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과-30화 (30/77)

30화

무슨 이유를 대면 좋을까? 학회? 그거면 받아들여 줄까? 때마침 정해준이 제안한 시기에 미국에서 학회가 열리긴 했다. 학부생도 참가신청서와 자기소개서를 제출하면 동행 가능하다는 공고도 있었고. 장소도 보스턴이니 핑곗거리로는 더할 나위 없이 적절했다.

얘기만 잘하면 어떻게 허락이 떨어지지 않을까? 한소리야 물론 듣겠지만 허락을 받아 낼 수만 있다면.

‘어떻게 운을 떼야 자연스러울까…….’

최대한 할머니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 방법을 고심하며 현관에 들어섰다. 기분 탓인가. 도둑이 제 발 저린 탓인지 거실 쪽 분위기가 사뭇 어두웠다. 아니, 확실히 달랐다. 가느다란 흐느낌 소리가 들려오는 게. 누가 우는지는 명확했다. 이소원이 중간중간 무어라 소리쳤기 때문이었다.

‘시험 망쳤나?’

요즘은 얌전히 재수학원 잘 다니는 줄 알았는데. 한편으론 갸우뚱했다. 이제 겨우 초여름인데 아직 수능까진 한참 남지 않았나?

고작 모의고사 망친 걸로 울 만한 이소원이 아니기도 했다. 입으로는 정해준과 같은 대학에 다닐 거라고 큰소리 뻥뻥 치면서 정작 공부에는 관심 없는 이소원이니까. 까놓고 말해서 같은 대학이 아니라 같은 도시에서만 다녀도 감지덕지할 수준 아닌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 귀에 온 신경을 집중하며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소원의 훌쩍임 속에 간간이 할머니의 무거운 한숨이 실려 무언가 심각한 일이 벌어졌구나, 짐작하며.

다녀왔다고 인사를 하는 게 과연 옳은지 잠시 고민했다. 가뜩이나 불편한 심기에 나를 보면 노발대발하는 게 아닐까. 불난 집에 기름을 붓듯이. 전에 없던 일도 아니라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다녀왔…….”

“해원이 왔으면 들어오거라.”

채 인사말을 마치기도 전에 할머니의 부름이 스산하게 울려 퍼졌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어쩌면 예감이 아니라 경험으로 터득한 반사적 감정이었다. 좋은 일로 나를 부른 적은 10년이 넘도록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할머니가 나를 부를 때는 나를 꾸짖거나 내게 꼬투리 잡을 게 있을 때뿐이었다.

드잡이하려고 벼르는 사람처럼 내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며 시퍼렇게 방문을 노려볼 두 눈이, 문을 여는 순간 내게 쏘아질 눈총이 두려웠다. 심장이 죄어드는 기분으로 천천히 문고리를 돌렸다.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시선을 바닥에 두며 조심히 여쭸다.

“부르……셨어요?”

“넌 어른이 불렀으면 재깍재깍 달려올 것이지 무얼 그리 굼뜨게 구는 게야!”

“죄송합니다.”

“인생사 그렇게 셈하면서 사는 거 아니다. 하긴, 남의 집 재산이나 노리는 그 핏줄이 어디 가겠느냐마는.”

늘 듣는 말이라 같은 듯하면서도 어딘가 낯설었다. 꼭 가르치듯이 인생사 운운하는 게……. 비난은 퍼부을지언정 내게 훈계를 한 적은 없는 양반이었다. 혹시라도 훈계를 듣고 내가 보다 나은 인간이 될까 봐. 그저 깎아내리고 후려쳐 한없이 작아지다 못해 세상에 없어야 하는 사람, 나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달라진 양상에 마음이 못내 불편했다. 그게 뭔지 딱 집어낼 수 없어 혼란스러워하면서 이소원의 옆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발뒤꿈치에 엉덩이가 닿고 나서야 이소원의 앉은 자세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다. 혼나는 것치고는 퍼질러 앉은 모양새가 너무 어색하다는 것을.

“어…….”

뒤늦게 부푼 배를 감싸 안은 팔을 보고 낮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깨달았다. 분위기가 왜 이렇게 심각한지, 이소원의 흐느낌이 무얼 의미하는지.

앉아만 있어서 그런가, 똥배가 부쩍 늘었다던 이소원의 투덜거림이 귓가에 왕왕 울렸다. 자꾸 몸이 붓는다고도 했던가. 야식을 끊어도 소용이 없다고. 원래 살집이 있는 편인 데다가 본인이 그렇게 말하니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그동안 관심 있게 보지 않아서 몰랐는데 주의 깊게 살피니 주수가 꽤 되어 보였다. 헐렁한 옷으로도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둥근 배를 보면. 그래서 할머니와 엄마도 눈치채게 된 걸까.

불현듯 언젠가 정해준과 마주쳤을 때 이소원이 오래 집을 나가 밤늦게 돌아왔던 게 기억났다. 군데군데 불그스름하게 남아 있던 울혈과 잇자국도. 시기상 그때가 의심스럽다.

‘아니,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럼 나는 대체 왜 이 자리에 부른 걸까. 내게는 숨기고 싶을 친손녀의 치부를 드러내면서까지.

“떼어 낼 시기는 지났다더라. 받아 주는 곳이 없어. 꼼짝없이 낳아야 할 판이야.”

“…….”

“의사란 것들이 하여간.”

덧붙이는 말투에 노기가 서려 있었다. 마치 이소원의 중절 수술을 거부한 의사들이 비양심적인 짓을 저지르기라도 한 것처럼. 본말이 전도된 발언 앞에 불안은 더욱 커져 갔다.

나를 부른 이유를 종잡을 수 없어 홀로 여러 가정들 사이를 헤매는 사이, 할머니의 화살이 예고도 없이 툭 쏘아졌다.

“소원이 말로는 해원이 너, 남자 친구 사귄다며.”

“네? 네…….”

단속하려는 건가. 나도 이소원처럼 대책 없는 임신이라도 할까 봐? 그럴 리가 없는데. 빈말로라도 내 걱정을 할 리 없는 양반인데.

“아무리 피가 안 섞였대도 동생이 재수하는데 하나밖에 없는 언니란 것이 헤프게 연애질이나 하고 다니니 애가 헛바람이 든 게지.”

“…….”

연애질. 헤픈 연애질. 경멸 섞인 어조에 정해준과의 찬란한 순간순간이 퇴색됐다. 꼭 정해준에게 오물이 튀기는 것 같아 속상하고도 분한 마음에 이를 앙다물었다. 나한테 뭐라고 하는 건 얼마든지 견디겠지만 정해준은……, 그런 소리를 들어서는 안 됐다. 나 때문에라면 더더욱.

그래서 이소원이 임신한 게 내 탓이라는 건가. 책임을 돌리는 것도 정도껏이지, 억울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노안을 직시했다. 기다렸다는 듯 할머니가 용건을 꺼냈다.

“소원이가 낳을 아이, 네 밑으로 하거라.”

“…….”

상식을 벗어난 강요에 귀를 의심했다. 경고를 보내듯 머릿속 한구석에서 빨간 등이 깜박였다.

이게 무슨 소리지. 내 밑이라는 게, 진짜 아래라는 뜻은 아닐 거고. 설마, 정말 설마 내가 지금 생각하는 그 뜻이 맞는 건가?

멍하다 못해 작신 두들겨 맞은 듯 전신이 얼얼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태연했다. 응당 그래야 한다는 듯 고개까지 끄덕끄덕 흔들었다.

“어린 나이에 몸 함부로 굴려 임신했다는 게 소문이라도 나 봐라. 앞길 망치기에 십상이지. 쯧.”

“…….”

“필요한 서류는 준비해 두마.”

대단한 편의라도 봐주는 것처럼 너그러운 태도에 아까부터 불편하던 느낌의 정체를 비로소 깨달았다. 파렴치한 위선을 직감한 메스꺼움이라는 것을.

생판 남의 애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이를 내 호적에 올리라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어떻게 그런 걸 아무렇지 않게 강요하는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부분만큼은 당사자인 이소원도 이미 합의한 모양인지 아무 말이 없었다. 숨을 죽이고 내 눈치만 살피는 게 우스울 지경이었다.

당사자를 제외한 저들끼리의 합의.

보통 그런 걸 작당이라고 하지 않나? 세상에 이런 일은 없는 법인데,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나 버려서, 너무 기가 막혀서, 난생처음 할머니에게 반문했다.

“저는……, 그럼 저는요?”

“인생사 그렇게 셈하면서 사는 거, 아니라고 했는데 영 못 알아듣는 모양이구나.”

역시 의도가 깔린 말이었구나. 그럼 그렇지. 헛웃음을 지으며 쓰게 따졌다.

“핏덩이를……, 엄마도 아닌 제게……, 그건 너무…….”

“너랑은 피 한 방울 안 섞였다 말하고 싶겠지. 안다. 너란 아이의 속은 옛날부터 뻔하니까.”

한데, 하고 말을 잇는 노구의 얼굴에 더없이 잔인한 미소가 피어났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의 집 핏줄 데려다 키운 건 우리도 피차일반 아니냐.”

“…….”

“이만큼 대가 없이 키워 줬으면 너도 그간 먹고 잔 밥값은 해야지. 그게 옳지, 암.”

할머니의 혀끝에서 쏘아진 비수가 사정없이 나의 부채 의식을 자극했다. 먹여 주고 재워 준 은혜 앞에선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는 걸, 이 안의 모두가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가슴을 날카롭게 베었다. 벼르듯 민감하게 내 반응을 살피고 있다는 것도.

“정 억울하거든 빚 갚는다 생각해라.”

“빚……, 이요.”

“그래, 빚. 왜, 정산이라도 해 주랴? 너 입으로 들어간 쌀값, 너 씻고 닦은 물값, 네 방 불 땐 난방비, 너 철마다 바꿔 입은 옷값, 초, 중, 고 학비! 어디 한번 요목조목 다 따져 볼까? 어? 그걸 바라는 거냐? 정 원하면 어디 한번 해 보자꾸나.”

적나라하게 쏘아붙여 대니 방 한 가운데 앉아서도 구석에 몰린 기분으로 가슴이 졸아들었다.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두리번거리다 문득 시선이 멎었다.

왜 그랬을까.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선 한 번도 내 편이 되어 준 적 없던 엄마를 바라본 건. 어릴 적 잠깐 맛봤던 온정을 아직 잊지 못한 걸까. 놀랍게도 엄마는 나를 보고 있었다. 어떤 간절한 빛이, 생기 잃은 검은 동자 속에서 미미하게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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