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진짜 사람 앞일 어떻게 될지 몰라. 난 네가 의사 돼서 대상 병원 물려받을 줄 알았거든. 물론 지금도 네 앞날이 창창한 건 변함없지만…….”
너 따위가 뭔데 나를 평가하세요. 뒤틀린 속내가 입술을 비집고 나올 찰나.
“이해원이 그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우리 중 아무도 몰랐을걸.”
갑자기 튀어나온 이름에 숨통이 콱 막혀 버렸다. 목을 졸린 것처럼 희게 질렸던 이해원의 마지막 모습이 눈알을 할퀴듯 스쳤다.
“이해원이…….”
차마 묻지 못했다. 이해원의 소식을 듣고 싶은지, 아닌지 스스로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첫 몇 년은 이해원의 흔적을 찾아 뒤지지 않은 곳이 없고, 최근 몇 년에는 의식적으로 이해원의 소식을 피하려 노력했다.
무의미한 노력이었는지 모른다. 각종 SNS가 난무하는 시대에 세상과 단절이라도 한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해원이었으니까. 사귈 때도 이해원의 휴대전화에 있는 메신저라곤 과 공지용으로 깔아 놓은 게 전부였다.
“걔가 왜.”
감당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면서도 끝내 유혹에 지고 말았다. 이해원 이름 세 글자가 나온 순간부터 그로기 상태였으므로.
“아직 모르는구나.”
자신과의 대화에 처음 보인 관심에 최인교는 비로소 만족감을 드러내며 한껏 뻐겼다. 하는 짓만 봐서는 국가 기밀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대강당에서 이해원을 씹어 댈 때의 모습이랑 조금도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갑자기 들을 마음이 싹 사라졌다. 그게 무엇이든 알고 싶지 않았다. 설령 내가 이해원에 대해 가장 궁금했던 점이라 해도.
“아쉽지만 다음에 들어야겠다. 약속이 있어서.”
약속 시간이 임박한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20 여분이 남아 있었지만, 근처를 대강 어슬렁거리거나 어머니의 비서에게 연락해 짐을 나눠 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보나 마나 양손에 다 들기 힘들 정도로 물건을 쓸어 담았을 테니.
언제까지고 눌어붙어 있을 것 같던 최인교도 벌떡 일어났다. 관심을 거두니 도리어 애가 타는 모양이었다. 굳이 멋대로 혀를 나불댔다.
“이해원, 어떤 양아치 새끼 애 배고 팽 당했다더라.”
“…….”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됐다. 이해원이…… 양아치, 애.
도무지 이해원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 어지럽게 귓전을 맴돌며 붙었다 떨어졌다.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한순간 싹 털어내며 피식 웃자 무시당한 최인교가 정색했다.
“그렇게 비싸게 굴더니. 이해원이 미혼모 될 줄 누가 알았겠냐고.”
“……지금, 뭐라고 그랬어?”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동명이인이겠지. 최인교가 뭘 잘못 알고 떠드는 거겠지. 믿지 않는 눈치에 최인교가 억울한 티를 내며 주절주절 말을 보탰다.
“혼자 애 키우면서 산대. 진짜야. 우리 동창 중에 희진이 알지? 걔가 어린이집 교사거든. 이해원 딸이 거기 다닌대. 어휴, 공주도 옛말이다, 으윽!”
“확실해? 정말이야?”
“이, 이것 좀 놓고, 윽! 말해……!”
“아…….”
무의식중에 움켜쥐었던 최인교의 어깨를 놔줬다. 목을 조르지 않은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묻지도 않았는데 실컷 떠벌릴 땐 언제고, 최인교가 겁먹은 얼굴로 올려다보며 더듬거렸다.
“너, 괜찮아?”
최인교의 염려에 겨우 고개를 돌려 근처 쇼윈도에 비친 내 얼굴을 확인했다. 핏기 없이 질린 낯이 사납게 일그러져 있었다.
***
방심하기 좋은 날이었다.
유난히 오전을 정신없이 보내기도 했다. 부쩍 스스로 하겠다고, 고집부리는 일이 잦아진 승아가 2L짜리 우유 팩을 엎질렀고, 급하게 욕실로 데려가 씻기고 옷을 갈아입혔을 땐 이미 등원 시간이 촉박했다.
우유가 흥건한 식탁이며 바닥을 닦을 틈도 없이 간신히 등원 시간에 맞춰 승아를 어린이집에 들여보내고 나선 이제 한숨 돌리나 했는데, 눈앞에서 출근 버스를 놓치고 말았다.
오늘따라 다음 버스가 배차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소매 한쪽이 우유에 젖어 고릿하고 시큼한 냄새를 풍기고 있다는 건 출근 후에야 알아챘다.
회사 화장실에서 비누를 살살 문질러 빨아 보았지만 고약한 냄새는 쉬이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축축하게 젖은 옷에 기분만 불쾌해졌다. 그 와중에 어린이집에서 전화가 왔다. 통화 버튼을 누르기 전에 겁부터 덜컥 났다.
‘무슨 일이지.’
당장 애를 맡아 줄 사람도 없는데.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 어린이집에서 걸려 오는 전화는 공포 그 자체였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승아 어머님.
조용히 받았는데 선생님의 쾌활한 목소리가 조용한 사무실을 뒤흔들었다. 쯧, 하고 부장이 혀 차는 소리를 듣자마자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허리를 굽혀 잽싸게 화장실로 향했다.
“네, 선생님. 말씀하세요.”
-승아가 아침 간식을 먹고 두드러기가 났거든요. 병원에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아, 네…….”
두드러기가 났다고? 갑자기? 우유와 견과류 믹스를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발진이 올라왔다는 얘기를 흘려들으며 머릿속에 떠오른 수많은 물음표를 쳐냈다. 중요한 건 당장 달려가 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당장……, 병원에 가야 할 정도인가요?”
질문 속에 담긴 망설임을 알아챈 선생님이 작은 한숨을 쉬었다. 아이를 방임한다고 생각하겠지.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비슷한 반응을 보여 왔으니까.
보통의 엄마들은 이럴 때 어떻게 반응할까. 모르긴 몰라도 아이 걱정부터 하지 않을까. 병세가 심하진 않은지, 부위는 어디인지, 많이 고통스러워하지는 않는지. 그리고 아주 작은 증상에도 놀라 아이를 둘러업고 병원으로 달려가겠지.
-음, 그러면 어머니, 조금 더 지켜본 후에 안 되겠다 싶으면 다시 연락드릴게요. 두드러기 말고 다른 증상은 없는 것 같거든요. 호흡이 곤란하다든가.
“네, 그럼 그렇게……, 감사합니다.”
통화를 마무리 지으며 허공에 대고 꾸벅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전화를 끊고 나니 도로 사무실에 들어설 일이 걱정이었다. 부장이 혀를 찬 이상 꾸중할 걸 알아서였다. 그래도 뾰족한 수 있나. 들어가야지.
“이해원 씨는 회사에 놀러 오나? 아주 내 집 안방처럼 편안하지?”
“……죄송합니다.”
예상대로 벼르고 있었던 것처럼 부장이 비꼬기 시작했다. 자리를 비웠던 시간이 무려 8분이나 된다고 손목시계를 신경질적으로 두드려 대며 다시 한번 날카로운 말을 쏟아 냈다.
“아니면 대단한 백이라도 있어서 남 눈치 같은 건 안 보나?”
“정말, 죄송합니다. ……아이가 아프다고 연락이 와서…….”
아이 핑계는 정말 대고 싶지 않았는데. 말하고 나서도 이를 지그시 물었다. 하지만 정말 이유가 그건데. 승아 몸에 두드러기가 나서 원에서 전화가 온 거, 그건데. 하지만 자녀가 셋인 부장에게 일말의 이해심을 바란 건 무리였나 보다.
“거, 사고 쳐서 여자 혼자 애 키우는 게 뭐 자랑이라고 떠벌리나?”
“…….”
가장 아픈 부분을 파고들자 머리도 혀도 굳어 버렸다. 숨 막힐 듯 어색해진 사무실 분위기마저도 내 탓으로 돌린 부장이 얼른 가서 일이나 보라며 팔을 휘휘 저었다. 모욕적이었지만 참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여기서 그만두면 갈 데가 없다는 걸 잘 아니까.
학부만 끝낸 채로 여기저기 이력서를 많이 냈으나 번번이 불합격이었다. 전문적인 지식을 많이 요하지 않는, 비교적 단순 작업 위주의 테크니션을 뽑는데도 석박사가 넘쳐나니 경쟁에서 형편없이 밀리는 건 당연했다.
서류를 통과해 기대하는 마음을 안고 면접에 임하면, 어쩌다 미혼모가 되었는지, 혼자 아이를 어떻게 키울 건지, 급한 경우에 아이를 봐줄 사람은 있는지 꼼꼼하게 질문한 후에 떨어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회사에 붙은 것만도 기적이었다.
덕분에 나와 승아 둘로만 이루어진 조촐한 살림을 그럭저럭 꾸릴 수 있을 정도의 벌이는 되었지만 넉넉하진 않았다. 꾸준히 다녀 경력이 쌓이면 더 많은 연봉과 보다 나은 근무조건을 제시하는 회사로 이직할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참아야지.’
참자, 참자. 자리로 돌아와 몇 번이나 되뇌고 나서야 겨우 업무를 시작할 정신이 들었다. 주말 동안 메일이 쌓여 있었다. 대부분 시약이나 배양액 주문서였다. 물량을 체크하여 회신한 후에는 제품 인덱스별 카탈로그 시안을 확인했다.
허리 한 번 못 펴고 몰두하다가 누군가 어깨를 툭 쳐 시간을 확인하니 어느새 점심시간이었다. 푸짐한 국수 사진이 떠 있는 휴대전화 화면을 눈앞에 들이밀며 옆자리의 손아름이 재촉했다.
“점심 먹으러 가요. 요 앞에 새로 생긴 메밀국수 집 어때요? 총떡도 같이 먹어요.”
“좋아요.”
순순히 끄덕이면서 나도 모르게 부장 자리를 눈으로 훑자 손아름이 귓속말로 알려왔다.
“부장님 아까 일찍 나가던데요?”
“아, 그렇구나.”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태연하게 대꾸했지만, 솔직히 안도했다. 나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사람이 상사로 있는 공간은 얼마나 지옥 같은지.
얼마간 편안해진 마음으로 손아름의 수다에 귀를 기울이며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 동치미 막국수가 완전 별미래요. 아, 모두부도 맛있겠다.”
“그럼 그것도 시켜요.”
“그럴까요? 둘이서 메뉴 네 개는 너무 많지 않아요? 살찌면 어쩌지?”
“두부는 괜찮을 것 같은데.”
“하긴, 해원 씨는 살 좀 쪄야 돼요. 여기요! 주문 좀 받아주세요!”
그렇게 말하는 손아름도 연약한 인상을 줄 정도로 마른 건 마찬가지여서 조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