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기억 속 모습보다 다소 날카로워 보이는 건 보다 뚜렷해진 얼굴선 때문인지, 신경질적으로 구기고 있는 미간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원래도 무표정하면 어딘가 못돼 보이는 인상이긴 했지만…….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건 다른 면담관의 지적 때문이었다. 이미 여러 번 부른 듯 한심하다는 기색이 만면에 그득했다.
“이해원 씨, 이해원 씨! 뭐합니까? 착석하지 않고.”
“아, 네, 네. 죄송, 합니다…….”
“정신 좀 차리세요. 회사가 만만해요? 그러니 근무 태만하단 소리가 나오는 거 아닙니까.”
“죄송합니다.”
손아름이 전해 준 것보다 부장이 나에 대해 훨씬 부정적으로 평가한 게 분명했다.
눈살을 찌푸리며 못마땅하게 혀를 찬 면담관이 업무와 관련된 질문을 몇 개 던졌다. 형식적인 질문이어서 무난히 답변했지만 긴장감은 쉬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정말 중요한 질문은 이제부터 나올 거란 걸 지난 경험으로 잘 알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이어지는 질문들은 꽤 공격적이었다. 약한 구석만을 골라 집요하게 찔러 댔다.
“남편은 없는데 아이는 있으시네요. 사별은 아닌 것 같고.”
노골적인 면담관의 질문에 다른 한 명도 흥미를 보였다. 어디 한번 설명해 보라며 고개를 끄덕였으니까. 정해준은 말없이 서류를 뒤적이고 있었다. 의식하지 않으려 차분히 답했다.
“보시는 대로입니다.”
기대했던 답변이 아닌지 턱짓했던 면담관의 잇새로 김샌 소리가 흘러나왔다. 오기가 생겼는지 어떻게든 트집거리를 잡으려는 질문들이 던져졌다.
“아이가 갑자기 아플 때 맡길 곳은 있습니까?”
“돌봄 신청하면 되는데, 아직 갑자기 조퇴할 정도로 아이가 아팠던 적은 없습니다.”
정말 없었나. 여름엔 수족구와 장염, 겨울엔 감기를 달고 사는 승아였지만 어린이집에 다니는 이상 감수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작은 이마에 해열 패치를 붙이고 약을 챙겨 보낸 날은 종일 마음이 뒤숭숭했다. 하원할 땐 나도 모르게 저자세로 선생님의 눈치를 살피고.
당장 오늘도 두드러기 건으로 걸려 온 전화를 생각하자 심장에 추를 매단 듯 가슴이 무거워졌다. 작고 어린 승아가 느낄 고통이 안쓰럽다. 안쓰러운 만큼 부담감도 상당했다. 어쩔 수 없이 이소원이 떠오르고 만다. 아이의 아픔을 고스란히 떠맡아야 하는 건 원래 너 아니었냐고.
너무 냉정하잖아.
그동안 승아와 지내온 시간이 얼만데. 지금 누구 몫인지가 중요해? 비정한 내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 질책하다, 또다시 원망하다 정의 내릴 수 없는 감정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사이 면담관이 새로이 질문했다.
“그럼 앞으로 결혼할 계획은 있습니까?”
“…….”
왜 이런 걸 묻지. 와중에 반사적으로 정해준의 눈치를 살폈다. 다른 면담관들이 질문하는 동안 무언가를 적고 있던 손이 멈춰 있었다. 머뭇거리자 질문을 던진 면담관이 허, 하고 한숨을 쉬었다.
“오래 다닐 수 있나 확인하려고 그런 겁니다. 가뜩이나 결혼하면 그만두는 여직원이 부지기수인데, 이해원 씨는 이미 애가 있으니까 결혼 후 출산이라도 하면 일하기 더 힘들 거 아닙니까. 나이가 젊으니 다시 가정 이루고 싶은 마음도 있을 거고.”
언젠가 손아름과 이런 이슈를 다룬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남자들에게는 이런 질문 안 하지 않냐며, 성차별이라고 분개하는 손아름에게 맞장구치면서. 비슷한 상황이 오면 어떻게 대처할지 같이 고심도 했던 것 같은데. 기억나는 건 없고 막상 당하니 얌전히 대답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무력감을 느끼며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없습니다.”
“그래요? 흠.”
성실히 답했으나 믿지 않는 투로 면담관이 질문지에 무언가를 체크했다. 그러곤 더 물을 건 없는지 다른 면담관에게 확인한 후, 마지막으로 정해준의 의사를 물었다.
“이사님은 이해원 씨한테 궁금한 점 없으십니까?”
“글쎄요. 궁금한 점이라.”
질문이 재미있다는 듯 정해준이 피식 웃었다. 한쪽만 올라간 입꼬리, 살짝 찡그린 눈썹을 보자 갈비뼈 안쪽이 새큰거렸다. 차마 시선을 맞출 수 없어 구두 앞코를 내려다봤다. 숙인 고개 위로 정해준의 나직한 중얼거림이 떨어졌다.
“별로…….”
궁금할 게 없다는 말에 심장이 저 아래로 추락했다. 당연하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속이 아렸다. 자꾸만 눈시울이 뜨거워지려 해 급하게 눈꺼풀을 깜박였다. 취조 같던 면담이 이제는 고문 같이 느껴졌다.
이 순간, 결과 같은 건 어찌 돼도 상관없으니 그저 여기서 벗어나고만 싶었다. 죽도록 고통스러웠고, 여전히 아플 일만 남은 과거의 인연에서.
다행스럽게도 갈구하던 시간은 곧 다가왔다. 휙휙 서류를 넘겨 보던 정해준의 손이 멈췄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내 신상이 기록돼 있을 서류철의 파일을 덮는 모습에 안도했다.
이대로 끝이겠지. 설령 궁금한 게 있대도 다른 사람들도 있는 자리에서 이야기할 만한 성질은 아닐 테니까. 비로소 한숨 돌릴 찰나, 힐난조의 물음이 들려왔다.
“옷이 왜 그 모양입니까.”
“…….”
퍼뜩 고개를 들었다 정면으로 시선이 맞닥뜨렸다. 서늘한 눈빛에 이내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비웃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정말, 겨우, 고작 옷차림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오늘 내가 뭘 입었더라. 당황해 살피자 우유로 젖어 찝찝했던 소매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밑단이 꾸깃꾸깃 뭉친 스커트는 그다음이었다. 자꾸만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와 손을 쥐었다 폈는데, 무심결에 스커트 자락을 구기고 있는 줄은 몰랐다.
“죄송……, 합니다.”
“나가 보세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다음 면담자의 파일철로 눈을 돌리며 정해준이 무심히 지시했다.
‘죄송합니다’로 시작해서 ‘죄송합니다’로 끝나는구나. 씁쓸한 미소가 번지려는 걸 애써 참으며 다신 눈길 주지 않는 정해준과 나머지 면담관들을 향해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한 후 물러났다.
어떻게 자리까지 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한참 멍하니 있다가 이제 이사님을 비롯한 본사 임원들이 돌아간다는 얘기에 비척비척 일어나 의례적으로 머리를 숙였다.
묘한 긴장이 흐르는 정적 속에서 불운하게도 내 휴대전화가 울렸다. 어린이집이었다. 아무래도 승아를 데리고 병원에 가 보는 게 좋겠다는 선생님의 우려에 부장의 질타를 받아 가며 퇴근 시간을 조정했고, 이 과정을 정해준이 낱낱이 지켜보고 있어서…….
또 한 번 짓이겨진 속이 무참했다.
***
“사내 복지 엄청 좋아진 것 같아요. 완전! 출근하는 맛이 난다니까요?”
새로 생긴 카페테리아에 들렀다가 온 손아름이 뜨거운 커피를 호호 불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달라진 복지 중 단연 최고는 새 이사님의 눈부신 외모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회식 너무 기대돼요. 해원 씨도 이번엔 오실 거죠?”
“잘 모르겠어요.”
“에이, 그러지 말고요.”
회식 자리에서 이사님 눈에 들면 연구소로 자리를 옮겨 줄지 누가 아느냐며 눈을 빛내는 손아름에게 희미하게 웃어 보이고 말았다.
“승아 때문에요? 요즘 돌봄도 잘 돼 있던데. 우리 언니도 가끔 조카 맡기고 영화도 보러 다녀오고 그러던데요?”
“구하려면 사설 업체에서라도 돌봄 선생님을 구할 수야 있겠지만 낯가림이 심한 편인 승아가 잘 지낼지 걱정이에요.”
구차한 구실이었다. 실은 정해준이랑 마주치기 싫은 거면서. 그래도 승아가 낯선 사람을 심하게 경계하는 건 사실이고 적응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도 맞으니까. 거짓말을 한 건 아니라고 합리화했다.
“아름 씨는 아직 연구팀에 미련이 있어요? 테크니션?”
“그것도 그런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손아름이 천장을 눈짓했다. 천장은 왜? 따라서 고개를 꺾어 위를 보자 손아름이 킥킥 웃으며 속삭였다.
“이사실이랑 가깝잖아요.”
겨우 화제를 돌렸는데 또 원점이라니. 어쩔 수 없이 따라 웃고 말았다.
“그런 의미에서 저 인간하고는 멀어졌으면 좋겠네요.”
손아름이 아침 댓바람부터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 있는 부장을 눈짓하며 귓속말했다. 기존 경영진이 새 이사를 필두로 한 경영진으로 교체된 후, 부장도 물갈이당할 거란 소문이 파다했는데 용케도 잘리지 않았다. 운이 좋은 건지, 명이 긴 건지 알 수 없으나 윗선에 수시로 깨진다는 소문이 있는 걸로 봐선 앞날을 장담할 수 없는 처지인 듯했다.
‘내가 남 걱정할 때인가.’
잘리지 않아서 의외인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오너가 여성이라 여성 친화적인 경영을 한다고는 들었지만, 어디까지나 확인되지 않은 추측이었다. 손아름은 여성 직원이 한 명도 잘리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지만, 얼마 전 연구팀의 여직원 하나가 퇴사하면서 빈약한 추론이 되고 말았다.
“완전 저기압. 조심해야겠어요. 으으…….”
“네, 오늘 하루 무사히.”
파이팅 표시로 주먹을 불끈 접는 손아름을 향해 마주 주먹을 쥐어 보였지만, 불행하게도 바로 영업부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전달받은 안건을 가독성 좋게 편집해 인원수만큼 뽑아 회의실로 향했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진짜 더러워서 못해 먹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