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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과-28화 (28/77)

28화

이소원은 밤이 늦어서야 비에 흠뻑 젖은 생쥐 같은 몰골로 돌아왔다. 학원에 문제집을 놓고 와서 다녀오느라 그랬다지만, 아무리 봐도 변명이었다. 눈알이 새빨갛게 짓무른 게 비 때문에 젖은 얼굴 같지 않았다.

줄곧 눈물을 쏟았을 게 분명한 눈이 마음에 걸려 샤워하고 나오는 이소원의 뒤를 따랐다.

“뭐야? 꺼져!”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면서도 나를 밀어 내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엄마와 할머니의 동정을 살피느라 강하게 내치지 못하는 듯했다. 눈치 볼 게 뭐 있다고? 워낙 안하무인인 애인 걸 알기에 더욱 이소원이 수상해졌다.

무엇보다 퉁퉁 부어 있는 눈이 마음에 걸렸다. 정해준과 내가 연인 사이인 걸 알게 된 충격이 그렇게 컸을까. 미리 밝혔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은 하지 않았다. 언제 터져도 터질 시한폭탄이 터진 것뿐이다. 한창 민감할 재수 생활 중에 터진 건 유감이지만.

“울었어?”

무슨 말을 해도 위로가 되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대화의 물꼬는 트고 싶었다. 사납게 대들 거라 예상한 것과 달리 이소원은 눈물을 터뜨렸다. 내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인 게 자존심 상하는지 이내 닦아 냈지만.

“어? 너, 그 자국…….”

눈물을 훔치느라 팔을 높이 드는 바람에 샤워 가운의 목 부분이 벌어진 사이로 선명한 울혈 자국이 보였다. 한 개도 아니고 여러 개……. 마치 누가 이를 세워 물어뜯은 듯 난폭한 모양새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닌 게 아니라 가슴 쪽으로 불규칙한 잇자국이 보였다. 깜짝 놀라 가운을 홱 젖히자 더 많은 자국이 드러났다.

“누가 이런 거야? 아……!”

자세히 살피려고 고개를 기울인 순간 가슴에 둔탁한 통증이 느껴졌다. 거칠게 나를 밀어 낸 이소원이 잽싸게 가운 자락을 여미고 씩씩댔다.

“무슨 상관이야? 너만 성인이야? 너만 남자 친구 있어? 미친, 너 설마 언니 노릇 하려는 거 아니지? 밥맛 떨어지게……, 진짜 재수가 없으려니까, 썅!”

“……정말로 남자 친구 맞아?”

혹 나쁜 일을 당한 건 아닐까. 정말 사랑하는 사이라면 상대방의 몸에 흉이 지도록 잇자국을 남기진 않을 것 같은데. 더군다나 아직 수험생 신분인 여자 친구에게. 설령 둘이 사귀는 사이라 할지라도 상대가 질 나쁜 인간인 건 분명해 보였다.

“계속 만날 거야? 내 생각엔…….”

이 만남은 이어 가지 않는 게 좋겠다고 조언하려고 했다. 정말 남자 친구가 맞는지 확인하는 물음에 허를 찔린 듯 가만히 있던 이소원이 눈을 부라리며 정해준을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왜? 네 남자 친구는 잘나가는 의대생이라 꿀릴 거 없다, 이거야? 씨발, 어디서 으스대고 지랄이야?”

“그게 아니라…….”

여기서 갑자기 왜 정해준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비교하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비교하려 해도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는 지금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눈알이 빙글 돌아 버린 이소원에게는 아무것도 뵈는 게 없는 듯했다.

“닥쳐! 너, 엄마나 할머니한테 이거 얘기하기만 해 봐! 나도 다 이를 테니까!”

“진정해, 난.”

“진정하긴 뭘 진정해? 가만있는 사람 쫓아와서 건드린 게 누군데! 야, 나가! 아, 나가라고! 씹, 뒤로 호박씨 까면서 겉으론 착한 척 존나 소름 돋는다고! 알아? 이 미친년아!”

이소원의 발악에 할머니가 신경질적으로 방문을 열었다.

“오밤중에 뭣들 하는 짓이야?”

둘을 다 나무라는 듯해도 나만을 쏘아보는 눈빛에 괜히 움츠러들었다. 한편으론 나도 모르게 이소원의 눈치를 살폈다. 저도 약점이 잡혔으니 그러지는 않겠지만, 만에 하나 이소원이 정해준과 내 관계에 대해 얘기하면 어떡하나 싶어서.

“해원이 너, 네가 말해 봐라. 네가 왜 소원이 방에 있는지.”

감히 들여서는 안 되는 성역에 발을 들여놓은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혹은 고귀한 아가씨의 패물을 훔치러 온 하녀. 바로 지금, 나를 대하는 할머니의 취급이 꼭 그랬다.

“그게…….”

비참한 기분으로 머뭇머뭇 입을 열었지만, 이내 목구멍이 콱 막혔다. 머리가 하얗게 굳어선 놀라울 정도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사소한 변명쯤이야 얼마든지 생각해 낼 수 있을 텐데도…….

“야, 알았으니까 이거 갖고 꺼져.”

가슴 쪽으로 딱딱한 무언가가 날아온 건, 할머니의 입술이 노기를 못 이겨 씰룩인 때와 동시였다. 바닥에 툭 떨어진 물건을 확인하니 유명 브랜드의 립스틱이었다. 갑자기 이건 왜……. 무심결에 주워 들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자 할머니가 물건을 확인하고 이게 웬 거냐고 이소원에게 물었다.

“이거 비싸잖아. 탐났나 보지.”

“학생이 이런 게 왜 필요해?”

딱히 내 학업을 걱정해서 묻는 게 아님을 안다. 이소원의 물건을 기웃대기나 하느냐는 트집 잡을 거리가 필요할 뿐.

“몰라. 연애하나 보지.”

심술 섞인 이소원의 말에 눈을 홉뜨자, 쯧, 하고 혀 차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래도 꾸중이 더 이어지진 않았다. 이걸로 일단락되는가 싶어 조마조마한 마음이 겨우 풀어질 때쯤, 악의 섞인 노성이 쏟아졌다.

“반반한 낯짝 믿고 몸뚱이 함부로 굴리고 다니는 게로구나. 네 아비처럼 누구 하나 잡아 팔자 필 모양인데 흥, 어림없지. 어디 세상이 그리 만만하더냐. 두고 봐라. 단물 실컷 빨고 나면 뒤도 안 돌아보는 게 사내놈들이니. 차라리 걸레짝이 부러울 게다.”

마지막은 숫제 저주였다. 아닌가. 이미 저주는 걸려 있나. 정해준과 몸을 섞고 대가로 안락하게 지내고 있는 지금이, 내 실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정해준이 결혼하자는 말에 설레는 나 자신이, 조금 전 들은 모욕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할머니 갔어.”

파랗게 질려 있다가 한심해하는 이소원의 핀잔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문득 손바닥이 아파 펴 보니 립스틱의 모서리에 눌려 살갗이 까져 있었다. 투명한 진물이 배어 나오는 손 위에서 이소원이 제 물건을 날래게 채갔다. 제가 던져 놓고선 꼭 도둑년 보듯 째려본다.

뭘 걱정했던 거지? 이소원 따위, 어떻게 되든 말든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주제에 오지랖이 지나쳤다. 허탈한 심정으로 기운 없이 방에 틀어박혀 문을 잠갔다. 어차피 아무도 열지 않을 걸 알지만, 문이 잠겨 있다는 사실이 어느 정도 위안이 되었다. 무릎을 모아 안고 멍하니 웅크린 채 시간을 죽이다가 깜박이는 휴대전화 불빛에 발신인을 확인했다.

정해준.

익숙한 세 글자에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 했다. 겨우 수습했을 땐 전화가 끊겨 있었다. 다시 걸지 않고 가만히 두었다. 정해준이라면 한 번으로 포기하지 않고 연달아 걸 테니까.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곧바로 전화가 걸려 왔다. 목을 가다듬고 너무 늦지 않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응.”

-목소리에 기운이 하나도 없네. 어디 아파?

역시 아까 비를 많이 맞은 게 문제라며 걱정이 대단했다. 고작 몇 걸음 걸은 게 전부인데 죽이라도 끓여 먹여야 한다며 그러지 못해 아주 애가 닳았다. 난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닌데.

가끔은 모든 걸 털어놓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곤 한다. 싸늘하게 식을 정해준을 떠올리면 몸 한 군데가 서걱 썰려 나가는 것처럼 섬뜩해 이내 접고 말지만.

“……내가 그렇게 예뻐?”

휴대전화 너머의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뚝 멈추었다. 당장 전복을 사 와야겠다는 둥, 지금 당장 열을 재러 가 봐야겠다는 둥, 한참 걱정하던 정해준이 뜻밖의 질문에 시원하게 웃었다.

-예뻐. 죽고 싶을 만큼 예뻐.

“내가 예쁜데 왜 죽고 싶어.”

-아무리 가져도 부족하니까 자괴감 들어서.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아직 말은 꺼내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큰 도끼로 찍은 것처럼 가슴 한가운데가 뻐근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아, 부러 숨을 몰아쉬고 겨우 속에 품고 있던 물음표를 던졌다.

“내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사람이 아니면? 그러니까, 봐줄 만한 건 얼굴 하나뿐이면? 다른 건 다 엉망이고, 실상은 가진 것 하나 없는 사람이면? 그럼 어떡할 거야?”

놀랐을까. 뱉어 놓고 나니 형편없는 질문이었다. 꼭 떠보는 것처럼, 마치 연인 간의 애정 테스트 같지 않은가. 그래서일까. 정해준도 심각하게 여기지 않은 듯했다.

-우리 해원이 얼굴 자신감이 대단하네. 하긴, 자신감 가질 만하지.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미모인데.

장난스러운 대꾸에 긴장이 탁 풀렸다. 의도대로 되지 않아 실망한 동시에 안도하기도 했다. 정해준이 진지하게 받아들였으면, 반응이 어떻든 감당하기 힘들었을 테니.

-그런데 무슨 일 있어? 갑자기 그런 얘긴 왜?

“그냥 해 본 소리야. 그냥…….”

대강 얼버무리는 말허리를 뚝 끊어 먹고 정해준의 음성이 묵직하게 가슴을 울렸다.

-사랑해, 해원아.

“…….”

-불안해하지 마. 내가 더 많이 사랑할게. 어떤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아. 약속.

약속. 입 모양으로 가만가만 따라 했다. 이런 고백, 받을 자격 없다는 걸 알면서도……. 너무 달콤하여 가혹하다. 삼키지 않곤 배겨날 도리가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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