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회전율이 좋은 집이었다. 메밀면도, 동치미 항아리도, 모두부도 금세 척척 차려졌다. 메밀면은 톡톡 씹히는 식감이 좋았고 동치미 국물은 속이 얼얼하게 시원했다. 입이 짧은 편인 손아름이 금세 한 그릇을 먹어 치울 정도이니 맛이 얼마나 좋은지는 말 다 했다. 뜨끈뜨끈한 두부 한 점을 젓가락으로 가르며 손아름이 눈썹을 세모로 모았다.
“총떡은 괜히 시켰나 봐요. 벌써 배부른데.”
“취소할까요? 늦었으려나.”
“그러니까요. 에이, 저기 나온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총떡은 보기에 먹음직스러웠지만, 쉬이 식욕이 일지 않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조금은 느려진 젓가락질로 김칫소를 흘리지 않게 조심하며 총떡을 집어 들었다. 손아름은 아예 먹을 생각이 없어진 듯 얇게 부친 메밀전병 안을 슬쩍 들춰 보며 재잘거렸다.
“부장님 말이에요, 요즘 완전 가시방석일걸요?”
“왜요?”
“합병 건 때문에요. 왜, 새 오너가 들어오면 칼바람이 불 거란 소문 있었잖아요. 인수 조건에 대거 직원 감축이 있대요.”
“그래도 연차도 있고 실적도 좋잖아요.”
“그럼 뭐 해요. 부장님 라인이 다 줄줄이 사표 냈는데. 완전 끈 떨어진 쪽박이죠.”
그런 식으로 따지면 걱정해야 할 쪽은 나 아닌가. 떨어질 끈 따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데다가 이렇다 할 성과는커녕 하루하루 버티는 게 전부니까.
“전 솔직히 합병돼서 너무 좋아요. 사실, 완전 사기 아니었어요? 테크니션 뽑는대서 지원했는데 막상 입사하니까 말 바꿔서 영업부로 돌리고.”
손아름도 그랬구나. 석박사에 포닥까지 마친 인재들이 수두룩한 생명과학과를 학부만 마친 채 전공을 살리려면 그나마 테크니션 정도가 최선이었다. 종일 실험실에 처박혀 온몸의 관절이 뻣뻣하게 굳도록 피펫을 놀려야 하는 박봉이지만 경쟁률이 셌다.
최종 합격 문자를 받았을 때, 제약회사 영업 사원으로 빠진 대부분의 남자 선배들을 떠올리며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나 역시 그들과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 넥스트메디텍이 사내 복지 좋기로 유명하잖아요. 연봉도 인상될 거고.”
“그러게요.”
잘리면 어떡하지. 앞선 걱정에 건성으로 대꾸하는 내 앞에 손아름이 본사 사진을 검색해 보여 줬다. 넓은 잔디 구장, 실내 골프연습장, 헬스장 같은 스포츠 시설과 근사한 카페테리아, 전문 셰프가 상주하는 구내식당이 차례로 지나갔다. 자기 계발에 관심 많은 손아름이 도서관과 어학 학습실을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반색했다.
“봐요, 키즈 케어 센터도 있어요. 승아도 여기 맡기면 되겠다, 그쵸.”
한쪽 벽면을 채운 만발한 분홍 진달래 아래 종종거리는 햇병아리 그림에 먼저 눈길이 갔다. 베이지와 그린 톤을 적절히 배치해 차분하면서도 따스한 느낌을 주는 인테리어도, 알록달록한 블록과 다양한 놀 거리로 꽉 채워진 놀이방도 오래 시선을 붙잡았다.
“어때요? 괜찮지 않아요?”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완벽했다. 승아가 이런 유치원에 다니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나도 출퇴근이 훨씬 수월해질 텐데. 너무 근사한 꿈이어서 잠시 가슴이 부풀었다.
“그러려면 우리 이따가 면담 잘해서 꼭 살아남아요, 해원 씨.”
“면담? 무슨 면담이요?”
“오후에 넥스트메디텍 본사에서 감사 내려오잖아요. 직원 면담도 동시 진행한대요.”
“그거 수요일로 알고 있었는데?”
“오늘 오후로 변경됐어요. 주말에 단체 문자 돌았는데, 못 받았어요?”
“문자 안 왔는데…….”
혹시나 해서 뒤져 보니 스팸함에 들어 있었다. 용건에 앞서 넥스트메디텍을 간단히 소개하는 문구 중, 국제, 상장 두 단어 때문에 스팸으로 분류된 듯했다. 난감해하는 내게 손아름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별일 없을 거예요.”
“네, 고마워요.”
웃으며 답하긴 했지만, 벌써 기운이 쭉 빠져 버린 후였다. 우유 썩은 내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 소매가 새삼 신경 쓰였다.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아 애꿎은 혀만 깨물었다.
***
뒤숭숭해서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면담으로 오후에 예정되어 있던 실험들이 밀리면서 실험을 의뢰했던 거래처에 일일이 전화를 돌려 양해를 구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와중에 앞 순서였던 손아름이 옆에서 눈을 빛내고 있었다. 표정이 밝은 걸 보니 얘기가 잘 풀린 듯했다. 면담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해, 대충 급한 불을 끄고 상체를 그녀 쪽으로 틀었다.
“잘하고 왔어요?”
물으나 마나 한 질문을 던지자 기회를 덥석 문 손아름이 기다리고 있었던 듯 얘기를 술술 풀어놨다.
“와, 새 이사님 진짜 잘생겼어요. 태어나서 그런 사람 처음 봤잖아요. 웬만한 연예인은 저리 가라, 아니, 연예인 뺨을 쳐도 맞은 연예인이 반해서 다른 쪽 뺨을 내밀 정도라니까요?”
얼마나 대단한 얼굴이면 면담 얘기는 한마디도 없이 얼굴 찬양 일색인지 궁금해졌다. 가져 봐야 쓸모없는 호기심이라 금방 거둬지긴 했지만.
“다른 얘긴 없었어요?”
연봉이나 인수 후 직급별 대우에 대해 알고 싶었는데 새 인물에 대한 수다는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너 아들이라는데 누굴 부러워해야 하는 거예요? 집안 빵빵한 이사님? 아니면 이사님 같은 아들을 둔 오너? 결혼반지 없는 거 보면 아직 미혼인 것 같은데. 와, 어떤 복 많은 여자가 물어갈까요? 전생에 나라 하나쯤은 구해야 하나?”
면담만으로도 바짝 긴장해 정신이 없었을 것 같은데 그사이에 손가락의 반지까지 확인했다니 새 이사가 엄청 마음에 들긴 했나 보다. 항상 사내의 남직원들이 손아름에게 들이대는 것만 봐 왔는데 그녀에게 이런 적극적인 면도 있었나, 하고 새삼 신기해하며 막간의 틈을 이용해 물었다.
“그런데 이사가 직접 면담하는 거예요?”
“네, 따로 키울 생각도 있다나 봐요. 자회사 개념으로요.”
“아…….”
완전히 본사에 통합되는 줄 알았는데. 면담 결과에 상관없이 손아름이 보여 주었던 본사의 환경은 물 건너갔다고 생각하니 살짝 김이 샜다. 이외에도 손아름은 한참 동안 귀족적인 마스크에 묻어나는 야성미라는 둥, 웃을 땐 솜사탕처럼 부드러운데 정색하면 오금이 저리도록 날카롭니 하며 새 이사에 대해 떠들어 댔다.
대강 응수하다 보니 어느새 내 차례가 돌아왔다. 자리를 정리하자 뒤늦게 생각난 듯 손아름이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왜요?”
“아……, 해원 씨 신경 쓰일까 봐 말 안 하려 했는데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뭐가요?”
“제 앞에 부장님이 면담하고 나오셨거든요. 그런데 부장님한테 불성실한 직원이나 사내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해서 관리하기 힘든 직원 있냐고 물었나 봐요.”
듣지 않아도 무슨 얘기인지 알 것 같았다. 당연히 내 이름이 언급됐을 거고, 그렇다는 건 첫인상부터 꽝이라는 소리였다.
“이해원 씨, 다음 순서입니다. 대기하세요.”
실망할 틈도 없이 호명됐다. 대기 의자에 앉아 있는 5분 남짓한 순간이 영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손아름의 귀띔 때문에 마음이 더 무거웠다.
새 이사가 선입견을 가지지 않았길 바랐지만, 반대로 주목할 만한 성과는 고사하고 주어진 업무를 쳐 내는 것도 버거운 미혼모에게 딱히 기대할 게 있길 바라는 게 더 무리 아닌가.
모쪼록 정리해고 대상은 아니었으면. 그것만 아니라면 멸시의 눈빛 정도는 얼마 정도 참을 수 있는데. 이미 여러 번 받아 본 눈총인데 하나 더해진다 한들 무어 큰일이라고. 이사면 마주칠 일도 적을 테니까 어떻게 면담만 잘 넘긴다면…….
“이해원 씨, 입장하세요.”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 회의실 문이 열렸다. 심호흡과 함께 인사말을 골랐다. ‘안녕하세요, 이해원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이건 좀 어색한가? 그냥 ‘이해원입니다.’까지만 할까.
그게 낫겠다고 마음을 정하며 들어선 순간, 벼락 맞은 것처럼 그대로 굳어 버렸다.
너무나 잘 아는 얼굴이 앉아 있었다.
바로 앞에 이사직 명패를 단정히 놓아둔 채.
‘정해준이…….’
왜 여기에 있지? 아버지 병원 물려받는다고 하지 않았나? 왜, 왜, 여기에…….
번뜩 손아름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오너 아들이라고 했던.
‘아…….’
하도 이소원이 호들갑을 떨어 정해준의 아버지가 대상 병원 대표 원장이라는 것만 알았지, 어머니 또한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고 있는 분일 줄은 미처 몰랐다.
사귈 당시에라도 물었으면 솔직히 얘기해 줬을 정해준이지만, 나를 숨기느라 급급해 가족 얘기는 피한 게 독이 됐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나. 혼란스러운 나머지 인지 능력을 잠시 상실했다. 이곳이 회의실이라는 것도, 면담을 위해 이 자리에 임했다는 것도 잊었다. 온통 혼몽한 가운데 정해준만이 또렷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