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회의 인원이 모두 착석하기도 전에 부장이 짜증을 부렸다. 시작 전부터 흉흉한 분위기에 바짝 긴장했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새 이사, 정해준을 지칭한다는 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무엇 때문에 부장의 심기가 불편해졌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상태로, 딱딱한 분위기 속에서 회의안을 자리에 하나씩 놓아두고 자리에 앉았다.
“이해원 씨, 이거, 누구 아이디어야?”
신경질적으로 회의안을 넘기던 부장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혼자 휘리릭 넘긴 탓에 무얼 얘기하는지 알 수 없었다. 허둥지둥 종잇장을 넘기며 우왕좌왕하자 부장이 노성 섞인 한숨을 터트렸다.
“여기, 이거 말이야. 요즘 누가 홈페이지를 블로그에 꾸며?”
“네……?”
부장이 검지로 꾹꾹 찌르는 문단을 겨우 찾아냈다. 홈페이지 개편에 대한 안건이었다. 인수 합병된 만큼 이미 대대적으로 고쳐 놓았어야 했지만, 아직 늑장을 부리고 있는 부분이었다. 억울한 점은 내가 안건을 낸 건 맞지만 홈페이지 관리 담당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독립된 도메인이 아닌 모 플랫폼의 블로그를 빌려 쓰는 방식의 홈페이지는 기존부터 운영되던 것이었다. 그저 수정이 필요해 보여 안건을 냈을 뿐인데 이런 식으로 뒤집어쓰게 될 줄은 몰랐다. 정작 홈페이지 관리 담당인 김성우 대리는 불똥이 튈까 딴청 피우는 중이었다.
무엇보다 나 같은 일개 사원에게 홈페이지 관리 권한을 맡기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당장 홍보팀을 따로 꾸려도 모자랄 마당에. 부장도 모르지 않을 텐데 이렇게 화풀이 식으로 나오는 건 부당했다.
“저, 부장님. 착오가 있는 것 같습니다. 홈페이지는 제 권한이 아니라…….”
“착오는 무슨 착오! 이제 이해원 씨까지 나한테 트집입니까? 아니,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네 일 내 일 나누고. 어? 사람이 일머리가 있어야지, 그렇게 빈둥거릴 틈만 찾으면 되냔 말이야!”
폭격이 쏟아진 것처럼 등줄기가 얼얼했다. 축축하게 땀이 배어나는 손을 쥐었다 펴며 두서없이 눈만 깜박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가 회의실 문을 노크했다.
“영업부 회의 중입니다.”
회의실 앞에 붙어 있는 스케줄표를 확인하라는 말에 차분한 대답이 들려왔다.
“압니다.”
갑자기 등장한 정해준 때문에 잠시 소란이 일었다. 상석을 내어 주기 위해 엉거주춤 일어난 부장을 필두로 다 같이 일어서 우왕좌왕하는 사이, 여유롭게 착석한 정해준이 제게도 회의 안건 목록을 달라고 요청했다.
정해준이 회의실에 들어온 순간부터 하얗게 얼어 있다가 거듭된 청에 뒤늦게 회의안을 인원수에 딱 맞게 복사했던 게 떠올랐다.
“한 부……, 복사해 오겠습니다.”
“이해원 씨, 좀 넉넉히 뽑지 않고 뭐 했어!”
언제는 자원 낭비니, 종잇값을 아껴야 하니 일장 연설을 하며 설교했던 부장이 정해준의 눈치를 보며 말을 싹 바꿨다. 손아름이 잽싸게 제 회의안을 정해준의 앞에 내려놓는 센스를 발휘했다.
“제가 해원 씨랑 같이 보면 됩니다. 편히 보세요, 이사님.”
정해준이 회의안을 꼼꼼히 살피는 동안 긴장 섞인 침묵이 회의실을 장악했다. 이따금 종잇장 넘기는 소리만 날카롭게 허공을 갈랐다.
그럴 때마다 얇은 종이 모서리에 가슴이 사악 베이는 듯했다. 정해준과 한 공간에 있는 게 불편한 나머지 가슴이 돌로 눌러놓은 것처럼 답답했다.
“이거.”
정적을 깨는 지적에 움찔 튄 건 우연이 아니었다. 쯧, 부장이 눈총을 쏘았지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나는 왜 이렇게 못났을까, 자책하며 손아름이 가리키는 부분을 읽었다. 부장이 성질을 부렸던 홈페이지 건이었다.
“내 의견 반영한 겁니까.”
정해준이 묻자 부장이 공손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맞습니다. 말씀해 주신 대로 홈페이지는 회사의 얼굴이나 다름없는데 독자적 구축 없이 블로그 따위로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건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서 개편 진행할 예정입니다.”
와, 진짜 얍삽하다. 손아름이 내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눈빛으로나마 동의하며 내가 낸 안건을 본인이 낸 것처럼 피력하는 부장을 복잡한 기분으로 쳐다봤다. 부장이 예민하게 굴었던 이유가 정해준에게 같은 내용으로 한 번 깨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그럼 구체적으로 진행안 작성해서 제출하세요. 제가 직접 검토합니다.”
“네! 회의 끝나고 바로 작성해서 올려보내겠습니다.”
부디 결재서류를 들고 가는 게 내가 아니길 기도했다. 만약 내게 시킨다면 어쩌지. 정해준과 단둘이 마주치는 상황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고 싶었다.
적절한 핑곗거리를 떠올리느라 이어지는 질의응답에 영 집중하지 못했다. 겨우 정신을 차린 건 손아름이 옆구리를 툭툭 건드린 덕분이었다. 회의안에 못 박혀 있던 시선을 들고나니 어째서인지 모두들 나를 보고 있었다.
“죄송……, 합니다. 다시 말씀해 주시면…….”
“영업부는 전원 회식 참석이냐고 물었습니다.”
“아……, 힘들 것 같습니다. 아직 아이가 어려서…….”
“알겠습니다. 그럼 이해원 씨 빼고 나머지는 모두 참석, 맞습니까.”
“예, 이거, 송구하게 됐습니다. 첫 회식인데 결원이 생겨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비굴하다 싶을 정도로 굽실거리는 부장의 행동을 제지하며 정해준이 깔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만간 업무 평가 및 인사이동이 있을 예정입니다. 혹 원하는 부서가 있으면 자유롭게 건의해도 좋습니다. 그럼.”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나갈 때도 거침이 없었다. 정해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마자 털썩 주저앉은 부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해원 씨. 사회생활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 정 사정이 안 되면 애를 업고라도 와야지. 분위기 깨는 것도 아니고, 뭐? 힘들 것 같아? 그게 뭐야. 내 얼굴에 먹칠하려고 작정했어?”
억측이었다. 남의 얼굴에 먹칠하려고 안달 난 건 오히려 부장이었다. 부장이 주선한 소개팅에서 미혼모인 게 밝혀진 후, 공공연하게 이해원 때문에 개망신을 당했다고 떠들면서.
“그게 아니라.”
“아아, 됐어! 됐고, 무슨 일이 있어도 회식 참석하세요. 그렇다고 진짜 애를 업고 오진 말고. 어이, 김 대리. 한 대 피우러 가자고.”
어쩌라는 걸까. 남의 사정은 듣지도 않고 이랬다가, 저랬다가. 무어라 위로라도 하고 싶은 건지 옆에서 머뭇거리는 손아름을 먼저 내보내고 정해준과 부장이 연달아 휘몰아치고 지나간 회의실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배 속 밑바닥에 앙금처럼 가라앉은 비참한 기분을 곱씹으며.
‘역시 이직하는 게 나을까.’
이곳도 힘들게 입사했는데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집과 가까운 이점도 포기하기 어렵고. 답답한 기분에 바람이라도 쐴 겸 잠시 1층으로 내려갔다. 손아름이 극찬하던 새로 바뀐 카페테리아에 가 볼 생각이었다.
‘따뜻하다.’
갓 뽑아낸 커피의 향과 손바닥에 전해지는 뜨끈한 온도가 경직됐던 마음을 어루만졌다.
손아름의 말대로 카페테리아는 훌륭했다. 상주 바리스타가 다양한 음료를 만들어 제공하는 데다가 디저트류도 알찼다. 이만큼 양질의 커피와 간식이 공짜라니. 전과 너무 달라 어리둥절했던 것도 잠시, 코너를 돌다가 부장과 김성우 대리를 발견하고 멈췄다.
벌써 들어갔을 줄 알았는데. 오늘따라 할 얘기가 많은 모양이었다. 사무실 밖에서까지 부장과 마주치고 싶진 않았다.
좀 멀지만 다른 길로 가기로 마음먹고 휙 돌아섰다가 뜻밖의 인물을 맞닥뜨리고 하마터면 손에 쥔 잔을 놓칠 뻔했다. 정해준이 나와 마찬가지로 커피를 들고 있었다.
“…….”
비켜줄 생각도 없이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 정해준과 대치하며 머릿속이 하얗게 얼어 버렸다. 뭐라고 하지? 안녕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안녕하십니까? 또 뵙네요? 경어를 써야 할지, 예전처럼 인사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쇠를 긁는 듯한 김성우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해원 씨는 인물이 아깝죠. 그 얼굴로 연예인 하면 아주 딱인데, 하필 애가 생겨서. 그런데, 진짜 애 엄마처럼 안 생기지 않았어요?”
“원래 얌전빼는 애들이 뒤로 호박씨 까는 거야.”
쯧. 부장이 혀를 차며 예전 일을 끄집어냈다.
“내가 이해원이 소개팅 주선했다가 나중에 애 있는 거 밝혀져서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꼴에 고고하게 굴질 말든가. 왜 사람 헷갈리게 만들어? 의뭉스럽게.”
“난처하셨겠어요.”
“난처하다마다.”
“그래도요.”
무슨 얘기를 꺼낼 것처럼 무게를 잡던 김성우가 손에 들린 꽁초를 발치로 툭 던져 비벼 끄고 다시 새 담배에 불을 붙여 첫 모금을 맛있게 빨았다.
“의외로 해원 씨 같은 스타일이 쉽다니까요. 혼자 애 키우면서 얼마나 외롭겠어요. 몇 번 잘 다독여 주면 냉큼 벌려 줄걸요. 아, 마음을, 마음을 벌려 준다는 겁니다.”
“김 대리도 참.”
다른 높낮이의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허공에서 어지럽게 엉겨 붙었다. 나를 두고 멋대로 지껄인 음담에 속이 짓이겨졌다. 형편없이 이겨진 자리에 더운 피가 고이는 듯도 했다. 무엇보다 아픈 건 정해준이 나란히 서서 같은 대화를 듣고 있다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