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
“몇 번 잘 다독여 줬나 보지?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냉큼 벌린 거 보면.”
오전에 김성우가 했던 말을 정해준이 고대로 반복했다. 김성우가 멋대로 지껄일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정해준이 하니 가슴에 푹푹 찔러 박혔다.
“나랑 정반대라 끌렸다고 했나? 사실인가 보네.”
하룻밤 실수라고 했던가. 기막히게 잘 지어낸 변명거리였다. 김성철이 정해준과 눈곱만큼도 겹치는 점이 없다는 것마저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서.
“그래, 의심하게 해서 미안해.”
속여서 미안해. 마음 아프게 해서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정해준에게 건네야 할 너무나 많은 미안해가 남아 있었다. 전할 곳을 잃고 부유하던 수많은 미안해가 가슴 저 밑바닥에 차곡차곡 쌓여 시시때때로 몸과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이따금 과거의 기억이 튀어나와 속을 할퀴면 암울이 더께 앉은 밑바닥이 와아아 일어나며 혼탁해졌다. 다시 가라앉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앙금 없는 눈물이 미지근하게 고이도록.
“왜 울어.”
“…….”
“뭘 잘했다고 우는데.”
정해준이 성난 목소리로 다그쳤지만, 오랜 시간 굳어 버린 감정의 덩어리를 입 밖으로 꺼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목구멍이 틀어박힌 것처럼 흐느끼는 게 전부일 뿐.
***
메일함 제일 상단의 인사이동 통지를 보고 긴장했으나 인사발령 사유인 ‘부서이동 : 중앙연구소 연구개발 1팀’을 확인한 후 당황은 곧 안도로 바뀌었다. 처음 입사 지원할 때부터 바라던 부서라 내심 기쁘면서도 한 가닥 의문을 떨치지 못했다.
‘혹시…….’
나를 배려해 준 걸까. 아무래도 정해준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을 거란 쪽으로 자꾸만 생각이 기울었다. 근거 없는 심증이 깨진 건 손아름 덕분이었다.
“해원 씨!”
상기된 표정으로 다가온 손아름이 신나서 떠들어댔다.
“봤어요? 우리 부서 이동이요. 연구소 가고 싶어 했잖아요! 완전 잘됐죠!”
아, 맞다. 나만 연구소로 발령 난 게 아니지. 대체 무슨 착각을 했던 거람. 김칫국도 유분수지.
김성철이 찾아왔던 밤, 그 싸늘했던 정해준의 눈초리를 보고도 혼자 망상에 빠져 있던 게 부끄러워 입술을 깨물자 떨떠름한 반응에 손아름이 뒤늦게 눈치를 살폈다.
“해원 씨도 바랐던 거 맞죠?”
“아, 네. 그럼요.”
선선히 긍정하면서 한편으론 궁금했다. 손아름이 이 정도로 연구부서로 발령받길 원했었나? 이제 영업부 일이 익숙해져서 여기 생활을 더 편하게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좋아요?”
솔직히 걱정도 됐다. 학부 때 실험실에서 몇 번 깔짝거린 게 전부인데 정교한 손기술이 요구되는 피펫팅 컨트롤을 잘할 수 있을지. 복잡한 실험과정을 최대한 오차 없이 진행할 수 있을지. 모르긴 몰라도 새로 배우는 거나 마찬가지 아닐까.
내 앞선 걱정에 손아름은 별게 다 근심이라며 깔깔 웃었다.
“에이, 본격적으로 업무 시작하기 전에 교육시켜 주겠죠. 거기선 신입이잖아요. 그리고 손에 익었던 건 바로 기억날걸요. 왜, 몸으로 배운 건 몸이 다 기억한다잖아요.”
몸으로 익힌 건 오래가잖아.
너, 죽을 때까지 나 못 잊게 하려고.
정해준이 예전에 귓가에 속삭였던 말들을 떠올리며 맥없이 수긍했다. 다행히 손아름은 흥분한 상태라 내 반응에 별 관심이 없었다.
“좋냐고요? 당연하죠! 이사실 바로 앞이잖아요.”
“아…….”
언젠가 들었던 기억이 난다. 정말 한결같기도 하지. 귀여운 이유에 웃음을 터트리자 더욱 신난 손아름이 열심히 구상해 놓은 장밋빛 미래를 낱낱이 들려주었다. 흡사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고 극적인 상상을.
“오며 가며 열심히 눈도장 찍다 보면 뭐라도 되겠죠. 또 누가 알아요? 화장실에서 손 씻고 나오는데 이사님이 딱 기다리고 있다가 시계를 확인하면서 물어보는 거예요. ‘손아름 씨, 시간 괜찮으면 같이 저녁 식사 어떻습니까?’ 어우, 두근거려.”
주체할 수 없이 뛰는 가슴을 주먹으로 꾹 누른 손아름이 못마땅한 심기가 가득한 부장의 헛기침 소리에 익살스럽게 어깨를 움츠렸다. 어차피 타 부서로 옮기는데 부장이 뭐라고 질책해도 신경 쓰지 않을 태세였다. 부장도 사람 우스워질 걸 알아서 더 이상 아무 말 안 하는 걸 테고.
평소 싹싹하게 굴던 모습과 대비되는 당돌한 면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한편으론 부러웠다. 남 눈치 보지 않고 거리낌 없이 행동할 수 있다는 게. 방금 잡혀 와 우리 속에 갇힌 원숭이처럼 주변을 향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민감한 나와는 여러모로 달라서, 부러우면서도 살짝 질투가 났다.
아무렇지 않게 정해준을 향한 호감을 드러낼 수 있어서가 아니라, 정말, 그냥 질투. 돌아서면 잊어버릴 그런 가벼운…….
‘……뭘 또.’
구구절절 내 감정에까지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나 싶어 문득 한숨이 났다. 그걸 부장의 반응을 살피는 걸로 오해한 손아름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빠르게 흔들며 안심시켰다.
“남은 이야기는 다음에 해요!”
“그래요.”
좋게 손아름을 돌려보내고 나서 부장의 지시를 받아 인수인계안을 만들고 업무자료를 정리했다.
쉴 틈 없이 오전을 보내고 겨우 틈이 생겨 한숨 돌리고 있을 때 불현듯 이사실 바로 앞이라 좋다던 손아름의 말이 다른 의미로 들렸다. 정해준과 자주 마주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부담감에 속이 거북해졌다.
‘깊게 생각하지 말자.’
괜찮을 거라고, 어차피 다른 선택지도 없지 않냐고, 스스로를 가만가만 다독인 후, 다시 업무에 집중하려 했는데 휴대전화에 알림 표시가 반짝였다.
승아가 요즘 들어 자주 바지에 소변을 지리니 앞으로는 속옷과 바지 여분을 두어 벌 더 챙겨 달라는 당부가 담겨 있었다. 오늘만 해도 여벌로 가져간 옷마저 적셔서 다른 아이의 엄마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 아이의 옷으로 갈아입혔다며.
어린이집에 들어가기 전, 오늘따라 유난히 떨어지지 않으려 목을 꽉 끌어안고 칭얼거리던 승아가 떠올랐다. 정해준이나, 김성철이나, 회사 일이나, 신경 쓸 게 많아서 승아에게 소홀했던 건 인정한다.
아이들이 대개 그렇듯, 승아가 제 엄마인 나의 말투, 표정, 작은 한숨마저도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반응한다는 걸 알면서도 촉각을 곤두세우는 어린것이 마냥 거추장스럽게 느껴져서…….
엄마, 승아 예뻐? 승아 사랑해?
응, 해 주면 될 걸, 그 한마디가 뭐라고 그러지 못했다. 대답 대신 꽉 안아주긴 했지만 어린 마음에는 차지 않았을 거다. 생각할수록 내 탓인가 싶어 마음이 무거워졌다.
지금은 아니지만, 처음에는 승아가 말을 배우는 게 두려웠다. 정확히는 나를 엄마라고 부르는 게.
그럼 돌이킬 수 없을까 봐. 어쩌면 본능적으로 아는 게 아닐까. 내가 자신을 꺼리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엄마라는 부름에 차마 입이 안 떨어져 망연했던 그 순간을.
덕분에 좀처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허둥대며 오전을 보냈다.
***
“자, 자, 유종의 미를 거두자고.”
윤기가 반들반들한 깐풍기를 앞에 두고 부장이 반주로 고량주 한 잔씩을 돌렸다. 알싸한 술 냄새에 마시기도 전부터 속이 얼얼했다.
“우리 아름 씨 그동안 고생 많았어. 부서는 달라져도 종종 보자고. 참, 해원 씨도.”
명목상 송별회지만, 사실상 난 깍두기 같은 존재였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그래도 빼놓지 않고 불러 준 게 어디냐 싶어 곱게 잔을 부딪쳤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어어, 서운한 거 있음 이 자리에서 다 잊어버려. 사회생활이란 게 다 그래. 여기저기 구르면서 닳고 닳는 거지 뭐. 하나하나 마음에 담아둬 봤자 모난 돌이 정 맞는 꼴 말곤 볼 게 없어. 어? 깎여 나가기 전에 미리부터 둥글게, 둥글게. 내 말 무슨 뜻인지 이해하나?”
손아름과 내가 도착하기 전부터 남직원들과 잔을 기울이고 있던 부장의 말이 점점 길어졌다. 아직 점심시간인데 이래도 되나 싶게 거나한 자리기도 했다. 벌써 세 순배 째.
뭔가 느낌이 이상해 손아름을 보니 남들 몰래 술을 바닥에 터는 중이었다. 나도 저렇게 할걸.
술이 약한 편이라 맥주 한 캔에도 얼근히 취하는데, 아닌 게 아니라 도수 높은 술이 처음 목구멍을 넘어갈 때부터 식도에 작열감이 들더니 두 잔을 마신 지금은 속이 지글지글 끓고 있었다.
“뭐 해, 이해원 씨? 안 마시고?”
석 잔째 술을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잔만 만지작거리고 있자 부장의 눈꼬리가 쭉 찢어졌다.
“저, 부장님. 제가 속이 좀 안 좋아서…….”
탕! 테이블을 내려치는 소리에 말을 채 맺기도 전에 깜짝 놀라 얼어붙었다.
“누구는 속이 좋아서 마시나? 사람이 눈치란 게 있어야지, 원. 됐어. 이해원 씨는 이만 일 하러 가 봐! 술맛 망치지 말고. 에잇!”
무안하여 화끈거리는 낯이 술 때문인지 수치심 때문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면박 줄 일인가 싶으면서도 따가운 눈총을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닫이문을 닫고 나오자, 룸 안의 소란이 홀에서도 잘 들렸는지 몇몇 손님들이 식사하다 말고 기웃거리는 게 느껴졌다. 회사 앞 식당이라 몇몇은 아는 얼굴이어서 더욱 당황했다. 그중 하나가 정해준이어서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