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몰아치던 과제와 시험이 끝나고 잠시 여유가 생긴 틈을 타 모처럼 교외로 나왔다. 얼마만의 제대로 된 데이트인지.
늘 정해준과 함께 붙어 다녔으면서도 학교와 집이 아닌 곳에서 만나는 기분은 또 색달랐다. 짙어가는 녹음과 연한 푸른빛 하늘. 어떤 물감이 이 색을 담아낼까. 절대 불가능하다고 단정 지으며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 예쁘다.”
적당한 습기를 머금은 초여름 하늘이 싱그러웠다. 이리저리 요란하게 튀어 다니는 초록색 풀벌레들과 팔랑거리는 하얀 나비를 질리지도 않고 구경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옆에서 양산을 받쳐 든 정해준이 보조를 맞췄다. 괜찮다는데도 한사코 양산을 씌워 주는 마음이 고맙다. 정작 자기는 따가운 햇살을 다 맞고 있으면서.
“그렇게 안 해도 된다니까.”
“다시 말하지만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야. 우리 공주님,”
“알았어! 그만, 그만!”
공주님이라는 호칭은 아무리 들어도 적응이 되질 않아 얼른 정해준의 입을 막았다. 어차피 뒷말은 안 들어도 뻔했다. 우유 푸딩처럼 매끄럽고 촉촉한 살결이라느니, 뽀얀 피부가 타면 가슴이 찢어진다느니, 낯빛 하나 안 변하고 잘도 간지러운 말을 늘어놓겠지.
곱게 눈을 흘기자 정해준이 입을 막은 손바닥을 날름 핥았다. 떼지 못하게 내 손목을 꽉 붙들고.
“아, 정말…….”
당해 낼 수가 없다니까. 손가락까지 쪽쪽 빨린 후에야 겨우 풀려났다. 다시, 초록을 머금은 풀 내음이 코끝을 맴돌았다.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 좋아 몇 번이고 크게 숨을 들이마시다 불시에 내려앉은 입술에 그대로 호흡이 멎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어쩌려고……!’
사방이 탁 트인 산책로라 타인의 시선이 신경 쓰여 가슴을 밀어 내자 선선히 물러나 준 정해준이 악동처럼 웃으며 양산을 눈짓했다.
“이게 햇볕 가릴 때만 쓰는 건 줄 알아?”
“…….”
그럼 처음부터 이럴 목적으로? 설마 그렇게까지 치밀하다고? 미심쩍은 눈초리로 흘겨보자 다시 입술을 겹친 정해준의 중얼거림에 작은 궁금증은 사실로 판명 났다.
“난 다 계획이 있다고.”
좋은 머리를 이런 데 쓰다니 아깝다는 핀잔은, 부드럽게 들어선 처음과 달리 집착적으로 안을 헤집는 혀가 앗아가 버렸다. 머릿속이 지글지글 끓는 것만 같은 키스에 속절없이 휘둘렸다. 겨우 입술을 맞대고 있을 뿐인데 꼭 집어삼켜지는 듯 아찔하다.
이렇게 몰아붙일 땐 다른 속셈이 있어서라는 걸 알면서도 반응이 더뎌졌다. 끙끙 앓으며 정해준의 단단한 어깨를 잡고 겨우 버티는 게 전부다.
“하아…….”
달뜬 한숨과 함께 몽롱하게 눈을 맞췄다. 진득하게 들러붙는 눈빛, 무언가 요구할 때 나오는 눈빛이었다. 어쩌면 어려운 부탁.
“뭔데? 말해 봐.”
“말하면 들어주나?”
“들어는 줄 수 있는데.”
손바닥을 오목하게 굽혀 귀에 대고 소리를 모으는 척하자 어이없어하는 웃음이 떨어졌다.
“방학 때 같이 여행 가자. 이왕이면 해외로.”
“아…….”
외박도 안 되는데 여행을 허락할 리가 없었다. 당장 오늘도 통금시간 맞추려면 저녁 먹자마자 출발해도 빠듯한데.
“알아. 집안 분위기 엄한 거. 그래도 한 번만 말씀드려 보면 안 돼?”
“음…….”
대놓고 눈치 주는 건 아니지만 어쩌다 통금시간을 어길 때, 현관을 들어설 때부터 느껴지는 특유의 무거운 분위기가 있었다. 숨 막히는 정적,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으려 곤두세운 감각이 살갗을 바늘처럼 찌르는 따끔함, 김 여사님의 어색한 웃음.
그런 날은 몸을 씻는 것조차 조심했다. 어쩌다 물 튀기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면 눈치가 보여 가슴이 선뜩선뜩 뛰었다. 허락해 줄 리 없는데 괜히 얘기해서 긁어 부스럼 만드는 거 아닐까.
“미국 가자. 보스턴도 가고, 뉴욕도 들리고.”
벌써부터 조마조마 졸아붙은 속도 모르고 마치 옆집에 놀러 가는 것처럼 여상하게 얘기하던 정해준이 싱긋 웃었다.
“간 김에 우리 엄마도 좀 보고.”
“어?”
“정식으로 너 소개하고 싶어. 엄마가 오기만 하면 비행기에 호텔비까지 다 대 준다니까 몸만 가자, 해원아.”
“그……, 너무 갑작스러워서. 생각해 볼게. 만약 가게 되면 집에다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도 고민해 봐야 하고.”
“알았어. 기다릴게.”
이래라저래라하지 않고 그저 기다린다고. 마치 제 뜻을 받아 줄 걸 알듯이. 느긋하지만 정해준의 기다림엔 거스를 수 없는 힘이 있다. 누적된 시간이 주는 압박, 혹은 부담감.
그래서일까. 정해준이 기다린다고 하면 꼭 들어줘야 할 것만 같다.
“그런데 어머님……도 뵙자고?”
“응.”
어머님, 세 글자가 혀끝에서 어색하게 흩어졌다. 나를 낳아 주신 엄마에게도, 길러 주신 엄마에게도, 모정을 느끼기엔 충분치 않아서 내게 엄마라는 존재는 어려운 숙제처럼 남았다. 그래서인지 어쩌다 동기들의 엄마와 마주쳐도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게 힘들었다.
이렇게 말하면 실례일까, 이런 행동은 오해를 사지 않을까. 미움을 사지 않기 위해 집에서 눈치 보던 습관이 남아 끊임없이 상대의 반응을 살피느라 짤막한 대화라도 마치고 나면 급속하게 피로해지곤 했다.
하물며 정해준의 엄마라니. 부담감에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입술을 꾹 다문 채 난처해하는 내 반응에도 정해준은 서운해하지 않았다. 으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하지만 단호하게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졸업하면 결혼하자.”
“어?”
아직 4년 반이나 남았는데 벌써? 아니, 그보다 뭐가 이렇게 빨라. 이제 처음 어머님을 뵙고 오자는 얘기가 나왔는데 결혼이라고? 그런데 이마저도 정해준의 기준에서는 느린 듯했다.
“분명히 해 두자면 내 졸업이 아니라 네 졸업이야. 솔직히 말하면 지금 당장 하고 싶은데, 너 대학 졸업은 해야 너희 집에서도 허락할 것 같아서.”
“너무…….”
빠른 것 같다고 하려다 열망이 절절 끓고 있는 정해준의 두 눈에 포기했다. 그냥 아직 2년 넘게 남았다고 덧붙이기만 했다. 그마저도 결혼 같은 중대사를 결정하기에 결코 긴 시간은 아니라고. 조심스럽게 낸 의견에 정해준은 드물게 정색했다.
“이미 결정했고, 난 안 변해.”
정해준의 기다림을 안다. 마음먹은 건 기어코 해내는 성격인 것도.
문제는 나였다. 우리 집 얘기가 나온 순간 몸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정해준을 집에 데리고 가 인사시키는 건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여전히 얼어붙어 있는 내 모습에 정해준은 초조한 기색을 보였다.
“……싫어?”
“아니.”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정해준을 많이 사랑한다. 사랑하는 남자가 결혼하자는데 빈말이라도 싫을 리가 없었다.
다만 마음에 걸렸다. 그동안 자신이 진짜라고 믿어 왔던 내 모습이 모두 가짜라는 걸 알게 되면 정해준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내 입으로 밝히는 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눈앞이 까마득했다.
“그럼?”
“그냥, 어른들 반응이 걱정돼서.”
대강 둘러대자 마음이 놓인 정해준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왜. 내가 병원 차려 달라고 할까 봐?”
“응?”
“우리 아빠 병원, 외갓집에서 세워 주신 거거든.”
“아…….”
몰랐던 사실이었다. 외갓집도 잘사는 건 알았지만 병원을 세워 줄 정도라니. 대상 병원의 으리으리한 규모를 떠올리자 새삼 기가 죽었다. 나는 정말, 정말 아무것도 없으니까. 허울만 그럴듯할 뿐, 그 허울조차 내 것이 아니니까.
“넌 몸만 와. 내가 진짜 잘해 줄게. 응?”
“지금보다 더?”
지금도 충분하다 못해 넘치게 사랑받고 있는데, 그 이상이 가능할까.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내게 정해준도 진지하게 반응했다.
“모르나 본데, 하루 종일 네 수발드는 게 내 꿈이야.”
수발이라는 표현에 풋, 웃음이 터졌다. 한편으론 가슴 한구석이 켕겼다. 그런 사랑 받을 자격이 내게 있을까 싶어서. 정해준처럼 모자람 없는 사람이, 완벽하단 수식어도 부족한 사람이, 고작 나 같은 여자를 소중히 여겨 주는 게 너무 과분해서.
“나 그렇게 대단한 사람 아닌데. 정해준이 아깝다.”
“이해원 대단한 걸 이해원만 몰라.”
“에이.”
“진짜야. 너 눈에 안 보이면 얼마나 속이 끓는지 모르지. 나 몰래 어떤 놈이 집적거리진 않을까, 감히 눈독 들이진 않을까. 분해서 도무지 집중이 안 돼.”
“분하다고?”
“난 못 보는데 그놈들은 볼 거 아니야.”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마치 그런 누군가가 존재하는 것처럼 정해준이 말을 씹어뱉었다.
“모자란 새끼들이 꼴에 보는 눈은 있어서.”
“뭐?”
어이가 없는데 기분은 좋아서 다시 웃음을 터트리자 어라? 하며 엄한 얼굴로 단속까지 한다. 어디 가서 그렇게 예쁘게 웃지 말라고.
“그러니까 넌 나랑 꼭 결혼해 줘야 해. 나 아무것도 못 하는 등신 새끼 되는 꼴 안 보려면.”
“무슨 그렇게까지…….”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마지막은 거의 협박이었다. 협박인데 애원하는 듯한 착각이 드는 건 왜인지. 그래도 좋았다. 행복할 것 같다. 이렇게나 나를 소중히 아껴 주는 정해준과 함께라면.
잠시, 그러면 안 되는데 나쁜 생각이란 걸 자각하면서도 결혼이 매력적인 도피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잘만 성사된다면, 영원히 도망칠 수 있지 않을까. 숨통을 옥죄는 가시덤불 같은 집에서.
정말……, 그런 희망을 품어도 될까.
막연한 바람이 점점 구체적인 모습을 띠기 시작했다. 잠만 따로 잔다 뿐, 이미 같이 살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여서 우리의 미래를 그리는 건 쉬웠다. 나란히 이불을 덮고 잠들었다가 함께 맞이하는 아침만 더하면 되니까.
커플 잠옷을 입고 양치하는 모습을 잠시 그려 보다가 문득 마주 잡은 손을 빼자 정해준의 낯이 선명하게 일그러졌다. 이게 무슨 뜻이냐고 묻고 싶은데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고 화만 삭이는 모습에 달래듯 다시 느릿느릿 손깍지를 꼈다.
이걸로 대답이 됐으려나.
말갛게 올려다보자 정해준이 콧등을 찡그렸다.
“넌 가끔 보면 진짜 앙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