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과-38화 (38/77)

38화

2부

Prologue

꿈은 흑백이란 말도 있잖아요. 그럼 저는 지금 꿈을 꾸는 걸까요?

아니요, 시력에 대한 얘기가 아닙니다. 그냥 세상이 무채색으로 보여요. 억지로 의식하려고 노력해야 빨간색, 파란색이 구분된다고 하면 이해하시려나.

아무것도 눈에 안 들어온다는 말이 더 맞겠네요.

그런데 걔가 나오는 꿈은 안 그래요. 살 내음, 목소리, 따스한 체온까지……, 어느 하나 생생하지 않은 게 없는데.

괴로우냐고요? 전혀요. 그게 꿈이라면 영원히 깨고 싶지 않은데요. 왜요, 선생님도 제가 미친놈 같으세요?

하하, 농담이에요. 사실 요즘 잠을 거의 못 자고 있어요. 수면제 몇 알만 처방해 주세요. 저번보다 용량 좀 높여서요.

눈을 감으면 어김없이 이해원이 나타났다.

빨갛게 울고 있는 이해원, 햇살처럼 반짝이는 이해원, 집중하느라 쳐다보는 줄도 모르는 이해원, 어린아이처럼 웃는 이해원,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이해원, 이해원, 이해원.

눈을 뜨면 진짜 네가 옆에 있었던 것처럼 상큼한 풋사과 냄새가 가볍게 일렁였다. 일부러 코를 가까이 대고 맡지 않으면 맡아지지 않는 냄새가.

환취인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다가 이 모든 게 꿈이라는 걸 자각한 순간, 숨이 턱 막혔다.

꿈에서 깰까 봐, 너를 보지 못할까 봐. 깨기 싫어 몸부림쳐 봤지만 꿈인 걸 자각한 이상 이미 때는 늦었다. 고통스럽게 심장이 죄었다. 다시 잠드는 게 두려울 정도로. 결국 꼬박 밤을 새웠다.

불면의 시작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벌이다. 네가 계속 외롭길. 언제까지나 나밖에 없길. 바라고 또 바랐던 업보. 뒤틀린 욕구, 비열한 갈망의 끝.

‘몇 시지.’

휴대전화를 확인하자 오후 일곱 시였다. 한국은 오전 여덟 시겠지.

습관적으로 시간을 계산하는 나를 발견하고 쓰게 웃었다. 몸은 이곳에 두고 지구 반대편의 시간을 산 지 오래됐다. 같은 하늘을 이고 있지 않다는 상실감의 발현일까.

수면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도로 서랍 속으로 집어넣었다. 몇 년 전 과량 복용으로 응급실에 실려 갔던 후로는 정말 괴로운 경우가 아니면 자제하고 있었다.

자살 시도를 한 건 아니었는데 엄마는 큰 충격에 빠졌다. 깨어났을 땐 눈물이 가득해선 억지로 웃고 있는 엄마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실망했던가. 이해원이 아니어서.

그때를 생각하자 목이 깔깔했다. 갈증에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저녁을 준비하던 엄마가 애써 웃는 얼굴로 맞이하며 은근슬쩍 우려를 표했다.

“졸업은 해야지.”

“네.”

짤막하게 답했다가 상처받은 엄마의 표정에 이를 물었다.

“논문 학기라 수업이 몇 개 안 돼요. 매일 학교 갈 필요 없어서 그런 것뿐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구나.”

겨우 안도감이 돌기 시작한 얼굴에 안심하라는 듯 한 번 더 웃어 보이고 컵에 물을 따랐다. 그대로 들고 올라가려 하자 불안 섞인 물음이 들려왔다.

“……방에 가서 마시게?”

물이 문제가 아니다. 또 수면제를 복용할까 봐, 지레 겁을 먹은 엄마를 똑바로 쳐다보며 보란 듯이 컵을 비우고 싱크대에 올려놓았다.

“우리 배 여사님, 겁쟁이가 됐어.”

“얘는…….”

모처럼 엄마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졸업하면 엄마랑 같이 여행갈까? 간만에 뉴욕? 아님 그랜드 캐니언은 어때? 하와이도 좋겠다. 어디든 너 가고 싶은 데로 가자. 엄마 휴가 길게 낼 수 있어.”

“대표가 자리를 막 비워도 되나? 응? 넥스트메디텍 대표 배윤경 님, 말씀 좀 해 보시죠.”

“모처럼 가는 거잖아.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렸는데 쉴 때도 됐지. 엄마도 기분 좀 내 보자.”

“음, 그럼 라스베이거스 가서 한탕 크게 땡겨 볼까. 인생 한 방, 알지?”

“엄마 회사가 다 네 건데 그거로는 부족해?”

경영을 이어받길 원하는 엄마의 바람이 은근하게 묻어났다.

하지만 앞날 같은 건 이해원과 공유했던 시간에 멈춰 있다. 함께 미래를 그렸던 이해원이 내 삶에서 나가 버려서, 자연스럽게 내 미래도 지워졌다. 졸업도 마지못해서 하는 거나 다름없는데, 뻔히 알면서도 부모 입장에선 포기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간절하게 올려다보는 눈에 대고 차마 모질게 굴 수는 없는 노릇이라, 억지 미소를 지었다.

“……넘치지. 넘쳐요, 엄마. 그런데 이럴 거면 자식을 둘은 낳았어야지. 아빠는 병원 이을 생각 없냐고 그러는데, 이거 중간에 껴서 좀 난처하네.”

“다시……, 한국 가려고?”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떨어져 계시지만 두 분의 사이는 매우 좋았다. 떨떠름한 반응의 본질은 한국이 아니라 이해원이었다.

다시 그 여자애를 만나려고? 너를 망가뜨린 그 애를? 머릿속에서 멋대로 바뀐 질문을 피해 화제를 돌렸다.

“여행 어디 갈지나 정해 봐요. 엄마 가고 싶은 데면 어디든 갈 테니까.”

***

서커스, 마술, 불 쇼, 수중 쇼까지. 평생 쇼 같은 건 다시 구경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슬슬 라스베이거스의 화려한 밤거리에 질려가고 있었지만, 몇 년 만의 휴가를 제대로 만끽하는 엄마를 위해 인내심을 최대치로 발휘했다. 어차피 내일이면 여행도 끝이었다.

하우스 와인으로 유명한 레스토랑 예약 시간까지는 약 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부지런한 배 여사는 마지막 쇼핑을 즐기며 유능한 수렵꾼처럼 쇼핑몰 구석구석을 누비고 있을 터였다.

마지막 날인 만큼 오후 일정부터는 비서가 동행하는 조건으로 자유시간을 하사받았다. 천만다행이었다. 의식적으로 웃느라 얼굴에 경련이 일 정도였으니까.

아무 데나 걸터앉아 호텔의 분수를 멍하니 쳐다봤다. 가짜 트레비 분수 앞에서 관광객들은 서로 사진을 찍어 주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쩐지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시선을 돌려 천장을 바라보자 이번엔 천장의 인공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고 저기고 전부 거짓이다. 여전히 믿기지 않는, 그래서 거짓이라고 치부하고 싶은 이별부터가.

손을 뻗어 천장을 긁으면 하늘색 페인트가 묻어날까. 내가 현실이라 믿고 있는 지금이 실은 거짓이라는 증거가 되지 않을까. 거대한 영화 세트장 따위에 갇혀 있는 거라고. 어딘가에 숨겨진 문을 찾아 나가면 이해원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어림없는 망상인 걸 지각하면서도 팔을 위로 길게 뻗었다. 아니, 뻗을 뻔했다. 누군가 무례하게 어깨를 치지 않았다면.

“와, 여기서 보네! 진짜 반갑다!”

낯을 찡그리며 천천히 뒤돌아보자 뜻밖에도 고등학교 동창 최인교가 서 있었다. 고등학교 때 얼굴이 어렴풋이 남아 있어 특정하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이해원한테 고백했다가 차이고선 분풀이하듯 욕하던 등신.

“그러게. 별일이네.”

대화를 툭 끊어 내고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여유는 있었지만 달갑지 않은 불청객을 피해 어딘가로 자리를 옮기기엔 애매한 시간이었다. 보아하니 일행도 있는 것 같은데 최인교는 옆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때나 지금이나 말은 많고 눈치는 없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당연히 관광 왔겠지? 너 미국 갔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거기가 라스베이거스였어? 하버드가 라스베이거스에 있었나? 이런, 아니구나. 나도 참, 헷갈릴 걸 헷갈려야지. 그런데 얼마나 머물 예정이야? 시간 되면 같이 저녁이나 할까 하고. 오늘은 쇼 때문에 안 돼. 너도 이거 봤어? 유명하다던데. 남자들은 이게 필수 코스래.”

최인교가 주위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내민 건 여성 스트립쇼 홍보 브로슈어였다. 한심해서 헛웃음이 다 나왔는데, 그걸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인 최인교가 계속해서 치근댔다.

“해준이 넌 뭐가 제일 좋았어? 하나만 추천해 주라. 난 어제 도착했거든. 벌써 천 달러나 잃었다.”

솔직히 라스베이거스에서 좋은 건 늦도록 침대에 처박혀 있어도 걱정 어린 시선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것 한 가지뿐이었다.

물론 이런 개인사를 최인교에게 얘기할 마음은 없었다. 몇 년도 전이지만 어느 정도 선을 긋고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들이대는 것 자체가 짜증스러웠다.

“어머니께서 사업차 잠깐 만날 사람이 있다고 하셔서 들렸어. 내가 회사를 이어받길 원하셔서.”

“아, 그렇구나…….”

들떠 있던 최인교에게 찬물을 확 끼얹자 머쓱한지 나사 빠진 표정으로 웃는다. 어머니께서 바이오 관련 사업주라는 건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미국이나 유럽에선 꽤 인지도 있는 기업이지만 아직 한국 시장에는 진출하지 않아서인 듯하다. 최인교도 영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의대를 때려치웠다고?’

딱할 정도로 어수룩한 최인교의 얼굴에 물음표가 선명했다. 그나마도 차마 뱉지 못하고 눈치만 살피는 모습이 한숨 나올 정도로 한심스러웠다. 어머니의 사업체에 비하면 아버지가 경영하시는 병원은 견주기도 민망할 지경이건만.

어쨌거나 이만하면 대강 분위기 파악하고 꺼져 줬으면 좋겠는데, 또 궁금한 게 생긴 듯 어물거리는 걸 보면 찰거머리가 따로 없었다.

“넌 역시 다르다. 벌써 경영 수업이라니. 하긴, 옛날에도 남다르긴 했지. 그럼 아버지 병원은 안 물려받는 거야? 너무 아깝다.”

이번에야말로 정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이라고. 한 시절 잠깐 엮였던 인연으로 주제넘은 참견할 권리라도 얻은 듯 함부로 첨언하는 게 꼴사납다.

최인교에게 유독 날카롭게 반응하고 있다는 건 알지만, 굳이 참고 넘어갈 이유가 있나? 뭐 대단한 인물이라고.

“좀.”

성가시게 굴지 말고 가던 길 가라고,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잠깐의 틈을 못 참고 최인교가 또다시 혀를 나불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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