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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과-47화 (47/77)

47화

부장이 하도 눈엣가시처럼 나를 대해서 선물하고도 좋은 소리 못 들을 게 뻔해 일부러 하지 않았다. 승아 어린이집 간식으로는 소소하게 들려 보냈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조금 넉넉하게 준비해서 나도 밸런타인 선물을 돌릴 걸 그랬나, 약간 후회되기도 했다.

“우리 해원 씨도 인기는 아름 씨 못지않았을 것 같은데 말이야. 학교 다닐 땐 고백 많이 받았지?”

과거형이었다. 나의 봄날은 이미 지나갔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란 확신이 담긴.

팀장의 말이 영 틀린 것도 아니라 애매한 미소만 지었다.

할머니가 이소원의 과오를 내게 떠맡긴 이유를 이런 순간마다 실감한다. 아무렇지 않게 던져지는 무례들, 숨 쉬듯 받는 편견 어린 시선. 그게 내게 지워진 빚의 굴레였다.

“우리 해원 씨야 당연히 인기 많았겠죠. 팀장님 이것도 드실래요?”

살짝 가라앉은 기분을 눈치챈 손아름이 센스 있게 화제를 전환해 난처한 상황을 넘겨 주었다. 고맙다고 입 모양을 지어내려는 찰나, 경쾌한 발걸음으로 고해나가 다가왔다.

“웬 거예요?”

팀장이 두 번째로 들고 있는 마카롱과 같은 색의 마카롱을 집어 든 고해나가 손에 든 것을 달게 깨물며 사람들을 둘러봤다.

“손아름 씨 생일?”

“아니요.”

손아름이 손사래 쳤다.

“지난달 밸런타인데이 때 주전부리 조금 돌렸거든요. 이번에 다른 분들이 화이트데이라고 챙겨 주신 거예요.”

흐응. 심드렁하게 콧소리를 낸 고해나가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직장에서 밸런타인데이니, 무슨 데이니 챙기는 거 조금 촌스럽지 않나. 그거 다 상술인데.”

“다 사람 사는 재미지 뭐.”

팀장이 얼른 수습했으나 이미 손아름의 사회생활용 미소가 깨진 뒤였다. 노골적으로 짜증 난 표정을 지어도 고해나는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미안, 미안. 미국에는 화이트데이 없거든요.”

와잇 데이, 하고 유난히 억양에 힘을 주어 발음한 고해나가 맛있다며 마카롱 하나를 더 집어 들고 자리로 돌아간 후, 손아름은 크나큰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분해했다.

“와, 진짜 재수 밥맛.”

고해나 정도로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말을 막 던지는 사람쯤이야 어디든 한둘은 있게 마련이었다. 손아름도 그걸 모르진 않을 테지만 이토록 기분 나빠하는 까닭은 따로 있었다. 고해나가 공공연하게 정해준과의 오래되고 깊은 인연을 떠들고 다녀서였다.

정해준 어머니와 자신의 어머니가 선후배 사이라고,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집안끼리 자주 왕래해 왔다는 얘기는 전체 회식에 참여한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참여하지 않은 나도 바로 다음 날 들었으니 이제는 사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터였다.

어쨌거나, 어린 시절부터 같이 자라 친한 사이 역시 있을 법한 일이었으나 손아름이 초조해하는 부분은 다름 아닌 고해나의 장담 때문이었다. 정해준의 어머니가 일찍이 자신을 며느릿감으로 점찍어 놓았다고. 그게 바로 한국에 들어와 정해준을 돕는 이유라고.

손아름 입장에서는 김새는 얘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고해나가 유독 자신에게 얄밉게 구니 하루에도 몇 번씩 바짝 약이 올라 씩씩댔다.

“거짓말일지도 몰라요.”

“뭐가요?”

“며느릿감 어쩌고 했던 거요. 자기도 초조하니까 따라 들어온 거 아닐까요?”

일리는 있었다. 손아름이 추측했던 것 같은 이유는 아니었다. 정해준과 사귈 때, 고해나의 얘기는 이름조차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고해나가 주장하는 것처럼 돈독한 친분을 유지하는 사이였다면 이름 정도는 들어 봤을 법한데.

한편으론 씁쓸했다. 고해나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 사랑은 어쩌면 허상 속에 세워진 신기루와 다름없었던 거라고. 서로를 속속들이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조차도 착각이었음을. 아님, 오만이었을까.

“그러게요.”

애매하게 답하며 뒷말을 흐렸다. 반응이 영 미적지근했는지 손아름이 마저 미심쩍은 점을 털어놓았다.

“전체 회식 때 누가 이사님한테 결혼 계획 있냐고 물었거든요.”

손아름이 꿀꺽 침을 삼키며 뜸을 들이는 짧은 시간 동안 입이 말랐다. 내가 뭐라고 덩달아 온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지.

내 손으로 잘라낸 인연이야. 나랑은 아무 상관 없다고. 끊임없이 되뇌는 머리와 달리 핏기가 사라지도록 주먹을 쥔 순간, 손아름이 고해나 쪽을 흘깃 노려보며 속삭였다.

“없대요, 결혼 계획 같은 거.”

“…….”

“당분간 사업에만 집중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순식간에 긴장이 탁 풀렸다. 손톱자국이 선명히 남은 손바닥에 뒤늦게 피가 돌아 저릿저릿한 감각이 일었다.

“말로는 뭘 못해요. 며느릿감 어쩌고도 희망 사항인지 모르죠.”

“그럴 수 있겠네요.”

“그럴 수 있는 게 아니라 분명 그렇다니까요. 두고 보세요, 제 말이 맞나 틀리나.”

확신에 차 못을 땅땅 박은 손아름이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나 역시 데이터와 그래프로 어지러운 모니터에 시선을 박았으나 어느 것 하나 명확하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심하다.’

이런 나 자신이 밉다. 갑자기 별생각 없었던 고해나가 의식되기 시작했다. 유들유들한 고해나는 누구와도 스스럼없이 지내는 편이지만 나한테는 알게 모르게 냉담했다. 직책은 훨씬 높은데 나이가 나보다 어려 불편한 점이 있겠지, 혹은 이런저런 이유로 선입견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넘기긴 했으나 이제 와서 그게 신경 쓰였다.

가소롭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네가 뭔데. 뭔데 신경 써? 아무것도 아니면서. 스스로를 호되게 질책하면서도 손아름이 그동안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듯 늘어놓았던 고해나의 신상이 하나둘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미 학부 시절에 제1 저자로 등록한 논문이 권위 있는 저널에 실린 재원이라던가, 그로 인해 국내 언론에 자랑스러운 이름으로 오르내렸다던가, 석사만 마치고 한국에 간다니 지도교수가 무척 아쉬워했다든가 하는. 하나 같이 나는 감히 넘볼 수도 없는 일화들이라 기가 죽었다.

‘기가 살면 어쩔 건데.’

어처구니없어하며 잠시 기분 전환이라도 할 겸 자리에서 일어섰다. 찬물에 세수라도 하고 올 요량이었지만, 정신을 차려 보려는 작은 노력은 부질없는 시도로 끝나고 말았다.

막 화장실로 향하는 복도의 모퉁이를 돌았을 때, 고해나와 단둘이 마주 서 있는 정해준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앞뒤가 뻥 뚫린 개방된 공간이었는데 꼭 둘만의 밀실에 침입한 것처럼 눈치가 보였다.

“또 회식 잡힌 거 알아? 진짜 싫어. 술, 술, 술. 어휴, 다들 술고래들이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것 같은데.”

“나야 분위기 메이커니까.”

종알거리는 고해나가 귀엽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린 정해준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마치 누군가 있던 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정확히 짚어서.

피할 틈 없이 시선이 맞닿았다. 황급히 돌아서려 했으나 내 이름이 들려와 그만 발이 딱 붙고 말았다.

“그런데 이번엔 분위기 띄우고 싶지 않아. 정확히 말하면 회식이 아니라 환영회거든. 이해원하고 손아름.”

“아.”

무감한 동조에 듣는 나까지 무안해졌다. 그럼에도 강렬한 시선은 여전히 떨어지지 않아서, 꼭 그물에 얽힌 새처럼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이번엔 이해원도 올 것 같던데. 전 여친하고 같은 회사에 있는 거 불편하지 않아?”

“아니. 전혀.”

이리저리 흔들리는 두 눈에 대고 못 박듯 정해준이 단호히 말했다. 앙금이 없다면 불편한 감정이 있을 리 만무했다. 한때는 무척이나 증오하던 상대라 하더라도.

너는 나를 완전히 정리했구나, 다시금 절절히 실감한다.

“확 잘라 버리면 안 되나? 애 본다고 일도 제대로 못 하는 것 같던데.”

다시 고해나에게 눈을 돌린 정해준이 어린 동생을 대하듯 다정하게 타일렀다.

“해고가 그렇게 쉬운 게 아니야.”

허, 기막혀하며 고해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내 회사인데 마음대로 못 자르는 게 말이 되나? 노동법을 대대적으로 손봐야 한다니까? 법대나 갈 걸 그랬어. 아, 이참에 갈까? 나, 판사 어울려?”

“뭔들.”

“아이, 성의 없게.”

키득키득 웃으며 고해나가 정해준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탁 소리에 최면에서 풀리기라도 한 것처럼 겨우 다리가 움직였다. 뒤숭숭한 기분으로 복도를 지나는 동안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고해나와도 서로의 이름 한자를 확인했을까. 같은 해를 품었다고 반가워하며 웃었을까.

칠판에 분필 긋는 소리만 울리는 조용한 교실 안, 교과서 한 귀퉁이에 주고받았던 낙서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종이 위를 사각사각 움직이던 샤프 소리와 유난히 힘주어 썼던 글자들이, 수줍게 띠었던 미소가.

이제는 산산이 조각난 과거의 파편들이 날카롭게 가슴을 내리그었다. 깎여 나가는 것처럼 온몸이 욱신거렸다.

통렬한 고통 속에 새로이 깨닫는다. 관계는 끊어졌어도 내 마음은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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