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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과-48화 (48/77)

48화

감정을 자각한 후 의식적으로 이사실 앞을 피했다. 화장실은 다른 층으로 다녔고, 점심은 도시락, 카페테리아도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출입하지 않았다. 하지만 팀장이 대신 이사실에 전달해 달라며 맡긴 서류만큼은 피할 수 없었다.

“내가 지금 바로 외부 미팅이 있어서 힘들 것 같은데. 이해원 씨가 좀 대신해 줘요.”

“네.”

순순히 서류를 받아 들었지만, 정해준과 단둘이 한 공간에 있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속이 거북해졌다. 다른 팀원들도 많은데 하필 내게 주어지다니. 다른 일이라면 얼마든지 대신 하겠지만……. 불편한 속내가 얼굴에 드러났는지 팀장도 탐탁지 않은 표정을 했다.

“일부러 해원 씨 불렀어요. 이렇게라도 안 하면 통 둘이 얘기하기가 힘드네. 도시락은 일부러 싸 다니는 거예요? 돈 아끼려고?”

“그게, 사정이 있어서.”

“뭐, 됐고. 그런 의미에서 이해원 씨, 환영회 참석할 거지? 확답을 못 들었네.”

“아직, 아이를 맡아 줄 분을 구하지 못해서요.”

“고리타분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회식도 사회생활의 일부거든. 팀워크가 좋으면 능률도 그만큼 오르는 거고. 너무 그렇게 혼자만 따로 지내는 거, 보기 좋지 않아요.”

“죄송합니다…….”

“진짜 맡아 줄 사람 없으면 아이 데리고라도 와요. 그냥 회식도 아니고 환영회인데 주인공이 빠지면 안 되지.”

“네.”

“가 봐요. 아마 지금쯤 자리에 계실 거야. 점심도 없이 일하니까. 전달하고 나서 나한테 메모 하나만 남겨 주고.”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수고.”

시간을 확인한 팀장이 급히 연구실을 나섰다. 서류 모서리를 매만지다가 가만히 자리로 돌아왔다. 분위기상 피하기 어렵게 된 환영회가 태산처럼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고민 끝에 김 여사님의 도움을 받아보기로 했다. 이따금 반찬이나 승아가 좋아할 만한 장난감을 챙겨와 놀아 주시는 김 여사님이라면 승아도 무리 없이 나 없는 시간을 보낼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퇴근 후에 연락드려야지.’

결정한 후 심호흡했다. 점심시간은 아직 20여 분 정도가 남아 있었지만, 팀장의 말대로 정해준이 자리에 있다면 업무 재개를 기다릴 것 없이 빨리 해치워 버리고 싶었다. 설령 표정 관리가 힘든 일이 벌어진다 해도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원래도 조용한 편인 복도는 사람이 빠져 더욱 썰렁했다. 와중에 이사실의 유리문 안쪽에서 밝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어서 팀장의 말이 맞나 보다, 하고 짐작했다.

똑똑.

조심성이 묻어나는 손길로 가만히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점심도 없이 일한다는 팀장의 말과 달리 정해준은 의자에 상체를 길게 기댄 채 오수에 빠져 있었다.

자세가 반듯해서 언뜻 보면 그냥 눈을 감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잠들어 있는 게 맞았다. 잘 때도 흐트러짐 없는 게 신기해 몰래 깨어 한참 들여다본 적도 있으니까.

‘하나도 변한 게 없구나.’

그때처럼 정신없이 정해준을 뜯어 보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팀장이 맡긴 서류를 그냥 놓고 가야 할지, 메모라도 남겨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망설이다가 그냥 팀장에게 사정을 얘기하거나 좀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오기로 마음먹었다.

걸음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용히 한 발을 물렸을 때였다. 충분히 주의를 기울였음에도 인기척이 느껴졌는지 정해준이 한쪽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아직 잠에 취한 눈꺼풀을 두어 번 깜박이다가 그대로 굳어 버린 나를 얼마간 응시했다.

이어 확 좁아지는 미간에 내 속 또한 동여맨 것처럼 조였다. 반길 리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지금처럼 대놓고 혐오감을 드러낼 때는 목이 졸린 것처럼 숨이 막혔다.

이제 정해준이 깼으니 찾아온 용건을 꺼내든지,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으니 다음에 다시 오겠다든지 뭐라도 말을 해야 하는데 바보처럼 하얗게 굳어 있는 사이 괴로운 듯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린 정해준이 짜증 섞인 실소를 흘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또 꿈인가.”

“…….”

어쩌자고, 원망 속에 섞인 한 줄기 아쉬움을 읽어 버렸을까. 어쩌자고.

충격으로 멍하니 서 있는 동안 미묘하게 달라진 정적을 기민하게 눈치챈 정해준이 얼굴에 얹어 두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사납게 치뜬 눈에 당혹감이 어려 있었다. 다소 과한 반응이 나의 어렴풋한 짐작에 힘을 실었다.

‘아직 나를…….’

뜻하지 않게 마주한 정해준의 본심은 서글프고 아프고, ……기뻤다.

이 무슨 파렴치한인가. 질색하며 자책한 순간 정해준의 차가운 명령이 떨어졌다.

“나가.”

“아, 미, 미안. 아니, 죄송합니다. 이거…….”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등줄기의 어느 한 부분은 정말 물줄기를 직통으로 맞은 것처럼 얼얼하기까지 했다. 얼뜨기처럼 팀장이 맡긴 서류를 대강 정해준 앞에 올려놓고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하나 너무 서두른 탓일까. 벌컥 열어젖힌 문에 누군가가 부딪쳐 요란한 소리가 났다. 윽, 신음을 흘리며 어깨를 감싸 쥔 사람은 같은 연구 1팀 전임이었다.

“죄송, 합니다.”

“죄송은요. 그런데 어디 안 좋으세요? 많이 힘들어 보여요.”

전에 없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김규환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엉망일 얼굴을 황급히 훔치며 다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 괜찮아요.”

“이사님한테 된통 깨진 건 아니고요?”

이사실 문을 눈짓하며 김규환이 다시 한번 되물었다. 다른 목적을 가지고 추근거리는 게 아니라는 건 알겠지만 괜찮다는데도 계속 붙어서 질문을 던져 대는 게 불편했다. 사심 섞인 호의가 과한 느낌.

“아닙니다. 저, 진짜 괜찮아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다행이네요. 귀신이라도 본 표정이라서.”

“…….”

“사실 팀장님도 얼마 전에 엄청 깨졌거든요. 이번에 유럽 규정 바뀌었잖아요. 싹 다 재인증받아야 하는데 팀장님하고 마찰이 있었나 봐요.”

“네…….”

“어렵게 가지 말고 아프리카나 동남아 쪽 노리자고 말 꺼냈다가, 어휴. 말도 마세요. 누가 그러는데 복도가 갈라지는 줄 알았대요.”

노성을 지르는 정해준은 잘 상상되지 않았다. 감정 기복이 별로 없는 편이기도 하지만, 굳이 언성을 높이지 않고도 상대를 압박하는 건 타고났으니까. 김규환이 과장하고 있구나, 생각하면서도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이 사람은 할 일이 없나. 벌써 꽤 오래 노닥거린 것 같은데 자꾸 얼쩡대는 게 점점 부담으로 다가왔다. 애초에 그리 친근한 사이도 아니고.

원래도 적은 말수가 아예 없어지자 김규환이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것마저도 부담으로 다가오는 찰나, 이사실 문이 사나운 기세로 열렸다. 화들짝 놀란 김규환이 얼른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성의 없이 고개만 까딱한 정해준이 남긴 냉기에 김규환이 당황한 사이 재빨리 연구실로 들어섰다. 뭔가 더 얘기하고 싶은 듯 머뭇거리는 그를 모른 척하고서.

***

-승아 밥 잘 먹고 지금 색칠 공부 하고 있어. 여긴 걱정 마. 늦게 와도 돼. 사람이 숨 좀 쉬고 살아야지.

1차가 끝나면 돌아가려 했으나 주인공 운운하며 2차는 필수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팀장에게 어쩔 수 없이 붙잡히고 말았다.

미안한 마음에 전화하자 흔쾌히 승아를 맡아 주신 김 여사님이 자정을 넘겨 와도 좋으니 충분히 사람들과 어울리다 오라고 몇 번이나 신신당부했다. 고마운 마음을 뒤로하고 다시 술자리로 돌아왔을 때는 자리를 비운 잠시 동안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 있었다.

달아오른 취기에 따분한 일 얘기는 어느새 뒷전이었고, 혼기에 이른 사람들이 많은 만큼 자연히 연애와 결혼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내가 껴서 좋은 끝을 본 적 없는 주제라 여겨 한발 물러서 오가는 한담을 지켜보기만 하려 했다. 때문에 초반부터 튀어온 불똥은 뜨겁기만 했다.

“이해원 씨는 재혼 안 해요? 참, 결혼은 처음이니까 초혼인가?”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고해나의 물음에 몹시도 당황했다. 갑작스러운 질문의 답도 의도도 파악하지 못한 채 허둥대다 스스로 듣기에도 엉뚱한 답만 내놓고 말았다.

“아직 아이가 어려서…….”

최근에 늦둥이를 본 팀장이 참을 수 없다는 듯 끼어들었다.

“에이, 아이가 어릴수록 아빠가 있어야지. 어떻게, 해원 씨만 생각 있으면 내가 아는 사람 소개시켜 줄까?”

“누군데요, 그게?”

정작 당사자인 나는 손사래 치고 있는데 고해나가 눈을 빛냈다. 누군지 알기만 하면 당장 예식장으로 끌고 갈 태세였다. 평소 데면데면한 사이인데 어째서 이렇게 열성적인지, 술버릇이라고 보기엔 악의마저 느껴지는 적극성에 희미한 반감이 일었다.

“어어, 거기도 애 하나 있는데 마침 딸이거든. 해원 씨 딸이랑 자매처럼 지내면 좀 좋아?”

“여자는 자매가 최고죠.”

고해나가 맞장구쳤다. 자매가 최고라니, 이소원이 떠올라 그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다지 반기는 분위기가 아니자 팀장이 중언부언 말을 얹었다.

“나이는 좀 있는데 아파트도 큰 평수 자가로 있고 생활이 안정적이야. 사람이 소탈해서 해원 씨와도 잘 어울릴 것 같거든. 어때, 생각 있어? 없어도 한번 만나나 봐.”

“전 정말 괜찮습니다. 생각 없어요.”

다시 한번, 보다 명확하게 뜻을 전달했으나 이미 도마 위에 오른 화제는 생명력이 끈질겼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팀장에게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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