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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과-27화 (27/77)

27화

“앗……!”

말릴 틈도 없이 내 양 무릎을 접어 좌우로 활짝 눌러 벌린 정해준이 음부에 코를 박고 중얼거렸다.

“향긋한 냄새 나. 새큼하고 단 향, 음, 사과?”

“아, 하지, 해준아!”

정해준이 음절 하나하나를 발음할 때마다 입술과 맞닿은 음순과 속살이 동시에 푸르르 떨렸다. 정수리를 밀어 봤지만 꼼짝도 않는 머리통에 하릴없이 얼굴이나 가렸다.

“평생 이것만 먹으래도 먹겠는데.”

길게 뽑아 넣은 혀가 안을 훑어 올리는 감각에 몸을 떨었다. 말도 안 돼. 미쳤나 봐. 도리질만 치는 내게 보란 듯 항문을 엄지로 꾹 누른 정해준이 심술궂은 눈빛을 빛냈다.

“여기도 예쁘게 생겨선.”

“해준아, 제발…….”

“얼마나 귀여운지, 네가 몰라서 그래.”

“그래도, 그래도……!”

울먹임에 자꾸만 말꼬리가 흐려지자 너그러운 척 다리를 모아 곧게 펴준 정해준이 약속했다.

“알았어. 너무 자주 하진 않을게.”

안 한단 말은 끝까지 않는다. 그래도 이게 어디냐 싶어서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다행이라고 여기게 만들다니, 정해준에게는 신기한 재주가 있다고 생각하며.

“그리고 나 어디 안 가.”

“…….”

“불안하다고 해서…….”

대답 대신 어깨를 그러안은 정해준이 나를 제 품에 꽉 가둬 안았다. 숨 막히게 조여드는 품에 오히려 안정감을 느꼈다.

“너 이렇게 작아서, 쏙 빠져나가면 난 어떡해.”

“나 안 작은데.”

또래 평균을 웃도는 키라 작은 편이 아닌데, 정해준은 자꾸만 작다고 했다. 당연히 자기와 비교하면 그렇겠지만. 기준이 너라서 그런 것 아니냐는 물음에 가벼운 웃음이 돌아왔다.

“그냥, 이상하게 자그마한 느낌이 들어. 작고 달콤한 솜사탕 같아.”

“솜사탕?”

“응, 어느 순간 녹아 없어질 것 같아.”

그게 자꾸 어디고 물고 빠는 이유라고, 정해준이 천연덕스럽게 덧붙였다. 내가 녹아 없어지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

“그럴 일 없어.”

아무 데도 가지 않아. 재차 안심시켰다. 살과 뼈로 이루어진 나는 녹지 않겠지만, 형체도 없는 마음 한구석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건 막지 못하겠다. 달콤한 기분에 잠겨 눈을 감았다. 뭐라도 녹일 듯이 뜨거운 입맞춤이 떨어졌다.

***

보송보송한 정해준의 침대에서 게으르게 뒹구느라 몰랐는데 밖은 세차게 비가 오고 있었다. 이맛살을 찌푸려가며 목적지에 다 가도록 약해질 줄 모르고 퍼붓는 빗줄기를 올려다보던 정해준이 아무래도 안 되겠다며 액셀을 밟았다.

“그냥 여기서 내려 줘.”

“오늘만 집 앞까지 바래다줄게. 비가 이렇게 오는데.”

“우산 있잖아.”

“신발 다 젖는다.”

정해준이 얼마 전 자신이 선물한 흰색 운동화를 눈짓했다. 날이 맑은 날만 골라서 소중히 아껴 신는 중이었는데, 정해준의 말대로 조금만 걷다간 흙탕물로 얼룩질 게 뻔했다. 울상이 되어 신발을 내려다보자 귀엽다며 볼을 톡톡 두들긴 정해준이 피식 웃으며 핸들을 꺾었다.

와, 얄밉다.

거절 못 할 부분만 콕 집어 건드리다니. 그나저나 괜찮겠지. 창밖을 보며 막연히 기원했다. 제발 들키지 않기를.

한편으론 과한 걱정 같기도 했다. 비가 이렇게 쏟아져서 행인도 없고, 가족 중 누가 굳이 내가 오나 안 오나 확인하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여기면 돼. 바래다줘서 고마워.”

그래도 바로 집 앞에서 내리는 건 어쩐지 꺼려졌다. 한 블록 정도를 앞두고 그만 멈춰 달라고 얘기하자 정해준이 순순히 차를 세웠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공주님.”

“아이, 참……. 너도 얼른 들어가. 빗길인데 운전 주의하고.”

“그래.”

곱게 눈을 접은 정해준이 핸들에 고개를 기댔다. 뭐지? 꼭 놀리는 것 같은데……. 아닌가? 갸웃하며 내리려다가 꽉 잠겨 열리지 않는 차 문에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러려고 여유만만으로 굴었구나 싶어서.

“잊은 거 없어?”

“없는데.”

사실은 알고 있었다. 내리기 전엔 늘 뽀뽀를 하니까. 물론 대부분 끈적하고 깊은 키스로 발전하기 일쑤지만. 그래도 집 근처에서 그러는 건 내키지 않았다. 짐짓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며 토라진 척해 봤지만 정해준은 물러서지 않고 덩달아 입술을 내밀었다.

“뽀뽀가 없으면 시동이 안 걸려서 그래.”

“말도 안 돼.”

“나 같으면 이럴 시간에 얼른 뽀뽀하겠다.”

“아, 진짜…….”

하는 수 없이 얼굴을 가까이 댔다. 촉, 부드러운 마찰음과 함께 젖은 입술이 떨어지나 했는데 웬걸. 내 뒷목을 받친 정해준이 덤비듯 훅 다가와 입술을 빨아 댔다.

우음! 신음하며 가슴을 밀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도리어 손목을 잡힌 채 가슴을 주물럭거리는 우악스러운 손길을 고스란히 받아 내야 했다. 조수석으로 넘어오지 않는 게 용하다 싶을 지경이었다.

차창에 뿌옇게 김이 서릴 즈음에야 정해준은 겨우 품에서 나를 놓아주었다. 곱지 않게 눈을 흘겼다가,

“결혼하자.”

엉뚱한 소리만 들었다.

“장난 아니야. 너 집에 보내기 싫어 죽겠다. 진짜 집은 우리 집인데.”

진짜 우리 집……. 속이 들뜨게 만드는 말을 나도 모르게 설레며 되뇌어 보다가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점차 현실로 돌아왔다.

“들어갈게.”

이번엔 별 저항 없이 문이 열렸다. 기다려 줄까. 지금 거기서 나를 지켜보는 것처럼, 고등학교 졸업을 기다렸던 것처럼, 이번에도 나를 기다려 줄까. 영원히 함께하게 될 순간을.

“…….”

굳이 답을 내리지 않았다. 대신 막연한 희망을 품었다.

“어서 가.”

우산을 젖혀 여전히 핸들에 기대 나를 다정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정해준을 향해 손짓하고, 다시 돌아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오늘따라 저 집에 들어가는 게 몹시 괴롭다고 느껴졌다. 어쩌면 전조였는지도 모르겠다. 열 걸음 정도를 남겨 두었을 때 누군가 앞을 가로막았다.

“야! 이해원!”

이소원이 도끼눈을 뜨고 있었다. 정해준의 차에서 내리는 걸 본 게 분명했다.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비가 오든 말든 평소처럼 멀리 떨어진 큰길에서 내렸어야 했는데. 자책하며 어디까지 봤을까 걱정했다. 키스? 가슴 애무?

“이게 멀쩡한 아빠도 뺏어 가더니, 이젠 정해준까지 뺏어 가려고?”

또다시 판에 박힌 듯한 멘트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이소원과 내 그림자 사이에 새로운 그림자가 더해졌다.

“어…….”

당황한 이소원이 멍청하게 입을 헤 벌렸다. 이소원의 표정만 봐도 그림자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최악의 상황에 머릿속이 하얗게 바랬다.

“동생?”

“어어…….”

그래? 가볍게 대꾸한 정해준이 고개를 슬쩍 기울여 이소원을 뜯어 보았다. 이소원은 여전히 넋을 놓고 정해준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안 좋은 감정을 차치하고라도 보는 내가 다 민망해질 정도로 얼이 빠져 있었다. 유니콘, 혹은 그 비슷한 신비를 처음 가까이에서 접하고 감격에 젖은 표정.

“너랑 하나도 안 닮았네.”

짧게 평을 남긴 정해준이 어이없어하며 차게 웃었다.

“그런데, 누가 누굴 빼앗아?”

미소는 짓고 있으나 날 선 말투에 이소원은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그렇다 한들 뭍에 꺼내진 붕어처럼 무어라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다문 게 전부였지만. 그런 이소원을 고압적으로 내려다보며 정해준이 진심으로 불쾌한 티를 냈다.

“내가 언젠 네 거였어?”

그렇게 따지는 말투도 아니었는데 이해원이 움찔했다. 이 정도로 졸아붙은 이소원은 처음이었다. 할머니가 작정하고 매섭게 혼을 낼 때도 기는 죽지 않던 이소원이었다. 한데 지금은 꼭 궁지에 몰린 쥐처럼 잔뜩 얼어선 감히 눈치 볼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나 좋아했었던 모양인데 말은 바로 하자. 네 거였던 적 없고, 그리고 언니한테 ‘야’가 뭐야. 버릇없게.”

나직하나 강한 어조는 분명 경고였다. 바짝 긴장한 이소원이 경직된 목을 움직여 제대로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통쾌했다. 내게는 늘 강자였던 이소원이 누군가에게는 얼마든지 약자가 될 수 있다는 거, 그게 정해준이어서 속이 시원하다면 내가 너무 못된 건가.

그래도 티를 내지 않으려 입 안쪽 살을 지그시 무는데, 나와 정해준을 번갈아 보며 울먹거리던 이소원이 집과 반대 방향으로 뛰어갔다.

“이소원! 어디 가!”

다급히 불러보았지만 이소원은 뒤도 안 돌아보고 빗속을 내달렸다. 쫓아가려고 걸음을 떼는 찰나, 어깨를 강하게 쥐는 악력에 멈추었다. 돌아보니 정해준이 낯을 찡그린 채 이소원이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고 있었다.

“너희 집.”

“…….”

“가풍은 엄한데 동생한텐 관대한 편인가 봐.”

“아, 그게…….”

예리한 지적에 진땀이 흘렀다. 딱히 답을 요구한 게 아닌데도 겨우 핑곗거리를 찾아냈다. 왜 이런 걸 일일이 설명하고 있어야 하나, 스스로의 변변치 못한 처지를 실감하면서.

“아무래도 막내니까…….”

“감기 들겠다. 얼른 들어가.”

다행히 정해준은 별 의심하지 않는 듯했다. 더 묻는 법도 없었다. 한결같이 내가 비에 많이 젖지는 않았는지, 오한이 일지는 않는지만을 살피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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