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과-37화 (37/77)

37화

그러니 독해져야지. 비에 젖어 네가 앓게 된다 해도 어차피 한 번은 지나야 할 열병이라고. 정해준이 떨쳐내지 못한 미련에 응할수록 이별이 늘어질 뿐이라고. 고통을 연장할 뿐이라고. 그러니 무의미한 짓이라고.

단속하고 또 단속했다. 그마저도 곧 김 여사님의 염려에 바로 풀려 버린 빗장이지만.

“그게, 우산도 안 쓰고 있어.”

“예?”

화들짝 놀라 창으로 달려갔다. 거칠게 열어젖힌 창문을, 정해준이 직시하고 있었다. 시위하듯, 흠뻑 젖은 채. 대번에 시선이 마주쳤다. 정해준의 입가에 옅게 피어나는 미소가 저주처럼 아름답다.

영영 가슴에 새겨질 화인.

정해준의 새까만 두 눈에 피어난 희망을 외면하며 도로 창문을 닫았다. 그대로 벽에 기대 쓰러져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해원 학생…….”

울먹임 섞인 김 여사님의 부름에 귀를 막고 스스로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모진 년. 매정한 년. 피도 눈물도 없는 년.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년. 차라리 죽어 버려.

끓어 넘친 속울음이 흐느낌이 되어 쏟아졌다. 주체할 수 없이 몸이 떨렸다. 발작하듯 파들거리는 모양새에 놀란 김 여사님이 어깨를 쥐었다.

“이게……, 해원 학생, 괜찮아?”

“놔, 놔 주세요.”

누가 잡으러 오는 것도 아닌데 손길을 뿌리치고 침대로 올라 이불을 뒤집어썼다. 웅크린 몸이 절절 끓었다. 꺽, 꺽, 짐승이 내는 것 같은 이상한 소리가 목구멍을 뒤틀었다. 열병의 시작이었다.

마음이 아프면 몸이 아프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지독한 열병을 앓았다. 혼미한 와중에 어쩌다 걸려 온 전화를 받으면 숨죽여 내 기척을 살피는 정해준이 생생히 그려졌다. 처음엔 애원으로 시작했지만, 마지막엔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거짓말이라고 해. 잠깐의 변덕이었다고.

그럼 없던 일로 해 주겠다고. 전처럼 마냥 행복하자고.

꿀인들 이보다 달콤할까. 삼키고 싶어. 너무 달아 결국 받아 내지 못하고 게워내는 한이 있더라도.

그래도 정해준의 말이 약이 된 듯 때아닌 열병은 얼마 지나지 않아 거뜬히 나았다. 허물을 벗은 것처럼 가벼워진 몸이 신기했다. 모래알 같은 밥알이라도 씹으면 그럭저럭 목구멍을 넘어가는 것도. 양치하고, 씻고, 평소처럼 일상을 보내는 내가 낯설어 한참 거울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며칠, 뚝 끊긴 정해준의 연락을 의식하지 않으려 일부러 휴대전화를 멀리했다. 꺼 두었다가 이따금 켜 보기도 했지만…….

“…….”

부재중은 없었다. 짧은 문자조차도 없이 텅 빈 휴대전화를 멍하니 쳐다봤다. 이대로 끝인 건가. 정말?

현실감이 없었다. 허공을 부유하는 것처럼 발밑이 아득하다. 내가 그러자고 했으면서. 헤어지자고, 모질게 끊어 냈으면서. 막상 그리되니 믿기 힘들어 몇 번이고 휴대전화를 확인하는 내가 꼭 미친 여자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정말 우리의 끝을 실감한 건 간밤, 새벽에 걸려 온 전화에서였다.

가슴을 조마조마 졸이며 수신 버튼을 누르자 꿈을 꾸는 듯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해원아, 이해원. 너 좀 안 보이게 해 줘.

무어라 더 얘기할 것 같아 귀를 바짝 붙이고 있는데 별안간 전화가 뚝 끊어졌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이러면 안 된다고 혼잣말을 하면서도 손가락은 정해준의 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황급히 다시 건 전화를 정해준이 받는 일은 없었다.

그때부터였다. 정해준의 물기 어린 음성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재생되기 시작한 건.

누구든 철퇴로 가슴이든 머리든 후려쳐 줬으면 했다. 완전히 망가져서, 슬픔 같은 거 모르게. 그럼 너무 이기적인가. 너 혼자 아프게 두고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건…….

애석하게도 내게 철퇴를, 하다못해 솜방망이라도 휘두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멋대로 외박한 책임도 묻지 않았다. 그 정도 최후의 발악쯤은 얼마든지 보아 넘길 수 있다는 듯이. 아예 그런 일은 없었다는 듯 평화로운 가운데 오도카니 앉아 홀로 시들어 갔다.

해원아.

“응?”

무심코 대꾸하다가 환청이라는 걸 깨달았다. 밀려 나오는 쓴웃음을 훔치며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또 말해 줘. 듣고 싶어.

이해원.

“응, 나 여기 있어.”

실성한 여자처럼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곧바로 들려온 환청엔 더 이상 웃어지지 않았다.

너 좀 안 보이게 해 줘.

“…….”

기이하게 길어진 입매가 그대로 굳었다. 비로소 보였다. 안 보이게 해 달라는 속뜻이.

너는 나를 잊으려 하는구나. 단념한 거야.

억장이 무너진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았다. 가슴이 저미는 게 어떤 느낌인지, 너무 기가 막히면 숨도 따라서 막힌다는 것이, 너무 슬프면 엉엉 소리 내어 울고 싶어도 신음 한 줄기 흘릴 수 없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너를 잃어서 알게 된 게 많았다.

***

낮과 밤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그 때문인지 쨍한 여름 햇볕에 지끈지끈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오래 갇혀 있다 나온 사람처럼 눈살을 찡그리며 내 것 같지 않은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가 정해진 게 아니라 꼭 몽롱하게 환상을 헤매는 사람처럼.

사물함에 든 내 물건을 정리하러 가는 길이었다.

전공 책 몇 권과 실험복 따위가 들어 있을 터였다. 딱히 미련이 남은 물건들은 아니었지만, 휴학계를 접수하자 다음 학기에 쓸 학우들을 위해 사물함을 비워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이게 맞나.

차라리 버려 달라고 할까도 생각해 봤지만, 누군가의 손에 처분될 내 물건들 위로 나에 대한 뒷얘기가 오고 갈 상상을 하자 끔찍해져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죽기 전 유품을 정리하는 사람의 마음이 이럴까.

과한 비약이었다. 하지만 심정은 그에 다르지 않았다.

나는 홀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비틀대며 헤쳐 가는데 세상은 조롱처럼 반짝였다. 사방이 너무 환해서,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밝아서 강의를 듣느라 수없이 오르내렸던 비탈길마저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정말,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불명확했다. 그런 주제에 의대와 자연과학대 사이를 가로지르는 좁은 길에서는 의식적으로 주위를 신경 쓰지 않으려 애썼다. 아는 사람이라도 만날까 가슴을 졸이며.

다행히 학과 건물은 여름방학을 맞아 한산했다. 계절학기가 개설되긴 했지만, 강의동은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사람이 빠져 고요하기까지 한 복도를 지나 사물함이 모여 있는 과실로 천천히 향했다.

과실에도 아무도 없긴 매한가지였다. 혼자 있으니 편히 할 일을 해도 될 텐데, 꼭 도둑질이라도 하는 것처럼 불안했다. 박탈당한 소속감 때문이라는 깨달음은 사물함의 차가운 금속 표면에 손가락이 닿았을 때 불현듯 찾아왔다.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다 지나갈 거야.

“어…….”

습관처럼 되뇌며 자물쇠를 풀려다 자각할 새도 없이 눈물이 먼저 터졌다.

비밀번호 127.

고등학교 졸업식 날이자 우리가 처음 사귀기로 한 날.

학기 초, 문구점에 들렸다가 어떻게 날짜가 딱 맞아떨어지는 게 있냐고, 신기해하며 누가 먼저 사 갈까 봐 계산할 때까지 자물쇠를 손에 꼭 쥐고 놓지 않았던 정해준이 떠올랐다.

“흑…….”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과실 바닥에 주저앉아 어엉,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쏟아냈다. 최근엔 아무리 정해준을 떠올려도 눈물이 나오지 않아서 이제 이별에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그러니 너 없는 세상에서도 어떻게든 잘 버틸 거라 생각했는데 오만이었다.

무덤덤한 일상 같은 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다. 희망을 버리는 게 차라리 낫다. 절망하고 또 절망해, 이해원.

눈이 짓무르도록 눈물을 쏟아내며 염치없이 품은 미련마저도 끊어내 버렸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마무리할 의지가 생겼다. 최악만 남아 있을 거란 가정이 역설적으로 슬픔을 가라앉혔다.

비틀거리며 일어나 사물함을 정리했다. 안에 든 물건을 모두 꺼내도록 아무도 오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처량하게 흐느끼며 부자연스레 움직이는 모양새를 봤다면 아무리 아는 얼굴이라도 깜짝 놀랐을 테니까.

겨우 짐을 수습해 나왔을 땐 해도 기울어 있었다. 상실의 무게만큼 길어진 그림자를 따라 걷다가 어디선가 느껴지는 시선에 우뚝 멈춰 섰다. 무심코 시선을 들었다가 심장이 끝없이 추락했다.

“…….”

“…….”

좁은 사이길 끝에, 거짓말처럼 정해준이 서 있었다. 선뜻 다가오지도 않고, 그렇다고 피하지도 않으며 그저 시선만을 맞추며 그렇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이었다. 동시에 공허하기도 했다. 끝나 버린 관계란 이런 거였다. 절단면이 예리하든 거칠든 공백으로 남아 버린 감정의 잔재.

허망한 시선에 가슴이 옥죄어, 먼저 눈을 돌린 건 나였다.

어차피 둘 사이에 나눌 말은 더 이상 없었다. 다시 이별의 이유를 묻고 답하기엔 너무 시간이 지나 버렸다. 설령 지난 과정을 반복한다 해도 똑같이 외면과 침묵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을 테지만.

석상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정해준의 곁을 아무렇지 않은 척 지나쳤다. 평정을 가장했지만 구역질이 솟구칠 정도로 가슴이 떨렸다. 너무 크게 뛴 나머지 심장이 꼭 바닥에 팽개쳐진 것처럼 욱신거렸다.

문득 돌아본 그 자리에 정해준은 이미 없었다. 빈자리를 확인하자 갑자기 속이 메스꺼웠다. 허겁지겁 근처 건물로 뛰어 변기를 부여잡고 토악질했다. 터질 것처럼 얼굴이 빨갰다. 온통 시큼한 입 안을 헹구며 자책했다.

뭘 바란 건데.

그렇게 단념하겠다고 다짐했으면서, 정해준이 지나는 나의 팔꿈치를 붙잡아 세우진 않을까. 하다못해 이름이라도 부르지 않을까, 헛되이 상상했다.

언제나, 언제나 정해준이 먼저 내 삶 속으로 걸어 들어와 줘서. 전학 온 날 내 옆자리로 올 때도, 언제 어디에서건 나를 발견하면 성큼성큼, 망설임이라곤 없는 시원한 걸음걸이로 내게 와 줘서.

머릿속으론 의미 없이 이유를 찾았다. 더불어, 우연한 만남의 의미를.

따져보다 뒤늦게 정해준이 의예과는 방학이 다른 과보다 늦다고 투덜거리던 게 떠올랐다. 그렇게 보면 놀라운 일도, 운명 같은 만남도 아니었다. 동선이 겹쳐서 종종 마주치는 건 학기 중에도 흔한 일이었으니까.

머저리.

스스로를 향해 비웃음을 날리고 나니 멍해졌다. 와중에 세면대에 고이 쌓아놓은 전공 서적이 눈에 들어왔다. 저딴 게 뭐라고 꾸역꾸역 미련스럽게 찾으러 왔나. 남들이 뭐라고 떠들든 어차피 내 귀에 들어오지 않을 거, 그딴 게 무슨 대수라고.

“웃겨, 아주.”

갑자기 미친 여자처럼 책들을 그러모아 쓰레기통에 처넣어 버렸다. 부피가 작아 가방 속에 챙겨 둔 필기구, 실험복, 실험 노트도 싹 꺼내 훌훌 털어 버렸다.

더 버릴 게 없나, 남김없이 소지품을 그러모으던 손가락 끝에 묵직한 고리가 걸렸다.

“…….”

자물쇠였다.

몇 번, 쓰레기통 위에서 자물쇠를 쥔 주먹을 모았다 폈다. 수 없이 망설였지만 전공 서적이 떨어질 땐 잘만 들리던 둔탁한 소리가 다시 울리는 일은 없었다.

잔인한 현실을 일깨우듯 차가운 금속 모서리가 손바닥에 싸늘하게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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