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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과-43화 (43/77)

43화

정작 남의 가슴에 비수를 던진 두 사람은 끽연 후 돌아갔는데, 정해준과 나는 못 박힌 듯 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차라리 뭐라고 말이라도 해 줬으면. 미미하게 들린 입매가 흥미인지 조소인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속이 거북했다. 침묵이 주는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울컥, 토하듯 뱉었다.

“이만.”

“…….”

“가 보겠습니다.”

공손하게 고개까지 꾸벅 숙이고 나서야, 어떻게 인사를 건넬까 고민했던 게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다. 떨어진 시간, 달라진 지위만큼 멀어진 심리적 거리감은 타인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완벽한 타인.

그렇게 정의 내리자 정해준을 의식하며 굳어 있던 게 무색해졌다. 우연히, 그저 우연히 비슷한 시간대에 카페테리아에 들렀다가 마주쳤을 뿐인데. 정해준이 아니라 누구라도 같은 회사 직원끼리 남의 험담을 하고 있다면 선뜻 그 앞을 지나기 힘들었을 테고.

여전히 반응 없는 정해준의 곁에서 한 발 물러서 돌아섰을 때였다.

“누구 애야?”

나직하나 직설적인 물음이 작살처럼 등 뒤에 꽂혀 들었다. 경악한 얼굴로 쳐다봤으나 속을 읽을 수 없었다. 날씨 얘기라도 하는 것처럼 평온한 투라 왜 묻는지 그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사진만 봐선 알 수 없어서.”

“사진? 무슨…….”

별다른 말 없이 정해준이 사진을 내밀었다. 다른 아이들이 모두 집에 돌아간 후 늦도록 어린이집에서 혼자 놀고 있는 승아였다. 언제 찍힌 건지 정확한 날짜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옷소매가 긴 걸 봐선 최근인 것 같긴 한데…….

“이게…….”

“나를 닮은 것 같진 않은데.”

당황해 말을 더듬다가 덧붙인 중얼거림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얼굴을 비교해 봤다면 나와 닮지 않은 것 또한 금방 알아챌 테니까. 자연히 날카로운 반응이 튀어나왔다. 궁지에 몰린 쥐가 마지막으로 이를 세우듯이.

“지금 애 사진을 몰래 찍은 거야? 내 허락도 없이?”

“사진쯤이야. 누가 찍었든 그게 중요해?”

아무렇지 않게 인정한 정해준이 태연히 내 손에 든 사진을 채갔다. 그 속에 담긴 승아를 보는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닮지 않았다고 내 아이가 아닐 가능성을 부정할 순 없으니까. 시기가 너무 절묘해서.”

“그건…….”

그제야 정해준이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승아의 나이를 감안하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네 아이……, 아니야.”

“싸게 만들었잖아, 네 안에.”

원색적인 표현에 말문이 막혔다. 정해준이 내가 아닌 타인에게 어떻게 굴었는지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막상 당하는 입장이 되자 사정없이 내몰렸다.

“기억 안 나? 제주에서.”

“피임 확실히 했어. 말했잖아, 피임약 먹었다고.”

“그럼 나랑 헤어지고 바로 다른 남자 만났단 소리네.”

“…….”

“아님 그전부터인가? 양다리 걸친 것도 모르고 내가 병신같이 놓치고 있었나 본데. 맞아?”

정해준을 기만한 벌은 다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가장 진심이었던 순간까지 부정당하는 현실이 가슴을 저몄다.

“아니, 아니야. 그런 거.”

“아니면 뭔데.”

정해준이 신경질적으로 웃으며 한 발짝 다가왔다. 겨우 한 발짝 좁혀진 거리건만 위압감이 어깨를 찍어 눌렀다.

“사람이 납득하게 해명을 해야 할 거 아냐. 지금 나랑 스무고개 하자는 건 아닐 테고.”

속을 들쑤시는 눈빛이 예리했다. 역시 정해준이었다. 조금이라도 틈을 보였다간 바로 파고들어 진실을 파헤치고도 남을 정해준. 애써 숨겨 온 시간들을 지키려면 방어적으로 굴 수밖에 없었다.

미화된 껍데기일 뿐이지만, 지키고 싶었다. 이미 충분히 비참했는데 궁상맞은 속사정까지 들켜선 안 됐다. 완전히 끝나 버린 사이에 더더욱…….

“내가 왜?”

“뭐?”

“그때 이미 다 말했잖아. 더 이상 무슨 해명을 바라는지 모르겠어. 너랑 헤어지고……, 잠깐 분위기에 휩쓸렸어. 하룻밤 실수했고, 내가 한 행동에 책임지는 것뿐이야.”

이런 상황을 예견했던 것도 아닌데 거짓말이 술술 흘러나왔다.

“잠깐 휩쓸렸다, 라.”

여전히 믿지 못하고 떠보는 정해준의 눈을 똑바로 맞았다. 욱신욱신 쑤시는 가슴의 통증을 무시하며 또박또박 밝혔다. 거짓을 진실인 것처럼.

“너랑 정반대인 사람 보니까 혹하더라. 그래서 그랬어.”

견고하던 정해준의 낯에 실금이 갔다. 미세한 균열을 확인한 순간 속이 와르르 무너졌다. 내가 뱉어 낸 말임에도. 발밑이 푹 꺼지는 것처럼 어질한데, 어떻게 버티고 서 있는지 모르겠다.

“이제……, 설명이 됐어?”

기운 없이 밀었는데 성큼 물러난 정해준이 순순히 길을 터 주었다.

어쩐지 이게 끝이 아닐 거란 예감이 강하게 들었지만 별다른 도리 없이 패잔병처럼 도망쳤다.

***

일진이 사나운 날임에 분명했다. 오후에 승아를 데리러 간 어린이집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승아의 몸에 생긴 멍에 대해 언급했다. 약간의 불신 어린 눈을 하고서.

“원에서 넘어지거나 다치진 않았거든요. 모르셨나 봐요…….”

“제가 더 주의해서 살펴볼게요.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집에 와서 승아를 목욕시키며 확인하니 정말 크고 작은 다갈색 멍을 배와 갈비뼈 쪽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팔 안쪽에도 하나, 허벅지에도 하나. 이상했다. 승아는 기질적으로 예민하고 활동적인 걸 싫어해서 집에서도 거의 얌전히 앉아 그림을 그리거나 블록을 쌓으며 노는 게 전부였으니까.

“승아야, 혹시 친구랑 싸웠어?”

넘어지거나 다치진 않았다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의심스러운 쪽이 누군데. 억울한 기분으로 다시 한번 꼼꼼히 승아의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간혹 원에 다른 친구들을 꼬집거나 때리는 등 손버릇이 안 좋은 아이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런 경우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크기와 부위가 다양했다. 와중에 얼굴만 멀쩡한 걸 보며 마음이 착잡해졌다. 다섯 살이 그 정도로 영악할까 싶지만…….

“누가 승아 아야! 하진 않았어?”

“누가?”

“어? 글쎄.”

늘 데려다주고 데려오기만 급급해서 다른 친구들 이름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같은 어린이집에 다니는 엄마들과도 당연히 사귀지 못했고. 미안한 마음 반, 창피한 마음 반, 어수선하게 뒤섞인 기분으로 다시 물었다.

“토끼 반 친구들 중에는 과격한 친구들 없어?”

“과격한 게 뭐야?”

“음, 놀 때 막 먼저 하겠다고 밀친다든가, 화난다고 때린다든가.”

“없어. 아영이는 고양이 흉내를 잘 내고, 민하는 인형 놀이를 좋아해. 그런데 혼자서만 공주님 인형 갖고 놀려고 해. 명진이는 맨날 공룡처럼 으르렁거리는데 재밌어.”

“그렇구나.”

딱히 괴롭히는 친구는 없는 것 같아서 마음은 놓였지만, 설명되지 않는 여러 개의 멍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막막해졌다.

‘조금 더 지켜보자.’

나도 놓치고 선생님도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을 수 있으니까. 괜한 오해는 금물이라고 속으로 되뇌면서 목욕을 마친 승아를 재웠다.

‘지친다.’

겨우 혼자만의 시간이 되어 멍하니 하루를 곱씹었다. 정확히는 오늘 새로 주어진 업무를 복기하려 했는데 어째서인지 자꾸 오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부장과 김 대리의 대화를 듣고 서 있던 정해준이.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건만, 정해준의 표정이 그린 듯 생생했다. 무심하고 차가운, 어쩌면 옅게 떠올랐을 조소가.

‘잊자.’

끊임없이 생각해서 어쩌겠다고. 이제 상관없는 사이잖아.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10년의 절반이면 한때 이어졌던 연 끊어지는 것쯤이야 대수라고.

정해준을 처음 만나서 헤어질 때까지 3년이 걸렸는데, 벌써 두 배 가까운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어떤 인연이 남긴 흔적은 깊게 박힌 화석처럼 지워지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흔적은 말 그대로 흔적일 뿐. 남은 자취를 끌어안는 건 오로지 내 몫이다.

마음을 다잡고 빨래를 차곡차곡 개키는데 자꾸만 손이 느려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대로 멈춘 채 멍하니 정해준을 그리고 있다. 이제는 전처럼 따스하게 웃지 않는 정해준을.

너를 아프게 한 대가였을까. 정해준과 헤어진 뒤 벌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고됐던 시간을 떠올렸다.

출산 전만 해도 몸이 무겁다, 난 인생 망했다, 매일이 한숨과 짜증과 눈물 바람이었던 이소원이었다.

아이 때문에 자신의 인생 계획이 일 년이나 늦춰졌다며 갑자기 부풀어 오른 자기 배를 향해 원망을 쏟아 내기도 했다. 제 분을 못 이기고 몸부림치는 꼴을 보며 냉소를 날렸다.

넌 일 년이 늦춰졌지만, 네 아이를 떠맡게 될 나는 아예 삶이 멈춰 버렸는데.

세기의 사랑이라도 하는 양 할머니와 엄마 몰래 김성철을 만나러 다니는 것도 꼴사나웠다.

김성철을 만나고 들어오는 날이면 이소원의 눈꼬리에 맺혀 있는 눈물이나 팔뚝에 들어있던 멍만 보면 있느니만 못한 치였는데, 그것도 아이의 생부라고 꽤 의지하는 듯했다.

그나마도 산달이 가까워져 연락이 뚝 끊겨 버리자, 이소원은 김성철의 부재를 몹시도 불안해했다.

“군대 끌려가서 그렇겠지? 하, 진짜.”

내가 볼 땐 그냥 도망친 건데. 이소원은 김성철이 전쟁터에 강제 징집이라도 당한 것처럼 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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