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그러거나 말거나 내버려 두었다. 도망쳤든, 입대했든 아이를 책임질 인간은 아니라는 점에서 김성철은 내 관심 밖이었다. 애초에 이소원과 미주알고주알 서로의 고충을 털어놓는 사이도 아니었고.
이소원도 그걸 잘 알 텐데 말 상대가 딱히 없는 상황이니만큼 내가 아쉬운 모양이었다. 하긴, 고등학교 때도 제멋대로긴 했다. 갑자기 내 방에 쳐들어와 정해준 얘기를 쏟아 냈던 걸 떠올리면.
어쨌거나 이소원의 배는 출산 직전까지 착실하게 부풀었다. 도무지 성실한 구석이라곤 없는 이소원이건만.
출산이 임박해 입원을 앞두고 이소원이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이해원. 나 무서워. 죽으면 어떡하지?”
“…….”
안타깝게도 위로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순산할 거란 말도, 잘 회복할 거란 말도, 정말이지 목구멍이 바늘구멍처럼 좁아져선 꽉 막혀 버렸다. 입술을 꽉 다물고 대꾸하지 않는 내 모습에 이소원의 안면이 실룩거리더니 끝내 못된 말을 뱉었다.
“나쁜 년.”
우습게도 평소처럼 욕을 듣자 겨우 숨통이 트였다. 하, 하고 가까스로 뱉어 낸 한숨에 이소원이 발악했다.
“알고 보면 속으로 너 나 저주하는 거 아니야? 어? 애나 나 잘못되라고? 씹, 이 미친, 나 잘못되면 다 네 탓이야!”
“그래.”
담담히 대꾸했다. 네가 살고 죽는 게 나한테 달렸다니. 참 전지전능하네, 나.
“키워 준 은혜도 모르는 년.”
“그래서 이제 네 아이 키워서 갚을 거잖아.”
톡 쏘아붙이자 대꾸할 거리가 없는지 고개를 홱 돌린 이소원이 얌전히 병원으로 향했다. 김 여사님의 말에 따르면 출산 직전까지 안절부절, 초조함이 극에 달해 주변을 들들 볶았다고 한다. 그렇게 혈기 왕성했던 탓에 아기는 순산이었고.
처음엔 자기 인생 찾을 거라고 큰소리 뻥뻥 쳤던 이소원이었는데. 역시 엄마는 엄마였던 걸까? 막상 낳고 보니 예뻐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며 아기 곁을 떠날 줄 몰랐다.
“아, 예뻐. 어쩜 이렇게 귀엽지? 하품하는 것 봐! 까꿍!”
내 눈에는 별안간 돋아난 것처럼 보이는 이소원의 모성이 불편했다. 나를 낳아 주신 엄마도 이랬을까. 이소원이 푸근한 낯으로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묘해지기도 했다.
이 무렵 이소원은 나를 이물질처럼 대했다. 제 살과 뼈로 빚어 만들어 낸 아기를 내가 키우는 게 영 못마땅한 듯했다.
왜 엄마한테서 애를 빼앗아 가냐며 황당한 소리를 지껄여대더니 급기야는 밤마다 아기랑 계속 같이 살고 싶다고 할머니와 엄마 앞에서 눈물을 질질 짰다.
내가 볼 땐 어리석은 짓이었다.
할머니와 엄마가 얼마나 자기를 아끼면 눈엣가시 같은 나에게 손녀를 맡기겠는가. 이소원은 결국 아기가 백일이 되기도 전에 강제로 유학길에 오르게 됐다. 출산 때문에 재수는 당연히 망했고, 삼수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란 할머니의 판단에서였다.
늘 저를 끼고 살던 엄마의 살냄새가 없어지자 아기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어댔다. 능숙하게 아기를 돌보던 도우미도 애를 먹었다. 낮에는 그래도 도우미가 있었지만 밤에는 고막을 찢어대는 울음이 고스란히 내 차지였다.
나중에 정 떼기 힘들다는 이유로 할머니와 엄마는 아무리 아기가 자지러지게 울어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무슨 정신으로 살았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달래도 그치지 않는 아기와 같이 울다 보면 새벽이었다.
무언의 압박에 못 이겨 결국 계획보다 이르게 집을 나갔다. 분가하고 나서야 내가 일시불로 요구했던 액수가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여자가 생활을 이어 나가기엔 터무니없이 적은 금액이라는 걸 알았다. 용돈도 변변치 못하게 받았던 처지에 살림이 어느 정도 규모로 굴러가는지 빠삭할 리가 없었다.
물론 할머니나 엄마는 알았을 것이다. 자신들이 내 협박에 넘어가는 척 넘겨준 통장의 잔액으로는 대학 졸업도 빠듯할 거라는 것을.
부족한 부분을 채워 달라고 해도 이미 떠난 집이고 닫혀 버린 문이었다. 어리숙하게 당해 버린 것이다. 치사하고 비굴했지만 어쩔 수 없이 영수증을 내밀면 아이에 관한 지출만큼은 다시 채워 주었다.
뒤늦게 사정을 안 외삼촌이 학비를 대주어 대학을 겨우 졸업했다. 원하면 더 공부해도 된다고 했지만 사양했다. 엄마는 아빠를 선택하기라도 했지, 외삼촌이야말로 남이었으므로 더 손 벌릴 염치가 없었다.
그렇게 살았다.
멍하니 지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벌떡 일어나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막 개수대에 컵을 갖다 놨을 때, 현관 벨이 울렸다.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
인터폰을 확인해 봤지만, 어두컴컴한 인영만이 있어 분간이 가지 않았다. 덜컥 겁이 나 가만히 기척을 죽이고 있자, 이번에는 문을 쾅쾅 두들겼다.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나와서 얘기 좀 하자고.”
“누구……, 세요?”
“이소원 남자 친구.”
“…….”
아닌 밤중에 찾아와서 다짜고짜 문을 열라니. 끼리끼리 만난다더니 둘이 하는 짓도 비슷했다. 예의 없고, 막무가내에 안하무인. 무시하고 싶었지만, 그냥 두면 계속 문을 두드려 승아가 깰까 봐 걱정이었다. 아무 겉옷을 걸쳐 입고 김성철 앞에 나섰다.
“나가서 얘기해.”
바로 집 앞 복도에서 소란을 피워 이웃에 민폐를 끼칠 마음은 없었다. 강경한 태도에 꼬리를 내린 김성철이 순순히 뒤를 따라 밖으로 내려왔다.
이왕 내려온 거 그냥 이대로 가 주었으면 싶었다. 무슨 용건인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쳐다보지도 않고 무시하자 자존심이 상했는지 김성철도 눈알을 부라렸다.
“서율이 돌려 달란 얘기 하러 왔는데.”
“서율이?”
“소원이랑 나는 아이 이름 그렇게 지었거든. 그런데 애 이름도 마음대로 바꿔 놨대?”
“여태 코빼기도 안 비치다가 이제 와서 헛소리하지 마.”
이런 말은 내가 아니라 이소원이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에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갑자기 찾아와서 이러는 법이 어디 있냐고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머쓱했는지 김성철이 한풀 꺾인 기세로 주절거렸다.
“그동안은 나도 일이 있어서. 군대도 다녀오고, 아르바이트도 하고. 이제 정신 차렸으니까, 서율이 얼굴 좀 보여 줘.”
아무리 봐도 정말 승아한테 애정이 있어서 찾아온 건 아닌 것 같았다. 뒤늦게 정신 차렸다는 것도 믿을 수 없었다. 사람이 하루아침에 개과천선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지만 김성철 같은 인물에게 기대하기 힘든 일이었다. 아무래도 뭔가 속셈이 있는 것 같아 더욱 강경하게 맞섰다.
“서율이 아니고 승아고, 지금 자고 있어.”
“자는 것만 잠깐 보는 것도 안 돼?”
“여자 혼자 있는 집에 남자 들어오는 거 불편해. 약속도 없이 찾아와서 무례하게 구는 것도 기분 나쁘고.”
“그럼 내일 오전에, 아니, 주말에 시간 되나?”
“아니. 다신 찾아오지 마. 죽은 줄 알았던 아빠가 갑자기 나타나면 애가 얼마나 혼란스럽겠어?”
“그건…….”
“거 봐. 승아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충격받지는 않을지, 고려해 본 적도 없지? 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으면서 뭐? 애를 돌려줘? 양심이 있어?”
“아씨! 내 새끼 내가 보겠다는데 말 존나 많네!”
따박따박 따지고 들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던 김성철이 끝내 손을 쳐들었다. 어차피 각오한 일이었다. 이소원에게도 종종 손찌검했던 걸 봤으니까.
푸르스름한 멍을 달고서도 이소원은 김성철을 감싸기 급급했다. 너무 순한 사람은 가끔 욱하기 마련인데 자기가 성질을 건드려서 그런 거라고. 세상에 어떤 순한 사람이 남을 그렇게 두들겨 패는지. 오히려 그렇게 믿고 있는 이소원이 순진해 보일 지경이었다.
“씨발!”
거친 욕설에 눈을 꾹 감았다. 어디 한번 때려 봐. 바로 진단서 떼러 갈 거니까. 경찰에 신고하고 증거로 제출하면 찾아오지 못하도록 막는 법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어깨를 움츠린 순간, 이런 상황에서만큼은 절대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온몸의 피가 싸악 빠져나가는 감각에 몸을 떨었다. 김성철은 낯선 사람의 등장보다 별안간 희게 질린 내 얼굴에 더 당황한 듯했다. 나와 정해준을 번갈아 살피며 머뭇거리다가 내빼 버렸으니까.
차라리 다행이었다. 정해준이 김성철을 잡고 캐물어 전후 사정을 다 알게 되는 건 진심으로 원치 않았다.
“애 아빠?”
김성철이 멀어진 쪽을 턱 끝으로 가리키며 정해준이 물었다. 상관하지 말라고 말하려 했는데, 정해준이 상사인 이상 고분고분 답변할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게 떠올랐다.
“어.”
담담한 대꾸 후 침묵이 흘렀다. 정해준이 왜 여기 있지? 하는 의문은 뒤늦게 들었다. 지나가다 우연히 발견했을 가능성은 없었다. 차가 들어오기 힘든 좁고 외진 골목이었으니까. 그렇다는 건 제 발로 여기까지 일부러 찾아왔다는 뜻이었다.
“왜…….”
영문을 묻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냉소를 머금은 정해준의 낯에 그냥 입을 다물었다. 고단했던 내 지난 시간을 낱낱이 읽고 있는 것만 같아, 날카로운 시선에 속이 긁히는 듯했다. 초라한 행색이 새삼 부끄러워져 낡은 카디건 앞자락을 여몄다. 탐색을 끝낸 정해준이 입을 열었다.
“궁금해서.”
“…….”
“대체 얼마나 잘난 놈을 만나려고 날 차 버렸나 했더니 저런 쓰레기한테 잘도 다리를 벌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