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과-31화 (31/77)

31화

‘혹시…….’

엄마는 내 손을 들어 주고 싶은 게 아닐까. 아무래도 이건 너무 부당하니까. 갑자기 엄마가 어릴 때 구워 주었던 쿠키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환각이란 걸 자각했지만 그리웠던 냄새에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엄마가 나를 대신해 할머니와 맞서는 일은 없었다. 무력한 그녀에게 보호를 바라는 건 너무 이상적인 상황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쉬이 포기할 순 없는 건, 나를 보는 눈이 너무 애절해서…….

“엄마는요……?”

나도 모르게 마음속 질문이 툭 튀어 나갔다. 뜻밖이었는지 엄마의 해쓱한 얼굴에 당황스러운 기색이 스쳐 갔다. 어쩌면 당연했다. 지난 몇 년간 엄마와 나는 대화다운 대화를 거의 나누지 않았으므로.

시선을 마주하는 것도 어색해하는 엄마와 나 사이에 긴장 섞인 침묵이 이어졌다. 머뭇거리던 엄마가 입을 연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건 예감이었을까. 불길한 예감.

“그래 주면.”

“…….”

“고맙겠구나.”

“고맙……다고요?”

그나마 고맙다는 말이라도 들어서 다행인 건가. 얼떨떨한 기분으로 멍하니 조금 전의 짧은 대화를 되새김질했다. 난 뭘 기대했던 거지. 시선 한번 던져 줬다고 어처구니없는 희망을 품다니. 반발 의지를 상실한 내게 거보란 듯 입매를 묘하게 비튼 할머니가 다시 끼어들었다.

“조만간 휴학해라.”

“휴학은 왜…….”

“사람들이 믿게끔 해야지. 나돌아다닐 거 다 다니면 애 낳은 행세는 언제 할 거냐.”

누가 여길 찾아와 들여다보는 것도 아닌데 말하다 말고 괜스레 주변을 살피는 걸 보면 어지간히 남들의 시선이 두려운 듯했다. 그렇게 남부끄러운 짓을 내게 씌우는 건 조금도 부끄럽지 않게 여기면서.

“…….”

“사귀는 놈하고도 당장 헤어지거라. 네 주제에 연애가 가당키나 하더냐? 멀쩡한 남의 집 자식 신세 망칠 작정 아닌 다음에야. 그래봤자 오죽 변변찮은 놈일까마는, 쯧.”

절대 울고 싶지 않았는데, 이런 인간들 앞에서 그런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정해준을 떠올린 순간 굵은 눈물방울이 무게를 못 이기고 주르륵 떨어져 내렸다. 형편없는 내 처지 때문에 정해준과의 미래를 쉬이 그려보진 못했지만 그 어디에도 이런 끝은 없었다.

“나중에라도 대학은 졸업시켜 줄 테니 너무 섭섭하게 생각 말거라. 하긴 이만큼 키워 놨으면 섭섭할 게 무어 있겠느냐마는.”

키워 놓다니, 누가? 누가 날 키워 놨지? 방치와 무관심으로 일관했으면서. 말 그대로 식사와 잠자리뿐이었으면서.

아이는 물만 주고 내버려 두면 저절로 자라는 식물이 아니잖아. 식물조차도 따스한 햇살하고 때때로 찾아와 주는 바람이 필요한 거잖아.

당신들이 언제 내게 햇살이 되고 마음을 간질이는 바람이 되어 주었나. 뻗어나는 가지를 꺾고 채 피지 못한 꽃봉오리는 꺾었을지언정.

꽃은 무슨.

숫제 싹을 밟지 않았나. 조금이라도 기가 살까 자근자근. 지난 냉대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더는 무력하게 밟히고 싶지 않았다. 그간 밑바닥을 흐르는 물처럼 꾹꾹 눌러 왔던 설움이 불같은 분노가 되어 일어났다.

가슴이 활활 타오르자 머리는 도리어 차가워졌다. 더없이 차분하게 가라앉아선 눈물 젖은 눈가를 쓱 훔쳤다. 지금은 울 때가 아니라 결정을 내릴 때였다.

이렇게 살 바엔 차라리.

“지금 주세요, 돈.”

저들 말처럼 먹고 떨어져 나가는 것이 더 나은 삶이 아닐까.

“무어……? 너 지금 뭐라고 했니?”

“솔직히 못 믿겠어요. 나중 가서 또 무슨 소리가 나올지……. 그냥 확실하게 돈으로 받고 싶어요.”

이런 말을 태연하게 뱉는 게 정말 내가 맞을까. 앞으로 나는 어떤 생을 겪게 될까. 순탄치 않겠지. 독기 어린 자신이 얼떨떨하고 낯설어 자문하다가 스스로 내린 답에 마음을 다잡았다.

“이소원 아이 맡기려거든 학비랑 생활비, 양육비, 한 번에 정산해 주세요.”

“정산? 하!”

바람 빠진 소리를 낸 노구가 허물어지듯 의자에 기댔다. 바통을 이어받듯이 이소원이 새된 소릴 질렀다.

“야, 이해원! 너 돌았어? 정산은 무슨 정산? 너나 정산해. 그동안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재워 준 값!”

“조용히 해. 네 이름 기사에서 보고 싶지 않으면.”

“뭐라는 거야?”

“세이프온리 설립자 손녀가 재수생 주제에 사고 쳐서 미혼모 됐다는 기사.”

“뭐, 뭐? 야, 이 미친년이 진짜! 너 아주 눈깔에 뵈는 게 없나 봐? 막가자는 거야 뭐야?”

새 생명을 잉태한 임신부가 입에 담기에는 험악한 욕설이 연달아 쏟아졌다. 신경 쓰지 않았다. 이소원을 자극하려고 꺼낸 말이 아니니까. 여론을 타는 업체는 아니지만, 남의 이목을 중시하는 할머니의 성격상 그냥 넘어가지 못할 걸 알아서 한 소리였다. 아니나 다를까, 노성이 터졌다.

“이 배은망덕한 것! 네 지금 어디라고 그딴 소릴 지껄이는 거야!”

은혜도 모르는 계집이라고, 늘 듣던 소린데, 그렇게 되지 않으려 그렇게 스스로를 다잡고 노력했는데,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이제 진짜로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었다. 웃을 듯 말 듯 실룩이는 볼을 살짝 깨물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해요. 이진헌 핏줄이라서 어쩔 수가 없나 봐요.”

오랜만에 아빠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이 집에서는 금기와 다름없던 이름 석 자를. 왜 그동안 자주 부르지 못했을까. 뱉고 나니 아무것도 아닌 것을.

“따로 살 집도 마련해 주세요. 그럼 인연 끊어 주는 대가로 입 다물고 조용히 살 테니까.”

“인연을 끊어? 감히 그런 말을 해!”

왜 화를 내지? 바라는 바 아니었나? 나를 떼어 내지 못해 안달이었으면서. 당혹스러워하는 사이 격분한 할머니가 밭은 숨을 몰아쉬며 고함쳤다.

“누가 할 소릴!”

연 끊기 싫다는 뜻인가 싶어 잠시나마 어안이 벙벙했던 스스로가 우습다. 나와의 연을 끊을 자격은 본인들에게만 있는 줄 알았다가 감히 내가 먼저 말을 꺼낸 게 몹시도 분한 것뿐이었는데. 감히 나 따위가 의견을 내서, 고분고분하게 굴지 않아서.

하지만 지금 칼자루를 쥔 건 나였다. 한동안 할머니의 씨근덕거리는 숨소리와 약 오른 이소원의 징징거림이 이어졌지만, 결국엔 내 뜻이 받아들여졌다.

“알겠다.”

“…….”

“학비와 생활비, 육아비용 일체를 계산해서 네 통장에 넣어 주마. 따로 살 집은 마련해 주되 네 명의론 안 된다. 중간에 아이를 돌려보내거나, 아이의 생모가 소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당장 쫓겨날 각오해야 할 거야. 알겠니?”

“네.”

“계약서는 마련해 두마. 서로를 위해 그편이 좋을 것 같구나.”

“알겠습니다.”

“이 집에서 나가는 시기는……, 네가 정하거라. 갓난아기는 손이 많이 가니까 도움이 필요하면 더 있어도 좋고, 졸업을 여기서 마쳐도 좋다. 널 위해서 그러는 게 아니야. 그래도 소원이 핏줄인데 네가 소홀히 할까 봐 그런다.”

“네, 그 부분은 천천히 생각해 볼게요.”

이렇게 끝이 나는구나. 홀가분하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먹먹했다. 이곳에서 간절히 벗어나길 바랐지만 이런 마지막을 바란 건 아니었다. 이렇게 상처만 가득한 마지막은…….

언젠가 자립하게 되면 일부나마 갚을 마음 또한 있었다. 당신들 말마따나 은혜 모르는 금수는 아니었다고 증명하고 싶었다. 그랬는데.

허탈한 기분에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아 눈가를 꾹꾹 누르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할머니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너도 나름 억울한 사정이 있겠지만, 생판 남인 너로 인해 우리가 받은 고통만 하겠니? 너도 이제 아이를 키워 보면 알 거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의 혈육 맡는 게 얼마나 고역인지. 객식구도 그런 고약한 객식구가 없다.”

그러니 너도 어디 한번 당해 보라는 뜻일까. 내 앞날이 훤히 예상된다는 듯이 암상궂은 미소를 지은 할머니가 끝까지 본인의 고충을 토로했다.

“이리 애먹일 줄 알았으면 진작 보육원에 보낼 걸 그랬지. 내가 뭐랬냐. 응? 결국 이 사달이 날걸.”

마지막은 나를 탓하는 게 아니었다. 질책하는 눈으로 엄마를 보고 있었으니까. 진절머리 나는 눈으로 엄마를 응시하던 할머니가 고개를 잘게 흔들며 일어섰다.

“머리가 아프구나. 물이나 마셔야겠다.”

나 몰래 호소할 게 있는 듯 이소원이 그 뒤를 잽싸게 따랐다. 엄마는 나를 외면한 채 그 자리에 있었다. 가느다랗게 내쉬는 숨이 아니면 도무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감당할 수 없는 커다란 슬픔에 잠식당한 사람, 온 마음을 바쳐 생의 한순간 가장 열렬한 불꽃을 피워 낸 탓에 재만 남은 사람.

엄마가 불쌍했다. 감히 연민을 느낄 처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 아빠를 그토록 사랑해 준 마음이 고맙고 젊은 나이에 홀로 남은 그녀의 생이 애달팠다. 그래서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아빠가 살아계실 때 내게 보여 주던 다정한 미소는 전부 꾸며 낸 모습이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대를 무릅써가며 나를 책임지려 한 그 속은 어떠했는지.

끝까지 혼자만 간직할 의문들이었으나 이제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궁금해서요.”

차분하려 애썼지만,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 끝에서 무언가를 예감한 엄마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무엇이든 대답해 줄 것처럼, 담담하고 물기 없는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내게서 아빠의 흔적을 찾으려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진득한 시선이었다.

“나를, 왜 데려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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