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과-46화 (46/77)

46화

차가운 시선이 성에처럼 따갑게 들러붙었다. 때마침 울리는 전화를 구원처럼 받았다. 막상 받고 나니 썩은 동아줄이었지만.

“여보세요?”

-야, 너 좀 웃긴다? 이게 모르는 전화는 받네?

고막을 찢을 듯 쨍한 목소리는 이소원의 것이었다. 속도 울렁거리고 기분도 몹시 나빠졌다. 모조리 게워 내고 싶을 만큼. 휴대전화를 귀에서 최대한 떼어 내고 인도에서 떨어진 쪽 벽에 기댔다. 몇 걸음 옮기는 짧은 순간에도 신경을 긁는 이소원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끊지 마! 끊기만 해? 너 성철 오빠가 찾아갔던 거 왜 얘기 안 했어?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그야, 성철 오빠가 얘기했으니까.

몰랐는데 둘이 연락은 하고 지내는 모양이었다. 그럼 안 만나 준다던 김성철의 변명은 거짓이었던 건가. 더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 그럼 앞으로 찾아오지 말라고 좀 전해 줄래? 너도 앞으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희 둘 일은 둘이 알아서 해결해. 난 둘이 생각 없이 저지른 짓 수습하는 걸로도 바쁘니까.”

독한 술을 마셔서 그런가, 독한 말이 술술 흘러나갔다.

생각 없이 저지른 짓, 수습. 승아를 생각하면 미안한 표현이었지만, 솔직한 심정이 그랬다. 내가 김성철과 무슨 얘기를 나눴나, 캐 보려고 전화했던 이소원은 뜻하지 않은 반격에 성질을 있는 대로 부려 댔다.

-지금 애 키운다고 유세 부리는 거야? 진짜 대단하다, 이해원. 애 인질로 잡고 있으니까 네가 뭐라도 되는 것 같아? 애 키운다는 핑계로 받을 거 다 받아먹은 주제에.

유세? 인질? 이소원의 막무가내에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말문이 막힌 걸, 제 말이 옳아서 내가 아무 소리 못 하는 걸로 착각한 이소원은 의기양양했다.

-너 승아 기어 다닐 때부터 어린이집에 내팽개친 거, 그거 아동 학대야 알아? 네가 사람이니? 양심도 없어? 그따위로 키울 거면 받은 돈 다 뱉어 내!

미친 개소리를 더는 들어 줄 수가 없었다. 남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고. 사람대접 못 받게 만들어 놓고 사람이냐고?

“그깟 양육비 십 원 한 장 남김없이 다 돌려줄 테니 네가 데려가서 키워! 당장 데려가라고!”

악에 받쳐서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이 정도로 소리 지른 건 처음이라 이소원도 놀랐는지 수화기 너머에서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에 흘러들어 온 맹한 중얼거림에 헛웃음이 나왔다.

-양, 양육비만 갚지 말고 그동안 우리 집에서 너 키워 준 값도 다 정산해!

뭐라 대꾸할 새도 없이 전화가 뚝 끊겼다. 저 할 말은 냅다 질렀으면서 내 반응은 무서운 모양이었다. 이소원이 비겁하게 내빼는 바람에 꺼내 놓았다가 수습하지 못한 감정은 온전히 내 몫이 되었다.

“하…….”

얼굴을 감싸고 주저앉아 자책했다. 회사 앞이었기 망정이지 만약 집이어서 승아가 듣기라도 했다면……. 요즘 들어 감정의 기복이 심해진 탓일까. 전이라면 이소원이 뭐라고 지껄이든 귓등으로 들어 넘기며 눈 하나 깜짝 안 했을 텐데. 요동치는 감정의 원인은 생각할 것도 없이 정해준일 거다.

‘이러지 말자.’

흔들릴 게 뭐 있어. 과거는 과거일 뿐, 지금의 나와 그때의 내가 다르듯 지금의 정해준은 내가 아는 정해준과 다른 사람이니까. 그러니 착각하지 말아야지. 어쩌면 착각이 아니라 그리움이 자아낸 망상이겠지만. 내게 관심 있는 정해준 같은 건.

마음을 다잡으며 툭툭 털고 일어났다가 비스듬히 서 있는 정해준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직 불을 붙이지 않은 연초가 손가락에 끼워져 있었다. 담배를 피웠었나. 내가 모르는 정해준의 시간을 가늠하다가 냉랭한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구질구질하네.”

“…….”

내 모습이 어떻게 비쳤을지, 뒤늦게 아차 싶었다. 정해준이 전화의 상대방을 아이 아빠로 오해했으리란 추측은 쉽게 할 수 있었다. 형편없겠지. 덜컥 애나 낳은 것도 모자라 모성조차 없는 여자라고.

재회한 후 늘 바닥만 보였다고 생각했는데 오만이었다. 바닥 밑에 더 깊은 바닥이 있는 줄 모르고. 그렇다 한들 그다지 상처받을 이유는 없었다.

정해준에게 난 이미 최악일 테니.

“자주, 마주치네.”

그런 의미에서 툭 던진 말은 술기운이 불러낸 객기에 가까웠다. 어차피 더 나빠질 일도 없으니까.

“부서 이동, 고마워.”

어디까지나 추측이었다. 사실이 아니라도 좋았다. 별안간 길길이 날뛰며 화내는 부장을 보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뻤으니까.

“진짜 고마워.”

“취했나 본데.”

눈살을 찌푸린 정해준이 어이없어하며 비스듬히 웃었다.

“난 모르는 일이야.”

“아…….”

역시 그렇구나. 어쩐지, 그럴 리가 없는데. 이사씩이나 돼서 일개 직원의 거취에 일일이 신경 쓸 리가. 게다가 그냥 일개 직원이 아니라 상처만 남겼던 전 연인이라면 더더욱 봐줄 이유가 없었다. 생뚱맞은 부서에 꽂아 넣고 압박하는 거라면 몰라도. 정해준의 성격상 시시콜콜하게 보복할 것 같지도 않지만.

“그래도 고마워.”

콱 막힌 목으로 거듭 꾸벅거렸다.

“그냥 다……, 고마워.”

바보같이 눈물이 났다. 가뜩이나 술기운으로 불그죽죽할 얼굴이 눈물로 얼룩덜룩해졌다. 볼썽사나울 게 뻔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눈을 감아 스스로를 가둔 세상에서 누군가 정해준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다시 손을 뗐을 땐 초라한 내 그림자만이 곁을 지키고 있었다.

***

부장이 사직서를 제출했다는 얘기는 뒤늦게 전해 들었다. 자신이 자주 가는 중식당에서 요리 여러 개를 시켜 놓고 술을 권했던 게 부장 나름의 마지막 인사였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손아름과 나를 위한 송별회가 아닌 본인을 위한 송별회인 셈이었다.

부장 때문에 출근하기가 죽도록 괴로웠던 적도 있었지만, 막상 미워하던 사람이 영영 떠났다고 생각하니 내심 싫지 않으면서도 기분이 이상했다.

“잘됐죠, 뭐.”

손아름이 심상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내 코가 석 자인데 누굴 걱정해요.”

“그러게요.”

백배 동감하는 바였다. 바라던 연구팀에 들어왔는데 손아름의 예상처럼 순조롭게 일이 돌아가지는 않았다. 손이 굳은 탓에 몇 년 만에 놀리는 피펫이 정교하지 않고, 실험도 자꾸 튀는 결괏값이 나온다는 평가 때문에 손아름은 답지 않게 기가 죽어 있었다.

“알고 보면 영업팀이 체질이었나 봐요. 다시 옮겨 달라고 할 수도 없고.”

“조금만 더 하면 금방 손에 익어서 잘할 거예요.”

심심한 위로를 건넸지만 나 역시 고전 중인 건 마찬가지였다. 손아름 같은 이유는 아니었다. 정밀한 작업을 요하기에 고도의 집중력이 필수건만, 어린이집에서 오는 전화 때문에 자주 주의가 흐트러졌다.

요즘 부쩍 예민해진 승아는 최근에 퇴행 증상이 이어져 시도 때도 없이 소변을 지리는 바람에 다시 기저귀를 차고 있었다. 밥도 아기처럼 직접 떠서 입에 넣어 주지 않으면 도통 먹을 생각을 않아서 어린이집 선생님이 고생 중이었다.

더 어릴 때는 낮잠을 안 자서 애를 먹였는데. 해가 지나서 조금 나아지나 싶었는데 이제 선생님들 볼 낯도 없었다. 일시적이라고는 하지만 종일 신경이 쓰였다. 별다른 이유 없이 승아의 몸에 자꾸만 생겨나는 멍도 마음을 놓을 수 없어 조만간 병원에도 가 볼 생각이었다.

이런 와중에 어쩌다 마주치는 정해준은 고역이었다. 연구실이 이사실 바로 앞이라 정해준과 자주 마주치리라던 손아름의 예상은 정확했다.

이렇게 우연이 자주 이어진다고? 의심스러울 정도로 복도에서, 화장실 앞에서, 수시로 정해준과 마주쳤다. 그때마다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게 전부지만 별안간 공기가 압축된 것 같은 긴장감은 도무지 줄어들지 않았다.

마주칠 때마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나와 달리 손아름은 마냥 행복해하는 눈치였다. 어떤 날은 정해준과 마주친 횟수를 일일이 세어 보곤 이 정도로 우연이 계속되는 건 필연이자 운명이라며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이처럼 손아름의 예상은 고대로 맞아떨어졌지만, 그로 인해 정해준과 가까워지지 않을까 했던 그녀의 기대는 애석하게도 얼마 가지 않아 무참히 깨졌다.

손아름의 매력이 부족하다거나, 어딘가 뒤떨어져서가 아니었다. 화이트데이인 오늘 아침, 손아름의 책상에 놓여 있던 사탕들만 봐도 그랬다. 대부분은 지난 밸런타인데이 때 손아름이 뿌렸던 초콜릿의 보답이라지만, 개중에 몇몇은 분명 사심이 담겨 있었다.

서구형 미인상에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 모난 데 없고 싹싹한 성격의 손아름은 같은 여자가 봐도 매력적이었다. 맡은 일도 야무지게 잘하는 데다가 자주 주위를 웃겨 주지만 또 너무 허물없지 않게 선을 딱딱 지키니, 팀장이 대놓고 손아름의 영입을 좋아하는 게 무리는 아니었다.

“이거, 아름 씨 덕분에 분위기가 확 사네. 응?”

손아름이 맛보시라며 내민 마카롱을 덥석 베어 물며 팀장이 손아름의 바로 옆인 내 자리 위를 눈으로 훑었다.

“뭐야. 해원 씨는 초콜릿 안 돌렸었어? 어째 썰렁하다.”

“아…….”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서 멋쩍게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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