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그 시선에 힘입어 물었는데, 엄마는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처럼 꾹 다문 입에 수렁에 빠진 양 발밑이 서서히 꺼지는 절망감이 엄습했다. 아까는 잘만 그래 주면 좋겠다고, 이소원의 아기를 나한테 떠넘겼으면서.
오기가 생겼다. 꼭 듣고 말 거야. 그리고 잊어버릴 거야. 다신 떠올리지 않을 거고, 궁금해하지도 않을 거라고.
“왜……, 도대체 왜요?”
“그게 중요하니?”
겨우 두 마디 들었다. 하지만 원하던 답은 아니었다. 맥이 탁 풀리려는 걸 주먹을 꼭 쥐어 가며 참았다.
“네, 저는, 저한테는 중요해요. 그러니 들어야겠어요. 전 엄마가 아빠를.”
너무 사랑해서, 그 자식인 나를 차마 버릴 수 없어서. 그런 답을 기대했다면 너무 이상적인 걸까. 그렇다 해도 내가 짐작할 수 있는 이유란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아빠를 꺼내든 순간, 엄마의 얼굴엔 이미 균열이 가 있었다. 괴로운 듯 미간을 찡그리고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엄마가 마침내 답을 내놨다.
“벌 받을까 봐.”
“벌……이요? 누구한테요?”
생뚱맞게 벌이라니, 누가? 고인이 된 아빠의 영혼이 벌주기라도 한다는 걸까? 내 딸 왜 안 돌보냐고?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황당해서 얼떨떨한 채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설마, 아빠한테요?”
혹시 그런 건가? 나중에 하늘나라에 갔을 때 아빠 볼 낯이 없다든가 하는…….
혼자서 합당한 이유를 찾기 위해 그럴듯한 가정을 수없이 떠올렸다 지웠다 반복하고 있을 때 엄마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왕 얘기한 거, 그냥 다 털어놓겠다는 듯이.
“그냥……, 미신 같은 거야. 널 버리면 우리 소원이가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아님, 소원이 복을 네가 갖고 갈까 봐.”
“…….”
“왜, 그런 말도 있잖아.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면 내 눈엔 피눈물 난다고.”
본인이 얘기하면서도 머쓱한지 엄마가 설핏 웃음을 흘렸다. 고작, 고작 그따위를 나를 버리지 않은 이유라고 받아들여야 하는 내 반응은 안중에도 없이.
“그러니까……, 액막이 같은 거였네요.”
액막이? 따라서 중얼거린 엄마가 곧게 수긍했다.
“그래. 부적 같은 거. 착한 일 하면 우리 소원이한테 하나라도 복이 돌아가겠지 싶고.”
착한 일. 오갈 곳 없는 아이를 거둬서 행여나 있을지 모를 액땜으로 삼는 일.
갑자기 그간 이해할 수 없던 엄마의 모든 행동이 딱딱 맞아떨어졌다. 나와는 아예 대화를 하려 하지 않았던 점이나, 그러면서도 생활 일체를 지원해 준 점. 처음부터 그녀에게 나는 완벽한 타인이었다. 아빠에게 호감을 살 수 있는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 아빠가 사라졌으니 무용해진 여자애는 불길한 존재였다. 행여 버렸다가 재수 옴 붙을까 봐, 개도 키우는데, 하는 심정으로. 이 집에서 여자아이 하나 키운다고 해서 크게 재산이 축나거나 품이 드는 것도 아닐 테니.
“재밌네요.”
힘없이 비꼬았다.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알 수 없어서, 알고 싶어서, 조금이라도 엄마의 속을 헤아려 보고 싶어서 불면으로 지새웠던 밤들이 무수히 허무했다.
어쩌면, 이상적이라고 해도 내가 생각한 것처럼 아빠를 사랑해서 그런 게 맞다고, 그의 딸인 나도 당연히 품을 수밖에 없었다고 확인해 주길 은연중에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게 설령 거짓이라 해도. 그럼 이소원의 아기도 기꺼이 내 책임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고.
오만이었는지 모르겠다. 누구 말마따나 분수도 모르고. 사람 취급도 못 받는 주제에.
기운 없이 일어나 비척비척 걸음을 옮겼다. 복도 끝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소원이 달려들어 캐물었다.
“엄마랑 단둘이 무슨 얘기했어?”
엄마의 사랑을 내게 빼앗겼다며 울고불고하던 어린 이소원의 젖은 얼굴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자기가 어떤 사랑을 받고 있는지도 모르고.
“비켜.”
“무슨 얘기 했냐니까! 야!”
끝까지 말해 주지 않을 테다. 심술 같은 건 아니었다. 그냥, 비참하니까. 나는 이소원 너의 살아 있는 부적 같은 거였다고. 그러니 마음 놓으라고. 엄마가 정말 사랑한 건 너뿐이었다고. 그런 걸 내 입으로 낱낱이 고하는 건 너무 잔인하지 않나.
상대 않고 들어가서 문을 걸어 잠그자 분을 이기지 못한 이소원의 폭언이 쏟아졌다. 웅크려 앉아 귀를 막았다.
때마침 걸려 온 정해준의 전화를 받을 생각도 못 한 채. 진동이 끊긴 후에 남겨진 부재중 전화 표시에 걷잡을 새 없이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
다분히 충동적인 제안이었다. 기대했던 미국행이 어그러진 정해준을 위해 무어라도 보상을 해 주고 싶었다.
“여행 갈래? 아니, 가자. 여행 가자. 대신 국내로.”
“얘기 잘 안됐구나.”
“응…….”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하는 내게 정해준은 언제나 그렇듯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럼 해외는 다음에 가자,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고 바로 국내 여행 일정을 짜기 시작했다.
기말고사를 고려하면 시간이 촉박했는데도 마치 준비해 두고 있었던 것처럼 명소와 맛집 리스트를 길게도 뽑아 와 내밀었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나눈 일정도 있었다.
“골라 봐.”
어디로든 떠나자고 말을 꺼내자마자 순식간에 비행기표를 예매한 행동력도 놀라웠는데, 세심한 준비에 혀를 내두르며 동선 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리스트를 받아 들었다. 만 2일이 채 안 되는 시간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잘 모르겠어.”
선택지가 너무 많았다. 각종 테마파크도, 승마나 카누 같은 체험도, 크게는 해산물과 육류로, 그 안에서 작게 한식, 일식, 중식, 양식으로 나뉘는 식당도.
“넌 어디가 마음에 드는데?”
“여기.”
정해준이 태연하게 한 점을 찍었다. 성인 전용이라는 부가 설명에 의아해 검색했다가 민망한 사진만 한가득 떠 황급히 검색화면을 닫았다.
“……진짜?”
“뭘 그렇게 놀라.”
아연해 바라보자 정해준이 짓궂은 표정으로 상체를 바짝 붙이고 귓속말했다.
“굳이 보러 갈 필요 있나? 직접 해 보면 되지.”
진짜, 틈만 나면 놀려먹고……. 어쩜 이러나 싶어 있는 힘껏 정해준을 흘겨보면서도 귀까지 빨갛게 열이 오르는 건 막지 못했다. 잠시 가슴 속을 가득 채운 우울한 기분이 걷히기도 했다. 그러자 먹구름이 물러가면 주위가 훤히 보이듯이 내가 원하는 게 명확히 보였다.
“그냥 바닷가에 가고 싶어. 가만히 앉아서 바다만 봐도 좋을 것 같아.”
온갖 현란한 것에 눈 두지 않고 오롯이 정해준만 담고 싶었다. 오래도록 잊히지 않도록 눈에 마음에 몸에…… 온통 너를 새기고 싶었다.
“그럼 여기 가자.”
별 고민 없이 정해준이 섬의 동쪽을 찍었다. 성산일출봉, 광치기해변, 섭지코지……. 지도를 따라가며 독특한 명칭을 읽는 동안 정해준은 바로 근처의 호텔을 예약했다.
예정에 없던 여행이었는데도 라운지에 나란히 앉아 날아오고 날아가는 비행기를 여유롭게 구경할 수 있는 건 순전히 정해준 덕분이었다. 커피 한잔을 다 비워갈 때쯤 우리가 예약한 편명의 비행기 탑승을 위한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꼭 신혼여행 가는 것 같다.”
정해준의 들뜬 중얼거림에 여행지에 대한 기대감으로 잠시 붕 떴던 마음이 추를 매단 듯 도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정해준은 애틋하게 여기는 여행을 나는 이별의 종착지로 삼았다.
설렘이 떠난 자리에 죄책감이 똬리를 틀었다. 슉, 슉. 날카로운 독니를 드러내며 말랑하고 예쁜 감정을 온통 시커멓게 물들였다.
“응. 좋다.”
그래도 웃었다. 음흉한 속내를 감춘 사악한 뱀처럼.
***
제 차가 아닌데도 정해준은 능숙하게 운전했다. 운전할 때 정해준 특유의 여유로운 분위기가 있었다. 느긋하게 젖힌 상체라거나, 살짝 기울인 고개, 운전대를 가볍게 쥔 손 같은 것들. 비탈길이 많아 기어를 조작할 때마다 손등의 힘줄이 불거졌다 가라앉았다 하는 모양을 홀린 듯 지켜봤다.
정신이 든 건 운전석에서 가볍게 터진 웃음 때문이었다.
“왜. 너무 멋있어?”
“아……, 응.”
얼빠진 모양새로 끄덕이자 정해준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오늘따라 이상하네, 이해원.”
“뭐, 뭐가?”
의미심장한 눈빛에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뛰었다. 얼결에 속마음을 내색할 만한 짓을 했나? 쿵쿵 울리는 심장박동에 두통이 일 지경이었다.
“뭐긴. 평소보다 예쁘니까 하는 말이지.”
“아…….”
“너 진짜 왜 이렇게 예쁜 짓 해. 누구 숨넘어가는 꼴 보려고. 응?”
그냥 운전하는 모습이 멋있다고 한 것뿐인데, 황송할 정도로 기뻐하는 정해준을 보며 손끝이 싸늘하게 식었다. 이런 너에게 난 대체 무슨 짓을…….
며칠만이라도 둘이서 멀리 떠나 있고 싶다는 바람은 품어선 안 될 욕심이었을까. 이미 되돌리기엔 늦은 선택을 후회하는 사이 차가 숲길 가에 멈춰 섰다.
“잠시 걷자.”
아름다운 숲길이었다. 사려니 숲이라는 이름도 예뻤다. 안개 자욱한 숲에서는 요정이 튀어나와도 이상할 것 같지 않았다.
“신성하다는 뜻이래. 사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