어, 어?”
“제 처지가 처지라, 결혼 생각 없거든요. 누구 인생 망칠 것도 아니고……. 그래도 정 한 번만이라도 만나 보라고 하시면 나중에라도 그분 만나 볼게요. 만에 하나 그분하고 잘돼서 말씀처럼 승아한테도 자매 생기면 좋을 것 같네요.”
“아니, 나도 얘기는 꺼내 봐야 아는 거고…….”
당황한 팀장이 손사래를 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규환에게도 정중히 의사를 밝혔다.
“저를 좋게 봐 주신 점은 감사해요. 그런데 제가 누구를 만날 준비가 아직 안 됐어요. 죄송합니다.”
이상할 정도로 주위가 조용해졌다. 지금쯤이라면 옆구리를 한 번 찔렀을 만한 손아름조차도 눈알만 굴리고 있었다. 특히 팀장은 침통하기까지 한 표정이었다. 이걸 바란 게 아니었나? 예상한 것과 다른 반응이 재밌어서 실없이 웃음이 났다.
아, 나 취했나 봐.
소주, 맥주, 와인을 끊임없이 마셨으니 취한 게 당연한데, 취한 게 웃겨서 또 웃다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여긴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닌 것 같아. 하긴, 언제 내 자리가 온전히 있었느냐마는. 한때는 누군가의 곁을 내 자리라고 여기고 충만했던 적도 있지만, 정말 한때였을 뿐이다.
“아이가 기다려서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꾸벅 허리를 숙이고 나자 고해나가 작게 “와우!” 하고 탄성을 터트렸다. 탄식인지 감탄인지 모를 소리였으나 굳이 분별하여 의미를 곱씹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 내가 많이 취한 것 같으니 택시를 잡아 주겠다고 했지만 고개를 잘래잘래 저었다.
“괜찮습니다.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한 번쯤은 만류할 법도 한데 아무도 붙잡는 사람이 없어서, 그대로 밖으로 향했다.
이마에 닿는 서늘한 바람에 터질 것처럼 뜨거웠던 머리가 어느 정도 식는 듯도 했다. 술도 깰 겸, 잠시 정처 없이 보도를 따라 걸었다. 눈에 아른거리던 헤드라이트 불빛이 점점 또렷해졌다.
이만하면 취기가 가신 듯도 하다. 무슨 일이라도 칠 것 같던 흥분이 가시고 걸음마다 처지는 기분이 그랬다.
몇 시지. 시간을 확인하려다가 그만 휴대전화가 손에서 미끄러졌다. 퍽, 거친 마찰음을 내며 바닥에 떨어진 휴대전화가 반동으로 툭 튕겨 연석과 도로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쳤다.
휴대전화를 주우려고 허리를 굽힌 순간 경적이 요란하게 울렸다. 경적을 울린 차의 운전석에서 누군가 급하게 뛰어내려 비틀거리며 쪼그려 앉는 나를 낚아채듯 일으켜 세웠다.
“죽으려고 환장했어?”
“어…….”
또 정해준이다. 술자리에 남아 있는 줄 알았는데. 여기서 가까운가? 걸어온 거리를 가늠하느라 주위를 휘휘 둘러보다가 그보다 먼저 떠올랐어야 할 질문이 뒤늦게 떠올랐다. 정해준이 왜 여기 있지?
“왜…….”
“운전대 잡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서.”
“…….”
“타.”
성가시다는 듯 조수석을 고갯짓하는 정해준을 따르지 않고 멀거니 서 있었다. 다들 취해서, 운전할 사람이 너밖에 없었다고. 진짜 그 이유가 전부일까. 택시를 타고 되고, 아직 지하철도 버스도 다니는 시간인데. 굳이 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