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아.”
정말 신성한 숲이라면 무엇이든 빌고 싶다고, 간절한 마음으로 돌아본 것과 다르게 정해준은 어딘지 모르게 조금 멋쩍은 모습이었다.
“왜……?”
어디 불편한가 싶어 안색을 살피려다 꽉 붙잡혀 안겼다. 숨 막히게 나를 그러안은 정해준의 호흡이 거칠었다. 단단히 발기한 둔기가 등허리를 찌르고 있었다. 그제야 정해준이 어색해하던 이유를 알았다. 신성한 숲에 어울리지 않는 불순한 신체 반응 때문이라는 걸.
“안고 싶어 죽겠는데, 차 안에선 이렇게 못 안으니까.”
필사적으로 참았던 듯 긴 한숨이 목덜미로 쏟아졌다. 이처럼 뜨거운 네 품에 안겨서 가슴 한구석이 아프도록 시린 게 희한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벌써부터 이렇게 아프면. 닥쳐올 시련 따위 잠시 밀어두고 지금은 너만 담기도 모자란 시간인데.
“이럴 때가 아닌데.”
마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정해준이 숨을 크게 몰아쉬기를 반복했다. 풍경이 멋진 맛집도 가야 하고, 둘만의 추억으로 가득한 사진도 잔뜩 남겨야 한다고.
심호흡이 효과가 있었을까. 아쉬움 가득한 한숨을 마지막으로 줄곧 어깻죽지에 묻혀 있던 정해준의 고개가 겨우 떨어졌다.
“이러다가 곧 성인의 반열에 오르겠어.”
자신의 자제력을 스스로 칭찬한 정해준이 손을 가만히 감아쥐었다.
“조금 더 걷다 가자.”
“그럴까.”
이 또한 오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겠지. 고작 나 한번 끌어안아 보겠다고 급하게 차를 세운 숲길이나, 청량한 공기를 흔들며 뜨겁게 섞여들던 네 숨결, 고운 흙이 걸음마다 부드럽게 뭉개지는 감촉.
할 수만 있다면 천형처럼 몸에 새기고 싶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나아갔다.
제주는 시간이 빨리 흐르나.
석양 무렵부터 황홀하게 아름다운 바다를 만끽하다 어느새 별들이 총총한 하늘을 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시간에 꼬리가 있다면 꽉 잡고 놓아주지 않을 텐데. 애타는 속도 모르고 정해준은 사진을 찍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그만 찍어.”
쓰고 있던 귤 모자를 벗어 얼굴을 가렸지만 그것마저 귀엽다고 연신 사진을 찍어 대던 정해준이 가린 팔을 떼어 내며 부러 화난 척했다.
“자꾸 이러기야?”
“나 보지 말고 바다 보라고 그러지. 이렇게 멋진데 안 봐 주면 바다가 서운해할걸?”
바다가 서운하단 표현이 재미있다고 쿡쿡 웃던 정해준이 손에서 모자를 빼앗아 머리에 다시 씌워 주며 진지하게 따지고 들었다.
“그럼 네가 귀엽질 말든가.”
대답 대신 그냥 웃고 말았다. 그래도 더는 사진을 찍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이미 정해준의 휴대전화에 남은 수십 장의 사진이 차곡차곡 쌓여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애써 나와의 추억을 잘 담아내려 들인 노력이 모두 헛수고가 될 테니. 기억보다 먼저 지워질 철 지난 감정의 잔재.
“그냥, 이렇게 서로 보고만 있으면 안 돼? 이 순간 그대로 간직하고 싶어.”
다시 구도를 잡는 정해준의 팔을 잡으며 안기듯 가슴에 폭 기댔다. 기막혀하는 정해준의 헛웃음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간질였다.
“너 가끔 되게 여우 같은 거 알지.”
“모르겠는데.”
“지금 알려 주잖아. 나 말고 다른 놈들한테 여우 짓 하지 말라고.”
“안 할게.”
순순히 끄덕이자 이건 이것대로 앙큼하다는 중얼거림이 돌아왔다.
“어디다 맞추라고.”
새침하게 대꾸하자 정해준이 급하게 입술을 맞춰 왔다. 저 말고 다른 답은 없다는 듯이.
입술이 통통하게 부풀도록 숨을 섞고 난 뒤엔 해변에 나란히 앉아 돌을 주워 던졌다. 처음엔 심심풀이로 하던 것이 나중엔 꽤 재미있어졌다. 정해준이 물수제비를 그럴듯하게 던지고 난 후에는 내가 더 흥분해 납작하고 동그란 돌을 모으러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중 표면이 매끈한 돌 하나를 골라 던져 올렸다 받기를 반복하던 정해준이 문득 손장난을 멈추고 궁금해했다.
“너와 내가 동시에 던진 돌이 이 넓은 하늘에서 부딪힐 확률이 얼마나 될까.”
“불가능하지 않을까.”
“그럼 네가 던진 돌을 내가 맞추는 건.”
“글쎄. 그건 조금 가능성 있을지도. 그래도 어렵지 않을까.”
엄지손가락보다 조금 큰 돌을 일부러 맞추는 것도, 허공에서 우연히 맞닿는 것도, 우열을 가릴 수 없게 만만찮아 보였다. 어째서 뜬금없이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정해준의 낯에 슬며시 장난기가 번졌다.
“얘는 이해원.”
돌무더기에서 유난히 동그랗고 반질반질한 돌을 골라 내 손에 쥐여 준 정해준이 자신은 조금 크고 묵직한 돌을 골라냈다.
“얘는 정해준.”
“뭐 하게?”
“이거 던져서 만약 얘네 둘이 뽀뽀하면 천생연분.”
“못하면?”
“못하면 우리 둘이 뽀뽀하면 되지.”
싱거운 대꾸에 웃으며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섰다.
“셋에 던지는 거다, 하나, 둘, 셋!”
“셋!”
동그란 이해원 돌이 하늘 높이 떠올랐다. 거의 동시에, 웅크려 있다 먹이를 발견하고 비상하는 솔개처럼 정해준 돌이 날쌔게 이해원 돌을 향해 날아들었다.
딱!
하늘을 가르듯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순간 번쩍! 불꽃이 튄 것도 같았다. 맞부딪친 돌은 동시에 바다로 퐁당 떨어졌다. 얼빠진 탄성은 물보라가 가라앉을 즈음에 터져 나왔다.
“어…….”
이게 정말 가능하다고?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얼떨떨하게 앉아 있는 사이 정해준이 환호했다.
“봤어? 봤지!”
“어? 어…….”
“우린 진짜 천생연분인가 봐.”
감격한 정해준이 내 허리를 번쩍 들어 안아 올렸다. 그대로 시야가 빙그르르 돌았다. 달빛이 비늘처럼 반짝이는 바다도, 짙은 보랏빛 융단을 깔아놓은 것 같은 밤하늘도, 중심에 놓인 정해준도, 모두 아름다워서 설핏 눈물이 맺혔다.
천생연분이라니. 그걸 믿어 의심치 않으며 기뻐하는 정해준이라니.
이건 너무 가혹하다.
“왜 울어. 응?”
“아니, 아무것도. 진짜 그랬으면 좋겠어서.”
작게 느껴 우는 나를 보며 정해준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그럴 건데 뭐가 걱정이냐는 듯.
“그냥, 내가 좀 감상적이 됐나 봐.”
“귀엽기는.”
조심스럽게 이마에 대고 눌러오는 정해준의 입맞춤을 받으며 설운 눈으로 정해준 돌과 이해원 돌을 품은 바다를 흘겼다.
찾을 수만 있다면 바다에 뛰어들어 두 돌을 꺼내와 알을 품은 새처럼 그것들을 애틋하게 간직하고 싶었다.
이뤄질 수 없는 염원이라 해도.
***
으레 깊어질 밤을 예상했는데, 정해준은 샤워가운을 단단히 여민 채 벗을 생각을 않았다. 허리끈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리자 의도를 알아챈 정해준이 손을 잡아떼며 깍지를 꼈다. 서운한 눈초리 끝을 살살 쓰는 손길이 눈물 나게 다정했다.
“너 첫 여행이잖아. 그냥 즐기기만 해. 그러려면 체력 아껴야지.”
그렇게 배려해 주지 않아도 되는데. 그런 섬세한 마음 씀씀이, 받을 자격 없는 사람인데, 나.
손깍지를 슬쩍 빼곤 상체를 틀어 정해준의 위를 점했다. 흥미 짙은 눈길을 의연하게 받으며 손날로 가운 틈을 파고들었다. 탄탄한 복근을 위아래로 어루만지자 손이 놓인 부근보다 한 뼘쯤 아래가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낮게 가라앉은 신음을 흘린 정해준이 움직이는 손목을 잡아 세웠다.
“해원아.”
욕망이 절절 끓는 눈빛을 하고서, 그럼에도 자제하려고 노력하는 정해준을 계속 도발했다. 이것조차도 상처로 남을 기억이겠지만, 이기적인 걸 알면서도, 욕심인 걸 알면서도. 그래도 정해준을 기쁘게 해 주고 싶었다.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거란 고작 이런 것뿐이어서…….
“이것도 즐기고 싶으면?”
손가락을 골반으로 죽 미끄러트리자 정해준이 헛웃음을 지었다. 기막혀하는 시선을 피하며 벌어진 가운 자락 밑으로 얼핏 보이는 우람한 음영에 눈길을 꽂았다. 들릴락 말락 아쉬운 한숨을 내쉬며. 눈치 빠른 정해준은 이조차 계산된 행동임을 바로 알아챘다.
“내가 얼마나 괴롭힐 줄 알고 이렇게 요망하게 굴어. 후회할 텐데.”
“후회하게 해 줘.”
대답 없이 정해준이 이를 악물었다. 나는 진심인데. 그렇게 살펴보지 않아도 너무나 원한다고. 읽어 볼 테면 얼마든지 읽어 보라고 속을 캐듯 뚫어지게 쳐다보는 두 눈을 마주했다. 도리어 시선을 피한 정해준이 황당한 웃음과 함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옆얼굴이 그린 듯 아름답다. 다시 내게로 돌아온 시선이 진득하게 들러붙었다. 새까맣게 가라앉은 눈이었는데 이상하게 밝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검은 동공 저 너머에 무언가 타오르는 것 같아서…….
“넌 가끔 되게 의외인데, 그게 또 싫지 않아서 큰일이다.”
“의외라고?”
“찬바람 쌩쌩 불게 생겨선 완전 순해 빠졌고.”
“…….”
“또 겉만 봐선 바늘로 찔러도 안 들어갈 것 같은데 속은…….”
“아……!”
순식간에 자세를 뒤집은 정해준이 별안간 손가락을 질구에 푹 찔러 넣었다. 정확하고 군더더기 없는 동작이었다. 예고 없는 침입에 허리가 움찔 튀면서 주먹 하나는 들어갈 정도로 바닥과 사이를 띄웠다.
“이렇게 무르고.”
파고든 손가락이 곧장 느끼는 지점을 찾아 강하게 문질러 댔다. 순식간에 눈앞이 하얗게 번졌다. 엉덩이를 요분질하듯 들썩거리며 끙끙 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